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강대교천현무암협곡은 포천시 관인면 등지에 있다. 천연기념물 제436호다. 한탄강 연안에는 현무암 평원이 발달해 있다. 현무암 평원을 관류하는 한탄강 유로에는 경관이 특이한 현무암 협곡이 형성되어 있다. 철원 대교천 현무암 협곡은 그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서 제4기의 지질과 지형 발달을 이해하는데 학술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협곡 양측절벽 현무암의 절대연령은 약 27만 년 전에 분출한 용암이 최소한 3번의 분출 단위를 보이는 추가령 현무암으로 구성되며, 협곡 곡벽 곳곳에 현무암의 주상절리가 아름답게 분포한다. 주상절리는 지표로 분출한 용암이 냉각될 때 용암이 수축되면서 형성된 육각기둥이다. 이 현무암 협곡의 총 길이는 약 1.5km이고 협곡의 깊이는 20∼30m로 경관이 빼어나다. 문화재청 제공
강화 보문사(普門寺)는 인천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낙가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또 한국의 3대 해상관음기도장 가운데 하나이다. 건립시기는 신라시대인 635년(선덕여왕 4)에 창건했다고 알려졌으며, 이 마을에 살던 한 어부가 그물을 쳤다가 불상과 나한상 22구를 건져올렸는데 꿈에 나타난 스님이 일러준 대로 현재의 석실에 봉안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1812년(순조 12)에 홍봉장의 도움을 받아 중건했으며, 1893년(고종 30)에는 민비의 전교로 요사와 객실을 중건하는 등 여러 차례의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법당·관음전·나한전·대방·종각·석실 등이 있다. 특히 이 절의 역사를 대표하는 순례지인 석실(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7호)의 입구에는 3개의 홍예문이 있고, 동굴 내에는 반원형의 좌대를 마련하고 탱주를 설치했는데 그 사이에 있는 21개의 감실에는 석불을 안치했다. 문화재청 제공
궐리사성적도는 공자의 생애를 그림으로 새긴 목판으로 공자의 76대손인 한국인 공재헌이 1904년 중국 산둥성에 가서 구한 것을 본떠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을 간행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목판은 피나무로 되어 있고 모두 60장인데, 크기는 가로 70㎝, 세로 32㎝이다. 이것을 보관하고 있는 궐리사(공자를 모신 사당)는 우리나라에서 오산과 노성 2곳 밖에는 없다. 오산 궐리사는 정조 16년(1792)에 착공하여 그 다음해에 완성하였는데, 이 곳은 중종 때 문신이자 공자의 64대손인 공서린이 서재를 세워 후학을 가르치던 곳으로 정조가 사당을 지어 공자의 영정을 모시게 했다. 이에 정조는 친히 궐리사라는 현판을 친히 썼을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문화재청 제공
용흥궁(龍興宮)은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현재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됐다.강화도령으로 불렸던 철종이 왕위에 오르고 난 이후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궁의 이름을 붙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내전의 오른쪽과 별전의 왼쪽에 각각 우물이 1개씩 있으나 사용할 수 없다. 별전에는 마루 앞으로 작은 정원이 있고, 별전 오른쪽에는 조금 더 큰 규모의 정원이 있었으나 잘 가꾸지 않아 화초가 전혀 없다. 별전 주변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으나, 거의 베어져 밑동만 남아 있다. 용흥궁은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문화재청 제공
