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연 선생은 경기도 김포(현 강서구 염창동)에서 아버지 김종원과 어머니 초계정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우국인사들이 세운 태극학교(太極學校)에 입학해 근대학문을 배웠으며 졸업 후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여 민족의식을 함양하였다. 2·8독립선언 이후 김도연 선생은 1922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콜롬비아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아메리칸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선생은 미주지역 민족운동 세력 결집을 위해 ‘삼일신보’를 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고, 귀국 후에는 연희전문학교에서 후학을 지도하다 식민지 교육의 한계를 느끼고, 실업계에 투신하여 조선제사회사(朝鮮製絲會社)의 감사역으로 활동하다 자본금 30만원의 조선흥업주식회사를 창업하기도 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박찬익 선생은 1884년 1월 2일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성년이 되기까지 서당에서 유학을 공부한 선생은 20세가 되던 1904년, 서울의 농상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본인 교사와의 마찰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후 ‘보안회’에 참여하여 일제의 황무지개척 요구안에 반대투쟁을 하며 민족문제를 자각하게 되었고 신민회에도 가입하여 서북지역에서 계몽교육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11년 2월에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종교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대종교를 받아들이고 대종교 포교와 독립운동에 온 힘을 다하였다. 1940년 광복군 창설 과정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40년 10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자 법무부장에 선출되었으며 이후 임시정부의 좌우합작에도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국가보훈처 제공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서림면(西林面)에서 김문환과 임천 조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성숙 선생은 밭일을 도우며, 한문과 소학교 공부를 하였다. 1916년 서간도로 망명하려다가, 양평의 용문사(龍門寺)에서 불교에 입문하고태허(太虛)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 경기도 광릉에 있는 봉선사(奉先寺) 월초(月初) 스님의 문하로 들어가, 불교 교리를 공부하고 근대사회과학에 눈떴다. 3.1운동 때에는 경기도 양주, 포천 등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체포됐다. 이 때문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김사국 선생을 통해 사회주의사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 듯하다. 1921년 봄 출옥 후에는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무산자동맹회 활동에 참여하였고, 김한, 조봉암 선생 등과 교류하였다. 문화재청 제공
홍원식 선생은 경기도 화성 향남면 제암리 출생이다. 대한제국 서울시위대 제1대대 서소문병영에서 근무하다 1907년 군대해산 후 충남 등 각지에서 의병으로 활동했다. 1914년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안종후, 김성렬 등과 ‘구국동지회’를 결성하여 신교육운동 등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월1일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서 발표와 함께 탑골공원에서 만세함성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수원지역의 31운동은 3월1일 수원 방화수류정(용두각)에서 시작된 이후 3월26일 송산면 만세시위를 계기로 조직적이고 격렬해졌다. 이후 홍원식 선생은 제암리 교회에서 일본 아리타 중위의 총격으로 부인과 함께 순국했다. 정부는 홍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김혁 선생은 1875년 10월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했다.그 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근대식 군사교육을 받았다. 전통 한학의 토대 위에서 무관학교의 교육을 통해 습득한 근대적 사고와 투철한 민족의식을 지니게 된 것이다. 3.1운동이 발발하자 향리인 용인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한 뒤 중국 만주로 망명했다. 처음 서간도로 망명하여 대종교 독립운동 단체를 찾아가 흥업단 부단장으로 활약하면서 본격적인 항일 무장투쟁에 나섰다. 그 뒤 북간도로 옮겨 임시정부를 지지하던 북로군정서에 참여하여 활동하면서 청산리대첩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 3월께 김혁 선생은 신민부 결성을 주도해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며 큰 성과를 올렸다. 국가보훈처 제공
