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시론] 공공의료서비스 확충에 민간의료 적극 활용해야

병원(Hospital)이 처음 만들어진 계기는 종교단체에서 구제와 사역을 진행하면서다. 사회적 약자를 여러 면에서 돌보다 보니 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을 치료해 주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고 이런 분들을 전문적으로 돌보기 위한 기관으로 병원이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의료는 태생적으로 공공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아플 때 병원에서 진료하면 본인부담금만 낸다. 나머지는 국가가 건강보험재정에서 병원에 지급한다. 국가가 지급을 보증한다는 것은 의료가 가진 공공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과거 병원이 숫자가 적어 아플 때 지역에서 병원을 찾기가 매우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이를 보완하고자 국가에서 국ㆍ공립 병원을 지어야 했고 이 병원들을 통해 의료취약지에서 살고 있는 국민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런 역사가 있다 보니 은연중에 공공의료는 국/공립병원, 민간의료는 영리목적의 기관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선진국에서도 공공의료서비스 확충을 위해 많은 국/공립 병원을 지었고 이를 통해 공공의료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런 서비스 제공에는 양적인 한계와 질적인 한계가 발생했다. 계속 국/공립 병원을 만들기에는 예산의 한계도 있었고 매년 적자를 보전해주는 문제가 발생했다. 또한 국민들의 높아진 의료서비스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예산상 한계가 많았다. 그래서 지금은 공공의료서비스 제공에 이미 높은 수준을 가지고 있는 민간의료자원을 활용하는 쪽으로 적극적 변화를 하고 있다.매우 가난한 노인분이 아플 때 민간병원을 방문하면 민간병원은 좋은 시설과 의료진으로 높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때 국가는 건강보험재정에 국가 복지예산을 더해서 이분들에 대한 예산을 지원한다. 또한 민간병원이 국가가 추진하는 공공의료서비스에 동참하면 국가는 이들 병원에 대한 지원을 제공한다. 권역별 외상센터 건립에 대한 국가 예산 지원이 그 예이다. 공공의료서비스에 민간의료가 참여한 대표적인 예로 전국을 강타했던 ‘메르스 사태’를 들 수 있다. 이때 민간병원들이 메르스 확산을 막고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병동 전체를 비워 메르스 의심환자를 입원시켰고 이 과정에서 병원의 손실도 감당했다. 또 다른 예로 국가예방 필수접종사업이 있다. 과거 영유아의 예방주사 접종률을 올리고자 국가가 별도의 예산을 도입했지만 별로 소득이 없었다. 보건소에서만 맞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쿠폰으로 제공하면서 집 근처 민간의료기관에서도 맞을 수 있도록 하자 접종률이 급증했고 60% 정도에서 98% 까 향상되었다. 이런 시스템을 전문용어로는 공공-민간 협력(public-private partnership)이라고 한다. 민간의료기관이 90% 정도인 우리나라의 현실을 고려하면 공공의료서비스에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민간의료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이바지하는 민간의료기관은 거점병원으로 지정하여 지원하고 이들을 통해 공공의료서비스 제공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이를 잘 활용하면 국가 예산 투입을 효율적으로 집행할 수 있고 민간의료의 활성화도 이룰 수 있다. 민간의료가 더 활성화되면 인력고용률이 매우 높은 의료의 특성상 고용창출과 내수시장 활성화에도 기여가 가능하다. 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정재훈 한국정신보건연구회 정책이사

[경기시론] 헌신의 커뮤니케이션 위에 꽃핀 ‘원팀’

‘울보’는 웃었다. 이번엔 활짝 웃겠다고 약속한 대로 그는 웃었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을 이끈 주장 손흥민 선수는 금메달을 목에 걸고 환하게 웃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내 일처럼 함께 웃으며 기뻐했다. 우리 아들이 병역면제 받은 것처럼, 우리 아들이 이제 마음 놓고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게 된 것처럼 부모 마음으로, 형제자매 마음으로 조마조마하며 피를 말렸던 시간을 지나 마음 놓고 축하해주었다. 손흥민 선수는 아시안게임 전체 1골 5도움의 개인 기록을 세우며 주장으로서 완벽하게 팀을 이끌었다. 이 기록은 수많은 기회 앞에서 직접 골을 넣기보다 동료가 득점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데 노력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치다. 공격수였지만 수비 진영까지 내려와 상대 공격을 적극적으로 차단하며 수비했다. 무릎을 다쳤던 수비수 김진야 선수는 “형이 있었기에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끝까지 뛰었다”고 말했다. 열정적이고 솔직담백한 화법은 팀에 투지를 불러왔을 것이다. “누가 됐든 도와줘야 해. 뛰는 사람, 안 뛰는 사람 가리지 않고 하나가 되는거야.” 자신은 낮추면서 동료는 높이는 성숙한 모습도 말도 인상적이다. 빛나는 공격수가 아닌 궂은 일 도맡아 하는 이타적인 ‘만능 도우미’ 손흥민 선수의 성숙한 커뮤니케이션은 뛰어난 재능에 더욱 아름다운 날개를 달아주었다. ‘전략적 직관(Strategic Intuition)’의 저자인 월리엄 더간은 기업이 천재라고 하는 소수의 인재에게만 놀랍고 새로운 결과물을 기대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라고 말한다. 혁신은 천재 한 명이 보여주는 원맨쇼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서로 직관으로 소통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능력이 뛰어나고 인정받는 범위가 넓다고 해도 우월감을 버리고 팀원의 능력을 더욱 빛내주는 헌신의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존중과 수용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이다. 이는 내가 먼저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자 다른 사람의 관점을 통해서 사물을 보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감이나 자존감이 큰 리더의 경우 타인의 관점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애초에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잘난 사람’이 자신을 내려놓고 허심탄회하게 소통하는 일은 정말 어렵고도 위대한 일이다. 우리 사회가 성숙했다고 느낄 때는 사람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 한 명에게만 시선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다. 강철 체력을 가졌다고 하지만 7경기 풀타임을 소화하며 온 힘을 다했던 수비수 김진야 선수는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하며 팬들의 주목을 받았다. 사람들은 음지에서 묵묵히 그러나 치열하게 제 몫을 다하는 사람들의 땀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모든 일을 내가 혼자서 완전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어냈을 때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주위 사람들의 도움과 함께 나의 성공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성공도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더욱더 가치 있는 일이다. 대표팀의 슬로건은 ‘원팀(One Team)’이었다. 슬로건대로 완벽함 팀플레이를 보여주며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경기를 보여주었던 이 멋진 팀의 시작은 이제부터이다. 23세 이하 선수들의 가능성은 누구도 쉽게 예단할 수 없다. 이미 모범을 보았다. 병역 의무에서 자유로운 선수들이 ‘원팀’으로 완벽하게 성공했던 기억을 잊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커뮤니케이션 리더로서 성숙해지길 바란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 전미옥 중부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경기시론] 인류 발전의 ‘티핑포인트’에 서서

용수철로 만들어진 스프링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딸 아이가 울상이다. 무슨 일인가 보니 스프링을 너무 심하게 늘여서 용수철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고 망가져 있었다. 딸 아이가 용수철을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보려고 온 힘을 다해 꾹꾹 눌러보지만 용수철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티핑포인트(Tipping Point)’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극적인 변화의 순간’을 뜻하며, 우리말로는 ‘임계점’으로 번역한다. 보통 티핑포인트에 도달하면 기존 방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극단적인 변화가 발생하고, 그 지점을 넘어서면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티핑포인트를 지나서 늘어져 버린 용수철처럼 말이다. 용수철 장난감이야 망가지면 딸 아이의 안타까움 정도로 끝나지만, 만약 누군가가 중요한 일에서 티핑포인트를 알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다면 큰 손해를 입게 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우리의 실제 삶에서 티핑포인트를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급속도로 나빠지는 시점이 언제인지, 공부를 하지 않아 성적이 떨어지는 시점이 언제인지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은 어렵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우리가 티핑포인트를 인지했을 경우는 이미 그 시점이 지나갔을 경우가 대부분이다. 늘어져 버린 용수철 장난감을 보고서야, 주변 사람과 사이가 나빠진 이후에야, 초라한 성적표를 받은 후에야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지나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 이렇게 개인적인 일들의 티핑포인트를 아는 것도 쉽지 않은 마당에, 하물며 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거나 큰 규모의 일에서 티핑포인트를 계산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에 따르면, 바로 지금이 우리 인류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느냐, 아니면 그렇지 못하고 쇠락하느냐를 판가름할 매우 중요한 시점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우리는 지금 인류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있어 티핑포인트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구온난화나 기상이변, 미세먼지와 같은 환경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사회나 경제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사회적 불평등이나 경제적 양극화 문제도 점차 임계점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전문가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어떤 영역들이 티핑포인트에 근접하고 있는지 전문가들의 의견에 더 귀 기울이고, 어떻게든 그 지점을 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설사 아직 티핑포인트에 도달하지 않아서 약간의 여유가 있다 할지라도 미리 조심하고 대비해야 티핑포인트를 넘지 않을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규모가 커질수록 티핑포인트를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은 어렵고, 일단 그 지점이 지나가 버리면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지구라는 거대한 용수철을 가지고 놀고 있는 아이와 같을지 모른다. 지금까지 괜찮았으니 앞으로도 괜찮을 것이란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용수철을 조금씩, 조금씩 더 늘여보는 아슬아슬한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용수철이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이런 방식의 놀이를 멈춰야 한다. 아이처럼 울며 떼쓴다고 한 번 늘어나버린 지구 용수철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성화 수원시기후변화체험교육관 관장

