[변평섭 칼럼] 고용비리 공기업에 히딩크 감독을

베트남 축구 붐을 일으키고 있는 박항서 감독을 베트남 국민들은 ‘박항서 선생’이라 부른다. 그곳에서는 ‘선생’이라는 호칭이 가장 높은 경의를 표현하는 것이다. 정말 베트남에서 박항서 감독은 영웅처럼 받들어지고 있다. 특히 베트남 축구팀을 이끄는 그의 리더십이 크게 평가받고 있다. 선수들과 감독의 신뢰가 두텁고, 팀 모두가 가족적 분위기여서 단합과 투지가 살아 있으며 ‘우리도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리더십은 어디서 영향을 받은 것일까? 물론 그 대답은 2002년 한ㆍ일 월드컵 때 함께 뛰었던 히딩크 감독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때 박항서 감독은 히딩크 감독 밑에서 코치로 있으면서 호흡을 맞춰 왔다. 특히 히딩크 감독이 선수 선발에 학연, 지연, 혈연 그리고 한국사회의 고질병인 실력자 줄서기에 단호한 입장을 보였던 것을 깊이 가슴에 새겼다. 사실 선수 선발 때마다 끊이지 않았던 잡음은 A선수는 실력자 누가 밀었고, B선수는 축구계 주류를 이루는 C대학 출신이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히딩크는 한국 스포츠의 고질병을 깨고 오로지 축구 경기실력과 잠재적 가능성을 보고 선수를 선발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사회는 ‘줄서기’의 고질병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2018 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의 야구선수 선발이 지금껏 회자되고 있는 것도 그런 악습 때문이다. 명예롭게 금메달을 땄음에도 박수 소리가 크질 않고, 마침내 선동열 감독이 국회 국정감사장까지 나가야 했음은 우리의 안타까운 현주소를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한 야당의원의 국정감사 자료에 의하면 한국가스공사는 지난 8월 용역ㆍ파견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을 추진하면서 가스공사 임직원의 부모, 배우자, 형제자매 24명을 정규직 대상자로 선정했다는 것,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직원의 어머니도 3명이 끼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고용비리에 대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한국가스공사에 앞서 서울교통공사, 인천공항공사 등에서 불을 댕겼고 마침내 야당은 국정조사를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전력 자회사인 한전KPS도 임직원의 자녀 35명, 형제ㆍ자매 5명 등 40명을 채용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와 같은 보도를 접한 취업준비생이나 실업자들의 심정은 어떨까? 얼마나 허탈할까? 바로 이런 것이 우리의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이 된다. 학자들에 따르면 과거에는 이런 불공정한 사태에 직면하면 ‘불가항력’의 운명으로 받아들였지만 오늘의 패자들은 자신의 낙오가 사회적 요인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매우 분노하고 억울해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우리가 최근 잇달아 터지는 고용비리 의혹에 크게 우려를 갖는 것도 바로 사회적 갈등, 패자의 심각한 좌절감 때문이다. 그렇게 공정성을 잃게 되면 사회는 병들고 정치는 불신을 받게 된다. 가정에서도 하찮은 차별이 갈등을 일으키고, 마침내 가정불화로까지 번지게 된다. 가령 엄마가 자녀들에게 콜라를 따라주면서 어떤 아이에게는 한 컵 가득히 부어주고 나머지는 그보다 적게 따라 주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면 아주 작은 문제에서 가정비극이 싹틀 수 있다. 왜 나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가? 왜 나에게는 공정하지 않은가? 이렇게 패자의 분노가 가정과 사회, 정치 등 모든 분야에서 일어나지 않아야 민주주의는 성장한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北韓, 우리기업인들 양묘장에 초대한 것은

몽고의 초나라는 동북 아시아를 거의 정복하고 마지막 남은 일본을 침략하기 위해 우리 고려를 닦달했다. 육전(陸戰)에는 강했지만 해전(海戰)에는 약했던 그들은 일본 침공에 고려군을 앞장 세웠다. 특히 1274년 몽고는 일본 정벌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고려로 하여금 900척의 배를 4개월 안에 건조할 것을 강요했다. 그 당시 900척이라는 선박건조는 고려가 감당하기에는 엄청난 고통이었다. 특히 그 많은 목재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어쩔 수 없이 전국의 산림이 훼손되기 시작했고 그 피해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하여 그 해 10월3일, 고려군 8천명, 몽고군 2만500명 등 3만3천명의 여ㆍ몽 연합군이 일본정벌에 나섰으나 다카시마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이 태풍이 나라를 지켰다고 일본은 ‘가미가제’(神風)라 하고 2차 대전 때 미국 전함에 날아가 자폭하는 특공대를 ‘가미가제’라 불렀다. 몽고는 일본 침공에 실패하고도 계속 배를 만드는 등 고려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이렇게 하여 산림이 벌거숭이가 된 고려는 국운이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성계에게 조선건국의 문을 열어주고 말았다. 통일 신라의 서울, 경주(서라벌)는 태평성대가 계속되면서 산을 벌거숭이로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경주는 초가집이 하나도 없는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화려한 도시였다. 모두가 기와집에 가정 연료는 숯이 주종을 이루었다. 경주에서 발굴된 숯 굽는 가마터가 20개나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숯 공급이 중요했던가를 말해 준다. 그 태평성대가 1000년 계속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산의 나무가 벌채되어 숯가마에 들어갔을까? 그래서 홍수가 발생하면 얼마나 많은 농지가 피해를 입고 식량 부족 등 문제를 일으켰을까? 결국 신라의 국력이 기울어져 나라가 분열되고 패망의 길로 간 것 역시 벌거숭이산으로 국토가 황폐된 것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외국의 경우, 로마제국의 멸망 역시 신라의 경주처럼 무절제한 벌채가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지난 9월, 평양에서의 남북 정상회담 때 우리의 기업인들이 대통령을 따라 북한에 다녀왔다. 그런데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 등 기업인들이 맨 먼저 초대된 곳이 황해도에 있는 양묘장이었다. 이 뉴스를 보면서 ‘역시 북한의 다급한 문제가 이거였구나’하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다. 사실 요즘 북한의 매체들이 가을 나무심기 계절을 맞으면서 연일 산림극화를 강조하는 것 역시 우리 기업인들을 양장으로 초대한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지난 9월30일자 노동신문은 ‘당 일꾼들이 신발에 흙 묻히길 싫어한다’며 강한 어조로 산림극화 부진을 질책했다. 북한의 사막화 현상은 서울면적의 47배로 이미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다. U.N.의 FAO는 북한의 산림황폐화가 사막화 현상으로 어어졌다고 경고했으며, 중국몽고에 이어 아시아에서 3위라는 비관적 견해를 밝히는 측도 있다. 북한의 고질적인 식량부족사태도 결국 산림황폐의 가속화에서 찾을 수 있다. 무엇이 이렇게 북한의 산림을 황폐화시켰는가?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소위 ‘주체농업’이라 하여 많은 산을 개간하여 홍수 때 토사로 하천을 범람시켰고 연료부족으로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한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빚어진 북한의 사막화는 우리에게도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데 우리의 고민이 있다. 실제 북한의 주적은 ‘사막화 현상’이다. 북한이 그것을 알기 시작한 것일까? 변평섭 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북한 교황 초청의 수수께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향수의 시인 정지용. 그는 일찍이 천주교 신자가 되어 천주교 관계 시를 쓰고 신앙을 같이 하는 동인 모임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천주교 신부가 되게 하려고 함경남도 덕원에 있는 덕원신학교에 보내기까지 했다. 당시 덕원신학교는 성 베네딕도수도회 산하에 있으면서 북한 지역의 신부를 양성하는 요람이었다. 그러나 1949년 북한 공산정권이 출발하면서 종교박해가 시작되었고 신학교의 아름다운 건물과 토지, 재산 등 모두가 몰수되었다. 그곳에 있던 신부, 수녀들은 정치범 수용소에 갇히거나 죽음을 당했으며 신학생들도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평양교구 홍용호 주교도 정치범수용소에 갇혔다가 죽임을 당했다. 신부들은 대부분 신자들이 피란을 가야 한다고 간청했으나 ‘목자가 양을 버리고 갈 수 없다’고 버티다 순교를 하였다. 심지어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는 신부를 발로 차며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트럭에 실어 끌고 가기도 했다. 북한 공산정권이 수립될 즈음 평양, 신의주, 원산 등에는 성당이 57곳이나 되었으며 신자들도 5만2천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평양을 아시아의 예루살렘이라고까지 불렀다. 그러나 지금은 성당도 없고, 단 1명의 신부도 없으며 오직 ‘백두혈통’으로 분식된 김씨 세습정권이 유일한 종교가 되어버렸다. 모든 성당은 몰수되거나 파괴되었다. 신자들은 지하로 숨어들거나 남한으로 넘어왔다. 물론, 지금 평양에는 장충성당이라는 간판이 하나 있다. 그러나 신부도 없고 미사라는 흉내를 내고 있으나 미사의 핵심인 영성체가 없어 미사가 아닌 계획된 쇼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꺼지지 않은 불씨가 남아 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우리의 주교 한 분이 평양을 갔을 때 어느 광장에서 평양 시민 하나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아멘’하고 속삭이듯 말하고는 쏜살같이 도망가더라는 것이다. 그 주교는 순간 뜨거운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아직도 북한에 숨어 있는 신앙의 불씨가 있구나 하고. 따라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김정은 위원장의 초청을 받고 북한을 방문하면 이와 같이 지하에 숨어있는 신앙의 불씨가 살아나서 뜨거운 횃불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그곳의 유일한 종교인 김씨 일가의 세습정치까지 위협이 될 텐데 그것을 북한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사실 1979년 요한 바오르 2세 교황의 폴란드 방문은 폴란드는 물론, 동유럽 공산정권을 무너뜨리는 전기가 되었으며, 현 프란치스코 교황의 쿠바 방문은 카스트로 폐쇄통치의 빗장을 푸는 기여를 했다. 북한에도 그것이 가능할까? 오히려 세계를 향해 북한이 벌이는 정치 쇼에 이용되지 않을까? 가짜 신자를 수만 명 급조하여 얼마든지 이벤트를 만드는데 능한 그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북한 김정은 위원장만 세계적 인물로 무대에 세우는 것이 되고 말 것이란 우려가 만만치 않다. 북한의 가장 취약점인 인권 문제에서도 오히려 면책 쇼를 벌일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신부도 없고 신자도 없는 종교 불모지 북한에서 어떤 의도로 교황을 초청, 열렬히 환영하겠다는 것인지 참으로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포기하지 마시오!

