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관과 양손을 따로 만들어 불신(佛身)에 결합시킨 조선시대 목조보살좌상으로 인천시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됐다. 인천시립박물관에 전시됐다. 현재 보관은 결실되고 없지만 이마 위에 단을 지어 보관을 안치했던 흔적이 남아있으며, 머리 정상부에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묶은 보계가 드러나 있다. 가슴 앞에서 들어 올린 오른손의 수인은 아미타구품인으로 추정되지만, 왼손을 잃어 정확한 수인(手印)은 알 수 없다. 보살상이지만 천의를 입지 않고 불상처럼 대의를 입고 있는데, 이중착의식 통견(通肩) 형식으로 배 부분에는 U자형으로 접힌 대의자락이 좌우대칭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존격 추정의 근거가 되는 보관과 수인을 잃어 존명(尊名)은 알 수 없다. 평판적인 옷주름의 처리와 가슴을 가로지르는 승각기의 표현, U자형으로 접힌 대의자락 등으로 볼 때 17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제공
김포 장릉은 선조의 5번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1580∼1619)과 부인 인헌왕후(1578∼1626)의 무덤이다. 인조반정(1623)으로 아들 능양군인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에 봉해졌고, 인조 10년(1633) 원종의 칭호와 함께 그의 무덤을 장릉으로 불렀다. 왕릉과 왕비릉이 나란히 있는 쌍릉으로,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설치하지 않고 보호석만 둘렀다. 무덤 아래에는 영조 29년(1753)에 세운 ‘조선국원종대왕장릉 인헌왕후부좌’라고 새긴 비각이 있다. 기존 이름은 장릉이었으나 지난 2011년 7월28일자로 김포 장릉으로 명칭 변경됐다. 현재 소재지는 경기 김포시 장릉로 79(풍무동)다. 문화재청 제공
강화 사기리 탱자나무는 인천시 강화군 화도면에 있는 400년(추정)된 나무로 천연기념물 제79호로 지정됐다. 강화도는 고려 고종(1213~1259)이 몽고의 침입을 피해 피난생활을 한 곳이며, 조선 인조(1623~1649)도 정묘호란(1627) 당시 난을 피했던 장소다. 이 때 외적을 막는 수단으로 강화도에 성을 쌓고, 성 바깥쪽에 탱자나무를 심어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탱자나무는 그 때 심은 것이 살아남은 것으로 추측된다. 강화 사기리 탱자나무의 나이는 약 4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뿌리목의 지름은 53㎝, 가지 길이는 동쪽 4.1m, 서쪽 3.2m, 남쪽 2.7m, 북쪽 3.9m이다. 나무가 차지하는 면적은 13.2㎡이다. 가지의 굵기로 미루어 볼 때 매우 컸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현재 대부분 가지가 죽고 동쪽 가지만 살아 있다. 줄기가 옆으로 처지기 때문에 철제 지주로 지탱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반야바라밀다심경은 줄여서 ‘반야심경’이라고도 부르는데, 당나라 현장이 번역한 반야바라밀다심경에 대해 법장이 해설을 단 주석서로 여러 종파에서 공통적으로 읽고 외우는 보편적인 경전이다. 크기는 세로 31㎝, 가로 19.1㎝로 책머리에는 금강경의 전문인 금강경심경전이 붙어 있다. 전문에 의하면 금강경은 조선 세조 10년(1464) 간경도감에서 간행했음을 알 수 있다. 책 끝에는 조선 세조 10년(1464) 효령대군과 한계희 등이 왕명을 받아 간경도감에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반야바라밀다심경은 지난 1994년 10월17일 보물 제1211호 지정됐으며, 현재는 소요산 자재암에 소장된 문헌이다. 문화재청 제공
강화 솔정리 고씨가옥은 전통적 한옥에 일본식 건축양식이 도입된 99칸 민가건물로, 인천시유형문화재 60호로 지정됐다. 1941년 지어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면적은 1천479㎡이다. 강화 3대 부자집 중 하나로 알려져있으며, 일제강점기 일본과 중국 등으로 인삼 무역을 했던 고(故) 고대섭이 개성에 사업차 방문을 했다가 봤던 집이 마음에 들어서 그 집과 똑같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담장은 사고석으로 둘렀고, 정면과 왼쪽·오른쪽 3면에 문을 내었는데, 정문은 1칸 규모의 솟을대문이다.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와 행랑채 사이 트인 곳에 중정을 드나드는 출입구를 두었으며, 반루 기둥 위에 겹처마를 사용하였다.일본식 가옥처럼 행랑채 끝에 다실을 갖추고 있으며, 건물 내부에 남자와 여자가 사용하는 복도를 각각 별도로 마련해 놓았다. 민가로서는 규모가 매우 크고, 전통적인 한옥에 일본식 건축양식을 혼합하여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문화재청 제공
