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어주는 남자] 참음은

참음은 - 김수영 참음은 어제를 생각하게 하고 어제의 얼음을 생각하게 하고 새로 확장된 서울특별시 동남단 논두렁에 어는 막막한 얼음을 생각하게 하고 그리로 전근을 한 국민학교 선생을 생각하게 하고 그들이 돌아오는 길에 주막거리에서 쉬는 十분동안의 지루한 정차를 생각하게 하고 그 주막거리의 이름이 말죽거리라는 것까지도 무료하게 생각하게 하고 기적(奇蹟)을 기적으로 울리게 한다 죽은 기적을 산 기적으로 울리게 한다 《김수영 전집》, 민음사, 1981 프랑스의 대학입학 자격시험 바칼로레아(Baccalaureate)는 8개 분야로 나뉘어 치러지는데 특히 철학시험 논제는 사회적 이슈가 되어 수험생은 물론 각계각층의 열띤 토론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철학시험 논제 중에 유난히 기억에 남는 출제가 있는데, 참을 수 없는 것은 참아야 할까?라는 것이다. 예상되는 답안은 참거나 참지 말아야 한다는 두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어쨌든, 어느 쪽을 택하든 왜라는 장벽을 뚫고 가야만 한다. 왜 참아야 하고, 왜 참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해 각각의 논거를 내세우겠지만 참을 수 없는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들의 일환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두 논지의 주장은 동일한 목적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개선에 대한 희망이 없이 인내(忍耐)만 강요하는 주장은 초라하고 무기력하다. 힘없는 내가 참아야지, 그래도 예전보다 좋아졌으니까 참아야지라는 식의 말들로 참을 수 없는 상황을 비껴가는 것은 옳지 않다. 그래서 김수영 시인의 〈참음은〉이라는 시는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만연한 이 시대의 현실을 여러 측면에서 돌아보게 만든다. 모(某) 소설가가 〈참음은〉에 대해 이렇게 풀이를 했다. 그래도 당시 상황은 6.25 전쟁으로 어려웠던 어제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래서 참음은 어제를 생각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죽은 기적을 산 기적으로 울리게 한 것이었다.라고. 여기에 덧붙여 가난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있었다. 부와 가난이 본질적으로 상대적 개념이므로, 앞으로 사회가 발전하고 부유해져도,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은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잘라 말하자면, 그의 해석은 온당치 않다. 어제보다 덜 가난하다는 이유로 오늘의 가난을 참아야한다거나, 모든 것이 상대적이어서 가난한 사람은 늘 있을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매우 위험해 보인다. 세상이란 다 그런 것이니 분노하지 말고 그냥 참고 살라는 것은 얼룩진 벽에 종이를 붙여놓고 얼룩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다. 김수영이 강조한 것은 생각하게 하고라는 반복적 표현에 있다. 성찰을 통해 막막한 얼음과 지루한 정차와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그 얼음의 땅으로 전근을 간 초등학교 선생님의 애절한 사연을 찬찬히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들의 기적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 김수영시인의 생각일 것이다.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니라 왜 참아야하는 지를 분명히 인지할 때 참음은 비로소 희망이 될 수 있고, 산 기적이 될 수 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봐야 한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가난의 저 솔깃함

가난의 저 솔깃함 - 정우영 황사가 자욱이 깔리는 새해 아침, 조촐한 시야 밖으로 북소리 퍼진다. 소년은 간데없고 단출한 시구詩句만 남아서 작은 북 울린다. 따뜻하다. 가난을 넘어온 저 솔깃함. 올겨울은 외롭지 않겠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 어찌 따로 있을까. 설운 푸념도 기꺼이 꺼내 읽겠다. 낡은 바흐에 귀 기울이다 들여다보는 허름한 생의 등성이. 천진한 음표가 움트고 있다. *김종삼의 시 북 치는 소년 첫 행에서 가져옴. 《활에 기대다》, 반걸음, 2018. 2019년 새해도 벌써 한 달이 바람처럼 훅 지났다. 삶의 여정을 산행에 비유하자면, 오르는 길은 청춘의 시간이고 내려가는 길은 청춘 이후의 시간일 것이다. 그래서 젊음의 시간은 더디고 힘들며 중년의 시간은 빠르고 하염없다. 물리적 시간은 일정하고 차갑게 흐르지만 마음의 시간은 들쭉날쭉 뜨겁게 움직인다. 모가 난 돌이 구르고 굴러 동글동글한 자갈돌이 되듯 사람 사이에 기대어 부딪히고 깨지다보면 바다에 다다른 강물의 넉넉함처럼 솔깃한 것에 기대게 된다. 솔깃함이란 그럴듯해 보여 마음이 쏠리는 데가 있음을 뜻한다. 천지사방으로 좌충우돌하던 젊음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한발쯤 앞에 서서 호젓하게 나를 부르는 타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만한 나이가 된다. 그래서 또 하나의 세상을 새롭게 살게 된다. 정우영 시인의 시 가난의 저 솔깃함은 그런 홀가분한 마음이 들게 한다. 홀가분해진다는 것은 많은 짐을 져본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어려움을 겪지 않은 이가 어찌 설운 푸념도 기꺼이 꺼내 읽을 수 있겠는가. 기꺼이의 넉넉한 품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픔과 열정과 혹독의 시간을 건너왔을 것이다. 그 시간의 흐름을 시인은 소년은 간데없고라는 표현에 담아낸다. 소년의 뜨거웠던 열정이 지나간 자리에 단출한 시구만 남아 따뜻하게 작은 북을 울리는 시간, 그것이 가난의 저 솔깃함일 것이다. 시인이 말하고 있는 가난은 물질적 궁핍이 아니라 조촐하고, 따뜻하고, 외롭지 않은 마음의 아름다움일 것이며, 기꺼이로 모든 푸념과 허름함을 품어낼 수 있는 완숙의 지점에 도달했을 때 얻게 되는 청빈(淸貧)일 것이다. 그런 마음이 되면 굳이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라는 수사에 따로 매이지 않아도 스스로를 아름답게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새로운 삶을 노래할 천진한 음표가 움트고 있는 정우영 시인의 새해가 어떤 음악을 만들어낼지 내심 솔깃해진다. 산의 풍경은 오를 때는 잘 보이지 않지만 내려갈 때는 잘 보이기 마련이다. 우리의 삶도 그러할 것이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일진(日辰)

