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우리 이대로 살아도 될까요?

요즘 사람들의 마음에 분노가 깊이 뿌리내린 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분노가 터질 때 조절이 안 돼 자신과 이웃을 거침없이 파괴하기도 한다. 분노조절장애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 경고처럼 들어야 할 말이 됐다. 약자에게 더 포악하게 공격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야만적 사회로 전락하는 슬픈 모습이기도 하다. 미국 사회가 끌어안고 있었던 흑백갈등을 해결하고자 자신을 희생한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런 말을 했다. 용서를 통해 다시 화합하는 일이 없이는 아무도 자기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서 우리의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결정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적으로 돌려세우고 있다. 자기를 따르지 않으면 잔인한 말로 공격을 한다. 잠언 12장 18절은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고 한다. SNS의 댓글을 보면 너무 살벌해서 우리가 언제부터 이 지경이 되었는가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정치인들이 진영 논리를 따라 국민을 분열시키고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정치인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 맞서는 것은 당연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목적은 동일해야 한다. 어떻게 우리나라 국민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할 것인가 이런 목적을 가지고 우리가 먼저 마음을 같이한다면 통일이 돼도 세상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분열과 갈등이 더 악화할 테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고 남부 사람들이 미합중국연방으로 돌아올 때, 링컨의 참모가 남부 사람들을 어떻게 대우할지 링컨 대통령에게 물었다. 그 참모는 적대적인 남부 사람들에 대한 보복도 예상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링컨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들이 결코 떠난 적이 없었던 사람들처럼 대할 것입니다. 용서는 고통스러운 과거의 사슬에 묶이지 않는다. 가슴 아픈 기억의 어둠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용서는 새로운 관계를 이루기 위해 상대를 끌어안는 사랑의 실천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시시덕거리는 로마 병사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스데반 집사도 자신을 돌로 쳐서 죽이는 무리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나라는 장점이 많은 나라다. 가능성도 큰 나라다.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 가운데 공산당의 침략에서 건져주시고 전쟁의 폐허에서 일으켜 주신 나라다. 우리는 더 이상 이런 상태로 살면 안 된다. 미래를 위한 변화가 필요하다. 지난날의 모든 미움과 증오 그리고 보복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새 역사를 시작할 수 있는 새 출발이 필요한 때다. 안용호 기흥지구촌교회 목사

[삶과 종교] 암베드카르의 네오붓디즘

현대 인도의 위대한 인물로 3명이 거론되곤 하는데 이 3명은 간디, 인도 초대총리 네루, 그리고 암베드카르(Ambedkar, 1891-1956)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은 간디와 네루이지만 인도에서 가장 동상이 많이 제작된 인물은 오히려 암베드카르라고 한다.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 출신이다. 불가촉천민은 인도 카스트제도의 산물인데 일반적으로 인도의 카스트는 4가지 계급으로 구분된다. 브라만(성직자), 왕족, 서민, 노예계급이다. 이처럼 처음에는 카스트제도가 4가지 계급에서 출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노예계급보다 아래의 계급인 불가촉천민이 더 추가됐다. 이는 말 그대로 접촉해서는 안 되는 천민이다. 만약 접촉하면 브라만 계급의 신성함에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신성함을 회복하려면 다시 종교의례를 실시해야 한다. 인도에서 이처럼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던 불가촉천민은 인구의 15% 정도라고 한다.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 출신이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미국과 영국에 유학 가서 경제학 박사가 되고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 출신으로는 상당한 성공을 했다. 그렇지만 그가 불가촉천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같은 사무실의 부하직원들도 그와 거리를 두고서 근무했다. 심지어 사무실의 임시고용원조차도 암베드카르와 거리를 유지한 채 서류뭉치를 그의 책상으로 집어던졌다. 만약 암베드카르와 접촉을 하면 부정을 탈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암베드카르의 이러한 경험은 자연스럽게 그를 정치의 세계로 이끌었다.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 암베드카르는 초대 법무부장관이 됐고, 1950년 인도헌법이 제정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당연히 이 헌법에서는 카스트제도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 암베드카르는 1935년 힌두교를 버리고 다른 종교로 개종할 것을 선언했다. 오랜 숙고 끝에 1956년에 불교로 개종했다. 암베드카르가 주장한 불교는 네오붓디즘, 곧 신(新)불교라고 부른다. 가난한 자들이야말로 종교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인생 행로의 원천인 희망이 종교를 통해 주어지기 때문이다. 불교의 기반은 이성에 있기 때문에 현대인에게 모순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불교의 주된 목적은 고뇌하는 인류를 구하는 것이다. 암베드카르는 이처럼 주장하면서 불교를 선택했다. 암베드카르의 신불교가 한국 사회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그의 주장은 종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도록 해준다. 요즘 떠도는 말 가운데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종교를 걱정한다라는 말도 있는데, 이는 종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강한 의문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암베드카르는 사회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정의를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불교이고, 그것이 이 시대의 종교적 역할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병욱 불교학연구회 부회장

