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깍쟁이’란 물건을 팔기 위해 가게를 차려 놓은 사람, 즉 ‘가게쟁이’에서 변화된 말로서 오늘날의 상인을 말한다. 국어사전에는 ‘인색하고 이기에 밝은 사람’ 또는 ‘몸집이 작고 얄밉게 약빠른 사람’ 등으로 풀이돼 있다. 옛날부터 수원(水原)은 서울로 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은 화성군 태안읍 소재지이지만 병점리(餠店里)는 지명 그대로 떡점거리로 유명해 언제나 성시를 이뤘다. 또 현재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장안문 밖에는 1796년 조선조 22대 정조가 양재역(良梓驛)을 폐지하고 신설한 역참(驛站:역마를 갈아서 타던 곳)인 영화역(迎華驛)이 있어 상점들이 많았다. 지금 영화동이 예전에 역촌(驛村), 역말(驛馬), 또는 영말(역마을)로 불려졌던 연유이다. 그런데 수원을 지나가고 오는 사람들 중에는 먼 길을 오고 가느라 노자(路資)가 떨어져 수원 사람들의 신세를 지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병점이나 영화역 일대에서는 숙박비나 식비를 내지 않고 몰래 도망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일이 거듭되다 보니 아무리 인심 좋은 수원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자연히 계산에 밝아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식사를 하거나 하룻밤 유숙한 뒤 계산을 했거나 하지 못해 무안을 당하고 수원을 떠난 외지사람들이 ‘수원에는 가게쟁이만 산다’거나 ‘수원사람은 가게쟁이’라고 푸념 아니면 원망했을 것은 짐작이 간다. 수원사람들을 가리켜 하는 여러가지 말 가운데 ‘수원사람은 깍쟁이’는 그러니까 ‘수원사람은 가게쟁이’라는 뜻인데 ‘수원사람은 계산이 밝다’로 생각하는 게 옳겠다. 그 옛날 수원 가게쟁이들이 수중에 돈이 없는 길손들에게 어느 정도나 야박하게 대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한양가는 길에 수원사람을 많이 사귀어라’고 했던 옛 시절이 그리워진다. /淸河
白山 경의선은 경부선과 함께 한반도를 종단,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국제간선 철도다. 전장 499.3㎞의 경의선이 1906년(광무10년) 4월 3일 개통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당시 조정은 처음 부설권을 주었던 러시아 상사가 재력이 없어 못하게 된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 외세배격을 위한 직영에 나섰다. 조병식을 총재로 한 ‘서북철도국’을 내장원에 설치, 서울∼개성간 철도 부지측량에 나섰다. 그러나 노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통감부는 서울∼신의주간 군용철도부설이 필요하다며 ‘임시군용철도감부’란 것을 두고 철도부대 병력을 동원해 제멋대로 공사에 나섰다. 조정은 일본의 강요에 못이겨 할수 없이 50년간 임대조건으로 경의선 부설권을 내주고 말았다. 군인과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경의선부설을 서두른 일본은 불과 733일만에 개통시켰다. 전근대적인 공법으로 하루에 730m를 부설한 셈이니, 공사가 얼마나 강행군이었던가를 짐작케 한다. 개통시키고나서 개량·보수공사(터널 신설 19군데 교량증개축 328군데)를 하는데 본공사기간보다 긴 4년이 걸렸다. 경의선이 만주까지 운행된 것은 1911년 11월 압록강철교가 가설되고 나서다. 전 구간이 복선화 된 것은 1943년 5월로 대륙침략과 식민지 수탈을 위해서였다. 1945년 8월말, 38선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면서 끊긴 경의선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 서울∼개성간마저 끊겨 문산간 46㎞만 운행해온지 오래다. 1차 남북장관급회담 합의사항으로 문산∼장단간 12㎞(남측구간), 장단∼봉등간 8㎞(북측구간) 등 허리가 끊긴 20㎞의 경의선 복원공사가 연내 추진을 보게 됐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철도종단점의 소원(표어)이 이루어져 비무장지대를 관통, 개성∼사리원∼평양∼안주∼신의주까지 달릴 날이 그리 멀지 않을것 같다. 여기엔 북측 공사비를 남북경협자금으로 입체하든지, 북측 차관도입에 남측이 보증을 서는 부담이 있긴 하지만.