[경기시론] 더 큰 우리

김근홍 모두에게, 작은 우리(식구)를 비롯해 큰 우리(사회, 국가)에게 좋겠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일단 우리 식구, 특히 우리 자식이 어떤 일에 휩쓸리거나 관여되는 것은 안 된다. 왜냐고 묻기라도 하면, ‘좌우지간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정도의 대답이 나온다. 그러나 그게 인지상정임을 아는 것, 그래서 본능처럼 나오는 대꾸도 인지상정으로 보되 반성해볼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제주에 온 예멘 사람들 이야기를 하려니 막상 망설여질 정도로 험한 반응이 걱정된다. 청와대 청원에서도 지금껏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반대 청원을 했다고 하던가? 아니 우리 스스로 끼워줄 마음이 없다. 난민협약에 가입한 이상 국제법적 의무도 있지만, 그것도 상관없다. ‘좌우지간!’ 수출에 의존하는 우리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가 있다는 것,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지만 그래도 아직은 마음 열 생각이 없다. 거기에다 인류애, 인권, 인간존엄성 같은 원칙을 이야기하면 아마도 이 사건을 찬찬히 다룬 기사들에 달린 댓글들처럼 육두문자까지 쏟아질지 모른다. 국민연금 이야기도 그렇다. 기존 계산보다 3년 앞당겨진 2057년에 고갈된다는 추정이다. 아직까지 국민연금으로 충분하게 생활하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고, 앞으로도 그렇게 많은 수는 아닐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젊은 세대에서는 지금까지 낸 것 돌려받고 국민연금에서 빠지겠다는 이들도 적지 않다. 2057년 근처에서 연금 탈 때가 되었을 때 고갈 탓에 막상 낸 연금조차 돌려받기 어려울지 모른다는 걱정이 한 가지 원인이겠다. 그러나 그럴 경우 독일처럼 부과식으로 바꾸고 세금을 동원할지언정 국가의 책임을 팽개칠 배짱 큰 정치가들은 많지 않다. 더 큰 우리를 생각하지 않고 작은 우리, 이 경우에는 세대를 앞세운 탓도 없지 않다. 그래서 자꾸만 세대갈등이 언급된다. 그러나 이제껏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어느 한 세대를 희생양으로 삼지는 않는다. 갈등이 다스릴 수 없을 지경으로 치닫지 않는 한 말이다. 효(孝)란 말을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부모 힘 빌어 자란 다음 부모 부양하고 다시 자식에게 부양 받는 세대 간의 책임은 끝나지 않는다. 그 양상이 달라질 수 있고, 부양보다 스스로 노후준비를 하는 경향이 갈수록 커가지만, 그것은 개인 차원이고 사회 차원에서는 세대 간의 책임이 계속된다. 그것이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걱정이 앞서고, 불안이 다른 어떤 감정보다 강하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아니 사람만이 아니라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다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녕 ‘생각하는 동물’이라면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걱정이며 불안을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 작은 우리를 극복하고 더 큰 우리를 생각해볼 수도 있어야 한다. 500여 예멘 사람들 가운데 그동안의 전례를 놓고 추정해볼 때 난민으로 인정될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그들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말도 사실과 거리가 있다. 지금도 일손 구하기 힘든 분야의 일자리들이 많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사실들을 비틀고 물들여서 작은 우리마저도 다시 더 분열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독일, 프랑스, 심지어 덴마크나 스웨덴까지, 어디 별 큰 예외 없이 그런 데에서 득을 보는 세력들을 볼 수 있다. 우리 안에서는 그러지 않을까? 어머니께서 생전 보지 못하던 사람이 밥을 구걸하더라도 군소리 없이 상을 차려 대접하던 모습을 경험하곤 했었다. 앞으로도 다시 보지 못할 사람들이었지만, 아끼거나 아까워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세상에 버릴 악습도 많지만, 버리지 말아야 할 미덕도 많다. 꾸준히 악습은 치워내고 미덕은 길러 가는 것이 지속가능하고 더 행복한 우리를 만드는 길이 아닐까 싶다. 그러기에 우리의 범위도 더 키울 수 있으면 좋겠다. 김근홍강남대 교수한국노년학회장

[경기시론] 주인의식

무더위를 견디다 보면 꼭 한 번씩 생각나는 광경이 있다. 어느 해 여름, 모 대사관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이 연신 이마에 땀을 훔치거나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뭐 하는 사람들이냐고 명동에서 오래 근무한 동료에게 물었더니, 주로 비자 발급을 받으려는 사람들인데 늘 보는 모습이라 별스럽지 않다고 덧붙였다. 순간, 호기심이 발동해 다시 캐물었다. 많은 사람들이 불편하게 항상 줄을 서야 한다면, 발급 업무를 보다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 개선할 일이 아닌가.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람들이 불편해야 이권이 생긴다는 것이다. 줄을 서게 만들어야 급행료 같은 뒷돈이 생기니 대사관 직원들이 일을 고쳐 더 좋게 만들 동기가 없다는 속사정이란다. 비윤리적인 이권까지는 아니더라도, 개선이 요구되는 분야가 어디인지 충분히 인식하고도 이렇듯 아무런 조치 없이 벋대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더 나은 기술과 더 좋은 방식을 몰라서 못 하는 것도 아니다. 충분히 인식하고도 실천하지 않는다. 그런 조직의 경영진은 조직구성원들이 주인의식이 없다며 하소연한다. 주인의식은 조직구성원 스스로가 회사의 주인이라고 간주하고 맡은 일에 자발적으로 몰입하는 것이다. 자신의 경력목표를 조직의 미션과 비전에 일치시키고 임무를 반드시 완수하겠다는 책임감이 투철하다. 지시나 명령, 관행을 따르기보다 고객을 포함한 이해관계자의 관점을 더욱 중시한다. 오늘의 품삯보다 내일의 가치에 집중하며 회사를 쇄신하고 업무를 개선하는 데 주도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주인의식을 겸비한 부하직원을 진정으로 반기는 경영진은 막상 드물다. 경영진뿐만 아니라 대부분 관리자는 이런 직원을 오히려 성가시고 부담스럽게 여긴다. 부하직원의 주인의식이 본인의 지시나 경험치에 종종 배치되기 때문이다. 애당초 부하직원의 시간과 능력을 회사에 맹목적으로 올인해 주길 바라면서 자의적으로 주인의식이라고 포장했을 뿐이다. 이대로라면 주인의식은 허울이고 머슴을 원했다고 봐야 한다. 머슴이 주인의식을 가지면 역심을 품은 반역자이다. 꺼려질 수밖에 없다.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고 하였다. 조직구성원의 주인의식을 논하기 전에, 이를 맞받아 줄 경영진의 주인의식부터 살펴야 한다. 조직 상층부, 수뇌부의 인식을 주인의식으로 혼동하는 것이 가장 위험한 패착이다. 주인의식은 권력의 크기, 지위고하와는 무관하다. 실질적 소유주임에도 불구하고 주인의식은 온데간데없고 사익을 위해 조직과 구성원을 악용하는 사례는 허다하다. 한편, 주인의식을 고취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투명성이다. 투명성은 좋고 나쁜 정보에 관계없이 사실대로 적시에 공개하는 것이다. 조직의 사명, 목표뿐만 아니라 의사결정 과정도 투명하게 밝혀야 조직구성원이 회사의 처지와 나아갈 방향을 충실히 이해할 수 있다. 투명한 공유는 조직구성원을 신뢰한다는 신호로 작동한다. 나를 믿어준다는 확신은, 자발적 참여와 몰입으로 이어져 주인의식 조성의 근간이 된다. 따라서 정보 독점으로부터 나오는 권력에 탐닉하는 조직에서 주인의식은 기대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조직구성원 모두가 주인이 되어야 하는지 되짚을 필요가 있다. 군군신신 부부자자(君君臣臣 父父子子). 나라를 잘 다스릴 방법으로 공자가 제시한 답이다. 군주는 군주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각자 맡은 바를 성취하는 것이 기본이다. 주인의식을 당위적 의무나 도덕과 결부시켜 강요하고 있지만, 어쩌면 존재가 규정하는 의식을 바꾸는 일이 애초부터 어불성설일 수 있다. 공자의 경구처럼 자신의 삶에서 스스로가 주인인지 우선 반추해 볼 일이다. 우형록 경기대학교 융합교양대학 교수

