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서로 감싸주고 안아주는 삶

7월의 햇살에 초록빛이 어우러진 시선 끝의 광교산 자락을 바라보면서 우리나라의 산천은 모양새가 단아하고 멋스러움을 갖춘 한옥의 아름다운 자태를 품을 수 있는 형세를 갖추었고 이 땅에서 살아왔던 우리의 조상은 이러한 모습을 주거하는 집과 삶의 인격을 갖추려는 근원으로 삼고자 노력하였다는 상념이 스친다. 인간의 역사는 발전과 후퇴라는 수레바퀴를 굴리면서 인재를 찾아내고 공동의 문화를 만들어가며 서로 이익을 확대하고자 노력했다. 만약 우리가 아닌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사유가 현재에 주류의 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고 이것을 최상의 가치라고 의미를 부여한다면 우리에게 행복과 안녕이라는 일상의 모습이 얼마나 존재할 것인가. 인간들은 대부분이 속박과 억압을 싫어하고 자유와 안락한 삶을 추구한다. 이러한 자유의 기초에 존재하고 있는 우리들의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지켜야 하는 약속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 이해가 필요하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모든 대중들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현실에서의 이념이고 이것을 대외적으로 나타내는 상징성은 화합이다. 화합이란 말이 지닌 의미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한 것이지만, 실제로 화합을 실현하고자 하였을 때에 실천 역시 간단하지 않다. 두세 명이 함께 생활하면서도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인간의 삶인데 공동체 생활을 한다면 갈등이 발생할 여부는 매우 커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현재의 삶을 지속하고 더 발전시키려고 화합을 이루어야 한다. 화합의 의미를 사회적인 윤리로 풀어서 설명한다면 같은 삶의 터전에서 정해진 규정을 따르고 규정을 서로 인식하며 지키고자 노력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화합을 실현하는 방법은 규정에 알맞은 행동을 일상에서 실천하고, 또한 화합은 이치에 알맞은 규정을 기반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화합은 우리의 삶에서 선택의 일상이 아닌 필수의 문제라고 인식하여야 한다. 지금은 장마가 우리나라와 주변국에 걸쳐서 많은 비를 뿌렸고 남쪽 지방에 큰 피해를 발생시켰으며, 이웃 나라인 중국과 일본은 피해가 많이 일어났음을 보도를 통하여 접할 수 있다. 자연의 세계에서도 혼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끼친다는 이치이다. 이처럼 인간세계에도 나와 다른 사람이 화합을 이루지 못하면 국가적 재앙이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살펴볼 수 있진 않은가.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컸던 동족상잔의 625전쟁이 발발 한지도 70년이다. 군인과 경찰 민간인을 포함하여 130만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나, 지금까지도 서로 이념의 가치를 따라서 갈등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국가의 위기는 외부에서 유입되는 측면보다는 내부 구성원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서로 반목하는 화합을 깨트리는 행위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국가를 이끌어가는 지식인과 국민 다수가 화합하고, 가장 약한 사람들까지도 배려하며 공정하게 국가의 법이 평등하게 작용한다면 화합에 점차로 다가갈 수 있다. 지금도 우리의 눈앞에는 정치적 갈등, 성 평등의 갈등, 분배의 갈등과 세대 간의 갈등이 선을 넘어선 모습이다. 국가에 위기가 다가왔을 때에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전쟁의 포화 속에 스러져갔던 선배의 영령들이나, 국가의 발전과 민주화를 위하여 노력하였던 선지자나, 또는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추구하며 개인의 영예보다 사회와 이웃을 위해 희생하였던 많은 사람은 우리의 이러한 현실을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분들을 기억해야 하고, 그들의 숭고한 희생에 가슴 깊이 감사드리며 대중의 화합을 추구해야 한다. 국가는 이 순간에도 역동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우리는 다시 서로 마음으로 감싸주고 상처를 안아주는 삶을 실천하였으면 한다. 세영스님수원사 주지

[삶과 종교] 지구를 생각하는 마음, 반올림

깨어 있어라, 그날이 다가온다. 2004년에 개봉한 기후재난영화 투모로우의 포스터에 실린 문구이다. 한눈에 보아도 경고성이 짙다. 무엇에 대한 경고일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전한다. 지난 몇 주간 우린 배웠습니다. 자연의 분노 앞에 인간의 무력함을. 인류는 착각했었습니다. 지구의 자원을 마음껏 써도 될 권리가 있다고. 허나 그건 오만이었습니다. 많은 기후 전문가들의 예견대로 이 영화의 경고는 점점 현실화되고 있으며 실제로 세계 각국이 심각한 기후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때아닌 눈이 내리고 우박이 떨어지며 기록적인 폭염과 폭우 등으로 수많은 인명과 재산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이상기후의 주요 요인으로 지구의 온난화와 해수면이 해마다 상승하고 있는 점을 꼽는다. 이러한 기상이변은 공동의 집 지구의 생태가 위험수위에 이르렀다고 하는 일종의 반증일 것이다. 지구의 위기는 인류 공동체의 운명이 걸린 문제이며,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결단의 문제이다. 따라서 이에 따른 전 지구적 차원의 지속 가능한 공동의 대응책이 시급히 마련되어야 할 것이며 생태위기극복을 위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야 할 때라고 여겨진다. 코로나 사태와 관련한 이번 일련의 과정을 통해 세계는 이미 코로나19 감염이 일개 국가의 국지적 문제가 아님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세계보건기구 WHO의 팬데믹 선언을 바라보며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환경의 위기가 인류 전체를 순식간에 실존적 위기로 몰아갈 수 있음을 교훈으로 얻었다. 바라건대, 현재의 바이러스 사태로 국제사회에 일고 있는 공동의 위기의식이 지구 생태의 위기를 다 함께 극복해 보자고 하는 공동체적 대응 행동으로까지 이어져 갔으면 좋겠다. 따라서 이번의 위기를 다 함께 극복하자고 하는 우리의 노력 안에는 단순히 일상으로의 복귀뿐 아니라 보다 광의적이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위기에 처한 공동의 집 지구를 위해 나의 일상과 생활 습관을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숙고해 보았으면 한다. 그럴 수 있다면 지금의 위기상황이 분명 전 인류에게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라 본다. 코로나의 역설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각국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엄격한 봉쇄를 선택하면서 항공망과 교통망이 막히고 이에 따라 사람들의 이동도 멈추게 된 것이다. 이동에 대한 봉쇄는 자연스럽게 탄소 배출량의 감소로 이어졌다. 사람들이 집에 머물고, 공장들이 가동을 멈추면서 탄소 배출량도 상대적으로 급감한 것이다. 뜻하지 않은 결과로 우리나라는 고질적인 미세먼지 없는 봄을 맞이했고 중국에서는 의도치 않게 파란 하늘이 모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인도 뭄바이 인근 샛강에는 어느 때보다 많은 홍학이 날아들어 분홍빛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코로나19로 불가피하게 취한 조치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지구 생태에 백신 역할을 한 격이다. 이번 상황이 환경에 대한 우리 자신의 행동을 깊이 각성하고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우리 후손들에게,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까?(회칙, 「찬미받으소서」 160항). 누구에게 뭐라고 하기 전에, 물을 아껴 쓰고 플라스틱과 쓰레기를 줄이는 작은 실천, 나부터 시작해보려 한다. 우리의 풍요로운 삶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 후손들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우리 공동의 집 지구를 생각하는 마음을 반올림해 보자. 이번 코로나 교훈이 우리의 일상도 되찾고 지구의 생태도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놓는 상생의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김창해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삶과 종교] 칠월과 붓다 명상법