남북이산가족 사이의 이혼소송, 재산다툼에 관련한 몇몇 사례의 소송 및 법률문제가 일부 지상에 보도되고 있다. 생사여부조차 몰랐다가 살아있는 소식이 알려진 재회기대의 감격속에 벌써부터 이런 얘기가 나오는 것은 성급한 흥미위주의 과장보도인지, 아니면 세태가 그런 것인지. 요절한 손창호 감독이 각본을 쓰고 주연한 영화로 ‘동경 아리랑’이 있다. 젊은 여성들이 일본에 가면 많은 돈을 벌수 있다는 허황된 꿈에 부풀어 건너갔다가 호스티스로 전락, 그곳 건달패의 노리개가 되어 돈은 커녕 인생 자체를 망치는 내용이다. 손감독 자신이 일본에서 7년간 영화공부를 하며 직접 보고 들은 얘기를 소재로 했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KBS-1TV 특별생방송 프로그램이 있었다. 1983년 6월 30일부터 그해 11월 14일까지 무려 136일동안(453시간 45분)에 걸친 생방송으로 1만189가구의 국내 및 해외 이산가족을 만나게 해주었다. 6·25 전쟁때 가족이 헤어진 경위를 화면을 통해 서로 확인하다가 “맞다! 맞어!”하며 손수건을 적시는 재회의 눈물속에 기쁨을 터뜨리곤 한 감동의 프로그램이었다. UPI는 ‘텔레비전사상 최대의 걸작품’이라고 평했고 AP는 80여개국에 주요기사로 타전하는 등 세계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나중에 방송가에 들린 소식으로는 지극히 일부의 예이긴 하나 그중에선 ‘차라리 안만났던 것보다 못한 일이 벌어졌다’는 말이 들려 뒷맛을 씁쓸하게 한 적이 있다. 돈 탓이다. 다시 만나고보니 복잡한 재산다툼이 벌어져 서로 그리워하며 만나지 못했을때보다 못한 사이가 된 것이다. 돈도 좋지만 정이 앞서야 한다. 사람의 도리가 앞서면 재산문제는 절로 잘 풀릴수가 있다. 사람의 도리를 정이 아닌 법으로 먼저 풀려면 잘 풀리지도 않고 더 어려워진다. 서로 상대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이산가족들의 좋은 만남이 되기를 바라고 싶다. /白山
근대에 타자기, 복사기 등 사무기기의 발달은 행정사무의 능률화에 변혁을 가져왔다. 지금은 전자시대다. 컴퓨터의 눈부신 발달은 행정사무를 지면화(紙面化)에서 화상화(畵像化) 추세로 가고 있다. 행정사무의 화상화는 종전의 결재(보고포함) 양식이 얼마나 비능률적인가를 드러낸다. 경기도가 결재단계 등을 대폭 축소한 행정체제개선지침을 시달한 것은 행정사무의 전자화 조치로 시의적절하다. 결재를 5∼6단계에서 3∼4단계로 축소, 위임전결권을 강화한 것은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게 된다. 내친김에 화상결재도 검토할만하다. 결재단계가 많아 결재받다가 시간 다 보내는 폐단은 폐단대로 낳으면서 책임소재가 불분명했던 것이 종전의 결재체제였다. 회의도 마찬가지다. 청, 국과별 회의로 오전 한나절을 거의 회의로만 보내는 것은 전 근대적 행정문화의 유산으로 심한 낭비다. 회의는 횟수가 적을수록 좋고 시간이 짧을 수록 좋다. 회의가 잦고 시간이 길어지는 것은 무슨 일이 잘 안된다는 징후다. 행정수행을 위한 회의를 30분이내로 제한하는 도의 지침은 전자문화시대 들어 이행할만하다. 화상회의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시대의 첨단감각과 맥을 같이 해야 하는 것이 행정사무문화다. 정보산업의 눈부신 발달은 행정사무문화의 부단한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원래 행정관리의 목표는 지침에 따라 구체화 된다. 이번의 경기도 행정사무개선지침이 구체적 명확성, 인식의 통일성, 일체적 협동성에 의해 새로운 행정사무문화로 성숙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白山
조선조 제22대 임금 정조가 수원에 축성한 화성(華城)이 복원되기 전 수원 사람들은 사대문(四大門)의 보존 형태를 ‘동문(창용문)은 도망가고, 서문(화서문)은 서 있고, 남문(팔달문)은 남아 있고, 북문은(장안문)은 부서지고’라고 비유했다. 여자애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면서 이 말에 무슨 동요의 곡을 붙혀 불렀다. 화성의 사대문중 장안문과 창용문이 부서지고 도망간 것은 6·25때 였다. 서울 숭례문보다 규모가 더 큰 팔달문, 장안문과 창용문의 이층 누각이 멸실되고 성벽과 수많은 누각들이 파괴, 훼손됐다. 다행히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으로 막대한 국고지원들 받아 1975년부터 5년간 ‘화성성역의제’에 따라 화성의 복원 공사를 마쳤으나 도시형편상 남수문, 남공심돈, 남적대, 남암문은 도시형편상 복원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 25일 저녁 화서문에서 사단법인 화성연구회가 주최한 ‘화성 바로 알기’학술 발표회에서 화성 미복원 시설 현황이 공개됐다. ‘화성에 배포된 정조때의 문헌’, ‘화성 주변경관 계획에 관련 연구’에 이어 발표된 화성 미복원 시설은 36개소로 밝혀졌는데 다소 난관은 있겠지만 지금도 복원이 가능한 시설들이어서 화서문 성문밖 야외에서 밤9시30분까지 열린 세미나 인데도 참석자들로 하여금 자리를 뜨지 못하게 만들었다. ‘화성 바로 알기’세미나의 주제 발표자나 토론자들은 도시 공학박사 등 박사들이 많았는데 따로 학위를 명명 하자면 ‘정조학(正祖學)박사’들 이라고 칭할 수 있겠다. 그야말로 각계의 인사 백여명이 모여 지난 7월25일 창립한 사단법인 화성연구회 회원은 물론 그날 참석 자들은 ‘화성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미복원된 화성의 시설물들이 모두 복원 된다면 더 할 나위 없겠지만 복원이 전혀 불가능 한 것은 우선 표지석과 안내판 이라도 건립하는 것이 좋다. 앞으로 화성연구회가 할일이 너무 많다. /淸河