[삶과 종교] 공동체의 시너지 효과

시너지(synergy)라는 말이 있다. 이 용어는 함께 일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쉰-에르고스 혹은 쉰-에르기아에서 유래한다. 둘 이상의 것이 상호 협력해 작용할 때 하나가 독립적으로 작용해 얻을 수 있는 결과 이상의 효과를 생산할 수 있다는 의미다. 어떤 현상의 긍정적 결과는 다시 상승효과를 만들어 내며, 마지막에는 배가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저서 형이상학에서 언급한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더 크다는 문구는 이러한 시너지의 효과를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시너지 효과는 혼자가 아닌 함께 작용할 때 이루어질 수 있기에, 공동체가 반드시 전제돼야 한다. 코로나19 시대가 장기화하면서 우리 사회 안에서 함께보다는 혼자가 친숙한 개념이 됐다.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오랜 시간 거리두기 운동을 시행했고, 언택트(untact) 결과로 개인화 현상은 코로나 시대의 특징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이제 사회 공동체 안에서 개인 생활 방식이 우선한다. 직장에 출근해 동료를 만나 업무를 보지 않아도 된다. 재택근무 방식으로 일을 진행할 수도 있다. 어린 아이들은 비대면 수업을 통한 교육을 받고 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사회성을 배워야 하지만 거리두기 방침에 따라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줄었다. 컴퓨터 혹은 스마트폰이 그들과 놀아주는 친구가 됐다. 저출산 현상과 함께 코로나 시대에 가속화 되는 개인화 현상은 가정의 해체뿐 아니라 사회 공동체라는 개념까지 붕괴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섞인 전망을 하고 있는 학자들도 있다. 공동체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에 그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예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 이후 신자들은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고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기도했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며 공동으로 소유했다(사도 2,42-47 참조).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보여준 공동체 생활은 단순히 함께 모였다는 가시적 현상만으로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없다. 신자들이 함께 모여 보여준 자기 희생적 신앙생활 방식이 긍정적 효과, 곧 이방인 선교라는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 교인들의 공동체 생활은 그리스도가 직접 자신의 내어줌을 통해 보여준 모습이었고, 이방인들은 그들의 생활상을 목격하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공동체의 가치와 중요성을 증명해왔다.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서 함께 일할 때 그 효과는 배가된다. 하지만 이러한 명제는 오늘날 새로운 도전을 받는다. 코로나로 인한 개인화의 가속 현상 속에서 함께 보다는 혼자가 편하게 느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하기에 우리 모두의 고민과 노력이 요구되는 때다. 정진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일연 ‘삼국유사’를 통해 본 한국적 격의불교

고려 후기 승려 일연(一然, 1206~1289)이 찬술한 삼국유사(1281)는 고대 한국인들의 시원과 역사적 자취를 가름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 중 하나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한 의도는 민족 주체성의 회복과 자긍심 고취 또는 불교사상의 포교 및 교화에 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현재 삼국유사는 앞으로 한국적 격의불교 관점에서도 연구될 자료로도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이야기 가운데 처음과 끝 부분에 있는 두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우선, 삼국유사의 제일 처음에 나오는 기이편 고조선 왕검조선이다. 그 이야기 일부만 소개한다. 아들이 땅에 관심을 보였다. 아버지 환인 하느님은 환웅 아들의 뜻을 헤아려 삼위 태백을 내려다보니 널리 사람 사이를 이롭게 할 만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세상을 다스리도록 해줬다. 이후 아들은 이 세상에 내려와 이치에 따라 다스리고 교화했다. 한편 그 근처에 같은 동굴에 사는 호랑이와 곰이 있었는데, 환웅은 그들에게 신령스런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주며 이것을 먹고 동굴 속에서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일러줬다. 곰만 여자 사람이 됐고, 사람이 된 웅녀와 하느님의 아들인 환웅 사이에서 난 아들이 단군이다. 단군은 하늘이 땅과 소통하며 그 덕을 합한 중간적 존재자다. 이 이야기는 고대 한국인들의 시원을 다루는 이야기다. 다음, 삼국유사의 마지막 부분 효선편 이야기다. 이 중 하나만 소개하겠다. 이 이야기는 전생과 이생의 부모에 대한 대성의 깊은 효성과 불국사와 석굴암 창건 등의 불사를 이루는 이야기다. 불국사를 조성하고 석굴암을 조성하는 계기 가운데 곰 이야기도 나온다. 어느 날 대성이 곰을 사냥 후 회심하고 곰을 위해 불국사를 조성하는 불사를 하게 되는 이야기다. 그리고 석굴암을 조성하는 불사에 천신(天神)의 도움이 등장한다. 두 이야기 속에서 고대부터 한국인들의 삶 속에 녹아있는 조상과 하늘을 공경하는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일연은 이 이야기들을 고대 한국에 전해진 불교의 종교적 심성에 투사해 전하고 있다. 특히 하느님에 대한 고대 신앙은 고대 한국인들의 공통 조상과 깊은 관련을 갖는 것이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왔고, 하늘을 공경하는 경천사상과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대성의 전생과 현생의 효처럼 조상에 대한 깊은 효와 관련이 있다. 이는 본래 불교에서 승려의 출가수행이 기본적으로 속세의 부모와 인연을 끊는 것과는 대조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일연은 이를 불교 신앙심과 연결하는 내용으로 구성해 처음과 끝에 배치해 강조하고 있다. 이 이야기에 곰 토템 흔적과 하느님의 도움이 등장하는 것은 고대 한국인들의 신앙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외래 종교인 불교와 전통 신앙과 일상 삶의 효를 습합하는 과정의 이야기들이다. 이런 이야기는 불교가 유입될 당시 고대 한국인들의 생활 속에 녹아있는 신앙심과 효 이야기를 불교에 투사해 격의한 불교 이야기로 보인다. 일연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현존재의 시원과 실존적 삶에 대한 영감을 주고 있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미얀마 불교사회주의