백낙열 선생은 경기도 수원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수원군 장안면(長安面)·우정면(雨汀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이곳의 만세운동은 차희식 선생을 비롯한 차병한ㆍ차병혁 선생 등의 지휘로 전개됐다.이들은 장안면 덕정리 뒷산에서 횃불을 올리며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그리고 4월 3일 장안면 석포리에서 시작돼 시위군중은 독립만세를 부르고 장안면사무소로 행진했다.이날 정오 수촌리 이장 백낙열 선생은 장안면사무소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동민들에게 알리고 시위참여를 촉구하는 등 군중을 규합했다. 이후 시위군중은 백낙열 선생의 주도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안면에서 우정면으로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때에 백낙열 선생은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습격해 집기류와 공문서를 파기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강기동 선생은 경기도 장단 고랑포에서 헌병보조원으로 일했다. 1907년 정미칠조약과 군대해산이 일제에 의하여 단행되자 뜻있는 많은 의사들이 항일 무력 투쟁을 전개했다. 이때 강기동 선생이 근무하던 장단에는 의병투쟁하다가 체포된 인물들이 다수 투옥됐지만 그가 옥문을 열어 주어 많은 의병들을 구출할 수 있었으며,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의거의 기치를 내걸게 됐다. 그 후 그는 의병대장이 되어 각지의 의병장들과 유기적 관계를 맺었다. 강기동 선생은 주로 양주, 포천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그의 주변 일대 특히 경기도의 양주, 포천을 위시하여 삭령(朔寧)마전(麻田)황해도의 토산(兎山)금천(金川)재령(載寧) 등지에서는 연기우(延基羽)전성서(田聖瑞)이한경(李漢京) 선생 등이 활약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박은식 선생은 1859년 9월30일 황해도 황주군 남면에서 농촌 선비로 서당 훈장이던 부친 박용호와 모친 노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880년에는 경기도 광주로 가서 신기영과 정관섭 등에게서 학문을 배웠는데, 이들은 다산 정약용의 문인들이었다. 이들을 통해 선생은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의 정치, 경제, 사회 등 제분야의 개혁론을 섭렵했고 나아가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관념 체계 아래 현실 문제에 관심이 깊은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했다. 1912년 3월부터 박은식 선생은 북경, 천진, 상해, 남경 등지를 순방하며 망명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한 뒤, 그 해 7월 상해에서 동제사(同濟社)를 결성했다. 동제사는 중국 상해에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해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등 한국 독립운동의 기반 조성에 주력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1860년 구리에서 윤익상과 평해 황씨의 큰딸로 태어나 16세가 되던 해, 춘천 의병장 외당 유홍석의 장남이며 팔도창의대장 의암 유인석의 조카인 유제원과 결혼했다. 시아버지 유홍석의 영향으로 의병운동에 뜻을 뒀다. ‘안사람 의병가’, ‘의병군가’, ‘병정가’등을 지어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고 여성들도 구국활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친일파와 일본군에게 서신을 보내 죄상을 꾸짖고 1907~1908년의 의병운동 때에는 강원도 춘성군에서 여성의병 30여 명을 조직, 군자금을 모아 의병운동을 지원했으며 8편의 의병가와 4편의 경고문을 남겼다. 국가보훈처 제공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파주군 적성에서 성장했다. 을사조약 늑결 후 가산을 정리해 군자금을 마련한 뒤 거사를 위해 양평으로 내려갔다. 이후 양평을 주근거지로 양주와 포천, 그리고 강원도의 홍천, 화천, 춘천 일대에서 투쟁했다. 무기를 구입하고,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소장수를 가장하고 장날을 이용해 격문을 돌리며 200명이 넘는 장정을 규합했다. 양평 용문산을 근거지로 양주, 이천, 지평 등지에서 일제 군경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의병은 한때 400여 명에 이르렀으며 강원도 일대에서 병력을 보강해 세력을 강화했다. 민긍호 의병을 비롯한 주변지역 의진과 연합전열을 구축하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1907년 8월, 서울에 인접한 양평 일대에서 의병이 활발하게 활동하자, 일제는 심각한 위협을 느꼈다. 이에 의병과 일본군 사이 수차례 대소 전투가 벌어졌다. 권득수는 결전에 앞서 의병들에게 “나라 없는 백성으로 왜놈의 노예가 되어 목숨을 부지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다면 우리의 후손들은 당당한 삶을 누릴 것이다”라며 최후의 결전을 독려했다. 31세 나이로 용문사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국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1861년 3월 경기도 여주에서 명성황후 일가로 태어난 선생은 약관 20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이조참판으로 승진하고 정부 내 여러 요직을 역임하는 등 탄탄대로의 관료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일제의 침략이 자행되고 그 와중에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는 치욕적인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관직을 내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충청도 정산으로 낙향해 국치를 설욕하고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절치 부심했다. 특히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돼 국망의 위기가 닥쳐오자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에 나섰다. 또 1906년 3월 충청도 정산에서 안병찬 등 유생들과 함께 600여명의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봉기의 첫 기치를 올렸다. 1906년 5월에는 충청도 홍산에서 재봉기하면서 의병대장에 추대됐고, 1천여 명에 달하는 의병부대는 화포를 앞세워 홍주성 탈환이라는 큰 전과를 거뒀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의기를 꺾지 않다가 1917년 6월 26일, 56세로 일생을 마쳤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경기도 양주 출신.