속칭 ‘미륵바우’라고 하는 커다란 화강암벽 전면에 걸쳐 얕게 돋을새김한 고려시대 마애보살상으로 전체 크기는 3.2m에 이르고 소재지는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서이천로 577-5다. 높은 관을 쓴 이 보살상은 손에 연꽃을 들고 있으며, 관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어 관음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보살은 반가상의 자세로 오른발은 내려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의 대좌위에 놓고 왼발은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얼굴과 신체는 전체적으로 큼직하며 비례가 맞지 않아 둔중한 느낌이 든다. 보살상이 새겨진 바위 뒷면에는 고려 초인 981년에 만들어진 작품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글이 적혀 있다. 문화재청 제공
태산요록은 조선 세종 때의 의학자인 노중례가 세종 16년(1434)에 왕의 명을 따라 편찬한 것으로 임신과 육아의 질병치료에 관한 전문 의학서로, 보물 제1179호로 지정됐다. 연수구에 있는 가천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상·하 2권으로, 상권은 임산교양을 서술하고 태산문(胎産文)이라는 제목하에 태교론, 전녀위남법(여아를 남아로 바꾸는 법), 식기론(꺼려야 할 음식) 등 20항목이 수록되었고, 하권은 젖먹이의 보호법을 서술하고 있는데 ‘영아장호문(영兒將護門)’이라는 제목하에 거아법, 식구법, 장포의법 등 27개의 항목이 수록되어 있다. 15종이나 되는 의학서적을 참고하고 산부의 임신, 분만, 산전·산후에 필요한 사항과 초생아 및 유아들의 양호와 치료에 관한 필요한 사항들을 정연하고 알기 쉽게 서술하였다. 특히 이 책은 조선 중기까지 산서로서 폭넓게 사용되었다. 문화재청 제공
정지국사탑과 비는 용문사에서 약 300m 떨어진 동쪽에 자리하며, 정지국사(1324∼1395)의 행적 등이 기록됐다. 정지국사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황해도 재령 출신이며 중국 연경에서 수학했다. 조선 태조 4년에 입적하였는데 찬연한 사리가 많이 나와 태조가 이를 듣고 ‘정지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탑과 비는 서로 약 80m 가량 떨어졌다. 탑은 조안 등이 세운 것이며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은 4각, 윗받침돌과 탑몸은 8각으로 전체적인 모습이 8각을 이루고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기고, 북 모양의 가운데받침돌에는 장식없이 부드러운 곡선만 보인다. 비는 작은 규모의 석비로 윗부분은 모서리를 양쪽 모두 접듯이 깎은 상태이고, 문자가 새겨진 주위에는 가는 선이 그어져 있다. 비문은 당시의 유명한 학자인 권근이 지었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에 있는 조선시대 방어시설로 인천시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됐다.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두는 초소다. 대개 평지가 높은 곳에 마련해두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둔다. 강화도 외포리 마을에 축조된 이 돈대는 다른 것과는 달리 둥글게 쌓여 있으며, 대포를 올려놓는 받침대가 4곳 설치되었다. 성위로 낮게 쌓은 담이 55개 있었다 하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있다. 문화재청 제공
칠장사삼불회괘불탱은 영축산에서 석가가 설법하는 모습을 묘사한 영산회상도로 안성시 죽산면 칠장사에 있다. 화면 구성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한 하단과 노사나불과 아미타불이 있는 상단으로 구성되는데 사각형의 광배를 한 석가불의 주위를 팔대 보살과 십대제자, 사천왕 등이 에워싸고 있는 형상이다. 보탑 위로 반원형의 큰 광배 안에 9구의 보살을 중심으로 천상세계의 모습을 표현했다. 숙종 36년(1710)에 그려진 이 괘불은 석가불이 그려진 하단 단독으로도 영산회상도를 묘사할 수 있는 독특한 구성이며, 상단과 합쳐서는 삼신불을 간략하게 표현한 구성을 하고 있다. 이러한 간략화한 구성 방식은 조선 후기에 유행하는 방법으로 그 개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문화재청 제공