일진(日辰) - 신현정 오늘따라 나팔꽃이 줄 지어 핀 마당 수돗가에 수건을 걸치고 나와 이 닦고 목 안 저 속까지 양치질을 하고서 늘 하던 대로 물 한 대야 받아놓고 세수를 했던 것인데 그만 모가지를 올려 씻다가 하늘 저 켠까지 보고 말았다 이때 담장을 튕겨져 나온 보랏빛 나팔꽃 한 개가 내 눈을 가렸기 망정이지 하늘 저 켠을 공연스레 다 볼 뻔하였다. 《자전거 도둑》, 애지, 2005. 언제부턴가 신문을 읽을 때 1면 주요기사를 제치고 부음란을 먼저 찾아 훑어보고 곧바로 오늘의 운세를 챙겨 보는 버릇이 생겼다. 죽음의 소식과 하루의 운세를 연달아 겹쳐 읽는 것이 참 이상야릇한 행동이라 여기면서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친숙한 두려움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 감정의 실체를 말로 또렷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버스 운전석 앞에 오늘도 무사히!라는 문구와 함께 기도하는 소녀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떠올려본다면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것이 주는 두려움보다 친숙한 것에서 느끼는 두려움이 더 깊은 흔적을 남긴다. 프로이트는 친밀한 대상에게서 느끼는 낯설고 두려운 감정을 운하임리히(unheimlich)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운하임리히는 집과 같지 않은이라는 뜻의 독일어로 친숙한 것에서 느끼는 심리적 공포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신현정 시인의 시 일진은 나팔꽃이 핀 마당에서 양치하고 세수를 하는 정겨운 풍경을 서정적 묘사로 그려내고 있어 앞서 말한 친숙한 두려움과는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그렇지 않아 보인다. 오늘따라 공교롭게 그만 모가지를 올려 씻다가 하늘 저 켠까지 보고 말았다는 진술이 여러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그만이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찌해볼 도리도 없이 당하게 되는 순간을 의미한다. 오늘따라와 그만의 사이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두려움일 것이다. 보랏빛 나팔꽃이 내 눈을 가렸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하늘 저 켠을 공연스레 다 볼 뻔하였다.는 진술에서 시인이 겪고 있는 모종의 두려움과 그것이 내뿜는 심적 진동이 여실히 느껴진다. 하늘 저 켠과 보랏빛 나팔꽃이라는 이미지가 서정적으로만 느껴지지 않은 이유는 오늘따라, 그만, 망정이지, 다 볼 뻔하였다.는 시어들이 그날의 운세를 뜻하는 일진이라는 제목과 연결되면서 빚어내는 친숙한 두려움의 정서 때문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시를 쓸 때 시인은 암투병중이었다고 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내는 오늘이라는 시간의 절박과 소중을 이만큼의 서정으로 넉넉하고 아름답게 표현해낼 시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죽음은 친숙하고 두려운 사태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 사태를 가려줄 보랏빛 나팔꽃의 사연이 있어 삶은 아름답게 지속된다. 다 드러난 것보다 반쯤 가려진 것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도 무사히!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행간行間

행간行間 - 박목월 이처럼 깊이 눈이 내린다. 이런 일도 있었구나. 전혀 이승의 그것 같지 않은 부드러운 것이 어깨에 쌓인다. 그렇다. 이제는 깊이 조용할 세계에 들어섰다. 모든 소리는 내면으로 울리고 가는 귀가 먹은 오늘의 눈 시도 죽음도 눈처럼 가벼워지고 아무리 걸어도 발에 땀이 배지 않는 오늘의 눈 적막한 행간이 전혀 이승의 그것 같지 않는 부드러운 것이 온다. -《박목월 시전집》, 민음사, 2003. 문득이라는 부사(副詞)는 캄캄한 방에서 라이터를 켜는 것처럼, 숨겨진 혹은 잊고 있던 사물과 기억들을 순간적으로 소환한다. 그래서 문득은 일상의 따분함을 가로질러 어떤 의미들을 새로이 되새겨 보게 만든다. 그 되새김은 아픔일수도 기쁨일수도 있겠지만 곱씹어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면에서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시인들은 문득의 시간을 사랑한다. 평범하고, 지루하고, 고통스런 일들로 덜그럭거리는 생활의 불편한 뜨락에서 아름답고, 소중하고, 내밀한 것들이 주는 행복의 맛을 감식토록 해주는 문득의 따뜻한 방문(訪問)은 그래서 반갑다. 문득 떠올린 첫사랑, 문득 떠올린 친구, 문득 떠올린 고향처럼 문득의 시간은 아련하고 아득하지만 그 아렴풋함으로 하루 동안 쌓인 일상의 피로들을 부드럽게 풀어준다. 박목월 시인의 행간은 문득의 부드러운 시간을 생각해보게 만든다. 눈 내리는 것을 보며 이처럼 깊이 눈이 내린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득의 시선에서 온 것이다. 늘상 봐왔던 눈의 풍경이 전혀 이승의 그것 같지 않은 부드러운 것으로 느껴지는 순간은 거칠고, 가볍고, 시끄러운 일로 가득한 일상의 시간과 대척(對蹠)한다. 이런 일도 있었구나.라고 느낄 만큼 깊고, 부드럽고, 조용한 시간을 맛보는 시인의 모습에서 평온함과 함께 피할 수 없는 쓸쓸함의 무게가 느껴진다. 밥벌이를 위해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녀야만 오늘들의 연속, 그것이 이승의 고달픔이며 삶의 무게일 것이다. 문장과 문장의 행간에 담긴 어떤 적막처럼, 내리는 눈과 눈 사이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이와 내면과 부드러움을 읽어내는 시인의 심정이 참으로 애틋하다. 아무리 걸어도 발에 땀이 배지 않는 오늘의 눈은 가볍고 부드럽다. 문득의 따뜻한 방문으로 무거움의 시간들을 잊고 눈 속을 총총히 걸어가는 시인의 뒷모습이 바로 적막의 행간일 것이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적막이 있다. 그 적막 안에 오늘의 쓸쓸함이 있고, 내일을 살아야 하는 희망도 있다. 쓸쓸함과 희망의 엇갈림을 붙잡아 우리를 살게 만드는 것이 문득의 손길이다. 이런 일도 있어구나.라는 문득의 생각으로 불편의 일상을 횡단할 때, 내면의 깊은 창(窓)이 열리고, 그 안쪽에서 우리가 잊고 있었던 전혀 이승의 것 같지 않은 행복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일몰(日沒)

일몰(日沒) - 황인숙 네 얼굴을 알아볼까 봐 두건을 쓰고 네 얼굴을 알아볼까 봐 역광 속에서 그림자처럼 스쳐 인파 너머로 넘어가는 너를 돌아보면서 네 개도 내게도 낯선 거리를 돌아보면서 내 모든 고인(故人)들을 돌아보면서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문학과지성사. 2016. 다른 사람의 얼굴은 나의 얼굴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사랑하고 있는 나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에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모든 말을 가능하게 하고 모든 말을 시작하는 것이 얼굴이다. 그 점에서 얼굴은 말한다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얼굴로 말한다. 그의 슬픈 얼굴은 나의 슬픈 얼굴이다. 나는 그의 얼굴이 말하는 것에 위로를 보내야만 한다. 사랑이란 상대의 얼굴이 나에게 명령하는 것에 헌신하고 투신하는 것이다. 얼굴의 명령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바로 레비나스가 말한 사랑의 윤리다. 사랑의 명령은 강요나 억압이 아니다. 책임이다. 그의 얼굴에서 나의 얼굴을 읽어내지 못하면 그 어떤 사랑도 결국엔 파국을 맞는다. 응답과 책임의 문제는 연인 사이의 사랑은 물론 가족과 친구와 이웃에 대한 사랑에도 적용되는 윤리적 당위일 것이다. 황인숙 시인의 일몰은 조용하고 쓸쓸하고 외롭고 안타까운 여러 개의 감정들이 동시적으로 밀려와 읽는 이의 마음을 한없이 두드린다.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겹겹의 감정들을 시인은 일몰의 풍경에 담아 제시한다. 시의 문맥으로 보면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것이 분명해 보인다. 무슨 연유로 그리 됐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네 얼굴을 알아볼까 봐 두건을 쓰고/네 얼굴을 알아볼까 역광 속에서라는 표현을 통해 너를 향한 화자의 사랑이 아주 깊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네 얼굴을 알아볼까 봐 두건을 쓰기보다는 내 얼굴을 알아볼까 봐 두건을 쓴다. 그런데 시인은 네 얼굴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네 얼굴이 곧 내 얼굴임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의 얼굴에서 나의 얼굴을 보게 될까 두려워하는 마음과 아직도 남아있는 사랑의 감정을 내밀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 2행의 표현을 그가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두건을 쓰고 역광에 서있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도 충분히 있다. 이별이 누구의 잘못 때문인지를 따지는 것은 유치하다. 그것은 사랑했던 시간들에 대한 훼손이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얼굴에서 말의 시작을 찾지 못했고, 그로인해 서로가 서로의 말에 응답하지 못해 엇갈렸다는 사실이다. 얼굴에 담긴 명령에 응답하지 못하는 사랑은 낯선 얼굴이 되고 고인이 된다. 사랑은 힘들고 아프다. 그러나 우리를 살게 하는 무한의 힘이다. 내 모든 고인(故人)들을 돌아보면서라는 마지막 구절은 회한의 쓸쓸함이라기보다는 못다 읽은 사랑의 얼굴을 되돌아보려는 또 다른 사랑의 시작으로 읽고 싶다. 너의 얼굴에 대한 나의 무조건적인 환대, 그것이 사랑의 윤리일 것이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머나먼 옛집