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강원도 철원으로 가서 해산된 군인들을 규합하여 의병운동을 일으켜 철원과 양주를 근거지로 일본군과 네 차례나 접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무기를 구입하려고 노력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일제가 한반도를 식민지화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1919년 8월 군정부의 중심인물로 활약하다가 그해 12월 북로군정서가 조직되자 사단장으로 활동했으며 청년교육에도 힘썼다.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는 보병대대장으로 활약하여 대첩을 거두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같은해에 밀산에서 대한독립군단이 편성되자 총사령관이 되었다. 자유시참변 이후 망명군을 재편성하는 한편, 독립사상의 함양에 진력하였다. 1923년 연길현에서 이범석 등과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여 총사령관으로서 영농과 군사훈련을 강화하여 일제와의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1929년 동포의 교육을 위해 노력하다가 공산당원에게 피살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경기도 평택 출신. 1907년에 단발을 하고 상경, 이상재·남궁억·윤치호 등과 교분을 가졌다.1910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조선인기독교청년회에 계속 관여, 조선인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해 활동하면서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했다. 1915년 귀국해 주로 언론계에 종사하다가, 1916년 상해로 망명해 이회영·신채호 등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서 활약했다. 1919년 3·1운동 만세시위를 지도하는 한편, 비밀결사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해 상해 임시정부의 연통부 역할을 수행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4년 조선일보 주필을 거쳐 부사장·사장을 역임해 10년 동안 언론인생활을 했다. 1927년 신간회 총무간사로 활약하다가 잡혔다. 1936년 임시정부와의 긴밀한 활동이 탄로나 2년 동안 복역했고,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다시 2년 동안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우리나라 상고사와 조선철학에도 정진했다. 이는 일본학자들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연구였다. 8·15광복과 동시에 생겨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됐다. 정부수립 후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나 납북된 후 사망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경기도 용인 출생. 1898년 남궁억·나수연 등과 황성신문을 창간했다. 독립협회에 가입, 각종 토론회를 지도했으며 만민공동회 간부로 활동했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한 직후,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이란 유명한 논설을 쓸 때, 너무 격분해 끝을 맺지 못하자 유근이 그 후반부를 끝내고 밤새도록 인쇄해 배달했다.이 사건으로 무기정간을 당했다가 속간되자, 장지연의 뒤를 이어 사장이 돼 국권회복을 위한 언론구국활동을 전개했다.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 조선광문회 등에서 활동했다. 1910년 일제가 모든 한국인의 신문을 폐간하자 교육사업에 종사했다.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부설 교원양성소 학생들이 조직한 조선물산장려계의 민족운동을 지도하다가 130여 명과 함께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가 풀려났다. 3·1운동이 일어나자, 13도 대표자의 국민대회에 대종교계 대표로 참석하고 ‘한성정부’라는 임시정부의 정부체제 선택과 각료 선정에 참가, 활동하다가 붙잡혔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때는 양기탁과 함께 고문으로 추대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일명 영득, 호는 오산(午山).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수원 등지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했고, 1920년 3월 북경(北京)으로 망명, 중국청년회 어학과에서 수학하다가 중퇴하고 장춘(長春)·톈진(天津)·상해 등지를 순력했다. 장춘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난 뒤 1922년 6월 의열단에 가입했다. 1923년 의열단에서는 국내의 일제기관 파괴와 요인을 암살하고자, 서울에 있던 김한(金翰)과 김원봉 사이를 오가면서 폭탄의 수입준비를 진행하던 중 김한이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어 폭탄을 구하지 못했다. 그해 3월1일 톈진으로 가 김원봉으로부터 폭탄반입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가 비용을 구하지 못하였기 때문임을 듣고, 실행비용을 국내에서 보충하기 위해서 동지 권정필(權正弼)·유시태(柳時泰)·유병하(柳秉夏)와 협의한 뒤 권총을 휴대, 2월21일부터 3회에 걸쳐 서울 내자동 이인희(李麟熙) 집에 찾아갔다가 잠복한 경찰에 붙잡혔다. 그해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8년형을 받고 복역했다. 1929년 출감하자, 다시 톈진으로 망명하여 톈진교민회를 조직,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아 귀국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1590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이 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화 선원촌으로 피난했다가 왜군 토벌과 명나라 군사 접대로 공을 세워 승지에 발탁됐다. 1601년 대사간이 됐으나 북인의 배척을 받아 정주목사로 좌천, 이후 지방관을 전전하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 잠시 한성우윤·도승지를 지낸 뒤 계속 한직에 머물렀다.