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인간과 AI 공존

인공지능(AI) 책사(策士)가 우리와 같이 한다? 허리가 계속 아프다. 가까운 사람에게 물어봤다. 신통치 않은 답변. 어느 병원의 어떤 의사에게 가야 하나. 요가나 달리기를 해야 하나. 뜨거운 물이 들어있는 물주머니를 매시간 허리에 차는 것도 이젠 지겹다. 누가 나를 도와줬으면 하는데. 구글은 제미나이(Gemini)가 클래식 게임인 포켓몬 블루(Pokémon Blue)를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전략 게임을 스스로 할 정도라면 전략가로 고려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친구에게 무엇을 주고, 무엇을 보게 해야 요통 해결 전략을 들려줄 수 있을까. 옆에서 꼬마가 숨이 넘어갈 정도로 계속해서 까르르 웃는다. 배경음악으로 참 듣기 좋다. 나도 너처럼 웃고 싶다. 제갈량이라면 나에게 어떤 따끔한 이야기를 했을까. 우선 최적의 솔루션부터 찾아보라고 충고하지 않았을까. 구글은 다양한 버전의 제미나이를 나열하면서 파레토 프런티어(The Pareto Frontier)라고 언급했다. 이동 시 적합하고, 성능도 좋고, 가격도 저렴한 파운데이션 모델(foundation model)을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겠지. 소위 크기-품질-비용-속도의 최적점을 발견하라는 미션. 이제 우리에게 익숙했던 해법이 아닌 낯선 문법을 채택할 때가 임박했다는 계시인가. AI 집사(執事)가 우리의 결점을 채워준다? 투자심사역이 중국 AI 전문회사와 협업해 보자고 제안한다. 인수합병 전문가가 스페인 언어를 구사하는 국가도 AI 협력을 희망한다고 귀띔한다. 중국어와 스페인어 그리고 영어. 능통했으면 좋으련만 인지적 구두쇠라는 핑계로 눈만 질끈 감고 있었으니. 구글은 구글 빔(Google Beam) 기술을 화상회의 솔루션인 구글 미트(Google Meet)에 접목하면서 자연스러운 실시간 화상 통역 서비스를 시연했다. 영어와 스페인어를 동시에 통역하면서 모국어의 억양 패턴을 상대방의 언어에 녹이고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입 모양과 표정이 통역할 언어로 동기화되면서 동일한 목소리를 낸다. 내가 아니지만 유창한 언어 마법사가 된 나. 그런데 한국어인 갑질, 눈치, 정 같은 단어는 어떻게 번역하려나. 하여간 기술을 믿어 본다면 새로운 기회를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겠지. 왠지 믿고 싶다. 전화가 소나기처럼 울린다. 다양한 독촉 메시지. 제발 쫓기며 살고 싶지 않다. 구글은 AI에이전트 기술인 컴퓨터 유즈(computer-use) 기능을 에이전트 모드로 선보였다. 크롬 웹브라우저로 수행하는 모든 일을 내가 다른 일을 하는 사이에 조용히 뒤에서 첩보원처럼 처리한다. 사람처럼 웹브라우저를 자율적으로 통제하면서 사용한다니. 확실히 기술이 좋긴 좋다. 사람의 ‘귀차니즘’을 지지하면서 업무 효율성을 극대화한다니. 이 시대에는 인간에게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역할을 부여하고자 무척 노력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적응하고 있는가. AI 박사(博士)가 일당백을 한다? 구글은 프로젝트 아스트라(Project Astra) 기술을 제미나이 라이브(Gemini Live)에 활용해 산악자전거 수리 장면을 연출했다. AI가 알아서 브레이크 설명이 나오는 문서 페이지를 열어 보여준다. 망가진 나사 고치는 유튜브 영상을 틀어준다. 필요한 육각 너트 스펙을 자전거 가게에 이메일로 문의해 답변받아 안내한다. 부족한 나사 재고를 업체에 전화해 확인하고 주문한다.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은 아주 똑똑한 직원. 당장 시키고 싶은 일이 수도 없이 떠오른다. 그중 최고의 난도는 협력할 믿을 만한 파트너를 찾는 일. 정말 네가 할 수 있겠니. 때론 시각장애인의 안내견 역할도 수행한다. AI가 사람의 눈이 된다. AI와 협업해 내일을 개척할 준비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AI 감독(監督)이 우리네 인생의 이모작 또는 삼모작을 계획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구글은 AI 영화 제작 도구인 플로우(Flow)를 출시했다. 내 메시지가 담긴 스토리를 감동적인 영상으로 자동 생성한다. 영상, 배경음악, 효과음, 대사, 캐릭터 모두를 아우른다. 숏폼 영상, 숏폼 드라마, 단편 영화, 장편 애니메이션까지 욕심을 낼 수 있을까. 기술이 평범한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인생을 꿈꿀 수 있도록 한 발 한 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오픈마인드가 필요하다.