[시 읽어주는 남자] 팽이

[시 읽어주는 남자] 가을의 향기

가을의 향기 - 김현승 남쪽에선 과수원의 임금(林檎)이 익는 냄새, 서쪽에선 노을이 타는 내음…… 산 위엔 마른 풀의 향기, 들가엔 장미들이 시드는 향기 당신에겐 떠나는 향기, 내게는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 모든 육체는 가고 말아도, 풍성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 상(傷)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여,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이여…… 《김현승 전집》, 민음사, 2005. 숭고함이 사라진 시대는 불행하고, 아름다움이 매몰된 삶은 참혹하다. 모든 것의 척도가 ‘돈’으로 귀결되는 맹목의 사회는 숭고함과 아름다움의 시간을 우리에게서 가차 없이 앗아가 버린다. 그리하여 우리는 ‘감흥(感興)’이라는 말을 잊고 기계처럼 무감각하게 산다. 아름답다는 말의 ‘뜻’은 알지만 아름답게 사는 ‘방법’은 모른다. 모른다기보다 외면하고 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낙엽 지는 날의 쓸쓸함과 첫눈 오는 날의 설렘은 한가한 사람들의 ‘배부른 감정’처럼 여겨진다. 극단적인 예이겠지만, 어떤 이는 “꽃보다 돈이 아름답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의 말은, 모든 감흥이란 돈으로부터 나온다는 무서운 논리의 발현으로 들린다. 세속을 넘어서고자 하는 숭고한 정신과 자연이 우리에게 전하는 미(美)의 속삭임이 ‘돈’의 손아귀에 갇혀 망각되는 이 시대의 가을은 과연 풍요롭고 행복한 계절인 것일까? 이 물음으로 나는 김현승 시인의〈가을의 향기〉를 읽어본다. 이 시가 발표된 년도는 정확치 않지만 1963년에 발간된 시집《옹호자의 노래》에 수록된 것으로 미루어본다면 1960년대쯤에 씌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후 10년의 시간은 모두에게 어지간히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도 숭고하고 아름다운 시가 쓰였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임금(林檎)이 익는 냄새”와 “노을이 타는 내음”, “마른 풀의 향기”와 “장미들이 시드는 향기”로 후각화된 가을의 정취는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가슴에 물씬물씬 와닿는다. 냄새는 풍경을 깊고 풍요롭게 만든다. 여기에 ‘당신’의 “떠나는 향기”와 ‘나’에게 남은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가 더해짐으로써 시인의 가을은 아주 짙게 삶의 애틋한 여운들을 풍겨낸다. 익어가는 것과 말라가는 것, 영원한 것과 유한한 것, 떠나는 것과 남는 것, 상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가을의 “풍성한 향기”로 담아내는 시인의 정신이 숭고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상(傷)하고 아름다운 것들”과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을 늘 가슴 한켠에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몸은 감각의 그릇이다. 그 안에는 기쁨과 슬픔, 고통과 환희의 시간들이 담겨있다. 삶이란 그런 두 개의 감각적 시간을 ‘높고 깊은’ 숭고의 정신으로 조율해가는 음악의 시간일 것이다. 돈의 바퀴에 깔려 감흥을 잃은 우리의 몸을 ‘높고 깊은’ 가을의 향기로 다시 일깨우는 것, 그것이 아름답게 사는 ‘방법’이라 믿는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밥

밥 - 허연 세월이 가는 걸 잊고 싶을 때가 있다.한순간도 어김없이 언제나 나는 세월의 밥이었다.찍소리도 못하고 먹히는 밥,한순간도 밥이 아닌 적이 없었던, 돌아보니 나는 밥으로 슬펐고,밥으로 기뻤다.밥 때문에 상처받았고,밥 때문에 전철에 올랐다.밥과 사랑을 바꿨고,밥에 울었다.그러므로 나는 너의 밥이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2008. 네덜란드의 생물학자 미다스 데커스(Midas Dekkers)가 쓴 ‘시간의 이빨’은 제목이 무척 강렬하다. 그는 시간을 ‘이빨’을 지닌 생명체로 의인화함으로써 우리가 시간에 의해 먹히는 존재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의 표현에 빗대어 생각하자면 인간은 ‘시간의 밥’인 셈이다. 시간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이빨자국을 우리 몸에 남긴다. 늙음과 쇄락과 죽음이 그 흔적이다. 미다스 데커스는 시간의 입에 넣어져 씹히는 삶의 운명을 비극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늙음은 결코 실패가 아님을 강조한다. “쇠약해진다는 것은 얼마나 멀리 여행했는지를 알려주는 시계”와 같은 것이며, 죽음은 몰락이 아닌 완성이라고 말한다. ‘시간의 이빨’은 “아름다움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움의 파괴”라는 믿음이 만든 삶에 대한 유려한 보고서라할 수 있다. 그렇지만 죽음이 아름다움의 완성이라는 그의 말에 선뜻 동감하기는 어렵다. 죽는다는 운명의 수락보다 살아야 한다는 현실의 당위(當爲)가 더 다급하고 생생하기 때문이다. 허연 시인의 시 ‘밥’은 ‘세월의 밥’으로서의 인간의 운명과 ‘현실의 밥’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해야하는 생활인의 슬픔을 나란히 진술하고 있어 더욱 깊게 공감이 된다. 세월에게는 “찍소리도 못하고 먹히는 밥”의 신세이며, 현실에서는 ‘밥 때문에’ 울고 웃어야 하는 화자의 애달픈 처지는 밥벌이로 삶을 영위하는 생활인들의 실존과 삶을 표상한다. ‘세월의 밥’이라는 실존의 운명보다 ‘밥’에 울어야 하는 현실의 참담이 우리를 한없이 슬프게 한다. ‘밥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하고, ‘밥 때문에’ 꿈과 사랑을 놓치는 곡절의 시간이 ‘지금-여기’의 생활이다. 그래서 시인은 “세월이 가는 걸 잊고 싶을 때가 있다.”라는 말로 생활의 야속을 자조(自嘲)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속담처럼 먹고살기 위해 ‘전철’에 오르는 억지의 시간이 한없이 먹먹하기만 하다. ‘밥’을 미끼로 우리의 꿈과 사랑을 낚아채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나는 너의 밥”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이 세계의 삶은 참혹하다. 허연 시인의 시 ‘밥’은 밥의 희망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밥의 슬픔을 온전히 다 드러냄으로써 밥의 희망을 생각하게 만드는 역설로 읽혀진다. 그 역설의 의도는 “그 어떤 위대한 일도 밥 한 그릇에서 시작된다.”는 박노해 시인의 말과 상통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신종호 시인

