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무상사

YTN 텔레비전이 6·25 전쟁 50주년 기념행사로 연중 방송하는 ‘훈장을 찾아드립니다’란 기획 프로그램이 있다. 여기에 보면 ‘이등중사’니 ‘일등상사’니 하는 지금은 볼수 없는 생소한 계급이 나온다. 하사도 지금의 하사가 아니다. 1948년 건국과 함께 창설된 국군(미군정 시절엔 국방경비대였다)의 당시 사병계급은 지금과 다르다. 이병, 일병은 같지만 상병은 하사, 병장은 이등중사, 하사는 일등중사, 중사는 이등상사, 상사는 일등상사라고 했다. 현 계급으로 바뀐 것은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고나서 몇해 뒤였다. 말이 나온김에 말하자면 현 계급가운데 상병은 ‘조도해이’(上等兵) 병장은 ‘해이조’(兵長) 등이라고 했던 일본군 냄새가 없지 않다. 그건 그렇고 일등상사위에 특무상사란 것이 있었는데 여간 귀한게 아니었다. 지금으로 치면 원사(元士)에 해당하지만 아마 원사보다 더 존귀했을 것이다. ‘一’형 작대기 세개위에 역시 세개인 ‘V’형 맨위에 별하나가 박힌 특무상사의 계급장은 가히 권위의 상징이었다. 민주당에 난데없는 특무상사 바람이 일고 있다. 최고위원경선이 본격화하면서 각 후보진영마다 특무상사 모시기가 한창이라고 한다. 밑바닥 당료에서 출발, 20∼30년동안 외곬 당료생활을 하다 국회의원이 됐거나 국회의원을 지낸 당내 사정에 밝은 정통 당료출신을 특무상사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당내 득표전략을 위해 ‘특무상사 참모’들을 필요로 하는 모양인데 특무상사가 일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어느 조직, 어떤 직장단체든 일 잘하는 실무형 특무상사가 많아야 하는 것은 맞다. /白山

말 하기, 말 듣기

귀가 두 개, 입이 한 개인 것은, 말은 한 번 하고 두 번 들으라는 뜻이라고 한다. 또는 두 번 듣고 난 다음 비로소 한 번 말하라는 뜻도 된다. 귀가 좌우로 있는 것은 한쪽 말만 듣지 말고 양쪽 말을 다 참고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귀 담아 듣는다는 것은 음미하는 것과 같다. 음미하면 말하는 그 사람의 진의를 알 수 있다. 인간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반드시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생각 그대로라고 할 수는 없어도 항상 안팎으로 담긴 의미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흘려 듣고 망녕되게 듣기가 십상이다. 그릇이 깨졌는지 아닌지를 소리로 알 수 있듯이 사람의 어리석고 현명함은 그의 말을 들어 알 수 있는데도 옳고 그름을 구별할 줄 모른다면 귀가 탁한 증거이겠다. 물고기는 입으로 낚이고 사람은 말로써 낚인다. 말로 천냥 빚을 갚는가 하면 말로써 화를 입기도 한다. 오가는 말이 고우면 평안하고 거칠면 갈등이 생긴다. 말로써 말 많으니 아예 말을 말까 하노라는 읊조림에서 보듯이 말이 말을 낳는다. 말이 사랑을 낳고 미움을 쌓이게 하고 화해를 가져오며 언쟁과 폭력을 부르기도 한다. 입씨름, 말씨름으로 상대를 이기는 순간, 상대는 등을 돌리고 마음 속에 날을 세운다. 말이 논쟁으로 흐르는 것을 막지 못하면 머지 않아 홍수를 만나게 된다. 말은 수단이지 무기가 아니다. 무기를 쓰면 폭력이 된다. 말의 성찬(盛饌)에는 먹을 것이 없다. 수식어가 난무하는 곳에는 진실이 없다. 더듬는 말 속에 깨끗한 음률이 있고 물 흐르는 듯 매끄러운 말 속에는 탁류가 가리워져 있다. 남과 이야기하는 것은 하프를 연주하는 것과 같아서 현(絃)을 켜는 일도 중요하지만 현을 누르고 진동을 억제하는 일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조율을 해야 화음을 내는 것이다. 이한동 국무총리의 인사청문회를 TV로 지켜보면서 느낀 말 하기와 말 듣기의 허(虛)와 실(實)이다. /청하

