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교회, 올해 연이어 단독성전 설립

지난해 국내에만 약 30개의 단독 성전을 새로 설립한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총회장 김주철 목사)가 올해 들어 연달아 새 성전을 마련하며 복음 전파에 앞장서고 있다. 하나님의 교회에 따르면 지난 1월 대전정림교회를 시작으로 2월에는 안양동안교회, 대구반야월교회와 경산교회, 사천교회를 설립하고 헌당기념예배를 가졌다. 그리고 서울시 노원구와 경기도 남양주시에 또다시 단독 성전을 마련하고 지난달 26일 헌당기념예배를 가졌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새로 세워진 남양주진접 하나님의 교회는 대지면적 926㎡, 연면적 1,826㎡에 총 6층 규모다. 450석 규모의 대예배실을 비롯해 소예배실, 식당, 교육실, 사무실, 다목적 홀 등이 잘 구비돼 있다. 같은 날 헌당기념예배를 가진 서울노원 하나님의 교회는 노원구 상계동 수락산 인근에 세워졌다. 연면적 1,136㎡에 지하 1층ㆍ지상 4층 규모로 3층과 4층에 350석 규모의 대예배실이 자리한다. 성도들의 성경공부와 모임이 가능한 소예배실과 교육실, 사무실, 식당, 시청각실 등이 잘 마련돼 있다. 헌당기념예배를 집전한 총회장 김주철 목사는 하나님의 DNA라는 설교를 통해 지상에 수많은 교회가 있고 하늘나라와 구원을 동경하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하나님만의 DNA인 영생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전했다. 또한 김주철 목사는 하나님께서 성전을 세워주신 것은 영생과 구원을 주시는 어머니 하나님을 알려 인류를 구원과 행복으로 인도하게 하기 위함이라며 어머니 하나님을 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찾아오는 영혼의 보금자리와 복음의 전당으로의 사명을 다해 달라고 부탁했다. 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

수원기독교총연합회, 수원시 지도자를 위한 조찬기도회 개최

120만 수원시 복음화와 균형발전을 위해 수원 정관계 지도자들과 목회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조찬기도회를 가졌다. 수원시기독교총연합회(회장 김철한 수원오목천감리교회 목사)는 지난 1일 오전 7시 수원 인계동 호텔리츠에서 수원시 지도자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개최했다. 이날 조찬 기도회에는 염태영 수원시장, 고희선 새누리당 경기도당위원장, 남경필 국회의원, 안혜영 경기도의원, 민한기 수원시의회 부의장, 염상훈 수원시의원, 강성채 수원남부경찰서장 경무관, 김성용 수원중부경찰서장, 서정달 경기도기독교총연합회 총회장과 유명재, 이재창, 이관호 목사 등 수원 관내 31개 임역원, 목사 200여 명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반종원 목사 사회로 진행된 이날 조찬기도회에서 김봉태 목사(영원장로교회)는 설교 말씀을 통해 역사의 열쇠를 가지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며 봉사하며 어려운 이웃을 돌봄으로써 칭찬받은 수원교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강조했다. 이어 진행된 공동기도 시간에서 최승균 목사(수원성감리교회)는 국가와 대통령을 위해, 유만석 목사(수원명성장로교회)가 수원시 지도자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이규왕 목사(수원제일장로교회)가 수원시 복음화와 구제역 방지를 위해 각각 기도했으며 고흥식 목사(영통영락침례교회)와 같이 합심기도를 했다. 김철한 회장은 환영사에서 수원시기독교총연합회는 당에 구분없이 지역을 위해 노력하고 주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당과 정치인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것이라며 무엇보다 본질에 충실한 교회가 주님이 원하는 참된 모습이라고 생각함으로 본질에 충실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수원시기독교총연합회는 올 한해 동안 ▲3ㆍ1절 나라사랑기도회 ▲부활절 연합예배 ▲개척교회 목회자 위로회 ▲제15회 선교대상 시상식 ▲제12회 목회자 축구대회 ▲국가유공자 위로회 등 다양한 사업 등을 통해 수원교회 발전과 복음화를 위해 진력질주 할 계획이다. 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

[문화원에서 놀자]<26>수원문화원 '정조대왕 능행차길 체험순례'