유월이 지나고 칠월을 맞았다. 코로나19로 일상의 활동이 많이 줄었고, 장마도 시작되고 있어 활동이 더욱 줄어들었다. 사람들 활동이 줄었을 때 나는 따로 권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하나는 독서고, 다른 하나는 명상이다. 얼마 전부터 나는 우리 학교 이자연 교수님께서 쓴 『붓다의 명상법』(소명출판, 2020)이란 훌륭한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독서도 하고, 독서 내용이 붓다의 명상법이니 명상도 저절로 하게 되는 것 같다.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다. 불교에서는 음력 4월15일부터 6월15일은 하안거 기간이다. 올해에는 윤 5월이 있어 음력 5월15일부터 7월15일까지 여름 안거를 해야 할 것이다. 안거 기간에 수행이나 기도를 인연에 따라 할 것이다. 그런데 붓다가 실제 행한 명상법은 무엇인가? 붓다의 명상법을 한자로는 지관(止觀) 수행이라 한다. 지(止)는 그친다 멈춘다는 뜻이다. 지(止)는 산스크리트로 사마타 명상의 한자 번역이다. 사마타는 고요함을 뜻한다. 이것은 붓다 이전에도 있던 요가 명상에서 온 것이다. 요가 명상에서의 사마타 명상은 붓다의 사마타 명상과 비슷하지만, 정확히 같지는 않다. 요가는 범아일여의 일원론적 유신론 전통에 있다. 즉 요가적인 명상은 신 개념에 집중함으로써 완전한 몰입 상태인 삼매에 도달하려고 한다. 이것이 이른바 초월세계로의 전이 상태인 신과의 합일이고, 범아일여 사상이다. 반면에 붓다는 상캬 이원론의 영향을 받았으며, 무신론적 전통에 있다. 붓다는 초월세계와 현실 경험세계의 참모습을 관찰하여 통찰지를 계발하여 중도(中道)를 추구한다. 이 통찰지의 계발은 무명을 제거하고 무명으로 인해 생겨난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며 행복해지는 길이다. 요가의 목적은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욕심은 번뇌의 근본 원인이고, 이 욕심에서 마음작용이 일어나고 번뇌가 생겨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요가 명상에서의 사마타 명상은 산란한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고자 어떤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한다. 이때 호흡이나 신 개념에 집중하면서 자신의 의식마저 사라지고, 대상에 완전히 몰입하여 모든 마음작용이 끊어짐을 목표로 한다. 붓다 명상의 목적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괴로움은 무명이 근본 원인이다. 이 무명에서 마음작용이 처음 일어나 그것이 조건이 되어 다른 마음작용이 연이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른바 12연기로 돌고 돌며 괴로움이 계속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붓다 명상법의 사마타 수행은 대상과 마음의 거리를 두고 마음을 하나의 대상 영역에 고정해 정신 통일을 길러 고요함을 계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는 통찰지를 계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통찰지 계발을 통해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무명을 제거하여 번뇌를 꿰뚫어 부수어 영원한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관(觀)은 자세히 본다는 뜻이다. 관은 산스크리트의 비파나사, 빨리어의 위빠사나의 한자 번역어다. 이는 분리해서 본다는 뜻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거리를 두고 대상화해 자세히 관찰하면서, 그것들을 관찰 주체인 나와 동일시하거나 나의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도록 하는 것이다. 일체는 변화하여 영원하지 않고, 그래서 일체는 다 그것의 자아가 없다. 그러니 그것에 얽매이는 것은 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좇는 것이며 괴로움이다. 이것을 알아차려 무명을 부수고 열반에 이르는 것이 붓다의 명상법이 추구하는 것이다. 붓다의 명상법은 사마타 수행으로 얻은 삼매와 위빠사나 수행으로 얻은 통찰의 지혜를 유기적으로 함께 닦는 것이다. 그래서 무명을 제거하고 무명으로 인해 일어나는 괴로움도 소멸하여 열반을 얻게 되는 것이다. 김원명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1748-1825)가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라는 유화는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고 죽기 직전에 그의 생각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하는 모습을 회화한 작품이다. 이 그림에는 네 유형의 사람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하나는 스승의 죽음을 슬퍼하고 아파하는 제자들의 모습이고 또 하나는 죽음을 앞둔 스승의 유훈과 같은 가르침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로 집중하는 제자들의 모습이며, 그리고 나머지 둘은 멀리서 그것이 마치 남의 일인 듯 지켜보는 사람과 아예 관심도 없다는 듯이 등 돌리고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의 모습이다. 소크라테스는 신을 부정하고 그의 가르침으로 인해 젊은이들이 타락했다는 이유로 아테네 정부로부터 고소당했고.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독배를 마셨다고 한다. 사실 여부야 어떻든지 여론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 분명한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살해당해야 하는 사람에 대한 사회의 관심과 태도이다. 어떤 이는 동정하고, 어떤 이는 추종하고, 어떤 이는 구경하고, 어떤 이는 아예 관심도 없다. 물론 그중에 동정하고 추종하는 것이야 그 살해당하는 사람의 인물됨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구경거리로 여기거나 관심조차 주지 않는 것은 암묵적 동의(同意)고 사회적 방기(放棄)라 할 수밖에 없겠다. 여론(與論)이란 사회 대중이 공통으로 제시하는 의견을 말한다. 보편적인 목소리라는 말이다. 민주 사회를 이끌어 가는 방식으로서 건전한 사회 형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원리이다. 그러나 여론이 호도(好導)되기보다 조작되고 오도(誤導)되어질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히 SNS의 급격한 발달로 인해 여론은 댓글이란 이름으로 제멋대로 조작되고 재생산될 뿐만 아니라, 살벌한 독침이 되어 사람을 가리지 않고 저격(狙擊)하여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신음하게 하다가 극단적 선택을 하게도 한다. 댓글 살인이다. 이럴 때 이 댓글이라는 오용된 여론을 다루고 대하는 태도이다. 대체로 같은 생각이 있는 사람들끼리 어울려 생각이 다른 사람을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독설로 접근도 하지 못하게 하여 그 문제는 구경거리가 되고 무관심거리가 되어버리게 한다. 소크라테스도 그렇게 살해당했을 것이다. 신약성경 야고보서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야고보서 3:2)고 하였다. 또한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야고보서 3:6)고 하였다. 여론은 공감하여 서로를 위하고 살리는 소리가 되어야지 살해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댓글도 그렇다. 그런데 SNS에서 떠도는 수많은 여론과 댓글은 여전히 수많은 소크라테스를 살해하고 있다. 이럴 때 여론과 댓글은 지옥 불에서 난 불의(不義)한 도구이고 살해의 도구이다. 그렇게 어떤 저명한 사람은 여론으로 고통당했었고, 어떤 연예인은 댓글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 하고, 어떤 불특정 시민들은 본의 아닌 일로 지금도 댓글에 괴로워하고 있다. 가뜩이나 코로나로 위협당하고 고통당하며 죽어가는 것도 억울한데, 소크라테스의 죽음처럼 구경거리나 무관심거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살해의 독침이 언제 어떻게 나에게 날아들어 소크라테스처럼 죽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강종권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신뢰받는 교회가 되는 기회를 잡자

한 나라를 구성하고 한 사회가 구성될 때 건강한 나라와 건강한 사회는 다양한 일거리와 다양한 문화와 산업이 공존하게 된다. 대한민국은 70년 전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잿더미였던 국가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도약적인 발전을 해 왔다. 그리고 전 세계는 이런 한국의 발전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가 도약적인 발전을 하며 한국 경제발전 수치의 그래프가 급상승할 때에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가치와 사회의 기업 윤리적 가치도 함께 성장했는지는 돌아보아야 한다. 많은 재계의 총수들이 경제법 위반으로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야 했고 국민이 대 기업에 보내던 고마운 시선들이 반기업적 정서로 돌아서는 것을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현상이 교회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대기업이 한국 사회에 자연스럽게 등장했듯이 교회도 대(大)교회들이 20C 말까지 한국사회에 화두가 될 만큼 많이 세워졌다. 대형교회들의 영향력은 교계와 사회 속에서 매우 커져 왔고 한국사회의 기업구도처럼 교회들도 대형교회 중심으로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19 전염병 사태를 겪으면서 대형교회들의 역할론이 다시 회의적인 화자가 되고 있다. 국민과 교회를 다니는 신자들이 삶의 위기를 맞이하는 코로나 19의 총체적 난국 속에서 교회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할까. 일 년에 수백억의 헌금이 모여지는 유명한 대형교회들의 그 헌금들이 하나님을 위해 쓰인다고 말하지만 결국 건물과 인건비와 교회 내의 교인들을 위해 90% 이상이 쓰이고 있는 것이 현실의 모습 아닐까. 지금 이 상황 속에서 과연 교회는 세상에 어떤 도움이 되는 것일까. 국민이 가장 어려울 때이니 교회의 예배당을 팔아서 구제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국민이 이해하고 적어도 교인들이 이해할 수준의 헌신적인 재난극복을 위한 구제비는 이럴 때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민이 가장 어려울 때에 교회의 예비비는 전부 소진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교회는 이웃과 함께 배고픔의 고통을 나누어야 하고 함께 굶주림의 고통을 나눌 때 그 모습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교회의 존재인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한국 사회는 지금까지 교회에 대하여 관대했다. 교회가 사회에 무관심했듯 사회도 교회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코로나19가 몰고 오는 세상은 그런 안전지대가 없음을 교회들은 빨리 인식해야 한다. 교회가 스스로 자정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면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며 개혁하는 중세의 아픔을 한국교회가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0장에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구제를 가르치신 예수님의 메시지가 오늘의 코로나19의 총체적 난국 속에서 교회들에 큰 도전으로 여겨지기를 기도해 본다. 교회의 곳간은 곡식으로 쌓여 있는 곳이 아니라 매일 매일 일용할 양식으로 순환돼야 하는 곳임을 교회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큰 전염병이 발생하고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피할 곳 없던 가난한 사람들 옆에는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던 교회가 함께했었다. 그리고 그 전염병이 끝나면 그 사회는 교회라 불리 우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사회에 두 배, 세 배로 늘어나 있었다고 역사는 증언한다. 그 신뢰의 기회를 붙잡아야 하는 시간이 바로 지금이라는 오늘이지 않을까.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ㆍ수지지부 FIM이슬람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협력과 공존