프로축구에서 공격수로 이름을 날렸고 지금은 U-23국가 대표 축구 팀 코치로 있는 김은중. 그는 중학교 때 축구를 하다 공에 눈이 맞아 심한 부상을 입었고 끝내 실명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축구를 했다. 축구선수에게 빠르게 패스된 공을 차는데 실명은 큰 약점이다. 시야와 초점이 발끝 동작으로 이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은중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계속했다. 심지어 시력도 안 좋은데 캄캄한 밤 운동장에서 공을 모는 연습을 수없이 반복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결국 그는 훌륭한 공격수가 될 수 있었고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처럼 그가 역경을 극복하고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지를 가졌기 때문이다. 1996년 미국 아틀랜타 올림픽 때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마라톤에서 연출됐다. 숨가쁘게 달려온 선수들이 운동장에 들어섰고 트랙을 돌아 결승점을 향했다. 관중들의 환성이 터졌다. 곧 이어 1등에게 월계관이 씌어졌고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그렇게 막을 내린 즈음 뒤늦게 쓰러질듯 비틀거리며 트랙을 뛰는 선수가 있었다. 내전중인 아프가니스탄의 압둘 베사르와시키. 자리를 떠나려던 관중들은 일제히 꼴찌로 트랙에 들어서서 비틀거리는 그 선수를 향해 ‘포기하지 마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했다. 스타디움의 모든 눈은 그 꼴찌를 향했고 결국 그가 완주를 하자 만세를 부르는 등 마라톤 1등이 바뀐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됐다. 4시간 24분 17초. 1등과 배가 되는 기록이었지만 그 아프가니스탄 선수는 부끄럼보다 ‘해냈다’는 것에 벅차하며 그를 격려하는 관중에게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무엇 보다 가장 감동적인 것은 꼴찌로 트랙을 도는 선수를 비웃지 않고 ‘포기하지 마라’고 응원을 보내는 관중들의 모습이었다. 물론 그 응원에 힘입어 비틀거리던 압둘 베사르와시키는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꼴지를 했지만 내 조국 아프가니스탄을 알리는 것에 만족한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꼴지의 모습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일까? 오히려 우리는 꼴찌에게 손가락질하고 실패자를 비웃는 것을 즐기고 있지 않는가? 심지어 비틀거리는 선수를 뒤에서 잡아당기는 사회가 아닐까? 지난 달 정부 서울청사에서는 ‘2018 실패사례 공모전’이 열려 화제가 됐었다. 실패의 아픔을 극복하고 성공한 23명의 ‘사장님’들이 나와 자신이 겪은 모든 것을 털어 놓는 자리였다. 한두 번 실패는 보통이며 10번이나 실패한 사람도 있었고, 여러 번 마포대교에 나가 한강에 투신하려 한 사람 등등 끝없는 실패담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일어나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비록 좌절에 빠져 마포대교를 찾기도 했지만 결국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마치 꼴지 마라톤 선수가 비틀거리며 결승점을 향해 달릴 때의 ‘포기하지 마시오!’ 외침처럼. 이와 같은 생사는 요즘처럼 경제사정이 심각하고 실업자가 넘쳐나는 때,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꼴지를 향해, 실패자를 향해 ‘포기하지 마시오’하는 응원이다. 장애자 시설을 이웃에 못 들어오게 시위를 하고, 자기 자식을 1등으로 만들기 위해 시험문제를 유출하는 선생님이 없는 세상, 꼴지가 부끄럽지 않은 세상, 그것은 한낮 꿈일까. 변평섭 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급변하는 세상과 ‘선제대응’

서울의 상도 유치원 붕괴사고는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자칫 수십명의 어린 목숨들이 희생될 뻔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붕괴 하루 전에도 유치원측에서 당국에 위험을 호소했지만 바닥에 크랙이 가지 않았다고 그냥 지나쳤음은 한심스런 자세라 아니할 수 없다. 국민의 생명 이상 더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세월호 사고를 비롯, 제천 사우나 목욕탕 화재사고, 그리고 최근 서울 상도유치원 붕괴사고에 이르기 까지 계속되는 대형사고 때 마다 등장하기 시작한 말이 ‘선제대응’ 이다. 예상되는 위험요소를 미리 손을 써서 제거하거나 대비한다는 것이다. 이 ‘선제대응’이 없어 귀중한 생명을 억울하게 잃거나 앓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뼈아픈 교훈. 이 교훈은 경제계에도 번져 급변하는 시장에 ‘선제적 대응’을 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다는 의식이 높아가고 있다. 최근에 있었던 LG디스플레이가 글로벌 협력사들과 2018 LG디스플레이 테크포럼을 개최, 미래 신기술 발굴에 관한 열띤 논의를 벌였는데 역시 그 중심은 급변하는 시장에 대한 ‘선제적 대응’이었고, 롯데의 식품부문 계열사 사장단도 최근 생존을 위한 ‘선제대응’방안을 깊이 있게 논의했다. 정말 세계 시장의 변화는 하룻밤 자고 나면 상황이 확 바뀔 정도로 빠르고 심각하다. 짝퉁 취급을 받던 중국의 화웨이, 샤오미 등 스마트폰이 어느 사이에 올해2분기 세계시장 총수익 20%를 차지, 삼성전자 17%를 추월했다는 보도가 바로 그런 충격적 변화를 뜻한다. 이래서 ‘선제대응’은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기업의 명제가 되고 있다. 이와 같은 절박한 명제에 무감각한 분야가 있다면 정치쪽일 것이다. 특히 보수 정당이 민심을 얻는 선제대응을 못하고 아직도 친박, 비박의 틀에 갇혀 귀중한 시간만 보내고 있음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집권 야당에서는 ‘20년 집권’에서 이제는 ‘50년 집권’ 해야한다는 소리를 내고 있는데 그런 이야기도 보수당 쪽에서는 무덤덤하다. 사실 ‘선제적 대응’은 군사적 의미가 강하다. ‘선제적 공격’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1981년, 이스라엘 공군기의 이라크 핵시설 공습. 이라크의 원자로에 연료가 충전되기 전 폭파해야 했기에 이스라엘로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이라크도 이스라엘의 공격 가능성을 예견했으나 이스라엘 공군기로서는 600마일 이상 날라와 폭격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바그다드 핵시설 공격을 이스라엘은 해냈다. 그해 6월7일, 이스라엘 공군기 8대가 레이더에 잡히지 않게 고도 300m 저공비행으로 이라크 핵시설을 급습, 원자로를 산산조각내고 무사히 귀환한 것이다. 세계가 깜짝 놀란 것은 당연하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렇듯 이라크의 핵건설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의 안보는 위기에 빠지고 중동의 세력판도도 확 바뀌었을 것이다. 이로부터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은 모든 나라의 국가안보에 교과서처럼 평가받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 후에도 이와 같은 모든 가능한 위협으로 부터의 자위를 위해서라면 선제공격을 서슴치 않았다. 이렇듯 군사적 측면에서만 아니라 우리의 행정, 정치, 경제, 심지어 이번 국민들을 긴장시켰던 메르스 사태에 이르기까지 적절한 ‘선제대응’이 급변하는 오늘 생존의 전략이다. 그럼에도 ‘선제대응’은 고사하고 그 뒤를 따라 가기도 힘들다면 낙오자로 탈락할 수밖에 없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수첩이 무서운 세상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성폭행 사건이 있었다. 사건의 주범이 된 A씨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지만 경찰은 그를 구속했고 검찰은 그래도 재판에 회부했다. 언론도 A씨의 피의사실을 경쟁적으로 보도해 관심을 부풀렸다. 그런데 A씨는 재판에서 성폭행죄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그를 무죄로 이끈 것은 엘리베이터에 달린 CCTV 동영상이었다. 그 사진은 A씨와 성폭행을 당했다고 경찰에 고소한 여성이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장면. 그런데 성폭행을 당했다는 그 여성이 A씨 앞에서 웃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A씨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런데 무심코 타고 내리는 작은 공간 엘리베이터에도 CCTV가 설치돼 있었다니… 그리하여 24시간 감시가 이루어지고 살아있는 증인 역할을 한 것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직장인의 경우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활동을 하고 퇴근할 때까지, 하루 평균 20~30회 CCTV에 찍힌다고 한다. 좋든, 싫든 우리는 어쩔 수없이 감시의 포로가 되어 있는 셈이다. CCTV뿐 아니라 자동차의 블랙박스, 휴대폰 같은 것도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래서 어떤 기업체에서는 임원회의 때 아예 휴대폰을 갖고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회의내용이 녹음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 스스로 메모하는 수첩 아닐까? 메모하는 습관은 예로부터 많이 권장돼 왔다. 특히 일본인들의 메모 습관은 유별나다. 1985영 8월 2일 승객 524명을 태운 일본항공 (JAL) 보잉 747점보 여객기가 도쿄에서 오사카로 비행하다 산속에 추락, 520명이나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큰 충격을 주었었다. 사고 규모가 워낙 커서 충격도 컸지만 희생된 탑승객들이 남긴 유서와 메모 같은 것이 많이 발견돼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미찌꼬! 아이들을 잘 부탁하오. 사랑하오.” “아들아, 엄마를 부탁한다.” 이런 유서가 있는가 하면, ‘지금 엔진에 불길이 솟았다. 기체는 계속 떨어지고 있다’는 등의 사고 진행 상황을 메모로 남기기도 했다. 이 정도면 일본인들의 기록열이 어떠한가를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들어 메모가 호랑이처럼 무서운 것이 되고 있다.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면 치매도 예방한다고 하지만 경우에 따라 자신과 조직을 파멸로 이끄는 폭탄이 되기도 하고 법정에서는 교도소로 가는 저승사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 정부 시절의 고 김영한 민정수석의 수첩과 안종범 수석의 수첩은 사초(史草) 역할을 했다고 할 만큼 파괴력이 컸고, 이필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의 남겨진 메모는 이명박(MB) 전 대통령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특히 이 전 회장의 메모는 그야말로 현미경 메모다. 지난달 서울 중앙지법형사합의 27부 심리로 열린 MB의 특정경제 가중처벌 등에 관한 공판에서 이 전 회장의 메모가 공개됐는데 22억5천만원의 뇌물 전달 과정, 방법이 소상하게 기록된 것. ‘통의동 사무실에서 MB 만남. 국회의원까지 얘기했음. 긍정방향으로 조금 기다리라고 함’ 심지어 그날 MB와 함께 마신 차의 종류도 적혀있고, 처음 그의 청탁이 이루어지지 않자 ‘배신감을 느낀다’고도 했다. 이쯤 되면 메모는 선의의 기록이 아니라 양날의 칼이다. 언제 흉기로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CCTV, 휴대폰, 메모도 모두 무서운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만큼 불신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700년 百濟가 5일 만에 무너진 것은…