을묘년(1795년), 조선의 성군 정조대왕은 길을 나섰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찾아가는 참배길이자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을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 행궁에서 열기 위한 효의 순례길이었다.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1789년에 수원부 화산(현 화성군 태안읍)으로 옮긴 후, 지금의 서울 창덕궁에서 경기 화성시 융건릉까지 을묘년을 포함해 13차례나 무던히 이 땅을 밟았다. 시간이 흘러 효심을 바탕으로 백성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나라의 융성을 꾀했던 으리으리한 정조대왕 능행차는 사라졌다. 길 위에는 낮은 기와집과 초가집 대신 높은 빌딩과 아파트가 들어섰다. 이처럼 역사책 기록으로 박제된 이 길을 다시 걷는 이들이 있다. 수원문화원이 주관하는 정조대왕 능행차길 체험순례단이 주인공이다. ■ 지식과 감성, 두 마리 토끼 잡는 체험순례 올해로 10회째 열리는 정조대왕 능행차길 체험순례는 매년 5월말께 참가 희망자를 접수 받아 6월초 최종 선발, 7월 중 진행된다. 전국의 초중고 학생으로 구성된 체험순례단은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러 가던 길인 창덕궁에서 융릉까지의 62.2Km를 3박4일 일정으로 걷고 또 걷는다. 단순히 수 백년 전 국가적 행사였던 능행차를 재현하는 이벤트가 아니다. 정조대왕 재위 기간의 그 위업과 치적을 되짚어가며 역사와 효심을 한 걸음씩 밟으며 꼭꼭 새기는 장이다. 특히 순례에는 전문가가 동행해 길 위에서 마주하는 유물과 유적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살아있는 역사책을 읽는 것과 마찬가지다. 전국에 산재한 국토대장정과 차별화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체험순례단으로 모인 성장기 청소년이 낯선 이들과 공존과 상생을 함께 깨우칠 수 있도록 다양한 놀이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조선시대 정조대왕 능행차도 그러했겠지만, 청소년들이 뙤약볕 아래 62.2Km를 걷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전국의 많은 청소년과 학부모들이 의미있는 체험순례단에 지원해 탈락자들이 항의할 만큼 높은 경쟁률을 기록하지만, 실제로 일정이 시작되면 괜히 지원했다고 하소연하는 참가자도 여럿이다. 지구 환경오염으로 빨리 그리고 강하게 찾아오는 여름 더위가 가장 큰 장애물이다. 최근 몇 년간 체험 순례가 진행되는 7월이면 한여름을 방불케하는 무더위에 갑자기 쏟아지는 비까지 겹쳐, 순례단의 체력은 물론 정신력마저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에 순례 일정 첫날에 진행되는 서울구간은 다른 도시보다 복잡한 도로사정과 많은 교통량에 체험 순례단의 안전확보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다. 이때 문화원 측 인솔자와 전문가, 경찰, 자원봉사자 등 많은 이들이 총동원된다. 이처럼 힘든데 10년이나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가. 단연 역사를 배우면서 효심과 극기를 키우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세부 일정이 그 근원이다. 주인군 수원문화원 사무국장은 전국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문화원 주관 행사 중 가장 큰 프로그램으로 참가자들이 우리역사와 문화를 스스로 배우고 느끼는 한편 세계문화유산이 있는 도시 수원을 알릴 기회로 그 의미가 깊다며 10주년을 맞은 올해에는 순례단 규모를 확대하고 순례 일정에 다채로운 이벤트를 추가로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걸으며 배우는 생생한 역사책 짧다면 짧은, 그러나 그 시간의 수백 수천에 달하는 가치를 얻을 수 있는 일정을 들여다보자. 