[경기만평] 민생...

[사설] 새 정부에서 경기국제공항은 어려울 듯하다

과거 어느 때보다 공약 비중이 작았던 선거였다. 불과 한 달여 만에 모든 게 끝났다. 공약집이 사전 투표 하루 전에야 발표될 정도였다. 많은 지역 공약이 토론도 없이 묻어 갔다. 그중 하나가 ‘중부권 거점 공항’ 공약이다. 이재명 후보의 청주지역 공약에 이렇게 돼 있다. ‘민항기 전용 활주로 확보로 증가하는 이용객 수용 및 국제 노선 취항 확대’, ‘청주공항을 중부권 거점 공항이 되도록 지원’. 청주시 지역 공약 9개 가운데 1호 공약이었다. 경기도, 수원·화성시에는 경기국제공항이 있다. 수도권 등 중부권의 항공 물류 거점 구상이다. 수원에 있는 군공항 이전에서 비롯된 청사진이다. 화성시 매향리 일대가 후보 지역으로 얘기된다. 물론 화성시와 화성지역 정치권은 반대하고 있다. 이 지역은 청주공항과 불과 80㎞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중첩된 SOC 투자가 예상된다. 선택적 접근이 불가피해졌다. 바로 이 선택에서 이재명 후보가 ‘청주공항’을 고른 것이다. 경기국제공항의 대선 유탄이다. 여기에 경기도의회의 이상 기류도 있다. 경기국제공항 관련 조례를 폐지하려는 움직임이다. 도의회 민주당 의원 등이 추진하고 있다. 빠르면 10일 도의회에서 다뤄질 수 있다. 해당 조례는 김동연 지사의 국제공항 초석이다. 관련 시책 추진, 행정·재정적 지원 근거가 담겨 있다. 물론 조례 폐지에는 여러 가지 현실적 요인이 있다. 수요 예측 변화, 강화된 안전성 확보 등의 변수가 고려됐다. 그렇더라도 ‘김동연표 경기국제공항’이 받을 타격은 크다. 수원지역 정치권의 구상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해 보인다. 아쉬운 점이 있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공약으로 ‘청주공항 육성’을 선언했다. 지역 정치권에서는 알고 있었어야 했다. 알았다면 충분히 토론하고 대응했어야 좋았다. 촉박한 대선에서 그런 모습은 없었다. 그나마 위로를 삼는다면 ‘군공항 이전 지원’ 공약이다. “수원의 군공항 이전 및 이전지의 개발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은 있다. 정부가 국책사업으로 군공항 이전을 선정해줄 희망이 남는다. 새 정부를 끌어가는 틀은 국정 과제다. 국정 과제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는 공약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공약을 통해 공항 문제를 정리했다. 청주시에는 ‘국제공항 육성’ 지원을, 수원시에는 ‘군공항 이전’ 지원을 약속했다. 현실적으로 바꾸기 어렵다. 경기도와 수원시가 이에 맞는 선택을 해야 한다. 경기도 관계자는 “(정부 정책 전환을 보면서) 열어 놓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고 밝혔다. 희망고문이 아닌 실현 가능성을 볼 때다.