서기 660년 7월, 그해 여름도 무척 더웠다. 그러나 백제의 왕도 사비성(지금의 충남 부여)은 의자왕의 독선과 아집, 권력층의 분열로 내홍을 앓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평화로웠다. 부소산 낙화암 아래 백마강에서는 여기저기 흥겨운 뱃놀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사비성의 평화를 깨뜨리는 급보가 전해졌다.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10만 대군이 사비성의 관문 기벌포(지금의 금강 하구·충남 서천군 장항읍)에 물밀듯 상륙을 시작했으며, 백제의 동쪽 탄현(지금의 大田 계족산성 일대)에는 김유신이 이끄는 5만 신라군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급보였다. 그 순간 백제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의자왕을 비롯, 모두가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했고 백성들은 도성을 빠져나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때에, 전혀 생각도 못한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백제는 신라가 감히 침공해 오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당나라가 신라와 손잡고 황해를 건너오리라고 상상도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당시 신라보다 국력이 월등했던 백제였고 특히 의자왕은 즉위 후 신라의 100여 성(城)을 빼앗았는데, 이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점령한 64개 성보다 월등히 많은 전과였다. 그러니 백제는 국가안보에 느긋해졌고 안일한 생각을 갖지 않았을까? 거기에다 당나라는 전통적으로 백제와 깊은 외교ㆍ문화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를 배신하여 신라와 연합군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백제의 방심을 완벽하게 이용한 것이 신라와 당나라였다. 신라는 늘 괴롭힘을 당하는 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신라의 생존을 도모하고 당나라는 한반도의 분쟁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지배 영역을 확보하려는 계산에서 신라와 손을 잡은 것. 그때나 지금이나 이렇듯 국제관계는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배반도 하고 손도 잡고…. 영원한 동맹도, 적도 없다는 것 아닌가. 특히 자만에 빠진 의자왕은 처음에 가졌던 리더십을 잃고 점점 향락으로 세월을 보내는가 하면 충성스러운 대신을 귀양 보내는 등 극심한 일탈행위를 이어갔다. 이에 대해 최근 ‘삼국통일 어떻게 이루어졌나’라는 연구서를 발행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이도학 교수는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을 오만과 교만, 갈등과 분열 등, 사회적 통합의 실패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근본적인 백제의 멸망 원인은 ‘정신력’임을 거듭 강조한다. 생각해 보면 660년 7월10일, 나당 연합군이 사비성(부여)을 함락하고 웅진성(지금의 충남 공주)로 도망간 의자왕이 항복하기까지 불과 5일 밖에 걸리지 않았음이 이 교수가 지적한 백제 최후의 ‘정신력’이 얼마나 한심했던가를 짐작게 한다. 특히 당나라에 붙잡혀 간 의자왕이 묻혀있는 중국 낙양 북망산에 가면 13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 시절의 회한이 눈앞에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온다. 그렇게 백제의 최후는 허망했다. 그리고 그것은 의자왕 스스로가 몰고 온 운명이 아니었을까? 이번 주 금요일(9월14일)부터 충남 공주와 부여 일원에서 ‘한류 원조, 백제를 즐기다’라는 주제로 제64회 백제문화제가 풍성하게 열린다. 노래와 춤, 그리고 계백장군을 비롯해 성충, 흥수 등 세 충신에 대한 제향도 올리며 백마강에 몸을 던진 백제 궁녀들의 원혼도 위로하는 행사도 갖는다. 백마강이 내려다보이는 낙화암에서 눈을 감고 백제 최후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점쟁이와 통계학자

과거 쌀 한 톨이 금쪽같던 시점에 있었던 일이다. 매월 15일을 ‘쥐 잡는 날’로 정하고 각급 학교에서는 학생들로 하여금 자기 집에서 잡은 쥐의 꼬리를 가져오게 했다. 그런데 이 ‘쥐잡기 운동’은 시간이 갈수록 잘못된 방향으로 변질되어 갔다. 학생과 학생, 학급과 학급, 학교와 학교 간 경쟁이 뜨거워지면서 허위로 숫자를 부풀려 보고하는가 하면 심지어 오징어 다리를 잘라서 쥐꼬리라고 제출하기도 했다. 사실 오징어 다리를 살짝 불에 그을려 쥐꼬리라고 제출하면 식별하기가 어려웠다. 이처럼 통계를 잡는다는 것이 수학이고 과학이면서 오징어 다리가 끼어들고 경쟁심이라는 불순물이 작용하면 그때는 수학도 아니고 과학도 아니다. 오히려 그 수학의 공식이라는게 불순한 목적을 위한 도구로 전락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의 통계나 여론조사가 자주 불신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심지어 종교계의 통계조차 그런 소리를 듣는다. 눈을 돌리면 곳곳에 교회가 많고 사찰이 많지만 실제로는 불교, 기독교 등 6대 종교의 신자 수는 전국민의 50.7%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각 교단에서 발표하는 신자 수를 합치면 우리나라 인구보다 많다는 모순이 나타난다고 한다. 얼마 전 TV에서 모 지방의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의 교통량을 보도했는데 여기서도 통계의 불신이 도마에 올랐다. 처음 이 다리를 놓을 때 당국이 실시한 교통량 예비조사에서 1일 수천 대의 차량이 왕래하여 관광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막대한 국민 세금을 쏟아부은 다리는 개통 후 너무 한산하기만 했다. 교통량 통계작성에 수학의 공식이 작용하지 않고 정치가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효성을 제대로 예측하지 않고 많은 세금을 투입해 건설한 교량, 도로, 심지어 비행장이 한둘이 아니다. 특히 그 지역에 정치적 거물이 있을수록 이런 현상은 두드러지게 마련이다. 이렇듯 통계는 순수한 수학공식이 보여주는 결과물이어야지 사(私)가 개입하면 안 되는 것이다. 황수경 전 통계청장의 경질로 빚어진 가계소득 통계방법의 논란도 이런 관점에서 국민들의 우려와 불신을 낳고 있다 하겠다. 특히 황 전 청장이 이임식에서 울먹이며 “나는 정치적 도구가 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그것이 국가 통계에 대한 국민신뢰를 얻는 올바른 길이다”라고 한 것은 매우 의미있는 발언이다. 무엇보다 ‘신뢰’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공자에게 자공이 물었다. “정치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공자가 대답했다. 백성이 먹고 사는 ‘食’과 나라를 지키는 ‘兵’, 그리고 백성들로부터의 ‘信’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경제, 안보, 국민과의 신뢰가 아닐까? 자공이 공자에게 이 셋 가운데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이냐고 다시 묻자 공자는 ‘信’이라고 하면서 백성들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존재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서양 속담에도 ‘점쟁이가 배부르고 통계학자가 배고프면 백성은 운다’는 말이 있다. 점쟁이도 통계학자도 앞으로 있을 일을 예언하는 것에는 공통점이 있지만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점쟁이에 귀를 기울이고 바른 말하는 통계학자는 외면하지 말라는 경고다. 그렇게 통계는 국가 신뢰의 기본인 것이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세종시! ‘외로운 공무원의 섬’될까?