운전자 인격

어제 출근시간 무렵이다. 아침부터 찌는 듯한 더위속에 차량이 빽빽이 밀렸다. 월요일 아침이면 으레 겪는 정체현상이지만 이날따라 더욱 짜증스럽게 보인 것은 더운 날씨 탓일게다. 산업도로 하행선이 정체차량 행렬로 꽉 차다보니 수원시가지 요소마다 정체현상이 파급된 가운데 산업도로 인근의 조원동 이면도로 또한 주차장처럼 돼버렸다. 이면도로뿐만 아니라 주택가 골목, 길이란 길은 줄이어 밀려든 차량으로 꽉찼다. 산업도로가 막혀 이면도로를 찾은 것이지만 너도나도 몰리다보니 이면도로라고 사정이 더 나은것은 아니다. 앞뒤로 밀린 차량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은 골목길 삼거리에서 운전자들 저마다 무작정 진행을 기다리고 있는 판에 난데없는 고함소리가 났다.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이 난무했다. 가뜩이나 비좁은 골목에서 차가 서로 비켜지나가야할 마당에 서로 양보치 않은 것이 발단이 됐다. 욕지거리는 마침내 주먹다짐으로 번져 보다못한 다른 운전자들이 나와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이바람에 주택가 삼거리 골목은 차가 엉키고 설켜 더욱 엉망진창이 돼 버렸다. 정말 짜증스런 아침출근 길이었다. 하지만 짜증낸다고 소통이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욕지거리를 하고 주먹다짐을 벌인다고 막힌 길이 뚫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불쾌지수가 높은 여름철 운전은 신경과민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 운전을 하다보면 정말 얌체운전을 서슴지 않는 얌체족이 있어 화나게 만들때가 있지만 그런 사람들하고 싸우면 같은 사람밖에 안된다. 고급차가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양보하는 운전이 운전자의 인격을 나타낸다. /白山

여름

여름 한여름이다. 천문학적으로는 하지(6월22일전후)에서 추분(9월23일〃 ), 기상학으로는 입하(5월6일전후)에서 입추(8월8일〃 )까지가 여름이다. 오는 7일 소서를 시작으로 11일 초복, 21일중복에 이어 이튼날 22일은 대서다. 한여름철 더위의 맹장들이 거의 이달에 들었다. 또 8월7일 입추에 이어 10일이 말복이다. 삼복이 지나도 여름 더위가 한풀 꺾이려면 아무래도 다음달 23일 처서가 지나야 할 것이다. 여름은 농사일이 무척 바쁜 계절이다. “여름에 하루놀면 겨울에 열흘 굶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가하면 하루벌어 하루먹는 사람들이 살기좋은 계절이 또한 여름이다. “여름거지 겨울부자 안부럽다”는 옛말이 있다. 벌써 해수욕장이 개장됐다는 소식이다. 여름휴가가 시작됐다. 피서간다고 야단들이지만 어디간들 여름더위를 아주 피할 수 있겠나 싶다. 더위가 본격화하면서 냉방병환자들이 부쩍 늘고 있다. 에어컨바람에 인체의 리듬이 달라져 갖가지 이상징후를 드러내는 것이 냉방병이다. 아무리 에어컨냉방이 좋아도 잠시지, 자연의 통바람을 당할수는 없는 것이다. 예전에는 선풍기조차 없어 부채만으로도 여름을 잘 넘겼던데 비해 지금은 에어컨바람을 쐬면서도 덥다고들 호들갑이다. 도시고 농촌이고간에 공간은 시멘트벽 투성이에 바닥은 아스팔트로 다 덮어버렸으니 더 더울수밖에 없다. 하지만 마음 급하게 사는 현대인들의 생활성정이 더위를 더 타게 만드는 스트레스 축적의 심리작용도 없지 않다. 어렵지만 마음이나마 여유를 갖는 지혜가 필요하다. 때로는 더위와 맞부딪치는 이열치열이 가장 좋은 피서일때가 있다./白山

한자교육

초등학교 한자교육 문제가 30년만에 다시 논란이 되고 있어 생각나는 게 많다. 한자교육은 지난 1972년 교육용 기초한자가 제정된 이래 중·고교에서만 실시돼 왔는데 최근 한국한문교육학회 등이 초등학생에게 600자 정도의 한자교육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자 국어학계에서 우리 말을 더 잘 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반대하고 나섰다. 어린이들에게 우리 글을 더 가르치고 우리 정신을 심어줘야 하는데 한자교육은 도리어 시대를 거스르고 있다는 주장이다. 한자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자꾸만 한자를 써서 ‘물’을 ‘음용수’, ‘따뜻한 물’을 ‘온수’, ‘잔다’를 ‘수면을 취한다’고 말해 우리글을 버린다고 말한다. 또 초등학생들은 학습에 굉장한 부담을 갖고 있어서 한자교육을 추가하면 아이들 부담을 늘리는 무리수라고 지적도 한다. 그런데 찬성하는 사람들은 중국 일본 등 인접국가와의 교류를 위해 필요하다며, 우리 말의 70%가 한자어이기 때문에 한자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맞서고 있다. 또 한자공부는 학습지나 과외를 통해 받고 있는데 정규과목화 하면 사교육 비용을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보통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언급하면 사대주의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하는 것을 사대주의 사상이라면 곤란하다. 한국은 한문 문화권에 속해 있다는 현실을 말하지 않더라도 대다수의 대학생이 부모 성명을 한자로 못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자를 배운다고 해서 어린이들이 물을 음용수라고 말하는 예는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600자 정도의 한자교육을 영어 ABCD 익히는 것 쯤으로 생각하면 어떨까. ‘아는 것은 힘’이다. /淸河

