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유발 하라리의 신작 ‘넥서스’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중세시대 마녀에 대한 공포가 우연한 계기로 확산되고 이것이 수세기 동안 무자비한 마녀재판으로 이어졌던 역사에 대한 설명이 그것이다. 초기에 마녀에 대한 괴담이 큰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저자는 ‘마녀의 망치’라는 책이 발간돼 당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마녀가 존재한다는 ‘상호주관적인 실제’가 급속히 퍼져 나가 잔혹한 마녀사냥이 촉발됐다고 쓰고 있다. 마녀사냥은 중세의 새로운 정보기술인 인쇄술의 발달에 기인한 아이러니한 비극이라는 얘기다. 이야기로 시작해 문자 발명, 인쇄술 발달, 산업사회 태동, 그리고 인터넷 사회를 거쳐 AI시대에 접어든 정보기술 발전사를 돌아보면 마녀의 존재 같은 허황된 음모론이 시대에 따라 주제와 대상을 달리할 뿐 항상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금 전 세계에 불고 있는 부정선거 음모론 역시 가짜뉴스와 확인되지 않은 자극적인 뉴스들이 뉴미디어 시대의 강력한 매체인 유튜브와 맞춤형 알고리즘을 통해 구독자들의 편향적 사고로 고착된 결과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부정선거에 대한 확증편향은 레거시 언론에 대한 불신과 함께 디지털 매체를 통해 쉽게 확산되는 듯하다. 최근 부정선거에 대한 다큐영화가 상영됐지만 기존의 주장들과 크게 다른 점은 발견하기 어렵다. 이미 선관위가 해명했거나 법원 판결로 부정이 없었음이 입증된 사례의 재탕이었다. 하지만 대중문화인 영화의 영향력은 크다. 우려되는 점은 영화처럼 감성적인 정보전달 매체를 통해 확산되는 거짓정보가 선거관리에 대한 불신을 부추기고 민주주의에서 투표가 갖는 참여의 가치를 퇴색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일부 단체는 투표소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행동 매뉴얼까지 만들어 공유하고 있다고 하니 자칫 유권자들의 투표에 피해를 주지 않을지 걱정도 든다. 그럼에도 선거는 민주주의의 축제다. 선관위 위원으로서 부정선거가 없다는 말을 반복하기보다 이 말씀을 드린다. 건강한 민주주의는 깨어 있는 유권자가 만들어 간다. 쏟아지는 음모와 가짜뉴스로부터 지켜야 할 것은 유권자의 냉철한 균형감각이다. 선거에 대한 감정적이고 자극적인 주장과 정보를 접하는 경우에도 이념적 대립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도 지난한 대화와 설득으로 진실과 화해를 추구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하라리의 경고처럼 우리는 AI 정보혁명 속에서 과거와 같은 시행착오를 겪을 시간적 여유가 없다. 전대미문의 불확실한 시대에서 대한민국의 명운을 가르는 대통령선거가 오늘이다. 깨어 있는 유권자의 시간이 바로 지금이다.