최근 학술대회에서 미얀마 쿠데타의 부당성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미얀마는 불교사회주의로 유명한 곳이었는데 어쩌다 미얀마가 저렇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얀마의 불교사회주의는 초대총리 우누(U Nu, 1907~1995)가 주장한 것이다. 우누는 인도의 초대총리 네루(1889~1964)와 정치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고 개인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우누와 네루는 서로 합심해서 제3세계의 비동맹운동이 잘 진행되도록 노력했다. 우누의 정치적 동지였던 아웅산이 1947년에 암살을 당하자, 우누는 미얀마의 초대총리가 됐다. 우누는 불교경제학으로 널리 알려진 슈마허(1911~1977)의 주장을 근거로 해서 자신의 불교사회주의를 전개한다. 이는 사회주의와 불교의 유사한 측면에 착안한 것이다. 우누는 공공복지를 확대해서 국민 생활의 수준이 향상되고 동시에 평등화되기를 추구했다. 또 다른 우누 계열의 인물은 미얀마에서 사회주의는 현세의 열반이라고도 했다. 우누는 미얀마의 발전을 위해서 향상된 농업기술이나 현대적 공장을 모색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유용한 도구로서 가치를 가질 뿐이라고 한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 물질적이고 기술적인 측면의 개선을 추구하고 그래서 미얀마 국민이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좋은 집에 살고 더 좋은 보건 혜택을 누리며 더 나은 치안 속에 살고 더 나은 여가를 향유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렇지만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국민이 더 나은 조건 속에서 삶을 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영적 가치를 추구하고 향유하는 것으로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든 우누의 불교사회주의는 미얀마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우누의 불교사회주의는 현재의 한국사회에 시사해 주는 것이 적지 않다. 우선, 단순히 경제발전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혜택이 국민에게 고르게 돌아가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한국사회가 경제가 발전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혜택이 구성원 모두에게 고르게 돌아갔는지는 의문이다. 또 단순히 경제가 발전해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것을 통해 구성원 내면의 삶이 풍요로워야 한다는 점도 아울러 강조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물질적 풍요가 어느정도 이뤄졌지만 그것이 삶의 질이 나아지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경제발전인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누가 추구한 길이 미얀마에서 결실을 보지 못했지만, 그 의미가 완전히 퇴색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병욱 불교학연구회 부회장

[삶과 종교] 사제

2019년 11월 유네스코 본부는 제40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김대건 신부를 2021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다. 올해 2021년은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 천주교 대전교구와 당진시는 지난 18일 김대건 신부의 출생지 솔뫼에서 김대건의 해 선포식을 갖고 김대건 신부의 생애와 업적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사제(司祭)는 누구인가? 천주교 신자가 아닌 이들에게 사제는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러한 일반적 시선은 한편에선 특별함으로 비춰질 수 있다. 비신자들은 사제가 독신을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기대 혹은 환상을 가진다. 다른 한편에선 사제의 특별한 삶이 평범한 무관심 속에 묻혀 버리기도 한다.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한국의 비신자들은 사제를 여러 직업군 중 하나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는 천주교 사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변화돼 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 사회에서 사제는 오랜 시간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 중심에는 지난 2009년 작고하신 김수환 추기경님이 계셨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 사제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직업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필자의 유학 시절, 관공서에 제출할 서류를 작성할 때 직업란에서 머뭇거렸던 적이 있다. 학생 신분으로 외국에서 머물고 있었지만 필자는 천주교 신부였고, 직업란에 천주교 사제라고 적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부는 여러 직업 중 하나일 뿐인가?라는 물음을 가지고 원로 신부님을 찾아갔을 때, 신부님은 씁쓸한 웃음으로 답변을 대신하셨다. 그 웃음에는 세속적 사고와 잣대로 사제를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사제는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이다. 하지만 사제가 거행하는 제사는 과거의 시간에 머무르는 장소가 아니다. 사제는 교회 공동체와 함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면서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시간 안으로 끌어온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 속에서 보여주기 위해 사제는 존재한다. 사제가 행하는 일련의 사회적 활동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가난한 노숙자에게 한 끼의 식사를 대접하는 한 사제의 배려는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라 하느님의 사랑을 알리는 복음적 행위이다. 훼손돼 가는 생태계를 보존하기 위해 사태의 위중함을 알리는 한 사제의 외침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알리는 예언자적 선포이다. 사제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다. 개인적 이익을 포기하고 공적 선익을 구하고자 살아가는 사제들은 직업인일까? 정진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삶의 근원