체험 순례 첫날에는 이른 아침 7시쯤 서울 창덕궁 앞에서 모인다. 매년 잠기운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아이들이 억지스레 내달리고 부모와 참가 학생이 대화를 나누며 지하철 안국역 계단을 오르는 다정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출단식을 알리는 현수막이 창덕궁 돈화문에 걸리고 순례단원들은 청룡ㆍ백호ㆍ주작ㆍ현무ㆍ황룡ㆍ봉황 등 6개팀으로 각각 나뉘어 줄을 선다. 이들은 정조대왕이 주로 지낸 궁궐이자 을묘년 능행차 출발지였던 창덕궁을 돌며 본격적인 체험 순례에 돌입한다. 수원문화원장의 출발 선언에 기수단 깃발을 선두로 한 순례단이 발걸음을 떼면 부모들은 걱정과 기대감으로 박수치며 자식을 떠나 보낸다. 이렇게 시작한 순례단의 첫날은 광화문에서 수문장 교대의식을 관람하고 경복궁, 덕수궁, 삼각지, 노량행궁, 남사초교, 과천초교로 이어진다. 순례단은 이 길을 걸으며 보고 듣는다. 경복궁 동남쪽 모서리에 설치한 망루였으나 일제에 의해 담장을 잃고 섬처럼 도로 한 가운데 떨어져 있는 동십자각(東十字閣), 구중궁궐(九重宮闕)의 뜻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각 궁궐의 특징, 도심을 관통하는 아름다운 강이지만 능행차때는 장애물이었던 탓에 정약용이 고안한 배다리(배를 줄로 이어 그 위에 널판은 얹은 다리) 등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지금은 건물 하나만 남아있지만 정조대왕이 한강을 건넌 후 잠시 쉬었던 용양봉저정(龍?鳳?亭ㆍ노량행궁)도 오른다. 이후 걷고 또 걸어 숙영지(宿營地ㆍ군대가 병영을 떠나 묵는 장소)인 과천초등학교에서 과천문화원과 수원박물관 측에서 준비한 역사 교육을 들으며 하루를 정리한다. 남은 일정도 알차다.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다. 하지만 함께하는 시간만큼 순례다은 서로 다독이며 서로 밀고 끌어주며 성장한다. 둘째날의 첫 행선지는 정조대왕이 과천을 지날 때 들러 쉬던 객사 성격의 과천행궁이다. 이어 조선시대 지방에 설치한 국립 교육기관인 과천향교에서 전통 예법을 익히고, 갈현삼거리에서 인덕원사거리까지 한 폭의 산수화 속 주인공인 듯 경치를 감상하며 걷는다. 사근행궁 자리에 위치한 고천동사무소에서 허기를 달랜다. 동사무소장은 터만 남아있지만 곧 복원 예정인 사근행궁을 설명하며 간식을 제공한다. 수원을 향해 발길을 재촉, 비탈길이어서 한 발자국 떼기도 힘겨운 지지대고개에 오르면 드디어 푸른 소나무가 도로 좌우에 늘어서 있는 노송지대를 마주한다. 이 길 끝에서 만난 둘째날의 숙영지 대평초등학교에 도착하면 지친 순례단원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환호성이 터져나온다고. 늦은 밤, 순례단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틀간의 고생한 기억을 떠올리고 그동안 편안했던 일상을 만들어 준 부모님에게 감사 편지를 쓴다. 정조대왕이 보여준 효심이 손편지를 쓰는 고사리손에서 한 그득 영그는 아름다운 시간이다. 죽음의 이틀을 보낸 순례단에게 나머지 일정은 누워서 떡 먹기다. 정조대왕이 농사를 위해 축조한 후 쌀을 만석 이상 생산해 이름 붙은 저수지 만석거, 취타대의 힘찬 환영 연주를 들으며 당당하게 걸으며 관람하는 세계문화유산 화성, 화성행궁과 수원화성박물관, 수원 향교, 용주사와 융릉 등이 남은 일정을 장식하는 관람지다. 이 같은 알찬 역사 교육에 신나는 수영장과 한 여름 밤 수원양궁장에서 펼쳐지는 캠프파이어로 색다른 재미를 더한다. 나흘 동안의 순례를 마무리하는 해단식에서 순례기를 반납하고 인증서를 수여받는 순례단의 얼굴에는 해냈다는 뿌듯함과 배웠다는 자부심이 만개한다. 노현호 수원문화원 주임은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아이들을 바라볼 때 드디어 문화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는 보람을 느낄 수 있다며 특히 수원문화원의 능행차 체험순례는 서울에서 화성까지의 각 지역 문화원과 전문가 등이 힘을 합쳐 만드는 것으로 우리나라 대표 문화원 프로그램으로 꼽을 만 하다고 밝혔다. 류설아기자 rsa119@kyeonggi.com