[경기시론] 어제와 오늘의 다른 스토리

어릴 때 방학숙제 중 가장 부담이 컸던 게 일기 쓰기였다. 개학이 가까워지면 성실하게 쓰지 않은 일기 걱정에 동네 친구들과 뛰어 놀면서도 문득 가슴을 묵직하게 누르는 무엇을 느꼈다. 일기장을 들여다보면 못 쓰고 지나간 날을 계산해서 띄엄띄엄 빈 채로 건너뛰어 놓았으니 그걸 안 채우고 선생님께 낼 도리가 없었다. 뒤늦게 이야기 짜내기 전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날마다 신나는 일, 특별한 일이 한 가지씩이라도 있었으면 글쓰기가 좋았을 걸 내 일상은 왜 이리 별일도 안 일어나고 심심할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세계적인 디자인컨설턴트 얀 칩체이스는 한국, 일본, 미국 유럽 등의 다양한 기업의 제품 컨설팅을 해준다. 기업에서 의뢰가 오면 현지로 날아가서 그 나라 사람들의 풍속과 습속, 그리고 생활 패턴과 문화를 낱낱이 조사한 후, 어떤 제품이 좋고 어떻게 접근하고 어떤 제품을 만들거나 서비스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한다. 뉴욕에서 살던 사람이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에 가서 그 나라의 사람도 깨닫지 못하는 부분까지 세심하게 잡아낼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얀 칩체이스는 관찰의 힘이라는 책을 통해 그 비결을 공개하고 있다. 저자는 좋은 카메라를 사서 사람들을 관찰하는 데 사용한다. 사람들이 돈을 내고 기름을 넣는 모습이나 신용카드를 꺼내는 모습 같은 지극히 평범한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본다. 이런 평범함 속에서 혁신이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날마다 보고 만지고 사용하지만 한 번도 ‘왜?’라고 묻지 않았던 것들을 관찰하면서 ‘왜?’를 이끌어내고 그 답을 해주는 과정을 이 관찰의 힘에 담고 있다. 글도 마찬가지다. 관찰이 글쓰기의 큰 힘이다. 자기 생각을 글로 쓰는 일이 어렵고 뭘 써야 할지 모른다면 먼저 세심하게 자기 일상을 관찰해서 사실 그대로만 적는 연습을 해보자. 어떤 사건이든, 한 사람의 행동이든 자기 생각을 써야 하는 부담을 내려놓고 찬찬히 관찰한 것만 써보자. 눈으로 보는 듯하게 묘사만 해도 훌륭한 스토리이고 좋은 글이 된다. 좋은 글을 쓰고 싶은 마음에 어설프게 문장에 이런저런 수식어가 가득한 글보다 훨씬 간결하고 정직한 글이 된다. 인상 깊은 스토리의 전형에 대한 부담을 버려야 소소한 일상을 소중한 스토리로 깨닫게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꽤 조용한 활동 같지만 정신엔 굉장히 역동적인 영향을 준다. 일기만 썼을 뿐인데 뭔가 스트레스가 풀리고 마음이 위로받고 치유 받는 느낌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몸은 가만히 있었는데 정신은 큰 운동을 한 것처럼 개운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루의 생활을 글로 정리하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들은 그런 느낌이 날마다 일기를 쓰는 큰 힘이 된다고 말한다. 일기는 모든 글쓰기의 바탕이다. 내용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엄청나게 많은 글감을 모두 다룰 수 있다. 그날의 이야기 가운데 무엇을 글감으로 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글쓰기 연습이 모두 가능하다. 읽은 책을 내용으로 쓰면 독후감이 되고, 주말과 휴일에 옥상이나 주변 자투리땅에 농사짓는 이야기를 쓴다면 영농일지이다. 일기 쓰기는 모든 글쓰기의 잠재력을 쌓고 자신감을 기르는 소중한 시간이다. 날마다 어떤 소재든 어떤 형식이든 날마다 일기를 써보자. 이것만 잘 되면 다른 글을 쓰는 일에 두려움이 사라진다. 아마도 한 달만 매일 써도 쓰기 한 달 전보다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전미옥 중부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경기시론] 올바른 인간관, 자기성찰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을 인간관이라고 한다. 인간관은 자신과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의 내적 표상이다. 표상이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어떤 것을 머릿속으로 떠올릴 수 있는 내적 관념 또는 심상을 뜻한다. 사고방식, 행동방식, 표현방식, 생활방식처럼 모든 사람들은 자신과 상대방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가의 인간 표상방식, 즉 인간관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자신과 타인을 긍정적으로 보는가, 부정적으로 보는가? 사람에 대한 인간관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긍정적 표상이다. 이는 ‘나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주위사람들을 믿을만하고 의지할 수 있다’는 인간관을 말한다. 이런 사람은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자신감이 있으며, 자아상이 긍정적이다. 사람을 신뢰하고 사랑하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하나는 부정적 표상이다. 이는 ‘나는 사랑받지 못하거나 가치가 없다, 주위사람들을 믿을 수 없고 의지할 수 없다’는 인간관을 말한다. 이런 사람은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자신감이 없으며, 자아상이 부정적이다.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며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당신의 인간관은 어떠한가? 사람에 대한 인간관은 당신의 인생행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긍정적 표상과 부정적 표상이 결합되면, 네 가지의 인간관이 생겨난다. 첫째, 자신과 타인을 긍정적으로 보는 방식이다. 즉, I’m OK - You’re OK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가치와 자존감을 신뢰하므로 인간관계가 건강하다. 상대방과의 사소한 갈등이나 좌절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협력적이며 건강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 자신감이 있고, 다른 사람들을 편하게 대해주고, 인간관계에서 의존과 독립의 균형을 잘 맞춘다. 둘째, 자신은 부정적으로, 타인은 긍정적으로 보는 방식이다. 즉, I’m not OK - You’re OK이다. 이런 사람들은 쉽게 열등감에 빠져서 자신을 아프게 만들고, 다른 사람에게 집착하려는 인간관계를 나타낸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므로 불안수준이 높다. 타인과의 친밀함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거부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갈등을 겪고 있거나 갈등이 끝난 후에도 상대방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쪽으로 귀인하는 경향이 있다. 셋째, 자신은 긍정적으로, 타인은 부정적으로 보는 방식이다. 즉, I’m OK - You’re not OK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무시하기 때문에 방어적인 인간관계를 맺는다.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를 불편해한다. 항상 상대방과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지낸다. 가까운 인간관계가 형성될 것 같으면 불편해하고 이를 회피하고자 한다. 상대방을 신뢰하지 못하므로 너무 가까이 가지 않으려는 방어적인 성향을 나타낸다. 넷째, 자신과 타인 모두를 부정적으로 보는 방식이다. 즉, I’m not OK - You’re not OK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도, 다른 사람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 상처받는 인간관계를 맺는다. 다른 사람들을 당혹하게 만들고 자신에게는 무익한 태도를 취한다. 인간관계에서 우울한 기분이 깔려 있고, 일이 잘못되면 자신과 상대방을 탓한다. 그 결과 본인도, 타인도 모두 괴롭다. 당신은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는가? 사람의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가 그 핵심 물줄기다. 인간관계의 새로운 발견은 자기성찰에 있다. 자기성찰은 곧 인생성찰로 이어지고, 인간관계 속에서 새로운 나를 찾게 해준다. 김청송 경기대학교 청소년학과 교수