나는 어디로부터 왔고, 이 세상은 언제 어떻게 있게 된 것인가? 인간만이 근원을 묻는다. 근원에 접근하는 많은 이야기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계속 근원을 묻는 것이다. 존재하는 어떤 것도 원인 없는 것은 없다. 예를 들어, 나의 원인은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다. 그런데 나의 엄마와 아버지도 그들 각자의 엄마와 아버지와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이다. 그 원인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끝이 없을 것이다. 그 위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이 무한히 계속된다. 그런데 이때 무한소급의 문제가 생긴다. 둘째, 제1근원을 설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대한국인들은 단군을 그들의 공통조상으로 삼고 단군의 할아버지를 하느님으로 설정하여 제1근원을 설정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또 그리스인들은 세계의 존재 근거를 설명하기 위해 제1원인을 가정한다든지 선의 이데아를 만들었다.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을 만들어 태초에 세계를 창조했다고 믿었다. 또 현대과학에서는 빅뱅이론을 만들어 우주 발생의 처음을 빅뱅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단군의 할아버지인 하느님은 어떻게 해서 있는 것인지를 설명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은 우주를 창조한 그들의 신이 어떻게 해서 있는 것인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도 선의 이데아나 제1원인이 어떻게 있게 되는지 설명할 수 없다. 현대과학자들도 우주발생의 출발점인 빅뱅의 에너지는 어떻게 있게 되는 것인지 설명할 수 없다. 무한소급을 끊는 이런 제일 첫 번째를 설정하는 것도 독단적이란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셋째, 제1근원을 마지막 결과와 맞물리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는 무명(無明)으로부터 노사(老死)까지 12가지의 연기(緣起) 고리를 설정하고 그것이 순환하는 것으로 이 세계 존재의 실상을 설명한다. 이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와 같이 전체적으로 순환한다고만 설명하는 것이다. 이는 순환에 빠지는 설명일 뿐으로 제대로 된 설명이 될 수 없다. 20세기 독일 철학자 알베르트는 근원이나 근거를 설명하는 이 같은 세 가지 방식에 모두 문제가 있다고 하며 트릴레마로 불렀다. 세 번째 순환에 빠지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불교에서는 조건들이 만나 사건이 일어나며 현상 세계가 이뤄진다고 설명한다. 현상 세계가 생겨나는 조건의 고리를 역으로 끊어나가면 결국에 모든 고리가 끊어진다. 이것이 바로 무아(無我)에로의 해탈(解脫)이자 니르바나를 이뤄 순환을 벗어나는 것이다. 두 번째 독단에 빠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제1근원에 대한 깊은 믿음으로, 세상과 자신을 그것에 전적으로 내맡겨야 한다. 그러면 스스로는 텅 비어 제1근원을 잊게 되며, 세계는 신의 섭리대로 돌아간다. 첫 번째 무한소급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른 차원의 문제로 전환하길 제안한다. 사과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사과가 무엇인지 묻는 대신 사과를 먹는 것이 사과를 아는 지름길이다. 근원 묻기를 멈추고, 그때 거기에서 할 일을 그저 하면서, 삶의 근원을 맛보며 사는 것이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가정이 회복되어야 할 때

성경은 말세 때 나타날 현상들을 상세하게 밝혀주고 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디모데후서3:2-4) 이런 현상을 셩경은 고통하는 때의 증거라고 한다. 그런데 특별히 가정과 관계된 내용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않는 것이다.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점점 사나워진다. 이런 것이 타락한 시대의 정신이라니 끔찍하지 않은가! 부모를 거역하는 마음은 사회의 권위도 무시하고 어른에 대해 존중심도 없다. 가정이 건강하지 못하면 존중심이 없는 젊은이 배출하게 되고 사회는 강자가 어른이 되는 야만적인 정글처럼 될 것이다. 어디부터 손댈 것인가. 사회적으로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정의 회복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해야 한다. 부모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며 희생적인 사랑이어야 한다. 자녀들은 부모를 사랑하며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부모도 약점이 있으며 삶의 아픔도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무정하거나 원통함을 풀지 못한 채 살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부모를 이해하려고 힘쓰고, 부모의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 가정은 가족끼리 서로 용서하고 서로 이해하며 서로 품어주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자리가 돼야 한다. 그래서 가정에서 건강한 인격으로 성장한 자녀들이 우리나라를 건강한 사회로 만들어가는 차세대 주역이 돼야 한다. 가정의 회복은 부모와 자녀의 삶을 건강하게 할 뿐 아니라 자녀들이 아름다운 가정을 꿈꿀 수 있게 한다. 로마제국의 멸망을 저술한 18세기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은 로마 멸망의 이유 중 하나를 가정의 붕괴로 꼽고 있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관의 바른 관계, 부모의 권위에 대한 순종의 정신, 자녀를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부모의 삶 그리고 가정에서 이뤄지는 교육이 회복돼야 한다. 가정의 달인 5월에 우리 모두 가정 회복을 위해 온 가족이 마음을 모으면 좋겠다. 안용호 기흥지구촌교회 담임목사

