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강화군에 위치한 자연경관을 보며 풍류를 즐기거나 학문을 공부하던 정자로, 현재 인천시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됐다.한강과 임진강의 합해진 물줄기가 하나는 서해로, 또 하나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데 이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고 해서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지었다고 한다. 정자를 언제 처음 지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나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이 사립교육기관인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공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 중종 5년(1510)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운 황형에게 이 정자를 주었다고 한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곳이기도 하다. 앞면 3칸ㆍ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연미정은 강화십경의 하나로서 뛰어난 경치를 이루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파주 수길원(坡州 綏吉園)은 조선 21대 영조(재위 1724∼1776)의 후궁이자 추존 진종소황제의 사친(생모)인 정빈 이씨(1694∼1721)의 무덤이다. 정빈 이씨는 이준철의 딸로 8세에 궁녀로 입궁하여, 1719년(숙종 45)에 영조의 맏아들 진종(효장세자)을 낳았다. 영조가 왕위에 오른 후 정빈에 추봉되었으며,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자 왕의 사친의 지위에 맞게 원의 이름을 수길원이라 하였다. 신주(위패)는 조선시대 왕을 낳은 후궁들을 모신 칠궁(七宮) 중 연호궁(延祜宮)에 모셨다. 묘소에는 문석인, 장명등, 망주석, 표석이 있으며, 현재 정자각 등의 건물은 소실돼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에 있던 외국인들의 사교모임인 제물포 구락부의 사교장으로 쓰기 위해 광무 5년(1901)에 지은 것으로 인천시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됐다. 1913년 일본제국 재향군인회 인천연합회 소속의 정방각으로 불리다가, 1934년 일본부인회, 광복 직후에는 미군 장교 클럽, 1947년부터는 대한부인회 인천지회가 각각 활용하였으며, 1952년 시의회, 교육청, 박물관이 함께 사용하다가, 1953년 의회와 교육청이 이전한 후 1990년 인천시립박물관도 이전하였다. 2007년 6월 리모델링 작업을 거쳐 구)제물포구락부의 모습을 복원하여 스토리텔링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2층 벽돌집으로 근대 개항 이후 복잡한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호화스러운 건물이다. 이 건물은 특별한 건축 양식이나 구조상의 특징은 없다. 다만 인천시의 발달로 서양식 건물이 대부분 사라지는 현실에서 개항 이후 건축물을 통한 인천 지역의 변화상을 직접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호로고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효종 7년(1656)에 편찬된 ‘동국여지도’이며 이 책에는 호로고루가 삼국시대의 유적임이 명시되어 있고 최초의 학술조사 기록은 1919년에 발간된 ‘조선고적조사보고’이다. 이 보고서에는 도면과 함께 사진을 싣고 있으며 삼국시대 성으로서의 중요성이 기술돼 있다. 그 후 1991년부터 2003년 사이 본격적인 학술조사 및 발굴조사가 이뤄지게 됐다. 연천 호로고루는 연천당포성, 연천은대리성과 함께 임진강과 한탄강이 지류와 만나 형성하는 삼각형의 대지위에 조성된 독특한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으로 임진강이 국경하천역할을 했던 삼국시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학술적으로 가치가 높은 귀중한 문화유적이다. 문화재청 제공
강화 선원사지는 1976년 동국대학교 강화도학술조사단이 강화도 일원에 대한 지표조사에서 처음 발견했다. 면적은 1만1천540.5㎡이며 사적 제259호로 지정됐다. 1977년에 사적 제259호 강화선원사지(江華仙源寺址)로 지정되었다. 이 곳은 1996년부터 4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동국대학교박물관) 결과 절터와 관련된 유적으로 규명되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서 전하는 고려팔만대장경을 판각했던 선원사(禪源寺)터로 볼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확인되지 않아 이에 대하여는 장기적인 조사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문화재청 제공