시내버스가 정류장에 들어서면 승객이 우루루 몰려든다. 정류장 사정에 따라 버스가 서야하므로 줄을 설수도 없고 서봤댔자 소용이 없다. 출퇴근 시간이면 버스정류장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이 노선 저 노선마다 버스 승강구를 향한 아귀다툼이 벌어진다. 버스차장은 단 한사람이라도 더 태울 욕심으로 꾸역 꾸역 밀어넣는다. ‘버스 옆구리가 터질 지경’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차장은 승강구 계단 바닥에 간신히 두발을 걸친채 차체를 두어번 탕탕 두드리는 신호로 개문발차 시킨다. 차가 출발하면서 온몸으로 승객을 밀어대어 간신히 문을 닿는 차장은 대개가 10대 여차장이었다. 서울 시내버스가 60년대 중반까지 이런 실정이었다. 그 무렵의 시내버스 운송사업은 황금산업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었다. 승용차 대중화추세로 대중교통사업이 예전같지 않다. 비록 예전같진 않지만 그래도 대중교통은 사회의 중추기능 산업이다. 수원시내버스가 서울등지와 연결된 장거리버스에 승객을 잠식당하고 있다. 운행 배차간격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업계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배차 시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배차시간을 지키지 않으므로 승객이 기피해 타산이 맞지 않을수도 있다. 임창열 지사가 시·군 시내버스요금인상안(어른 500원서 600원·중고생 340원서 400원·초등생 200원서 250원)을 두고 서비스개선책이 마련된뒤 실시키로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서비스개선은 시내버스업계의 자구책 이기도 하다. 시내버스승객이 증가하는 것은 승용차이용이 줄어드는 것으로 교통정체 해소에 큰 도움이 된다. 60년대 콩나물버스는 배차간격만은 잘 지켰었다. 편리하고 쾌적한 현대형 시내버스로 변모, 대중의 교통수단으로 더욱 더 많이 이용될수 있기 바란다. /白山
한해와 수해는 글자 한자 차이지만 뜻은 정반대다. 뜻은 다르지만 무섭기는 마찬가지여서 한해도 무섭고 수해 또한 무섭다. 으레 한해끝에 수해가 닥치는 것을 보면 자연의 섭리는 실로 오묘하여 한해대책끝엔 수해대책이 따르곤 한다. 한해와 수해는 모두 재해다. 당국의 재해대책이 한해와 수해를 망라한 ‘중앙재해대책본부’ ‘경기도 재해대책본부’로 한 것을 보면 타당성이 인정된다. 글자 한자 차이로 그때마다 간판을 바꿀수 없으므로. 마른장마속 가뭄으로 애를 태우더니 400㎜ 안팎의 집중호우가 쏟아져 마침내 한해끝에 수해가 닥쳐 야단이다. 주로 한수이남의 경기남부지역이 피해지역이다. 연중행사처럼 수해를 당한 북부지역이 무사히 넘긴 것은 다행이나 이번엔 남부지역이 물벼락을 맞았다. 뭐라 할까, 기우제와 기청제를 번갈아 올려야 할지. 예전엔 한해땐 기우제, 수해(장마)땐 기청제를 올리곤 하였다. 지금은 이런 제를 안올리지만 절박할 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불행중 다행히 집중호우는 하루 소나기로 끝나 계속되는 장마홍수는 면했다. 그래도 피해가 상당하다. 한해와 수해는 대자연의 조화속이긴 하지만 피해정도는 물의 다스림, 즉 인간의 치수에 달렸다. 치수는 나라의 근본이라고 했다. 중국 하(夏) 왕조의 시조 우(禹) 임금이 순(舜) 임금으로부터 선위를 받은 치수설화는 물을 다스리는 것이 백성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준다. 지금도 다름이 없다. 수해가 났지만 날씨가 또 가물것이다. 가물다가 역시 수해가 닥칠 수 있다. 앞으로도 벼이삭이 팰 무렵에 부는 계절풍, 가을장마 등을 예상할 수 있다. 재해대책은 평소 꾸준하여 그칠날이 있어선 안된다. /白山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 ‘나라문장(汶章)규정’은 대통령령이다. ‘애국가’는 그나마 규정조차 없다. 안익태작곡 작사미상의 ‘동해물과 백두산이…’는 일종의 관습법(관행)에 의해 애국가로 부를 뿐 애국가로 규정한 실정법규는 없다. 북측은 국장(國章), 국기, 국가(國歌), 수도를 헌법7장(168조∼171조)에 조문화해놓고 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국기는 기발의 가운데에 넓은 붉은 폭이 있고 그 아래우에 가는 흰 폭이 있으며 그 다음에 푸른 폭이 있고 붉은 폭의 기대달린쪽 흰 동그라미 안에 붉은 오각별이 있다. 