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운동가인 김용기는 지난 1909년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 봉안마을에서 태어났다. 학창 시절 여운형이 세운 광동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그의 민족 구원의 지도 이념을 충실히 따르게 됐다. 1931년 고향인 봉안에 이상촌을 건설해 애국지사 후원 및 부락 협동기능 강화에 앞섰다. 아울러 전후인 1954년에는 하남 풍산동에 정착해 황무지를 개척하고 가나안농장을 가꿨으며 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했다. 가나안농군학교의 설립은 경제개발계획과 맞물려 국가가 펴는 국민운동과 맥을 같이했다는 평을 받았다. 이후 가나안농군학교 수료생을 중심으로 일가회를 조직해 복민운동의 주체로 키웠으며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62년 농림부 장관상ㆍ향토문화 공로상을 수상했고, 1964년 공군 참모총장 감사장과 협조 상패를, 1966년 막사이사이상 복지 부문상을, 1973년 초대 인촌문화상을 받았다. 하남문화원 제공
김중만 장군은 조선시대의 무신으로 영조 4년(1728년)에 이인좌와 정인량의 반란을 평정한 인물이다. 한성부판윤 김석창의 아들로 안성 이지현 토현리(현 대덕면 토현리)에서 태어난 그는 숙종 38년(1712)에 무과에 합격했으나 부모님의 병간호를 위해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다. 그런 와중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거짓으로 그들의 거사에 따랐으나 곧바로 상경해 이들의 토벌에 나섰다. 당시 그는 2등 공신에 선정돼 토지(밭 14결 29부 4속), 논(9결 40부 4속), 노비(34명)를 포상받았다. 현재 그의 공신록 및 교지와 영정은 각각 시도유형문화재 제110호와 보물 제715로 지정돼 있는 상태다. 문화재청 제공
최명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병자, 정묘호란 당시 주화론의 대표론자다. 전쟁 중 주화론을 주장해 청나라의 첩자로 오해받는 등 많은 지탄을 받았으나 인조의 각별한 신뢰를 받았다. 아울러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활약하여 공로를 인정받았다. 당시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환향녀를 용서하자는 주장을 펼쳐 미풍양속을 해치는 자라고 비난받기도 했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는 합리적인 주장을 펼친 이로 평가받는다. 정묘호란 당시 경기도관찰사로 부임해 경기 지역과 인연을 맺었으며 이후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거쳐 좌의정과 영의정을 역임하기도 했다. 위키피디아사진=황창배 화가 제공
정지용 시인은 우리나라의 시인이자 신앙인으로 지난 1902년에 태어나 1919년 3ㆍ1 운동 당시 학교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 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1930년대 경향파시의 잡초 속에서 시어의 탁마와 참신한 감각시를 쓰기도 했으며 박두진 등 우리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인들을 대거 발굴하여 한국 문학을 풍요롭게 이끌었던 거대한 산이기도 하다. 대표작으로는 향수, 바다9 등이 있다. 신앙인으로서의 면모도 부천에서 드러났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당시 활발한 신앙 활동을 하던 중 부천에 교당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인천교구를 찾아 다니며 물질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손수 벽돌을 쌓아 오늘의 소사성당을 있게 했다. 부천역사관 제공
홍사용은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한 인물로 나는 왕이로소이다, 그것은 모두 꿈이었지마는 등의 대표작을 남긴 작가다. 생후 100일때 서울로 이주했지만 유년 시절 대한제국 통정대부 육군헌병 부위를 지낸 아버지 홍철유의 사망으로 경기도 화성으로 이주해 학업을 마쳤다. 홍사용이 청년이었던 시절에는 일본의 수탈이 심했던 시기였으나 생전 어떠한 친일 행위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의미가 깊은 인물이라는 평이다. 시문학사적 위치로 볼 때 1920년대 초 낭만주의운동의 선두에 섰던 그의 공적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나는 왕이로소이다 에서 보인 동심적 비애, 향토적 서정, 자전적 전기 등의 감상적 색채는 그의 시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비애의식을 민족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그의 묘소는 화성 동탄면 석우리에 위치해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보우는 가평군 설악면 설곡리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불도를 닦은 인물로 과거 충숙왕 시절 승과에 급제했으나 출사하지 않고 양평 용문산에서 고행했다. 용문산 소재 상원암에서 무(無)를 탐구했으며 1346년(충목왕 2년)에는 중국에 가서 하무산 총공의 법을 계승해 임제종의 시조가 됐다. 