이천 설봉산성은 계곡을 감싸안고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성벽은 대부분 흙으로 쌓았으나 돌로 쌓은 석축도 군데군데 있다.이 일대에서는 석축ㆍ석편ㆍ토기편은 물론, 건물터 임을 알리는 정면 9m, 측면 6.30m의 인공 주춧돌 9개가 정연히 배치돼 있어, 이 곳이 웅장한 규모의 삼국시대 산성터 임을 알려 준다. 정상 밑 서쪽 능선 평평한 부분에는 주춧돌이 원형대로 남아 있어 장대지(將臺址)로 추정되며, 군기(軍旗)를 꽂았던 홈을 판 바위와 돌싸움에 사용됐던 것으로 보이는 돌무더기도 3곳 남아 있다. 또 산성의 필수요건인 우물터 2곳, 수구와 인접한 북문의 흔적도 남아 있다. 산의 정상에 서면 주변 지역이 한눈에 들어와, 삼국시대부터 치열한 세력 다툼이 있었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대의 역할을 하였던 성으로 여겨진다. 문화재청 제공
강화 홍릉은 고려 23대 고종(1192∼1259)의 무덤으로 사적 제224호로 지정됐다. 이 당시는 정치적으로 최씨 집권시기였으며 밖으로는 거란·몽골의 침입 등으로 고통받았던 시기이다. 고종 18년(1231)부터 여러 차례에 거친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국토는 초토화되고, 인명과 문화 유산의 손실 또한 매우 컸다. 고종은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대장경을 만드는 등 문화상의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이 현재 합천 해인사에 남아있는 ‘고려대장경’이다. 원래의 홍릉은 높게 쌓은 3단의 축대로 이루어져 제일 아래에 정자각, 2단에는 사람형상을 한 조각, 가장 높은 곳에는 왕릉이 배치된 형식이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며, 무덤 주위에는 난간으로 두른 돌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문화재청 제공
백송은 나무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져서 흰빛이 되므로 백송 또는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 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다 심은 것이다. 이천의 백송은 나이가 약 230살 정도이며, 높이는 16.5m, 가슴 높이의 둘레는 1.92m, 1.98m이다. 마을에서 약 1㎞ 떨어진 야산에 위치해 있다. 줄기는 아래에서부터 두 개로 갈라져 고르게 발달했으며, 나무의 모습이 좋은 편이다. 200여 년 전인 조선시대에, 전라감사를 지낸 민정식의 할아버지 민달용의 묘소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백송은 흔히 볼 수 없는 희귀한 소나무로 중국과의 교류관계를 알려주는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시 강화군 하점면 봉천산 아래에 자리잡은 고려시대의 석조불상으로 보물 제615호로 지정됐다. 두꺼운 화강암의 판석에 돋을새김으로 했는데, 현재는 전각을 만들어 그 안에 모시고 있다. 민머리의 정수리 부분에는 상투 모양의 작은 머리(육계)가 솟아 있다. 타원형의 얼굴에는 살이 올라 있는데 눈·코·입의 표현이 다소 둔중해 보인다. 귀는 비사실적으로 길며, 목이 짧아 3줄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가슴까지 내려와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두껍게 표현되어 신체의 굴곡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으며, 좁고 둥글게 처리된 어깨선으로 인해 불상은 어딘지 모르게 움츠러든 모습이다. U자형의 옷주름은 가슴에서부터 흘러내려 무릎 부분까지 표현되었는데 형식적이며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평판적이고 선으로 조각하는 경향이 두드러진 불상으로 모든 면에서 단순화, 생략화되는 점은 시대가 내려가는 것을 말해준다. 양감이 있는 얼굴, 짧은 목, 움츠린 어깨, 형식적인 옷주름 등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남양주에 위치한 사릉은 조선 6대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1440∼1521)의 무덤이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그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왕후는 왕실을 떠나 작은 집을 지어 평생 흰옷만 입으며 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무덤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하지 않았고, 무덤 앞에 상석과 양석, 둘레돌이 있으며 그 밖으로 3면을 낮은 담으로 쌓았다. 단종의 무덤이 장릉으로 봉해졌을 때에도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고, 동물모양의 돌만 세웠는데 이는 왕릉으로 봉해진 것에 대한 예에 따른 것이다. 사각지붕 모양의 장명등은 장릉과 같은 것으로 숙종대의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문화재청 제공