[사설] 급물살 해수부 이전... 부산항 편중 보완책 있어야

대중의 선거 표심이 권력을 창출하는 시대다. 그 표심은 후보자의 비전이나 꿈을 쫓아간다. 전문용어로 정치적 상상력이다. 고정관념이나 법의 테두리를 벗어날수록 파괴력이 크다. 과거 박정희 정부는 그런 비전을 내걸고 스스로 실현했다. 헐벗은 나라에서 ‘국민소득 1만불’, ‘마이카 시대’를 얘기했다. 그러나 대항 세력은 비난과 비판으로 일관했다. 경부고속도로까지 반대하던 그 모습으로. 20여년 후 노무현 후보가 파괴적 상상력을 보여줬다.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이다. 중립지대 충청 표심이 쏠렸다. 그러나 상대 진영은 비판으로 대응했다. 헌법 위배라 했다. 선거가 끝난 뒤 이런 후회가 나왔다고 한다. “우리도 그냥 따라 공약했으면 어떠했을까.” 이번 6·3 대선 때는 이재명 후보가 나섰다. 해양수산부와 1위 해운기업의 부산 이전 공약이다. 전략적 요충지에 대한 맞춤형 약속이었다. 어쨌든 역대 어느 선거보다 높은 부산 득표율을 이끌었다. 부산은 이미 4월부터 해수부 이전 10만명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해양수도 부산 범시민추진회의’도 나타났다. 이재명 대통령이 임기 시작부터 지시를 내렸다.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을 신속히 준비하라고. 처음 이 공약이 나왔을 때 인천과 세종시 등에서 반발이 나왔다. 충청권에선 행정수도 취지에 역행한다 했다. 인천항만업계도 곧바로 반대 성명을 냈다. ‘일방적으로 해양수산 정책의 중심축을 부산으로 옮긴다면 수도권 해양물류 체계의 효율성과 정책 대응력이 약화할 것’이라고 했다. ‘부산을 제외한 전국 항만과 수산업의 소외’도 우려했다. 유정복 인천시장도 최근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해수부 신속 이전을 지시했지만 부처 간 협업을 저해하고 지역 갈등을 조장할 수 있다고 했다. 수도권의 인천항과 동남권의 광양항은 홀대해도 된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고 했다. 같은 날 인천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도 성명을 냈다. 항만정책의 ‘부산 쏠림’을 더욱 가속화할 것을 우려했다. 지역 해양수산청의 지방정부 이양 등 지방분권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도 내놓았다. 해수부 이전에 대한 인천의 우려는 괜한 것이 아니다. ‘해양수도’를 내세우는 부산 이전론에는 ‘원포트(One Port)’ 정책 논리가 깔려 있다. 대표 항만 하나를 집중 육성해 국제 경쟁력을 키운다는 논리다. 중국 항로가 열리기 이전엔 사실상 ‘부산항 원포트’였다. 인천은 정책 방향이나 재원 배분에 있어 늘 상대적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이제 그 편중의 정도가 더 심해질 것이라는 걱정들이다. 돌이킬 수 없다면 보완책이라도 있어야 한다.

[지지대] 명언과 국적

‘명언과 격언’이란 과거의 위인이나 현대의 유명인이 남긴 현명하고 깊이 있는 말들이다. 그 속에는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는 가르침이나 조언이 담겨 있다. 우리는 명언과 격언을 통해 얻는 지혜와 인생 교훈을 시대적 배경에 맞게 잘 활용하면 된다. 시대상을 타개할 가장 현명한 가이드라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명언과 격언에 국적이 생긴 모양새다. 시대적 환경과 상황에 맞게 말한 명언이 지금은 검증 대상이 되고 말았다. 가장 대표적인 명언이 바로 ‘흑묘백묘론(黑猫白貓論)’이다. 중국의 지도자 덩샤오핑은 “고양이는 털이 검든 희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며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정치체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백성이 잘살기만 하면 된다는 뜻으로 이 말을 발표했다. 그런데 현재의 대한민국은 어떤가. ‘흑묘백묘’, 이 말을 쓰면 친중 세력으로 지목된다. 필자도 그동안 글을 쓰면서 이 말을 여러 차례 언급했는데 그럼 친중 세력으로 분류되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뉴딜정책을 추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말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행동하는 사람이 역사를 만든다’ 등의 명언을 인용하면 친미 세력인가. 대한민국은 지금 전례 없는 경제위기에 빠져 있고 출구도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갈등과 반목은 수년째 이어지고 있고 ‘내란과 탄핵’이라는 단어는 이제 국민들에게 피로감만 더할 뿐이다. 새로운 대통령을 선택한 국민들에게서 해답을 찾아보자. 진짜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검은 고양이와 흰 고양이의 구분이 아닐 것이다. 쥐(경제)만 잘 잡는 고양이가 필요한 게 아닐까. 지지했던 기호가 1번이든 2번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지금은 새 정부가 국민들을 위해 일할 기회를 줄 시간이라는 것이다.