용문사에서 약 300m 떨어진 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지국사(1324∼1395)의 행적 등을 기록한 것이다. 탑과 비는 8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위치하고 있다. 탑은 조안(祖眼) 등이 세운 것이며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이 4각이고 윗받침돌과 탑몸이 8각으로 되어 있어 전체적인 모습이 8각을 이루고 있다.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기고, 북 모양의 가운데받침돌에는 장식 없이 부드러운 곡선만 보인다. 지붕돌 윗면에는 크게 두드러진 8각의 지붕선이 있으며 꼭대기에는 연꽃 모양의 장식이 놓여 있다. 비는 작은 규모의 석비로 윗부분은 모서리를 양쪽 모두 접듯이 깎은 상태이고, 문자가 새겨진 주위에는 가는 선이 그어져 있다. 비문은 당시의 유명한 학자인 권근(權近)이 지었다. 처음에는 정지국사탑에서 20m 아래 자연석 바위에 세워 놓았는데, 빠져나와 경내에 뒹굴고 있던 것을 1970년경 지금의 위치에 세웠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후기의 문신 심동신(1824∼?)이 입던 금관조복이다.조복이란 문신과 무신들이 동지와 설날,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종묘와 사직에 제사 지낼 때 입었던 옷으로 금관조복이라고도 한다. 심동신 금관조복으로 지정된 유물은 금관, 적초의, 적상, 청초의(청초중단), 운학금환수, 패옥, 서대, 홀 등이다. 금관은 5개의 금색선이 붙여진 오량관으로 나무비녀로 고정시키게 되어있다. 조복인 적초의는 날씨가 더울 때 쓰는 항라로 만든 붉은색의 홑옷이다. 청초의는 조복인 적초의 바로 안에 입는 옷으로 중단이라고 하는 청색 명주로 된 홑옷이다. 적상은 조복인 적초의와 같이 항라로 만들었으며, 전체를 잔주름으로 처리하였다. 1890년대를 전후한 구한말의 유품으로 부속품까지 양호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어 복식사적 가치가 크다. 문화재청 제공
원인재는 인천 이씨 중시조인 이허겸의 묘 앞에 세운 건물로,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됐다. ‘고려사’에 따르면 그의 선조는 신라 때부터 지금의 인천인 소성현에 살았다고 한다. 인천 이씨가 고려 귀족 반열에 오른 것은 이허겸 때부터로, 그의 손녀 3명이 모두 현종의 비(妃)가 되었기 때문이다. 첫째 손녀는 원성황후로 덕종과 정종 두 왕을, 둘째 손녀는 문종을 낳았다. 그 뒤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기까지 7대에 걸쳐 귀족정치의 막강한 파벌을 이루었다. 건물 형태는 팔작지붕 형식을 하고 있다. 원래 연수구 연수동 적십자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왼쪽의 신지마을에 있었으나, 택지개발사업으로 해체되어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 그의 묘역으로 옮겨져 복원하였다. 문화재청 제공
크낙새는 딱따구리과의 일종으로서 지구상에서 한반도 중부지역에만 생존하고 있으며, 현재는 멸종위기에 처해있다.암수 구분 없이 몸길이는 46㎝ 정도이며, 수컷은 머리 꼭대기에 진홍색 깃털을 가지고 있다. 광릉의 크낙새 서식지는 경기도 포천군 소홀면, 내촌면, 남양주시 진접읍, 별내면, 자둔면의 5개면에 걸쳐 있다. 광릉(光陵)은 조선 제7대 왕인 세조와 왕비 윤씨가 묻힌 곳으로 능 주변의 숲은 조선시대 460여 년간 엄격히 보호됐다. 크낙새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만 사는 진귀한 새로서 학술적 가치가 클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이 대륙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살아있는 자료로서도 의의가 매우 크다. 그러므로 크낙새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우의정 김상용(金尙容), 공조판서 이상길(李尙吉), 장령 이시직(李時稷), 돈녕도정 심현(沈), 천총(千摠) 구원일(具元一) 등을 모신 사당이다. 강화도 내의 유생들의 재정적인 지원으로 1642년 건립됐으며 인천시 유형문화재 21호로 지정됐다. 김상용은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인천이 청나라 군사에게 함락되자 순절한 충신이다. 인조 19년(1641)에 지어 현충사라 불렀으나, 효종 9년(1658)에 나라에서 충렬사라는 이름을 다시 받았다. 충절인의 넋을 달래고, 또 국가에 대한 충절을 장려한다는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이 서원·사우를 훼철할 때에도 그 대상에서 제외되어 존속되었다. 현재는 충렬사유지재단에서 관리를 하고 있으며,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는 없어지고, 사당과 책을 보관하는 전사청· 출입문인 외삼문 등이 남아있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백자 항아리다. 