[시읽어주는남자] 젊음

젊음 -파블로 네루다 길가에 서 있는 자두나무 가지로 만든 매운 칼 같은 향내,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손가락 끝에서 미끄러지는 생기의 방울들,달콤한 성적(性的) 과육,안뜰, 건초더미, 으슥한집들 속에 숨어있는 마음 설레는 방들,지난날 속에 잠자고 있는 요들, 높은 데서, 숨겨진 창에서 바라본 야생 초록의 골짜기:빗속에서 뒤집어엎은 램프처럼탁탁 튀며 타오르는 한창때. 《네루다 시선》, 정현종 옮김, 민음사, 2007. 1904년 칠레 국경지방에서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는 열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열아홉 살에 첫 시집 황혼 일기를 발간했다. 일찍부터 그의 비범함을 알아챈 멕시코의 문호 카를로스 푸엔테스(Carlos Fuentes)는 “그가 손을 대는 순간, 모든 것은 시가 되었다”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감각적인 연애시에 출중했던 네루다는 스페인 내전을 계기로 공산당에 입당하면서 민중시인의 길을 걷게 된다. 세 번의 결혼, 빈궁한 외교관 생활과 여행, 도피와 망명을 겪어야 했던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시의 행보는 혁명과 사랑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된다. 이탈리아에서의 망명생활 중 마리오라는 우편배달부와의 우정을 그린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시를 배우고자 하는 마리오에게 네루다는 “시란 설명하면 진부해지고 말아. 시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정을 직접 경험해 보는 것뿐이야”라고 말한다. 감정을 직접 경험한다는 것은 감각의 문을 열고 온 몸으로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젊음과 늙음은 시간의 길이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의 농도와 깊이로 구별된다. 나이가 젊을지라도 감각이 무디면 젊다할 수 없다. 반면 나이가 들어도 감각이 생동하면 젊다할 수 있다. 네루다의 시 젊음은 젊음의 생기와 설렘을 감각적 비유로 잘 전달하고 있다. ‘매운 칼 같은 향내’라는 표현은 설명을 통해서는 온전히 이해될 수 없다. 감각과 경험으로 느껴야할 표현이다. ‘설탕 같은 키스들’이라는 표현은 독자에게 ‘달콤함’이라는 공통의 감각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 달콤함의 농도는 개인의 경험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 너무 달아서 어지럼증을 느낄 만큼 강렬한 키스도 있겠고, 가볍게 달콤함만 남기는 키스도 있을 것이다. 감각의 문을 얼마나 여냐에 따라 경험의 깊이는 달라진다. 그러하기에 네루다의 시 젊음은 문맥으로 읽기보다는 감각으로 읽어야 한다. ‘생기의 방울’, ‘성적(性的) 과육’, ‘방’, ‘창’, ‘야생 초록의 골짜기’, ‘램프’라는 내밀한 시어들과 ‘미끄러지는’, ‘달콤한’, ‘설레는’, ‘잠자고 있는’, ‘숨겨진’, ‘뒤집어엎은’ 등의 술어들이 빚어내는 ‘한창때’의 풍성한 생기, 그것을 이성(理性)이 아닌 감각으로 음미할 때 시 젊음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다. 생각함으로 존재한다기보다 감각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인간의 참모습일 것이다. 젊은 감각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창때는 옛날이 아니고 모든 이들의 지금이다.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돌

돌 ―김광석金光石 한우진 공중에 돌이 떠 있다 사랑했을 뿐이다, 노래했을 뿐이다 돌 속에 든 등잔의 혈관이 터진다죽은 심지에 노래를 댕긴돌이 공중에 떠 있다 흐리거나말거나 밤낮으로 빛난다 《까마귀의 껍질》, 문학세계사, 2010.상상력이란 무엇일까? 국어사전에 의하면,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그려 보는 힘’이라 풀이되어 있지만, 신발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 것처럼 속내가 시원치가 않다. 묻고 대답하는 말들의 오고감이 다 그렇게 후련치 않기에, 강압의 방편으로 모두들 이렇게 생각하자고 못 박아 약속한 게 사전적인 정의(定義)일 것이다. 사전은 소통의 매뉴얼이기도 하지만 말들의 감옥이기도 하다. 시어(詩語)는, 보편의 망치로 쾅쾅 못질이 되어 생명력을 잃은 언어들에 생기(生氣)를 불어 넣는 특별한 말들이다. 생기란 상상력이다. 상상력에 의해 일상의 언어들은 불가해한 세계로 진입한다. 꿈꿀 수 없는 것을 꿈꾸게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할 때 세상은 경이로운 장소가 된다. 상상력은 과학을 넘어선 과학이고, 이해를 넘어선 이해다. 상상력은 부딪혀 되돌아오는 ‘반향’(反響)의 힘이 아니라 영혼을 뚫고 들어가 요동하는 ‘울림’의 힘이다. 한우진 시인의 돌-김광석金光石은 가수 김광석을 시의 소재로 삼고 있다. 그의 시는 김광석에 대한 추모로 읽혀질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시의 저변을 맴도는 상상력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공중에 돌이 떠 있다”는 첫 구절에서 불가해하한 인상을 받게 되는데, 이러한 당혹의 느낌은 중력에 지배당하는 ‘돌’의 실체를 해체시켜 새처럼 만들어버림으로써 경이감을 준다. 이는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의 ‘피레네의 성’이라는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푸른 하늘에 우뚝 떠있는 르네 마그리트의 바위는 상상력의 힘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한편, 그의 바위는 너무 압도적이어서 어떨 때는 슬몃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한우진 시인의 돌은 다른 느낌을 선사한다. 그의 돌 속에는 불이 있다. ‘등잔의 혈관’이 터져 ‘죽은 심지’에 ‘노래’를 당기는 그의 돌은 ‘타는 돌’, 아니 ‘타는 심장’으로 다가온다는 점에서 르네 마그리트의 검은 바위와는 사뭇 다른 인상이다. 오로지 사랑하고 노래했을 ‘뿐’인, 그래서 ‘흐리거나 말거나’ 홀로 공중에서 자기의 영혼(심장)을 태웠던 가수 김광석. 시인은 그를 통해 진정한 예술가의 초상이 무엇인지를 말하려 한다. 그것은 ‘돌 속에 든 등잔의 혈관’을 터트리며 공중에 떠있는 돌의 모습일 것이다. 합리성만 따지는 세상은 빈곤하다. 생각의 중력을 거슬러 새처럼 비상하는 상상력의 날개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생기를 잃어 피곤만 흥건할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비틀어 당연하지 않을 것을 불쑥 내밀어 보일 때 세상은 한결 산뜻하고 청량해 질 것이라 믿는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그 여름의 끝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강릉 오죽헌(烏竹軒)에 가면 600년 된 목백일홍을 만나볼 수 있다. 짙은 분홍색에 보라색 기운도 군데군데 서려 있는 목백일홍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묘한 꽃빛깔로 보는 이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다. 아무래도 꽃과 사람의 심장은 한통속인 듯하다. 특히 붉은 꽃들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꽃을 보면 마음이 설레고 아득해진다. 꽃을 만나는 심사(心思)란 어떤 기억과의 내밀한 조우일 것이다. 기억은 과거이며, 경험의 ‘끝’에 매달려 있다. ‘끝’은 참담과 설렘의 두 감정이 맞부딪치는 경계의 시간이다. 꽃 지는 올해의 사연은 참담하지만 꽃 피는 내년의 사연은 설렘으로 가득하다. 오죽헌의 목백일홍은 그런 까닭으로 600년을 훌쩍 건너왔다. ‘꽃’과 ‘심장’, ‘기억’과 ‘끝’, ‘참담’과 ‘설렘’의 두 지점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사연은 단연 사랑일 것이다. 이성복 시인의 그 여름의 끝은 폭풍의 시련을 뚫고 꽃을 피운 ‘나무 백일홍’의 시간을 묘사한다. 그리고 그에 빗대어 자신의 심사를 고백한다.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라는 처음의 진술과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라는 끝의 진술 사이에는 ‘폭풍’과 ‘우박’과 ‘불’과 ‘피’의 뜨거운 사연이 맹렬히 요동치고 있다. 이 요동은 사랑의 몸부림일 것이다. “넘어지면서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격정의 붉은 시간이 사랑의 얼굴이고 빛깔이다. 그래서 사랑은 때로 감당하기 힘든 절망이 된다. 절망이 없는 사랑은 가볍고 얕다. 한편 절망이 ‘끝’이 되는 사랑은 참담하다. 사랑의 실패는 사랑의 종말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사랑의 시작이다. 그래서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라는 화자의 진술은 아프게 느껴지면서도 또 다른 사랑의 시작을 기대하게 한다. 이것이 사랑의 역설(逆說)일 것이다. 사랑의 ‘시작’과 ‘끝’은 올해의 꽃이 지고 내년의 꽃이 다시 피는 것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속되는, 그래서 그 내막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장난 같은 것이다. 하여, 중요한 것은 사랑의 실패가 아니라 ‘어떤’ 사랑을 ‘어떻게’ 했는가라는 태도일 것이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열정이다. 이성복 시인은 그 열정을 ‘붉음’의 빛깔로 표현한다. 그 안에는 절망과 희망이 살고 있다. “물질 속은 붉다. 우리 안의 모든 것이 기억한다. 낙원에 다가서는 일은 여전히 우리를 붉게 만든다”는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의 말처럼 사랑의 낙원에 다가서는 일은 심장을 꽃처럼 붉게 만드는 여전한 ‘끝’의 ‘시작’이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늙은 꽃