기발의 세로와 가로의 비는 1대 2이다.’ 헌법169조 인공기 조문의 내용이다. 지난 정상회담때 남북의 국기가 공식 사용되지 않았다. 여러가지 점을 고려하여 태극기와 인공기 게양은 하지 않기로 합의했었다. 회담기간중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서울의 대학내 인공기게양에 대한 사법처리방침 보도(당일 아침 TV)를 보고 김대중대통령에게 돌아갈 것(회담무산)을 권유한 적이 있었다는 황원탁청와대외교안보수석의 말(이북도민회주최 강연회)이 있었다. “얘기가 사실보다 더 나갔다”(황수석), “돌아가라고 한 적은 없다”(박준영청와대대변인)는 해명이 나중에 있긴 했으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적어도 회담기간중 일어난 일의 처벌방침보도에 유감을 표명한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대통령의 평양수행에서 돌아와 적절치 못한 실언을 한 것이 황수석이 처음은 아니지만 말하나 가려서 제대로 할줄 모르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답답하다. 그나저나 앞으로 인공기 게양사건이 또 일어나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주목된다. 텔레비전의 남북관계 보도에서 태극기와 인공기를 나란히 맞댄 그림을 보이곤 한다. 민족화해의 뜻은 좋지만 아직은 역기능이 우려된다. /白山
‘도깨비 장난 같다’는 까닭을 알 수 없는, 터무니 없는 짓을 이르는 말이다. ‘도깨비 놀음’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어 가는 일이다. ‘도깨비 살림’은 있다가도 별안간 없어지는 불안정한 살림이다. ‘도깨비도 수풀이 있어야 모인다’‘도깨비 달밤에 춤추 듯’ 등 도깨비의 행동을 비유한 말은 꽤 많다. ‘도깨비’를 국어사전에서는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한 잡된 귀신의 하나로 비상한 힘과 괴상한 재주를 가져 사람을 호리기도 하고 짖궂은 장난이나 험상궂은 짓을 많이 한다고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도깨비는 귀신인 듯 하지만 귀신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도깨비는 본디 ‘돗’과 ‘아비’를 합쳐 ‘돗아비’라고 했다. ‘돗’이란 ‘도섭’이라는 우리의 옛말이다. 도섭은 ‘능청맞고 수선스럽게 변덕을 부리는 것’을 뜻하는 말이고 ‘아비’란 한 가족에서 아버지가 가장 윗사람이듯이 작은 무리의 우두머리인 남자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돗’이 ‘불’이나 ‘씨앗(種子)’의 뜻을 지녀 ‘돗’은 곧 풍요로움을 상징한다는 설도 있다. 고로 도깨비는 곧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신이었다는 말이 된다. 그 ‘돗아비’가 ‘돗가비’로 변하였고 그것이 다시 ‘도깨비’로 변한 것이다. ‘돗가비’라는 표현은 조선 7대 왕 세조가 수양대군으로 불릴 당시에 부처님의 일대기를 써서 1447년(세종 29년)에 펴낸 <석보상절>이라는 책에 ‘돗가비에게 부탁을 해 복을 빌었다’라고 처음 등장한다. 그러고보니 옛날 이야기에도 귀신은 원한을 품는 경우가 많고 인간을 해치지만 도깨비는 조금은 멍청하고 짖궂어 자기 꾀에 속아 넘어가 인간에게 당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신통력을 가지고 있어 오히려 복을 가져다 주는 대목이 많이 나온다. 요즘 ‘도깨비 놀음’같은 일이 많이 벌어지지만 그래도 까닭을 모르게 재산이 부쩍 부쩍 늘어감을 이르는 ‘도깨비를 사귀었나’같은 긍정적인 말도 여름밤에 가끔 생각해 보자. /淸河
우리나라 왕권시대에는 왕의 호칭에 태조(太祖)·정조(正祖)·태종(太宗)·세종(世宗)과 같이 조(祖)나 종(宗)을 붙였는데 이러한 호칭이 그 왕들의 이름은 아니다. 왕들이 죽은 뒤에 그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종묘 사당에 붙인 칭호로 묘호(廟號)라고 했다. 묘호는 그 왕이 죽은 뒤 신주를 종묘에 올릴 때 조정에서 대신들이 추천하고 왕의 결재를 받아 정했다. ‘조’나 ‘종’을 붙이는 원칙을 ‘조공종덕(祖功宗德)’이라고 했는데 공이 많은 임금은 ‘조(祖)’, 덕이 많은 임금은 ‘종(宗)’자를 붙였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애매한 원칙이다. 공이 많은지 덕이 많은지를 판단하는 것은 그야말로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통은 한 왕조를 건국하였거나 거의 망한 왕조를 부흥시킨 왕에게만 ‘조’를 붙이고 기타 왕들에게는 ‘종’을 붙이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도 태조(왕건)외에는 모두 종을 붙였다. 