동두천 광주정씨가소장고문서는 광주정씨 성제공파 정수상계열의 고문서로서 교령류(敎令類), 소차계장류(疏箚啓狀類), 첩관통보류(牒關通報類), 명문문기류(明文文記類) 4종 61점으로 구성돼 있다. 동두천 광주정씨 성제공파문중은 고려후기에 득관한 이래 조선후기까지 다수의 문신·학자 등을 배출하여 경화사족으로써 가성을 지켜온 전형적인 양반가문이다. 특히 광주정씨의 대표적 인물인 정사호 선생(호는 화곡(禾谷))의 묘지는 동두천시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돼 관리 운영되고 있다. 자료는 당대의 경제적 실상을 잘 대변해주고 있으며 역사적 자료가 많이 부족한 동두천시의 과거 경제, 생활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로써 사료적 가치가 높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시 강화군 전등사에 소장된 묘법연화경 목판은 조선 중종 38년(1543) 마니산(摩尼山) 정수사(淨水寺)에서 성달생 서체 계열의 인본을 복각하여 1판 4장의 형태로 조성한 것이다.현재 보물 제1908호로 지정됐다. 전체 105매 가운데 첫 부분인 변상(變相) 및 홍전서(弘傳序)로 구성된 1매가 결실되었고, 일부 목판에서 충해로 인한 훼손이 보이나 대부분의 경판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이 목판은 조선 초기부터 16세기까지 성행되었던 성달생 서체 계열의 ‘묘법연화경’ 가운데 시대가 가장 앞서는 목판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또한 각 권의 말미와 판면 광곽의 변란 밖에는 중종실록 등과 같은 관찬사서 등에서 확인되지 않은 수백 명의 시주질, 연화질 및 각수 등이 새겨져 있어 16세기 중엽 정수사의 경판 조성과 관련된 역사상, 수록된 승려 등을 통한 불교사적 사실 등 다양한 역사·문화적 실체를 살펴볼 수 있는 학술적 가치도 지니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한강하류의 재두루미 도래지는 우리나라에서 재두루미가 겨울을 지내는 대표적인 지역이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산남리, 문발리, 신촌리와 김포군 하성면 사이의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삼각주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재두루미가 이곳에서 겨울을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한강 상류에 댐을 만들고 농지를 넓히는 계획에 따라 물의 높이와 소금의 농도가 변하면서 수송나물, 칠면초, 매자기 등 재두루미의 먹이가 감소됐다.현재 그 자리에는 소금농도에 강한 갈대와 갯개미취 또는 띠가 무성하게 자랐다. 현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수의 개리(천연기념물 제325호)가 도래하는 지역이 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전등사에 있는 철제 종으로 현재 보물 제393호로 지정됐다. 이 종은 종에 적힌 명문으로 제작시기를 알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중국 하남성 회경부 수무현에 있는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라는 점과 주종 연대는 북송의 철종 소성 4년, 즉 1097년(고려 숙종 2년)이다. 이 종은 일제강점기 일제의 금속류 강제수탈 과정에서 중국에서 인천으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 광복 후 부평미군기지에서 발견된 것을 신앙심이 높은 불교신도에 의하여 전등사에 옮겨져 현재까지 보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형태와 조각수법에서 중국종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춘 높이 1.64m, 입지름 1m의 종으로 한국의 종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비록 철로 만든 종이지만 종소리가 청아하며 중국 북송 시대에 만들어진 명문을 지니고 있어 중국종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문화재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16대 인조의 첫째 아들 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 강씨(1611~1646)의 무덤이다. 강감찬의 19대 손녀이자 강석기의 딸인 민회빈 강씨는 1627년(인조 5) 왕세자빈에 책봉됐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의 볼모로 가게 됐고, 1645년(인조 23)에 귀국했다. 그러나 남편 소현세자를 잃은 후, 인조의 후궁 조씨 등이 민회빈이 왕실을 저주한다는 모함을 해, 1646년 폐위된 후 사사(賜死)됐다. 이후 1718년(숙종 44)에 죄가 없음이 밝혀져 민회빈으로 복위됐다.무덤의 이름은 민회묘(愍懷墓)라 했다가 1870년(고종 7) 영회원으로 높였다. 무덤 주변에는 문석인, 장명등, 혼유석, 석양과 석호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정자각 등은 남아있지 않다.문화재청 제공
