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 덕포진은 조선시대 진영으로, 서울로 통하는 바닷길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대였던 곳이다. 처음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현종 7년(1666)에 강화에 포함되었다. 높직한 평지에 세운 포대인 돈대와 대포를 쏘는 포대, 그리고 포를 쏠 때 필요한 불씨를 보관하고 포병을 지휘하는 파수청이 있다. 돈대는 중요한 전략지에 있어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함대와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싸웠다. 1980년에 행한 발굴조사 결과 7개의 포탄과 2개의 상평통보 등이 출토되었고 주춧돌과 화덕자리를 발견하였다. 명칭은 2011년에 덕포진에서 김포 덕포진으로 바뀌었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시 동구 창영동 36번지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교사(校舍). 선교 목적과 신식교육을 위해 설립된 영화학교 교사는 지난 1909년 우각현의 대지 1천226평에 연면적 212평의 3층 건물을 1910년 3월30일에 착공, 1911년 9월14일에 완공했다. 현재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됐다. 이 건물은 현관부분을 돌출시킨 십자가 형태를 띠고 있었으나, 1954년 건물입구쪽의 돌출부분을 증축하여 흔적만 남아있다. 증축된 부분들을 제외하고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됐다. 지붕면은 서양 건축의 양식을 띠고 있으며, 처음에는 양철지붕이었으나 현재는 슬레이트 기와로 되어 있다. 1, 2층에는 상하의 창틀이 화강암으로 된 오르내리창을 설치하였는데, 주철 도르래를 달아 움직였다. 동서북쪽의 지붕면에는 통풍과 채광을 위하여 여닫이 형식으로 된 돌출창을 설치하였고, 현관에는 간결한 미서기 문을 달았다. 문화재청 제공
수원 방화수류정은 현재 팔달구 매향동에 있다. 조선 정조 18년(1794) 건립됐으며 화성의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은 전시용 건물이지만 정자의 기능을 고려해 석재와 목재, 전돌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조성된 건물이다. 수원 방화수류정은 송나라 정명도의 시(詩) ‘운담풍경오천(雲淡風經午天), 방화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에서 따왔으며, 편액은 조윤형(曺允亨,1725~1799)의 글씨다. 평면은 ‘ㄱ’자형을 기본으로 북측과 동측은 ‘凸’형으로 돌출되게 조영하여 사방을 볼 수 있도록 꾸몄으며, 조선 헌종 14년(1848)에 중수됐고, 일제강점기 이후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수리됐다. 다른 정자에서 보이지 않는 독특한 평면과 지붕 형태의 특이성 등을 토대로 18세기 뛰어난 건축기술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문화재청 제공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관음보살상을 표현한 것으로,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됐으며, 연수구 소재 인천시립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연꽃이 새겨진 대좌(臺座)위에 앉아 있다. 머리에는 구슬로 장식된 보관(寶冠)을 쓰고, 가슴에는 화려한 구슬 목걸이를 하고 있다.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천의(天衣)는 땅위까지 흐르고 있으며, 오른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천의 자락은 가슴을 거쳐 무릎 위 손목과 대좌 위까지 이르고 있다.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오른손을 편안하게 올려놓았으며, 왼손은 지면을 짚고 있어 평온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불상은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형태로 보아 명나라 또는 청나라 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제공
이원익 초상은 광명시 충현박물관에 있다.오리 이원익(1547~1634)이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녹훈(錄勳)된 것을 기념해 제작됐다. 초상의 형태는 축으로 장정되어 있으며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의 전신상으로 그 모습은 오사모(烏紗帽)에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공수(拱手)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사모의 양쪽에는 운문(雲紋)이 들어가 있다. 얼굴에는 음영 효과가 거의 들어가 있지 않고 이목구비의 형용은 선묘 위주로 되어 있으며 족좌대 위에 흑피혜(黑皮鞋)와 채전(彩氈)이 깔려 있어 공신상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강화 장정리 오층석탑 (江華 長井里 五層石塔)은 인천시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산193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보물 제10호로 지정됐다. 