하나님의 교회 학생들, 월미도서 거리정화활동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총회장 김주철 목사)의 청소년들이 추운 겨울에도 다양한 봉사활동을 벌여 눈길을 끈다. 우선 인천낙섬 지역 150여 명의 학생이 지난 20일 한겨울 쌀쌀한 바닷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월미도 정화활동에 나섰다. 이날 학생들은 월미도에서 가장 유명한 문화의 거리를 중심으로 카페와 음식점이 줄지어 선 인근 상가와 주택가를 청소했다. 또 관광객들 사이를 오가며 거리에 버려진 담배꽁초와 비닐봉지, 현수막 등의 쓰레기를 말끔하게 청소했다. 박한별양은 예전에 가족들과 왔을 때는 이런 것들이 보이지 않았는데 청소를 하다 보니 뜻밖에 쓰레기가 많아 놀랐다며 아름다운 바다를 구경할 수 있는 장소인 만큼 서로 아끼고 가꾸는 마음도 가져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인천낙섬 하나님의 교회 표기상 목사는 청소년기에는 학과공부도 중요하지만, 배려와 사랑, 협동심과 자주성 등을 습득할 수 있는 인성교육도 꼭 필요하다며 학생들의 활동 취지를 설명했다. 이에 앞서 지난 18일 용인 신갈 지역 학생부 20여 명은 무지개너싱홈 노인전문요양원(용인시 기흥구 보정동)에 방문해 위문공연을 펼쳤다. 전자피아노와 바이올린, 기타 등의 협연으로 곡을 연주하고 콩트 토끼와 거북이를 공연하는 등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했다. 직접 만든 음식을 전달하고 어르신들의 발을 직접 씻겨 드리며 훈훈함을 더했다. 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

[문화원에서 놀자]<25>여주문화원 '명성황후 숭모제'