[문화산책] 어사 박문수의 양면성

지방자치단체장인 도지사나 시장, 군수는 시의회의 견제를 받으며 제한된 범위에서 권한을 행사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수령은 달랐다. 이들은 왕에게 직접 통치권을 위임받아 행정은 물론이고 사법권까지 독자적으로 행사하는, 사실상의 절대 권력자였다. 왕조는 수령의 전횡을 막기 위해 암행어사제도를 운용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파견된 암행어사는 총 613회에 이른다. 그중 오늘날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단연 박문수다. 박문수는 책과 드라마 속에서 탐관오리를 척결하고 민초의 억울함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정의의 상징으로 그려져 왔다. 그러나 정작 그가 어사로 활동한 기간은 채 1년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수백명의 어사 가운데 박문수만이 ‘어사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것일까. 그 단서를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박문수는 왕의 총애를 받았고 사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하지만 동시에 실록에 ‘광인(狂人)’으로 기록된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박문수는 명문 소론 가문 출신으로 경종 대에 벼슬길에 올랐다. 당시 왕세제였던 영조와 가까운 관계를 맺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집권 노론에 견제를 받는 처지에 있었다. 이후 영조가 즉위하자 그는 중용됐고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공신에 오르며 입지를 굳혔다. 과거에 급제한 뒤 병조판서까지 오르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5년이었다. 정치적으로 성공한 인물임에도 박문수의 이름 앞에 유독 ‘어사’라는 호칭이 따라붙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박문수는 영조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대신들이 자세를 바로잡으라 하자 “아첨하는 노예들이 그렇게 한다”고 일축했고 결국 영조는 모든 신하가 얼굴을 들고 말하도록 명령했다. 그의 발언은 거칠었고 때론 다른 신하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정6품 수찬 한현모는 박문수의 모욕적 언행을 문제 삼아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박문수는 오히려 “한마디도 못 하는 신하들이 문제”라며 왕에게 언성을 높였다. 자식마저 희생시켰던 영조조차 박문수에게는 “성질 좀 죽이라”고 타이르는 데 그쳤다. 박문수는 당시 사회의 병폐를 직시하고 그 실상을 여과 없이 진언했다. 법의 형평성은 무너졌고 권세가 있는 자는 죄를 피해 갔으며 경박한 기회주의자들만 조정에 가득했다. 그는 조선 300년의 기틀이 무너지고 있다며 왕에게 경고했고 백성의 삶과 국정 전반에 대한 총체적인 개혁을 촉구했다. 박문수의 발언은 당시 조정에 충격을 줬고 실록은 그런 그를 ‘광인’이라 표현했다. 상식과 양심을 지키는 자가 오히려 미친 사람으로 보이던 시대, 박문수는 그 한복판에서 홀로 목소리를 냈다. 어사로서의 활동은 짧았지만 임무 수행은 인상적이었다. 그는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다른 지역에서도 다녀갔다는 민담이 전해질 정도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영일만 해안에 밀려든 가재도구를 보고 함경도의 수해를 직감해 신속히 지원을 요청했고 왕에게 보고하는 절차도 생략할 만큼 과감했다. 그는 백성의 삶에 실질적으로 다가가려 했으며 용인, 대구, 울산 등에서 부정한 수령을 파직시키기도 했다. 박문수는 직언을 주저하지 않았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관료였다. 진정한 리더십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공직자의 책무가 어디까지여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줬다. 실록은 그를 ‘광인’으로 남겼지만 백성은 그를 ‘영웅’으로 기억한다. 요즘 같은 시국에 박문수와 같은 인물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기고] 인천국제법조타운 조성해야

2028년 인천고등법원 개원이 확정되고, 해사법원 유치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는 지금, 인천은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해야 합니다. 바로 국내에 산재한 국제적 업무 담당 법원들을 한데 모은 ‘인천국제법조타운’을 조성해 동북아시아의 명실상부한 법률 허브로 발돋움하는 것입니다. 최근 대한민국 사법부와 법조계의 움직임은 이러한 구상에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대법원 국제분쟁해결시스템연구회(이하 연구회)가 국가지식재산위원회 등과 함께 '새로운 국제 IP 분쟁해결시스템 구축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한 것은 그 서막과 같습니다. 