조선 후기 인천으로 들어오는 서양인들의 배를 막기 위해 쌓은 포대로, 인천시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됐다. 고종 16년인 1879년 어영대장 신정희와 강화유수 이경하가 경기 연안의 군사시설을 확충하면서 구축한 것으로 구축 당시는 지명을 따 호구포대라 불리었지만, 지금은 논현포대로 불린다. 축조 후에는 인근에 설치된 묘도포대, 제물포대 등과 화도진에 소속됐지만, 1894년 화도진이 철폐되면서 이 포대 역시 폐쇄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포대가 원래 몇 개의 포좌(砲座)로 이루어져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현재는 2개의 포좌만이 남아 옛 모습을 전하고 있다. 논현포대의 축조 형식은 각 포좌의 아랫부분에 잡석을 깔고 중단과 상단에는 어느 정도 다듬은 장대석을 쌓았으며, 그런 다음 그 위에 봉토를 하여 마무리하였다. 지형 여건상으로 미루어 보아 각 포좌에는 이동식 중포 2문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원형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문화재청 제공
현등사 삼층석탑은 가평군에 위치한 높은 지대석 상면에 2층 기단을 구비한 일반형 석탑이다. 하층기단은 불상의 대좌와 같이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되어 있고 상, 하 대석에는 판 내에 장식문이 있는 연화문과 장방형의 액(額)이 공통적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중대석에는 대나무형의 원주(圓柱)로 된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다. 이 탑에서는 조선 세조 5년(1470) 현등사를 중수한 기록이 새겨진 사리함과 사리가 발견되었으며, 석탑을 구성하는 각 부의 양식과 문양 등으로 보아 조선시대 전기에 건립된 석탑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제공
신라시대 선덕여왕 8년(639)에 회정선사가 세웠다고 알려졌으며, 이후 조선시대 세종 8년(1426) 함허대사가 다시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보물 제161호로 지정됐다. 정수사의 유래는 건물 서쪽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 법당은 석가모니불상을 모신 대웅보전으로, 1957년 보수공사를 거친 바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4칸이지만 원래는 툇마루가 없이 앞면과 옆면이 3칸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고, 지붕 무게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앞뒷면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앞면 퇴칸이 후대에 다시 설치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앞쪽 창호의 가운데 문은 꽃병에 꽃을 꽂은 듯 화려한 조각을 새겨 뛰어난 솜씨를 엿보게 한다. 문화재청 제공
구리시에 위치한 건원릉(健元陵)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의 능으로 구리 동구릉에서 가장 먼저 조성됐다. 건원릉은 기본적으로 고려 공민왕의 현릉(玄陵)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왕릉에는 없었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정자각은 제향(祭享, 제사)을 지내는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인 정전에 2칸의 배위청이 결합한 ‘丁’자형 평면의 건물로, 태조가 세상을 떠난 1408년(태종 8)에 건립되었다. 조선의 능침제도 중 정자각의 표준으로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큰 건물이다. 특히 1764년(영조 40) 건물이 크게 퇴락하자 중수청을 설치해 수리했다. 전체적으로 조선시대 정자각의 전형적인 형태를 잘 따르고 있으며, 기둥 상부의 익공(翼工)형식은 18세기의 수법을 보여주고 있어 1764년(영조 40) 중수 당시의 시대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문화재청 제공
인천시 중구 운서동에 위치한 삼목도 선사유적지(三木島 先史住居址)는 7만2천444.6㎡ 규모로 현재 인천시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됐다. 삼목도 선사유적지는 중서부 내륙의 암사동유적을 제외한 서해 도서지역에서 확인된 최대 규모(17기)의 신석기 주거지이며, 기존의 패총 중심의 조사와 연구에서 벗어나 도서지역에서의 취락을 통한 생업 및 주거양식에 대한 연구를 진전시킬 수 있었다. 즉, 서해안 일대의 유적들이 내륙 주민들의 자원 획득을 위한 방문 및 단기 점유로 형성된 것이라는 기존의 가설이 해당 지역의 모든 유적을 설명해 줄 수 없다는 점이 제기되었다. 주거지 내에서 발견되는 유물 및 시설은 서해 중부지역 신석기시대 문화의 연구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유적지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수혈주거지 17기, 수혈 1기, 적석유구 1기와 조선시대 구들 1기 등이 확인되었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