생전 선교일체론을 주장해 선과 교를 다른 것으로 보던 당시의 불교관을 바로잡고 일정설을 정리해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강조한 선진적인 인물이었다. 아울러 왕조의 누적된 폐단과 정치부패, 불교계의 타락 등을 꾸준히 꼬집으며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저서로는 태고화상어록, 태고유음 등 8권이 있으며 사후에는 사리 100매가 양산사, 사나사, 청송사, 소설암 등에 나뉘어 봉안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김세환 선생은 경기도 수원 출신으로 일본 주오대학을 졸업한 뒤 수원상업회의소에 근무했다. 미국인 선교사 밀리의 후원을 받아 수원의 삼일남녀학교를 설립해 후진교육에 전념했으며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천도교측과 연합하는 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기독교 측 대표들의 철야회합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지난 1919년 3ㆍ1 운동에 민족대표 48인으로 참가했다가 그해 3월13일 검거됐다. 여러 차례에 걸친 재판 끝에 이듬해 10월 무죄로 석방됐으나 출감 뒤에도 교육사업을 통해 재산가인 홍사훈을 설득, 수원상업학교를 설립하여 2세교육을 통한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김교영은 독립운동가로 광주군 동부면 망월리(現 하남 망월동) 323번지가 본적이다. 1919년 당시 62세였으며 농업에 종사하던 천주교도였다. 그 해 3월20일 전국에서 독립운동이 벌어지고 있음을 전해 듣고 27일 김용문에게 조선 독립의 시위운동으로서 만세를 부를 것이니 사람들을 집합하라고 전했다. 이때 모인 9명을 규합해 동부면 면사무소 앞으로 가서 오후 1시부터 오후 4시까지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때 일본은 정치에 관하여 불온 언동을 하고 치안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체포해 4월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 1994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하남문화원 제공
김치인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영의정을 3차례나 지낸 인물이다. 우의정 김구의 손자이며 영의정 김재로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해 전적, 정언에 이어 문경어사로 나가서 민정을 다스리고 호남어사, 승지, 대사간, 이조참판 등을 거쳐 경기도관찰사가 됐다. 이후 이조참판이 됐다가 공조판서, 이조판서, 호조판서를 하고 지돈녕부사를 했다. 그리고 이조판서와 형조판서를 했다. 57세에 당파를 조성했다는 죄로 직산현으로 유배됐으나 반년만에 풀려나 영중 추부사로 다시 서용돼 봉조하(奉朝賀)가 됐다. 62세 때 정조가 즉위하자 판중 추부사로 기용돼 명의록(明義錄) 의 편찬을 주관했고 70세에 대전통편(大典通編) 의 편찬을 주관했다. 영중추부사로 향년 75세에 사망했다. 시흥문화원 제공
고려시대 최후의 충신이라 불리는 정몽주는 지난 1357년 감시에 합격한데 이어 1360년에는 문과에 장원급제해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363년 당시 병마사 이성계와 함께 여진토벌에 참가해 공을 세웠으며 이후에는 왜구와 협상에 나서 이들을 토벌하고 납치된 백성 수백명을 구해내는 등 맹활약을 펼쳤다. 고려 말기에는 이성계의 위세가 날로 높아지고 조준과 정도전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책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이성계를 문병하고 귀가하던 중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 등에게 살해됐다. 생전에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당시 고려의 주자집주에 대한 강설이 의표를 찌를 정도로 뛰어났다. 아울러 정치적으로도 어려운 시기에 정승의 자리에 올라 아무리 큰일이 나더라도 조용히 사리에 맞게 처결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현재 그의 묘소는 용인 처인구 모현면 능곡로 45에 위치했으며 지난 1972년 5월4일 경기도기념물 제1호로 지정됐다. 묘비에는 고려시대의 벼슬만을 쓰고 조선의 시호를 기록하지 않아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뜻을 분명히 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장준하는 지난 1962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막사이사이상(언론부문상)을 수상한 인물이다. 일본 도쿄의 니혼 신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1944년 일본군 학도병에 강제 징집됐으나 반년 만에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탈출해 중국중앙군관학교 린취안 분교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에 입대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비서로 일했으며 조선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 교무처장과 통일당 최고위원 등을 거쳤다. 지난 1975년 8월17일 포천군 약사봉에 등산하다 의문의 사고로 사망했다. 