유시민의 ‘말’에 지지를 바꿀 유권자가 있을까. 윤석열의 ‘등장’에 돌아설 지지자가 있을까. 있다면 판세를 바꿀 정도의 비중이 있을까. 돌이켜 보면 돌발변수 없는 선거는 없었다. 많은 경우 그게 ‘말’ 또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선거판을 바꾼 결과는 예가 많지 않다. 그럼에도 그런 ‘말’ 또는 ‘행동’은 예민했다. ‘아군 진영’에서 시작된 사달이라 더 그랬다. 지지자들에게는 속타는 내부 총질이었다. 이번에는 ‘유시민 말’, ‘윤석열 등장’이다. 유시민 작가의 발언은 이랬다. “...설난영씨의 인생에서는 거기 갈 수 없는 거예요. 이 사람이 지금 발이 공중에 떠 있어요. 이제 영부인이 될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정신이 아니다 그런 뜻이죠.” 김 후보를 ‘학출(대학생 출신) 노동자’로, 설씨를 ‘찐(세진전자 노조위원장 출신) 노동자’로 구분했다. 여고 졸업 이후 공장 노동자였던 신분을 논리 출발로 삼고 있다. ‘180석’(2020년), ‘60대 썩은 뇌’(2004년)도 그의 과거 설화였다. 노동자 대표 양대 노총이 들고 일어났다. 한국노총은 ‘계급·성차별 발언’이라고 비난했다. 민주노총도 ‘여성·노동자 비하’라는 성명을 냈다. 국민의힘은 비난을 넘어 선거 막판 이슈로 몰고 간다. ‘고졸 유권자 분노했으면 투표장으로 가자.’ 수원 등 도심에 등장한 현수막이다. 상황이 이렇자 민주당에서도 ‘진보 진영 스피커들의 말조심’을 주문했다. 이재명 후보도 “(유 작가가) 사과했으니 국민이 용서할 것”이라며 머리를 숙였다. 사흘 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등장했다.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정상화시키기 위해서 오는 6월3일 반드시 투표장에 가셔서 김문수 후보에게 힘을 몰아주시기를 호소드린다.” 직접 밝힌 것은 아니고 대독이었다. 전광훈 목사가 주최하는 집회에 보낸 메시지다. 윤 전 대통령은 민주당의 최대 공격 포인트다. ‘김건희 여사 잡음’도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는다. 민주당이 기다렸다는 듯 ‘김문수 후보가 윤석열’이라며 맹공을 가했다. 김용태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입장이 분노에 가깝다. “국민의힘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시기를 바란다.” 사실 윤 대통령의 등장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 21일에는 갑자기 서울의 극장을 찾았다. 부정선거론을 주장하는 영화였다. 그때도 대선판은 ‘계엄·내란’으로 확 돌아섰다. 일부에서는 이런 배경을 ‘본인 정치’로 보기도 한다. 내란 재판 등 추후 고된 일정이 산적해 있다. 이를 위한 지지자 규합·유지가 목적이라는 추론이다. 유시민 작가. 선거 때면 도지는 관심일까. 아니면 고도의 화두 몰기일까. 윤석열 전 대통령. 여론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본인만의 정치셈법일까. 막판에 등장한 ‘X맨’들 ‘활약’에 두 정당이 애를 먹고 있다.
6·3 대선이 오늘 자정을 기해 22일간의 열띤 선거운동을 끝내고 내일 대선 후보자들은 유권자들로부터 선택을 받게 된다. 지난 29일부터 30일까지 진행된 사전투표는 34.74%를 기록했다. 역대 최고치인 지난 20대 대선의 36.93%보다 2.19%포인트 낮은 수치다. 이번 대선에서의 사전투표율이 종전 기록을 갱신할 것이라는 일반의 예상과는 다른 결과가 나왔다. 이는 선거관리위원회의 투표관리 부실로 인해 확산된 사전투표 불신 등이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12·3 비상계엄 사태로 인해 조기 대선이 결정된 원인도 있지만, 이번 대선은 역대 어느 선거에 비해 정책경쟁이 실종된 선거라는 오명은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동안 세 차례에 걸친 ‘대선 후보 TV 토론’에서 치열한 정책경쟁은 실종되고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만 난무하는 진흙탕 싸움이 돼 유권자들의 실망은 크다. 각 정당과 후보자들이 정책경쟁을 얼마나 소홀히 했는가는 선거공약집이 사전투표 직전에 발간된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사전투표 사흘 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하루 전에야 공약집을 내놨다. 공약집 내용도 공약 이행에 따른 재정조달 계획 등 구체성이 떨어진 급조된 공약이 많아 집권 시 이렇게 부실한 공약이 과연 어떻게 실제 정책으로 이행될 수 있을지 지극히 우려된다. 이번 선거는 내일 투표가 끝나면 개표 종료 이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전체 위원회의를 열어 당선인 결정을 선포하게 된다. 이후 즉시 신임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된다. 정권인수위원회 구성도 없이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게 됨으로써 급조된 공약을 가지고 섣부른 정책 집행을 하게 되면 어려운 민생경제는 물론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는 데 상당한 한계를 갖게 될 것이다. 대선 후보자들은 선거운동을 통해 정책경쟁이 아닌 인신공격만 난무하는 진흙탕 싸움을 벌여 유권자들에게 희망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실망시켰다. 특히 후보자들에 대한 비호감이 어느 때보다 높아 상당수 유권자들의 기권이 예상된다. 유권자는 이제라도 공약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최선(最善)의 후보자가 없으면 차선(次善)의 후보자에게라도 투표를 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다. 이는 유권자들이 행사하는 귀중한 주권 행사인 투표에 의해 대통령을 비롯한 국민의 대표들이 선출되기 때문이다. 결국 선거 시 투표에 대한 최종 책임은 유권자의 몫이다. 유권자는 국가 미래가 선거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 귀중한 주권을 반드시 행사해야 한다.