개성 송악산

경기오악(京畿五岳)의 하나인 송악산(松嶽山)은 개성시(開城市) 북쪽에 있는 해발 488m의 명산으로 일명 만수산(萬壽山)이라고도 한다. ‘만수산에 구름 뫼듯’이란 말은 사물이 많이 모임을 일컫는다. 북쪽에 송악산, 서쪽에 오송산·야미산, 남쪽에 남산 등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산자수명한 개성은 고려 475년동안의 왕도(王都)로, 황도·중경·개경·송도·송경 등의 옛 지명이 있다. 송악산의 처음 이름은 부소(扶蘇) 또는 곡령(鵠嶺)이었다. 만월대, 경덕궁, 성균관, 선죽교 등 고적이 많으며 개성과 송악산을 소재로한 문학작품도 상당수에 이른다. “강산이 송악을 껴안았는데 견여 타고 바로 팔선궁으로 오르네. 남강은 밝고 서강은 어두워 개성 지척인데도 개고 흐림 같지 않네.(이색)” “선인교 나린 물이 자하동에 흐르니 반천년 왕업이 물소리뿐이로다. 아희야 고국흥망을 물어 무삼하리오.(정도전)”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야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정몽주)”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이방원)” “눈 맞아 휘었노라 굽은 솔 웃지마라. 춘풍에 피운 꽃이 매양에 고왔으랴. 춘표표 솔분분할제 너야 나를 부러워하리라.(최영)” “눈 비추는 달은 고려의 빛이요 차거운 종소리는 고국의 소리로세. 남루는 시름겹게 홀로 서 있는데 성곽에는 거문 연기 자욱하네.(황진이)” 파란만장한 대역사와 문향의 고장 개성 송악산이 요즘 장마비로 대기중 오염물질이 씻겨 내려 흐린 날씨에도 60여㎞나 떨어진 서울 남산타워에서도 보이는 날이 있다. 방랑시인 김병연은 그 옛날 “읍이름은 개성인데 (읍호개성·邑號開城) 왜 문을 닫느냐 (하폐성·何閉城)”고 했다. 지금은 휴전선 북쪽에 있지만 이제 경기도 개성의 문은 다시 열릴 것이다.

하물며 동포인데

평양 남북정상회담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선물한 ‘풍산(豊山)개’ 한쌍의 이름을 김대통령이 직접 ‘우리’와 ‘두리(‘둘이’라는 뜻)’로 짓고 지난 22일 북한에 전언통지문을 통해 알렸다고 한다. 당초 북한측이 건네줄 때 이들의 족보상 이름은 ‘자주’와 ‘통일’이었으나 김위원장이 김대통령에게 이름을 새로 지어서 기르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와 ‘두리’라는 좋은 이름을 갖고 청와대에서 사랑받으며 자라고 있는 이 풍산개는 함경남도 풍산지방의 특산 개품종이다. 풍산군(현 김형권군)은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개마고원 근방이다. 풍산개는 몸짓이 중대형으로서 흰 털이 빽빽하여 엄동설한이라도 추위를 타지 않으며 눈·코·발톱이 검은 것이 특징이다. 풍산개는 오랫동안 다른 지방과 접촉없이 풍산 주민들에 의하여 사육돼 왔는데 ‘호랑이 잡는 개’로 통할만큼 그 성품이 용맹하고 인내력이 강하여 맹수사냥에 가장 알맞다. 이러한 성품은 이곳에 사냥을 하러온 사냥꾼 이외에는 몰랐으나 일제강점기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일반에게 알려졌다. 러시아의 사냥꾼들도 호랑이·곰·산돼지 등의 사냥에 풍산개를 이용해 보고 그 용감성을 극구 찬양하였다고 한다. 영하 30℃의 추위에도 집안에서 자지 않고 밖에서 집을 지키는 충견이기도 하다. 주인만 따른다는 풍산개는 붙임성이 좋고 대소변을 잘 가리는 등 훈련에 따른 교육 효과도 우수할뿐 아니라 특히 말티즈나 푸들 시츠 등 서양개들 보다 되레 애교를 잘 부려 애완용으로도 매력적이라고 한다. ‘우리’와 ‘두리’는 그동안 김대통령 내외가 청와대에서 길러온 진돗개 ‘나리’와 ‘처용’과도 금방 친해졌다는 소식이다. 동물도 이렇게 금세 친해지는데 남북한 사람끼리, 하물며 동포인데 마음만 터놓으면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청와대 본관 잔디에서 재롱을 피우고 있는 ‘우리’와 ‘두리’의 모습을 보면 남북관계의 전망이 더욱 밝아질 것 같다. 느낌이 좋다. /淸河