공정거래위원회가 38년간 독점해온 전속 고발권을 내려놓음으로써 검찰이 공정위 고발 없이도 기업의 담합행위에 손을 댈 수 있게 됐다. 이와 같은 중대한 결정은 지난 21일 법무장관과 공정거래위원장 사이에 있었던 합의문 서명으로 공식화됐다. 그런데 이 서명은 공정위가 있는 세종시가 아니라 서울 정부청사에서 이루어졌다. ‘고용 쇼크’로 다급해진 정부와 여당, 그리고 청와대는 지난 19일, 일요일에도 당·정·청 회의를 열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내년도 일자리 예산을 올해 증가율 12.6% 이상으로 확대하는가 하면 4조원 규모의 재정보강 패키지도 추진하는 등 가용한 모든 정책수단을 총 동원키로 했다. 이와 같은 일자리 창출의 심각성이 이번 당·정·청 회의를 계기로 실효를 거두길 기대하는 것은 모든 국민들의 한결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논하고 싶은 것은 이것을 계기로 세종시의 위상문제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사실 대한민국의 경제정책을 다루는 기획재정부, 농수산축산부, 국토교통부, 노동부, 공정거래위원회 등 정부기구 70%가 세종시에 와 있다. 그런데 경제관련 정부회의는 70% 이상이 서울에서 개최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당·정·청 회의에서도 경제사령탑이 있는 세종시의 정부기관과 공무원들은 자료를 만들어 서울 출장을 가야 하는 등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이런 일이 거의 다반사가 되어 있다는 것이 세종시 현안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은 오래됐다. 세종시는 올가을 행정안전부까지 내려오면 명실공히 ‘행정중심도시’가 되지만 세종시를 만든 것이 이런 식의‘서울 회의’를 위한 자료작업이 중심이 되고, 서울 출장에 시간과 경비를 소모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세종시는 당초 계획했던 ‘국토균형발전’과는 거리가 먼 국토건설부 산하의 도시 하나를 만드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공무원만 2만명이 넘는‘공무원의 외로운 섬’으로 전락할 우려도 있다. 따라서 세종시의 기능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경제부처가 집중되어 있는 만큼 세종시에서 정부간 정책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치열한 토론도 있어야 한다. 이 같은 기능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정부관계자와 정치권에서 서울 중심의 프레임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이런 의식 변화 없이는 세종시가 아무리 부처가 늘어나고 인구가 30만을 돌파했다 해도 실질적인 국토균형을 요원한 것이 될 것이다. 특히 이 시점에서 우선 국회 분원만이라도 하루 속히 실현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세종시 정부청사는 서울 회의 자료준비와 서울 출장에 정부동력을 소비하는 것을 벗어나 생산적 기능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탄생한 세종시이기에 현 정부에서 세종시의 가치와 기능을 살려야 하는 책임도 있다. 세종시에 들어서면 ‘개헌으로 행정수도 완성’이란 구호탑을 여기저기 보게 된다. 이 지역민들의 간절하고 소망을 표현 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정치 현실이 ‘개헌을 당장 추진할 상황이 아니며 더욱이 세종시를 위한 개헌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할 수 있는 국회분원 설치와 세종시 출범 때 가졌던 그 순수한 목적과 기능을 서두르자는 것이다. 이 본래의 목적을 놓치게 되면 세종시는 ‘공무원의 외로운 섬’으로 전락할 수 있고 걸핏하면 거론되는 ‘투기단속’ 대상의 아파트 도시가 될 우려가 있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西部戰線 이상 없나?

변평섭 기원전 로마는 3세기에서 2세기, 로마는 지중해 지배권을 놓고 라이벌 카르타고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특히 카르타고는 유명한 코끼리 부대로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공격한 한니발장군이 있었다. 이때 로마의 레굴루스라고 하는 장군이 전쟁 중에 카르타고군의 포로로 잡혔다. 카르타고는 레굴루스장군을 석방하면서 로마에 가서 원로원으로 하여금 카르타고와 평화조약을 맺고 전쟁을 끝내도록 설득하라고 했다. 그러나 로마에 돌아온 레굴루스장군은 원로원에서 ‘우리는 카르타고군과 평화조약을 맺으면 안 된다. 그것은 그들의 계략에 빠지는 것이다’라고 연설한 후 다시 자신을 포로로 잡았던 카르타고군영에 들어가 장렬하게 죽고 말았다. 어쩌면 로마 원로원은 평화를 원했고 그것을 레굴루스가 명분있게 설득하는 연설을 해 주길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떳떳이 소신을 밝힌 뒤 다시 적군의 포로가 돼 죽음을 택한 것이다. 참 멋진 군인이다. 진정 로마가 위대했던 건 이와 같은 군인의 충성심, 애국심이 뭉쳐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요즘 전에 없이 우리 군에 대한 뉴스가 쏟아질 때마다 로마의 레룰루스 장군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다 국방의무를 거부했던 사람까지 나서 군을 이러쿵저러쿵하는 걸 보면 ‘이걸 어찌하나’하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또한 북한의 핵은 아직도 안갯속인데 우리의 방위태세는 마음씨 좋은 이웃집의 울타리같이 되는 건 아닌지 찜찜하다. 2012년부터 1천600억 원이나 들여 개발한 우리의 중거리 지대공 요격미사일 ‘철매 II’ 양산 물량을 대폭 축소하는걸 검토한다는 보도는 더욱 그런 불안을 가중시킨다. 이 미사일은 북한의 스커트노동미사일에 대응할 우리의 매우 중요한 방어수단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불과 며칠 전에는 믿었던 해병대의 마리온 헬기가 어처구니없게 이륙 직후 추락, 장병 5명의 목숨을 앗아감으로써 국민들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다 군복무 기간의 단축, 병력 감축… 이렇게 ‘감축’이 안심해도 좋은 것일까. 물론 지금 남북 분위기가 4ㆍ27 정상회담을 계기로 호전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분위기가 국가 안보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분위기란 또 어느 상황에 변할지도 모른다. 공산주의의 본질이 또한 그래 왔었다. 필요에 따라 옷을 바꿔 입기도 하고, 눈물과 미소를 마음대로 연출해 내는 게 그들의 전술이요 전략이다. 그래서 믿을 것은 완전한 국방력이다. 북한은 지금도 그렇지만 상황이 유리해지면 주한미군 철수를 더욱 강력하게 주장할 것이다. 그때에 트럼프같은 거래의 명수가 잘못 악수를 두게 되면 우리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세계 1차대전으로 독일의 프랑스-벨기에를 잇는 서부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졌었다. 참호 속에서 지루한 공방전이 계속되고 팔 다리가 잘려 나가는 등 그 참상은 말할 수 없었다. 이때의 상황을 글로 쓴 것이 E.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In Western nichts Neues). 1928년 이 책이 나오자 25개 국어로 번역되고 영화화되는 등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책의 가장 감명 깊었던 장면은 주인공이 현장의 참상을 수기에 남기고 죽는 순간에도 사령부의 그날 보고는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것. 정말 우리 ‘서부전선’ 이상 없는가? 결코 이상이 없어야 하기에 묻는 말이다. 변평섭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중국 축구의 ‘공한증’과 굴기(崛起)