정부에서는 그에게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 1999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최근 들어 청빈함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으나 황희가 경기도를 빛낸 청백리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그는 고려 우왕 2년(1376) 복안궁녹사로 관직생활을 시작했으며 조선이 들어서자 일정 기간 은둔하며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보였다. 하지만 결국 조선 태조의 적극적인 출사 요청을 수용해 성균관학관에 제수되면서 세자우정자를 겸임하며 다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아울러 농사개량에 유의해 곡식 종자를 배급하고, 각 도에 명령해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의생활을 풍족하게 하였다. 또한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펴내면서 종래 원집과 속집으로 나뉘어 내용이 중복되고 누락되거나 내용과 현실이 괴리되는 것을 수정, 보완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문일평은 국사학자이자 언론인으로 호는 호암(湖巖)이다.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한학을 배우며 성장한 그는 1905년 미국 선교사의 소개로 일본에 유학해 1908년 졸업할 때까지 유학생들의 자강운동단체였던 태극학회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귀국하여 평양의 대성학교, 의주의 양실학교, 한성의 경신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고 유학생활에서 구상한 자강운동론을 교육활동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하려 했다. 그러나 1910년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교육을 통한 자강운동의 보급을 포기하고 다시 일본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 내 조선인 유학생등이 조직한 비밀결사인 동제사에 가입하고 여기서 함께 활동하였던 박은식, 신규식, 신채호 등과 함께 박달학원의 교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1918년 귀국하여 이듬해 3ㆍ1운동에 참가해 8개월을 복역하였다. 이후 1939년 타계할때까지 그는 국사학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면서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구리시청 제공
공안국 신부의 본명은 안토니오 공베르(Antonio Combert)로 지난 1875년 프랑스의 아베이론에서 태어나 1900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우리나라에 입국했다. 그는 1932년까지 안성성당에서 재직하며 구포동 성당을 세우며 안성포도의 기원이 된 프랑스 포도를 들여와 포도 전파에 이바지했다. 아울러 3ㆍ1 운동 당시 구포동 성당으로 피신한 이들을 일본 순사들로부터 지켜낸 데 이어 헐벗고 굶주린 이들을 지켜내기도 한 의인으로 평가받는다. 광복 이후엔 남북전쟁이 발발한 1950년 7월15일 평양으로 납북돼 그해 11월12일 평안북도 중강진에서 선종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그의 흉상은 지난 2012년 5월 안성시에서 제작해 생전 그가 안법학교를 설립하고 현대교육 실시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점을 기리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박세채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631년 지금의 광탄면 창만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율곡의 ‘격몽요결’ 을 읽으며 학문을 출발했으며 율곡을 매우 존경했다. 그 무렵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종사 문제가 제기되었다. 당시에 영남유생 유직이 이들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박세체는 유직의 상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내 장안의 화제가 됐다. 이에 대한 효종의 비답 속에 선비를 몹시 박대하는 글이 있어 이에 분개해 과거시험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만 전념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후 1659년 봄에 천거로 익위사세마가 됐는데 효종이 승하 후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크게 거론되자 그는 3년설을 주장한 남인계열의 대비복제설을 반대하고 송시열, 송준길의 기년석을 지지해 서인 측의 이론가로 거듭났다. 많은 저술 외에 70여 권의 문집, 논어ㆍ맹자의 찬요, 유현들의 사우 연원을 수록한 책 등 후진들에게 귀중한 문헌을 남긴 인물이라는 평이다. 