더위에 가뭄까지 겹치고 산불까지 난다면 어떨까. 최악의 상황이다. 이런 사태가 실제로 현실로 나타났다. 2010년 러시아에서였다. 그해 6월 초순부터 7개월여 동안 이어졌다. 5만5천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경제 피해는 17억4천만달러(약 2조3천477억원) 규모였다. 당시로 더 들어가 보자. 매일 수은주가 30도가 넘는 폭염이 이어졌다.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아 농작물은 타 들어 간다. 대기가 고온 건조해지면서 산불이 급속도로 확산했다. 산불 연기는 모스크바 등 대도시에 유입돼 폭염과 함께 사망자가 다수 발생했다. 폭염은 지면에서 높이 2m의 기온인 하루 평균 기온이 상위 10%에 드는 날이 사흘 이상 연속되는 경우다. 가뭄은 물순환을 반영해 하루 증발산 부족량 지수가 하위 10%에 드는 날이 사흘 이상 연속되는 경우다. 폭염에 가뭄을 동반하는 현상을 복합재해라고 부른다. 한국도 예외는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기상협회의 분석 결과다. 한국기상협회는 전국을 100㎢ 격자로 나눈 뒤 1979년부터 2023년까지 기상자료를 활용해 5~10월 폭염과 가뭄이 얼마나 발생했는지 분석했다. 한 격자에 6월10~15일 폭염, 같은 달 12~20일 가뭄 등이 나타났다면 폭염이 시작한 10일부터 가뭄이 끝난 20일까지 복합재해 한 건이 발생한 것으로 규정했다. 그 결과 복합재해 발생 횟수는 연평균 446.3건으로 나타났다. 최근 10년(2014~2023년)만 놓고 연평균을 계산하면 951.5건에 달했다. 복합재해가 한꺼번에 나타나는 일이 급증했다는 의미다. 가장 많이 발생한 해는 1994년으로 4천113건이었다. 2018년(2천194건)과 2016년(1천670건)이 뒤를 이었다.복합재해 지속 기간은 평균 11.4일이었다. 복합재해는 자연 훼손과 환경 파괴 등이 불러 온 후유증이다. 명백한 기후 리스크다. 마땅히 극복해야 할 과제다.