[경기시론] 시민들이 온도계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폭염이 기승이다. 기상 예보를 보니 7월 말까지는 이렇다 할 비소식도 없어서 당분간은 지금처럼 더위를 견디며 지내야 할 모양이다. 더 좋지 않은 것은 폭염에 미세먼지가 더해지기도 하고, 한낮에는 오존 농도가 높아져서 오존 경보가 발령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사면초가의 형국이다. 요즘 수원에서는 사면초가에 빠진 시민들이 매주 토요일에 기다란 온도계를 들고 거리로 나서고 있다. 그리고 10여분 남짓 특정 장소에 머물며 그 장소의 온도를 측정한 후 인증샷과 함께 온도 정보와 사진을 어딘가로 보낸다. 가만히 있어도 더운 날, 그것도 휴일에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6월 말부터 8월 중순까지 수원시민 약 120여명이 참여하고 있는 이 활동은 ‘기후행동 수원시 열지도 그리기’ 활동이다. 수원기후행동네트워크가 주최하고 수원시기후변화체험교육관에서 주관하고 있는 이 활동의 주요 내용은 폭염이 발생하는 기간에 수원시 네 개 구, 백 곳에서 시민들이 직접 온도를 측정하고 이를 공유하는 것이다. 첨단 장비를 통해 정확한 온도가 실시간으로 발표되는 요즘 같은 시대에 수원 시민들은 왜 이런 활동을 하는 것일까? 그것도 백 명이 넘는 시민들이 말이다. 그 이유는 같은 도시 안에서도 국지적으로 온도 차이가 크며, 이런 작은 단위 지역의 온도는 기존 대기 측정망을 통해서는 모두 확인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같은 시각에 수원 중심의 상업 지역과 공원이나 하천 주변의 온도는 5, 6도까지 차이가 나기도 하는데, 시민들이 직접 나서면 이런 차이를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시민들이 도시 곳곳에서 직접 측정한 정보는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정책을 입안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수원의 이런 사례처럼 다수의 시민이 어떤 주제를 직접 조사하고 연구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시민과학(citizen science)” 활동이라고 한다. 시민과학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전문가가 아닌 일반 시민이 측정한 자료의 신뢰성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시민과학의 방법이 점차 개선되고 사례들이 쌓여가면서, 최근에는 전통적인 과학 분야에서조차도 시민과학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다수의 국지적인 지역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고, 무엇보다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과정에서 특정 주제에 대해 시민들 스스로가 보다 높은 수준의 안목을 갖게 된다는 장점이 있다. 사실 시민들이 온도계를 들고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온도를 잰다고 해서 갑자기 폭염이 사라지거나 환경 문제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폭염이나 미세먼지와 같이 시민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환경 요인들을 능동적으로 확인해 보는 것은 깨어있는 시민으로 성장해 가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주변에서도 다양한 시민과학 활동들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자기 주변에 어떤 시민과학 활동이 있는지 찾아보고 한번쯤 참여해 보는 것은 어떨까? 조성화 수원시기후변화체험교육관 관장

[경기시론] 최저임금 인상과 소상공인의 비명 사이

내년 최저시급이 8천350원(올해보다 10.9% 인상)으로 결정됐다. 하루 8시간씩 한달을 일하면(주 40시간 기준, 월 소정 근로시간 209시간) 주휴수당 포함해 174만 5천150원이다. 중요한 사실은 노동자나 사용자 모두가 저 안(案)에 불만이란 점이다. 특히 소상공인의 경우 정부가 노동자와 소상공인, 두 을의 싸움을 부추긴다고, 살 수 없다고 아우성이다. 먼저 나는 경제에는 문외한이다. 노년학자로서 복지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일 뿐이다. 보기에 저들의 불만이 이해가 간다. 생존 가까운 중요한 문제에서 상대방 이해보다는 자기 이해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다. 자기의 이해가 중요하긴 하지만 생각의 틀, 사고의 논리는 객관화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서로간의 다툼을 지양할 수가 없다. 이 다툼에서 이야기되지 않는 중요한 사실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구조적으로 사회 전 분야에서 하도급과 원도급의 지나친 격차다. 재벌과 여러 층위의 하도급 업체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이는 일하는 시간이나 일의 수준 그 어느 것을 보더라도 합리적이라고 할 수 없을 지경으로 크다. 무엇이 원도급과 정규직에 비해 하도급과 비정규직의 불합리한 차별을 정당화시킬 수 있을까? 둘째, 노동에 비해 자본에 대한 지나친 우대다. 원도급이나 정규직은 하도급이나 비정규직에 비해 자본 면에서 대체로 우월하다. 공부할 시간이 확보될 수 있어 정규직에 가기 쉽고, 시설과 토지 및 정책 금융에의 접근성을 확보할 수 있어서 원도급은 하도급보다 우월한 지위다. 그리고 이 차이, 우월한 지위를 지킬 수 있는 가장 편한 길이 바로 하도급과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이다. 그 차별을 정책에서부터 현실 적용을 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원도급과 정규직이다. 그래서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할 수 없게 만들어서 이러한 틀을 유지해온 것은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이 다툼에서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소상공인의 임대료와 프랜차이즈 로열티다. 최저임금 이야기가 나오면 당연히 나와야 할 이 두 가지가 전혀 이야기되지 않는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임금 부분보다 소상공인을 더 옥죄는 것이 저 두 가지가 아닐까? 그런데 왜 그 부분은 이야기되지 않은 채 임금 인상에 대해서만 목소리를 높일까? 이보다 앞서 일어난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 청년임대주택 건설에 대한 입주민들의 반대시위다. 그러니까 값싼 임대주택이 들어오면 집값 떨어진다는 님비현상(NIMBY)에다 세대 간 갈등까지 얹힌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것을 세대갈등으로 보려는 시각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역시 최저임금과 통하는 부분으로, 내가 살기 위해서 상대만 공격할 뿐, 구조적으로 나를 옥죄는 것은 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도 그 때문이다. 자본 이외에 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서도 앉은 자리에서 돈을 벌자면, 그렇게 돈이 벌리게끔 만든 사람들의 희생이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회가 건강하고 행복하자면 풍요로워야 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공정하면서 공동체가 살아 움직여야 한다. 사촌의 땅 구매에 대한 무조건한 배앓이가 이기적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정함이 지켜져 서로의 몫을 인정할 수 있다면 공동체는 어지간한 배앓이를 포함하더라도 이보다는 잘 굴러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차별과 배제는 일부의 효율성 추구에 효과적인 수단이지만, 공동체에는 큰 걸림돌이다. 서로의 이해를 보듬어 우리의 이해로 만들어가는 공동체 정신이 있어야만 갑과 을의 구분과 다툼을 극복하고 우리 모두의 복지와 행복이 가능하다. 김근홍 강남대 교수한국노년학회장

[경기시론] 성장의 덫, 그리고 갑질

“작년 대비 15% 매출 증대”, “세계 100대 은행 진입”, “시장점유율 10% 제고”… 국내기업이 경쟁우위를 획득하고자 구사하는 전략을 파악하여 대학생들이 제출한 예다. 전략을 오해하여 한결같이 기업의 성장을 지향하고 있다. 전략의 핵심특성은 선택과 집중이다. 마이클 포터도 전략을 “무엇을 안 할지 선택하는 것”이라고 이를 강조한다. 그런데 성장은 취사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더 이상 성장하지 않겠다’는 전략을 수립하는 일은 숫제 어불성설이다. 성장은 선택가능한 전략이라기보다, 수익이나 이익 같은 성과이자 전략의 결과다. 성장을 위해 최적의 전략을 선정하지만, 성장 자체가 전략일 수는 없다. 전략으로 오인된 상기의 예는 해당 기업의 성장지표에다 도전적인 수치를 부여한 목표이지 전략이 아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아져야 한다는 성장의 욕구는 개인이나 조직이나 매한가지로 강력하다. 기업에서 내놓는 각종 문건을 의미분석해 보더라도 ‘증대, 제고, 개선, 향상, 강화, 극대화, 고도화’같은 성장의 용어가 남발한다. 이렇듯 성장을 추구하는 활동이 만연하다 보니 대학생들이 이를 전략행위로 오판할 만하다. 노련한 경영자들은 불황기보다 호황기에 의사결정이 더 힘들다고 강조한다. 제품 및 서비스부터 인력, 설비, 점포의 확장에 이르는 외형성장의 유혹을 떨쳐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소위 규모의 경제, 범위의 경제로 불리는 달콤한 이득에 현혹되어 성장 자체를 전략으로 착각하게 된다. 불요불급한 성장을 추진하다 보면, 어느새 유휴자원으로 돌변하여 오히려 성장이 패인으로 작동하는 사례는 허다하다. 이같이 성장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경쟁우위를 가져온다고 믿는 현상을 경영학에서는 ‘성장의 덫’으로 지칭하여 경계해 왔다. 기업이 매년 몇십 %씩 성장할 수 있다면, 마라톤 기록도 이미 1시간 이내로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성장에는 항상 부침이 뒤따른다. 아무리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더라도 경쟁사의 출현, 성장속도에 뒤처진 관리역량, 자원의 한계, 시장의 포화에 봉착하게 되고 시련을 겪기 마련이다. 이에 대처하는 두 가지 해결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존에 하던 활동을 더 열심히 더 빨리 추진하거나, 새로운 성장동력을 탐색하여 아예 성장곡선을 창출하는 것이다. 창의성이나 기업가정신이 요구되는 후자는 전자에 비해 어렵고 불확실성이 높다. 따라서 기존의 자원, 역량을 한층 치밀하게 활용하여 성장정체를 타개하려는 기업이 훨씬 많다. 치밀한 활용의 성과는 대부분 원가절감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원가절감으로는 성장곡선 상의 정체국면을 벗어나기 힘들다. 잠시 버틸 뿐이다. 설상가상은, 성장의 유혹에 빠져, 성장으로써 이를 돌파하려고 우길 때다. 이쯤 되면 자사뿐만 아니라 협력업체의 원가까지 죄어야 표면적으로 유지가 된다. 이른바 갑질이다. 이런 맥락에서, 활용을 뜻하는 영어단어 ‘exploitation’이 착취의 뜻도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성장의 덫’으로부터 유추해 보면, 갑질의 본질은 기업가정신과 창의성의 결여이며 성장을 전략으로 혼동하면서 증폭된다. 최근 떠들썩한 갑질은 여기에 개인의 파렴치가 얹어졌을 뿐이다. 개인 차원의 부도덕도 지탄 받아야 하지만, 기업경제 차원에서 ‘성장의 덫’ 또한 반추해 볼 일이다. ‘오늘이 어제보다 나아야 한다’는 강박이 갑질로 변질되지 않도록, 지속가능한 사회를 추구하는 진정한 전략에 도전할 때다. 우형록 경기대학교 융합교양대학 교수