인간의 역사는 통사적으로 살펴보면, 오랜 시간에 걸쳐 진전된 문화를 추구하면서 삶의 질을 향상하고자 자연과 인간의 사이에서 갈등과 협력의 조화로 이룩한 결과물이다. 지구촌의 여러 지리적 특성에도 인간의 삶을 개척한 지역은 어느 곳보다도 넓고 다양하게 분포되어 발전되어 왔다. 비옥하고 풍요로운 땅과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갈등도 계속해서 반복되어 오면서 많은 비인간적인 행동도 돌출되었으나 인간이 가진 영혼의 순수성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고 다시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은 지금까지 많은 전쟁의 불길에 휩싸였고 이것에 따른 상처의 흔적도 역사를 인지하는 대중들에게 서글픈 사유를 일으키게 한다. 한국의 역사는 대체로 약 500년의 세월을 의지하여 새로운 왕조에 의하여 패러다임이 변화되는 전환이 이루어지는 주기성을 지니고 있었다. 새로운 국가를 이루고 안정시키는 과정에서도 협력과 갈등도 내재했을 것이고 이것에 따른 부작용도 있었으나 다른 민족에 의한 지배와 주권의 박탈은 존재하지 않았다. 주권의 박탈과 이민족의 지배에 따른 시대적 정치권력의 변화로 인한 혼란과 군수목적의 공업화는 지역적 갈등을 제공한 기초로 작용하였고, 신분제 변화에 따른 갈등도 한 부분을 차지했으며, 왜곡된 교육에 의한 사상적 변용은 한 국가의 미래에 암울한 현실로 빠트리게 된다. 이러한 복합적인 갈등과 사상의 부조화는 결국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확대되어 이전의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발생시켰고, 또한 전쟁의 유품으로 남북의 대치가 계속되고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도는 것으로 세상은 연속성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우주의 진리에서는 인간의 환생이 자기의 생활터전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이루어지므로 민족과 국가를 강조하는 사상은 이치에 맞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인간은 선천적으로 가져왔던 업력과 현실에서 학습된 습관이 현재의 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공통적인 요소는 이러한 업력의 속성에 원인하는 것으로 도덕에 대한 관념이 우리의 삶을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생계에 보이지 않고 그림자로서 중생들을 얽어매는 하나의 사유가 이기적인 마음이다. 국가 간의 인적 이동과 문화의 교류가 왕성한 현대사회는 자발적인 문화의 수용과 새로운 문화 전개로 전진하고 있어 부작용이 적고 인간사회를 풍요롭게 하고 있다. 그렇지만, 외부의 힘에 의한 강제적인 문화의 수용과 억압에 의한 역사의 변용은 많은 후유증으로 그 사회를 해체하거나 큰 혼란으로 이끌어 간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겪었던 일제강점기의 억압과 강제에 의한 통치와 문화의 접목은 6ㆍ25라는 동족 상잔을 유발하였고, 각 분야에 보존되는 전통으로 남았다. 지금 우리의 위치에서 이전의 선배 세대가 그러하였듯이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고 협력과 공존하는 마음으로 생활규범을 바꾸어가는 것이 이들에 대한 작은 배려라고 생각된다. 세영스님 수원사 주지

[삶과 종교] 계절의 여왕 오월에, 잠시 쉬며 스스로를 돌아보자

오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불린다. 오월에는 봄이 무르익어 온갖 생명이 피어나고 온갖 꽃들이 만발하며 온갖 색깔이 드러나는 계절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월에는 날씨가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 모든 달이 다 나름 좋기는 하지만 특히 오월은 여러 면에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올해 우리는 이런 계절의 여왕 오월을 온전히 즐길 수 없었다. 오월은 시끄러운 세상일과는 상관없는 듯이 아니 오히려 더욱 맑고 깨끗한 하늘을 이고 온갖 색깔이 꽃들이 피고 지고 있다. 그렇게 무심히 오월은 자신을 뽐내며 왔다가 또 무심히 가고 있다. 세상이 시끄러운 때에는 조용히 집에 앉아 오월을 즐기며 자신을 돌아볼 더욱 좋은 축복의 시간이 되게 하고 싶다. 『장자』의 「변무」편에서는 어떤 일에 열정을 다하며 목숨을 바치거나 본성을 상하게 하는 일은 모두 어리석은 것으로 본다. 중요한 건 자신이다. 이곳에서 자신과 관계된 자득(自得), 자문(自聞) 그리고 자견(自見)을 강조한다. 나는 이 가운데, 자견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자 한다. 자견(自見)이란 스스로 본다는 뜻이다. 즉 외부 색깔에 정신을 빼앗기는 일 없이 스스로 자연스럽게 본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것이 눈 밝음(明)이라는 것이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가장 기본적인 표준색은 파랑, 빨강, 노랑, 검정, 하양의 다섯 가지다. 우리 눈이 이 다섯 색의 기본 범주를 배우고 나면, 색들을 이 범주로 단순화해 생각하게 된다. 그다음, 이 다섯 색을 어지럽히고 화려한 무늬로 조작하며 눈을 끌어 혹하게 한다. 천연의 많은 색을 다섯 가지로 범주화해 설명하는 것은 한편으로 편리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조작해 다시 화려하게 꾸미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때론 예술적이고 창조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실제 자연 세계에 펼쳐진 천연의 많은 색을 다섯 색으로 단순화하여 환원할 필요가 있을까. 혹은 거꾸로 이 다섯의 기본색들을 섞어 어지럽고 화려하게 조작하여 일부러 우리의 눈길을 끌어야 할까. 수많은 색은 스스로 그렇게 있는 것이다. 그 스스로 그렇게 보이는 색을 그 스스로 있는 그대로 보면 그뿐 아닌가? 『장자』에서는 인위적 조작을 멀리하라고 한다. 실제 자연 세계에 펼쳐진 수많은 색깔은 있는 그 자체로 나타나고, 또 스스로 기분에 따라 그 색깔은 그때마다 늘 새롭게 보이기 때문이다. 다섯 색깔의 기본 범주로 환원해서 보게 되면서, 혹은 이것을 어지럽거나 화려하게 조작해 봄으로써,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뿐만 아니라 그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의 나도 없게 되는 것이 주목한다. 세상 일이 그렇다. 자세히 봐도 문제고, 대충 봐도 문제다. 나는 스스로 주체적인 눈으로 보고, 또 날카롭게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이 학문의 기본이라고 배웠다. 이것은 서구 근대 학문의 기본적인 훈련이다. 또 『논어』의 「자장」편에서는 넓게 배우고 뜻을 돈독하게 하라. 절실히 묻고 가까운 데서부터 생각하라. 그러면 자연스레 그 안에 인(仁)이 있다고 한 전통과도 얼추 비슷하다. 그런데 장자 입장에서는 이것들 모두 인위적이고 조작적일 뿐이라고 넌지시 혹은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는 그저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할 것이다. 조금 더 방법을 이야기하자면, 지나치게 밝은 눈은 눈을 조금 더 감고, 지나치게 감은 눈은 조금 더 떠야 하는 정도 이야기밖에 할 수 없다. 계절의 여왕 오월은 우리에게 그저 왔다. 그저 가고 있다. 코로나19로 지친 눈을 잠시 감고 잠시 쉬자. 귀도 닫고 잠시 쉬자. 그리고 우리 자신의 안으로 들어가 자신을 보고 스스로 돌아보자.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지 다시 스스로 생각해보자.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조건 없이 주고 받는 사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하여 전 세계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경제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도 잘 대처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미 경제적 고통은 피부로 느낄 정도다. 정부가 급하게 재정을 풀어 국민에게 현금으로 재난지원이라는 정책을 내 놓을 만큼 사태는 심각하다. 긴급재난지원금이라는 정책이 각 시별로 도별로 나랏빚 내어 인심 쓴다는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해야 하는 상황임을 볼 때 타이밍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다시 긴급재난지원금이라는 정책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걱정하게 된다. 바로, 자발적 기부라는 상위 30% 계층에 지명된 문구 때문이다. 상위 30%만 기부하라는 말도 아니고 다른 계층이 기부하지 말라는 말도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다 알고 있다. 그런데도 상위 30%라는 지명을 받은 국민에게는 다소 불편할 수 있는 말들이다. 성경은 정확하게 사람은 죄인이라고 정의한다. 그 죄에 대한 정의(定意)는 욕심이며 왜곡된 자기 사랑이다. 성경 안에는 99마리의 양을 가진 부자가 1마리의 양을 가난한 자에게 빼앗아 100마리를 채우고 싶어 하는 욕심을 지적한다. 우리가 정의(定意)하는 상위 30%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부자라고 스스로 인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선뜻 현금성 자산을 기부라는 이름으로 포기할 수 있을까? 만약, 상위 30%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기부하지 않는다면 어떤 여론몰이가 그들을 부도덕한 욕심쟁이의 부르주아 집단으로 사회적 재판대에 올려놓지는 않을까. 예수님은 언제나 가난한 자들을 먼저 돌보셨고 부자들에겐 물질에 노예가 되지 말고 그 물질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늘 가르치셨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가난한 자들을 향한 구제방법은 독특했다. 구제하라는 성경의 명령에 유대인들은 시장으로 나아가서 가장 번잡한 시장터에서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고 먼저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나에겐 이렇게 구제할 수 있도록 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가난한 자들같이 살지 않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구제하오니 받아 주옵소서 그리고 그 기도가 끝나면 가지고 온 동전을 하늘로 던지며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소리쳤다. 그 발밑에서는 가난한 자들이 그 던져진 동전을 줍기 위해 그 유대인의 발밑을 기어다니며 동전을 주어야 했다. 기부라는 것은 무엇인가? 기부의 행위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 선택이 아니겠는가? 정치적 성향으로 친여권의 사람들은 정책을 찬성하며 기쁨으로 기부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만만치 않게 기부의 정신이 빠져버린 낙인찍힌 30%의 상위부자들은 불편한 마음으로 고민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불편함이 기부하든 하지 않든 기부의 정신에서는 이미 멀어졌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우리 사회가 불편하게 70%대 30%로 갈라지는 일이 없기를 기도하게 된다. 속히 우리 사회에도 자발적 기쁨으로 기부를 통한 보람을 느끼는 기부문화(Donation Culture)가 제도가 성숙해져야 한다. 예수님은 바른 믿음은 나누는 것이며 함께 하는 것이며 조건 없이 주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구제할 때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가르치셨다. 그것은 그 구제를 통해서 가난한 자들에게 마음으로라도 우위에 서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나라가 더욱 성숙해져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부로 조건 없이 주고 받는 아름다운 나눔의 사회가 되기를 기도하게 된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수지지부 FIM 이슬람 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온 나라가 코로나 전염병으로 진통을 겪는 동안에도 들과 산의 꽃들은 피어나고 나무의 가지들은 초록색 연필심 같은 여린새싹 잎들을 줄줄이 밀어낸다. 한치의 어김이 없이 대자연의 질서 앞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봄의 생명체들 앞에서 경이로운 마음마저 든다. 그렇게 생소했던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이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지금, 우리들의 그 잃어버린 평범한 일상들도 봄꽃이 다 지기 전에 서둘러 왔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 저녁나절 벚꽃길 따라 산책을 하던 중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었다. 아서 아서 꽃이 떨어지면 슬퍼져그냥 이 길을 지나가심한 바람나는 두려워 떨고 있어이렇게 부탁할게. 가수 예민이 부른 노래 꽃이 바람에게 전하는 말이다. 꽃잎이 바람에 떨어질까 봐 꽃이 바람에게 건네는 말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심신이 지쳐 있을 우리 모두를 위해 봄꽃들이 바람에게 건네는 말이 아닐까 싶다. 춘천에 사는 동기신부 하나는 23년 신부 생활 동안 이런 시간은 처음이라며, 힘들지만 자숙하는 시간을 보낸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자숙이라 함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삼가고 조심한다는 말일 건데 무엇을 자숙한다는 말인가? 감염에 노출될까 봐 사회적 거리두기를 열심히 실천하고 있다는 의미로 들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간의 삶을 되돌아보고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정말 지금의 사태에서 되돌아봐야 할 우리의 공동선적 책임은 없는 걸까? 블로그를 통해 도는 한 신앙인의 글이지인의 카톡을 통해내게도 전해졌다. 글은 참회의 기도로 시작하고 있었다. 주님, 코로나19로 인해 불과 한 달 새 우리의 생활 모든 것이 너무나 많이 바뀌었습니다. 요즘 상황을 보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분명히 있음을 보게 하시고, 우리가 잘 못 가고 있었던 길을 반성하며 다시금 주님 앞에 바르게 서는 기간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이어서, 한국인 입국을 막는 나라가 많아지는 상황이, 지나치게 해외여행을 다니는 우리에게 절제하라는 일종의 사인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또 마스크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이 된 건, 그동안 너무 많이 무책임한 말을 내뱉고 거짓 뉴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퍼 날랐던 우리에게 조금 더 침묵하며 살라는 뜻인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모이는 교회를 막으시는 것은, 그동안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은 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모이는 일에만 힘쓴 것에 대한 벌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내 삶에 군더더기는 없는지 살피게 된다. 스위스 화폐 100스위스프랑에는 스위스의 유명한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초상이 있다. 그의 예술은 더함의 예술이 아닌 뺌의 예술로 유명하다. 스케치하고 물감을 입히고 덧칠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예술의 틀이라고 한다면, 그의 예술은 오히려 덧칠함과 입힘을 뺌으로써 인간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그 때문에 그의 작품은 대부분 뼈에 살가죽만 살짝 입혀놓은 것처럼 마른 형상이다. 가볍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살 수는 없을까? 그러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에 힘과 에너지를 쏟고, 지쳐 힘들어하며, 필요 이상의 것을 가지고 거기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간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은 어쩌면 더 많은 것을 가지는 일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비워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유례없는 전염병으로 삶의 무게감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느껴지는 요즘, 겸허히 나에게 묻는다. 지나온 삶이 혹시 불필요한 것의 더함은 아니었는지.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그랬던 것처럼 삶의 군더더기를 빼면서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행복으로 다듬는 삶의 조각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힘든 이 시기, 사회적 거리두기의 적극적인 실천과 함께 나를 짓누르는 내 삶의 불필요한 물거품은 없었는지도 살피면서 내 인생의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해 보는 건 어떨까? 김창해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삶과 종교] 정치와 군자