[삶과 종교] 만해 한용운의 불교관과 독립운동

한국 근현대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만해 한용운(1879~1944)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민족주의 계열의 인물 가운데 변절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인물이 한용운이라고 한다. 앞 문장의 거의 유일한에서 거의가 붙은 이유는 혹시 새로운 인물이 발굴될 가능성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한용운은 27세에 강원도 백담사에서 출가했고, 39세(1917)에 백담사 오세암에서 좌선하다가 견성체험을 했다. 1919년(41세) 3ㆍ1운동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53세(1931)에 잡지 불교를 인수해서 사장이 됐다. 이 불교에 한용운의 좋은 글이 많이 실려 있다. 한용운의 불교관은 개벽 45호(1924)에 실린 내가 믿는 불교에 잘 소개돼 있다. 첫째, 불교는 스스로 믿는 가르침이다. 이는 믿음의 대상이 다른 것에 있지 않고 자기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이다. 둘째, 불교에서는 평등을 말한다. 이는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셋째, 불교에서는 마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마음이 육체를 지배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넷째,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을 널리 사랑하고 서로 구제할 것을 구체적 내용으로 한다. 이러한 한용운의 불교관 가운데 넷째 내용, 곧 불교는 모든 중생을 널리 사랑하고 서로 구제하는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이 그의 독립운동과 다른 사회운동의 이론적 기초가 됐다. 한용운은 동아일보 1925년 1월1일 칼럼에서 당시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두 가지 노선, 곧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노선의 충돌을 화해시키고자 한다. 한용운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당시 사상계를 대표하는 두 개의 흐름인데, 이 둘이 서로 반발하고 대립하고 있어서 여러 가지 혼돈이 생기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 대안으로 한용운은 이론을 버리고 실제적 관점(實地)에서 이 두 노선을 바라볼 것을 주장한다. 사회주의 운동에서 말하는 경제혁명이나 민족주의 운동에서 말하는 민족해방이 다 필요한 것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에 근거해서 서로 반발을 한다면, 사상(思想)이 우리를 망하게 하는 장본인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비유를 들면, 같은 배를 타고 가는 중인데 비를 만난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에는 이쪽이다, 저쪽이다 하면서 서로 가려는 방향은 있겠지만, 일단 폭풍우를 피하는 것이 제일이다. 그래서 한용운은 이러한 문제를 사상의 관점에서 보려고 하지 말고, 현실을 제대로 본 실행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한용운의 주장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경청할 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에도 여전히 정치 이데올로기에 근거해서 상대방을 비판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는 한용운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상, 곧 정치 이데올로기에 치우친 것이고, 현실을 제대로 본 실행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용운의 주장처럼, 실제적 관점에서 한국의 미래를 차분히 준비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를 기대한다. 이병욱 불교학연구회 부회장