[경기시론] 스토리 발전소 월드컵을 잡아라

월드컵은 평소 축구경기를 열성적으로 관람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도 설레게 한다. 국가대항전은 전 세계 사람 누구나 ‘우리팀’이 확실히 있기 때문에, 열성적인 축구팬들이 보는 리그전과는 달리 응원 규모도 크고 관심도 한층 뜨겁다. 스타 선수들이 총출동하는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안방에서 편히 볼 수 있다는 건 분명 흥분되는 일이다. 사람들이 서로 모이고 치맥이 불티나게 팔린다. 골이 터지면 한밤중에도 온 아파트가 들썩인다. 포르투갈 국가대표 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월드컵이 아니라도 실력 면으로나 화제성으로 보나 이미 세계적인 셀럽이다. 이번 월드컵에선 그의 두 가지 에피소드가 시선을 끈다. 하나는 포르투갈이 조별 리그에서 이란전을 하루 앞둔 밤. 호날두 숙소 주변에서 이란 팬들이 소란스러웠다. 갑자기 창가에 모습을 드러낸 호날두가 두 손을 모아 귀 옆에 가져가며 고개를 옆으로 누이는 포즈를 취했다. 잠잘 수 있게 조용히 해달라는 의미다. 잠시 조용해지자 호날두는 사람들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톱 선수가 저렇게 귀여운 포즈로 부탁하는데 축구팬이라면 상대팀 선수라도 어찌 미워할 수 있을까. 또 하나는 16강전 경기를 할 때다. 포르투갈은 2:1로 지고 있는 상황인데, 멀티골을 기록한 우루과이의 카바니 선수가 다리 통증을 호소했다. 호날두는 그라운드 밖으로 나가려는 카바니를 끝까지 부축했다. 내가 미소 지었던 건 호날두가 꽤 ‘스토리를 좀 아는 영리한 선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소통하는 방식을 말하고 싶다. 의식한 행동은 아니었다고 해도 팬들에게 훈훈한 에피소드를 ‘투척’하며 소통하는 모습이 흥미롭다. 월드컵이 재미있는 이유는 수많은 스토리가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축구선수, 감독, 팬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재미있고 가치 있을 때도 많아 글을 쓸 때 좋은 재료나 소재가 된다. 축구는 혼자 하는 경기가 아니기 때문에 감독의 역량이나 리더십, 선수들 사이의 팀워크와 커뮤니케이션, 그라운드 밖의 스토리, 각 나라 팬들이 쏟아내는 무수한 이야기들이 한 가득이다. 스토리를 대방출하는 한 달이기 때문에 설렌다. 바빠도 틈틈이 영상도 보고 메모도 한다. 어떤 스토리를 글에 어떻게 활용할 지는 그때그때 글의 주제에 달렸지만 이미 ‘스토리를 좀 아는 선수’ 호날두 이야기는 충분히 흥미롭고 의미 있다. 이야기를 모으자. 이런 세계적인 빅 이벤트에서 쏟아지는 이야기를 버려두긴 아깝다. 사실 이야기를 얻을 수 있는 소재는 주변에 무궁무진하다.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 보았던 뉴스의 미담으로 글을 시작할 수도 있다. 들은 것, 본 것, 읽은 것, 경험한 것에서 글쓰기 소재로 적합한 스토리를 메모하고 기억하자. 삶은 그 모든 것이 이야기 아닌 것이 없다. 너무 많아 메모하든 저장을 하든 노력이 필요하다. 필요할 때 그 주제에 맞는 적절한 이야기를 골라내 제대로 전달하는 글쓰기를 하면 된다. 태생적으로 이야기꾼일 것 같은 작가들도 모든 걸 책에서만 얻지는 않는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이야기의 소재를 꾸준히 수집하고 취재하고 가공한다. 전문 작가들은 더욱 스토리 수집에 부지런하다. 호날두는 팬들이 보내온 편지와 선물을 구단이 관리하고 있었는데, 어느 때부턴가 직접 관리한다고 한다. 역대 축구스타 가운데 팬레터에 가장 많은 답장을 보내는 선수인데, 한 달에 편지 보내는 데 드는 비용으로 400만원 가까이 쓴 적도 있다는 기사도 있다. 그렇게 많이 편지를 쓰는 축구선수의 글은 어떨까 문득 읽어보고 싶어진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을까? 아니면 그냥 의례적인 감사인사 뿐일까?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는데, 이게 계속 궁금해진다면 아무래도 호날두에게 먼저 편지를 써야 할 것 같다. 전미옥 중부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경기시론] 사랑의 양면성, 새로운 발견

영국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자살을 한 두 사람은 셰익스피어의 불행한 연인인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그들은 연인이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자신의 목숨을 끝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실연과 고독에 빠진 베르테르가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에 공감한 젊은 세대들은 모방자살(동조자살)을 통해 목숨을 끊었고, 베르테르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이 불행한 죽음과 시도는 모두 ‘사랑의 상실, 즉 사랑의 양면성’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그 핵심 원인이다. 즉 신변비관, 절망감, 희망상실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과 깊은 애정을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는 심리적 능력을 뜻한다. 사랑은 배우자 선택과 결혼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인생 최대의 선택은 배우자 선택이며, 그러한 선택에는 사랑의 힘을 기초로 한다. 선택에는 항상 책임감이 존재한다. 우리는 살면서 항상 누군가를 사랑하기를 원하며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사랑의 양면성으로 인해 사랑에는 항상 위험부담이 따른다. 사랑으로 인해 극도의 행복감을 맛보기도 하지만 극심한 괴로움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것이 사랑의 양면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꺼이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려고 한다. 실낙원의 작가 와타나베 준이치는 “목숨을 건 사랑은 그것이 불륜이라도 아름답다. 사랑은 인간의 영원한 테마로 어떠한 형식을 띠더라도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며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그 무엇이다”라고 했다. 그리스의 철학자인 플라톤은 “누구를 사랑한다 함은 그 사람 속에 있는 선과 미의 진수를 알아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사회심리학자이며 철학자인 프롬은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고독한 존재이며, 그 고독감과 공허감을 극복하기 위해 사람은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매슬로우는 존재적 사랑과 결핍된 사랑을 제시했다. 존재적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고 자기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의 욕구와 행복에 관심을 두는 사랑을 뜻한다. 반면, 결핍된 사랑은 이기적 사랑으로 자신의 계산된 욕구와 흥미를 만족시키는 데 있다. 따라서 파트너의 한 사람, 또는 둘 모두가 결핍된 사랑에 관심을 두었을 때 그 관계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결국 사랑의 상실과 함께 쓰라린 고통과 마음의 상처가 남게 된다.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기술이 필요하다. 사랑을 계속 유지하지 못하면 결국 사랑의 종말이 온다. 흔히 사랑은 타오르는 불과 같이 시작하고 영원을 약속하지만 많은 사랑들이 애초의 기대나 희망을 달성하지 못하고 불행으로 끝나고 만다. 사랑의 기술이란 무엇인가? 사랑의 기술, 핵심요인은 소유냐, 존재냐의 문제다. 소유적 사랑은 상대방을 내 마음대로 하려고 집착하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랑은 눈물이 되고, 미움이 되고, 원수가 되어 돌아온다. 집착할수록 남는 것은 고통과 불행뿐이다. 왜냐면 사랑은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양면성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그것은 존재적 사랑에 달려 있다. 존재적 사랑의 핵심은 세 가지다. 첫째, 나와 다른 상대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 둘째, 상대방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이해하는 것, 셋째, 나를 내려놓기다.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이다.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싫다 좋다’에 사로잡히면 소유적 사랑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사랑의 새로운 발견은 존재적 사랑에 있다. 김청송 경기대학교 청소년학과 교수