강화 백련사 철조아미타여래좌상은 인천시 강화군 하점면 백련사에 모셔진 고려 후기 불상으로 보물 제994호로 지정됐다. 백련사는 고구려 장수왕 4년(416) 세워진 사찰로 알려져 있다. 당시 한 인도 승려가 강화도 고려산에서 연꽃을 꺾어 공중으로 날리고 떨어지는 곳마다 절을 세웠는데, 흰꽃이 떨어진 곳이어서 백련사라 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불상은 여기에 모셔진 것으로 고려 후기에 유행한 단아한 양식을 따르고 있다. 갸름한 얼굴, 단정한 눈·코·입, 좁아진 어깨, 손발의 곡선 처리 등은 절제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옷은 두껍고 주름은 단순한데 왼쪽 팔꿈치 윗부분에는 독특한 모양의 옷주름이 표현됐다. 문화재청 제공
현등사 내의 언덕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고려 희종 때 승려 보조국사가 이 주위를 지나다가 석등에서 불빛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수백년 동안 폐허로 있었던 이 절터에 새로 절을 짓게 되었다. 이 때 터의 기를 진정시키고자 이 탑을 세워 두었다 한다. 이로 인해 ‘지진탑(地鎭塔)’이라는 이름이 생겨났으며, 승려의 이름을 따서 ‘보조국사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탑은 원래 3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기단(基壇)의 일부와 탑신(塔身)의 1층 몸돌이 없어져 본래의 모습을 잃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후기에 승려 일행(一行)이 세운 것으로,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됐다. 비문은 이충겸(李謙)이 짓고, 비문의 글씨는 명서예가인 백하윤순(尹淳)이 썼다. 비문에는 불교의 전래 및 사찰의 증건·중수 상황과 고려시대 몽고 침입에 대항하여 강화에 도읍을 옮겨올 때 임금의 거처로 사용했다는 기록 등이 있다. 비문 말미의 ‘숭정기원후팔십칠년갑오육월일립 남원양응집각후서’란 각수의 기년으로 보아 1714년(숙종 40)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적석사는 ‘전등사본말사지(傳燈寺本末寺誌)’ 등의 기록에 의하면 백련사 및 청련사와 함께 416년(장수왕 4)에 창건됐고, 처음에는 적련사(赤蓮寺)였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전설에는 천축국 승려가 고려산에 올라 다섯 색의 연꽃이 피어 있는 오련지를 발견하고 다섯 송이의 연꽃을 날려 그 연꽃이 떨어진 곳에 절을 세웠는데, 그 중 붉은 연꽃이 떨어진 곳에 적련사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문화재청 제공
파주 가월리와 주월리에 있는 구석기시대 유적이다. 이 유적은 연천 전곡리 유적과 이어지는 한강-임진강 유역의 구석기 유적 가운데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구석기시대란 처음 인류가 등장한 때부터 약 1만년 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기 시작한 것은 1963년 이후의 일이다. 발굴조사 결과 4∼5만년 전에 사람들이 살았던 곳으로 생각되며, 출토 유물에는 양면 가공석기(주먹도끼), 찍개, 긁개, 몸돌 따위와 크고 작은 석기재료들이 있다. 이 유물들은 무엇보다 당시 도구 제작과정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들이다. 이곳은 석기가 집중해서 발견되는 문화층이 있어 매우 중요하다. 전곡리 유적과 함께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구석기시대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는 곳이다. 문화재청 제공
강화 석릉(江華 碩陵)은 인천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에 위치한 고려 희종(재위 1204∼1237)의 무덤이다. 사적 제369호로 지정됐다. 희종은 신종의 첫째 아들로 어머니는 정선태후 김씨이며, 부인은 성평왕후 왕씨이다. 1204년 왕위에 올랐고,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희종 7년(1211)에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강화 교동으로 갔다. 고종 24년(1237) 57세의 나이로 죽자 낙진궁으로 옮겼으며, 10월에 덕정산 남쪽에서 장례를 지내고 석릉이라 하였다.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이 찾아내어 다시 무덤을 쌓았는데, 그 뒤 석물도 부서지고 무너진 무덤을 1974년 손질하여 고쳤다. 석릉 주변에는 최근에 고려시대 귀족의 무덤이라 생각되는 돌방무덤(석실분)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문화재청 제공