게놈사업

3대(代)간의 노소가 불분명한 100세 장년의 사회, 황인종 2세가 황인 백인 흑인도 아닌 돌연변이, 열등 유전인자의 인종은 아이를 못낳게 하는 사회를 가상해본다. 끔찍한 일이다. 금세기 중반이면 이런 끔직한 인류사회가 다가올 수 있다. 초 거대 과학프로젝트인 인체게놈사업이 완성됨에 따라 의약업계는 조만간 이에 관련한 신약개발에 들어간다. 인류사의 대사건으로 세계가 떠들썩한 게놈해독은 한마디로 염기서열을 이용해 인체의 신비를 밝혀낸 생명공학의 신기원이다. 노화의 비밀이 풀려 젊음을 유지하고 유전자를 통해 각종 난치병을 퇴치, 건강하게 살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한지 2천200년만에 불로초가 가능한 게놈지도의 초안은 인류의 재앙을 예견케한다. 과학발달의 가치가 과학선진국에 의해 오도될 공산 또한 높다. 인체는 우주의 신비와 같아 의학이 발달할수록이 신비로웠던 것은 조물주가 창조한 대자연의 섭리다. 이에 거역한 게놈의 구명은 대자연에 대한 반역이다.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인류의 자연법칙이다. 난치병극복, 건강추구는 육체의 고통을 줄이려는 노력이지 불로장생은 아니다. 인류가 늙지 않는다면 가치관의 일대혼란이 일어난다. 도덕이나 윤리관마저 달라진다. 사고사(事故死)가 아니면 죽는 사람이 희소하므로 땅과 식량이 모자라 가공할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신(神)의 영역을 침범한 인간의 극성은 자칫 인류의 재앙을 자초하기 십상이다. 게놈사업은 난치병 치료의 인술로만 쓰여져야 한다. /白山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 올브라이트의 브로치 메시지가 또한번 화제에 올랐다. 지난 23일 방한했을때 공항에 마중나간 외교부 관계자들이 그녀의 왼쪽 가슴에 단 브로치가 햇볕(정책)을 상징하는 선버스트인 것을 보고 안도했다는 후문이다. 중동협상땐 교착상태를 꼬집어 거미줄에 매달린 거미모양, 이라크회담때는 자신을 독사로 빗댄 것을 의식해 뱀모양의 브로치를 단 것은 이미 알려진 이야기다. 올브라이트는 옷차림도 전략임을 브로치에까지 이용하는 여성 외교관이다. 지난해 7월 뉴욕의 미국 공예품 박물관에서 ‘외교적인 브로치, 올브라이트에게 바친 선물’이란 테마의 전시행사가 있었다. 16개국 공예작가 61명이 제작한 71개의 브로치가 선보였다. 갖가지 외교적 메시지와 애국심을 담은 여러가지 모양의 작품이 전시됐다. 길이가 23㎝나 되는 대형브로치가 있었는가 하면 주먹으로 얼굴을 맞는 모습의 ‘펀치’란 이름의 황금브로치가 있었다. ‘펀치’의 작가인 네덜란드 사람 바커는 “올브라이트는 협상에서 마지막 한방을 날릴수 있는 외교관”이라고 설명했다. 자유의 여신상 얼굴을 본뜬 ‘자유’란 브로치는 올브라이트가 전시회 카탈로크 사진촬영에 달았었다. 올브라이트의 브로치는 한번 사용된 것은 두번 달지 않는다. 이 모든 브로치는 국무성이 만든다. 브로치외교에까지 신경을 쓰는 것이 미국의 외교정책이다. 올브라이트가 미국 의회의 인사청문회에 섰을때 외교경륜을 질문받고 “기회를 주면 보여줄 것이다. 지금 말하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의 인사청문회는 단문단답이면서도 깊이가 있다. 그땐 브로치를 달지 않았었다. /白山

칠천만 동포

조선시대의 인구조사는 호구자료가 근간이었다. 집집마다 호구단자를 관아에 제출하여 집계했다. 관이 주도하여 인구조사를 하는 것이 아니고 민의 신고에 의해 작성됐다. 호구단자를 3년마다 내도록 하는 신고의무는 물론 조정의 정책이었다. 호구조사는 조세부담, 군역 등을 위한 것이었으나 확실하지 못했다. 흉년이나 전염병으로 인구가 줄어도 이를 은폐하는 수령이 허다했다. 또 유아사망률이 높았으므로 10세미만의 어린 아이들은 신고대상서 제외했다. 그러나 3년마다 주기적으로 수백년동안 조사된 호구기록은 세계적으로 드물어 조선시대의 호구조사는 그런대로 평가받고 있다. 태조2년(1393년)의 조선 인구는 5백57만2천명(30만1천300가구)이었으며, 1천만명을 돌파한 것은 중종6년(1551년) 1천1만명의 기록이 처음이다. 융희4년(1910년)의 인구는 1천7백47만7천명으로 ‘이천만 동포’라고 했다. 1945년 광복 당시에는 ‘삼천만 동포’라고 했다. 조선조말 하와이 이민,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이민이 시작되면서 해외동포가 늘기 시작했다. 연해주 동포에 대한 스탈린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로 지금은 독립된 구 소련 연방국가에도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산다. 일제시대에 중국 일본에 건너가 그대로 사는 동포들도 많다. 아시아, 북미, 남미, 동·서구, 대양주, 아프리카 등 6대주 70여개국에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다. 남북한과 해외동포를 모두 합쳐 ‘칠천만 동포’라고 한다. 21세기는 인구가 국력이 될 것으로 보는 관측이 있다. 우리의 인구는 단일민족이라는 것이 강점이다.

