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녘의 화신을 견디다 못해 길을 나선다. 길은 과거와 미래의 가교이자 이유이며 목적이었다. 살아야하는 불가피한 의무 앞에 선 마음은 늘 비수 같다. 수분 가득한 속살을 드러내는 과도였다가도 누군가의 심장을 도려내는 흉기가 되기도 했다. 응혈된 마음이나 닦을까하여 침류왕 원년(384) 인도 승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처음 들여와 창건한 초전가람지 불갑사를 찾았다. 산문입구에 융단처럼 돋아난 상사화 잎들이며 수액을 올려 가지 끝을 붉으래 물들인 단풍나무가 새봄을 알린다. 동백도 꽃잎을 태우고 배롱나무는 온몸을 비틀어대며 솟구치는 양기를 주채하지 못하고 있다. 대웅전 지붕의 스투파가 마라난타가 동진을 거쳐 오며 남방불교양식이 유입되었음을 증명한다. 이봄에 무엇이라도 깊이 사랑해야겠다. 클라라를 사랑한 브람스 같은 사랑, 그런 절대사랑이 아니더라도.
떡방앗간의 가래떡이 꾸역꾸역 쏟아져 내리는 장바닥을 꺼벙하게 걸어가는 거리는 온통 나른하다. 뚝배기를 핥던 파리한마리가 춘곤증에 꾸벅거리는 순댓국밥집 안에서 주인아줌마의 하품이 아지랑이처럼 나풀대는 불가피한 생리적 봄. 후배나 불러 오소리감투에 쐐주 한잔 걸칠까 하다가 그만두고 엉거주춤 돌아오는 춘 삼월. 신라 파사왕 때 축성한 파사성에 올랐다. 허물어진 산성은 임란 때 유성룡의 건의에 따라 승군을 동원 더욱 확대해 쌓았다고 한다. 비교적 잘 보존된 산성이지만 조선후기에 남한산성의 비중이 커지자 쇠락한 것이라고 한다. 산 아래 남한강 이포가 선경처럼 아름답게 펼쳐졌다. 유성룡이 이곳에서 시 한수 지었다는데 낯선 이포보가 심기를 거슬린다. 에라, 목구멍의 황사나 씻으러 가자. 천서리 막국수에 편육 곁들여 결정적으로 한잔 꺾어야겠다.
절이라기보다 고즈넉이 자리한 구도자의 집이거나 객사 같은 분위기가 사뭇 정숙하다. 거창한 대웅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浮石寺라는 낯선 현판만이 희미하게 겸양을 갖추고 있다. 휘어진 건물 양쪽으로 다수의 방문이 있는 참 편한 민가 같기도 하다. 아랫목에 앉아 화롯가에 긴 곰방대를 내리고 있는 노인이 있을 것 같은, 바느질하는 여인네들이 한담을 나누고 있을 것 같은 방이 있는. 그래서일까? 예의를 갖춘 관람객들은 아무도 돌계단을 오르지 않았다. 서해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에 당나라 다녀온 의상대사가 그를 흠모해 바다에 투신한 선묘낭자의 혼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절이다. 또한 요즘 일본에서 도적들이 접수해온 금동관세음보살이 봉안되었던 사찰이라고 하는데, 법원은 일본이 정당한 취득의 경위를 소송에서 확증하기 전까지 일본으로의 점유이전을 금지한다는 가처분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진짜가 된다는 것은 아름다운 고통이다. 한 위대한 컬렉터에 의해 이곳은 전세계 축음기와 에디슨 발명품의 을 소장한 최고의 박물관이 됐다. 6살에 선친이 물려준 콜롬비아 축음기 G241에 매료되어 그(손성목, 관장)의 수집본능은 시작되었고, 교통사고, 강도, 피습 등 10여 차례의 목숨 건 위험을 넘겼으며 운명적으로 에디슨을 만났다. 인류 최초의TV, 축음기 발명전의 오르골, 150여 종의 내장형축음기를 본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세계적으로 전문화되는 추세에 편승해 특화된 이 박물관은 아직도 3천500여점의 소장품이 수장고에 갇혀 신음하고 있다. 음악 감상실에서 레하르의 오페레타 미소의 나라 중 그대는 나의 모든 것을 소름끼치며 듣는다. 그리고 매킨토시MC1000TR앰프에 그 이름도 설레는 자디스의 유리스미 스피커로 듣는 넬라판타지아는 나의 모든 음악성을 송두리째 함몰시키는 열망의 절벽이었다.