총선이 끝났다. 웃는 사람도 있을 테고 우는 사람도 있을 테다. 코로나19로 온 세계가 뒤숭숭한데도, 우리나라에서는 큰 무리 없이 질서정연한 가운데 총선을 잘 치렀다. 질병이 세계적으로 대유행 하는 것을 뜻하는 펜데믹 상황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선거를 비교적 잘 치렀다. 이것은 자부심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우리나라 정치 지도자들과 국민 모두 참 큰일을 잘 치렀다고 생각한다. 코로나19의 유행 상황에서 관민 모두가 이를 잘 대처해, 우리나라는 이제 세계적으로 방역체계와 의료체계를 잘 갖춘 나라로 존경을 받고 모범이 되며, 다른 나라를 돕는 나라로 인식될 수 있게 되었다. 정치도 한 단계 진보를 해서, 여당이든 야당이든 이제 서로 비난만 하지 말고 정당한 비판을 하면서 품격을 지키고 서로 살리는 정치의 길을 가기 바란다. 정치가 무엇인지 다시 돌아볼 기회를 갖고 싶다. 정치(政治)란 정(政)과 치(治)의 결합어다. 정(政)은 바를 정(正)과 두드릴 복()자가 결합된 회의(會意)문자로 보거나 형성(形聲)문자로 본다. 정(政)은 바르다는 뜻의 정(正)으로도 쓰였으며, 정리정돈을 뜻하는 정(整)자와도 통용됐다. 바르다는 뜻의 정(正)은 원래 정벌한다, 바르게 한다는 뜻인 정(征)의 본자다. 갑골문에는 두 가지가 나타난다. 하나는 행군한다는 지(止)의 원 갑골문 위에 읍성을 뜻하는 ㅂ자처럼 생긴 글자를 덧붙여, 마을 위를 행군해 질서를 잡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정(正)자 오른쪽에 무기를 들고 두들겨 공격한다는 복()자를 붙여, 무력으로 정복해 힘으로 다스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처럼 처음에 정(政)은 무력으로 질서를 잡는다는 뜻이 있었다. 『시경(詩經)』「대아(大雅)황의(皇矣)」에 나타나는 정(政)의 뜻은 기정불획(其政不獲) 즉 그 질서를 잡음이 민심을 얻지 못했다에 나타나는데, 무력으로 다스린다기보다는 정치교화의 뜻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정벌, 세금, 정책 또는 법령, 전술적 책략 등으로 다양해지면서 정치적인 것들을 모두 포함하게 된다. 『논어(論語)』에 정(政) 자는 43번 나타나는데, 그 가운데 「위정(爲政)」편에서 공자(孔子)는 정(政)으로 이끌고 형벌[刑]로 질서를 잡으면 백성이 법망만을 피해가며 부끄러움이라곤 없는데, 덕(德)으로 이끌고 예(禮)로 질서를 잡으면 마음으로 부끄러워할 뿐만 아니라 행실이 바르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어찌 정무에 종사해야만 정(政)을 하는 것이겠는가?라고 했다. 공자는 정(政)을 정치행위의 일로 보면서도, 효(孝)와 우애(友愛) 신의(信義) 등 우리 삶 전반에 걸친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의 발로와 도덕적 행위 일체를 포함해 질서를 잡는 것 일체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치(治)자는 본래 산동(山東)성의 동래(東萊) 곡성(曲城) 양구산(陽丘山)에서 발원해 황해로 흘러가는 고대의 하천 이름에서 비롯된 형성(形聲)문자다. 나중에 우임금의 치수라는 표현에 쓰이기도 하고, 옥결처럼 잘 다듬어지고 질서가 잡힌 상태를 가리키는 뜻으로도 쓰이게 되었다. 치(治)자는 『논어』에 6번 나타난다. 여기서 치(治) 자는 대동소이하게 질서가 잘 잡힌 상태를 뜻한다. 공자에게는 형(刑), 덕(德), 예(禮), 정(正) 등이 치의 질서 상태에 이르는 정치적 행위인 것이다. 공자는 형벌보다는 덕과 어짊으로 다스리는 것을 정치의 최고 가치로 여긴다. 심지어 예(禮)와 악(樂) 또한 치에 이르기 위한 정치행위로 본다. 된 사람 또는 될 사람을 뜻하는 군자(君子)가 바로 총체적 덕목들을 한몸에 갖춘 정치가의 표상인 것이다. 일상 삶에서 도의(道義)가 실현되어 인간관계의 완전한 질서체계를 실천하고 구현하는 된 사람이 온전한 정치를 실행하는 이상적인 인간인 것이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사람은 무엇으로 살까?