요즘 대통령선거운동이 한창이다. 거리에는 확성기를 단 선거 차량이 돌고 후보들의 현수막이 도심 곳곳에 걸려 있다. 방송에서는 TV 토론이 이어지고 사람들은 각 후보자에 대한 평가와 의견을 쏟아낸다. 후보자들은 자신을 선택해 달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 지도자를 뽑는 일은 유권자에게도 큰 부담과 스트레스를 준다. 겉으로는 “마땅한 후보가 없다”거나 “관심 없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누구나 무책임하게 아무나 뽑을 수는 없다고 느낀다. 그래서 선거가 끝난 후에는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뒤섞인 감정으로 남는다. 이상적으로는 후보의 과거 이력, 공약의 현실성, 주변 인물의 성향, 자신에게 맞는 정책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일상에 쫓기는 시민이 모든 정보를 체계적으로 분석해 판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당적, 지역 연고, 선거홍보물의 인상 정도로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선거운동 과정을 통해 지도자의 면모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 뚜렷한 정답은 없지만 적어도 어떤 정치적 태도를 지닌 사람인지는 유추해볼 수 있다. 바로 1차원적 정치를 하는 사람인지, 2차원적 정치를 하는 사람인지를 구별하는 것이다. 1차원적 정치활동은 주로 자신을 과대포장하거나 경쟁자를 공격하는 데 초점을 둔다. 이들은 “나는 경험이 풍부하고 내 공약이 가장 현실적”이라며 자신이 더 낫다는 것을 강조한다. 상대를 끌어내리는 전략을 통해 자신이 돋보이길 원하며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려 한다. 이는 ‘선거는 전쟁’이라는 논리에 따라 자신이 더 유능하다는 인식을 유권자에게 심으려는 접근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스타일은 단기적 승리를 위한 전략일 뿐 장기적 국가 비전을 수립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경쟁자보다 우월해 보이는 것에 집중하다 보면 국민의 삶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전략이나 실천력은 뒷전으로 밀리기 쉽다. 반면 2차원적 정치를 하는 인물은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국민의 질문에 귀 기울이고 공동의 목적을 탐색한다. 그는 “우리 사회의 가장 절박한 과제는 무엇인가”, “국민이 바라는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 같은 질문을 던지며 소통을 통해 해답을 찾으려 한다. 단순한 승부보다 비전과 방향을 중시하고 정책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을 설득하려 한다. 경쟁자와의 갈등보다는 다양한 관점을 통합하려 노력하며 공동체적 가치와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오늘날 우리가 선택해야 할 지도자는 바로 이러한 2차원적 정치를 실천하는 인물이다. 국가의 최고 지도자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자리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변화와 성장의 책임을 짊어지는 자리다. 경쟁자를 이기기 위한 선거운동에만 몰두하고 자신의 이미지를 포장하는 인물에게서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기 어렵다.
- 청송 김송배 시인을 보내고 - 고향 합천이 그리우면 하동 참게가리장 먹으로 가자던 걸음으로 산천이 초록으로 물들고 동네의 고샅길에는 눈물 젖은 붉은 장미꽃이 輓章 같이 주렁주렁 오월 초 엿새 흙에서 온 육신은 흙으로 영혼은 본향으로 온돌 아랫목 같은 깊은 마음 따뜻한 손을 어찌 단번에 놓고 가시고는 이제는 내 안에 오시어 여생을 함께 한 사흘 흘린 눈물이 화개천으로 청량하게 흐르는 지리산자락 하동 진목 *미강재 건넛산에 사철 짙푸른 한그루 *聽松으로 보고프면 서재에 가서 靑松을 마주 담소하리이다. 정순영 시인 경남 하동 출생. 시집 ‘침묵보다 더 낮은 목소리’, ‘조선 징소리’, ‘사랑’ 외 7권. 부산시인협회장, 한국자유문인협회장, 동명대 총장, 세종대 석좌교수 등 역임. 부산문학상, 한국시학상, 세종문화예술대상, 한국문예대상 외 다수 수상 *聽松 : 김송배 시인(1943~2025) 아호. *未江齋 : 정순영 시인 서재 이름.