조선시대에는 ‘조’를 붙이는 것이 ‘종’을 붙이는 것보다 더 권위있고 명예로운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후계자인 왕이나 실세 신하들이 아첨하느라고 억지로 붙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여권에 의해 좌지우지된 격이다. 조선 왕조 10대 왕으로 조신유생(朝臣儒生)간에 당쟁이 격심한 혼란중에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폭군으로 지탄받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된 연산주(燕山主·1476∼1506·재위 1495∼1506), 그리고 조선 15대 왕으로 당쟁에 휩쓸려 임해군·영창대군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여 서인파에 의한 인조(仁祖)반정으로 폐위된 광해주(光海主·1575∼1641·재위 1608∼1623)는 군(君)으로 봉작돼 종묘에도 들어가지 못해 묘호가 없다. 당쟁에서 이긴 쪽의 권세가 막강했기 때문이다. 예나 오늘이나 냉혹하고 인정사정 없는게 당쟁이다. /淸河
전선없는 전쟁이라고 했다. 베트남전의 특징이다. 적인지 양민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상대는 베트공(월남인민해방전선)이었다. 군복차림이 아니다. 평상복에 편제(군)가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평화로워 보이는 농촌마을의 주민들이 갑자기 짚단더미 등에 숨겼던 총을 꺼내어 쏘아대곤 했다. 길가던 집단 행상의 과일더미 같은데서도 총을 꺼내어 전투를 벌이곤 했던 것이 베트공이다. 전투원인지 비전투원인지를 가릴 수 없었던 베트남전은 그래서 ‘지옥의 전쟁’ ‘악마의 전쟁’으로 불리웠다. 비전투원으로 알고 무심히 보았다가 전투원으로 둔갑한 베트공들에게 수없이 당했다. 파월장병들의 희생이 컸다. 이러다보니 영 의심스러워 보이는 사람은 사살하는 예가 더러 있었다. 죽지않기 위해서는 먼저 죽여야 했던 것이다. 이 바람에 억울하게 죽은 양민도 전혀 없진 않았을 것이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정부 패망과 함께 하노이정부의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으로 통일된지 25년이 됐다. 근래 국군의 베트남전 양민학살설이 이따금씩 언론에 보도되곤 한다. 물론 양민이 학살당했다면 유감스럽고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전쟁실상이 외면된 감상적 발상으로 사선을 넘나든 파월장병들의 긍지를 손상시키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안된다. 전시의 전쟁터를 평시의 시각과 잣대로 보는것 부터가 판단의 균형상실이다. 마치 대단한 인도주의 정신인 것처럼 양민학살설을 말하는 이들에게 양민위장의 베트공에게 당한 국군의 희생에 대해선 뭐라고 말할 것인지 묻는다. 하기좋은 말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베트남전의 특성을 알고 말을 해도 해야 한다. /白山
1948년 5월 10일 첫 총선으로 구성된 제헌국회가 헌법을 제정, 공포한 것이 7월 17일 제헌절이다. 이성계가 1392년 조선을 세운 날과 같다. 정부수립으로 1공화국이 탄생한 것은 1948년 8월 15일이다. 서상일헌법기초위원장과 유진오전문위원 등이 초안한 당초 헌법안은 내각책임제였던 것을 이승만박사가 반대해 대통령중심제로 바뀌었다. 우리 헌법은 실로 파란만장한 역정속에서 아홉차례나 고쳐졌다. 1차개헌(52년 7월 2일)은 대통령직선제에 국무위원불신임제가 가미된 이른바 발췌개헌, 2차개헌(54년 11월 29일)은 초대대통령에 한한 3선허용의 사사오입개헌, 3차개헌(60년 6월 15일)은 4·19후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한 2공화국헌법, 4차개헌(60년 11월 29일)은 반민주행위처벌을 근거화한 개헌, 5차개헌(62년 12월 26일)은 5·16 혁명세력이 추진한 대통령중심제의 3공화국헌법, 6차개헌(69년 10월 21일)은 대통령간선제, 7차개헌(72년 12월 27일)은 이른바 유신헌법인 4공화국헌법, 8차개헌(80년 10월 27일)은 박정희대통령 저격사건후 전두환 노태우소장 등 신군부세력이 추진한 대통령 간선제의 5공화국헌법이다. 지금의 6공화국(노태우 김영삼 김대중대통령)헌법은 87년 6·29 선언이후 그해 10월 29일 국민투표에 의해 제정됐다. 이토록 상처투성인 헌법은 그나마 효력이 중지되는 초법적인 시대가 있었다. 박정희소장과 김종필씨 등이 일으킨 5·16으로 약 1년6개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신군부의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의해 10개월동안 헌정이 중단된 비운을 겪었다. 대부분 집권자의 통치편의에 의해 좌지우지된 것이 우리 헌법의 개헌특성이다. 헌법은 문자 그대로 ‘법의 법’이다. 제헌절을 맞아 헌법을 존중하면서 국리민복을 이룩하는 정치사회가 참다운 정치발전이라고 생각해 본다.
