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13961486)의 초상화인 효령대군 영정은 가로 70㎝, 세로 90㎝의 작은 규모의 작품이다. 효령대군은 태종의 둘째 아들로, 세종대왕의 형이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독실한 불교신자로 불경의 간행과 원각사 창건에 참여했다. 그림은 황색의 관모를 머리에 쓰고, 붉은색 홍포를 차려 입고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전신좌상이다.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어 다른 부분의 표현보다 중요한데, 여기서는 약간 도식적이고 미숙하게 처리된 감이 있다. 코와 입술은 윤곽을 묘사하는데에는 신경을 썼으나 수염의 표현은 세밀하지 않으며, 또한 무언가를 잡고 있는 오른손의 형태도 불완전하다. 화면이 다소 거칠고 정교하지 못한 것은 조선 전기의 초상화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습으로 여러 번 옮겨 그린 탓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몇 번 옮겨 그린 중모본이기는 하지만 조선 전기의 초상화가 거의 전해오지 않는 현 시점에서 소홀히 해서는 안될 작품이다. 현재 그의 초상화는 과천 소재 관악산 연주암에 보존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김상용 순절비는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인 김상용 선생의 충의를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세워놓은 비다.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16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천시기념물 35호로 지정됐다. 선원 김상용(15611637) 선생은 선조 23년(1590) 문과에 급제하여 판동녕부사, 병조예조이조의 판서, 유도대장, 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묘를 모시고 빈궁과 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도로 피란했으나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른 후 순절하였다. 이러한 그의 충절을 기리고자 비를 세웠으며, 선원면에 자리한 충렬사에 그의 위패를 모시었다. 비각 안에는 2기의 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데, 하나는 정조 때 공의 7대손인 김매순이 세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숙종 26년(1700) 선생의 종증손 김창집이 건립한 것으로, 1976년 지금의 자리로 비각을 옮기던 중 발견되었다. 문화재청 제공
우저서원은 조헌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의 유학교육을 담당하기 위하여 지은 교육기관이다. 조헌(15441592)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이며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금산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700명의 의병들과 함께 전사했다. 인조 26년(1648) 선생이 태어난 집터에 서원이 건립됐고 숙종1년(1675) 우저(牛渚)라는 사액을 받았다. 서원의 배치는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구조로, 본당과 사당, 강당인 여택당, 서재 등으로 이뤄져 있다. 사당에는 조헌의 위패가 봉안돼 있고 송시열의 문집인 우암집(尤庵集)을 비롯해 청금록(靑衿錄), 원생안(院生案), 계현비사적기(啓賢妃事蹟記) 등의 문집이 소장돼 있다. 사당 왼쪽의 비각에는 서원이 창건되기 전에 세워진 조헌선생유허추모비(유형문화재 제90호)가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해마다 봄 2월 중정일과 조헌의 기일인 음력 8월18일에 향사를 지낸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시 미추홀구 문학산 정산부분에 있는 돌로 만든 산성으로 인천시기념물 1호로 지정됐다. 동사강목과 여지도서에 따르면 문학산은 백제 미추왕(비류)의 도읍지로, 돌로 만든 산성의 터가 있고, 성안에 비류정이라는 우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축조형식은 테뫼식으로 정상의 봉우리를 돌로 둘러싸며 성벽을 두른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내에는 봉수대가 있었다. 성의 둘레는 토축의 내성이 100m, 석축의 외성이 200m로,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며 특히 정상부분에는 약 5m의 석축을 쌓았다고 전하나 현재는 대부분의 성벽이 붕괴되었다. 문헌에 전하는 이 성과 관련된 기록으로는 인천부읍지에 임진왜란 때 부사 김민선과 김찬선이 고성을 중수하여 주민들을 이끌고 왜군을 격퇴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문학산성은 인천항에서 동남쪽으로 약 10㎞정도 떨어져 있고, 문학산 정상에 오르면 인천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시흥시 조남동 안골 마을 논 가운데 커다란 탁자식 고인돌 1기가 있다. 덮개돌의 길이는 4m, 받침돌의 길이는 2m20cm인데 받침돌은 흙에 묻혀 제대로 보이지 않고 남쪽의 받침돌만이 겉으로 드러나 있다. 