2020년 신년을 앞두고 중국 우한에서 날아든 코로나 바이러스가 4개월여 동안 전 세계를 뒤덮으면서 세상의 풍속도가 급속히 변화되고 있다. 국가와 국가, 사람과 사람 간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불신하고 경계하며, 서로 적(敵) 대하듯이 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특히 사재기에 사재기를 하는 열풍은 사람과 그 삶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다. 매슬로우(Abraham H. Maslow)의 심리적 단계대로 본다면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 사회는 분명히 여가를 선용하며 자아를 실현해야 하는 최고의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 맞을 텐데, 이번 사태를 당하고 보니 먹고사는 데 급급한 최저 수준의 본능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 서글프기 그지없다. 거기다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총기류를 구입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서글픔을 넘어 인간의 상태가 소름끼칠 정도로 무서워졌다고 하겠다. 그러니 설교를 할 때나 강의를 할 때 종종 농담처럼 사람이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먹기 위해서 살지요?, 사람이 왜 먹느냐고 묻는다면 살기 위해 먹지요?라고는 했지만, 이것이 현실이 되어버린 마당에 과연 사람은 왜 사는지를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톨스토이가 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에 보면 천사 미하일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 알기 위해 벌거벗은 몸으로 세상에 버려졌다. 그는 가난한 구둣방 주인 셰몬의 친절한 배려로 그의 일꾼이 되어 3년 동안 일하다가 구두를 맞추고 돌아가다가 객사한 부자와, 태어나면서 부모를 잃은 쌍둥이 자매를 자기 딸처럼 키우던 한 여인을 만난 후 그는 사람이 자기의 계획과 욕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친절과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톨스토이는 이 마음을 그의 저서 하나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에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돕는 일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사람은 왜 살까? 톨스토이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를 이루도록 돕기 위해서 살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도록 돕기 위한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 사랑과 친절로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도 바울은 그 사랑을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정리하여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하였다(고린도전서 13:4-7). 한 마디로 사랑이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위해 친절을 베풀며 사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신의 창조 목적이고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드러난 인간의 모습이 너무 추악하다 못해 부끄러울 지경이다. 사랑과 친절로 서로 협력하여 어떻게 해서라도 이 난국을 속히 벗어나려기보다 정치적 정략적인 구실로 삼으려 하고, 경제적 이익을 위해 독점하려 하고, 종교적 신앙을 이유로 독선을 부리기까지 하려 하니 이제는 추악과 부끄러움을 넘어서 위협이 더 커지고 있다 하겠다. 그러니 더 한 지경이 되기 전에 거울 앞에서 자신을 살펴봐야겠다. 거울을 부르며 마술 부리려는 욕심꾸러기가 아니라 신의 형상을 닮은 순수한 자신을 성찰하기 위해 거울 앞에 서야 하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고통 속에서 배워야 하는 본질적 진리

요즘 전 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은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19이다. 이 신종 바이러스는 모든 세계인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사람과 사람의 접촉을 피해야 하는 상황에서 비즈니스든 종교든 정치든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안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 죽음의 바이러스 앞에서는 이 땅의 어떤 종교계도 예외일 수 없었다. 교회를 비롯한 모든 종교모임에도 사회적 안전거리가 요구되고 있고 심지어 주일에 모이던 예배조차도 온라인 예배를 요구받고 있다. 교회와 종교계는 이제 새로운 형태의 모임 방법을 찾아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교회들은 일요일이면 모두 예배당에 모여 잘 준비된 찬양과 이벤트와 화려한 순서 속에서 주일 대(大)예배라는 이름으로 예배를 드렸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는 사랑과 공평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사람 숫자로 대예배와 소예배를 나눌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인간적인 편의상 성도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를 대형교회라 부르고 성도들이 적은 교회를 작은 소형교회로 구분한 정신은 이미 현실 속에서는 굳어져 있었다. 코로나19사태앞에서 교회는 크든 작든 이제는 예배형식에도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미디어의 시대 속에서 이미 기존교회들에 실망감을 느끼고 온라인에서 예배를 드리던 성도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다는 것은 교회가 다 아는 현실이다. 좋든 싫든 지금 교회들은 방송예배를 드리고 있다. 대안이 필요했던 교회들은 학교운동장을 이용하여 드라이브인(drive in)예배도 시작하고 요즘의 대세인 유튜브 방송도 예배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 이해되는 예배방법의 변화를 누가 뭐라고 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시점에서 교회와 종교계는 스스로 질문해 보아야 한다. 과연 지금 교회가 예배의 방법을 바꾸고 방송장비를 사들여 교회 안에 작은 방송실을 만들어 예배형태를 바꾸는 것에 초점이 있어야 하는가?를 말이다. 성경 사도행전 8장에 있던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 모든 교회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 땅으로 흩어진 것의 의미가 예배의 형식을 바꾸라는 하나님의 의도였는가?를 말이다. 교회가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난 현실을 단순한 방법을 바꾸는 시도로 본질로 돌아가는 있을까? 교회는 큰 건물을 짓고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들여 첨단기술을 도입하고 사회보다 빠르게 문화적인 선도를 하는 기능이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교회의 더 큰 강력한 본질은 올바른 믿음을 고백한 성도들이 자신의 생활터전 위에서 신앙을 기뻐하며 세상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품어가는 모습으로 본질이 드러나야 한다. 참된 영성의 경건한 예배는 는 성도들의 자발적인 종교적 기쁨이었다. 교회가 모여드는 성도들의 머리숫자로 힘의 기독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의 시민의식은 섬김이며 신앙의 기쁨을 통한 작고 어려운 사람을 섬기는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 코로나19 사태는 말 그대로 재앙이다. 그러나 이 재앙 속에서 교회는 먼저 스스로를 회개하고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는 모이는 교회와 더불어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기능을 이젠 해야 할 때이다. 코로나19를 이기는 힘은 교회가 좌ㆍ우가 아닌 하늘의 기준으로 모두를 품고 사랑하는 이 능력에서 나오는 것임을 우리는 오늘의 현실 앞에서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만 한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수지지부 FIM 이슬람 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네 덕이고 내 탓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는 특정한 지역을 넘어서 지구촌 전체의 문제로 확산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결국 대유행을 선언했고 세계의 국가들은 자신에게 알맞은 대책을 마련하고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현재 상황을 바라보면 인간이 발달시킨 교통망의 비약적인 발전에 따른 편리성에 비례하여 다른 측면에서 반대급부가 발생하는 현실에 마주하게 된다. 더구나 코로나라는 이 바이러스에 인류는 의학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했고 감염 초기의 무증상 상태에서 상대방에 감염을 시키는 사례는 방역의 어려움과 인간 사이의 불신을 확대하고 있다. 이처럼 불신이 증가하면 이에 따른 상식을 벗어난 다른 대안이 성행하게 된다. 과학 시대에는 통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인식되는 주술과 광기 또는 반지성이 선동하는 집단이기주의 등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파스칼이 말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는 언어의 상징처럼 우리는 때로는 객관적인 현실을 제쳐놓고 주관적인 이기주의에 빠져들게 된다. 금강경에서 네 가지의 고착화된 인식인 상(相)을 말하면서 첫 번째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상이고 이것을 고집하는 것이 아집이다. 물론 중생은 사유를 자기의 중심으로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같은 아집이 이성의 존재를 심하게 억압하면 정상적인 사유가 마비되고 일상생활이 비정상으로 흘러가고 결국은 혼란을 부추기게 될 것이다. 이제 자국의 안위를 보호한다는 새로운 명분이 세계에 유행하고 있다. 감염병에 대한 공포는 세계 각국에 정치ㆍ경제ㆍ의료ㆍ종교ㆍ문화ㆍ교육 등의 인간 세상의 일상을 바꿔놓고 있다. 이러한 여러 혼란이 가중되는 현실에는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측면이 있으나, 근원에는 감염병에 대한 공포와 또 다른 중생들이 가진 이기심에 따른 네 탓이라는 사유가 자리 잡고 있다. 그렇지만, 감염병은 항상 우리 곁에서 같이 존재하였으나, 현실에 쫓겨서 인식하지 못하고 생활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어제까지도 그랬고 오늘에도 그러한 것이지만 치명적인 감염병의 대유행과 관련한 공포가 언론의 흐름을 타고 시시각각 전해지면서 우리들의 사유 속에 공포가 강하게 각인되었다. 여기에는 언론과 정치인 그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 등도 서로 지식을 내세우며 과도하게 경쟁하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것도 네 탓이라는 사유의 한 종류이다. 이러한 국가의 위기 상황에 또 하나의 변수가 등장하였는데 곧 다가올 선거이다. 선거의 특성상 언론을 통한 자신들의 정책을 알리려는 노력이 중요하지만, 여기에서도 등장하는 또 하나가 상대방을 비방하는 행태인데 이것도 네 탓이라는 논리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내 탓이 아니고 남의 탓이라는 생각은 자신의 내면이 주요 성찰과 반성이 대상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재난이 발생하였을 때 그 사회의 건강성을 확인하게 되는데, 우리나라는 집단의 지성이 정상적으로 작용하고 있어서 다른 나라들처럼 생필품 사재기를 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한 충돌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 성숙한 국민이다. 성숙한 국민답게 지금은 정부가 무능하다고 비방하는 것과 같은 여러 여론은 잠시 접어두고 대중들과 정부가 현실을 직시하고, 국가의 모습을 냉정하게 성찰하며, 여러 현상이 네 덕이고 내 탓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 개인은 자신이 세계의 중심인 것을 인지하고 이러한 세계의 암울한 현상도 내 탓이라고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모두가 내면을 성찰하며 새로운 사회의 공통문제에 대처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지금까지 도덕적인 국민으로 살아왔던 신뢰가 있는 지성들이다. 우리의 발전된 시민의식은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이루게 할 것이다. 세영스님 수원사 주지