특히 연구회는 노태악 대법관을 회장으로, 전국의 각급 법관 56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해 대한민국이 국제 상사 및 지식재산 분쟁에서 아시아의 전략적 분쟁 해결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연구회의 노태악 회장은 세계지식재산기구(WIPO)가 미국과 유럽 중심으로 운영돼 국제특허출원 4위, 국제상표출원 9위인 우리나라가 정작 소외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며, 아시아 지역의 지식재산분쟁 조정센터나 전문법원을 우리나라의 관문 도시인 인천에 설치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는 매우 시의적절한 제안입니다. 유럽연합(EU)이 2023년 6월 유럽 단일 특허의 보호 및 침해 방지를 위한 유럽 통합특허법원(UPC)을 설립한 것처럼, 아시아 역시 자체적인 지식재산권 분쟁 해결 메커니즘이 절실합니다. 이는 역내 국가들이 분쟁 해결을 위해 유럽이나 미국까지 가야 하는 불편함과 막대한 비용을 줄이고, 아시아 국가들의 권익을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6위의 무역 대국이며, 대다수 기업이 상당한 지식재산권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특허와 상표는 속지주의 원칙에 따라 각국에 개별적으로 권리를 확보해야 하므로 국제 분쟁의 소지가 다분합니다. 이러한 지식재산권 분쟁은 관할권이 여러 곳에서 발생할 수 있고, 신속하고 전문적이며 경제적인 해결이 사업의 지속성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창조산업, ICT, 생명공학, 그리고 비디오게임, 소프트웨어, 콘텐츠 산업에 이르기까지 지식재산권의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으며, 세계 최고 수준인 우리나라의 지식재산권 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은 국가 경쟁력 강화와 직결됩니다. 국제 IP전문법원이나 분쟁센터를 유치하기에 최적의 장소는 노태악 연구회 회장이 언급했듯이 관문도시 인천입니다. 인천의 송도국제도시나 영종국제도시는 인천국제공항에서 불과 30분 거리에 위치해 국제적 접근성이 매우 뛰어납니다. 또한, 각종 컨벤션센터와 충분한 오피스 공간을 이미 갖추고 있으며, 국내 대기업 본사가 밀집한 서울에서의 접근성도 우수합니다. 송도와 영종이 국제도시로 구상된 근본적인 이유도 바로 이러한 탁월한 접근성 때문이었습니다. 세계적으로 국제분쟁 해결을 위한 법조타운 또는 클러스터가 성공적으로 운영되는 사례는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싱가포르의 맥스웰 체임버스(Maxwell Chambers)는 세계 최고 수준의 국제 중재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싱가포르 국제중재센터(SIAC), 국제상업회의소(ICC), 국제중재법원 등 주요 국제중재기관들이 입주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대표적인 국제분쟁 해결 허브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영국 런던 역시 오랜 법치주의 역사와 함께 다수의 국제 로펌, 중재기관, 전문법원들이 밀집하여 국제 법률 서비스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 또한 ICC 국제중재법원 본부가 위치하며 국제 상사중재 분야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시들은 잘 갖춰진 인프라, 우수한 법률 전문가 그룹,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국제분쟁 해결 시장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인천국제법조타운’이 성공적으로 조성된다면 다음과 같은 광범위하고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현재 추진 중인 해사법원, 그리고 우리가 유치하고자 하는 국제분쟁센터, 나아가 국제 IP 분쟁 해결 기능(국제분쟁법원/재판부, WIPO 아시아 지부, IPO 조정센터, 아시아지식재산법원 등)이 한곳에 모여 업무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기관간 협력을 촉진해 시너지를 창출합니다. 국제 중재 및 소송 유치로 인한 직접적인 법률 서비스 수익 증대와 국내외 대형 로펌, 회계법인, 컨설팅 기업 등의 유치 및 관련 산업(통번역, MICE, 숙박, 관광 등) 성장 견인하고, 양질의 일자리 창출 및 지역 경제 활성화가 기대됩니다. 국제 규범 형성에 있어 대한민국의 발언권 강화 및 국격이 제고되고, 국내 기업들이 해외 분쟁 발생시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며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법률 지원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됩니다. 이러한 인천국제법조타운의 성공적인 조성을 위해서는 인천시 차원의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준비가 필수적입니다. 공항에서 가까운 송도나 영종에 국제 중재 및 소송을 위한 첨단 법정 시설과 대규모 컨퍼런스 시설, 스마트 오피스 빌딩 등 맞춤형 공간을 조성해야 합니다. 국제학교, 외국인 친화 병원, 다양한 문화 및 편의시설을 확충해 해외 법률 전문가와 그 가족들이 생활하기 좋은 환경도 필요합니다. 국제 로펌, 중재기관, 관련 기업 유치를 위한 세제 혜택, 재정 지원, 규제 완화 등 파격적인 인센티브 패키지를 마련해야 합니다. 국제적으로 명망 있는 중재인, 변호사, 법학자 등을 초빙하고 이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해야 합니다. WIPO, ICC, UNCITRAL 등 주요 국제 법률 기구와의 협력 관계를 강화하고, 관련 국제회의 및 행사를 적극 유치해야 합니다. 법무부, 외교부, 산업통상자원부 등 중앙정부 부처와의 유기적인 협력체계를 구축해 국가적 지원을 확보해야 합니다. 