생활한복 교복

한국 교복의 효시는 1886년 이화학당이 학생들에게 러시아제 붉은 목면 옷감으로 똑 같은 치마 저고리를 만들어 입힌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1920년대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남학생 교복이 양복으로 바뀌어 검은색이나 회색 옷감으로 스텐드 칼라에 단추가 5개 달린 저고리를 입기 시작한 것이다. 여학생의 경우는 1930년대에 들어 세일러복과 블라우스, 스커트, 스웨터로 구성되는 양장 교복시대로 바뀌었다. 이같은 변화는 서양 근대 의복문화 유입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일제가 학생들의 민족정신을 억압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즉 1931년 일본 문부성이 교복을 양복으로 바꾸도록 특명을 내렸고, 이화학당의 경우 학생들이 연판장을 돌리며 반발하였지만, 결국 1935년도 신입생부터 양복 교복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교복의 모습은 일제시대 양복교복 형태에서 크게 변하지 않다가 1983년 교복자율화조치를 맞았다. 교복자율화는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학생들의 개성과 독창성을 길러주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반면 빈부 차에 의한 위화감 조성, 생활지도상의 어려움, 학교에 대한 소속감 결여 등 역기능이 나타나 1985년 교복 재착용 여부를 학교장 재량에 맡겼다. 현재 98%정도의 학교가 학교별로 개성있는 디자인을 선택하여 교복을 착용하고 있는데 최근 진주 삼현여고, 부산 가야고교, 안동 성창여고, 서울 국악예고, 전남 학다리중학교, 전남 강진의 성요셉여자종고는 생활한복을 교복으로 채택하여 화제를 모으고 있다. 양장중심의 청소년 의상이 전통문화, 한복문화 선호쪽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요즘은 교복만이 아니라 성인들의 일상복과 어린이들 옷도 생활한복으로 바뀌는 추세이다. 많은 청소년들이 입기 편리하게 개량된 생활한복을 입고 학교에서, 거리에서 활보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마음이 싱그러워진다. /淸河

醫와 藥

한자(漢子)의원 의(醫)자는 활집 예, 창 수, 술 유(酉)의 결합이다. 전쟁터에서 부상병들을 술을 사용해 치료했던 데서 나온 글자로 전쟁과 관계가 있다. 중국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알코올성분이 들어 있는 술을 이용하여 상처를 소독했는가 하면 마취효과를 거두었으며 현액순환을 돕도록 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의’는 ‘치료하다’는 뜻을 갖게 됐다. 또 약 약(藥)자는 풀 초(草)와 즐거운 락(樂)의 결합이다. 먹으면 ‘즐겁게 되는 풀’, 곧 ‘병을 다스리는 풀’을 뜻했다. 굳이 ‘풀’이 들어 있는 까닭은 한약의 재료가 대부분 풀, 곧 약초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약’은 ‘의술과 약초’라는 뜻이 된다. ‘의’가 술을 사용하여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라면 ‘약’은 약초로 치료하는 것이다. 방법은 다르지만 병을 치료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의약은, 길은 달라도 종착점은 같은 수도동귀(殊道同歸)의 관계, 곧 불가분의 관계라고 하겠다. 본래 한길인 것이다. 그런데 작금 정부의 의약분업 강행에 반대하며 의료계가 집단 폐업에 들어가 환자들은 물론 전국민이 막심한 고초에 시달리고 있다. 병원이 문을 닫을 것이란 소리에 분만촉진제를 맞고 출산예정일보다 일주일 먼저 태어난 신생아가 하루 만에 숨졌는가 하면, 종합병원의 폐업으로 병원 3군데를 전전하던 70대 노인이 제때 진료를 받지 못해 사망했다고 한다. 예정했던 수술을 연기하거나 취소하고 입원환자들을 강제로 퇴원시킨다면 말이 도지 않는다.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협상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의술은 인술이라고 했다. 의약의 본질을 외면하지 않고 집단폐업에 상관없이 소신껏 진료하는 병원과 의사들이 그래서 더욱 돋보인다./淸河

노작 문학상

한국 근대문학사를 개척한 문인 중 한 사람인 시인 노작(露雀) 홍사용(洪思容)은 1900년 음력 5월17일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에서 출생했다. 부친 홍철유(洪哲裕)는 대한제국 통정대부 육군 헌병부위를 지낸 인물로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에 많은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노작은 생후 100일만에 부친의 근무처를 따라 서울 재동에서 9세까지 유년기를 보냈으나 부친의 타계와 함께 곧 그의 본적지인 석우리로 왔다. 노작은 석우리에서 한학을 수학했으며 17세 때 다시 상경, 휘문의숙에 입학했다. 휘문의숙 재학시절 정백(鄭柏), 박종화(朴鍾和) 등과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노작은 1919년 3·1기미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됐으나 같은 해 6월 풀려 나와 고향에 돌아왔는데 이후 문예지 ‘백조(白潮)’와 사상지 ‘흑조(黑潮)’ 창간을 준비하였다. 문예지 ‘백조’만을 창간한 노작은 여기에 ‘나는 王이로소이다’ 등 다수의 시, 소설, 수필을 발표했으며 연극활동에도 참여, 극단 토월회(土月會) 등에서 다수의 희곡 창작과 함께 연출을 맡았다. 올 곧은 선비정신으로 천석지기의 재산을 민족문단에 내놓은 노작은 친일행적이 전무한 해방공간에서 근국청년단(槿國靑年團)운동을 일으키려 했으나 1947년 서울 마포구에서 별세했다. 출생지는 용인, 성장지는 화성이지만 당시가 수원군 시절이었으므로 노작 출생지는 보통 수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난 17,18일 이틀간 오산대학과 석우리에 있는 노작 묘소 시비 앞에서 한국문인협회 경기도지회, 화성지부, 오산지부 주최로 ‘노작 홍사용 탄생 100주년 기념 문학제’가 열렸다. 한국근대 서정시 개척자요, 민족시인인 노작의 문학업적을 기리기 위해 열린 이날 문학제에 참석한 강성구 국회의원, 우호태 화성군수, 유관진 오산시장은 매년 지속적인 문학제 개최를 희망했다. 특히 문인이기도 한 우호태 군수는 ‘노작 문학상’제정 의사도 밝혔다. 문학과 민족을 위하여 의롭게 생애를 마친 노작 홍사용 선생의 문학정신이 향리에서 면면히 이어질 것으로 믿는다. /淸河