섬말나리의 꽃말은 ‘더 이상 고귀할 수 없다’다. 울릉도에 가면 ‘나리분지’가 있는데 오래전에 그곳 사람들이 섬말나리의 비늘 줄기를 구황식물로 이용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섬말나리는 일반 나리와는 다른 독특한 꽃색을 지니고 있어 유난히 아름다우며 신품종을 만드는 유전자원으로 중요한 소재다. 다른 나리보다 개화 기간이 길어 관상가치가 더하다. 울릉도에서 자생하는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종자번식이 잘되지만 씨앗을 뿌리면 참나리처럼 3년은 지나야 꽃이 핀다. 음지에서 견디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 정원에 심을 때는 그늘을 만들 수 있는 나무 밑에 심어 해가림을 해줘야 한다. 농촌진흥원 국립원예특작과학원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정신은 농심으로 근면 자주 협동이었다. 농심은 땅의 척박함과 품종을 탓하지 않는다. 덜 좋은 씨앗도 정성을 기울이면 싹이 나고 척박한 토양도 농심으로 가꾸다 보면 옥토가 된다. 한국은 제1, 2, 3차 산업혁명을 한 세대 만에 성공적으로 끝내고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접어들었으며 그 중심에 인공지능(AI)이 있다. 이 시대에는 농심에다 기업심을 융합해야 하는 기업가정신이 천하지대본이다. 개인소득의 결정 요인은 자본, 노동, 능력, 기업가정신, 출신 배경 등이지만 분배 관련 논의에서 기업가정신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방해하는 치명적인 오류다. 기업가정신과 경쟁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원동력이기 때문에 이 원동력을 무시하고 분배 논리를 주장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오해를 불러와 반자본주의 정서를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기업가정신이란 번영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핵심이나 그 단어가 쓰이는 구체적인 문맥은 다양하다. 종종 위험부담자나 지도자의 임무조항, 개혁가나 창업가의 혁신, 경제발전의 수단 혹은 부의 불공평한 분배 요인을 의미한다. 경영대학에서는 새 사업을 시작하는 창업과 같은 의미다. 기업가정신은 본질적으로 이윤 창출 기회의 발견과 개척을 통해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며 자본주의의 청량제 역할을 한다. 첫째, 반드시 혁신적이다. 다른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것에서는 기업이윤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경제적 이윤을 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도입해야 한다. 둘째, 창조적이어야 한다. 이윤은 재화를 좀 더 가치 있게 쓰는 과정에서 발생하고 부를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셋째, 더 생산적이 되는 학습 과정이다. 기업가는 혁신을 통해 부를 창조하는 방법을 배우기 때문에 늘 학습하는 중이다. 혁신, 창조, 학습의 기업가정신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물을 주어진 대로만 볼 게 아니라 열린 견해로 봐야 사물의 다양한 용도와 가치를 발견하고 학습할 수 있다. 한 사물의 경제적 중요성은 시간과 각자의 지식 수준에 따라 사람마다 다른 가치를 가질 수 있다. 사물의 가치는 그것의 값진 용도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금전적 가치가 크지만 그 유용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치가 거의 없다. 예를 들면 19세기에 다이아몬드 원석은 아프리카 원주민에게는 장난감이었지만 영국의 탐험가에게는 고가의 보석이었다. 19세기 말까지 중동지방에서는 땅에서 솟아 나오는 흑갈색의 액체를 구역질 나는 백해무익한 것으로 여겼으나 내연기관의 연료로 가공될 수 있다는 것을 안 미국인은 ‘검은 황금’으로 봤다. 천지에 흔한 모래 규소는 정보기기에 꼭 필요한 실리콘 웨이퍼로 가공된다. 기업가정신은 어떤 것이 통상 생각하는 것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는 용도를 갖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기업가의 이윤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는 용도를 발견하는 것에 대한 보상이고 발견된 가치에 대한 정당한 요구다. 모두가 기업가정신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서 각자는 최선을 다해 최선의 결과를 얻으려고 노력하며 더 좋은 방법을 발견할 때마다 그 발견을 이용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업가정신이라는 용어는 대부분 기업이라는 조직을 통해 상당한 경제적 이윤의 기회를 발견하고 부를 창출해 많은 사람이 혜택을 얻어 다른 사람들이 따라 하게 되는 경우를 일컫는다. 기업가가 새로운 부를 창출할 기회를 발견한다는 것은 상황에 대한 개인적 인식과 역량의 문제로 객관적 확실성이 희박하다. 그 기회가 새로운 부를 창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성공 여부는 그것을 실행해 보기 전에는 아무도 올바르게 예측할 수 없다. 기업가적 기회의 발견은 종종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 우연히 있게 된 누군가에 의해 갑자기 이뤄지기 때문에 우발적이다. 기업의 역사를 보면 새로운 부의 창출 기회 발견에 대한 공통적인 결정 요인은 없다. 아무도 누가 성공한 기업가일지, 어떤 종류의 혁신이 어떤 분야에서 만들어질지 예측할 수 없고 따라서 계획할 수도 없다. 최선의 방법은 시장에서 모두가 최상의 역량으로 기업가정신을 발휘해 각자의 발상을 시도하도록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실패할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은 시도하기를 주저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성공적으로 혁신할 것이고 그 성공은 차례차례 넓게 모방될 것이다. 이것이 자유경쟁 시장체제의 진정한 이점이다. 즉, 각자의 발상을 기꺼이 역량을 다해 자유롭게 끊임없이 시도하고 실험해 봄으로써 그 결과로부터 혜택을 보거나 고통을 받는 경쟁을 통해 증명된 승자를 선택하는 것이 자유시장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경쟁 시장체제에서 기업혁신과 경제발전이 어떤 다른 형태의 경제체제보다 더 빠르고 더 활발한 이유다.