[삶과 종교] 봄날은 온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는 가운데 나라가 초비상이다. 감염 확산에 비상이 걸린 상황에서 국민의 감염에 대한 불안감 역시 날로 고조되고 있다. 감염 확산에 비상등이 켜지면서 정부는 감염자 치료는 물론이고 감염 예방과 확산 방지를 위한 고강도 방역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누구랄 것도 없이 격려와 동참을 통한 국민 모두의 적극적인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해 보인다. 코로나19로 인한 극도의 불안감과 두려움이 사회 전반의 불신과 혐오로 이어지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사람을 만나는 일도 조심스럽다. 감염의 확산이 빠르게 진행됨에 따라 나라 전체가 불안에 떠는 만큼 위기 극복을 위한 우리의 대응 자세는 더 차분하고 냉정할 필요가 있겠다. 불안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우리를 더욱 고립시키고 힘들게 하는 것은 바이러스보다도 어쩌면 서로에 대한 불신과 배척인지도 모른다. 감염 확진이 집중된 지역이나 집단 혹은 감염이 의심되는 사람들에 대한 차가운 시선은 이번 사태를 극복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한 정부의 방역책에 대한 범국민적 협력 즉 서로를 위한 격려와 배려 그리고 응원과 지지가 필요할 때라고 본다. 감염 예방을 위한 개인위생에 철저를 기함은 물론 감염으로 치료 중인 환자의 쾌유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치료와 방역에 온 힘을 다하는 분들의 수고에 진심 어린 감사와 응원을 보내주는 일, 그런 따뜻하고 성숙한 시민의식이 현재의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데 더 큰 힘이 되리라고 본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이왕이면 하루빨리 코로나19 사태가 해결되어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되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수 리아킴의 노래 위대한 약속에는 다음과 같은 노랫말이 있다. 평범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벼랑 끝에 서보면 알아요. 평범했던 우리의 일상생활이 쉽지 않아진 요즘, 그 평범함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살면서 우리는 때아닌 삶의 난관을 만나고 예상치도 않은 고통과 절망의 순간에 직면하기도 한다. 놀랍게도 그런 상황이 찾아오면 그간 평범했던 모든 순간들과 일상들이 모두 그냥 그대로 축복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뜻하지 않은 삶의 벼랑에 서게 되면 그제야 비로소 아침에 눈을 뜨는 것만으로, 편안히 숨을 쉴 수 있는 것만으로, 창문 너머에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이미 너무 충분히 행복에 겨운 일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때 우리는, 소소한 일상의 축복보다 1퍼센트의 행운만을 찾으려 했음을, 평범한 일상에 고마워하기보다 특별한 무엇인가를 얻으려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았음을 또한 깨닫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도 평범해서 때로 지겨울 때가 있었던 자디잔 허드렛일들과 가족들이 함께 모여 밥 한 공기 먹는 일 등 재미도 감동도 없이 반복되는 우리의 그 모든 일상들이 얼마나 소중한 축복이었는지 그 자리에 서보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들은 사실 재미있는 일도, 매번 보람이나 감동을 주거나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에 정성을 쏟고 열심을 다해야 하는 이유는 그 모든 평범한 일상들이 지나고 보면 알알이 축복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늦게야 깨닫는 일은 후회가 될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나라가 어수선한 요즘이다. 다시 평범했던 일상을 환하게 맞이할 봄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코로나19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과, 감염 예방과 방지를 위해 온 힘을 쏟고 있을 분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김창해 천주교 수원교구 사회복음화국장

[삶과 종교] 고인돌에 새겨진 별과 삶 그리고 종교

코로나19로 온 나라가 긴장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신천지에 대해 많은 것이 알려졌다. 신천지교도 중에 청년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고 한다. 나의 20대를 돌아보건대, 이 시기에는 삶과 죽음 그리고 미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며 공부하게 된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절실하게 묻게 된다. 우리 인간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삶에서 의미를 찾으며 살아가는 존재자다.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낀다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나는 삶의 의미를 묻는 가운데, 보살핌, 돌봄에 대한 사유가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것은 아주 고대로까지 올라간다. 우리 한반도에는 5만기 이상의 고인돌, 선돌이 있다. 강화도나 순천 및 화순, 안동 그리고 평양과 황해도 등에는 집단적인 고인돌들이 있다. 그런데 이 고인돌 중 일부 덮개돌에 다채로운 별구멍들이 새겨져 있다. 이 별구멍들을 만든 이들은 어떤 목적과 어떤 의미를 가지고 하늘의 별자리들을 이 바위에 구멍으로 새긴 것일까? 몇몇 역사학자들과 과학자들과 천문학자들 그리고 철학자들이 관심을 두고 그것을 발견하기 시작했고 앞으로 이를 더 해석해가려고 한다. 고인돌들의 별구멍들은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새겨진 천문도와 유사하다. 선사시대에 하늘을 관측하고 별자리에 대한 지식이 쌓이고 전승되면서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도 전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 권근(權近, 1352-1409)에 의해 만들어진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에도 전승되고 있고, 또 그것이 오늘날 쓰는 1만 원권 화폐에도 그 일부가 디자인되어 있다. 선사시대부터 우리 민족은 하늘을 관측하면서 별자리들을 만들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해왔다.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에게 오랫동안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 망각의 역사조차도 잊힌 채 많은 시간이 흘렀다. 고인돌의 덮개돌에 새겨진 별구멍은 해와 달 그리고 북두칠성과 남두육성이다. 이 별들은 당시 우리 고대 한국인들이 하늘과 땅을 오랫동안 관측하여 그 규칙성의 발견을 통해 그 하늘과 땅과 그 위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불멸성을 사유하고 보살피며 만들어낸 틀이다. 고인돌은 우리 한국 고대문명의 기원을 알리는 징표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고 하고, 또 노자(老子)는 말할 수 있는 도는 상도(常道)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고인돌도 침묵 속에서 많은 말을 던지고 있다. 그것들의 현존이 선사시대 우리 민족이 보던 하늘과 별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우리의 망각을 넘어 빛나고 있다. 하늘에는 저 하늘과 낮에는 태양이 밤에는 달과 별이 우리를 영원히 돌보는 존재고, 땅은 하늘과 협력하여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키우는 존재다. 그 하늘과 땅 사이에서 인간은 그 사실을 발견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영원히 우리 미래에도 남을 큰 돌에 그들의 혼을 새겨 넣어 우리를 돌보는 것이다. 모든 종교가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 자신의 삶을 보살피고 돌보는 종교가 되길 기원한다. 김원명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영화 ‘기생충’으로 보는 사회학