김치 종주국

국산고추는 매운맛에 단맛이 있고 색소는 강렬하면서 비타민C가 풍부하다. 소금이나 젓갈과 잘 어울려 몸의 지방을 산화시키는 효소를 만들어낸다. 이는 토양과 기후의 탓이다. 원래의 고추맛은 이러지 않았다. 중미 멕시코가 원산지인 고추가 조선에 전래된 것은 16세기 말이다. 신대륙을 점령한 스페인, 포르투갈 등이 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일본을 거쳐 전해졌다. 고추가 김치에 쓰이게 된 것은 17세기부터다. 그러나 이때의 김장재료는 무였으며, 그 이전에는 주로 소금이 사용됐다. 무에 소금기를 절인 짠지, 싱건지 등이 그러했다. 여기에 지금의 배추가 18세기말 중국으로부터 전래되면서 고춧가루에 젓갈을 들인 배추김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토종을 말하는 조선배추도 도입후 우리의 토양과 기후로 길들여진 품종인 것이다. 김치의 뜻은 넓은 의미로 절인채소를 말한다. 어원이 되는 ‘딤채’는 담근 채소라는 의미를 지녔다. 그러니까 지금과 같은 김치가 시작된 것은 약 200년 전이다.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으면서 민족음식의 상징으로 발달한 것은 바로 고춧가루와 젓갈류를 함께 쓸줄 알았기 때문이다. 10여년전부터 김치맛을 뒤늦게 안 일본사람들이 김치문화의 추월을 위해 안간힘을 다하더니 ‘김치 담그기’를 두 여고의 정식 교과로 채택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오사카의 오키마치여고와 이즈미여고가 배추고르는 법에서 고춧가루 등 양념재료 쓰는 요령까지 실습위주의 정규수업을 한다는 것이다. 김치과목을 담당한 초빙교사는 재일교포로 알려졌다. 우리의 신세대 주부가운데는 김치 담그기를 싫어하거나 담글지 몰라 김장김치마저 주문하는 주부들이 적잖다. 여고에서 김치교과를 두었다는 말은 더욱 듣지 못했다. 김치종주국의 위치가 위협받는게 아닌지 걱정된다. /白山

팀플레이

단체경기는 팀플레이가 생명이다. 스타의 기여가 아무리 크다해도 스타플레이어 혼자 게임을 다하는 것은 아니다. 국내 배구에 불멸의 기록이 있다. 1979년 울산서 열린 제2차 실업연맹전 여자배구경기였다. 현대와 한일합섬의 게임에서 세트스코어 2-0으로 마지막 3세트도 13-8로 현대가 앞서갔다. 누가 보아도 현대의 승리가 확실한 한일합섬의 절망적 순간, 팀플레이가 되살아나면서 3세트를 15-13으로 뒤집어 가까스로 게임종료를 모면했다. 이어 한일합섬은 기사회생한 여세로 계속 몰아치는 반면에 현대는 난조에 빠져 결국 세트스코어 3-2로 대역전극을 장식했다. 이 명승부는 신화적 기록으로 남아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축구도 공수가 잘 조화를 이루어야 공격, 수비 모두가 신바람이 난다. 링크의 허리역도 마찬가지다. 미국 프로야구에서 크게 활약하는 박찬호가 아무리 마운드를 잘 지켜도 자기팀의 타선이 침묵을 지키면 투구가 무거워진다. 수비가 실책을 저지르면 더욱 맥빠진다. 반대로 자기팀의 타선이 폭발하고 수비들이 안타성타구도 잡아내는 맹활약을 보이면 더욱 신명나 투구가 경쾌해진다. 스포츠뿐만이 아니다. 단체생활 역시 팀플레이와 같다. 혼자 아무리 잘 하려해도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저마다의 포지션에서 자기역할을 다하는 것이 조직의 활성화다. 조직이 살아 꿈틀거려야 생동감이 난다. 기업이나 공공단체나 일반단체나 모두가 같다. 정부조직 역시 마찬가지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후속조치가 추진되고 있다. 각 부처가 유기적으로 움직여 정부 팀플레이가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공연한 공명심에 들떠 팀플레이를 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정부의 팀플레이가 주목된다. /白山