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해 벼슬을 버리고 원주로 거처를 옮겨 화를 피했다. 인조반정 후 판돈녕부사에 기용됐고, 이어 병조·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 정묘호란 때는 서울을 지켰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묘사(廟社)의 신주를 받들고 빈궁·원손을 수행해 강화도에 피난했다가 이듬해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했다. 일찍이 고문(古文)과 시를 배웠다. 성혼과 이이의 문인으로서 황신·이춘영·이정구·오윤겸·신흠 등과 친밀했으며, 당색이 다른 정경세와도 도학으로써 사귀었다. 시와 글씨에 뛰어났다. 작품으로는 평양의 숭인전비 및 풍덕군수 장인정의 비에 남긴 전액(篆額)이 있다. 시조로는 ‘오륜가’ 5장, ‘훈계자손가’ 9편이 전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조선 중기 문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종군했으나, 아군의 패배 소식을 듣고 의주로 돌아가 함경도 지방의 선무 활동에 공을 세웠다. 1597년 성균관대사성이 됐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명나라에서 베트남의 사신을 만나 화답하면서 교유했다.1611년 왕세자의 관복(冠服)을 주청하는 사절의 부사로 다시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때 유구 사신과 섬라(타이) 사신을 만나 그들의 풍속을 듣고 기록했다. 1619년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수원에 살면서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도승지 겸 홍문관제학으로 임명되고, 대사간·이조참판·공조참판을 역임했다. 1625년 대사헌으로서 열두 조목에 걸친 ‘조진무실차자(條陳懋實箚子)’를 올려 시무를 논해 당시 가장 뛰어난 소장(疏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중요한 관직을 모두 지냈으며, 세 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어려운 정국에서도 당쟁에 휩쓸리지 않았다. 언제나 강직하면서도 온화한 입장을 유지해 그 시대의 성실하고 양식 있는 관료이자 선비의 자세를 지켰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기생이자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1일 조선 민족대표 33인이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선포하며 3·1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3·1운동은 신분과 남녀노소를 떠나 전 민족적인 운동으로 발전했다. 기생들 또한 만세 시위에 뛰어들었다. 3월 19일 경상도 진주를 시작으로 29일 수원, 4월 5일 해주 등으로 퍼져 나갔다. 수원에서 발생한 만세운동은 지식인과 학생들의 주도로 시작됐다. 이후 일어난 수원 기생들의 항일 시위는 23세 기생 김향화의 주도였다. 김향화는 태극기를 만들었고, 29일 오전11시 자혜의원으로 출발, 수원경찰서 앞에 이르러 독립 만세를 선창했다. 이후 체포돼 2개월간 고문을 받고 6개월간 수감생활을 했다. 그의 행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에서 김향화에게 2009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김향화가 이끈 수원의 기생 만세 시위는 기생들이 여성운동과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한국민족 전체의 운동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의 문신. 1569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사람과 번잡하게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성룡이 일찍부터 이원익의 비범함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 뒤 1587년 안주목사에 기용돼 생업을 안정시켰다. 뽕을 심어 누에 칠 줄을 몰랐던 안주 지방에 이원익이 권장해 심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조판서로서 평안도도순찰사의 직무를 띠고 먼저 평안도로 향했고, 선조도 평양으로 파천했으나 평양마저 위태롭자 영변으로 옮겼다. 평양이 함락되자 정주로 가서 군졸을 모집하고,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어 왜병 토벌에 전공을 세웠다. 1593년 정월 이여송(李如松)과 합세해 평양을 탈환하기도 했다. 광해군 즉위 후 다시 영의정이 됐을 때 대동법을 경기도지방에 한해 실시했다. 인조가 즉위하자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면 자신도 떠나야 한다는 말로 광해군의 목숨을 구했다. 성품이 소박하고 정의감이 투철했다. 오리집 속오리집 오리일기 등을 썼다. 경기도 광명에 묘소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경기도 파주 출신. 1917년 4월 서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1921년 3월 4년제를 졸업했다. 1925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영생고등여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1927년 5월 미국으로 유학해 우스터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과 과정을 마친 다음, 1931년 영생고등여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다. 1941년 영생고등여학교를 떠나 조선어학회(지금의 한글학회)에서 조선말 큰사전 편찬을 맡아보다가, 1942년 9월에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홍원경찰서에 구금돼 징역 2년을 선고받아 함흥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조선어학회로 돌아와 조선말 큰사전 편찬을 다시 시작하는 한편, 연희대학·중앙대학·홍익대학·동국대학 등에서 국어학 강의를 맡았다. 1950년 6·25로 고향에서 피신했고,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갔다가 1952년 서울로 돌아와 큰사전 속간을 위해 전념하다가 같은 해 11월 교통사고로 죽었다. 1962년에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추서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