지난 러시아 월드컵 조별 예선에서 한국이 독일을 2대0으로 이겼을 때 세계가 온통 놀라움이었는데 중국에서는 엉뚱한 일이 일어났다. 한국-독일전에 중국 도박꾼들은 당연히 독일이 이기는 것으로 돈을 걸었다. 한국은 스웨덴에 1대0으로, 멕시코에 2대1로 패하고서 치르는 세계 최강 독일전이니 도박꾼들은 그럴 만했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 승리에 돈을 많이 걸었던 중국 도박꾼들 중에는 너무 큰 충격에 자살을 하는 소동이 벌어진 것. 이것이 중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의식이다. 이와 같은 의식은 아주 멀리 한(漢)나라 때부터 연유하고 있는데 중국 동북부에 있는 조선을 ‘동이’(東夷), 즉 ‘동쪽의 오랑캐’라 지칭한 것이 그런 것이다. 그들 ‘한’(漢)족의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것이 본능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 그런데 그들이 우리를 무시하려는 것은 우리가 그들보다 못해서라기보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서울 8학군의 A학교에 시골에서 B학생이 전학을 왔다. 키도 작고 학원도 다니지 않았는데 공부는 물론 창의력도 그들보다 뛰어났다. 그러자 기존 학생들은 그를 깔보고 무시했지만 속으로는 무척 두려워했다. 거대한 중국이 동쪽 조그만 나라 한국을 보는 시각도 이와 같다. 축구만 해도 1978년부터 2010년까지 중국은 동쪽의 작은 나라 한국과 27번 경기를 했는데 한 번도 이겨보질 못했다. 16번 패배했고 11번 무승부, 그러다 2010년 2월10일 일본 도쿄에서 있은 동아시아 축구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한국을 이겼다. 딱 한 번. 그 원인 중 우리 대표팀 감독의 잘못된 선수 기용이 한몫했다. 13억 중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고 그래서 생겨난 말이 ‘공한증’(恐韓症), 즉 한국을 무서워한다는 뜻이다. 지금 중국은 축구부흥 프로젝트를 시진핑 국가주석이 앞장서 추진하고 있다. 한 번도 월드컵 예선을 통과한 일이 없는 그들의 꿈은 ①월드컵에 나가고 ②월드컵에서 이기고 ③월드컵을 개최하는 것이며 이것을 그들의 소위 ‘대륙굴기’(大陸起)라는 국가비전에 맞추고 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공한증’을 극복하여 한국을 이기겠다는 것이 깔려있다. 사실 지금 중국의 축구실력은 개인기에서부터 기습작전에 이르기까지 매우 큰 발전을 보이고 있다. 중국은 한국의 축구만 무서워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볼펜이 중국 문방구를 휩쓸고 우리의 TV, 전자제품, 자동차, 반도체가 그들 시장에 우뚝 서는 것이 축구만큼 미웠던 것이다. ‘어떻게 그 동쪽 끝 조그만 나라에서…’ 하는 마음이 그들의 본색이다. 한국에 관광객을 보냈다 말다하고, 삼성을 비롯 한국의 대기업 광고판을 거리에서 까닭없이 철거케 하고 세계 1위 한국의 반도체 시장을 따라잡겠다고 총력을 기울여 투자하는 것도 그런 것이다. 미국과의 경제전쟁이라고 하지만 우선 한국을 앞서야 한다는 ‘공한증’ 극복이 그들 ‘굴기’(起)의 첫 목표다. 필요에 따라 북한이라는 카드도 한반도를 자기 입맛에 맞게 자유자재로 활용하며 김정은을 어르고 달래는 모습이 참으로 교활해 보인다. 북한도 중국만 바라보고 동해안 관광개발 등, 경제프로젝트를 추진하다간 또 어느 때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중국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해전술로 밀려오는 중국의 ‘굴기’를 그냥 구경만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오만한 벽을 비집고 들어가 우리의 영역을 굳건히 만들어야 한다. 최근 중국에서 사업을 하다 ‘사드’ 문제로 고전을 하고 있는 모 회장을 만났더니 이런 말을 했다. “한국 시장의 20배가 넘는 중국 시장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힘들어도 참고 견디어 나가야 합니다. 그들의 도움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길을 개척하고 터득해야 합니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정치자금 ‘고해성사’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4월 어느 날, 이름 모를 신부앞에 무릎을 꿇고 고해성사를 하는 모습이 사진에 찍혀 화제가 됐었다. ‘교황처럼 높은 분도 죄를 짓는가’ ‘교황도 무릎 꿇고 고해성사를 해야 하는가’ 이런 이야기들이 오고 갔는데, 누구나 인간이기에 지을 수 있는 죄를 고백하는 것은 영혼을 깨끗이 하고 사회를 정화시키는 촉매작용을 한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 그리고 교황이 평사제 앞에 고해성사를 하는 겸손한 모습은 누구에게나 신선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겸손함은 무척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더욱이 정치인의 가장 아픈 아킬레스건이라고 하는 정치자금에 대한 고해성사는 엄청난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2002년 3월 고인이 된 김근태 전 의원의 정치자금 고해성사는 우리 정치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것이라 하겠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이 한창일 때 김근태 당시 최고의원은“나는 권노갑 고문으로부터 2천만원을 받았다”는 양심고백을 했다. 가히 메가톤급 폭탄발언이었고 우리 정치판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 실세였던 권노갑 고문의 실명이 거론되자 한나라당에서는 그 돈의 출처를 밝히라고 공격을 퍼부었고 민주당 역시 반응은 곤혹스러움 그 자체였다. 고문으로 몸이 망가지도록 민주화운동에 평생을 바친 김근태 대통령 경선후보는 영웅이 되질 못하고 오히려 ‘혼자서 깨끗하면 되나…’하는 비웃음을 받기도 했으며 인기가 하락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후보 사퇴를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양심고백’은 오히려 수사를 받았고 유죄판결로 이어졌다. 그리고 2011년 12월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고 뇌정맥혈전증 까지 겹쳐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깨끗한 정치’를 위한 그의 용기있는 정치실험은 실패로 끝났는지 모른다. 그러나 정치자금 고해성사를 외친 그의 순수한 열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정의당의 얼굴이었던 노회찬 의원의 죽음도 그 연장선상에서 보면 또 한번 난치병을 앓는 한국에 몸을 던진 것이라 하겠다. 그는 유서를 통해 드루킹으로부터 4천만원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유죄판결을 받고도 끝까지 얼버무리고 ‘결백’을 주장하는 정치인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도 노회찬의원은 어떤 경우에도 해서는 안될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통해 ‘고해성사’를 했고, 우리 정치발전을 가로막는 정치자금의 음산한 그림자를 무언으로 고발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정말 우리 정치가 정치자금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롭고 깨끗할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행동화해야 할 것임을 요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큰 충격적 사건이 벌어지면 모두들 자신이 당한 일처럼 벌떼 같이 일어나지만 시간이 지나면 망각해버리는 것이 우리들 모습이기 때문이다. 김근태 의원의 ‘정치자금 고해성사’때도 금방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처럼 뜨거운 분위기였으나 며칠이 못가 수면아래로 잠수해 버렸다. 그러나 이번 만은 정치자금 문제에 대한 항구적인 해결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 공천방식에 문제는 없는지 다시말해 우리의 공천방식이 돈을 빨아들이는 빨대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기업회계에서부터 음성적 자금 빼돌리기를 차단할 투명한 벙법은 없는지 이 모든 것을 당파를 초월하여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지방선거에서 낙선한 후배에게

K회장! 지난 6ㆍ13 지방선거가 뜨겁게 달아올랐을 때 당신은 사랑하는 아내를 저 세상에 보냈었죠. 정말 너무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당신을 돕는 캠프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소. 나는 문상을 갔을 때 이것을 계기로 후보사퇴를 고려해 보자고 권고했었소. 그러나 당신은 “하늘 나라에 간 아내를 위해서라도 끝까지 완주하겠습니다”라고 했고, 그 말에 나는 더 이상 이야기를 그만 두었습니다. K 회장! 선거는 ‘바람’이라고 했죠? 정말 선거는 바람입니다. 그래서 이번 선거에서 당신은 민주당 바람에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상심이 크실겁니다. 아내 잃고, 돈 잃고, 정신적 에너지 잃고…. 그런데 K 회장! 나는 당신이 6ㆍ13 지방 선거에 패배한 후 SNS를 통해 보낸 편지를 보고 당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소. 60대의 나이에 뭘 또 도전할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K회장은 그런 예상을 깨고 재기의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오. 당신은 그동안 농민들이 실질적으로 잘 살 수 있는 소득사업을 개발하고 그래서 그 개발을 가로막고 있는 법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 했었죠. 정말 감히 누구도 생각 못한 것을 당신이 했고, 그것이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 뜻은 높게 평가받을 것이오. 그리고 당신은 많은 후보자들이 포퓰리즘 적 공약과 지역개발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득표전을 벌였는데 오히려 그동안 개발이 자연훼손의 난개발이었다며 아름다운 자연보존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니 유권자들이 얼마나 표를 던질 수 있었겠습니까? 거기에다 당신은 무소속이었죠. 정말 무소속으로 거대 정당과 싸운다는 것은 큰 모험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무소속을 고집했소. 나 역시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원은 무소속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하는 지방자치에 왜 중앙권력이 간섭해야합니까? 지방자치의 선진국 일본은 지난 2016년 지방자치 선거에서 광역단체장 47명 중 오사카 사장을 제외한 46명이 무소속이었습니다. 오사카 시장은 ‘오사카 유신회’라는 지역정당의 후보였으니 실제로 중앙당은 없는 셈이죠. 기초 단체장 1천735명중 5명만 여당인 자유민주당, 그리고 야당에서 4명만 당선됐고 나머지는 무소속이었으며 기초의원도 70.8%가 무소속이었습니다. 무려 4선을 하며 13년간 도쿄 도지사를 한 골수 보수 이시하라 신타로가 2012년 임기를 끝내고 오사카 유신회와 세금을 줄이겠다는 ‘감세(減稅) 일본당’ 등 지역의 보수정당 통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 역시 일본인들의 정체의식, 다시 말해서 중앙정치와 지방자치를 구별하는 분위기를 나타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언젠가 지역정당이 나타날 거라 믿어요. 그런데 우리는 이론적으로 ‘풀뿌리 민주주의’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중앙정치의 예속에서 벗어나야 한다는데 공감을 하지만 실제로는 거리가 먼 이야기 입니다. 지방자치 1기 때인 1995년 국회의원 5선의 박찬종씨가 무소속으로 서울시장에 출마했으나 34%의 득점을 하고도 낙선한 것이 그 좋은 예이죠. 그런데도 당신은 무소속의 정치 실험을 옹골차게 주장하고 있으니 앞으로 4년 그 상황을 지켜보겠습니다. 개척자는 항상 외로운 것입니다. 먼저 자신과의 외로운 투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건승을 기원합니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딱정 벌레의 기적’ 경제달인 있어야