[경기시론] 치킨 시키면 치킨만 오는 세상을 꿈꾸며

얼마 전 주말 저녁, 오랜만에 치킨을 시켰다. 주말이어서 그랬는지 치킨은 주문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했고, 들뜬 마음으로 치킨 포장을 풀었다. 종이 상자의 중앙에 치킨이 담겨 있고, 사이드 메뉴와 몇몇 소스가 함께 있는 지극히 평범한 구성이었다. 그런데 치킨 상자의 윗부분에 평소에 못 보던 낯선 물건이 붙어 있었다. 그것을 떼서 뭔가 하고 보니 “00치킨 울트라황사마스크”라고 쓰여 있었다. 세상에 치킨을 시켰는데 황사마스크를 함께 보내다니! 음료수나 쿠폰을 치킨과 함께 보내는 경우는 봤어도, 황사마스크는 의외였다. 치킨 상자에 당당하게 붙어 있는 황사마스크를 보며 새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떻게 변해버렸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다. 이제 우리는 편하게 숨 쉴 수 없게 되었다. 아침마다 미세먼지 어플을 확인하고 그 결과에 따라 우리는 행동을 결정한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은 야외 일정들이 취소되고, 실내에서도 공기청정기가 24시간 가동된다. 수시로 공기질 정보가 핸드폰으로 전달된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깨끗한 공기를 마셔 보려는 우리의 몸부림은 이제 처절하기까지 하다.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이러한 우리의 풍경을 새삼스럽게 적은 것은 우리 인류가 아무리 뛰어난 존재라고 으스대도 결국 자연의 변화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신이 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숨을 쉬어야 하고, 물을 마셔야 하며,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모두 자연에서 나오는데, 우리는 그 자연을 하나둘씩 무너뜨리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을 것 같은 이 단순한 사실에 대해 안타깝게도 그 누구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사실 치킨을 시키면 마스크가 함께 오게 된 지금의 상태는 한, 두 사람의 노력이나 행동의 변화로 바뀌지 않는다. 특히 지구 전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기후변화와 같은 문제는 우리나라를 넘어 전 지구의 모든 국가들이 발전에 대한 생각을 변화시켜야 해결 가능한 문제이다. 하지만 언어와 문화, 역사, 경제 수준이 다른 수백 개 국가들이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국가들이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변화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조만간 우리의 삶의 터전을 잃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공동의 책임과 행동으로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미세먼지, 기후변화, 미세플라스틱 등 여러 환경 문제들은 지금까지 우리 인류가 직면했던 그 어떤 문제보다도 광범위하고 복잡하며 해결을 위해서는 전 지구적 규모의 노력과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결국 이러한 공동의 인식을 갖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수적이다. 본 필자가 소속되어 있는 수원시기후변화체험교육관 두드림은 이런 인식 확산의 최전선에 위치한 기관이라고 할 수 있고, 수도권에는 두드림과 같은 교육 기관이 곳곳에 위치하고 있다. 주말을 이용하여 가족과 함께 집에서 가까운 환경교육 기관에 방문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곳에서 우리가 쉽게 참여할 수 있는 행동들이 생각보다 큰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들이 하나, 둘 모이면 치킨을 시키면 치킨만 오는 너무나 당연한 세상이 우리에게 다시 주어질 것이다. 조성화 수원시기후변화체험교육관장

[경기시론] 엘리트 지망생의 치매 인식도

장차의 법조인들을 양성하는 법학전문대학원 입학을 준비시키는 어느 학원에서 근래 실시한 전국 논술모의고사에 치매 관련한 문제가 출제되었다. 문제에 문제는 없는지 검토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역시 치매 관련한 사실과 맥락을 살펴달라는 부탁이었다. 치매의 심각성에 따른 몇 가지 자료들과 예방과 조기 진료의 중요성 그리고 시설에 대한 노인들의 거부감과 환자 가족의 부담 등이 간결하게 제시됐다. 이어 ‘치매국가책임제’의 약속과 치매 환자 관련 정책 방향에 대해 의견이 엇갈린다는 상황이 설정되었다. 그 원인으로 병의 진행 정도, 환자의 행복, 환자 가족의 삶, 치료와 돌봄의 전문성, 정부 재정의 효율성 등 정책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이 다섯 가지가 제시되었다. 이어서 10행 안팎 분량의 자료가 다섯 개 나온다. ①병원의 계열화와 대형화 : 모든 단계의 환자들 체계적 수용으로 효율성과 전문성 강화 ②재가 돌봄 : 살던 곳에서 같이 살던 사람과 함께 살기 ③일본 사례 중 지역사회 돌봄 모델과 경북의 ‘우리마을 예쁜치매쉼터’와 ‘치매보듬마을’ : 몸이 기억하는 지역사회에서 자기 몫의 역할도 할 수 있는, 파견 전문 인력을 갖춘 공동체 차원의 돌봄 체계 ④네덜란드 호그백 치매마을 : 모든 인력이 치매 관련 교육 받고, 152명의 중증 환자들이 서로 어울리는 문화의 사람들끼리 짝을 이뤄 주거하며 사는 마을 ⑤중증 혹은 이상 증세 환자들 대상으로 주거지에서 가급적 가까운 곳에 소규모 시설 : 취미와 소일거리 등 최대한 격리 성격 완화책들 포함. 마침내 문제로서 자료에서 둘을 정책 방향으로 선택하여 논변하고, 선택하지 않은 자료들을 논박하라고 제시되었다. 2단으로 나눈 A4 한 장에 치매와 관련한 현실을 거의 고스란히 담아낸 것이었다. 이런 사항들을 굳이 정리한 것은 치매인식의 현황을 제법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 문제를 보고 2와 5 아니면 3과 5를 고르고, 나머지를 논박하는 문제겠다고 생각했다. 시험과 채점이 모두 끝난 뒤 궁금하여 결과를 물었다. 대략 10% 정도가 저 조합을 고르고 제대로 설명했다고 한다. 2와 3을 고른 경우, 1과 4, 1과 5를 고른 경우도 적지 않다. 물론 2와 1, 1과 3 등 생각할 수 있는 조합 가능성이 거의 다 나온 듯했다. 추측에 따르면, 주변에 치매환자가 있거나 아니면 사회복지 분야와 연관이 있는 수험생들의 경우 문제의 취지와 쟁점을 쉽게 이해하고 해결했다. 반면 치매환자와 만나본 경험이 없고, 생각해본 적 없는 이들은 맥락을 놓치고, 시설만 두 개 고르거나 아니면 재가와 공동체 돌봄의 조합처럼 스스로 함정에 빠진다. 몇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치매로도 엘리트 교육을 위한 시험문제를 꾸밀 수 있구나. 따지고 보면 우리 사회에는 시험이 참 많고도 많다. 그 시험들에서 이런 문제들이 다양하게 다루어진다면, 그 또한 중요한 시기의 학생 및 수험생들에게 바람직한 인식 변화의 효과적인 기회가 되지 않을까. 복지란 사회가 사회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국가가 돕는 것이요, 국가가 가족의 일을 대신할 수도 없고,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래서는 안 된다. 문제의 해제에 나온 말이다. 곧 치르게 될 선거의 후보자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들의 치매 인식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유권자로서 나서서 질문이라도 했어야 참다운 유권자 역할을 다한 것이려나? 6월13일 투표라도 꼭 해서 책임이라도 다해야 하겠다. 김근홍 강남대 교수한국노년학회장