야생동물이 정력과 건강에 좋다는 속설때문에 까마귀가 좋다하면 전국의 까마귀가 멸종될 정도로 수난을 당한다. 오죽하면 파리, 모기가 몸에 좋다고 소문나면 아마 순식간에 없어질 것 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겠는가. 보기 드문 야생 동물 일수록 효험이 많다는 속설은 더 무섭다. 희귀한 야생 동물이 암시장에서 비싸게 거래되고 밀렵꾼이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깊은 산속에 사는 300g 정도의 까치살모사는 20만원을 호가하고 같은 뱀 이라도 백사(白蛇)처럼 특이하면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비싸다. 천연기념물은 ‘위험 수당’이 붙어 더 비싸다고 한다. 반달곰은 3억원, 사향노루는 3천만원에 팔릴 정도다. 야생동물을 잡는 것은 불법이지만 멧돼지·고라니와 같이 제한된 지역에서 일정 기간 사냥이 허가되는 종류도 있다. 청설모·어치와 같이 숫자가 너무 늘어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동물은 지역에 따라 사냥 대상이 된다. 이런 동물이라도 독극물·농약을 사용하거나 올무·덫으로 잡는 것은 불법이다. 그러나 이제는 멸종위기 또는 보호야생 동물은 물론 일반 뱀이나 개구리도 함부로 잡을 수 없게 될 것 같다. 환경부가 조수보호 및 수렵에 관한 법률과 자연환경보전법상의 동식물 관련 규정을 ‘야생 동물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로 통폐합하고 처벌기준을 대폭 강화하는 법률 개정안을 마련 중이기 때문이다. 7월중으로 입법 예고할 이 법률 개정안에는 양서류, 파충류를 포함한 야생 동식물의 무분별한 포획 및 채취 제한 조항과 함께 야생동물 밀렵 밀거래자는 물론 야생동물을 사먹는 사람까지 처벌토록 하는 규정이 포함된다고 한다. 야생동물에게는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병원성 세균이나 바이러스, 환경 호르몬이 많이 들어 있어 ‘야생동물 보신’이 오히려 건강을 해친다는데도 대다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 죽어도 내가 죽는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그 생각이 문제다. /淸河
벽화는 후기구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무덤의 벽화는 이집트 고왕조시대(서기 전 2000년대)에서 시작돼 에트루리아의 고분벽화를 거쳐 중세 기독교도들의 카타콤으로 계속되고 있다. 궁전이나 신전의 벽화로는 이집트의 고왕조시대 유적인 히에라콘폴리스벽화와 크레타섬의 미노아왕조 궁전벽화(서기 전 1800∼1400년경) 등이 유명하고, 폼페이유적의 건물벽화들은 로마시대의 일반벽화의 유행을 보여주고 있다. 동양에서는 인도의 아잔타석굴 벽화가 가장 오래되었다. 중국의 벽화로서 가장 유명한 것은 돈황(敦煌)의 석굴사원 내의 벽화다. 우리나라의 벽화는 모두 삼국시대부터 시작됐다. 건물벽화는 사찰벽화가 조선시대까지 계속됐고 고분벽화는 고구려시대에 크게 유행하여 그 여맥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고구려 고분벽화중 ‘주인도’, ‘수렵도’ ‘환문도’ ‘현무도’ ‘청룡도’를 비롯 ‘비운연화도’ ‘주악천녀도’ ‘십지지신상’ 등이 유명하다.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가 시스타나예배당에 그린 ‘천지창조’등과 같이 교회나 성당에 그린 벽화들도 많지만 감옥에 그린 벽화는 없었다. 그런데 한국인이 최초로 감옥의 벽화를 그렸다. 하루 여섯시간씩 한달 남짓 작업을 했다고 한다. 수원구치소내 여자사동 복도 500m 벽면과 실내운동장 10m벽에 벽화를 완성한 수채화가 이은지화백이 화제의 주인공이다. 27개의 남자사동에도 1년 이상 벽화를 그려야 하는데 물감 구입할 돈이 없어 지금은 쉬고 있다고 한다. 수원구치소 재소자들도 벽화를 그리는 이화백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재소자들의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벽화를 그린다는 이 화백에게 당국이 물감을 제공하면 될텐데, 참 안타깝다. /淸河
옛날 김개인(金蓋仁)이란 사람이 어느 날 외출을 하였는데 기르던 개도 뒤따랐다. 주인(김개인)은 돌아오는 길에 술에 취하여 길가에서 잠이 들었다. 때마침 들판에 불이나 번지고 있었다. 개는 곧 냇물에서 수차례 몸을 적셔 주인을 불길로부터 구하긴 했으나 불이 꺼졌을 때는 기운이 다해 그만 죽고 말았다. 주인은 개를 장사지낸 뒤 지팡이를 꽂아 무덤을 표시했다. 뒷날 이 지팡이가 나무로 자라나 이 고장을 오수(獒樹)라고 했다. 한때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던 의견(義犬) 이야기다. 아이로니컬한 일은 매년 ‘의견제’를 열어 주인을 구한 개의 넋을 위로하고 있는 이곳에도 보신탕집이 성업중이라는 사실이다. 다행히 ‘의견제’가 열리는 날만은 문을 닫는다고 한다. ‘개고기를 계속 끓이면 중도 제대로 앉을 수 없다’는 중국 속담이 있다. 개고기 냄새가 그토록 유혹적이라는 얘기이겠다.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은 젊은 시절에 개고기 장사를 하는 번쾌를 찾아가서 돈도 내지 않고 개고기를 먹곤 했다. 친구 덕분에 개고기를 많이 먹어서인지 체력이 좋아진 유방은 항우(項羽)를 무찌르고 한을 건국, 역사상 최초의 평민 황제가 되었다. 개고기를 상식한 게 천하를 얻는데 확실히 기초체력, 보신이 됐다는 것이다. 개고기 예찬론자들은 개고기를 최상의 정력제로 믿고 있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살이 찌거나 콜레스테롤이 끼지 않으며, 여름철 허(虛)해진 체력을 북돋워 준다고들 한다. 그러나 연세대 식품영양학과 이종호 교수는 개고기가 “정력증강이나 보신 효과를 내는 성분은 없다”고 말했다. 서울 중앙병원 영양사 강은희씨도 “개고기도 많이 먹으면 비만이나 고지혈증 등 성인병의 원인이 된다”고 했다. 동물애호협회에서 보신탕을 그토록 반대하여도 개고기는 여전히 ‘보신탕’ ‘영양탕’ ‘사철탕’이란 이름으로 잘 팔리고 있다. 김개인을 살린 의견이 지하에서 눈물짓고 있겠다. 복중의 견공(犬公)들만 불쌍하게 됐다. /淸河