[삶과 종교] 거룩한 구별

최근 이스라엘은 국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코로나 방역 실패라는 오명을 받은 나라가, 이제는 방역 선진국의 대열에 서있다. 이스라엘은 현재 백신 접종률 세계 1위 국가이다. 국민 절반 이상 코로나 백신 접종을 완료했다. 지난 18일부터는 실외에서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 코로나 백신을 직접 제조하지 않지만, 특유의 정치 외교력을 발휘해 다른 나라에 앞서 백신 확보에 성공한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아직 집단 면역을 꿈꾸며 백신 접종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이스라엘의 안정화는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저력은 이미 역사 안에서 입증됐다. 2세기 초 제2차 유다전쟁에서 패망한 이후 나라를 잃은 유다인들은 세계 각지에서 흩어져 살았지만, 그들은 어디에서 살든지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수세기가 지나 시오니즘을 앞세워 국가 재건 운동을 펼쳤고, 아랍인들의 거센 반발에도 그들 조상의 땅인 팔레스티나 지역에 1948년 국가를 설립했다. 인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줄 알았던 나라가 그 모습을 다시 드러냈으니, 이 역시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가 없다. 무엇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을까? 그들이 가진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여러 가지 요인 중 한 가지를 꼽는다면 선민(選民)일 것이다. 선민은 유다교의 선택 사상에 근거한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해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선민은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이자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다.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의식에서 비롯한 유다인들의 책임감과 사명감은 남다르다. 하지만 선민의식은 부정적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분명 내부적으로 응집력을 강화하고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지만, 지나친 선민의식은 외부와의 관계 단절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확신은 우월주의라는 왜곡된 현상으로 이어졌다.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팔레스티나인을 배척하고 고립시켜 버린 것은 하나의 좋은 예가 된다. 코로나 19로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기에 백신의 고른 분배보다는 국가의 우선적 이익과 자국민에 집중하는 미국은 이른바 현대판 선민주의로 물들어 있다. 수많은 국가가 백신을 구하고자 혈안이 됐고 각국의 외교라인은 이를 위해 가동되고 있다. 일부 언론을 통해서 보도된 바에 따르면 미국 내 백신 보급은 여유로운 상태이고 잉여 분량을 이용하는 관광 상품도 출시됐다. 아직 코로나의 공포와 위협에서 시련과 고통을 당하는 이들에게 이 소식은 공분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미국은 부와 힘을 가진 나라다. 코로나 시대에 강대국의 위상은 배가 됐다. 미국의 구별된 지위가 오용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구별은 독점적 혹은 배타적이어서는 안 되고, 포용적이면서 개방적이고 보편적이어야 한다. 선민은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고자 구별된 존재들이지, 자신만의 집단적 이익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는 아니다. 구별은 다름이라는 결과를 만들었지만, 그 다름은 서로 도와주고 보완하며 희망을 주는 매개(媒介)가 돼야 할 것이다. 정진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실재 세계는 이중적이고 중첩적이다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선거가 끝났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슬픔이 교차하며, 우리 사회가 균열되고 있다. 양측 모두에게 지혜가 필요한 때라 생각한다. 나는 보이는 현상 너머 실재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여러분은 토끼와 오리 그림을 아는가? 이 그림은 두 가지 동물이 겹쳐 보인다. 어떻게 보면 긴 귀를 가진 토끼고, 다르게 보면 길쭉한 부리를 가진 오리다. 같은 그림인데도 토끼를 볼 땐 오리가 보이지 않고, 오리를 볼 땐 토끼가 보이지 않는다. 보는 것은 같지만 보이는 것은 때에 따라 다르다. 같은 것을 보면서 다른 인식적 결과를 얻는 것이다. 왜 그러할까?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그림에서 무엇을 보려고 하느냐다. 토끼를 보려고 하면 토끼가 보이고, 오리를 보려고 하면 오리가 보인다. 다른 하나는 어떤 인식체계를 가지고 보느냐에 달렸다. 우리는 주어진 감각자료들을 종합정리하고 해석하는 두뇌신경망을 가지고 있는데, 이 두뇌신경망이 어느 것에 대한 인식체계를 갖추고 있는지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즉 보는 이의 두뇌신경망이 토끼에 더 많이 노출된 사람은 토끼를, 오리에 더 많이 노출된 사람은 오리를 보게 되는 것이다. 토끼와 오리와 마찬가지의 현상을 일으키는 그림이 루빈의 꽃병 그리고 네덜란드 화가 에셔(M.C. Escher)의 천국과 지옥 그림이다. 천국과 지옥에서 흰색의 형태에 주목하는 사람은 천사를 보게 되고, 검은색 형태에 주목하는 사람은 악마를 보게 된다. 루빈의 꽃병 에서 가운데의 검은 물체를 보는 사람은 하나의 꽃병을 보게 되고, 양옆의 흰 물체를 보는 사람은 마주 보는 두 사람의 옆얼굴을 보게 된다. 단순히 재미있는 그림이라고 넘기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해보자. 우리가 그 그림들을 서로 다른 사물로 인식하기 전, 그림의 실재는 무엇인가? 토끼도 오리도 아닌, 꽃병도 사람도 아닌,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우리 의식에 규정되기 이전의 그 실재 대상,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비친 세계 너머, 일상적 상식의 틀 너머, 개념적 규정 너머, 주객분별의 의식 이전, 일체 분별 이전의 있는 그대로의 실재 세계는 무엇인가? 18세기 독일 철학자 칸트(I. Kant)에 따르면,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범주의 인식형식에 의해 규정된 현상이다. 그리고 특정 현상으로 규정되기 이전에 물 자체(Ding an sich)가 있고, 그것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칸트가 알 수 없다고 한 것은 바로 알 수 없다는 것을 안 것이라는 뜻으로 생각한다. 의식하기 전 위 그림들의 실재는 토끼도 오리도 아니고, 천사도 악마도 아니고, 사람도 꽃병도 아니다. 토끼이자 오리이며, 천사이자 악마이며, 사람이자 꽃병이기도 하다. 의식 이전의 실재 세계는 평범한 사유논리를 넘어선다. 모순율도 배중률도 통하지 않는다. 의식 이전 실재 세계는 이중성과 중첩성의 세계다. 시장 선거로 당선된 이나 탈락한 이나, 승패가 갈렸다고만 생각하며 일희일비하지 말고 더 멀리 그리고 더 깊이 통찰하고, 자숙하며 각자의 위치에서 시민을 위해 각자 할 일을 하기 바란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천책의 사상과 현대적 함의