이 탑은 무너져 있었던 것을 1960년 수리하여 다시 세운 것이다. 파손된 곳도 많고, 없어진 부재도 많아서 3층 이상의 몸돌과 5층의 지붕돌, 머리장식 부분 등이 모두 사라진 상태이다. 지붕돌은 밑면에 1층은 4단, 나머지층은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추녀밑은 반듯하다가 네 귀퉁이에서 약간 치켜올려져 있다. 탑이 무너졌을 때 추녀마루가 깨어져, 치켜오른 정도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점이 안타깝다. 전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을 주며, 각 부분에 두는 장식이 많이 생략되었고, 형식적으로 표현된 부분이 많은 탑이다. 신라석탑의 양식을 이어받아 변형된 고려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문화재청 제공
파주 오두산성은 오두산의 정상을 둘러싼 길이 620m의 백제 성이며 현재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산86번지에 위치해 있다. 파주 오두산성은 경사가 가파르고 서쪽은 임진강, 남쪽은 한강·동쪽은 농경지·북쪽은 산으로 이어진다. 성벽은 서쪽 부근이 잘 남아있다. 성벽 쌓기 수법을 보면 밖으로는 위로 올라가면서 돌을 안으로 들여 쌓고, 성벽 내부는 돌로 채웠다. 이러한 성곽의 형태는 백제 성곽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광개토대왕릉비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관미성이 이 바로 오두산성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이곳을 관미성이라 기록해 더욱 주목 받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숙종 때 경기도·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 사인비구에 의해서 1711년에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으로, 사인비구 제작 동종이라고도 한다. 보물 제11-8호로 지정됐다. 종은 높이 176㎝, 지름 145㎝, 두께 21㎝이며, 종신에 있는 명문을 통해 숙종 37년(1711년)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종 꼭대기에는 두마리 용이 좌우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종 윗면은 반원 모양으로 둥글고, 어깨 부분에는 ㄱ자형의 턱을 만들었다. 이것은 고려시대 꽃잎을 세워 장식하여 어깨부분이 돌출되었던 입상화문대에서 새롭게 변화시킨 모습으로 보인다. 이 종은 전통적인 범종 양식을 계승 하였던 사인비구가 그의 말년에 이처럼 중국 종 계열 범종을 제작하였다는 점을 밝혀주는 자료다. 문화재청 제공
당나라 현장(玄장)이 번역한 반야바라밀다심경에 대해 법장(法藏)이 해설을 단 주석서다.현재 동두천 상봉암동 자재암에 있다. 반야바라밀다심경은 줄여서 ‘반야심경’이라고도 부르는데, 여러 종파에서 공통적으로 읽고 외우는 보편적인 경전이다. 책머리에는 금강경의 전문(箋文:글의 뜻을 해명하거나 자기의 의견 등을 적어서 그 책에 붙이는 작은 쪽지)인 금강경심경전(金剛經心經箋)이 붙어 있다. 전문에 의하면 금강경은 조선 세조 10년(1464) 간경도감刊經都監: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서 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책 끝에는 조선 세조 10년(1464) 효령대군과 한계희 등이 왕명을 받아 간경도감에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문화재청 제공
강화 삼랑성 (江華 三郞城)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있어 삼랑성이라 부르며, 정족산성이라고도 한다. 사적 제130호로 지정됐다. 이 성이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가 1259년 삼랑성 안에 궁궐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뤄 그 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이 쌓여져 있는 모습을 보면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경주의 명활산성처럼 삼국시대 성의 구조를 찾을 수 있으므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추측된다. 고려 때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영조 15년(1739)에 성을 다시 쌓으면서 남문에 문루를 만들고 ‘종해루’라고 하였다. 조선 현종 1년(1660) 마니산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성 안에 있는 정족산사고로 옮기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그러나 지금은 둘 다 없어지고 전등사만 남아있다. 이곳은 고종 3년(1866)의 병인양요 때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을 해오던 160여 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도 유명하다. 문화재청 제공