이러한 구상은 아시아 각국의 동의가 필요한 사안이므로 우리 정부의 외교적 역할도 매우 중요합니다. 아세안 국가들과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을 체결한 것은 긍정적인 신호입니다. 대법원 국제분쟁해결시스템연구회의 출범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매우 시의적절한 움직임입니다. 연구회 구성원 대다수가 판사들이며, 그들 역시 지식재산권 분쟁의 국제적 성격을 깊이 인식하고 인천에 국제재판부나 법원 설치를 제안한 것으로 보입니다. 해사전문법원도 국제적 업무를 띄고 있으므로 국제법조타운에 같이 설치되면 좋습니다. 이제 인천지방변호사회도 이러한 대법원과 업계의 움직임에 발맞춰 인천시에 적극적으로 제안하고, WIPO 아시아 지부 유치나 아시아지적재산권분쟁조정센터 설립을 위한 행정적 지원을 강력히 촉구해야 합니다. 저 또한 인천지방변호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동료 회원들과 함께 인천에 국제기구와 전문법원을 성공적으로 유치하고, 나아가 '인천국제법조타운'이라는 원대한 비전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인천이 동북아 물류 허브를 넘어, 세계적인 법률 서비스와 분쟁 해결의 중심지로 우뚝 설 그날을 기대합니다.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경기시론] 내란회복지원금, 지역화폐로 지급한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민생 위기가 일상화됐다는 의식이 팽배하다. 그래서인지 민생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재명 정부는 전 국민 대상 25만원 내란회복지원금을 추경안에 포함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 또한 지역화폐(지역사랑상품권)로 지급해 지역상권을 살려 민생회복의 마중물 역할을 기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재명 대통령조차 대통령 후보 시절 지역화폐가 노벨상을 받을 정책이라고 주장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을 더할까 싶다. 요즘 이러한 지원금을 지역화폐로 지급하는 것을 놓고 쟁론이 벌어지는 것을 본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는 지역화폐와 관련해 중요한 사항을 의도적이든 무지해서든 놓치는 경우가 상당하다. 이 가운데 핵심 몇 개만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첫째, 대형 점포에서 중소형 점포로 매출의 이전이 있는가다. 이는 그동안 여러 실증연구 결과가 밝혀내 그 효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지역화폐의 정책효과 중 하나인 지역상권 내 점포 간 균형 소비 효과가 분명히 달성된 것이다. 둘째, 지역 간 불균형 소비를 해소하는가다. 지역화폐는 특정 지역에서만 사용 가능하게 해 이것이 없을 경우 예를 들어 A지역 소비자가 B지역에 가서 소비하는 것과 그 반대의 경우를 차단하는 것이기에 지역 이동에서 오는 소비(매출) 효과를 없앤다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주장은 그 전제로 지역 간 소비가 자유 균형 상태, 즉 A지역과 B지역이 서로 균등하게 지역 간 소비 이동을 하는 상태라는 것을 은연중 깔고 있다. 그런데 지역 간 소비 불균형과 쏠림 현상이 보편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직관적으로도 이해가 되지만 신용카드를 쓴 자료를 가지고 전국에 걸쳐 지역 간 소비 패턴을 파악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소비에서 지역 쏠림이 있고 현금이나 카드는 이걸 조장하는 데 반해 이를 일정 부분 막아주는 게 바로 지역화폐다. 실제 조사 결과도 지역화폐를 사용한 소비가 지역 간 쏠림을 어느 정도 막는 것을 보여준다. 대규모 도시나 중심상가에서 소규모 도시 및 소규모 지역상권으로 소비 이전이 일부 있다는 것은 지역화폐의 또 다른 정책 목적이 달성됐다는 얘기다. 더군다나 지역 간 이동을 해 소비하려 들면 지역화폐에 의지하지 않고 현금이나 카드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법이다. 소비의 이동 제한이 주는 불이익을 침소봉대할 일이 아니다. 셋째, 지역화폐 대신 온누리상품권을 사용하자는 주장이 있다. 이것이 지역 제한을 두지 않기에 국가경제 전체적으로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온누리상품권은 소비의 지역 쏠림을 해결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수단이 아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그 숫자가 얼마 되지 않은 전통시장에서 사용할 수 있고 소비자나 점포조차 대부분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온누리상품권은 애당초 지역화폐와 비교 경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넷째, 지역화폐가 과연 소비효과를 보여주는가다. 먼저 지역화폐가 현금, 카드로 하는 기존 소비를 대체한다는 주장이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극단적으로 100% 대체한다면 지역화폐는 아무런 소비효과가 없게 된다. 이를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연구보고서가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서베이 조사에 의하면 사람들은 지역화폐로 기존 소비를 대체하는 비율이 평균 30% 내외라고 한다. 