늙은 꽃 - 문정희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 꽃의 생애는 순간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아는 종족의 자존심으로 꽃은 어떤 색으로 피든 필 때 다 써 버린다. 황홀한 이 규칙을 어긴 꽃은 아직 한 송이도 없다 피 속에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는 꽃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오묘하다분별 대신 향기라니 《다산의 처녀》, 민음사, 2010. 프랑스의 철학자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는 “인간은 낭비에 의해 극치에 이른다. 즉 낭비는 모든 활동 중에서 가장 영광스런 활동이며 절대 권위의 기호다”라고 말한다. 낭비란 시간이나 재물 따위를 헛되이 헤프게 쓰는 행동을 이르는 말로 대개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다. 그래서 ‘낭비예찬’을 하는 그의 말은 절약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우리에게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들리게 된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생존에 필요한 것을 생산해왔다. 그런데 인간의 노동은 필요 이상의 생산물, 즉 잉여를 창출하게 된 바, 여기에서 인류사의 지독한 문제들이 발생한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잉여를 ‘저주의 몫’이라 명명한다. 모아서 쌓아두려는 소유의 욕망이 전쟁의 본질이며 추(醜)의 근원일 것이다. 잉여를 다 써버리고 낭비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영광스런 행동이라는 그의 낯선 주장은 삶의 황홀과 아름다움이 무엇에 있는 지를 생각해보게 만든다. 문정희 시인의 늙은 꽃은 삶의 진경(眞境)이 어디에 있는지를 묘파하고 있다.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라는 첫 구절의 이면에는 모든 꽃은 늙지 않는다는 당당한 신념이 자리한다. 아름다움이란 시간에 의해 퇴색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돌파하는 어떤 힘에 의해 유지된다. 꽃의 생애는 ‘순간’에 집중하는 힘의 발현이자,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증명하는 ‘종족의 자존심’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과정이다.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하나의 꽃을 피우는 순간은 삶의 절정이고, 존재의 황홀이 느껴지는 떨림의 시간이다. 아름다움은 뭔가를 쌓아두거나 소유하는 것에 있지 않고 쌓여있는 것들을 속속들이 소비하고 낭비하는 사치에 의해 구현되는 자존의 풍경이다. “꽃은 어떤 색으로 피든/필 때 다 써 버린다.”는 시인의 진술은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황홀의 규칙’이고, 미적인 삶의 태도라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주름’을 걱정하거나 ‘장수의 유전자’를 간직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분별’의 삶은 아름다움과는 동떨어진 삶이다. ‘분별’ 대신 ‘향기’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꽃의 삶은 ‘아름다운 낭비’로 요약된다. 사랑이란 생의 에너지를 아름답게 낭비하는 ‘황홀의 순간’이다. “인간은 모든 생물 중에서 잉여 에너지를 가장 강렬하고 사치스럽게 소비하는 동물”이라는 조르주 바타이유의 도발적 정의를 새롭게 생각해본다. 세상에 ‘늙은 꽃’은 없다. 필 때 다 써버리는 사랑의 꽃들만 있을 뿐.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정전의 감정