명성황후(1851~1895)는 조선시대사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독특한 행보를 보여준 왕비였다. 열여섯 살 소녀 민자영이 조선의 왕비가 되어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결국 일본인들에게 비참하게 시해되기까지의 일대기 그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통한의 역사 속에서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명성황후를 통해 조선 말의 혼란했던 역사적 상황과 대한민국 근대사의 아픔을 엿볼 수 있어 그녀는 아직도 각종 드라마와 영화, 뮤지컬 그리고 책 등 다양한 장르의 주인공으로 사랑받고 있다. 명성황후의 고향, 경기도 여주에선 그녀를 비극적인 국모가 아닌 대한민국 여장부로서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자 2012년 생일잔치를 성대하게 치렀다. ■영리하고 재기발랄했던 소녀, 조선의 국모가 되다 명성황후는 여흥 민씨로 1851년(철종2) 음력 9월 25일 여주군 근동면 섬락리(지금의 여주읍 능현리 250-2)에서 태어났다. 8살에 아버지 민치록을 여읜 이후 명성황후는 어머니와 함께 여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와 운현궁 앞 여흥 민씨 종가 내 감고당에 머물렀다. 조선시대에 대를 이을 사내아이가 없는 집안은 이미 몰락을 예정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12촌인 민승호가 양자로 들어와 집안의 제사를 맡기는 했지만, 사실상 명성황후는 어머니와 단둘이 외로운 성장기를 보냈다. 명성황후는 어린 시절, 영리하고 재기발랄 함으로 인해 인근의 칭찬이 높았다. 그때 당시 철종이 창덕궁에서 승하하고 닷새 뒤 흥선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9)의 둘째아들 명복이 조선 제26대 임금으로 즉위하니 이가 곧 고종이다. 흥선군은 실권을 장악하고 고종의 왕비 책립문제를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총명하기는하나 주변에 힘이 되어줄 사람이 없어 자신의 집권에 방해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명성황후를 조선의 국모로 삼았다. 1866년(고종3) 3월 7일 민치록의 딸 명성황후를 고종의 왕비로 맞아들인다는 조칙이 반포되었고, 3월 9일 납채례(納采禮ㆍ청혼서를 보내는 의례), 3월 11일 납징례(納徵禮ㆍ혼수를 보내는 의례), 3월 17일 고기례(告期禮ㆍ신부 집에 혼인 날짜를 알리는 의례 ), 3월 20일 책비례(冊妃禮ㆍ왕비를 책봉하는 의례)에 이어 21일 별궁에서 친영례(親迎禮ㆍ신랑이 신부집에서 신부를 맞이하는 의식), 22일 인정전에서 문무백관의 하례속에 상견례(相見禮)가 거행됐다. 이때 명성황후 나이 만 14세 6월, 비운의 명성황후의 국모로서의 삶은 이렇게 시작됐던 것이다. ■ 우리 역사상 가장 큰 비극명성황후 시해사건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된 명성황후는 삶은 녹록지 않았다. 남편 고종에겐 이미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고 시아버지 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명성황후는 아들을 두 명이나 낳았지만 모두 요절하고 말았다. 명성황후와 대원군은 며느리와 시아버지이기 전에 조선의 독립과 부국강병을 누구보다 갈망했다. 대원군은 쇄국정책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해 보수세력에 의한 부국강병을 추구하려 했다. 반면 명성황후는 친일본으로 대표되던 개혁세력을 바탕으로 근대화를 시도했다. 그래서 정치적 갈등이 심했다. 1895년 음력 8월 20일 새벽, 경복궁 안에 있는 건청궁의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는 난입해 들어온 일본 낭인들의 손에 처참하게 시해당했다. 시신마저 향원정의 녹원에서 불살라지는 수모를 당했다. 이것이 바로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이다. 이 을미사변을 지휘한 것은 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였다.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은 우리 역사상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였다. 국내에서는 일본에 왕비 살해의 원한을 갚자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을미의병이 일어났고 국제적으로는 일본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드높아졌다. 시아버지였던 대원군은 이 틈에 잠시 정권을 되찾는 듯했지만, 고종이 이미 아버지마저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러시아 공관에 안전을 의탁하는 아관파천을 행함으로써 곧 실각했다.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으로 인해 조선은 국격을 훼손당하고 망국으로 가는 길을 한발 더 내딛게 됐다. 명성황후는 시해 직후 대원군에 의해 폐위돼 서인으로 강등됐다가 같은 해 고종에 의해 복호됐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황후로 추봉됐다. 장례는 죽은 지 2년 만인 1897년에 가서야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홍릉에 안장됐다. ■ 탄신 제161주년 기념 명성황후 숭모제 거행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살해 직후부터 지금까지도 엇갈린다. 그녀가 망국의 왕비로서 나라를 망치게 한 장본인이라는 평가부터 구국을 위해 몸을 바친 시대의 여걸이었다는 평가까지 극단적이고 다양하다. 이것은 아마도 19세기 말 시대적 혼란 상황 속에서 그녀가 보여준 정국운영의 다양한 면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낭인들조차도 그녀를 동양의 호걸, 여장부로 평가했다. 명성황후는 총명하고 정치에 적극적이었고, 시대를 앞선 매우 현대적인 자존감을 가진 여인이었다. 이러한 점을 높이 평가해 여주문화원은(원장 김문영) 2012년 11월 17일 오전 10시30분부터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에 있는 명성황후의 생가(경기유형문화재 제46호)에서 명성황후의 탄신 161년을 기념해 숭모제가 거행됐다. 종전에는 매년 10월 추모제를 열던 것을 지난 2011년부터 여주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낸 것을 경축하고자 숭모제로 전환했다. 사전행사로 취타대사물놀이 공연과 함께 예조판서 행렬이 등장해 황후 탄생을 경축했고 여주향교유림회와 전주 이씨 종친회의 집례로 헌작례를 올렸다. 공식행사는 김춘석 여주군수를 비롯한 참석자들의 헌화와 분향, 기념사, 축사, 축시낭독 순으로 진행됐다. 이번 행사에서 눈길을 끌었던 대목은 왕비 간택례로, 고종의 후손인 이석이 왕 역할을 했고 왕후, 상궁, 사대부가 규수(처녀) 등이 함께하며 왕비 간택 의례를 생생하게 재현해 냈다. 또한 헌작례는 향교 유림회와 전주이씨 종친회에서 집례하고 김춘석 여주군수가 초헌관으로, 아헌관은 이우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산북면 분회장이, 종헌관에는 민병진 여흥민씨 종중삼방파 종중회 이사장이 맡아 진행했고 성우 박일씨가 홀기마다 설명과 해설을 들려줌으로써 행사의 전문성을 살리고 참가자들의 이해를 높였다. 이처럼 여주문화원은 명성황후 숭모제를 통해 우리 역사의 한 시대를 장식했던 명성황후의 넋을 위로하고 왜곡된 명성황후의 인식을 바로잡고 업적을 재조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글_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