필자가 어릴적 동네에서 큰 부자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집 담장으로 구렁이가 오르더니 밖으로 슬그머니 나가 버렸다. 이 모습에 당황하는 사람은 주인 할머니였다. 그동안 집안을 잘 살게 해 준 ‘업’(業) 이 나갔으니 큰 일 났다는 것이다.이런 일이 있고 나서 우연의 일치인지, 정말 그 부잣집은 점차 가세가 기울어졌다. 그리고 끝내 그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이렇듯 우리 민속(民俗)에는 집의 재물을 지켜 주는 수호신의 상징으로 뱀, 두꺼비, 돼지 같은 것을 위하는 풍습이 있었다.그것을 ‘업’이라고 말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과는 다르다. 때로는 동물들과는 달리 며느리나 머슴을 일컫기도 했다.그 며느리가 들어와 살림을 일으키고, 가운(家運)이 융성해 지면 ‘업’이 들어왔다고 했고, 머슴이 들어와 농삿일을 잘하면 그 집에 압 들어 왔네! 하고 덕담을 했다.‘딱정벌레(Beetle)’라는 별명을 가진 ‘폭스바겐(Volkswagen)’은 패전 후 독일 경제를 일으키는 ‘업’처럼 되었다. 1946년에는 월 1천대의 생산에 불과했던 ‘딱정벌레(Beetle)’폭스바겐은 1955년에는 미국에서만 1년에 100만대를 수출하는 것을 비롯 전 세계를 휩쓸었다.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일컫는 독일 경제 부흥의 눈부신 견인차가 된 것이다.그리고 이 기적의 중심에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1897~1977)가 있었다. 그는 학문적으로, 그리고 실물 경제에 능통한 경제학자이자 경제장관과 총리를 역임하면서 ‘모두를 위한 번영(Wohlstand fuer Alle)를 외치며 독일 경제를 이끌었다.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가 당시 집권당이던 기독교민주당 당원이 아니었다는 사실, 심지어 그가 경제장관일 때 수상이던 아데나워가 기민당 입당을 권유했으나 끝내 이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정치 색깔의 옷을 입지 않고 오로지 독일 경제부흥이라는 목표에 올인했다는 이야기다. 정권의 1인자 자리에 까지 올라갔으나 그는 오직 경제가 전부였고 , 그의 신앙이었다. 말하자면 에르하르트는 독일의 ‘업’인 셈이다. 지금 일본도 ‘아베노믹스’라는 ‘업’을 톡톡히 맛보고 있는 것 같다. 2008년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시작한 ‘아베’총리의 이름을 딴 ‘아베노믹스’가 발동을 걸었는데, 초저금리, 대폭적 규제완화가 그 중심이었다.한 동안 비판도 받았던 ‘아베노믹스’는 그러나 지금 20년 장기 침체를 극복하고, 기계공업, 철강, 화학산업이 활기를 띄기 시작했으며, 주식시장은 연일 최고가를 기록하는 등 일본경제를 살려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특히 부러운 것은 완전고용이다. 오히려 사람을 채용하지 못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까지 손을 뻗치는 것이다. 실업자로 아우성 치는 우리로서는 꿈 같은 이야기다. 우리도 박근혜정부시절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이름을 딴 ‘최경환 노믹스(또는 초이 노믹스)’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빚내서 집사라’는 말이 말해주듯 가계부채만 불렸고 부동산 가격만 상승시켰으며 우리 경제의 고질적 문제는 접근도 못했다는 비난을 받았고, 그나마 ‘최경환노믹스’의 주인공은 지금 교도소에 가 있다. 참으로 안타깝다. 왜 우리는 여·야 모두 정치 투사들은 넘쳐나는데 그 정치판에 경제 지도자는 보이지 않는가? 왜 정치지도자에게만 마이크가 쥐어 지고 경제 지도자는 뒤에 서 있는가? 그렇게 해서 이 어려운 경제난국을 헤쳐 나가겠는가? 경제의 ‘업’이 없으면 앞으로 정치마저 설 자리를 잃고 말 것이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美·中 고래싸움… 새우는 불안하다

일본 최고의 명의로 존경받던 동경 의과대학의 어느 교수가 정년퇴임식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진료한 환자 중 20%는 오진을 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유명한 명의가 20%나 오진을 했다고? 그러면 일반 의사들의 오진율은 얼마나 많겠나?” 한 분야에 이처럼 일생을 바치고 그래서 명성을 얻은 사람들도 그 분야를 분석하고 처방하는데 실수가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캐나다의 마이런 숄스 교수와 미국의 로버트머튼 교수는 1997년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한 경제학의 대가들이다. 명문 스탠퍼드대와 MIT공대에서 이름을 날리던 두 교수는 주식 옵션과 기타 다른 파생물의 가치를 평가하는 주요 수단으로서 ‘블랙-숄스 공식’을 개발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기에 이른 것. 그러니까 한 마디로 주식시장에 대한 최고의 권위자다. 이들은 노벨상을 받은 다음해 LTCM이라는 헤지펀드를 만들었는데 그만 실패를 하는 불상사를 일으켜 세상에 충격을 주었다. “아니 주식문제로 노벨상까지 받은 사람이…”하며 사람들이 혀를 찼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그들의 학문적 연구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변수가 강타한 것인데, 첫째는 덴마크 주택저당채권을 사들였는데 덴마크 이자율이 상승하면서 가지고 있던 채권의 가격은 급락하기 시작한 것. 두 번째는 1998년 러시아가 경제사정이 악화되자 모라토리움을 선언한 것이다. 채권 등 모든 채무이행이 일정기간 유예되는 러시아 모라토리움으로 해서 LTCM은 예기치 않은 빙산에 부딪힌 것이다. 이와 같은 예상치 못한 경제외적 변수로 하여 노벨 경제학상까지 받은 두 거물이 만든 LTCM은 1천200억달러의 손실을 입고 말았다. 결국 이와 같은 사태는 학술적 이론과 주장이 현실과 괴리되고, 언제나 ‘변수’라는 예기치 못한 괴물과 맞서야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정말 이 땅에 얼마나 많은 경제학자가 있고 ‘전문가’라는 사람 또한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도 왜 우리는 IMF를 막지 못했고 오일쇼크에 휘청거렸을까? 역시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외계로부터의 변수라는 것이 행성처럼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또 외계로부터 날아오는 행성과 맞서야 할 처지다. 세계 1, 2위의 경제대국인 미국과 중국의 이른바 ‘G2의 경제패권 전쟁’이다. 더 말할 것 없이 수십조원이라는 천문학적 수출품에 서로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는 사상 최대의 무역전쟁인데 우리는 무사할까? 경제전문가들은 우리나라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며 큰 걱정은 하지 않는 분위기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계 경제의 운전대를 잡고 있는 두 나라 싸움은 우리처럼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게는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불안한 입장이다. 그래서 번지르르한 논리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이야기다. 최고의 명의도 오진을 하고,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경제박사도 투자에 실패를 하는게 현실인데 이 거대한 미ㆍ중 경제전쟁을 어떻게 진단할 것인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나라의 운명을 가름할 것이다. 경제는 실패하면 회복하는데 엄청난 고통과 시간을 국민이 감내해야 하기에 더욱 그렇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트럼프의 ‘平和비용 계산법’