파주시 문화관광포털 제공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난 한흥이 열사는 경성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재학중 3ㆍ1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1919년 3월 1일 서울 탑동공원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계속되는 만세시위운동, 특히 3월 5일 학생단(學生團)의 주도로 이루어진 남대문역전의 시위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이날 남대문역전에 모인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조선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휘날리고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시위하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이때문에 그해 11월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형을 언도받았고 1920년 2월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돼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안양시 제공
김육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대동법의 시행을 주장, 추진했으며 화폐의 보급에 힘쓴 인물이다. 경기도 가평군 잠곡에서 태어난 그는 인조 반정 직후 학생으로 천거돼 관직에 나간 이후 과거에도 급제해 충청감사 재직 중 시범으로 대동법을 시행했다. 대동법의 시행 경과를 지켜본 그는 호서대동법이 실시될 때 호조판서로서 실무를 지휘한 이시방과 함께 대동법 시행에 적극 나섰다. 대동법 시행으로 특산물을 현물로 바치던 공납 대신에 쌀이나 베, 돈으로 납부토록 해 백성들의 삶을 헤아릴 줄 아는 이였다. 아울러 화폐 이용의 필요성을 강조해 민간에도 주전 유통에 성공했으며 공납의 폐단을 없애는 데도 본인의 정치적 운명을 걸기도 했다. 후대에는 단순 문신보다 실학자로 더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정치적인 업적 이외에 다양한 서적을 저술하기도 했다. 신라 말기에서 조선시대까지 유명한 신하들의 행적을 수록한 ‘해동명신록’, 백과사전인 ‘유원총보’를 저술하기도 했다. 한국사 콘텐츠 제공
경기도 과천군 하서면(현 안양시) 출신인 원태우 의사는 지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이토 히로부미 제거를 위한 거사를 준비했다. 원 의사는 이토를 저격하고자 안양의 서리재고개에 대기하고 있다가 이토가 탄 열차가 지나가자 돌을 던졌다. 돌은 정확히 이토의 머리에 명중했으며 뇌진탕은 물론 이때 깨진 유리파편 중 8조각이 이토의 얼굴에 박히는 등 중상을 입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원 의사는 철도방해죄 명목으로 징역 2개월과 곤장 100대에 처해져 수감됐으나 모진 고문으로 몸에 흉터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안양시 제공
경기도 고양에서 태어난 차미리사는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이자 민족 계몽운동가였다. 1901년 여선교사의 알선으로 중국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되어, 인천에서 떠나는 중국 화물선에 몸을 숨겨 상하이로 출국한 뒤 쑤저우에 있는 버지니아여학교에 입학하였다. 이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안창호와 함께 기울어가는 국운을 만회하고자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등 여러 가지 활동을 하였다. 그 뒤 1917년 미국 선교회에서 한국으로 파견하는 선교사 8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귀국하였다. 귀국과 동시에 배화여학교의 교사와 기숙사 사감에 취임해 1919년 3ㆍ1운동 당시 국내외 비밀 연락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후 여성을 대상으로 한 문맹퇴치와 계몽운동에 헌신했으며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아 근화학원을 설립해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 뒤 ‘근화’라는 명칭이 무궁화를 상징한다는 일제의 시비에 따라 명칭을 덕성학원으로 바꿨고 광복 후 1950년 덕성여자초급대학(현재의 덕성여대)을 설립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허준은 동의보감의 저자로 유명한 조선 중기의 의관ㆍ의학자다. 경기도 장단도호부 임강면 우근리(현 파주)에서 태어난 그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정실 부인 소생이 아니라 문관이 아닌 의관의 길을 걷게 된다. 31세 되던 해 부제학 유희춘의 부인을 치료한 게 인연이 돼 유희춘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가 의관으로 출사했으며 48세 되던 해엔 왕자 신성군을 살린 공으로 당상관으로 승진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선조 사후 어의로서의 책임을 추궁받아 유배됐지만 15년 간의 연구 끝에 1610년 임상의학 백과사전 ‘동의보감’을 집필하는 큰 업적을 세웠다. 동의보감은 조선 한방 의학의 발전은 물론 18세기에는 일본과 청나라에서도 간행될 만큼 높이 평가 받았다. 1615년 사망한 그의 묘소는 현재 파주 진동면 하포리 일대에 위치해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