[문화원에서 놀자]<24>김포문화원 ‘중봉문화제’

한국의 역사문화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한 국제전쟁이었던 임진왜란(壬辰倭亂)이 2012년 일어난 지 420년을 맞았다. 많은 이들이 임진왜란하면 이순신 장군을 기억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중 투철한 조국애와 뛰어난 전략으로, 나라와 민족을 왜적으로부터 방어하고 격퇴함으로써 한국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인물의 한사람으로 역사에 남겨졌다. 이에 반해 중봉 조헌(趙憲, 1544 ~1592년) 선생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그는 임진왜란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격퇴하는 등 나라사랑의 모범이 되고 겨레의 사표가 된 인물이다. 중봉은 사생취의의 정신으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투쟁하다 8월18일 금산전투에서 700명의 의사와 함께 순절한 인물이다. 중봉 조헌 선생이태어난 경기도 김포에선 그의 애국애족 정신과 용감한 살신성인 정신을 기리기 위해 중봉문화제를 개최해오고 있다. 김포시민들이 지역의 사표(師表)로 중봉 선생의 삶과 사상을 고구(考究)하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조선왕조 최대 사건 임진왜란을 예언한 조선 중기 문신 중봉 조선 왕조 최대의 사건으로 통하는 임진왜란은 누구나 알다시피 1592년(선조 25년)부터 1598년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왜군들이 조선 땅을 짓밟은 사건이다. 7년간 지속한 전쟁은 조선, 일본, 명나라 3국의 군사 100만 명이 동원됐다. 이처럼 임진왜란은 한반도 전쟁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국제적 사건이자 일본세력이 성장하는 계기가 된 첫 사례로서 중국 중심의 전통적 체제를 뒤흔들어 놓은 사건이었다. 조선 16세기 후반 정치사회적 혼란이 가속화되고 일본의 조선침략이 가시화되는 시기였다. 그러나 국제정세에 어두워 일본의 동향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봉은 일본의 침략을 예언하고 있었다. 중봉은 46세(1589년) 4월에 올린「논시폐소(論時弊疏)」에서 과도한 세금과 부역과 그리고 지나친 형옥(刑獄)으로 인해 당시 민생의 곤궁함과 국가 운명이 기울어지는 위급한 상황에 대해 수많은 백성들을 밑이 뚫린 배에 태워 출항하였다가 바다 한 가운데 풍파를 만나 행방을 잃은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만약 특단의 조치를 마련하지 못하면 내란과 외침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나라와 백성을 위한 단기ㆍ장기 대책을 제시했다. 임진왜란이라는 대 참변을 겪은 후에야 사람들은 중봉 선생의 선견지명과 예지를 뒤늦게 깨달았다고 한다. ■ 남다른 혜안과 굳건한 의기로 겨레의 사표가 된 인물 중봉은 고려말 홍건적을 격파하고 전사한 천주의 후손으로 1544년 김포 감정리에서 태어났다. 김황에게 수학하고 성균관에 유학했으며 24세 때 과거에 급제한 이래 정주, 파주, 홍주목의 교수와 교서관의 저작, 박사를 거쳐 예조좌랑, 통진현감, 공조좌랑, 전라도사, 종묘서령, 보은 현감 등을 역임했다. 토정 이지함, 우계 성혼, 율곡 이이에게 수학했으며 특히 율곡의 학덕을 배우고 기린다는 뜻으로 후율(後栗)이라 자호했다. 16세기 조선사회에 대한 현실 인식과 실천적 학문관을 토대로 정치ㆍ교육ㆍ경제ㆍ군사에 관한 근본적인 개혁론을 제시했으며 철저한 민생 안정을 주장했다. 왜적의 침입을 예견하고 대비할 방책을 거듭 상소했으며 그의 예측대로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충청도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충청도 공략 본거지를 탈환하는 전과를 거뒀으나 의주로 북상하기 전 왜군에게 함락당한 금산 공격을 강행하다 순국했다. 700여명의 의병과 함께 말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다 순절한 의병장은 많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중봉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봉 선생의 의병활동은 그의 사상이 학문적 체계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현실 참여를 통한 실천성의 발휘였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봉은 정암 조광조로부터 내려오는 조선의 도학정신이 퇴계 이황을 거쳐 율곡 이이에게 계승되었음을 강조하고 이 도학정신의 계승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도학과 절의를 겸비한 중봉의 학문 정신은 대대로 민족을 수호하는 원동력으로서 크게 구실해 왔다. 그러나 한국사상사에서 조헌이 차지하는 위상에 비해 그에 대한 연구는 그다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중봉 선생의 태가 묻힌 김포에서 아직까지 중봉 선생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김포에는 조헌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의 유학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지은 교육기관으로 우저서원(牛渚書院)이 소재하고 있다. 해마다 봄 2월 중정일(中丁日)과 조헌의 기일인 음력 8월 18일에 향사(享祀)를 지낸다. ■ 중봉의 숨결, 우리 곁으로2012 중봉문화제 성료 중봉 조헌의 위업을 기리기 위한 2012 중봉문화제가 지난 5월 30일부터 31일까지 양일간 김포 사우문화체육광장에서 열렸다. 기존 중봉문화예술제가 인물 소재의 축제와 예술제가 혼재돼 축제의 정체성 구현이 어렵다는 의견에 따라 2012년부터는 상반기는 중봉문화제, 하반기 김포예술제로 분리돼 개최했다. 중봉의 숨결 우리 곁으로라는 주제로 중봉 선생의 숭고한 업적을 이어받아 희망을 가슴에 안고, 전통과 현재, 미래의 소통을 통해 김포의 얼을 재형상하기 위해 김포문화원 주관으로 내실 있게 진행됐다. 축제 첫날인 2012년 5월 30일 오전 우저서원의 고유제를 시작으로 오후 3시 사우문화체육광장에서 개막식, 임진왜란 420년 역사 속에 조헌선생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 중봉의 얼에 주안점을 둔 경연 형식의 5월 문화행사(사생, 백일장, 사진, 휘호)가 청소년들의 참여 속에 진행됐다. 이어 31일에는 풍물공연, 오카리나 연주, 품바공연, 한국무용 회상 등이 열렸고 오후 4시 폐막식으로 마무리됐다. 강보희 김포문화원장은 2012년 중봉문화제는 축제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 중봉문화예술제에서 분리된 중봉 선생의 선양과 문화향유의 장이라며 비록 화려하지는 않지만 민간주도형으로 실시된 새로운 시도인 만큼, 지속 성장할 중봉문화제의 발전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다고 축제의 의미를 부여했다. 글_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