소피스트(변론술·궤변학파)에 반대하여 진리의 절대성을 주창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BC 470∼399)는 길거리 대화교수법으로 민중개발에 힘쓰는 등 갖가지 기행이 많았다. 악처담은 유명하다. 한번은 소크라테스의 처 크산티페가 남편에게 큰 소리로 욕을 퍼붓다가 갑자기 찬물 한통을 머리에 끼얹었지만 그는 “우레 소리가 났으면 큰비 오는게 당연하지…”하고 태연했다. 신을 모독하고 청년을 타락케 했다는 혐의로 옥에 갇히자 옥리로부터 탈옥을 권유받았으나 “악법도 법이다”라며 거절, 마침내 독배를 마셨다. 그의 사상은 사후 제자 플라톤에 의해 크게 꽃피워졌다. 소크라테스를 생각케하는 법언이 나왔다. ‘국민의 이름으로라면 무엇이든 할수 있는 듯이 급조된 국민여론을 내세워 법의 권위를 짓밟는 사회현상에 냉철한 판단으로 대응할때도 됐다’고 밝힌 이돈희대법관을 비롯한 6명의 대법관 공동퇴임사가 눈길을 끈다. “우리 사법부는 급변하는 사회현상을 맞아 어느 선에 법의 잣대를 맞춰야 올바른 것인지, 고뇌가 연속된 세월이었다”고도 했다. 또 “법의 괴리가 심화되었을 때는 판례를 통해 그 괴리를 메워줄 입법절차를 촉구할 부차적 업무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고 돌이켰다. 법 질서가 무시되는 사회분위기를 개탄, 법이 유린되면 사회가 유린되는 진리를 정곡을 찔러 경고한 것으로 보아진다. 법경시 풍조는 오래된 고질이긴 하지만 4·13 총선을 앞둔 DJ의 선거법불복종선언후 더 심화해지지 않았나 싶다. 지켜야할 법과 안지켜도 되는 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법을 안지켜도 된다고 했으므로 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 설득력을 잃는다. 이래저래 현대판 소피스트들로 인해 사회가 무척 불안하다. 우리에겐 소크라테스같은 현자(賢者)가 없는 것일까. /白山
서남아시아 사람들은 맨손으로 밥을 쥐어 먹는다. 아프리카인들도 맨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는다. 인류문화학계는 전세계에 맨손으로 음식을 먹는 인구가 40%, 포크로 먹는 인구가 30%, 젓가락을 사용하는 인구가 30%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포크를 사용하는 유럽인들도 중세시절에는 맨손으로 먹었다. 16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가 너무 급하게 음식을 먹다가 종종 손가락을 깨물었다는 기록은 포크가 아닌 손가락으로 집어먹었던 것을 알수 있다. 10세기 동로마제국의 수도 비잔티움왕궁 식탁에 처음 등장한 포크가 16세기에 이탈리아 상류사회로 건너가 전 유럽지역에 비로소 보편화된 것은 18세기 들어서였다. 우리는 젓가락과 함께 숟가락을 쓰는 것이 특징이다. 중국이나 일본도 숟가락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처럼 크게 쓰진 않는다. 우리의 음식에서 숟가락이 널리 쓰이는 것은 중국과 일본엔 없는 탕문화가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맨손이든 포크든 젓가락이든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 다르다. ‘인간은 손으로 먹되, 먹기전에 그 손으로 일을 하고 먹으라’는 조물주의 섭리일지 모른다. 다만 동물중에 손으로 음식을 먹는 짐승으로 원숭이를 꼽을 수 있다. 그렇지만 원숭이의 손은 손이 아니고 앞발이라는 동물학적 견해가 없지 않다. 어떻든 동물 가운데 일을 않고 손으로 밥을 먹는 것은 원숭이 뿐이다. 인간도 일을 않고 밥을 먹는 사람은 원숭이와 크게 다를바 없다. 원숭이같은 인간들이 많지 않은가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白山
자전거는 1790년 프랑스에서 목마에 바퀴를 만들어 붙인데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최초의 자전거는 사람이 발로 땅을 차면서 굴러갔다. 앞바퀴로 방향을 좌우로 돌린 것은 1816년 무렵이었고 발을 땅에 대지않고 달린 것은 1839년이었다. 공기타이어가 나온 것은 1886년이었으며, 지금같은 형태의 자전거로 발전한 것은 1890년대 초다. 자전거가 유래된지 약 100년만에 오늘의 자전거로 발전한 것을 보면 라이트형제가 1903년 복엽비행기로 최초의 동력비행에 성공한지 100년도 안돼 우주선까지 개발된 것에 비해 무척 더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에 자전거가 처음 도입된 것은 윤치호가 갑신정변으로 미국에 망명했다가 1895년 귀국하면서 들여온 것으로 전한다. 1905년 조정에서 만든 ‘가로관리규칙’ 가운데 ‘야간에 등화없이 자전거타는 것을 금한다’는 조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상당히 보급됐던 것 같다. 황성신문 1906년 4월 16일자엔 상금 100원이 걸린 자전거경기대회가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이 무렵에는 관청이나 군대에서도 자전거를 구입, 공용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지금의 자동차만큼 큰 구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근래 자전거출퇴근이 눈에 띈다. 휘발유값이 자꾸 오르기만 한다. 교통체증이 날로 심화하여 달리는 시간보다 공회전하는 시간이 더 많을 때가 있다. 승용차 출근을 하면서 짜증스런 일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전거 출근으로 씽씽 달리는 모습이 무척 경쾌해 보인다. 자전거도로시설이 열악한데다가 그나마도 흐지부지 되곤 하는 것은 이용자가 적기 때문이다. 우리도 은륜의 물결을 이룰 정도로 자전거 출퇴근이 보편화 됐으면 좋겠다. 운동겸해 건강에도 좋은 것은 상식이다.