정전의 감정 - 오석륜 달빛이여, 조금만 아주 조그만 몸을 틀어서 지나가면 안 되겠니? 내 손길과 내 목소리가 그녀에게 불을 붙일 때까지만 파문의 슬하, 시인동네, 2018 사랑이란 무엇일까? 이 물음은 유구하고 끈질겨서 인간의 땅 곳곳에 비탄과 환의를 불러일으킨다.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사랑은 처음에 아름다움에서 발생하여, 다음에는 친절로 확산되고 신체적 욕망으로 확산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그의 말을 세속적으로 풀어보자면,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보고 사랑의 마음이 생겨나 그녀에게 친절을 베풀고 그런 후에 손도 잡고 입도 맞추는 감정의 확산 과정이 사랑이라는 것일 터인데, 이는 ‘사랑의 발생학’이라 불러도 될듯하다.사랑은 개념으로 설명될 문제라기보다는 행위와 감정으로 이해되어질 문제다. 흄은 친절이란 영혼의 세련된 정념이고, 육체의 욕망이란 거칠고 통속적인 정념이라 했다. 그래서 사랑은 통속과 세련을 함께 갖는다는 그의 주장이 한결 멋있어 보인다. 오석륜 시인의 시 정전의 감정은 세련과 통속의 아찔한 경계를 아름답게 오가고 있어 매력적이다. 전기가 끊어져 깜깜해진 ‘정전’의 순간을 사랑의 감정으로 빗대어 표현한 것은 정말로 멋진 수사다. 남녀가 같이 있는 외진 방에 갑자기 정전이 되었을 때, 그 어둠 안에는 수없는 떨림과 머뭇거림과 흥분이 보이지 않게 소용돌이친다. 그런데 얄밉게도 환한 달빛이 창가로 스며든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농익어가는 사랑의 감정이 달빛에 훤히 드러나게 되면 서로가 멋쩍어질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남자의 애틋한 노력이 허사가 될 판이다. 그래서 시의 화자는 달에게 간절히 빈다. “조금만/아주 조그만/몸을 틀어서 지나가면/안 되겠니?”라고. 당사자에게는 절박하고 심장이 타는 상황이겠지만 보는 이에게는 설핏한 웃음을 짓게 하면서도 내심 부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손길과 목소리가 “그녀에게 불을 붙일 때까지만” 몸을 틀어 달라고 달에게 애원하는 남자의 심사는 세련과 통속의 경계를 오가는 아득한 사랑의 감정을 잘 드러낸다. “불을 붙일 때까지만”이라는 마지막 표현이 함축한 여운의 맛이 또한 만만치 않다. 독자에게 ‘그 다음에는?’이라는 설레는 물음과 과연 ‘달은 몸을 틀었을까?’라는 의문도 품게 한다. 그 뒷일이 나도 궁금하다. 격조만 있는 사랑은 공허하고 통속만 있는 사랑은 비속하다. 오석륜 시인의 시 정전의 감정은 엉큼하면서도 격조 있게 사랑의 욕망을 드러낸다. 은근하면서고 솔직한 감정의 표현이 독자의 심사를 흔들어 ‘정전’과도 같은 짜릿한 사랑의 미로 속으로 한껏 몰입하게 만든다.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전생의 모습

전생의 모습 - 이윤학 작년에 자란 갈대 새로 자란 갈대에 끼여 있다 작년에 자란 갈대 껍질이 벗기고 꺾일 때까지 삭을 때까지 새로 자라는 갈대 전생의 기억이 떠오를 때까지 곁에 있어주는 전생의 모습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 문학과지성사, 2008. 지난해 7월에 타계한 소설가 박상륭의 단편소설 두 집 사이-제이의 아해兒孩 얘기에 “시인들은, (외안外眼을 잃기로써 내안內眼을 떠), 저렇게 존재의 비밀을 보아낸다. 시인은 까닭에, ‘사물’을 노래하려면, 먼저 ‘사물을 보는 눈’을 잃어야 한다.”는 빛나는 구절이 비수처럼 매복해 있다. 겉눈을 잃고 속눈을 떠야 ‘사물’을 제대로 노래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우리의 겉눈이 그만큼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일러준다. 그렇다고 시인더러 장님이 되라는 것은 분명 아닌 바, 그의 진의는 현상 너머의 본질을 꿰뚫는 눈을 가지라는 일설로 보인다. ‘보기’는 곧 ‘말하기’의 다른 방식이다. 그래서 잘 보는 사람이 잘 말하기 마련이다. 제대로 본다는 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여 그것의 ‘참뜻’을 읽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상을 배회하는 주관의 눈을 버리고 본질을 파고드는 객관의 눈으로 사물을 마주할 때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비밀들’이 우후죽순으로 푸르게 솟아 발견의 기쁨을 안겨준다. 이윤학 시인의 전생의 모습은 갈대를 묘사함이 분명하다. 그런데 묘사의 시선이 집요하고 세밀하여 예사롭지 않다. 보통사람 같으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화려한 현상에 유혹되어 그 풍경에 성급히 주관의 감정을 쏟아 붓기 마련이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 같다는 비유가 그런 유혹의 예일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작년’의 갈대와 ‘새로이 자라는’ 갈대가 한 줄기에 자리 트고 생멸해가는 일련의 모진 시간을 세밀히 묘사한다. 작년의 갈대 ‘껍질’이 벗겨지고 삭아 떨어질 ‘때’까지 그 곁을 지키며 ‘새로’ 자라는 갈대로부터 삶과 죽음이 ‘전생’(前生)의 등을 맞대며 요동하는 숭고의 장면을 보아낸다는 것은 시인의 ‘내안’이 없었다면 가능치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전생의 기억이 떠오를 때까지/곁에 있어주는 전생의 모습”이란 진술은 박상륭이 말한 ‘존재의 비밀’을 건드려내기에 이른다. 시들어가는 작년의 갈대가 기억해내려는 전생의 모습은 새로 자라는 갈대의 전생일 것이다. 죽음이 삶이 되고, 삶이 죽음이 되는 윤회의 바퀴 밑에서 작년의 갈대와 새로 자라는 갈대는 한 뿌리에서 시작된 애틋한 전생이고, 서로의 뜨거운 사랑이다. 편견이라는 겉눈이 갈등을 부추기는 혼탁한 시절이다. 우리 안에 감겨져 있는 속눈이 떠져 서로의 전생(全生)을 사랑으로 지켜주는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회귀(回歸)―어느 저녁에

회귀(回歸)―어느 저녁에 -백인덕 초저녁 술을 마시다가 오래된 책을 읽다가 행간(行間)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다가 비처럼 서늘한 꿈을 꾸다가 뼈가 부러졌다는 느낌, 아픈 길로만 달려온 것이 아니라 모든 길을 부러진 뼈로 달려왔다는 생각에 너는 멀리서 웃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 웃음, 울음인듯 들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뼈가 시린, 어느 저녁, 쓸쓸한 술을 마시다가 잠깐 《끝을 찾아서》, 하늘연못, 2000. 강에서 태어난 연어들이 다시 강으로 되돌아오는 회귀의 긴 행렬은 웅장하고 엄숙하다. 모천(母川)에 가까워질수록 매끈하고 탄탄했던 몸은 등이 휘고, 턱이 구부러져 험상궂게 변한다. 혼인색으로 붉어진 그들의 모습은 지치고 위태로워 보인다. 곰과 인간의 집요한 포획망을 뚫고 고향에 다다른 암수의 연어들은 마지막 사랑의 힘으로 온몸을 떨며 아름다운 산란을 한다. 그 짧은 알 낳기의 시간이 끝나면, 나뭇잎처럼 가볍게 죽어 강 아래로 떠내려간다. 연어들의 일생처럼, 인간의 삶도 태어난 곳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회귀’의 불가피한 시간일 것이다. 회귀의 길에는 역경의 순간들이 복병처럼 곳곳에 잠복해 있다. 그래서 회귀는 짐짓 두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숭고함의 여운도 짙게 남긴다. 백인덕 시인의 시 〈회귀〉는 회귀의 두려움과 지기성찰의 힘겨운 흔적이 감지된다. 그 두려움은 시인만이 느끼는 개별의 감정이 아닌 모든 이들의 심정에 도사린 공통의 감정으로 읽혀지기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연어들처럼 강인하게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그래서 실패와 좌절을 숨기고 일부러 강한 척을 하거나 아니면 강해져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그런 자기최면의 허세가 삶의 주변에 빈번하게 드러난다. 나 또한 그런 세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백인덕 시인은 “뼈가 부러졌다는 느낌”을 서슴없이 드러내 말한다. 그 솔직함이 읽는 이의 마음을 찌른다. 초저녁에 술을 마시고, 오래된 책을 읽고, 빗소리를 들으며 자신만의 꿈을 꾸는 ‘회귀’의 애잔한 시간이 남들에겐 ‘실패의 시간’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그런 염려가 결국엔 “모든 길을 부러진 뼈로 달려왔다”는 엄청난 고통의 생각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멀리 있는 ‘너’의 ‘웃음’이 ‘울음’으로 들리는 “뼈가 시린, 어느 저녁”의 솔직한 시간은 두렵고 쓸쓸해 보인다. 다행인 것은, 그러한 시인의 쓸쓸함과 괴로움이 ‘잠깐’의 시간 안에 있다는 것이다.‘잠깐’은 여기에서 저기로 건너가는 짧고 강한 도약의 시간이다. 생의 모든 시간은 ‘잠깐’의 연쇄일 것이다. 실패와 두려움과 고통을 ‘잠깐’이라는 주머니 속에 가둬둘 때 삶은 강물을 거스르는 연어들처럼 강인해질 것이다. 백인덕 시인의 시를 읽으며 ‘잠깐’의 넓이와 깊이를 새로이 만끽해본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느릿느릿