‘Pax Romana’ 흔히 ‘로마의 평화’로 번역된다.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대로 부터의 약 200년 로마가 누렸던 번영과 평화를 말하기도 하고, 로마에 의해 지탱되는 평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서만 식민지와 주변 국가의 평화가 유지되는 것이며 로마가 없는 평화는 ‘가짜평화’라는 것이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Pax Romana’에 빗대어‘Pax America’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세계평화는 미국이 운전대를 잡고 있다는 이야기다. 북한 핵 문제를 풀어 가는데도 그렇다. 그러나 미국의 운전대가‘미국의 평화’를 위해서 인지, ‘세계평화’를 위한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가령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 있던 미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긴 것이 대표적인 예다. 예루살렘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모두의 성지이지만 국제법상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으며 따라서 모든 나라의 대사관은 이스라엘의 수도 텔아비브에 주재하고 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영국, 프랑스 등 우방국들의 반대에도 끄떡 않고 대사관을 옮겼다. 그러자 중동에 긴장이 조성되고 평화가 위협받기 시작했다. 미대사관 이전에 반대하는 팔레스타인과의 충돌로 벌써 60명이 죽었고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란의 한 강경파 단체는 예루살렘의 미대사관 폭파에 10만달러(한화 1억7천만원)의 현상금까지 걸었다. 평화를 위협하는 또하나의 불씨가 생긴 것이다. 그래도 트럼프 대통령은 이것이 평화라고 생각하는 이른바 ‘Pax America’다. 이번 싱가포르에서의 북미 정상회담에서 보여준 트럼프 대통령의 스타일도 그렇다. 그동안 미국이 요란스럽게 외쳐대던 북한 핵의 완전폐기를 검증하는 이른바 CVID는 꼬리를 감추고, 그 대신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이라는 큼직한 선물을 북한에 안겨 주었다. 물론 상응한 조치로 북한은 미사일 엔진시험장을 없애겠다고 했지만 완성된 미사일이 문제이지 생산을 멈춘 엔진시험장의 효용성은 얼마나 있는 것일까? 그리고 50기 안팎으로 추정되는 핵폭탄은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것이 잘 풀리고 북한과 미국 관계가 좋게만 이어진다면 그야말로 ‘평화’는 보장되겠지만, 그 과정이 길어 질 수밖에 없고, 그 안에 돌발 변수라도 발생한다면 머리위에 미사일과 핵폭탄을 이고 살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는 위기를 느끼게 마련이다. 그래도 미국이 이렇게 하는 것을 ‘평화’라고 생각하고, 또한 미국의 중간선거에도 유리하다는 정치적 판단까지 작용한다면 운전석에 앉아 있는 미국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특히 주한 미군의 철수문제가 이 시점에 등장하는 것에 솔직히 우리는 불안하다. 미국도 지금은 아니라고 말하고 우리 청와대도 주한미군 문제는 북한 핵과 관계없는 것이며 한미 동맹에 속한 것이라고 선을 그었지만 이런 말이 나오는 자체가 불길하다. 국제정치는 ‘아니라’고 하면서 진행되고 시작도 하지 않았으면서도 다 된 것처럼 장담하며 허풍 떠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욱이 트럼프 미대통령은 북한 핵 폐기 후의 경제지원을 우리나라와 일본에 떠맡기는 발언도 했다. 북한의 위협에 가장 근접한 나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언제는 북한 핵이 미국 안전을 위협한다며 전쟁도 불사할 것처럼 확대 하더니 계산서를 넘길 때는 셈법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 역시 ‘Pax America’의 논리일까?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링컨의 忠告

햄버거와 함께 미국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커피 체인점 스타벅스 하워드슐츠회장이 2020년 미국 대통령 출마설이 보도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스타벅스의 슐츠회장은 정치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미국 분열’이다. 실제로 그는 지난 4월 필라델피아 스타벅스에서 흑인 2명이 체포되어 인종차별 파문이 확산되자 미국내 전 점포를 하루 문을 닫게 하고 직원 교육을 실시했는데 그는 이것을 ‘인종차별=미국분열’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와 같은 차별적 상황이 트럼프 대통령 정부에 기인하는 것으로 돌렸다. 미국의 분열을 우려하는 것은 슐츠회장만이 아니다. 조지 W 부시대통령 때 국무장관을 지낸 콘돌리자 라이스는 지난 3월 CNN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분열된 국가’라고 규정짓고 미국인 스스로 ‘계급에 갇힌 죄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美정부에서 장관까지 지낸 인물이 이토록 뼈아프게 미국의 현실을 비판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무엇이 이렇게 미국을 분열시키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이‘계급에 갇힌 죄수’라고 생각했는가? 라이스 전 장관은 ‘잃어버린 아메리칸 드림’을 지적하고 있다. 임대주택에 살고,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어깨가 늘어져도 ‘꿈’이 있어야 그 사회가 통합되고 에너지가 생성된다는 것. 그러나 미국보다 더 심각하고 위험스럽기까지 한 분열이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분열이 심각한 것은 네 편, 내 편 갈라지는 것에 끝나지 않고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살기(殺氣)어린 싸움으로 이어가기 때문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보여 줬듯이 선거운동은 그야 말로 ‘캠페인’이아니라 피가 나도록 상대를 물어뜯는 싸움이었고 정당과 후보자들은 경찰과 검찰에 고소장 들고 다니느라 바쁜 ‘고소 고발전’이었다. 반드시 상대를 감옥에 보내야 내가 산다는 오기(傲氣)가 충천했다. 심지어 ‘△△괴멸론’ ‘○○괴멸론’과 같은 섬뜩한 용어들이 정치권에 등장하기도 했다. 관용과 포용으로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괴멸’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에는 한국인의 장점이면서 단점인 ‘이념주의’가 깔려 있다. 정치권만 아니라 교육에도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으로 갈라져 ‘중도’는 설자리를 잃어 가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법조계에까지 분열의 편가르기가 점점 그 모습을 들어내고 있다. 국민들이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법조인들은 얼마나 의식하고 있을까? 법조인들이 법의 정신보다 이념을 더 높은 가치로 받들 때 사법부를 보는 국민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종교계는 어떤가? 역시 이념의 분열이다. 순수한 신앙의 목자는 뒷전이고 집회에 쫓아다니며 마이크 잡기에 바쁜 성직자가 많은 것이다. 연예인도 갈라지고 예술, 문학 등등 갈라지지 않는 것이 없다. 그리고 거기에는 왕실의 대비가 죽었을 때 상복을 1년 입느냐, 3년 입느냐, 9개월 입느냐 하는 오죽잖은 복식 문제로 사생결단 싸움을 걸고, 마침내 패자에게 사약이 내려지거나, 귀양살이로 내몰던 사색당쟁의 DNA가 지금껏 이어져 오는 것이다. 지금 이 땅을 뒤덮고 있는 유령 같은 분열의 먹구름. 여기에서 미국의 링컨대통령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노예를 해방하지 않고도 연방이 유지 된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노예해방 보다 미국의‘통합’에 더 큰 무게를 둔 것이다. 정말 국민 통합을 이루는 정치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제갈공명의 ‘후보자 감별법’

아버지 생신을 맞아 가족들이 식사자리를 마련했다. 식사가 끝날 무렵, 아버지가 6ㆍ13지방선거에서 교육감은 A후보를 찍으라고 했다. 과거 아버지가 교직에 있을 때 함께 근무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어머니가 “그 교육감 후보는 어느 정당이냐?”고 물었다. 교육감은 정당공천이 없다고 하자 모두들 “정당 때문에 부담스럽지 않다”며 아버지가 이야기한 A후보를 찍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다음에는 시·도지사 후보 이야기가 나왔다. 장남은 시 후보는 사람은 별로지만 정당이 좋아 찍겠다고 했다. 차남은 B 후보가 정당은 안 좋지만 인품이 좋아 그를 밀겠다고 했다. 그러자 시집간 딸이 의견을 말했다. C후보는 정당도 마음에 안들고 공약도 모르지만 지난 연말 바자회 때 자기 아들을 데리고 갔는데 예쁘다고 안아 주었기 때문에 그를 찍겠다고 했다. 모두들 “아이 한번 안아 주었다고 찍어 주는 건 말이 안된다”고 하자, “다른 사람은 별수 있나요? 다 똑같지 뭐…우리 아기 한번이라도 안아 준 후보가 좋다구요…”하는 것이었다. 이때 어머니가 거들었다. “도대체 그 많은 출마자들을 어떻게 아나? 나는 영 모르겠더라. 그래서 첫 투표지부터 마지막 투표지까지 줄투표를 하겠다.” 이날 그들의 가족모임에서 나온 이야기가 오늘 투표장으로 나가는 우리들 현실이다. 여기에는 공약이나 정책을 촘촘히 챙기는 것도 없고, 그저 아버지가 추천해서, 인물은 마음에 안들지만 정당이 좋아서, 정당은 마음에 안들지만 인물이 좋아서…그리고 똑같은 사람들이니 아기 한 번 안아준(그러니까 스킨십) 후보를 찍는다는 것. 더욱 놀라운 것은 후보자가 하도 많아 누군지도 모르고 줄투표를 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서울시민 90%는 자기가 사는 곳의 구청장 후보를 모르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래서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줄투표다. 처음에 찍은 칸대로 나머지 후보들(교육감, 시장·군수, 도의원, 시의원을 비롯한 기초의원) 모조리 같은 순서로 찍겠다는 것. 정말 이것이야 말로 많은 세금을 쏟아 부어 치루는 지방선거의 뜻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와 지방자치발전을 위해서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도지사는 도지사, 시장은 시장, 군수는 군수이고 도의원, 시의원, 교육감도 다 각각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만큼 투표도 거기에 맞춰 깊이 생각하고 행해져야 한다. 중국 삼국시대 최고의 전략가이며 유비의 스승 역할을 한 제갈량은 그가 사람을 뽑을 때 기피해야 할 인물을 다섯 가지로 분류했다. ① 의식적으로 사람들 눈에 잘 띄는 옷을 입는 자 ② 귓속 말 하기를 좋아하고 자기보다 능력있는 사람을 비방하는 자 ③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이상론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자 ④ 공적인 규율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판단하여 선동하기를 좋아하는 자 ⑤ 이익이 된다면 적과도 서슴없이 내통하는 자. 그렇다면 오늘 내 손에 들어 온 투표용지에 오른 후보자들 중에서 제갈량이 예시한 다섯 가지 유형에 드는 사람은 없는지 챙겨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또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우리들 유권자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런데 제갈량은 이런 부류를 감별하는 방법의 하나로 술을 취하도록 마시게 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그 많은 후보들에게 술을 마시게 할 수는 없고 ‘일’에 취하게 하는 건 어떨까?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욕설 공화국