여기서 더 생각해야 할 것은 소비자들은 지역화폐를 사용하면서 소비 대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추가 소비도 30%를 넘긴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복합돼 소위 승수효과라는 것을 보이게 되는데 정책발행 지역화폐는 민간이전지출에 해당해 1.5가량의 승수효과를 보인다. 특히 지금 거론되는 내란회복지원금보다 훨씬 큰 규모일 경우 규모에 따른 효과가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수십조, 아니 그 이상 규모의 지역화폐 정책 발행은 소비를 제대로 진작하고 그로 인한 민생회복과 경제성장 효과는 상당할 것이다. 이번에 이를 증명한다면 정치적 이유로 추락한 대한민국의 위상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기고] 탱고, 존재의 리듬과 예술의 품위

탱고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뒷골목에서 태어났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과 아프리카계 후손들의 음악이 섞이고, 가난한 이주 남성들과 성매매 여성들이 좁은 공간에서 몸을 맞대며 만들어낸 춤. 불안정한 정체성과 외로움, 그리고 말로 다 전하지 못할 슬픔이 축적되어 탄생한 몸짓이었다. 탱고는 처음엔 천박하고 저속한 춤으로 치부되었지만, 오히려 그 안에는 절박한 삶을 견디는 이들의 존엄이 배어 있었다. 정체 없는 땅에 뿌리내리려 했던 자들, 그리고 이름 없이 사랑받고자 했던 자들의 절실한 감정이, 이 한없이 절제된 리듬 속에서 피어났다. 탱고는 격렬한 춤이지만 그 본질은 침묵에 가깝다. 말보다 앞서는 호흡, 손보다 앞서는 중심의 이동, 그리고 음악이 멈출 때 찾아오는 정적. 그것은 단순한 춤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고요함을 듣고 받아들이는 존재의 리듬이다. 한 사람의 걸음이 멈추면, 상대도 멈춘다. 이 춤은 이끄는 자와 따르는 자의 구분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만들어내는 감정의 조율이다. 남녀가 몸을 맞댔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사이에 흐르는 긴장과 간극의 미학이다. 탱고에는 분명 관능이 있다. 그러나 그 관능은 감각적인 자극이 아니라, 절제와 기다림 속에서 피어나는 정서적 농밀함이다. 서로의 체온을 나누지만 결코 허용되지 않는 거리가 있고, 마음은 가까워지지만 몸은 끝내 다가서지 못하는 간절함이 있다. 이 간격과 조율이 탱고의 품격을 만든다. 그것은 성적 유혹이 아닌, 상호 존중과 긴장 속의 고요한 교감이다. 탱고의 관능은 정제된 절망과 고독이 만들어낸 예술적 에로티시즘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떤 이들은 이 춤을 여성의 관능미에만 집중하며, 심지어 동물의 교미에 비유하기까지 한다. 탱고를 성적 환상으로 왜곡하고, 그 속에서 여성의 몸을 욕망의 대상으로만 소비하는 시선은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 감각의 타락이다. 탱고는 성적인 시선을 유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춤이 아니다. 여성을 ‘끌려가는 몸’으로만 바라보는 그 시선은, 춤을 본 것이 아니라 욕망에 물든 자기 내면을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탱고를 동물의 섹스에 빗대는 표현은, 예술에 대한 모독이며 여성에 대한 인격적 폭력이다. 탱고에서 여성은 단지 끌려가는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리듬의 공동 창조자이며, 감정의 주체로서 남성과 공간을 함께 구성하는 당당한 참여자다. 이 춤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관계 안에서의 균형과 조화를 통해 인간 사이의 긴밀한 공존을 구현한다는 데 있다. 남성은 리드하되 지배하지 않고, 여성은 응답하되 복종하지 않는다. 그 긴장과 완급 속에서 탱고는 단지 육체적 표현이 아닌, 철학적 사유의 장으로 확장된다. 예술은 보는 이의 수준을 반영한다. 어떤 이는 탱고의 발걸음 속에서 고독을 읽고, 어떤 이는 몸짓 속에서 존엄을 느낀다. 그러나 또 다른 이는 그 속에서 단지 섹스를 연상하고, 감상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예술을 자기 욕망의 도구로 전락시키기도 한다. 나는 단언하고 싶다. 탱고를 여성의 성적 이미지로만 축소하고, 그 춤을 동물의 본능에 빗대는 작가는 예술을 말할 자격이 없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감각의 폭력이며, 예술이 아닌 모독이다. 탱고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예술이다. 본능을 넘어 감정을 나누고, 고독을 견디며 타인과 교감하는 방식으로서의 춤. 그 안에 숨어 있는 간격, 정적, 여백은 모두 인간만의 정제된 감정과 사유에서 비롯된다. 탱고는 음란하지 않다. 오히려 탱고는 숭고하다. 느림과 멈춤, 기다림과 절제가 만들어내는 내면의 떨림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인간다운 품격을 마주하게 된다. 예술은 자유롭다. 그러나 그 자유는 타인의 존엄과 예술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 선 안에서만 빛난다. 감상자의 시선이 욕망에 갇힌 순간, 예술은 소통이 아닌 소비가 되고, 감상은 교감이 아닌 침해가 된다. 탱고는 몸의 예술이기 이전에, 마음의 예술이며, 존재의 윤리이다. 여성의 몸을 관능의 대상으로 소비하지 않고, 감정의 주체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이 춤의 진정한 아름다움에 다가설 수 있다.