느릿느릿 -이은봉 느릿느릿 천천히 잠자리를 정리한다. 여유 있게 시작할수록 아침은 더욱 밝다. 천천히 조간신문부터 펼쳐 들고 읽는다. 그동안의 아침은 너무나 바빴다. 젊어서는 없었다, 게으름을 피울 시간! 오늘은 좀 빈둥댄다, 한가한 마음으로! 분청사기 파편들에 대한 단상, 책만드는집, 2017.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Bertrand Russell)의 수필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제목부터 이목을 끈다. 마치, ‘악덕’을 찬양하라는 ‘도발’처럼 보인다. 러셀은 글머리에서 “사탄은 늘 게으른 손이 저지를 해악을 찾아낸다.”는 어른들의 말을 강직하게 믿어 열심히 일하는 것을 양심의 준칙으로 삼아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믿음이 오산이었다는 것이 바로 〈게으름에 대한 찬양〉의 핵심 내용이다.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에 의해 엄청난 해악이 발생”했기에 행복해지려면 여가를 즐기라는 그의 메시지는 ‘속도와 경쟁’의 바퀴에 깔려 삶의 의미를 잃어가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공감을 준다. 게으름은 악덕이고 근면은 미덕이라는 이분법적 논리에 대해 차라리 “열쇠는 선이고 열쇠구멍은 악”이라고 말하는 편이 낫다고 그는 말한다. 러셀이 말하는 게으름이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윤리적 나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자기배려’의 기술로 이해하는 것이 온당하다. 이은봉 시인의 〈느릿느릿〉은 읽을수록 마음이 편해진다. 그렇지만 또 한편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한다. 세수도 하지 못하고 대충 옷만 챙겨 입고 후다닥 집을 나서 간신히 지옥철에 피곤한 몸을 맡기는 현대인의 ‘아침’은 근로가 미덕이라는 불편한 믿음이 만든, 혹독하게 말하자면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경쟁사회의 차가운 명령이 만든 서글픈 풍경일 것이다. “그동안의 아침은 너무나 바빴다.”는 화자의 진술은 바로 경쟁사회의 악착과 독촉에 끌려 다녔던 과거에 대한 소회일 것이다. 하고 싶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던 소소한 삶의 여유들, 이를테면 천천히 이불을 개고 여유롭게 조간신문을 읽는 아침의 풍경이 그렇게 어려운 일들이었을까? 늦게나마 “게으름을 피울 시간!”을 음미하며 한가한 마음으로 ‘오늘’을 빈둥거리는 화자의 모습이 한갓지고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젊어서는 없었다.”는 화자의 말이 마음에 걸린다. 왜 없었을까? 독자들에게 이 물음을 갖게 하기에 시 〈느릿느릿〉은 시인의 사적 고백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진정한 행복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묻게 한다. 어떤 이들의 아침은 기름지다 못해 권태롭다. 가사도우미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운전사가 모는 고급차를 타고 회사엘 간다. 그리고 소위 ‘갑질’이라 짓을 서슴없이 자행한다. 러셀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쓴 이유는 그들의 기름진 ‘게으름’에 맞서기 위해서일 것이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자기배려의 ‘게으름’으로 ‘근로가 미덕’이라는 시대의 협박(?)에 맞설 때 삶의 진정한 행복이 깃들 것이라 믿는다. 이은봉 시인은 아마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청춘이여, 늦기 전에 게으름으로 반항하자!”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붓꽃이 있는 풍경

붓꽃이 있는 풍경 -자화상 이윤훈 앞뜰의 노란 붓꽃이 잠시 실바람을 그리고 고양이의 줄무늬 건반을 살짝 치다 지우고 허공에 방울새를 띄었다 지우고 나를 금생의 한 풍경으로 쓸쓸히 앉혔다 누가 후생에서 쓸쓸히 나를 보고 있다 생의 볼륨을 높여요, 시인동네, 2018. 빈센트 반 고흐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그중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 ‘귀에 붕대를 한 자화상’이다. 고갱과의 말다툼 끝에 귀를 자른 고흐가 동생 테오를 안심시키기 위해 편지 대신 초상화를 그려 보냈다고 한다. 글보다 얼굴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의 심정을 얼굴을 통해 말하려는 것이 자화상을 그리는 이유일 것이다. 뒤러, 렘브란트, 뭉크, 윤두서 등 유명화가들이 그린 자화상은 자신의 얼굴이 이렇게 생겼다는 사실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이런 말을 하고 싶다는 고백의 심사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인들이 ‘자화상’이라 제목의 시를 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나의 얼굴은 타인에게 건네는 고백의 말이고, 그 말은 타인의 얼굴을 통해 나에게로 다시 돌아온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꽃들을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제반의 행동들은 결국 나를 응시하고 성찰하는 것이다. ‘자화상’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는 이윤훈 시인의 ‘붓꽃이 있는 풍경’은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라기보다는 ‘붓꽃’이 그린 시인의 초상화에 더 가깝다 할 수 있다. 내가 그린 나의 모습보다 남이 그린 나의 모습이 더 진실해 보일 때가 많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없다. 거울이 잔인한 이유는 감추고 싶은 것까지 남김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에 드러난 붓꽃의 이미지는 노란 물감을 머금은 붓을 연상시킨다. ‘실바람’과 고양이의 ‘줄무늬 건반’과 ‘방울새’를 그렸다 지우는 붓꽃의 손놀림은 사물을 비치는 거울처럼 주변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붓꽃이 그린 화폭 안에 시인은 ‘금생의 한 풍경’으로 쓸쓸히 앉혀진다.실바람과 고양이와 방울새를 그렸다가 지운 자리에 그려진 ‘나’의 초상화는 ‘금생’에도 쓸쓸하고 ‘후생’에서도 쓸쓸할 것 같다는 어떤 예감의 표정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쓸쓸함의 예감이 허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붓꽃을 바라보는 시인의 얼굴과 시인을 바라보는 붓꽃의 얼굴은 쓸쓸함보다는 따뜻함으로 교감하는 하나의 얼굴일 것이다. 쓸쓸함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따뜻함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붓꽃’의 꽃말은 ‘기쁜 소식’이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기쁨은 얼굴에서 나와 얼굴로 전해진다. “얼굴은 말한다. 모든 말을 가능하게 하고 모든 말을 시작하는 것이 얼굴이다.”라는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말을 신중히 떠올려본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자반고등어