[명진 스님]교육 불균형ㆍ빈부격차 등 해소…우환없는 새 대한민국 불 밝히길

나는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이다. 선거 끝나고 언론 인터뷰를 전혀 하지 않았다. 18대 대선을 앞두고 문 후보를 공개 지지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명진 스님은 본보의 인터뷰 요청에 몇 번이나 사양의 뜻을 표했다. 강원도에 머물고 있는 스님을 찾아가서라도 잠시 뵙겠다고 하자 그제서야 전화인터뷰를 허용했다. 첫 질문부터 다소 당돌하게(?)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에 대해 묻자 스님은 처음부터 그렇게 단독직입적으로 묻는 거야?라며 넉살좋게 웃은 뒤 친절하게 답변해주는 모습을 보였다. Q. 박근혜 당선인이 해야 할 중요한 과제는 A. 내년 경제문제가 상당히 어렵다. 박 당선인의 공약은 복지분야가 많다. 복지분야 다 지킬 것이라고 보지 않지만 이를 위해서도 부자감세를 철회하고 부자증세를 해야 한다. 문 후보가 부자증세 한다고 했다면 좌파라고 반발했을 텐데 박 당선인이 부자증세 한다고 하면 보수언론과 기득권 세력들이 복지분야에 베푼다고 생각해서 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박 당선인이 외국 언론에서는 독재자의 딸이라고 표현했다. 선거 때 뒤틀린 역사문제를 집고 넘어갔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고, 죽어가는 노동자들 문제도 숙제다. 전경련 만나 강력하게 비정규직 문제 등을 주문하고 있는 것 보고 희망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Q. 인수위 인선을 평가하면. A. 윤창중 수석대변인 임명은 실망이다. 박 당선인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대변인이다. 그런 대변인에 극우이며, 별소리 다한 사람을 앉힌 것은 박 당선인의 정책에 대한 상징성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대단히 우려스럽다. 다른 인수위 구성에 있어서는 인사 탕평하겠다고 했지만 대변인은 대단히 실망하고, 극우적이고 자당내에서도 반발이 심한 사람을 앉혀놓은 것에 대해 대단히 우려한다. 인수위원장도 마찬가지다. 김용준 인수위원장은 여러 장애를 딛고 일어서서 자기가 가는 길에서 최고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선대위에 있었던 사람이다. 탕평인사라고 보기 어렵고 자기를 지지했던 사람 중심으로 정책을 펴고 끌고 가겠다는 것으로 생각된다. 김 위원장과 수석대변인 임명한 것 보고, 본인 정책대로 끌고 가겠다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 Q. 박 당선인이 어떻게 국정운영해야 하는지. A. 지금 사람이 죽어가고 있지 않나. 전경련 가서 노동자 해고문제 비정규직 문제 얘기했지만 부에 대한 불평등 때문에 흉악범이 생기고 있다. 경제민주화 필요하지만 교육민주화가 필요하다. 유치원때부터 사교육 시장이 판친다. 중학교고등학교까지 교육에서 사교육의 차등이 생긴다. 사교육 혜택을 못보니까, 신분상승 기회 좌절되니까 학교폭력이 발생하고, 흉악범이 되는 것 아닌가. 사회적 자체 흐름이 그렇게 가고 있다. 교육불균형과 빈부격차에서 오는 우환덩어리다. 투표를 통해 자기가 원하는 정치세력이 돼서 나도 먹고살수 있게 됐다는 희망을 가지면 좋았는 데 그런 희망이 없어졌다. 잘못하면 혁명적 상황도 올 수 있다. 그런 막장을 막기위해서도 부자감세를 다시 원위치해서 더이상 하지 말고 약자와 힘없는 사람을 위한 정치 펼쳐야 올바른 평가를 받는다. 김종인 국민행복위원장 같은 사람 측근에 두고 쓴소리 들으면서 정책을 펴면 희망 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Q. 이명박 정권 5년을 평가하면 A. 나는 혹독하게 평가한다. 2007년 선택도 대한민국 국민의 질이 떨어지는 선택이었다. 부자위한 정책펴고, 환율은 대기업에 유리하게 하고, 서민물가는 상승시키는 대신 월급 안오르게 해서 서민 파탄시켰다. 내곡동(사저부지 매입의혹)은 가족투기 같은 거다. 민관합작 투기 성격을 갖고 있는 거다. 현직 대통령 법을 어긴 것은 말이 안되고, 실정법을 어긴 대통령이다. 박 당선인이 간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처벌할 것은 처벌해야 한다. 4대강 담합비리, 왜 한꺼번에 해야 했는지, 22조를 쏟아부어 왜 해야 했는지, 하나씩 밝혀내고, 4대강 부실수사, 담합비리 밝혀내서 감옥보내야 한다. Q. 문 후보가 패한 이유는. A. 단일화 과정을 매끄럽게 하지 못했다. 아름다운 단일화 못하고 아웅다웅 단일화를 한게 첫번째 원인이라고 본다. 안철수에게 단일화 룰을 맡기겠다고 해놓고 불리한 룰을 가져오니 안받았지 않았나. 그러면 처음에 왜 룰을 맡기겠다고 했나. 나는 그때 문 후보측에 강력하게 받으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나서 토론회에서 (문 후보가) 공격적으로 대하니까 안 후보가 그만둔 것이다. 거기서 진 것이다. Q. 안철수 정치 재개와 신당 창당론에 대해서는 A. 그분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면식이 없다. 문 후보는 당까지 내려가서 몇 번 격려했다. 안철수는 한 번도 본적이 없어 평가하기 어렵지만 단일화 된후 소극적으로 도왔다. 적극적으로 도왔어야 했다. 기대치를 못미쳤다는 느낌이 든다. 신당 창당론에 대해서는 문 후보가 크게 잘 못한 것이 없다고 본다. 문 후보 아니었으면 그만큼 얻지도 못했다. 국회의원직 내놓으라고 하면 안된다. 서로 격려해주고 아픔 상처를 보듬어야 한다. 내년에 보궐선거 있는데 이런 식으로 하면 안된다. 현재 민주당에 희망이 없는데 신당이 생기면 더 어렵다고 본다. 이런식으로 가면 민주당은 영원히 집권 어렵고 신당도 탐탁치 않다. 나는 아직 문재인에 대한 신뢰를 변치 않고 있다. Q. 그러면 민주당은 어떻게 해야하나 A. 대선 패배했다 하더라도 문 후보 중심으로 하나로 뭉쳤어야 했는데 물건너갔다. 좀 지켜봐야 한다. 나는 정치전문가가 아니다. 민주당과 국민연대시민사회단체 안철수 신당 준비하려는 사람들이 모여 새틀을 짜야 한다. 문재인과 박원순안철수가 중심역할을 해야 한다. Q. 5년 후에 집권가능성은 있다고 보나. A. 하기에 달렸지만 지금같은 분열적 작태를 보이면 쉽지 않을 것이다. 다음에 박원순 시장도 강력한 대권후보 아닌가. 박 당선인은 6조 늘려서 복지한다고 하는데 박 시장은 서울시장 이번에은 1조2천억 빚 갚은 것은 대단한 것이다. Q. 차세대 야권지도자를 박원순으로 보나. A. 박원순이 야권이 강력한 주자라고 본다. 서울시장 하는 것을 보면 누구근지 부정할 수 없다. 박 시장 한번 더해야 한다고 본다 대담 = 강해인부국장 정리 = 김재민기자 jmkim@kyeonggi.com 사진 = 전형민부장