우리 옛 시조 중에는 지은 이 성명은 있지만 인적사항이 없고 아예 이름도 모르는 작자미상의 작품들이 상당수에 이른다. “내 정은 청산이요. 임의 정은 녹수로다.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녹수도 청산 못잊어 밤새도록 울어 옌다.”“말은 가려 울고 임은 잡고 아니 놓네/ 석양은 재를 넘고 갈 길은 천리로다/저 임아, 가는 날 잡지 말고 해를 잡아라”“창 밖에 국화를 심어 국화 밑에 술을 빚어/술 익자 국화 피자 벗님 오자 달 돋아온다/ 아희야 거문고 청쳐라, 밤새도록 놀리라” 작자와 지은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근화악부’‘청구영언’‘해동가요’등에 실려 전해져 널리 애송되는 작품들이다. 작자미상 작품은 시조만이 아니다. 전국 방방곡곡 산천초목에 서려 있는 전설은 소설이요,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구비동화(口碑童話)는 구비문학 중의 동화 장르에 속한다. 작자미상 작품은 또 있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된 망부석, 귀여운 모습의 동자석, 마을의 수호신으로 악귀와 외적을 막아 주며 이정표 역할을 하던 장승과 벅수(영남지방에서 일컫는 돌장승), 높이 올라서 먼곳까지 마을의 안위를 살피던 솟대도 작자미상의 조각작품이다. 왕릉과 사대부 집안의 묘에서 망자의 혼을 지키는 문인석·무인석과 그 앞에서 해학적 얼굴로 무덤을 보호하던 석수(石獸)도 이름 모르는 옛 석공들의 작품이다. 용인시 양지면 양지리 山 6의1에 있는 세중(稅仲)돌박물관에 가면 신라∼조선시대 돌조각 1만여점이 전시돼 있다. 양지리의 울창한 숲을 배경으로한 5천여평의 부지에 작자미상의 돌조각들을 보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느낌이 가슴에 와 닿는다. /淸河
반딧불이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형광(螢光)을 발산하는 귀한 곤충이다.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부지런하고 꾸준히 학문을 닦는다는 고사성어 ‘형설지공(螢雪之功)’은 반딧불에서 연유한다. 반딧불이 꽁무니에서 나오는 빛은 순전히 암수가 짝짓기를 하기 위해 보내는 신호로, 암놈은 논두렁이나 풀섶에 가만히 앉아서 희미한 빛을 발산한다. 꽁무니에 불을 켜고 날아 다니는 것은 수놈이며, 이들은 1년을 살면서 단 한번의 짝짓기로 일생을 마감한다고 한다. 반딧불이의 생태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반딧불이 서식에는 오염되지 않은 물과 공기, 다슬기 등 먹이와 섭씨 15∼25도의 수온을 유지할 수 있는 수심, 그리고 산소공급을 해 주는 흐르는 물이 필요하다. 요즘 사람들은 자동차 헤드라이트나 가로등 불빛, 번쩍거리는 네온사인 불빛 등 너무 밝은 빛, 화려한 빛에만 익숙해져 별빛이나 은하수, 반딧불이를 보고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소리도 그렇다. 생활 소음이나 경적 등에 청각이 길들여져 풀숲의 이름 모를 벌레소리는 물론이고 가을 날 밤의 귀뚜라미 소리도 그냥 흘려 보낼 때가 많을 것이다. 최근 전국 각지의 지방자치단체에서 ‘반딧불이 축제’나 ‘반딧불이 추억 만들기’ 등 행사를 열고 있는 것은 옛날을 떠올리게 하고, 도시로 나간 시골사람들에게는 고향산천을 생각나게 해 주는 흐뭇한 행사다. 반딧불이가 살수 있는 고장은 무공해 청정지역이다. 반딧불이 애벌레는 2급수 이상의 맑은 물 속에 사는 다슬기·달팽이와 이슬을 먹고 자라기에 수질과 토양 오염을 알려주는 환경지표 곤충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전지역에서 반딧불이가 살 수 있게 된다면 아마 천국이 따로 없을 것 같다. 반딧불이가 밤 하늘을 수놓고 날아 다니는 시골 들녘은 동화속의 나라이다. 아름다운 마을이다. /淸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