크기는 높이 54.8㎝, 아가리 지름 19.2㎝, 밑 지름 18㎝이다. 아가리 부분은 수직으로 낮게 있으며, 부드럽게 팽창하여 어깨부에서 팽배되었다가 서서히 좁아진 후, 몸통 아랫부분에서 약간 벌어져 바닥면에 이른다. 항아리의 양감이 풍부하고 아랫부분이 좁아서 보기에 준수하며, 몸통 가운데에 위·아래를 따로 만들어 붙인 흔적이 있다. 몸통 윗부분의 4곳에 푸른색 안료로 4개의 반원을 연결해 만든 마름모 형태의 꽃 창을 큼직하게 그린 다음, 그 속에 산수문과 화조석문을 교대로 그려 넣었다. 각각의 꽃 창 안에 도안화된 ‘富’자를 넣어 사다리꼴로 연결해 놓았으며, 꽃 창 사이의 위·아래 4곳에도 역시 도안화된 ‘壽’자와, ‘疆’자가 들어있는 원이 있다. 유약은 투명하고 광택이 좋은 백자유로 전면에 고르게 칠해졌고, 표면의 색조는 엷은 회백색이다. 형태가 아름답고 문양들이 우수하고 다양하여, 이 무렵 대표적인 백자 항아리로 손꼽힌다.문화재청 제공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조선 후기의 문신 영재 이건창(李建昌, 1852∼1898) 선생이 살았던 생가다. 이건창은 할아버지가 개성유수로 재직할 때 관아에서 태어나 출생지는 경기도 개성이지만, 선대부터 강화에 살았다. 그는 고종 3년(1866) 15세의 어린 나이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너무 일찍 등과했기 때문에 19세에 이르러서야 홍문관직에 나아갔다. 1874년 서장관으로 발탁되어 청나라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강직한 성격 탓에 세 번씩이나 유배되고 또 풀려났다. 그의 저서 ‘당의통략’은 파당을 초월하고 친족을 초월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 과정을 기술한 명저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생가는 인천시 강화군 화도면에 있으며 인천시 기념물 30호로 지정됐다. 이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확실치 않지만 기둥이나 보 등의 치목수법으로 볼 때 100여 년이 된 것으로 판단된다. 안채는 ㄱ자형이며,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건넌방이 좌우에 있고, 안방 앞으로 부엌을 내는 등 경기도 지방의 일반적인 살림집 모습을 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지석묘는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만든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하는데, 지상에 책상처럼 세운 탁자식(북방식)과 큰 돌을 조그만 받침돌로 고이거나 판석만을 놓은 바둑판식(남방식)이 있다. 경기도 파주 덕은리에서는 20여 기의 탁자식 고인돌과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터가 함께 발견됐다. 가장 큰 고인돌의 덮개돌 길이는 3.3m, 너비 1.9m로 조개날돌도끼(양인석부)와 숫돌 등이 나왔다. 그 아래에서는 선사시대 긴 네모꼴의 움집터가 나왔는데 깊이 40∼90㎝, 길이 157㎝, 너비 370㎝에 이른다. 벽을 따라 작은 기둥 구멍이 있고, 화덕자리가 2개가 있다. 벽이 불에 탄 자국과 바닥의 재로 보아 집이 불에 타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집안에서는 구멍무늬토기(공열토기), 간돌칼(마제석검), 돌도끼(석부), 가락바퀴를 비롯한 여러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긴 네모꼴 집터는 서울 역삼동, 파주 교하리 유적에서도 보이는 형태다. 집터의 연대는 BC 7세기경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고인돌이 BC 7세기 이후에 만들어 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지역에 위치한 관아건물 중 하나로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됐다. ‘부평부읍지’에 의하면 중심업무를 보던 동헌, 관리나 외국사신이 묵던 숙박시설인 객사, 죄를 다스리던 포도청 등 수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부지에 초등학교를 세우면서 현재 건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을 헐어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원래 ㄱ자형이었으나 1968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ㅡ자형으로 개조한 것이다. 