‘김삿갓’으로 더 잘 알려진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 김병연(金炳淵)이 중국이 파견한 사신들을 골려준 이야기. 김삿갓은 중국 사신들이 한양으로 오기 위해 대동강을 건널 즈음 뱃사공으로 위장하여 강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일부러 애꾸눈 행세를 했는지, 아니면 정말 그 당시 한쪽 눈을 못 봐서 그랬는지 안대를 하고 있었다. 마침내 중국 사신이 도착하여 배에 올랐고 김삿갓은 열심히 노를 저었다. 그런데 중국 사신이 김삿갓을 보고는 “한쪽 눈을 새가 쪼아갔군” 하고 비웃었다. 이에 김삿갓은 사신의 코가 삐뚤어진 것을 보고는 의연하게 “아하, 바람이 불어 코가 비켜 섰구나” 하고 대꾸했다. 디지털제주문화대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물론 김삿갓의 해학은 너무도 유명하지만 옛날 우리 선비들의 은유는 점잖으면서도 폐부를 찌르는 멋이 있었다. 그래서 김삿갓의 재치 있는 한마디 반격에 중국 사신은 한양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렸다는 것이다. 언어의 힘이다. 그런데 시대가 가면서 우리의 언어가 거칠다 못해 욕설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다. 특히 북한 평양방송이 우리정부나 미국을 비난할 때 쏟아내는 욕설은 섬뜩하다. 어떻게 방송용어가 저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이제는 아예 ‘평양방송=욕설방송’으로 체념해 버렸다. ‘인간쓰레기’, ‘지X발광’, ‘입에 걸레를 물고…’ 등등 차마 지면에 옮기기에도 민망스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 사회에도 언어가 순화되지 않고 특히 정치권의 언어는 폭력 수준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간의 ‘빨간 청개구리’, ‘왕파리’ 설전이 그렇고 이어 경기도지사 선거에 등장하는 ‘욕설파문’이 또한 그렇다. 이와 같은 정치 싸움으로 일어나는 인터넷상의 댓글은 누구 편을 들든 욕설로 도배를 한다. ‘정육점 아저씨의 심장수술’, ‘목을 잘라’, ‘XX놈’… 그리고 아예 우리말에도 없는 ‘개쉐이’ 등 변종 욕설까지 등장하고 있다. 국회를 가도, 지하철을 타도, 시장엘 가도, 온통 세상은 상스러운 언어로 가득 찼다. 심지어 가족들과 외식이라도 하려고 식당에 갔다가 자칫 술 마시는 젊은이들 옆자리에 앉게 되면 민망한 상소리에 자리를 옮겨야 할 때도 있다. 우리의 말과 글을 만들고 가꾼 세종대왕께서 오늘 이 땅의 언어문화를 보게 되면 통곡할 일이 아닌가? 1972년 미국 닉슨 대통령은 선거를 앞두고 워싱턴에 있는 워터게이트 호텔 도청장치를 지시했다는 것으로 탄핵이 되었다. 그런데 이때 흥미로운 것은 자기 나라의 일도 아닌데 영국인들까지 닉슨의 탄핵에 적극 나선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닉슨의 비밀 녹음테이프에 나타난 저속한 표현의 영어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영어를 모독했다는 것. 그러니 아름다운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께서 오늘 우리의 저속한 상소리를 들으면 참으로 가슴 아파하실 것이다. 인류의 욕설을 재미있고 다양하게 다루어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HOLY SHIT’(멀리사 모어 지음, 글항아리 출판, 서정아 번역)에 의하면 인간의 뇌는 교양 언어를 저장하는 대뇌가 있고 비속어를 저장하는 공간이 따로 있는데 뇌졸중이나 알츠하이머 등으로 대뇌가 손상을 입으면 ‘제기랄’ 같은 안 좋은 단어를 많이 쓰게 된다고 한다. 그럴까?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집단 뇌손상이라도 입은 것인가?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세종시, 國會가 오고 장사가 돼야 산다

지난주 말레이시아로부터 날아온 뉴스가 우리 언론에서도 관심 있게 다뤄졌다. 말레이시아 총선에서 야당과 연합한 마하티르 모하마드(Mahathir bin Mohamad)가 총리에서 물러난지 16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했다는 것, 특히 그의 나이가 93세로 현존 세계 정치 지도자들 가운데 최고령이라는 것 등이 관심의 초점이었다. 그는 과거 총리시절 그의 승용차 번호판을 ‘2020’으로 할 정도로 말레이시아의 ‘비전 2020’을 제시하며 산업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고 그 정책의 일환으로 ‘푸트라자야’라는 행정수도를 만들어 냈다. 최첨단 정보통신이 집약된 능률적인 행정도시, 3천명 수용이 가능한 현대적인 컨벤션시설, 인공호수와 아름다운 경관, 이슬람국가로서 말레이시아 정신이 숨쉬는 대형 모스크… 이렇게 말레이시아를 변화시킨 모하마드이지만 몇 가지 점에서 비판도 받고 있다. 첫째, 수도권 분산을 위해 만든 신 행정수도인데 결과적으로 수도권을 확대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 둘째, 최첨단 정부청사와 공공시설은 잘 되어있지만 시민들의 편의시설이 부족하다는 것. 공교롭게도 말레이시아의 새 행정수도를 만든 모하마드가 16년 만에 재집권했다는 뉴스가 전해진 날 세종시는 인구 30만명을 돌파했다는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마치 이제 세종시가 대한민국의 ‘행정수도’로서의 가능성이 열렸다는 듯이…. 물론 이와 같은 인구증가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당장 올해 아파트 1만4천여 가구가 분양되고 내년에도 1만1천여 가구가 분양될 계획이다. 거기에다 내년 안에 행정안전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까지 입주하게 되면 인구는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평균연령이 전국에서 제일 젊은 36.8세에 출산율도 전국 평균을 크게 웃도는 1.67명 그러니까 모든 가능성을 다 갖춘 세종시다. 그러나 국무총리 관저는 경찰이 경비근무를 서고 있지만 총리는 주로 서울에 있고 장관들 역시 관사가 비어있는 날이 많다. 그리고 공무원들은 끊임없이 서울 출장으로 바쁜 세종시다. 물론 총리도 주민등록상 세종시민이고 관저는 340억원이나 들여 지어진 것이며 장관들도 그렇게 국민세금으로 관사가 마련되어 있다. 경제부처 70%가 세종시에 있지만 주요 경제회의는 언제나 서울에서 개최된다. 결국 이대로 두면 말레이시아의 신 행정수도가 수도권 분산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결과적으로 수도권을 확산시켰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처럼 세종시도 다분히 그럴 우려가 있다. 따라서 ‘고비용 저효율’의 행정도시라는 비판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무원을 서울로 끌어올리는 가장 큰 원인 제공을 하는 국회, 그 국회의 분원이라도 하루속히 설치하는 것이다. 상임위가 이곳에서 활발히 전개되어야 국회와 행정부가 제대로 국정을 수행할 수 있고 공무원들이 길에다 버리는 시간과 비용도 절약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세종시는 ‘공무원의 도시’라든지 ‘공무원의 외로운 섬’이라는 소리를 면하기 어렵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세종시가 ‘젊은 도시’, ‘대한민국의 행정이 이루어지는 행정중심도시’라는 것에 만족해서는 ‘외로운 공무원의 섬’으로 주저앉고 말 것이다. 국회가 오고, 자족기능을 살려야 아파트는 붐비는데 상가는 썰렁한 지금의 어두운 그림자를 지울 수 있다. 사무실에 앉아있는 사람보다 거리와 상가 골목이 북적거려야 도시가 산다. 세종시도 예외가 아니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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