[천자춘추] 한반도·북 비핵화 주술에 걸린 핵맹 코리아 上

올해는 광복 80주년이자 원자폭탄 투하 80년, 그리고 한일 수교 60년이다. 이에 원자폭탄에 초점을 두고 3회 정도 글을 써 보려 한다. 미국의 핵무기 개발은 제2차 세계대전 후반 나치 독일이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소식에 놀란 아인슈타인 등 핵물리학자들의 요청으로 진행된 ‘맨해튼 계획’에서 출발했다. 1945년 7월16일 미국은 뉴멕시코 트리니티에서 첫 핵무기 실험을 성공한 이후 그해 8월6일 히로시마와 8월9일 나가사키에 핵무기를 투하했다. 투하한 핵탄두로 두 도시에서 약 70만명이 피폭됐다. 이 중 10만명이 조선인 피폭자다. 생존한 4만3천명이 상처받은 몸으로 귀국했지만 치료받지 못하고 국가의 관심 밖에서 ‘원자병’으로 고통스럽게 연명해야 했다. 현재 남아 있는 피폭자는 1천500여명에 불과하다. 1945년 5월 나치 독일은 항복했지만 핵무기 개발을 멈추지 않았다. 이후 뒤이은 미국과 소련 간 핵무기 경쟁으로 냉전은 격화됐고 영국, 프랑스 그리고 마침내 중국까지 핵무기를 확보하는 시대에 이르렀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핵무기 시대의 실상이다. 핵무기 실험은 과거 식민지였거나 내부 식민지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이뤄졌다. 전 세계적으로 2천번이 넘는 핵실험이 있었는데 미국은 미국령 마셜군도 비키니와 네바다에서, 영국은 옛 식민지인 호주에서, 프랑스는 식민지 알제리와 폴리네시아에서, 중국은 신장위구르, 소련은 카자흐스탄 및 북극에서 진행했다. 일본은 유일한 피폭 국가라고 주장하면서 전쟁 국가 이미지를 벗으려 하지만 실험지의 피해도 만만치 않다. 수십번, 어쩌면 수백번에 달하는 핵실험 속에 노출된 식민지 피폭자 수백만명의 고통은 세대를 넘겨 2세로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는 소련이 개발한 핵발전소 시스템과 미국의 ‘핵의 평화적 이용’을 더한 원자력발전소 시대에 살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400여기의 핵발전소가 가동 중이며 발전소를 통해 우리는 풍부한 전기를 공급받고 있다. 하지만 1979년 스리마일섬 원자력발전소 사고,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 2011년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를 거치면서 원전의 안전 신화는 점점 무너지고 있다. 이에 따라 전 세계 곳곳에서 ‘원전 제로 사회’로의 시도가 가시화되고 있다. 지난달 ‘32차 반핵아시아평화포럼’이 대만에서 열렸다. 대만은 2025년 5월18일 0시를 기해 마지막 원전의 가동이 중단됐다. 아시아 최초의 ‘원전 제로’ 국가가 된 것이다. 후쿠시마 사고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당시 포럼에 참가한 아시아 13개국은 타이완전력공사 앞에서 축하 행사를 진행했다. 핵무기와 원전은 핵의 쌍생아라고 평가된다. 핵무기 경쟁으로 한때 8만기의 핵무기가 지구를 뒤덮었다. 이는 지구를 수차례 멸절시킬 만한 양이었다. 하지만 전 세계적인 반핵 평화운동으로 핵무기 감축이 실현돼 현재는 1만2천기 정도다. 2017년 세계 비정부기구(NGO) 연대체인 핵무기금지국제캠페인(ICAN) 덕분에 유엔은 핵무기금지협약을 122개국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그해 12월 ICAN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21년 1월 50개국이 비준한 ‘핵무기금지협약(TPNW)’이 발효돼 핵무기의 개발 보유 협박이 불법으로 규정됐고 현재는 73개국이 협약에 가입돼 있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함께 한반도와 북한 비핵화를 주장하면서 미국 주도의 핵 정책을 지지하는 핵무기 지지 국가로 분류돼 있다. 고개 들고 눈을 떠 보자. 새롭게 출범한 이재명 정부의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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