낙동강 발원지 황지는 태백시의 한 복판에 태아를 품은 자궁처럼 똬리를 틀었다. 이어진 황지천은 넓이를 확장해 흐르며 바위산을 뚫고 깊은 소를 이뤘다. 1억 5천만년에서 3억만년 전에 형성된 고생대의 퇴적환경과 하천의 변천사를 간직하고 있는 석회암 동굴. 한때 경상도 사람들이 금맥(金脈)을 찾아 태백으로 모여 들었던 이상향의 관문이 구문소다. 그 옆으로 또 하나의 석문이 뚫려 땅 길을 잇고 있다. 하얀 눈은 소(沼)를 덮고 물길은 철암천에 합류해 낙동강을 이룬다. 설원에 무용한 잡념을 내린다. 생각의 일들에 휴식을 줘야지. 모성애 같은 그리움이 흰 눈이 달포쯤 덮인 분지에서 고향집 아랫목처럼 아득히 전해온다. 쓸쓸함이 빈혈처럼 몰려오는 눈길, 나는 문득 세월의 폭력에 외로운 최승자의 시 억울함을 나의 언어인양 되씹어본다.
중림동엔 명동성당보다 앞선, 우리나라에서 가장오래 된 고딕식 건물 약현성당이 있다. 언덕 위의 이 성당은 1998년 방화로 일부 소실되어 복원하였다고 하는데 그래서일까? 고색창연한 모습은 간데없고 너무나 반듯하다. 염천교 건너 다시지은 남대문을 보니 더욱 씁쓸하다. 차라리 성당과 이웃한 쪽방촌 골목이 향수적이다. 설날 오후의 쪽방촌은 차가운 날씨만큼이나 황량했지만 중학생쯤 돼 보이는 소녀가 선물인 듯한 물건을 든 채 미끄러운 언덕을 바삐 올랐다. 골목을 들어서자 나지막한 낡은 대문 앞에 설 인사 온 친척이 호출을 한다. 문을 열자 바글바글 모여 있던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소리치며 달려 나온다. 이런 정회(情懷)는 아파트의 정서와 비견할 수 없는 미학적 풍경이다. 연탄재 뿌려진 골목을 나서며 나는 그들의 방안 모습이 그리웠다. 무척이나 따뜻할 것 같은.
1월의 마지막 날, 여느 해보다 혹독했던 추위가 잠시 멈춰 3월 중순에 해당하는 날씨다. 눈꽃 열차에 오르니 마치 1월의 봄 여행 같다. 보슬비가 잠시 스치더니 눈부시게 포근한 설경이 펼쳐진다. 환상(幻想)이란 비현실계의 상념이 아닌 환상(環狀), 즉 서울역을 출발해 제천, 추전, 승부, 풍기, 단양을 거쳐 돌아오는 고리형태의 순환열차다. 탄광촌 사북 고한을 지난다. 이런 지명은 그 이름만으로도 사마르칸트나 타클라마칸 같은 흥분을 준다. 석탄가루 섞인 잿빛 눈이 선로에 흩어진 추전역. 매봉산 꼭대기의 풍력발전기 도는 풍경이 이국적이다. 이어진 협곡 속에 승부역이 나타났다. 이곳에서 먹는 우거지 국밥에 막걸리한잔은 술과 안주라는 관계의 의미를 새삼 고찰케 한다. 열차카페의 통유리로 보는 차창 밖 풍경은 소설 같은 인생역정이다. 幻想과 回想사이의.
수도국산(水道局山)은 일제강점기 때 산꼭대기에 있던 수도국에서 유래한다. 달동네는 개항 후 일본인들이 중구 전동 지역을 점령하자 그곳의 조선인들이 밀려나면서 생겼다. 이후 한국전쟁과 산업화를 겪으며 실향민과 지방 사람들을 수용하게 되었고 3천여 가구의 밀도 높은 달동네로 붐볐다. 지금은 이 일대의 달동네가 모두 사라지고 고층아파트가 자리했지만 아직도 산허리엔 대부분의 단독주택들이 나지막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하지만 아파트 공화국의 불도저는 언제 이곳을 허물는지 모른다. 박물관 골목의 포스터가 흥미롭다. 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지는 육십 환/ 넘쳐나는 왜 노래에 흐려지는 민족정신/혼식으로 부강하고 분식으로 건강 찾자/사글세, 하숙생구함, 반공방첩, 이발소, 연탄가게, 물지게 등도 향수적이다.