경기도 성남에 위치한 하석박정 영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 박정(1629∼1703)의 초상화 2점이다. 박정(朴正)은 광해군 11년(1619)에 문과 시험에 합격하고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쳤는데, 남원부사로 있을 때에는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2점의 초상화 가운데 하나는 낮은 사모를 쓰고 푸른색 관복을 입은 모습으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약간 돌려 왼쪽 얼굴을 그렸다. 전체적으로 얼굴에 비하여 몸체가 너무 크고 화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듯 구도가 어색하나 옅은 갈색을 사용한 얼굴 묘사는 매우 섬세하다. 특히 수염이나 눈썹의 표현은 매우 섬세하여 성격까지도 나타나도록 표현하였다. 화면의 아래 부분에는 양탄자가 그려져 있다. 문화재청 제공
영종첨절제사를 지낸 양주성 선생의 공덕을 기리고 있는 비이다. 인천시기념을 제13호로 지정됐다. 양주성 선생은 조선 고종 12년(1875) 영종첨절제사로 임명됐다. 그해 8월 강화도에 침입하여 초지진을 공격하고 돌아가던 일본 군함 운양호가 도중에 영종진을 공격하며 뭍에 올라와 진을 점령하고 관아에 불을 질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인천부를 방어영으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강화유수부에 속해 있던 영종진을 인천방어영에 속하게 했다. 양주성 선생은 이곳에 근무하는 동안 관아를 복원하여 방비를 튼튼히 함과 아울러 선정을 베풀었는데, 그가 떠나게 되자 은혜를 잊지 못한 주민들이 놋그릇을 모아 이 비를 세우고 그 뜻을 기렸다고 한다. 긴 직사각형의 비는 윗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 놓은 간결한 모습으로, 고종 15년(1878)에 세웠다. 원래 곤돌 고개마루에 있었던 것을 주민들이 동민회관 옆으로 옮겨 관리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천1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42m, 뿌리부분 둘레 15.2m이다. 우리나라 은행나무 가운데 나이와 높이에 있어서 최고 높은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줄기 아래에 혹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나무는 통일신라 경순왕(재위 927∼935)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전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외에도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었는데 그 자리에서 피가 났다는 이야기, 정미의병(1907) 항쟁 때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렀는데 이 나무만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소리를 내어 알렸다고도 한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시 강화군 마니산에 있으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적 제136호로 지정됐다. 고려 원종 11년(1270)에 보수했으며, 조선 인조 17년(1639)과 숙종 26년(1700)에도 고쳐 쌓았다. 여러 번 고쳐서 쌓았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제단은 자연석으로 둥글게 쌓은 하단(下壇)과 네모반듯하게 쌓은 상단(上壇)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둥근 하단은 하늘, 네모난 상단은 땅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경주의 첨성대와 비슷하다. 고려·조선시대에도 때때로 이곳에서 도교식 제사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단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참성단을 단군시대의 종교와 관련시켜 이해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일제시대에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가 생기고 난 이후에는 민족의 성지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2011년 고시 변경으로 참성단에서 강화 참성단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문화재청 제공
삼막사의 칠성각 내에 봉안된 마애불은 안양시 만안구 삼막로에 있다. 삼막사마애삼존불은 암벽을 얕게 파고 조성하여 칠성각이 전실(前室) 역할을 하고 있다.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보살을 거느린 삼존불로 연화좌 위에 앉아 있다. 본존불은 소발의 머리에 작은 육계가 있고, 전면에는 계주가 표현되었다. 방형에 가까운 상호에는 눈두덩이가 부푼 눈, 보수한 삼각형의 짧은 코, 작은 입 등이 묘사되었고 잔잔한 미소를 띤다. 어깨에 닿는 긴 두 귀와 얼굴에 연이어 어깨가 시작되어서 목은 달리 표현되지 않았다.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가슴에는 내의의 매듭이 표현되어 있다. 불신(佛身)의 전면에는 두꺼운 옷주름이 표현되었는데, 양 손은 복부에 모아 여의주를 들고 있다. 가부좌를 튼 무릎에는 소략한 의문(衣文)이 표현되었다. 좌우의 보살상 역시 머리에 쓴 관과 가슴에 모은 수인(手印)을 제외하면 본존불과 같은 형상을 보이고 있다. 