이 건물은 예전 형태로 보아 동헌이나 현감의 살림채였던 내아로 추측한다. 규모는 앞면 6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연못인데, 긴 돌을 이용해 단을 쌓고 네모 형태로 만들어 조선시대 연못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부평도호부청사는 인천도호부를 능가하는 청사규모로서 잘 보존해야 할 문화재로 꼽힌다. 문화재청 제공
안중근(1879∼1910)은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권총을 쏴 3발을 명중시켰다. ‘안중근의사유묵-욕보동양선개정계시과실기추회하급(安重根義士遺墨-欲保東洋先改政界時過失機追悔何及)’은 러일전쟁 당시 전의(대한제국 때 태의원에 딸린 주임의 벼슬)로 종군했다가 전쟁이 끝나자 만주 여순 감옥으로 전근되어 근무하던 절전독(折田督)이 1910년 3월 안중근 의사의 친필을 옥중에서 받아 간직해왔다. 1945년 8월15일 광복이 되자 그의 가족들이 일본으로 귀국할 때 조카인 절전간이(折田幹二)에게 넘겨주었으며 이것이 1989년 2월20일 단국대학교에 기증된 것이다. 이 유묵에는 “동양을 보존하기를 바란다면 우선 침략정책을 고쳐야 한다. 때가 지나고 기회를 잃으면 후회해도 소용없다”라는 내용을 담아 일본 정책의 잘못을 고칠 것을 촉구하였으며, 일본인 집정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장인(掌印)이 찍혀 있다. 문화재청 제공
강화도 전등사(傳燈寺)에 소장된 조선 후기의 업경대로,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됐다. 전등사는 ‘전등사본말사지(傳燈寺本末寺誌)’에 고구려 381년(소수림왕 11)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고 본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였다고 전해진다. 업경대(業鏡臺)는 망자의 죄업을 드러내 보인다고 하는 거울이며 업경륜이라고도 한다. 보통은 지장전에 설치하지만 일반 법당에 안치하기도 한다. 전등사 업경대는 황색사자와 청색사자 1쌍으로 목각사자의 몸체와 등 위에 커다란 화염문 거울이 꽂혀있다.규모는 높이 107cm, 길이 65cm이다. 좌대 바닥에 ‘천계칠년정묘구월 십삼일 각록목화원밀영 천기 봉생(天啓七年丁卯九月 十三日 刻祿木畵員密英 天琦 奉生)’이라는 묵서 명문이 남아 있어 조선 인조 5년(1627)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등사 업경대는 조선 후기 불교 목공예품의 편년 설정·상호비교 연구의 획기적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제공
병자호란(1636) 때 3학사 윤집·홍익한·오달제의 넋을 위로하고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3학사는 적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청나라에 끌려가 갖은 곤욕을 치르고 참형을 당하였다. 조선 숙종 14년(1688)에 그들이 끝까지 척화의 의리를 내세우던 곳인 남한산성 기슭에 지었으며, 숙종 19년(1693)에는 나라에서 ‘현절사(顯節祠)’라 이름을 지어 현판을 내렸다. 우국충절을 장려할 목적으로 지었으므로 모든 경비를 나라에서 지원하였다. 숙종 37년(1711)에 김상헌과 정온을 함께 모시게 되면서 현 장소로 옮겨지었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앞면은 제사 지낼 때 활용할 수 있도록 퇴칸으로 개방하였고, 옆면은 바람막이 풍판을 달고 방화벽으로 마감하였다. 고종 8년(1871) 전국의 서원 및 사우에 대한 대대적인 철폐 때에도 제외되어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목조보살좌상(木造菩薩坐像)은 정확한 연대 측정은 어렵지만, 전체적인 조각 기법으로 보아 조선시대의 목조보살좌상으로 보인다. 현재 인천시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됐다. 머리에는 관(冠)을 쓰고 있고, 관 사이로 나온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얼굴은 표정이 사라져 매우 삭막해 보이며, 신체는 머리에 비해 작게 표현되어 비례가 맞지 않는다. 