삼척사람이 넘은 피재와 경상도 사람의 구문소 너머엔 정감록이 지목한 이상향 태백이 있었다. 실제로 1920년 먹골배기 길가에서 검은 돌덩이가 발견된 이후 이상향 태백은 현실화됐다. 팔도에서 모여든 광부들은 검은 돈을 파내며 국가와 가족 경제에 불가결한 꿈이 되었다. 바람부리 지나 고개를 넘자 이름도 낯선 통리, 쇠바우, 삼방동이 이어졌다. 적막을 깨는 이곳이 유일하게 채탄을 멈추지 않은 철암역 장성광업소다. 어떤 시원(始原)의 향수를 찾아 철길건너 선탄장까지 갔다가 쫓겨 나왔다. 삼방동 비탈길을 돌아 나와 인적 드문 철암시장에서 사진을 찍겠다고 옥상에 오르다가 미끄러졌다. 이때 마주친 원 전파사 김형준님, 미소로 반기며 처음 보는 나그네를 받아들였다. 40년째 이곳을 벗어나지 못했다며 무쇠로 된 연탄 난롯가에서 회환의 이야기를 풀었다.
수집한 폐지를 손수레에 싣고 있던 할머니에게 괭이부리마을을 물었다. 휜 허리를 세우며 내 말을 겨우 접수하더니 얼굴을 찌푸린 채 고개 젓는다. 이곳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무슨 9번지니 18번지니 하며 쪽방촌을 암시했다. 부두에서 불어오는 삭풍 끝에 찾은 마을은 상상을 초월했다. 외부는 그런대로 허름한 일본식건물이 영화세트장처럼 나열되었으나 두 사람이 겨우 지나칠만한 쪽방골목은 놀라웠다. 소리 없이 목숨을 앗아가던 연탄가스가 양철 굴뚝사이로 하얀 부스럼을 만들었다. 무거워 보이는 머리가 무릎에 닿을 듯 쇠진한 노인들이 방에 달린 부엌으로 모습을 보이다가 홀연 사라진다. 귀로에 달동네박물관 구멍가게에서 만화를 보며 자야 한 봉지를 부스러뜨려 먹었다. 아스라한 추억이 짭짤한 콧물처럼 입술로 흘러내렸다.
머리는 크고 몸통은 짜리몽땅하여 비례가 맞지 않는 이 미륵불은 그로인해 국보가 되지못하고 보물218호라는 낮은 가치를 부여받았다. 고려광종 때 건립됐다고 추정할 뿐 미스터리하다. 부처 앞에 서 있는 석등 또한 조형적으로 어색하고 불안정해 품격에 걸맞지 않는 보물 232호로 지정되었다. 이런 양식은 그림으로 치면 민화 풍 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공양을 올리기 위해 조성된 긴 형태의 석조불단 또한 낯설고 이색적이다. 그밖에도 석탑과 배례석(부처님에게 합장하고 예를 올리던 곳)과 석문 등이 제각기 독특하다. 학사모를 거꾸로 쓰고 있는 형상의 이 거대한 미륵보살상 앞에 새해의 다짐도 벌써 허물어진 게 많음을 자백한다. 간사한 변심에 대한 죽비처럼 강추위가 귓불을 찢는 엄동설한에.
올해 일출을 이곳에서 보기로 한건 잘한 것 같다. 강추위에 긴장했으나 어둡고 가파른 새벽산을 오르느라 진땀이 날 지경이다. 올빼미눈알 같은 쌍흥문을 지날 때 먼동이 텄다. 신비로운 석문 밖에 보리암이 등장한다. 군상들이 암자의 난간과 바위에 붙어 서서 일출을 기다렸다. 부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들, 바다는 조그만 섬들을 띄워놓고 고요히 파닥인다. 이윽고 대망의 붉은 해가 떠올랐다. 환호성이 터진다. 올해는~으로 시작되는 수많은 기도들이 제각기 허공으로 피어오른다. 좀 더 멋진 광경을 보려 금산정상으로 치달았다가 다시 사랑 앓는 상사바위를 위문했다. 산 아래 미조항 위로 이성복의 시 남해 금산이 솟는다. 나는 문득 최승자의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꾼다를 무슨 지표처럼 마음 벽에 걸었다.