[경기시론] 성장 스토리가 있는 ‘나’ 소개서

‘BTS’라고 하면 1020세대는 눈을 반짝이면서 금방 알아듣지만, 30대 이상 세대 중엔 무슨 뜻인지 모를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방탄소년단’이라고 하면 금방 알아들을 사람들이 더 많다.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적인 대세 아이돌그룹으로 성장한 ‘방탄소년단’은 해외에선 ‘BTS’로 통한다. 얼마 전에 있었던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는 엄청난 함성소리와 함께 등장하여 그들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제까지 많은 가수들이 K팝을 전 세계에 알려왔지만 가장 큰 미국시장을 ‘접수했다’ 할 만하게 성공하진 못했다. 방탄소년단은 현재 접수했다고까지 말하긴 어려울지 모르지만, 이제까지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성공을 처음 해나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수년째 SM, YG, JYP엔터테인먼트 메이저 3개 기획사가 지배해온 대중음악계는 중소기획사의 아이돌인 방탄소년단이 이 자리에까지 오를 것이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많은 매체들이 그들의 성공 비결을 여러 가지로 분석하고 있지만, 가장 눈에 들어온 건 방탄소년단은 자기들의 이야기를 음악에 담는다는 점이었다. 이들 소속사의 방시혁 대표는 방탄소년단에게 “너희 자신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만들라”는 주문을 했다.데뷔곡 ‘노 모어 드림(No more dream)’에서 ‘니 꿈은 뭐니’ ‘삶의 주어가 되어봐’와 같은 가사로 10대에게 있어 꿈의 의미와 고민을 담았다. “17평 아홉 연습생, 코 찔찔이 시절. 엊그제 같은데 그래 우리도 꽤 많이 컸어. 좋은 건 언제나 다 남들의 몫이었고 불투명한 미래 걱정에 항상 목쉬었고.” 스페셜 앨범 ‘화양연화’에 수록된 곡 ‘이사’에는 고단했던 연습생 시절을 풀어냈다. 이같이 10대들의 고민이나 방황하는 청춘을 모습을 그린 가사에서 팬들은 공감했고 스타들도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는구나 하는 동질감을 느꼈다. 이야기는 이렇게 힘이 세다. 하루에도 수십 통씩 쏟아지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혹은 면접 속에서 자신의 것이 선택되기를 바란다면 남들과는 다른 자기만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특히 IT기업, 광고, 영업, 판매직 분야에 지원하는 자기소개서는 개성이 큰 무기다. 요즘은 자기소개서의 작성 항목이 경험 중심으로 바뀌었고, 면접에서도 지원자의 경험에 대한 질문들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을 발굴하는 것이 중요한데, 무턱대고 많은 경험이 아니라 다른 지원자들이 가지지 못한 독특한 경험, 에피소드, 지원 직무와 연관된 현장 경험일수록 유리하다. 주의할 점은 스토리에 치중하다가 길을 잃고 할 이야기를 못해서는 안 된다. 스토리를 끌어온 목적이나 효과를 계속 의식하며 집중해야 한다. 너무 과장이나 허위사실을 담아 이야기가 심각하게 왜곡될 수 있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으면 과대포장의 유혹에 빠지기 십상이다. 인사담당자들은 지원자의 경험이 있는 그대로인지, 과대포장인지 바로 눈치챈다. 작은 경험이지만 이를 통해 큰 소득을 얻었다면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되, 솔직담백하게 다가가는 것이 최선이다.방탄소년단이 자기 이야기를 처음부터 성공할 아이돌이었던 것처럼 뭐든 자신만만하고, 사랑의 기술에도 세련된 ‘선수’인 것처럼 굴며 ‘멋짐이 폭발’하는 모습만 그렸다면, 과연 팬들이 지금만큼 공감하고 열광했을까. 어떤 자기소개서든 사람의 이야기엔 바로 그런 성장스토리가 있어야 하고 그런 성장을 통해 또 다른 성장의 가능성을 볼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사실상 취업의 난 시대에 ‘간택’ 당하는 글쓰기 비결이다. 전미옥 중부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경기시론] 불안과 두려움, 의미치료

불안이란 무엇인가? 불안은 ‘임박한 또는 예상되는 불행에 대해 느끼는 불쾌하고 불길한 근심걱정(염려)’을 말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내일 중요한 취업 면접을 본다면 마음이 불안할 것이다. 왜냐면 ‘면접에 낙방하면 어떻게 하나’의 불안심리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나를 떠나면 어떻게 하나’의 근심걱정도 불안심리가 반영된 결과다. 결국 불안이란 ‘내가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게 되면 불행이 초래될 것’이라는 생각에 빠져 마음이 쪼들리는 상태를 말한다. 불안은 두려움(공포)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두려움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위험이나 위협에 대해 몸과 마음이 떨리는 것으로, 흔히 공포라고도 한다. 예컨대, 어두운 한밤중에 낯선 사람과 갑자기 마주친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불안은 미래의 일에 대해, 두려움은 현재의 일에 대해 느끼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불안에 두려움이 수반되기도 하고, 반대로 두려움에 불안이 수반되기도 한다. 이렇게 불안과 두려움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항상 사람 마음을 괴롭힌다. 당신은 오늘 하루도 마음이 불안했는가? 불안했다면, 왜 불안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챌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불안은 당신을 도와주는 적응적 측면이 있으므로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즉, 긴장하고 경계해서 어려운 상황 또는 부정적 결과가 예상되는 상황에 대비하라는 신호로 해석하면 된다. 이것은 정상적인 불안이다. 그러나 오늘도 왜 불안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면, 그것은 병적인 불안이다. 병적인 불안이란 불안해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불안해하거나, 현실적인 위험 정도에 비해 과도하게 심한 불안을 느끼거나, 불안을 느끼게 한 위협 요인이 사라졌는데도 불안이 과도하게 지속되는 경우를 말한다. 병적인 불안은 끊임없이 당신을 힘들게 만들고 괴롭힐 것이다. 그렇다면 병적인 불안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는가? 병적인 불안은 인생의 방향, 목표, 삶의 의미를 상실한데서 오는 고통과 괴로움의 표시다. 이것은 일종의 노에제닉 신경증이다. 노에제닉 신경증이란 삶의 의미가 결여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즉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목적이 없는 것처럼 보이며, 공허감에 빠진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짜증이 나고 화가 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갈등이 생기고, 앞날은 불안하고 두렵기만 한 것이다. 이런 상태를 심리적으로 병적 상태에 있다고 한다. 병적 상태에 있게 되면 사는게 재미가 없고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허송세월을 보내게 된다. 병적인 불안은 ‘내가 왜 살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게 되는 순간 사라지게 된다. 즉, ‘내가 지금 여기 왜 서있는지’를 알게 되는 순간 어두운 불안의 그림자는 걷혀지게 된다. 지금 한 번만이라도 자문해보라. 나의 생명은 어디에서 왔는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이러한 물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많이 물어왔던 질문일 것이다.그래도 이 질문은 언제나 새롭다. 물론 정해진 답이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당신 스스로 그 답을 찾고 경험해야 한다. 정말로 진지하고 간절하게 묻고 또 묻다 보면 언젠가는 당신의 영혼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삶이란 끊임없는 도전이며, 그 도전 속에서 자신의 인생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은 자신의 책임인 동시에 행복에 다가갈 수 있는 등불이 된다. 나의 인생을 대신해서 살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전진하고 도약하고 비상하라.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아라. 언제까지 움츠려들고만 있을 것인가, 인생을 되는 대로만 살 것인가, 아니면 가슴 뛰고 마음 설레는 삶을 살 것인가? 이것이 바로 삶의 의미치료다. 김청송 경기대 청소년학과 교수

[경기시론] 특별한 도시들의 특별한 교육

혹시, 수원과 성남의 공통점을 아는가? 두 도시 모두 경기도 중남부에 위치하고 있고 100만명 수준의 시민이 살고 있는 대도시라는 것. 또 최근 개발이 급속하게 진행됐고, 현재도 진행 중인 도시라는 것. 이 정도는 수도권에 살고 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원과 성남만 갖고 있는 독특한 공통점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이 두 도시가 ‘환경교육도시’라는 것이다. 수원은 2014년에, 성남은 2016년에 환경교육도시를 선언했다. 이후 두 도시는 관련 조례를 신설 및 개정하고, 행정 조직에 환경교육팀을 신설하는 등 시민들을 대상으로 일상적인 환경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 환경교육을 통해 시민이 살기에 더 좋은 지역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정책을 펴고 있다. 그렇다면 왜 수도권의 대표적인 도시 두 곳인 수원과 성남은 환경교육도시를 선언했을까? 영어교육도시, 수학교육도시가 아닌 환경교육도시를 말이다. 아마도 이 두 도시의 의사결정자들은 도시의 장기적인 발전과 시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교육이 매우 중요하고, 교육 중에서도 환경교육이 핵심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런 결정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개발 중심, 경제 중심의 발전 방향으로 보았을 때, 또 교육은 학교와 교육청이 알아서 할 문제라고 생각하는 일반적 인식에 비추어 보았을 때 매우 이례적인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민들이 미세먼지, 미세플라스틱, 폭염, 기후변화와 같은 환경 문제들로 포위된 삶을 살아가게 된 현재 시점에서 보면 매우 시의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판단된다. 경기도에서 개발이 가장 많이 진행된 지역이기도 한 이 두 도시는 개발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환경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는 시민이 얼마나 많은지가 향후 도시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핵심이 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 환경적으로 깨어있는 시민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작년(2017년) 서울이 ‘환경학습도시’를 선언하면서 시민들이 스스로 환경에 대해 학습하는 문화를 만들겠다고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서울과 수원, 성남의 인구를 모두 합하면 우리나라 인구의 14에 달하기 때문에, 이제 지자체 차원에서 환경교육에 관심을 갖고 이를 통해 지금의 환경문제를 완화하고 지역의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겠다는 것은 하나의 흐름이 되어가고 있다. 경기도는 31개 시ㆍ군 복합체이고 각각의 지자체는 처해 있는 여건과 환경이 다르지만 장기적으로 시민의 삶이 행복한 발전을 이룩해야 한다는 공통의 목표를 갖고 있다. 이를 위해 환경교육이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31개 시ㆍ군 중 두 곳에서 먼저 시작한 환경교육이라는 흐름을 경기도 전체가 선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경기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환경교육도’를 선언해 보는 것이다(사실 충북은 이 목표를 종합계획에 포함하고 있다). 이미 두 곳의 환경교육도시를 품고 있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다른 도에 비해 일이 훨씬 수월할 것이다. 이제 돌아오는 6월 중순이면 지자체장을 새롭게 결정한다. 지역의 개발 이슈 못지않게 지속가능발전의 관점에서 시민에게 어떤 교육이 더 중요한지, 무엇이 시민의 삶을 더 행복하게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분들이 선택받길 기대해 본다. 조성화 수원시기후변화체험교육관 관장