봉녕사 묘엄명사 원적 1주기 기념, ‘세주묘엄박물관 개관’

한국불교 비구니계 대강백이며 성철 스님의 첫 비구니 제자로 알려진 고(故) 세주당(世主堂) 묘엄(妙嚴) 스님(1931~2011)의 입적 1주기를 기념해 스님의 삶을 기리는 세주묘엄박물관 개관이 문을 연다. 대한불교 조계종 수원 봉녕사(주지 자연스님)는 오전 10시 대적광전에서 세주 묘엄 스님 입적 1주기 추모다례재를 갖고, 11시 30분 박물관 개관식을 개최한다. 오후 2시에는 묘엄 스님 일대기가 담긴 책 한계를 넘어서 독후감 시상식이 이어진다. 박물관이 들어선 건물은 향하당 건물로, 묘엄스님이 학인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며, 선방(禪房)을 조성해 참선을 하던 곳이다. 30여평 규모의 박물관은 전시실과 영상실로 조성돼 있으며, 영상실에서는 스님의 일대기를 3D로 제작해 상영한다. 전시실에는 묘엄 스님의 출생부터 입적까지 일대기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유품 100여점이 전시된다. 특히 묘엄 스님이 평소 사용했던 물품과 경전, 각종 편지와 메모 등과 한평생 검소한 삶을 산 스님이 편지 봉투의 일부를 잘라 사용했던 메모 등도 공개된다. 입장료는 무료다. 지난해 12월 2일 봉녕사에서 세수 80세로 입적한 묘엄스님은 종단 사상 처음으로 비구니 스님 최고 지위인 명사 법계를 받았다. 1931년 진주에서 태어나 1945년 대승사에서 월혜스님을 은사로 득도해 같은 해 대승사에서 성철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1958년 통도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각각 수지했다. 1971년부터 폐사에 가까웠던 수원 봉녕사에 정착해 후학양성에 매진하는 한편 1999년 세계 최초의 비구니 율원인 금강율원을 개원했으며 한국 비구니교단의 미래를 밝히는 동량들을 양성하는데 평생을 쏟았다. 봉녕사 주지 자연스님은 한국 비구니 교육에 평생을 헌신한 묘엄 스님의 향기를 자연스럽게 보여주기 위해 박물관을 열게 됐다며 스님뿐 아니라 일반 시민에게도 종교를 떠나 묘엄 스님의 삶에 대해 알려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문의(031)256-4127 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

천주교 수원교구 제2대 수원대리구장, 송병수(시몬) 신부 취임

천주교 수원교구 제2대 수원대리구장, 송병수(시몬) 신부 취임 천주교 수원교구 제2대 수원대리구장에 송병수(시몬) 신부가 임명됐다. 최재용(바르톨로메오) 신부에 이어 제2대 수원대리구장으로 임명된 송병수 신부는 1976년 12월 8일 사제로 서품됐다. 송 신부는 북수동성당 보좌로 사제로서의 삶을 시작했으며, 안법 중고등학교 교사, 수진동성당 보좌신부를 역임한 후, 양평성당, 발안성당, 광주성당, 호계동성당, 평촌성당, 원천동성당, 비전동성당 주임신부를 거쳐 최근까지 용인대리구 상하성모세성당 주임으로 사목해왔다. 특히 송 신부는 본당 사목에 지금까지 사제의 삶 대부분을 헌신해 왔으며, 본당 사목에 매진하면서 교도소 사목과 교구 구역반 활성화 위원회 위원을 역임하는 등 늘 신자들과 함께 하는 사목을 펼쳐왔다. 취임식은 오는 20일 오전 10시 30분 권선동성당에서 거행된다. 한편 수원대리구는 경기도 수원지역을 관할하는 사목구로서, 수원교구 내 6개 대리구(수원ㆍ성남ㆍ안양ㆍ평택ㆍ용인ㆍ안산) 중 하나이며 소속 본당 수는 33개이다. 수원교구는 2006년 7월 14일부터 대리구제를 시행해 교구 내에 6개 대리구를 설정, 각 대리구가 고유한 지역적 특성을 살린 작은 교구로서 지역 복음화활동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편, 각 대리구장은 교구장 주교의 일부 권한을 부여받아, 관할 대리구를 대표하며 관할 지역에 대한 집행권을 갖고 대리구 내 전반적인 사목을 주관하고 있다. 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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