이산가족 상봉

1964년 도쿄올림픽의 신금단 부녀상봉은 스포츠외적 감격드라마로 스포츠기자들의 열띤 취재전쟁을 낳았다. 가히 세계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북측 육상선수 신금단과 서울에 살고 있는 아버지의 부녀상봉은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단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보여 취재하던 기자들이 눈시울을 적셨다. 신금단 부녀상봉을 KBS-TV가 단막극으로 극화한 것은 그해 10월인가 싶다. 신금단 아버지역으로 고인이 된 김희갑씨가 출연했다. 그 역시 함경북도가 고향인 실향민 탓이었던지 원래 지닌 연기력에 알파를 더한 감정이 풍부하게 나타나 기막힌 연기라는 평가를 받았다. 막후 비화가 있었다. 대본에 없는 대사 한마디가 말썽이 됐다. 딸과 헤어지는 장면에서 감정이 격한 나머지 “공산주의도 싫고 민주주의도 다 싫다… 금단아!”하며 울부짖었던 것이다. 당시는 지금처럼 영상과 음향을 저장할 수 있는 ENG카메라가 없었던 때여서 녹화가 불가능했다. 생방송으로 나가기 때문에 그대로 방송된 김희갑씨의 대본에 없는 대사는 나중에 당국에서 조사를 받기까지 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말인데도 남북대치가 그만큼 예민하던 때여서 좀 문제가 됐던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으로 당장 효과를 보아 가장 희망에 부풀어 있는 사람들이 이산가족들이다. 생사확인, 서신교환만 해도 가슴 설레일텐데 하물며 만난다는 것은 벌써부터 밤마다 꿈에 보일만 하다. 정부는 폭주가 예상되는 이산가족들 만남의 신청을 고령자순으로 처리할 것이라고 한다. 되도록이면 많은 만남이 가능한 북한당국의 인도주의 정신의 발현이 있으면 좋겠다. /白山

노벨평화상

노벨평화상은 매년 2월 1일까지 각국으로부터 후보추천을 받아 10월 중순쯤 수상자를 선정한다. 노벨평화상은 지난해 ‘국경없는 의사회’가 수상한 것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분쟁지역에서 평화나 인권활동을 촉진한 사람들에게 수상의 영광이 돌아갔다. 또 지난 1973년 베트남전 종전에 기여한 공로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과 월맹측 평화협상 대표 레둑토가 공동수상한 것을 비롯, 1970년 이후 역대 노벨상 수상 중 공동수상이 11번이나 된다. 이번 전세계의 관심이 집중된 남북정상회담 성사로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성급한 말들이 들려온다. 남북정상회담은 양쪽 정상의 통일에 대한 의지 뿐 아니라 분단 55년이 초래한 남과 북의 시대적 요청과 주변국들의 상황변수 등이 복잡하게 얽혀서 나온 7천만 국민의 고난과 고통의 산물이기 때문이겠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관계자도 “노벨위원회로서는 오는 10월 수상발표가 있기 전 까지 아무 확인도 해줄 수 없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수상 가능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난 13일 0시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날이 카운트되던 순간에 문화일보 김선미 기자가 주한 노르웨이 대사관을 거치지 않고 노벨평화상을 선정하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 직접 국제전화를 걸어 “김대통령이 지금까지 수차례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돼왔고,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세계평화에 미치는 영향으로 미뤄볼 때 김대통령의 노벨상 수상도 점쳐볼 수 있느냐”고 물은 결과 그렇게 (수상 가능) 공식입장을 확인해줬다는 것이다. 수상자 발표 직전까지 수상자는 물론 후보와 관련해서 어떤 확인도 해주지 않는 노벨위원회 관계자의 이같은 발언은 아주 이례적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 한다면 한민족의 핏값이며 눈물값이다. 한국인이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가상만으로도 매우 기쁘다. /淸河

남북 정식國號

지난 반세기 동안 남한과 북한은 서로 간에 마땅한 호칭을 쓰지 못했다. 한때는 서로를 ‘괴뢰(傀儡)’라고 칭했다. 남한측은, 한국 이북지방에 ‘북한괴뢰’가 있다고 했고, 북한측은 남한을 ‘남조선 괴뢰’라 칭했다. ‘괴뢰’는 ‘꼭두각시’이다. 남한과 북한이 어디의, 누구의 꼭두각시인가. 1991년 9월 남한과 북한이 유엔에 동시가입할 때는 엄연히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정식 국호(國號)를 썼다. 그런데 북측은 한때 한국을 소위 ‘공화국 남반부’라고 했다. 한국은 북한을 ‘한국의 미수복지역’이라고 했다. 이러한 국호를 사용했던 것이 긴장완화와 평화통일에 도움이 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과연 잘 성사될까’하고 가슴 졸인 남북정상회담이 6월13일부터 15일까지 평양에서 잘 끝났다. 2000년 6월15일자로 공포된 남북공동선언문 맨 마지막에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이라고 적고 서명했다. 1992년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와 지난 5월18일 발표된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실무절차 합의서에 이어 세번째로 남북합의서에 국호가 명시된 것이다. 한반도의 남한과 북한은 세계100여개 국가와 국교를 맺고 있으며 이미 일본과 미국도 북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또는 DPRK라고 부르고 있다. 이렇게 전 세계와의 외교관계에서는 한반도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있다는 존재시인이 되고 있으나 오직 우리 민족 남북사이에만 서로 상대방의 공식 국호를 기피하고 있다. 동포로는 생각하여도 국가로 인정하기는 어려운 것인가. 언제까지 남쪽, 북쪽이라고 호칭할 것인가. / 淸河