봉준호 감독이 제작한 영화 기생충이 4개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후 국내외에서 환호의 열기가 대단했던 반면에 사촌이 땅 산 게 배가 아프기라도 하듯이 말도 많다. 자국의 영화 표절이라고 시비하는 인도의 영화감독, 좌파 감독에게 상을 준 미국 영화예술아카데미에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고 항의하는 국내의 칼럼니스트, 영화의 메시지보다는 한국의 주거난에 초점을 맞추어 비난하는 일본과 국가 간의 불편한 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차라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봐야겠다고 조롱하는 미국 대통령 등 시비가 만만찮다. 정말 배가 아파서 그런 걸까? 심보가 못 돼서 그런 걸까? 기생충이란 다른 종(種)의 체내 외에 붙어 해당 생물의 양분을 얻어 살아가는 진핵세포로 이루어진 무척추동물인 거머리와 같은 붙어살이벌레를 말한다. 정치적으로는 극우사상과 제노포피아(외국인혐오)를 기치로 내거는 사람들의 배타적인 성향으로 외국인이나 이민자들과 그들에게 우호적인 자국민을 지칭할 때 표현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자기와는 생활환경이 다른 상대계층을 비하하거나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남에게 덧붙어서 살아가는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일제식민지 시대 룸펜 인텔리겐치아(지식인)도 그렇게 조롱당했다. 1930년대 경제공황의 여파로 식민지 조선에는 실업자들과 부랑인들이 넘쳐났다. 그들 중에는 일본이나 미국에 유학하고 온 지식인 실업자들도 꽤 있었는데, 사회는 이들을 가리켜 룸펜 인텔리겐치아라고 놀려댔다. 원래 룸펜(Lumpen)은 사회에서 낙오된 부랑자나 실업자를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누구보다 더 많이 배우고 누구보다 더 사회적으로 공헌해야 할 그들이 일거리가 없이 빈둥거리면서 근대화의 선도자라도 된 듯이 모던 껄, 모던 뽀이 역할만 해대려니 눈꼴 시렸던 것이다. 그래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도움이 되지 않았던 그들을 룸펜 인텔리겐치아, 즉 사회의 기생충이라고 조롱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봉준호의 영화가 고발하려는 기생충은 무엇이었을까? 현대 사회의 지독한 양극화 현상이 아니었을까? 인권을 중시해야 하는 민주 사회에서 철저히 인권을 무시하는 신자본주의만 숭상하고, 자기와는 다른 사람을 서로 기생충처럼 여기는 현실을 고발한 것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들은 순진하여 무시당하고 이용당하는 힘없는 국민이기 보다 극우 제노포피아일수도 있겠고, 밥값도 못하는 게 혈세만 낭비하며 겉멋만 부리는, 자기 역할도 못하면서 힘만 과시하려는 수많은 현대판 룸펜 인텔리겐치아들일 수도 있겠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가리켜 미련한 자라 지칭하고 그들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고(잠언12:23), 미련한 것을 쏟아 내고(잠언15:2), 자기 의사를 드러내기만 좋아한다(잠언18:2)고 꼬집어 말하고 있다. 또한,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무익한 종(마24:30)이라 고발하고 그들이 받아야 할 심판도 예고하였다. 한마디로 기생충이란 자기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지 못하는 나이겠다. 또한,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를 좋아하고 쉽게 얕잡아 보려는 책임감이 결여된 너이기도 하겠고, 도덕성이 결여된 채 애써 신(神)의 낯을 피해 살아가려는 우리라고도 하겠다. 코로나19로 인해 지구촌이 어수선하다. 우리 형편으로 볼 때 이 또한 기생충 같은 자들의 무책임한 행위의 무서운 결과이지만 이제 와서 누구 탓한다고 더 나아질까? 원망은 차치(且置)하고 서로 협력하여 이 사회가 하루라도 빨리 정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코로나19’의 위기

빅토르 위고(Victor Hugo)라는 작가는 장발장을 비롯한 수많은 위대한 글을 남겼다. 그의 이라는 책 내용에 나오는 내용이다. 바다에서 위험한 폭풍에 휘말린 어떤 배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폭풍 속에서 선원들은 모두가 놀라고 두려워 떨며 긴장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갑판 아래에서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는 그 배에 화물로 선적된 대포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폭풍 속에서 대포를 묶어 둔 밧줄이 풀려 그런 소리가 났던 것이다. 배의 요동에 따라서 그 대포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배의 옆쪽 측면을 사정없이 쳐댔던 것이다. 이것을 지켜보기만 하면 배는 가라앉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용기있는 두 명의 선원이 느슨해진 대포를 다시 묶겠다고 자원하였다. 그 일은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그 대포로 인한 배의 내부에서의 난파가 폭풍의 격렬함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었다. 한 개인의 인생이던 한 국가의 역사이던지 위기라는 위험과 기회의 시간을 맞이한다. 그때에 그 위기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공동체의 정체성이다. 그 정체성이 분명하다면 그 위기는 기회의 시간이 되기도 하고 그 정체성이 깨져 있다면 그 위기는 위험의 시간이 될 뿐이다. 교회는 언제나 사람들 속에 있고 사람들과 함께 한다. 교회라는 곳은 그 사회의 정서적 문화적 생명을 같이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국가의 정체성을 영적,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인도해 가야 하는 책임이 교회엔 있는 것이다. 역사를 볼 때 그 세대 속에서 교회가 어떤 역할을 하느냐는 그 사회의 건강성의 잣대가 돼 왔다. 지금 한국 교회는 모든 것들이 다 정확히 좌우로 나누어져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국가적 재난으로 다가와 있다. 이 위기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일단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다면 멈추어야 한다. 다 같이 멈추고 하늘을 쳐다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도 어떤 기적을 보여주실 때나 아니면 생명의 말씀을 주실 때 언제나 모든 것들을 멈추게 하셨다. 그리고 한 곳을 집중하게 하셨다. 그 집중은 언제나 인생의 본질을 향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 나라의 힘과 그리고 인생의 참된 의미는 지금의 분주함을 멈추고 나 자신을 돌아보며 믿음을 향해 우리의 시선이 고정되어야 한다. 남아프리카 유목 부족 가운데 일 년 중 일정한 때가 되면 반드시 몇 달 동안 먼 길을 떠나는 부족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몇 날 며칠을 터벅터벅 걸어간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들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며칠이고 한 자리에 머물 때가 있다고 한다. 이 부족을 관찰하던 한 인류학자가 그들에게 왜 가던 길을 멈추고 쉬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들 중 한 리더가 그에게 대답하기를 그들의 영혼이 육체를 따라오도록 쉬면서 가야 한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번 코로나19 재난은 너무나 큰 인류의 재앙이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재앙 앞에서 누구의 탓인가?를 힐문하며 서로 공격하기보다는 모두가 육체적으로 멈추고 그 바빴던 육체의 발걸음에 영혼이 뒤따라 오도록 기다림의 시간이 있기를 기도해 본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수지지부 FIM 이슬람 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질병의 재난을 바라보면서

인간의 역사를 통하여 살펴볼 수 있는 여러 재난의 가운데에서 가장 많은 생명을 빼앗았던 사례들은 극단적으로 혼란을 일으켰던 전쟁이나 자연재해가 아닌 질병의 문제였다. 우리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 중에서도 역병, 즉 돌림병에 대한 기록을 많이 찾을 수 있는 것에서 이전의 시대나 지금의 시대에도 질병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중요한 명제인 것은 확실하다. 현대에서 과학의 발전과 생물학에 대한 많은 연구성과를 인용하여 인간의 기대 수명이 많이 증가하였고 다양한 질병의 치료도 가능해지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노력에 대한 의학의 발달과 더불어서 또한 인간의 탐욕에 의한 사람과 축생들에게 공통적으로 감염이 일어나는 사례가 증가하여 인간사회에 대혼란을 일으키는 행위는 과연 무엇에서 시작되는 것인가? 축생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전염되어 변형을 일으켰던 질병으로 2002년 11월 중국 관동지역을 중심으로 발병이 시작되었던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SAS)이나, 2012년부터 중동지역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나타났으며 2015년까지 맹위를 떨쳤던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등은 인간이 축생들에게 지나치게 인간의 생활환경으로 이끌었던 것에 원인이 있었고 기 내면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많은 탐욕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인도에서 활동하시던 당시에도 이와 비슷한 역병이 사례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그러한 일의 근원은 인간의 탐욕이 내재하여 있고 여기에 귀신들의 비인(非 人)이 가세하여 더욱 확대시키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즉 인간이 윤리적이고 이치에 맞게 생활을 유지한다면 이러한 비인들도 인간세상을 쉽게 넘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중국의 우한 지역에서 발생하여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어 세계의 문제로 부상하고 있고 우리나라도 환자가 발생하여 확대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하고, 조만간 대학교의 개강과 유학생의 유입은 현재의 방역체계를 더욱 강화해야 하는 필요성을 인식시킨다. 현대사회는 세계가 네트워크로 이뤄지고 있고 세계의 공장이라 일컫는 중국경제의 문제가 세계경제에 연쇄반응을 일으키고 있으며, 바다를 건너서 미국에서는 독감으로 많은 인명의 피해가 일어나고 있다는 또 다른 우울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러한 인간세상의 여러 지역의 재난을 보면서 불교의 가르침의 가운데에서 오탁악세라는 말을 생각해 본다면, 번뇌가 멈추지 않아서 감정의 갈등이 끊임없이 반복하여 고뇌하는 번뇌탁(煩惱濁)과 사악한 사상과 견해를 가진 자들이 자신을 혼란에 빠트리고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견탁(見濁)이 조화되어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는가를 조심스럽게 되새겨 본다.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는 과정에서도 일정한 이치에 따른 공간과 시간의 분배가 필요한 것이고 지구라는 삶의 터전을 살아가는 다른 존재와의 조화도 필요한 것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오만한 독선과 그것에 따른 무분별한 자연의 파괴와 에너지의 남용, 인간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새로운 탐험은 고스란히 인간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19의 병원균이 수산물시장에서 축생의 식용문제에서 시작되었다는 설과, 인간이 실험실의 연구과정에서 유출되었다는 설이 보도를 접하면서 스스로 반문하여 본다. 인간의 탐욕은 과연 부처님의 가르침인 소요지족(小欲知足)을 실천할 수 없는 것인가! 이것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앞에서 말한 부처님 당시의 재난을 일으켰던 아사세왕은 세상을 향하여 스스로 지었던 과오를 참회하였고, 고통받던 여러 사람을 위하여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이러한 재난이 점차 사라져갔던 인연사를 감명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의 재난은 인간의 지혜에 의하여 제어되고 수습될 것이다. 이러한 재난을 통하여 인간과 자연이 조화되는 삶을 기대하여 본다. 세영스님 수원사 주지