사제가 되어 중국을 건너온 김대건 신부께서 첫 발자국을 남기신 곳. 그의 순교비가 화산위에 우뚝 서서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첫길을 내기란 어렵다. 시의 첫줄처럼, 그것을 이룬다면 나머지는 저절로 풀려질 것. 아름다운 기와지붕에 고딕식 종탑이 고혹적이다. 성당을 만든 프랑스신부들의 첫 손길이 터전이 된 것은, 화산 중턱에 잠든 소세신부의 무덤에서 찾을 수 있다. 새해벽두, 여명을 여는 시 한편이 어려운 첫 마음을 배회한다. <첫줄을 기다리고 있다/그것이 써 진다면 /첫눈처럼 기쁠 것이다/미래의 열광을 상상임신한/둥근 침묵으로부터/첫줄은 태어나리라/연서의 첫줄과 /선언문의 첫줄/그것이 써진다면/죽음의 반만 고심하리라/나머지 반으로는/어떤 얼음으로도 식힐 수 없는/불의 화환을 엮으리라> -심보선 첫줄
내포지방은 이 땅에 처음 복음이 전파되고 천주교가 탄생한 곳이며, 공세리는 삼남의 조세를 보관하던 공세창이 있던 곳이다. 눈 덮인 언덕 위엔 고딕양식의 공세리 성당이 부활한 예수처럼 엄숙히 서 있다. 성탄절을 앞둔 세상은 기쁨으로 충만 하지만 몇 해 전 임종조차 보이지 않고 성급히 하늘가신 아버지와, 병상의 어머니가 가슴을 찢는다. 가지 많은 늙은 팽나무를 바라보다가 이런 시가 생각났다.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인공호흡기를 뽑는 일에 동의 했어요/병에 걸린 오골계의 똥구녕 같은/ 보름달이 떴어요/ 회백색 분비물이 제 얼굴로 쏟아지고 있어요/ 아버지 그거 아세요, 오늘이 성탄 전야라는 거/ 탄일종이 울리고 있어요/ 끝으로, 제 남은 생의 모든 성탄절을 동봉하네요/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친전 ㅡ박성우
충청도 양반이라고 했던가. 500년 전에 형성된 반가 고택과 초가가 있는 마을 앞엔 넓은 시냇물이 흘렀다. 영암댁, 참봉댁, 교수댁, 참판댁 등 유서 깊은 집들의 택호도 멋지다. 보일 듯 말 듯 나지막이 둘러싼 돌담은 무엇보다 정감 있고 가지런하다. 벗어 놓은 갓처럼 봉긋 솟은 설화산 너머엔 맹사성의 고택이 있는 맹씨행단이 있으니 이 지역은 분명 대표적인 반촌이다. 천수만을 지날 때 하늘위의 철새 떼가 겨울로 가는 부호를 그리며 천천히 날아가고 있었다. 문득 이런 시가 떠올랐다. <하늘 전광판에/ 문자뉴스 몇 줄 떠오르며 스쳐간다./겨울 전선 급속히 남하 중/지나가던 허수아비들이/ 일제히 멈춰 서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기러기 행군 오세영
<강호에 봄이드니 미친흥이 절로난다/ 탁료계변에 금린어 안주로다/ 이 몸이 한가해옴도 역군은이 샷다> 벌써 눈부신 서설이 겨울을 재촉하는 즈음, 강호사시사의 맹사성 고택을 찾았다. 오래된 느티나무 가지에 흰눈이 곡선을 그리고 있다. 맹사성이 심었다는 600년 은행나무는 그의 청백리 정신처럼 오늘도 곧게 섰다. 행단(杏壇)은 은행나무의 지칭 외에도 후학을 가르치며 공부하던 곳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최영장군이 살던 맹씨 고택은 가장 오래된 민간인의 집이라는데 가치를 두지만, 장군이 맹사성을 어릴 때부터 눈여겨 오다가 손녀사위로 들인 후 이 집을 물려주었다는 유래도 뜻 깊다. 소타기를 즐겼고 옥피리를 만들어 불었다는 그의 소박함은 화장실의 클래식 음악으로 이어졌다.