제21대 대통령선거에서 노동 관련 공약이 자못 주목을 받고 있다. 노동시간 단축이냐, 노동시간 유연화냐 하는 노동시간 문제부터 정년 연장 문제, 산업재해에 대한 기업주 처벌을 강화하는 문제, 최저임금을 지역이나 국적에 따라 차등 지급하는 문제 등에 대해 이른바 진보와 보수 진영 후보자가 내건 공약은 선명하게 대립한다. 대체로 진보 진영 후보는 노동자의 각종 권익을 보호, 강화하려 하며 보수 진영 후보는 기업의 경영 여건을 개선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이 같은 노동정책의 대립에는 그 심층에 노동의 의미에 관한 상당히 다른 견해 또한 있는 듯하다. 사람은 왜 일을 할까. 이 물음에 누구든 우선은 ‘먹고살기 위해서’, 그다음으로는 ‘좀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람은 생존의 욕구와 더 나은 삶의 갖가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일을 한다. 그러나 이 단순해 보이는 욕구나 욕망을 채우는 일이 인류 역사에서는 결코 간단했던 적이 없다. 생존 여건이 가장 녹록지 않았던 원시사회에서 채집을 위주로 살던 인류의 조상들은 역설적으로 열매를 따 먹는 평범한 일상에서 한없는 감사와 황홀함을 느꼈고 사회적 관계도 상당히 평등했다. 그러다 한곳에 정착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인간에게 노동은 축복과 고통이 함께하는 일이 됐다. 생활의 안정을 보장하는 부가 축적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축복이었지만 더 많은 수확은 얻기 위해 그리고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자연 및 이웃과 싸우는 과정은 고투였다. 그리고 근대 이후 더 많은 향유와 전면적인 지배를 위해 자연과 사회를 통제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더욱 노골화했다. 그 결과 21세기 인류는 이제 갖가지 지성적인 작업도 함께해주는 훌륭한 비서인 챗GPT를 얻기에 이르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 생태계의 질서를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하고 말았다. 인류 노동의 역사를 이같이 스케치해 얻는 한 가지 새로운 생각의 실마리는 오늘날 진보 진영은 노동의 고통과 재앙에 주목하고 있는 데 반해 보수 진영은 노동이 가져다준 축복의 측면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노동 방법의 발전, 즉 기술의 혁신은 인간사회에 물질적 풍요와 육체적 편의를 가져다줬다. 그렇지만 기술 발전과 노동의 효과적 조직화에 대해 지나치게 긍정하고 집착하는 사람들은 사실 재앙 수준의 기후 위기, 생물 다양성 고갈의 문제나 지나친 경쟁으로 심신이 극도로 피폐해진 사람들의 건강한 삶에 대해서는 사실상 크게 관심이 없고 근본적 해결책도 없다. 사람은 살면서 누구든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삶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노동이 행복한 노동이 돼야 하는 이유는 매우 분명하다. 물론 이 일은 쉽지 않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제까지의 노동은 축복과 고통이 교차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노동이 좀 더 즐거운 노동이 되려면 이제까지 노동이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웠던 측면을 개선하는 데 힘쓰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예컨대 첨단 기술이 이윤의 극대화가 아니라 자연 생태계와 노동하는 사람들의 건강을 세심하게 도덕적으로 고려하는 쪽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