[삶과 종교] 세상에 공짜 술은 없다?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하여 단 한 번도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 ... 시인 정호승은 인생의 한 변곡점에서 분노와 원망이 끓고 있을 때 시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를 썼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나는 내 인생을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왔으나 내 인생은 나를 위해 열심히 살아오지 않았다는 느낌이 불현듯 들었다고 했다. 많은 사람이 그렇듯이 그도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런 고통을 주는가. 나는 지금까지 열심히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한 죄밖에 없다고 원망을 했다. 시간은 어머니처럼 사람을 다독여 깨닫게 한다. 후에 그는 분노와 원망으로 그런 시를 썼다는 사실이 몹시 부끄럽고 후회스럽다고 고백한다. 종종 우리는 원하지 않은 실패와 좌절을 만나게 되고 예상치도 않은 인생의 고통을 떠안게 된다. 어느 누구도 실패와 좌절을 바라지 않는다. 고통의 십자가는 우리 인생 중에 피하고 싶은 첫 번째 목록이다. 그렇다고 피할 길도 없다. 그리고 불쑥 찾아든 고통과 좌절을 웃으며 맞이할 사람도 없다. 왜 우리는 인생 중에 찾아드는 고통과 좌절을 분노와 원망으로 대할 수밖에 없을까? 문제는 간단하다. 행복한 삶을 위해 설정해 놓은 우리의 인생 설계도면에는 안타깝게도 실패와 좌절을 수용할 공간이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오로지 소원의 성취와 성공의 기쁨만을 위해 설정된 이 도면은 밀물 썰물이 시도 때도 없이 오가는 생의 바다에서는 불행하게도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아픔 없이 살아온 인생이 있을까? 당연히 이러한 설계도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생의 질곡에 서서 쉽게 무너지고 만다.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고 원망했던 시인 정호승은 훗날 이렇게 고백한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쓴맛을 보지 않고는 결코 단맛을 맛볼 수 없다.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다른 사람한테 일어나는 불행한 일이 이제 나에게도 일어나는구나. 내 차례구나 하고 겸허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인생에는 공짜가 없다. 내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에 이르려면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고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필자의 방에는 365일 매일같이 꽃을 피우는 식물이 있다. 벌써 몇 년을 함께 살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매일같이 가시 끝에서 분홍색 꽃을 피우다 지다를 반복한다. 사람의 마음이야 날씨처럼 변덕이 심해서 웃다 울다 즐겁다 슬프다. 하지만 이 식물은 늘 한결같다. 어느 날엔가 꽃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이렇게 말을 걸어본 적이 있다. 꽃아, 너는 참 좋겠다. 늘 한결같아서, 늘 웃고 있어서, 늘 그렇게 꽃을 피울 수 있어서. 그러는 동안 문득 마음속에서 이런 울림이 일었다. 힘들이지 않고 저절로 피는 꽃이 있을까? 꽃은 식물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생존의 수단이라서 자신의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꽃을 피운다. 곧 자신의 감지장치를 최대한 사용해 빛의 양과 강도를 조절하고 온도를 맞추어 모든 에너지를 쏟아 꽃을 피운다. 작은 식물 하나도 이처럼 자신의 생존을 위해 온몸을 사르건만, 크고 작은 실패와 좌절에 우린 어찌 이리 매집이 약한지, 새삼 수줍은 듯 피어 있는 분홍빛 꽃들 앞에서 그저 부끄럽고 낯이 뜨겁다. 새해가 밝은지도 이제 두 달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보면 주눅이 들지 않을 만큼 나름 떳떳하고 참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목차 없는 단편집 같은 기분은 왜일까? 내 일상의 목차를 다시 점검해보며 한 줄 한 줄 인내심을 가지고 살아볼 일이다. 머지않아 나만의 멋진 단편집 하나가 완성될 것이다. 김창해 천주교 수원교구 사회복음화국장 신부

[삶과 종교] 내 한마음 차분하면 풀무는 쇠를 녹인다

입춘(立春)이 지났다. 집에 있는 작은 화단에 살포시 나오는 풀잎들을 보노라면, 생명이 약동하는 모습에 마음이 밝아진다. 다른 한편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곳곳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우리 주변을 서성이고 있음을 느낀다. 대학가에서는 우리나라에 유학 중인 중국인 유학생들이 방학 동안 중국에 갔다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가 있지 않을까 염려한다. 다중 모임을 최소화하여 바이러스 확산을 막으려고 고민하고 있다. 그래서 졸업식과 입학식 취소 및 축소 그리고 개강 연기까지 고려되고 있다. 이처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각종 예방 대책에 정부와 모든 국민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의학사 전문가가 아닌 나의 짧은 소견으로는, 인류는 이런 신종 바이러스들을 역사적으로 경험해왔다. 즉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차분히 대처하고 주의 사항들을 잘 지키면, 이를 이겨내는 데 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언론의 관심을 받는 동안 윤석열 검찰총장과 추미애 법무부 장관 간의 용호상박(龍虎相搏)하는 모습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다소 멀어지고 있는 듯하다. 물론 이외에 4월 총선 관련 정치권 뉴스들이 언론의 주요 관심인 것도 또 다른 탓일 것이다. 나는 우리 국민이 최근 언론을 장식하는 정치계와 법조계 이슈들을 통해 무엇을 느낄까 생각한다. 국가고시합격을 하거나 공부를 많이 하거나 정치계에 발을 들이거나 해서 이른바 출세를 한 분들 가운데, 우리가 존경할 만한 분들이 몇 분이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한다. 출세를 한 분들 가운데서 존경할 만한 분들을 찾기 쉽지 않은 것 같아 다소 슬픈 생각이 든다. 물론 존경할 만한 분들이 우리 주변에 없지 않다. 다만, 언론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분들 가운데 이런 분들을 찾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언론이 관심을 두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여론이 관심을 갖는 것이다. 존경할 만한 분에 대해 여론이 관심이 없으니, 언론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존경할 만한 분들을 알고 존경하고 살 수 있다면 그 또한 행복한 일이다. 나는 교육자로서 현재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존경받을 만한 지도자로 길러내는 교육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 물어본다. 어떤 길을 보여주고 어떤 길을 가라고 해야 하는지 스스로 물어본다. 나는 우리 학생들이 출세를 위한 길을 가든, 자신이 좋아하는 길을 가든, 다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학생들이 어떤 길을 가든 정성을 다하며 큰 눈을 가지고 깊고 차분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되길 바란다. 지난겨울에 몇 권 읽은 책 가운데 하나가 『채근담 하룻말』(박영률 옮김)이다. 이 책은 잘 만든 책이다. 한글 번역도 인상 깊게 아름답고 좋았다. 옮긴이는 이 책을 하루에 한쪽만 읽으라고 권한다. 나는 옮긴이의 이 권유가 이 글이 곧 너의 삶이 되게 하라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우리말 번역과 내용에 이끌려 번역자의 권유대로 읽지 못하고 아침저녁으로 읽으며 사흘 만에 읽어버렸다. 오늘 이 책을 다시 꺼내 펼쳐 읽은 부분 가운데 다음 이야기가 인상 깊다. 힘 있는 자들은 서로 머리를 쳐들고, 영웅들은 호랑이처럼 다투니, 냉정하게 이들을 보면, 개미가 누린내에 모여들고, 파리가 피 냄새를 다툼이라. 맞네, 틀리네 하며 벌떼처럼 일어나고, 얻었네, 잃었네 하며 고슴도치 바늘처럼 성을 내도, 내 한마음 차분하면, 풀무는 쇠를 녹이고, 끓는 물이 눈을 녹인다. 나는 세상 걱정에 위로 올라가는 열을 내리고 더욱 차분해지자 다짐한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