자반고등어 -박후기 가난한 아버지가 가련한 아들을 껴안고 잠든 밤 마른 이불과 따끈따끈한 요리를 꿈꾸며 잠든 밤 큰 슬픔이 작은 슬픔을 껴안고 잠든 밤 소금 같은 싸락눈이 신문지 갈피를 넘기며 염장을 지르는, 지하역의 겨울밤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창비, 2009. 아버지들의 뒷모습은 외롭다. 가족을 위해 직장에서의 수모와 어려움들을 감내하지만 정작 집에 돌아오면 ‘왕따’ 신세를 면치 못한다. 환영받고, 위로받아야할 이 시대의 가장들이 베란다 혹은 아파트 계단에 쪼그려 앉아 몰래 담배를 피운다.이제는 그 사소한 자기위로의 짤막한 순간도 여의치 않아 보인다.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한 조건 중 하나가 ‘아버지의 무관심’이라는 말이 공공연한 진실처럼 오가는 이 쓸쓸한 사회에서, 아버지들은 남모를 이중의 소외를 속으로 혼자 겪는다. ‘가부장적’이라는 공격적 수식어가 아직도 아버지들을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존재로 몰아세워 일반화하고 있다.예전처럼 밥상을 뒤엎는 막무가내 아버지들은 이제는 거의 없다. 지치고 힘든 아버지들이 밤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보며 자신의 집에서 손님처럼 불편하게 혼자 앉아있을 뿐이다. 그들은 이내 복받쳐 이렇게 말한다. “내가 돈버는 기계냐?” 앞에서 말한 내용이 과장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들이 왜소해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의 과문(寡聞)이겠지만, 아버지를 소재로 한 시들 중에 건강하고 밝고 든든한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한 시는 자주 보지 못했다. 술 마시고, 때리고, 행패를 부리는 아버지들이 많았다. 물론 그럴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쉽다. 우리의 근대사가 아버지들을 그렇게 만든 것 같다. 그 복잡한 사정은 접어두고, 박후기 시인의 ‘자반고등어’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눈물겨운 사연을 생각해본다. 자본주의에서 ‘가난한’이라는 수식은 원죄처럼 들린다. 그래서 ‘가난한’ 아버지와 ‘가련한’ 아들의 모습은 더더욱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의지로 개선될 수 없고, 희망조차 가질 수 없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냉정함 앞에서 ‘마른 이불’과 ‘따끈따끈한 요리’를 꿈꾸며 지하역에서 신문지를 덮고 자는 부자(父子)의 ‘겨울밤’은 읽는 이의 뼛속까지 시리게 한다. ‘큰 슬픔’이 ‘작은 슬픔’을 껴안고 자는 모습을 한 손의 ‘자반고등어’로 묘사하는 시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아버지의 애틋한 사랑을 보았을 것이고, 그들을 거리로 내몰아 세운 시대의 염량세태를 보았을 것이다. 자반고등어에 염장을 하듯, 아버지와 아들이 덮고 있는 신문지 위로 내리는 싸락눈의 겨울밤이 시인의 마음에 또 다른 슬픔의 염장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시 ‘자반고등어’는 구구한 설명이 필요치 않을 만큼 명료하다. 읽는 순간 마음이 찡해진다. 한 손의 자반고등어처럼 서로를 껴안고 보듬어주는 아버지와 아들의 따뜻한 시간을 생각해본다. ‘큰 슬픔’이라 쓰고 ‘큰 사랑’이라 읽어야할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에게 경의를!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연두의 저녁

연두의 저녁 - 박완호 연두의 말이 들리는 저녁이다 간밤 비 맞은 연두의 이마가 초록에 들어가기 직전이다 한 연두가 연두를 낳는, 한 연두가 또 한 연두를 부르는 시간이다 너를 떠올리면 널 닮은 연두가 살랑대는, 널 부르면 네 목소리 닮은 연두가 술렁이는, 달아오른 햇살들을 피해 다니는 동안 너를 떠올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지점에 닿을 때까지 네 이름을 불렀다 지금은, 나를 부르는 네 목소리가 들려올 무렵이다 기억을 만난 적 있나요?, 시인동네, 2018 부처님의 게송을 엮은 법구경에 “향 싼 종이에 향내가 나고 생선 싼 종이에는 비린내가 난다.”는 말이 있다. 무엇을 싸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를 수 있다는 교훈을 전하는 말이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은 아무것도 싸지 않은 순수한 종이와 같다. 행실에 따라 이름에 향내가 날 수도, 비린내가 날 수도 있다. ‘이름값’이란 바로 그런 것이라 생각된다.어릴 적 이름과 지금의 이름은 변함이 없겠지만 이름에 묻은 값어치는 다를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찔린다. 나는 ‘나’의 이름을 잘 간수해왔을까? 가끔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못들은 척할 때가 있다. 상대방이 싫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대개는 켕기는 일을 해서 대답을 하지 않는 경우다. 인간관계란 ‘호명’(呼名)하고 ‘대답’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유명한 시구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을 만큼 널리 회자되고 있다.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이 세계는 따뜻해지고 아름다워진다. 박완호 시인의 ‘연두의 저녁’은 호명의 애틋한 심정을 ‘연두’라는 빛깔에 담아 전하고 있어 읽는 이의 심정을 생기 있게 만든다. “연두의 말이 들리는 저녁이다”는 첫 구절은 4월쯤의 나무들이 뿜어내는 연둣빛의 아찔함을 한껏 연상시킨다.초록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연둣빛은 신비롭다. 특히, 저녁 무렵의 연둣빛은 황홀하기 그지없다. 생명력을 잔뜩 머금은 연두와 박명(薄明)의 어스름이 빚어내는 저 풍경은 차라리 음악이라 해야 마땅할 것 같다. “연두가 연두를 부르는” 호명의 시간은 ‘살랑대고’, ‘술렁이는’ 설렘의 리듬으로 가득 찬 그리움과 사랑의 시간으로 한껏 부풀어 오른다. 이러한 사랑의 연둣빛 정취는 풍경을 소리로 감식하는 시인만의 예민한 감각이 빚어낸 내면의 아련한 음악일 것이다. 연두의 말을 전해듣는 시인의 ‘달아오른’ 귀는 또 다른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듯하다. ‘너’로 지칭된, 연두를 닮은 어떤 대상의 응답을 간곡히 기다리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지점에 닿을 때까지” 그 이름을 목 놓아 부르는 시인의 모습이 참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나’를 호명하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올 봄밤의 ‘무렵’이라는 낭만의 애절한 시간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이 반갑기만 하다. 박완호 시인의 ‘연두의 저녁’을 읽으면서 “한 장소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사라져 버렸고/한 인간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이미 사망했으며/시절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이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레이몽 크노(Raymond Queneau)의 ‘은유들의 설명’이라는 시를 함께 떠올려 본다. 사라져 버린 낭만의 시간과 장소들이 속절없이 그리워진다. 그래도 아직은 남아있을 몇몇의 ‘낭만들’을 ‘호명’하는 시인들의 목소리가 애틋한 시절이다. 핸드폰일랑 던져버리고 벚꽃들의 부름에 소소한 낭만의 화답이라도 해봐야겠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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