금지곡

가수 이미자의 히트송 ‘동백아가씨’가 한때 금지곡이 된 까닭은 왜색이란 이유때문이었다. 음계와 리듬으로 치자면 모든 트롯 곡들이 왜색임에도 유독 ‘동백아가씨’만 금지곡이 된 이유는 당시 정부가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로 폭발한 반일감정을 다스리는데 ‘왜색가요 금지’라는 카드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일본과 연관된 금지곡 중 비슷한 사례는 ‘독도는 우리 땅’이다. 정광태가 부른 ‘독도는 우리 땅’이 한창 인기를 모았던 1983년 느닷없이 방송금지가 됐다. 이 곡은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일본을 방문하게 되자 반일감정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방송금지 당했던 것이다. 1970, 1980년대의 상징적인 금지곡이 ‘아침이슬’이었다면 1990년대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시대유감’이다.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모두를 뒤집어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네”라는 가사가 문제됐었다. 이 곡의 방송금지는 ‘사전심의 철폐운동’의 상징적인 기폭제가 되었다. 최근에는 단정한 이미지의 가수 이현우의 신곡 ‘정육점’이 청량리 사창가의 모습을 묘사했다는 이유로 방송금지곡으로 묶였고, 직설화법으로 언론과 경찰을 비판한 그룹 DJ DOC의 ‘라이(LIE)’와 ‘포졸이’가 문제곡으로 떠올랐다. 지난 2년반동안 음주, 폭행사건 등으로 경찰서를 들락거리며 공백기를 가질 수 밖에 없었던 DJ DOC의 ‘자전적인 노래’라고 하는 ‘라이’는 언론비판을 담았고, ‘포졸이’는 경찰을 포졸이, 씨방새, 짭새로 비유하며 경찰에 대한 억하심정을 표현했다. 그런데 요즘은 북한가요 ‘반갑습니다’가 인기를 끌고 있다. “동포 여러분, 형제 여러분,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라고 시작되는 이 노래는 1년전부터 금강산 관광객을 중심으로 일반인에게 알려졌다. 금강산 유람선이 정박하는 북한 고성항에서 북한 땅을 처음 밟은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것이 이 노래다. 북한가요가 금지되지 않고 남한에서 애창되는 현실이 반갑다. /淸河

임진강

임진강은 함경남도 덕원군 마식령에서 발원, 서남쪽으로 강원도 북부 황해도를 거쳐 경기도로 흐른다. 강줄기가 칠백리에 이른다. 북한땅인 고미탄천과 평안천을 합류한데 이어 도내 연천에서 철원 평강 등을 거쳐온 한탄강과 또 합류한뒤 고랑포를 지나 문산천을 합치면서 한강을 만나 함께 서해로 흘러든다. 유역이 비옥하여 예로부터 오곡백과가 풍성했다. 전곡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대량 발굴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살기가 좋았던 임진강유역은 수상교통의 요충지로 국토가 분단되기 전까지는 장단의 고랑포까지 큰 배가 들어왔으며 소규모 주운(舟運)이 발달하였다. 삼국시대에는 신라 백제 고구려가 임진강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빼앗기고 뺏는 많은 싸움을 벌였다. 당시엔 임진강을 칠중하(七重河)라고 하여 연천에는 칠중성(城)이 있었다. 임진강이라고 부른 것은 조선 선조 27년(1593년)이다. 광주산맥의 지맥이 뻗어 산수 또한 수려하다. 임진강변의 장단석벽은 경치가 아름답기로 이름나 시인묵객이 많이 찾았던 곳이다. 하류쪽으로는 동파적벽이 있으며 화장사, 심복사, 경순왕릉 등 대찰과 유적지가 있다. 보개산, 문인폭, 연취암, 용추, 문인석 등 명승고적이 또한 도처에 있다. 그러나 지척인 북한땅은 고사하고 남쪽땅인 장단마저 비무장지대에 들어 명승고적이 잡초에 묻힌채 인적이 끊긴지 오래다. 어제 남북정상회담을 바라보는 임진강의 한 어부가 “물고기처럼 남북을 오가며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새도 물고기도 마음대로 왕래하는터에 유독 사람만이 가로막고 있는 임진강은 오늘도 무심히 흐른다. 남북을 흐르는 임진강에 평화가 올 날은 언제쯤일까. 통일의 그날이 오면 축복이 예약된 강이 임진강이다. /白山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