덮개돌 윗면에는 20여 개의 조그마한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를 알구멍 또는 성혈(풍년을 기원하거나 자식 낳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만든 구멍)이라 부르지만 정확한 제작 동기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해관문서는 과거 인천해관에서 인천감리서로 보낸 공문의 부본 12종으로 현재 인천화도진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인천시문화재자료 제20호로 지정됐다. 공문 12종 중 2종은 1886년, 10종은 1889년에 각각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문서에는 당시 인천세관장 대리 J.F.Schoenicke(한국명:사납기)의 친필서명 및 발송 연월일이 기재되어 있으며, 당시 인천해관 세무사의 직인을 제1면 좌측에 첨부하였다. 이 문서는 사납기의 친필서명과 서명일시, 문서번호 등 명문이 뚜렷한 보기 드문 자료로서 19세기인천항 개항시기의 각국 조계지 조성과 관련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아울러 우리나라의 영문표기가 COREA로 표기된 것이 눈에 띄는 자료이다. 문화재청 제공
시흥시 대야동 산140-3 소래산에 위치한 마애보살입상은 고려시대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자연적인 암벽의 풍화작용으로 마멸이 진행돼 지금은 그 형상을 뚜렷하게 알아보기 힘들지만 머리에는 연화문의 보관을 착용하고 여래의 법의를 입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그리고 유려한 음각선으로 거대하고 부리부리한 보살의 모습을 표현해 현재까지도 호평받는다. 지난 1988년 시흥군지편찬위원회의 주관으로 명지대 박물관에 의뢰해 탁본한 바 있으며 지난 2009년 10월 시승격 20주년을 기념해 시청 로비에 전시된 바 있다. 탁본은 현재 시흥시 향토사료실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시흥문화원 제공
인천시 연수구 동춘동 흥륜사에 있는 불화이며,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28호로 지정됐다. 흥륜사 신중도는 조선 후기에 가장 대중적으로 유행하였던 불화 형식으로, 부처의 정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인 위태천(韋天)을 중앙에 크게 그렸다. 화면의 구성을 보면 주존인 위태천을 중심으로 제석천과 범천, 존명을 알 수 없는 무장신, 민간신앙 산신 및 조왕신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는 위태천을 주존으로 팔부중과 여러 무장신을 배치하는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신중도와는 약간 다른 점이다. 채색은 대부분 청색, 적색, 녹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으나 청색의 사용이 두드러졌다. 특히 위태천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민간에서 널리 신앙되었던 산신과 조왕신이 배치되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조왕신은 원래 부엌에 존재하는 화신(火神)에서 유래된 것으로 집을 떠난 가족을 지켜주거나 자식에 관한 공, 부정을 없애주는 정화력을 가지고 있어 부녀자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했던 신이다. 문화재청 제공
정몽주선생묘는 경기도기념물 제1호로 소재지는 용인 처인구 모현면 능곡로 45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선생이 순절한 후 풍덕군에 묘를 썼다가 후에 고향인 경북 영천 중 한 곳으로 이장할 때 용인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자 앞의 명정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의 묘소에 떨어져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단분으로 묘비, 문인석 1쌍, 상석, 혼유석 등은 종전의 것이나 장명등, 망주석, 석양, 곡담, 호석, 난간석 그리고 별도의 새 문인석 1쌍 등은 1970년에 추가설치 하였다. 묘비에는 고려시대의 벼슬만을 쓰고 조선의 시호를 기록하지 않아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뜻을 분명히 하였다. 묘역 입구의 신도비는 송시열이 찬하고 김수항이 글을 써서 조선 숙종 22년(1696)에 건립하였다. 비문에는 왕조와 시대를 뛰어넘은 정몽주의 충절과 높은 학식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경기문화재연구원 제공