[경기시론] 허묾과 성장 그리고 통일복지

여러 해 전에 독일 교수 한 분을 모시고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한 학기 강의를 부탁한 적이 있다. 강의 취지는 학생들이 직접 세계 복지의 트렌드를 느껴보라고, 말 그대로 세미나를 해보라는 의도였다. 어느 날인가 통일과 복지의 문제가 주제로 올랐을 때, 대학원생 중에서 남과북 통일이 되면 어떻게 되는 거냐는 물음이 제기됐다. 복지 차원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독일 교수가 대답했다.원론적인 대답으로 다음 물음이 나올 자리를 마련하는 수다. 그런데 기대와 다른 대꾸가 나온다. 정작 교류가 원활해져 상호 방문하는 데 문제가 없으면 큰일이 나지 않겠느냐고. 북한에서는 온통 공산주의 교육으로 물들어 일사불란하게 반응할 테니, 결국 여론전에서나 선거에서도 밀리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독일 교수가 대꾸하기를, 공산주의니 자본주의니, 무슨 주의니 해도 세상에서 가장 강한 주의는 바로 개인주의다. 그런 식의 대답이었지만, 앞서 이야기한 대학원생과 몇몇 뜻을 같이하는 원생들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북한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 뒤 어디까지 이어졌는지는 이제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온 겨레의 생각이나 아니면 적어도 느낌이라도… 뭐라고 딱 꼬집어 이름 붙이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변화가 시작되었거나 오리라 기대할 수 있거나 하는 분위기의 변화가 느껴지는 이즈음에 문득 떠오른 기억이다. 과연 우리는 북한에 대해 얼마나 알까? 듣자 하니 남한의 인기 드라마 월화 방영분은 그 주 주말이면 북한에서도 본다고 한다. 휴대폰 500만대 이상에 장마당이며 뭐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관심도 없어서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사실들이 최근 들어 어마어마하게 쏟아진다. 북한 사정에 대한 정보가 늘면 늘수록 북한에서 적어도 내가 북한을 아는 것보다는 남한 사정을 더 많이 아는 사람들이 많겠구나 싶다. 지금 분위기처럼 그렇게 성급한 변화가 생기기는 어렵겠지만, 아무튼 공부하고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통일이란 사건을 생각하면 반드시 복지도 함께 생각하게 된다. 통일이 막 이루어지던 무렵 독일에서 유학시절을 보냈던 나로서는 진즉 깊이 공부했어야 했지만, 막상 아직까지 그러지 못하고 말았다.다만, 독일의 경우 다른 분야도 그렇지만 특히 복지 분야는 준비가 전혀 없이 이루어지다 보니 어떤 경우 (구)동독에서는 복지 수준이 전보다 떨어지면서 불만과 고통이 따른 경우도 있었다. 통일 전과 후의 동독지역 출산율을 보면 눈에 띄게 줄어드는데, 그것은 변화에 따른 불안도 한몫했겠지만, 복지수준의 하락과 상대적 박탈감을 원인으로 지적하는 이들도 많았다. 앞에서 제자들 가운데 드러난 북한에 대한 두려움은 어쩌면 그동안 우리 사회와 민족을 감싼 알껍데기 같은 것이었지 않을까 생각된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알이 깨어져야 할 당위성을 이야기하였다. 기억에 의존하자면, 새가 태어나려면 새로운 세상이 오기 위해, 혹은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 알이 깨져야만 한다. 알은 곧 보호막이자 방어막이요, 우리 자신의 기존 틀이자 세상이다. 손톱만 깎으려 해도 조심스러운데, 우리 몸과 하나처럼 붙어있는, 아니 우리 정신과 하나처럼 붙어있는 저런 껍데기를 깬다는 것은 얼마나 두렵고도 가슴 설렌 일일까? 나 자신조차 급변보다 안정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알 안에서 나오려는 새의 껍질 쪼기가 느껴질 땐 밖에서도 함께 쪼아주는 즐탁동기(啄同機)가 필요하다. 그리고 더 늦기 전에 독일의 통일과 복지 문제를 제대로 살펴보고, 복지 분야에서 통일을 생각하며 살펴야 할 것들을 찾아보기 위해 고민해야 될 것 같다. 김근홍 강남대 교수·한국노년학회장

[경기시론] 손이 필요한 사회, 머리가 필요한 사회

자동차왕 헨리 포드는 “나에게 필요한 건 그저 사람들의 두 손뿐인데, 왜 항상 머리까지 딸려오는지 모르겠다”라는 다소 섬뜩한 말을 남겼다. 그의 행적을 보면 이 말이 한편으로 이해가 되고, 그렇지 않은 점도 있다. 포드는 1913년 자동차 제조에 이동조립방식을 최초로 도입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이동조립방식이란, 작업물이 전송대를 따라 자동으로 이동하고 각 작업자는 한 자리에 서서 몇 개의 부품만을 책임지고 조립하는 시스템이다. 이동조립방식을 정착시키고자 소위 3S라고 불리는 단순화, 표준화, 전문화를 추진하여 전송대의 이동시간과 작업자의 동작을 동기화시켜 나갔다. 작업능률은 대성공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실질적인 대량생산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포드자동차는 생산원가를 절감할 수 있었고, 당시 평균 자동차 가격인 2천달러보다 훨씬 저렴한 800달러 선에서 보급했다. 10년도 지나지 않아 290달러까지 내렸다. 그러나 이동조립방식은 극단적인 분업을 지향하고 노동자의 역할을 최소화한다. 노동자는 단순 손동작만을 정해진 위치에서 반복하였다. 이후, 찰리 채플린은 이를 희화화해 영화 ‘모던타임즈’에 담기도 했다. 이런 비판적 시각이 포드에게는 아마도 달갑잖았을 것이다. 노동자 개인의 지식과 경험(머리)을 내세우기보다 자신의 혁신적 생산방식을 묵묵히 따라 줄 손발만 필요했는지 모른다. 이에 반해 포드의 경영철학은 다소 역설적이다. 그는 대량생산으로 이룩한 기업이윤을 노동자와 함께 나누고자 했다. 그의 철학은 ‘저가격, 고임금’으로 사회의 복지를 증진시킨다는 봉사주의로 일컬어진다. 하루 2달러이던 임금을 5달러로 올려 다른 기업의 2~3배를 지급하였다. 근무시간도 10시간에서 8시간으로 단축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월스트리트에서는 이런 정책을 강력하게 비난했고 주주들은 법적 소송까지 제기할 정도였다. 봉사주의의 효과는 노동자의 사기를 진작해 단기적인 생산효율을 높이는 데 머물지 않았다. 다른 기업들도 경쟁력과 노동력을 잃지 않으려면 울며 겨자 먹기로 ‘저가격, 고임금’을 쫓을 수밖에 없었다. 장기적으로 탄탄한 중산층이 양성되었고 사회 전반에 구매력이 증대되었다. 포드자동차의 노동자라면 서너 달 치 월급으로 자신의 손을 거친 자동차를 살 수 있었다. 고가사치품이었던 자동차는 대중화되었으며, 1918년에는 미국 자동차의 절반이 포드 제품이었다. 결국 봉사주의는 대량생산과 함께 대량소비시장을 조성함으로써 미국을 경제대국으로 변모시켰다. 100년이 훌쩍 지나, GE의 회장이던 잭 웰치는 한 직원으로부터 들었던 “회사는 내 손을 사용하는 비용으로 내 머리를 공짜로 사용할 수 있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 충격적이었다고 회고한다. ‘머리’는 필요 없고 주어진 역할과 작업을 수동적으로 수행하던 인재상은 이제 화석이 되었다. 개인의 창의력, 네트워크, 잠재력이 조직에 흡수되어 능동적으로 발현될 때 기업 경쟁력으로 작동하는 시대다. 세간에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하여 첨단기계가 인간을 대체한다고 떠들썩하다. 인간을 하찮게 여기는 재벌가의 갑질파문, 국민은 개돼지라던 고위공무원이 묘하게 중첩되어 마음이 불편하다. 돌이켜, 헨리 포드는 2차 산업혁명을 이끌었던 주역이었고, 주변의 책망을 무릅쓰며 기업경영에서 이윤추구나 투기를 지양하는 대신에 봉사를 강조했다. 진정 그의 봉사에는 노동자의 ‘머리’는 필요 없었는지 포드가 옆에 있다면 묻고 싶다. 이제 그 답은 우리가 찾아야 한다. 진지하게 스스로의 자존감을 걸고 손만 필요한 사회로 퇴보할 것인지, 머리가 필요한 사회로 나아갈 것인지 지난 산업혁명의 성쇠를 반추해 볼 때다. 우형록 경기대학교 융합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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