고려시대의 무신 집권기 시대에 불교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 중의 하나가 백련결사(白蓮結社)이다. 백련결사는 원묘국사 요세(1153~1245)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데, 당시의 불교문화에 대해 반성하고 새로운 수행기풍을 세우고자 노력했다. 이 백련결사의 전통을 이은 사람 가운데 천책(天, 1206~?)이 있고, 그의 저술로 호산록(湖山錄)이 전한다. 이 호산록은 고려시대 천태종의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천책의 사상 가운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 가지이다. 우선, 사상의 유연성이다. 천책은 천태종에 속한 인물이지만, 화엄종의 사상도 수용하고 선종의 사상도 포용한다. 일반적으로 천태종의 사상을 추종하면, 나머지 불교사상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천책은 그렇지 않았다. 천태종의 사상과 화엄종의 사상을 아울러 드높였고, 선종의 장점을 받아들여서 주변 사람에게 공부하도록 권했다. 천책의 이러한 유연한 자세는 불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유교와 도교에 대해서도 포용적인 태도를 취해서 유교, 도교, 불교가 일치한다는 삼교일치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천책의 사상에서 주목할 또 다른 점은 주체적인 관점이다. 천책은 천태종의 위대한 인물을 선정할 때 고려출신의 보운(927~988)에 주목했는데, 이는 중국 천태종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다. 보운은 중국에 건너가 천태사상을 공부하고 중국에서 천태사상을 널리 전하고 고려에 돌아오지 못했다. 보운이 어느 정도 역사적 자취를 남긴 인물이지만, 중국의 천태종에서는 보운의 활동에 대해 평가해 주는 데 인색했다. 그에 비해 천책은 중국의 평가와는 다르게, 천태종의 역사에서 큰 역할을 한 인물로 보운의 위상을 인정했다. 이런 점에서 천책의 사상에서 주체적인 안목을 읽을 수 있다. 당시 문화의 중심이 중국이었고 이 문화의 중심과 다른 관점을 갖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유하면, 요즘 서양철학을 전공하면서 미국, 서구 유럽과 다른 견해를 갖기 쉽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천책의 사상이 갖는 현대적 함의는 어떤 것일까?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부족한 부분은 자신의 문화에 대해 주체적 태도를 가지면서도 또 새로운 문화에 대해 문을 여는 유연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둘을 동시에 갖추기는 쉽지 않다. 개인의 경우에도 사고방식이 유연해서 다른 문화를 잘 수용하는 쪽이라면, 아무래도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쪽에서는 약점이 있기 마련이다. 또 자신의 주장을 강력히 추진하는 데 강점이 있다면, 자신의 주장과 다른 생각을 수용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한 사회의 문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체성을 강조하다 보면 유연한 태도를 잃기 쉽고, 또 반대로 유연한 태도에 방점을 두면 주체적인 측면이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이 두 가지 태도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할 때 더욱 성숙한 문화를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병욱 불교학연구회 부회장

[삶과 종교] 백신 운동과 형제애 실천

2021년 한국 천주교회는 백신 나눔 운동을 전개한다. 일부 지역(교구)과 단체에서 시작한 운동을 전국 차원에서 전개하기로 한 것이다. 백신 나눔 운동에 대한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결정은 두 가지 배경에서 설명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백신 나눔 운동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해, 그리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시복시성을 준비하면서 애덕 실천을 통해 두 신부님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결의한 공동체적 실천 과제다. 이러한 한국주교회의의 결정에는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연대 의식이 작용했다. 교황은 지난해 10월 회칙 『모든 형제들』을 발표하면서 인간의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를 강조했다. 백신 운동으로 모은 기금은 교황청으로 전달돼 백신이 필요한 가난한 나라에 우선으로 전달될 예정이다. 백신 접종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19 대유행의 종식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까지 100개 이상의 국가에서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됐고, 백신 약 3억 회분이 소요됐다. 일부 국가는 다량의 백신을 선제적으로 확보해 전 국민 대상 접종을 하고 있지만, 백신 확보 경쟁에서 밀려난 저개발 국가들은 백신이 도착하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현실이다. 영국의 경제분석기관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은 2023년까지 전 국민 대상의 백신 접종이 불가능한 국가도 있을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전망하고 있다. 집단 이기주의로 코로나19 백신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백신 보급의 불균형 현상을 예견했는지 지난해 8월19일 일반 알현에서 코로나19 백신은 모든 사람,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백신의 차별 없는 공급을 호소한 바 있다. 백신의 차별적 보급으로 파생된 국가 간 불균형 현상을 바라보며 사회 정의의 부재를 절감한다. 인류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백신이었지만, 백신 보급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자취를 감췄다. 집단 이기주의가 극단적으로 심화하고 있다. 차별 없는 행복한 세상은 요원한 것인가? 사회 정의는 행복한 세상을 함께 만들기 위한 전제(前提)이다.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 무엇보다도 인간 존엄성이 존중돼야 하며, 연대성 또한 실현돼야 한다. 모든 사람은 천부적으로 존엄하므로, 이에 따라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기 위해 모두 함께 서로 돕고 배려하며 보완해야 한다. 코로나19 시대, 어느 때보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를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인류 공동체가 처한 위기 속에서 국가와 인종, 종교를 초월하는 형제애의 실천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한국천주교회가 전개하는 백신 나눔 운동은 코로나 위기를 극복해 행복한 사회를 만들려는 하나의 실천적 노력이며 인류 공동체를 향한 간절한 호소일 것이다. 정진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된 사람은 함께 지내는 사람에 대해 신중하다