잎을 떨궈 낸 나무들의 외로운 풍경. 바스러질 듯한 잎들을 아직 떨쳐내지 못한 활엽수들마저 허전하다. 자식들을 대처에 내보낸 부모 같고, 혼기를 놓쳐버린 청춘남녀 같기도 하다. 인간도 나무도 더불어 숲을 이루고 살아야 아늑한가보다. 남녘의 매화 보러 떠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가을 지나 겨울이라니. 아궁이의 장작불처럼 타버린 세월, 난로 위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가 나지막이 생을 속삭인다. 수생식물이 자라는 호수도 나무들을 물구나무세운 채 차갑다. 북적대던 수목원은 한해를 정리하는 발걸음처럼 고즈넉하다. 붉은 메타쉐카이어 가로수길, 온몸을 비틀어대는 향나무, 물방울 온실에는 세월 모르는 꽃들이 어둠속의 빛처럼 밝다.
피 묻은 역사의 소용돌이에도 소리 없이 흐르는 금강, 그 건너에 공산성이 있다. 금서루에 들어서자 문화해설사가 안내를 자청했다. 부담스러워 선채로 대강의 설명을 듣는데 매우 구체적이다. 알고 가는 길이 한결 가볍다. 쌍수정 아래 궁터가 있고 무엇보다 원형극장을 닮은 연못 터가 인상적이다. 복원된 임류각의 문양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백제의 화려한 역사가 전해온다. 광복루를 지나자 칡넝쿨 드리운 토성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강변으로 접어들어 성벽길 따라 내려오는데 영은사 앞에 멋들어진 만하루와 연지가 내려다보였다. 다시 언덕을 오르면, 잠종 냉장고가 마치 소크라테스의 감옥처럼 쇠창살을 매달고 있다. 누에부화를 뽕잎 나는 오월까지 늦추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토굴 냉장고다. 나는 다시 가을빛 따가운 길 걸어 무령왕릉 참배 길에 오른다.
근대란 기억의 가시거리에 있는 어렴풋한 경험의 이미지이거나 가까이 전해지는 추억 같은 것. 개항(1983) 100년을 넘긴 인천항은 스치듯 지나간 근대의 모습들이 굴곡진 세월의 무늬처럼 고스란히 남아있다. 자유공원을 오르는 길 양쪽으로 좌측은 청나라의 조계지, 우측은 일본의 목조건물과 르네상스식 은행들이며 우체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청나라의 조계지 자리는 차이나타운으로 북적대고 그들이 이 땅에서 막노동하며 먹던 짜장면이 집집마다 옛 맛을 깨운다. 짜장면과 화덕만두를 먹으려는 긴 줄은 짜장면박물관까지 생기게 한 원인이었을까? 언덕 끝자락의 제물포구락부는 근대적 사교장으로, 러시아인 사바틴이 설계한 요즘으로 치면 클럽에 해당하는 명소다. 그때 그 모습대로 복원해 놓은 바며 의자들이 사뭇 분위기 있다.
청춘을 반납하고 아파할 가슴 저림도 없는 홀가분함으로 이 길을 걷는다. 비운의 덕수궁은 왕을 잃고, 왕비를 잃고, 주인을 잃어 비워진 채, 쓸쓸함에 떨고 있었다. 덕수궁 돌담길이 아름다운 건 기구한 역사에도 고궁의 향기가 함께하기 때문일 것이다. 왕은, 작지만 크고 팠던 대한제국의 그리운 임이기도 했던, 이 땅에 풀뿌리처럼 살아온 지난한 백성들의 끄나풀이었던 것이다. 돌담아래서 달고나를 파는 노부부도, 하숙생이란 옛 영화 포스터를 내걸고 호박엿을 파는 아저씨도 이곳에선 외롭지 않다, 조그만 정동교회의 오래된 향기는 은행잎처럼 따뜻하고, 파란 하늘이 파도처럼 걸려있는 언덕 위 러시아공사관도 하얀 눈부심이다. 나는 단풍잎 나부끼는 정동길을 혼자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