음식물로 병을 예방하는 내용을 담은 전문의학서적으로, 중종 21년(1526)에 중국 명나라 요문청(姚文淸) 등의 서문을 붙여 간행한 것을 중종명종년간(15261556)에 다시 갑진자로 간행한 것이다. 보물 제1227호로 지정됐으며 인천시 연수구 가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수(水)곡(穀)채(菜)과(果)금(禽)수(獸)어(魚)미(味) 등 8류(類)로 나누어 상권과 하권에 수록하였다. 상권에는 수곡채과 등 4류 212조가, 하권에는 금수어미 등 4류 175조가 수록되었다. 각류(各類)에서는 조목마다 해당식물의 맛, 본성, 이익, 해독 등을 적어 설명하고 말미에는 각류의 식물에 대한 총론을 적고 있다. 이 책은 간년이 정확하지 않으며 또 상권의 반수 이상이 반쪽 정도 파손되어 있으나 중종명종연간에 간행된 갑진자본으로 도서목록에 아직까지 보이지 않던 것으로 희귀한 의학서적이며, 따라서 서지학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제공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광주향교를 처음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숙종 29년(1703)에 옛 광주관아 서쪽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가장 뒤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으며 그 앞으로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동재ㆍ서재가 있어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배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명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이고, 동재ㆍ서재는 학생들의 기숙사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경기지역에서 평지에 세운 유일한 향교이며 동재와 서재, 동무와 서무를 모두 갖춘 큰 규모의 향교이다. 문화재청 제공
간이벽온방은 조선 중종 때 의관 박순몽, 박세거 등이 임금의 명에 의해 온역(瘟疫: 전염병) 치료에 대한 약방문을 모아 엮은 의학서적으로, 현재 인천시 연수구에 위치한 가천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며 보물 제1249호로 지정됐다. 이 서적은 조선 중종 19년(1524) 가을에 평안도 전지역에 여역(전염성 열병)이 번지자 치료에 필요한 약방문을 책으로 엮어 한글로 번역하여 중종 20년(1525)에 널리 보급하였다. 그러나 현재 초간본은 전하여지지 않고 선조 11년(1578)의 을해자와, 광해군 5년(1613)에 훈련도감자로 발행한 중간본이 전한다. 이 서적은 선조 11년(1578)의 중간본으로서 당시에 유행한 전염병을 방지하기 위하여 나라에서 간행하여 널리 반포한 책으로 의학사 연구자료로서의 가치와 함께 1613년의 한글자료로서 17세기 한국어의 일면을 보여주는 국어사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초기의 명재상이자 청백리의 표상이었던 황희 정승의 묘는 파주시 탄현면 정승로 88번길 23-81에 위치해있다. 묘역은 3단으로 넓게 조성되었고, 봉분 역시 규모가 크다. 봉분의 구조는 다른 묘의 형태와는 달리 전면을 ㄷ자 모양으로 화강암 장대석을 이용해 전방을 향해 3단의 호석을 쌓아 봉분과 연결시킨 특이한 구조이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상석향로석이 밀착되어 있으며 그 정면에는 4개의 화창이 투각된 장명등이 있다. 봉분좌측에 묘갈이 위치하며 그 아래로 동자상과 문인석이 각각 1쌍씩 설치되어 있다. 묘역의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원모재 앞 언덕에 신도비가 있는데 1505년(연산군 11)에 세워졌으며 신숙주가 짓고 안침이 썼다. 비문은 마모가 심해 판독이 불가능하며 옆에 1945년에 다시 세운 신도비가 있고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지난 1976년 8월27일 경기도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된 바 있다. 한국관광공사 제공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으로 사적 사적 제132호로 지정됐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됐다.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성은 주위 약 1천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해안을 따라 쌓았다. 남문인 안파루북문인 진송루서문인 첨화루와 동문인 망한루가 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 그리고 수문이 2개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복원 정비돼 있다. 특히 이곳은 조선 후기 병인양요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문화재청 제공
청계산과 광교 산맥을 잇는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하우현 성당은 옛날 동양원이라는 역원이 있던 곳으로 현재 원터라고도 불리운다. 하우현 일대에 언제부터 교우들이 모여들어 살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이 지방에 청계산과 광교산 등 높은 산들이 있고 거기에 형성된 자연의 계곡과 울창한 수목이 박해를 피해 산길을 찾던 천주교인들에게는 더 할 나위 없는 피난처였음에 비추어 어느새인가 교우촌이 형성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교우들이 때로는 땅을 파고 토굴 속에서 살던 곳이었다고 해 토굴이라고도 불리웠다. 1884년에 하우현은 공소공동체의 모습을 갖추고 뮈텔 신부 등이 정기적으로 순방해 전교했다. 이때까지도 한국 천주교회는 박해하에 있었기 때문에 뮈텔 신부는 상복으로 변장하고 은밀히 하우현을 방문했다. 1886년 한불조약의 성립으로 한국 천주교회에는 신교의 자유가 허용되기 시작했다. 하우현은 현재 200여 명의 신자수로 교우촌을 형성하고 있는 작은 본소에 불과하나 본당 역사 100주년을 맞은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성당이며 1906년 신축한 사제관은 2001년 1월22일 경기도 기념물 제 176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제공