이 마애불은 전체적인 모습을 볼 때, 얼굴과 당당한 어깨 등 상체의 표현에 치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 확인되는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인천시 서구 대곡동 가현산에서 동서방향으로 뻗어 있는 야트막한 구릉지에 분포되어 있는 이 고인돌군은 모두 10기로, 탁자식과 바둑판식이 섞여 있다. 10기 중 탁자식 고인돌 2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고인돌이 매몰되거나 주위에 흩어져 파괴된 상태다. 그러나 탁자식 고인돌의 받침돌로 보이는 돌들이 놓여 있어 이 고인돌군은 탁자식이 주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고인돌군은 아직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한강 이북 지역 고인돌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현재 인천시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제공
월사집목판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인 월사 이정구(1564∼1635)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목판으로, 모두 947판이다. 이정구는 어려서부터 문장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선조 23년(1590) 문과에 급제하여 진주부사, 대제학, 병조와 예조의 판서,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다. 그는 스스로의 임무를 조정의 관리로서 맡은 바를 다하는 것이라 여겼으며, 정통적인 사대부문학의 모범을 보인 대가였다. 이 책판은 원래 대구 용연사에 보관되어오다 1928년 옥천으로 옮겨와 없어진 300여 판을 새로 새겨 넣었다. 따라서 총 894판중 590여 판만이 조선시대에 새겨진 것이다. 1984년 후손에 의해 경기도 가평군에 장판각이 건립되어 경기도로 이관되었다. 조선 후기의 문헌학 및 인쇄사, 한문학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도호부청사(仁川都護府廳舍)는 인천 남구 관교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관아 건물로, 인천시 지정 유형문화재 1호다. 청사는 원래 15∼16동의 건물로 구성되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객사(客舍)의 일부와 19세기 초 건물인 동헌(東軒) 및 훨씬 후대에 세워진 창고만이 남아 있다. 객사는 지붕기와에서 발견한 명문(銘文)에 의해서 1677년에 중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1950년 현 문학초등학교를 세우면서 동헌과 함께 지금의 위치로 이전 개축하였기 때문에 당초 건물들의 배치·형태를 알 수가 없게 되었다. 현재는 양쪽 익랑채가 없어지고 박공지붕으로 된 중앙부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 일부만 남아 있다. 동헌은 합각지붕의 굴도리집으로서 관청 건물로는 드물게 부연을 달지 않은 홑처마지붕을 하고 있으며 기둥도 둥근 기둥이 아닌 네모기둥을 사용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소래산의 마애상은 시흥시 대야동에 위치해 있다. 서있는 모습의 부처를 얇은 선으로 새긴 것으로, 장군바위라고 부르는 바위에 새겨져 있다. 무늬가 새겨진 모자 모양의 둥근 보관을 쓰고 있으며 작고 좁은 관대가 옆으로 휘날리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굵은 띠처럼 새겨져 있고 가슴에는 대각선으로 가로지른 꽃무늬가 새겨진 속에 입은 옷과 띠매듭이 보인다.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었는데, 가슴 밑에서부터 반원을 그리며 규칙적으로 흘러내린 주름은 볼륨감은 없으나 유려한 선으로 이어져 있다. 반원으로 둥글게 흘러내린 상의자락 밑 양쪽으로 발을 벌렸는데 발가락의 표현이 매우 섬세하다. 균형 잡힌 신체에 사각형의 각진 얼굴, 양어깨를 덮은 옷, 원통형 보관에 덩굴무늬가 새겨져 있는 점 등이 특징적이다. 특히 무늬을 새긴 원통형의 화려한 보관과 양어깨를 덮은 옷의 형태는 고려 전기 석조상의 특징으로 조성년대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시흥소래산마애상은 약 5㎜ 정도의 얕은 선각임에도 불구하고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며 기법이 우수하고 회화적인 표현이 뛰어난 세련된 작품이다. 문화재청 제공
신응경(新應經)은 침구(鍼灸:침질과 뜸질)관계를 다룬 전문의학서적으로, 조선 성종 5년(1474)에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보물 제1180호로 지정됐다. 책에는 머리말이 빠져 있어 손으로 써서 보충하여 넣고, 본문도 하단이 닳아 헤어져 간지(間紙)를 넣어 포개서 붙였다. 인조 21년(1643)에는 훈련도감자판으로 다시 간행한 일이 있다. 이처럼 책 자체가 훼손된 상태이나 우리나라에서 처음 간행된 침구서라는 점에서 서지학 및 침구서 연구에 귀중하게 쓰이고 있는 자료이다. 책의 내용은 백혈법가(百穴法歌)·절량법(折量法)·보사수법(補瀉手法) 등 24종으로 구분하여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현재 이 책은 가천문화재단 소유로 연수구 옥련동에 위치한 가천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