파주 광탄면에 위치한 고려 중기의 문신인 윤관(?∼1111)의 무덤이다. 그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문과에 합격하였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돼 국경을 침입한 여진과 싸웠으나 패했다. 그 후 여진정벌을 위해 별무반을 편성해 예종 2년(1107)에 여진을 정벌한 후 9성을 쌓았다. 윤관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었으나, 조선 영조 23년(1747)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임을 주장하여 영조 40년(1764)에 공인됐다. 윤관 장군묘 주변에는 후대에 세워진 비석과 석등이 있다. 위패는 예종의 사당에 함께 모셔졌고, 고려 태조와 충의공신을 모신 숭의전에서 함께 배향됐다. 문화재청 제공
후애돈대(後崖墩臺)는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 954에 위치한 조선시대 방어시설로, 인천시유형문화재 33호로 지정됐다.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두는 초소로, 밖은 성곽으로 높게 쌓고 그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둔다. 강화 53돈대 중의 하나인 이 돈대는 화강암을 이용해 정사각 모양으로 쌓아올렸으며, 대포를 올려놓는 받침대를 4개 설치하였는데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성 위로 낮게 쌓은 담의 일부가 유일하게 남아있어, 1998년에 완전 복원해 놓았다. 인근 마을에는 이 돈대를 훼손하면 재앙이 온다는 전설이 내려오는데, 이 때문에 돈대를 제단처럼 여기고 보호하여 지금까지 그 본모습이 잘 남아있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것으로, 어영군 2천명과 경기ㆍ충청ㆍ전라 3도의 승군 8천명이 동원되었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15대 광해군(재위 1608∼1623)과 문성군부인 류씨(1576~1623)의 무덤이다. 광해군은 14대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아들로, 1608년에 왕위에 올랐다. 재위기간동안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국토 복구사업에 전념하였고, 소실된 여러 서적들을 다시 편찬하였다. 또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여 민생안정에 힘을 썼다. 그러나 치열한 당파싸움으로 형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서궁에 유폐하는 등의 일로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폐위됐다. 묘소는 쌍분의 형태로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광해군, 오른쪽이 문성군부인의 묘이다. 묘의 상설은 왕자묘제의 형태로 문석인, 장명등, 망주석, 묘표석 등을 배치하였다. 문화재청 제공
은율탈춤은 황해도 은율지방에 전승되어온 탈춤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됐다. 인천시 남구의 은율 탈춤 보존회를 통해 전승되고 있다. 조선 후기 훨씬 이전부터 성립되기 시작해 1910년대에 최고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은율탈춤은 단오에 2∼3일 동안 행해지고 그 밖에 석가탄신일과 7월 백중놀이로도 행해진다. 약 200∼300년 전에 난리를 피하기 위하여 섬으로 갔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얼굴을 내놓기가 부끄러워 탈을 쓴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놀이는 사자춤·상좌춤·8목중춤·노승춤·영감과 할미광대춤의 6마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놀이에 앞서 숲에 모여 탈에 제사를 지내고 공연장소까지 탈과 의상을 갖추고 행렬하는 길놀이를 한다. 은율탈춤은 황해도 탈춤에서 나누어진 봉산탈춤과 해주탈춤의 상호교류와 영향관계를 잘 보여주는 주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중기의 무신 백운(白雲) 정발(1553∼1592) 장군의 묘다. 선조 12년(1579)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고 그 후 계속 벼슬에 올라 군비를 정비하고 병사를 훈련시키는데 힘썼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부산에 침입한 왜군을 맞아 용감히 싸웠으나 성이 함락되고 장군도 전사했다. 장군의 시신은 찾지 못했으나 그가 타고 다니던 말이 투구와 갑옷을 물고와서 그것으로 장례를 치렀다고 하며, 죽은 후에 좌찬성의 벼슬에 올랐다. 봉분은 하나이며 부인 풍천 임씨와의 합장묘다. 봉분 앞에는 돌로 만든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좌우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望柱石)과 무인석이 1쌍씩 배치돼 있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