자치통감 강목이란 중국 송나라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토대로 그 이전의 기사를 보충해서 중요한 사항을 강으로 삼고 부수적인 세부항목을 목으로 삼아 만든 편년사를 말한다. 인천시 연수구 흥륜사에 소장된 것은 조선 세종 때 출판한 것으로 인천시유형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됐다. 유교를 국시로 신봉한 조선 왕조는 자치통감을 중국 역사의 독본으로 주용됐다. 조선 세종은 이 자치통감강목의 인출을 위해 필요한 방대한 용지를 중앙과 지방관서에 만들게 했다. 강의 본문은 진양대군에게 큰 글자를 쓰게 하여 1436년 연으로 주조하고 병진자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목의 중간 글자와 작은 글자는 1434년에 주조한 갑인자를 사용하여 1438년에 찍어 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문화재청 제공
안성시 구포동에 있는 천주교 성당인 이 성당은 앞면 3칸ㆍ옆면 9칸으로 구성돼 있으며 종탑부에는 3개의 뾰족한 탑이 있다. 뾰족한 탑의 가운데는 끝이 8각형으로 변형됐고 양쪽은 사각뿔로 돼있다. 현재 건물은 보개면 신안리에 있던 동안강당의 한옥 재료인 목조기둥·서까래·기와 등을 사용해 만든 것으로 건물의 내부장식이 서양식인 반면 구조와 외곽은 전통적인 목조건축 양식을 채택하고 있다. 광무 5년(1901) 프랑스 신부인 안토니오 공베르(한국이름 공안국)가 지은 것으로 1922년에 새로 고쳤으며 1955년에는 건물 앞면 입구와 종탑을 로마네스크 풍의 벽돌 성당건축으로 고쳐 세웠다. 가톨릭 성당 건축을 짓기 시작하던 초기 단계의 건축을 보여주는 예로 한식과 양식이 절충되어 있다. 지난 1985년 6월28일에 시도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됐으며 현재는 천주교수원교구유지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강화 전등사는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일원에 세워진 사찰로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 중 전등사 대웅전은 보물 제178호로 지정됐다. 전등사는 조선 선조 38년(1605)과 광해군 6년(1614)에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그 이듬해 다시 짓기 시작하여 광해군 13년(1621)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전등사 대웅전은 이때 다시 지어졌다. 대웅전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네 모서리기둥 윗부분에는 사람 모습을 조각해 놓았는데 이것은 공사를 맡았던 목수의 재물을 가로챈 주모의 모습이라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이처럼 전등사 대웅전은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조문수 필적 위심수재서(曺文秀 筆蹟 爲沈秀才書)’는 지난 2010년 10월25일 보물 제1669호로 지정됐으며 과천시에서 보관 중이다. 17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문인명필 조문수(1590~1647)의 필적으로 왕희지 서풍과 조맹부 서풍을 겸비했던 그의 명성을 잘 대변해준다. 이 서첩은 앞쪽에 송나라 범준이 지은 ‘범씨심잠’을 단정한 해서로 쓰고 중간에 당나라 두보의 장시‘애강두’를 특유의 행서로 썼으며 뒤쪽에 두보의 칠언율시 3수를 좀 작은 행초로 썼다. 말미에 ‘정해맹동설정옹위심수재서우성서초옥(丁亥孟冬雪汀翁爲沈秀才書于城西草屋)’이라 하여 58세로 사망하기 얼마 전인 1647년 10월에 심씨 수재를 위해 썼음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강화 석릉은 고려 희종(재위 1204∼1237)의 무덤으로, 사적 제369호로 지정됐다. 희종은 신종의 첫째 아들로 어머니는 정선태후 김씨이며, 부인은 성평왕후 왕씨이다. 1204년 왕위에 올랐고,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희종 7년(1211)에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강화 교동으로 갔다. 이후 용유도에서 고종 24년(1237) 57세의 나이로 죽자 낙진궁으로 옮겼으며, 10월에 덕정산 남쪽에서 장례를 지내고 석릉이라 하였다.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이 찾아내어 다시 무덤을 쌓았는데, 그 뒤 석물도 부서지고 무너진 무덤을 1974년 손질하여 고쳤다. 석릉 주변에는 최근에 고려시대 귀족의 무덤이라 생각되는 돌방무덤(석실분)들이 많이 발견됐다. 강화 석릉은 남한지역에 남은 단 5기의 고려 왕릉·왕비능 중의 하나다. 문화재청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가 지난 8월 석릉 주변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강화 천도 이전 시기부터 강화 천도 이후까지 다양한 고려 시대 묘제가 강화도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확인했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