통나무를 깎아 조각하여 보살상을 만들고 양손은 따로 끼워 넣었다. 그러나 왼손은 없어진 상태이다. 상의 여러 군데에 금칠을 하였던 흔적이 보인다. 이처럼 목조보살좌상에 표현된 특징들로 보아 조선시대에 들어 불상조각이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 예배 대상이기보다는 맹목적인 존경의 대상으로 변질되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평면적인 신체 구조와 간략화된 옷주름, 두꺼운 불의 그리고 순박하면서도 정감 넘치는 얼굴 모양 등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불교 조각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흙을 이용하여 쌓은 토축산성이다.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험한 절벽을 이용하면서 펼쳐지는 넓은 평야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 전기의 산성 형식과 같다. 성은 동서로 약간 긴 형태로 1㎞가량의 테뫼식 산성이다. 산꼭대기를 둘러싼 작은 규모의 내성과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의 2중구조를 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이 산성을 에워싸고 돌아, 자연적으로 성을 방어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초기에 백제의 땅이었으며, 서해안과 연결된 수로의 거점지역으로 남북 교통의 요충지대이다. 성 안에서는 삼국시대의 토기조각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많이 나오고, 물고기뼈무늬를 새긴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어서 고려시대까지도 사용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산성은 한강 유역에 있는 다른 산성들과 함께 삼국시대 이후 중요한 방어요새의 역할을 한 곳으로,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가 있으며, 권율 장군을 모시는 충장사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후기 자주 나타나는 서구 열강들의 함선을 감시하기 위해 군대가 주둔하던 곳으로 장도포대와 논현포대를 관장했다. 현재 위치는 인천시 동구 화수동, 화도진공원 내부이다. 지난 1990년 11월9일 인천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됐다. 화도진의 설치는 인천항 개방을 요구하는 일본에 대비, 조선 조정에서 어영대장 신정희와 강화유수 이경하에게 만들도록 해 1879년 완성되었다. 그러나 1894년 갑오경장으로 군제가 개편되면서 진은 철폐되고 주건물은 일부 철거해 월미도 병영 건축에 사용됐다. 나머지 건물도 광복 이전 해안 매립공사 당시에 철거되었다. 화도진은 1882년 5월22일에는 이 곳에서 한미수호통상조약(韓美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고 이어 6월 한국과 영국, 한국과 독일 간의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장소로 역사적 상징성을 갖는다. 현재 화도진 터는 그동안 전하여 온 화도진도(花島鎭圖)에 의하여 1982년에 복원되었다. 문화재청 제공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717에 위치해 있다. 1972년 5월4일에 지정됐다. 조선 인조 16년(1638)에 지은 사당으로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모시고 있다. 뒷날 남한산성을 쌓을 당시 총책임자였고 병자호란(1636) 때 싸우다 죽은 이서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원래 건물 이름은 ‘온조왕사’였으나 정조 19년(1795)에 왕이 ‘숭렬’이라는 현판을 내려 숭렬전(崇烈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정조대왕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나 정조의 인품과 성업을 칭찬하면서 혼자 있기가 쓸쓸하니 죽은 사람 중에서 명망있는 신하를 같이 있게 해달라고 하였다. 이에 정조는 남한산성을 쌓은 공로자인 이서를 같이 모시게 했다고 한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