삶에서 사람을 사귀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교류하느냐에 따라 자기 삶의 방향이 바뀌기도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돌아볼 때 현재의 나를 있게 해준 스승님들을 생각하게 된다. 여러 스승님 가운데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선생님들이 계신다. 그 가운데 가장 고마우신 분은 나의 지도교수님이시다. 선생님께서는 학부 시절부터 내가 더 깊은 사색에 빠지게 하고, 대학원을 진학하고 계속 공부할 수 있는 동기를 주신 어른이다. 나는 학부 4학년 1학기 중반에 접어들 무렵 대학원 진학 상담 차 우리 학교 동양철학 담당이셨던 선생님을 댁으로 찾아뵀다. 요즘에는 선생님 댁으로 선생님을 찾아뵙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그리 이상한 풍경이 아니었다. 집 주변을 산책하며 이런저런 말씀을 드렸다. 선생님은 나는 가르칠 게 없다. (선생님은 자신이 사는 연립주택의 화단에 돋아나는 새싹을 가리키며) 저 새싹들이 더 많은 가르침을 줄 수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선생님은 한 대학을 추천해주셨다. 나는 선생님의 추천을 따르지 않았다. 나는 가르칠 게 없다는 선생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알 수 없는 전율이 있었다. 그런 말씀과 가르침을 내게 주시는 선생님은 추천해주신 그 대학에 계시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오히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선생님께 더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이 말씀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것은 내게 하나의 울림이고 하나의 화두다. 이 이야기를 25년이 훌쩍 지나서 말씀드렸는데, 기억은 못 하시고 즐겁게 웃으셨다. 나는 선생님께 감히 따라할 수 없는 격조와 절제를 느낀다. 한 번은 나만 못한 이를 사귀지 말라는『논어』에 나오는 공자 말씀에 대해, 참 이상한 말이라고 하시면서, 그럼 아무도 사귀지 못할 거라는 것이다. 자기(a)보다 잘난 사람(b)이 자기(b)만 못한 사람을 사귀지 않으면 자기(a)는 사귈 사람이 없고, 결국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공자의 이 말씀에 대해, 누구나 각자의 장점이 있고 배울 것이 있으니, 자기만 못한 벗이란 없다로 해석하셨다. 나는 당시 이 해석이 참 그럴듯한 해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면서, 스스로 누구로부터도 배울 수 있는 낮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선생님 해석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마음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일반 사람이 가지는 마음은 아니기 때문이다. 『명심보감』에 공자의 말씀이라고 하며 전해지는 말이 있다. 착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난초가 있는 방에 있는 것과 같다. 시간이 한참 지나면 그 향기를 맡지 못하지만, 그에게 동화된다. 나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생선 가게에 들어간 것과 같다. 시간이 한참 지나면 그 냄새를 맡지 못하지만, 그에게 감염된다. 빨간 물감을 담은 것은 붉어지고 검은 물감을 담은 것은 검어진다. 그래서 된 사람은 반드시 함께 지내는 사람에 대해 신중하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조계종 ‘선원청규’의 보청과 시민의식

조계종은 한국불교의 최대종단이다. 한국불교사를 돌이켜볼 때 조선전기에 불교는 억압을 받아서 불교의 모든 종파가 사라졌다가, 일제강점기인 1941년에 이르러서 조선불교 조계종이 등장했고, 현재의 조계종은 이것을 계승한 것이다. 조계종의 특색 가운데 하나는 선(禪)수행에 있고, 여름철과 겨울철 안거(安居) 때마다 여러 곳에서 선승(禪僧)들이 수행에 몰두하고 있다. 조계종의 선승을 대표하는 모임에서 2010년에 『선원청규』라는 책을 발행했다. 원래 선원청규라는 것은 선수행을 하는 수행자들이 지켜야 할 규정을 담은 책이고, 이는 중국의 송나라 시대에 저술된 것이다. 지금 말하는 『선원청규』는 과거의 내용을 계승하면서도 현재 상황에 맞게 다시 내용을 수정하고 보완한 것이다. 여기서는 『선원청규』의 여러 내용 가운데 보청(普請)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보청은 사찰에서 수행하는 선승들이 균등하게 노동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노동만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노동을 통해서 정신세계를 고양하는 수행의 측면도 고려한 것이다. 과거에 선수행을 강조하는 사찰에서는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기 어려웠어서 자급자족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사찰의 구성원들이 모두 나서서 노동을 통해서 먹거리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보청이 생긴 이유이다. 그런데 2010년에 간행된 『선원청규』에서는 현대의 상황에 맞춰서 보청의 의미를 확대하고 있다. 단순히 사찰에서 노동하는 것만을 보청이라고 하지 않고, 사찰 바깥으로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독거노인 돌보기, 곧 홀로 사는 노인을 돕는 것도 수행자가 실천해야 할 일이라고 보고 있다. 다른 예를 들면, 농촌봉사활동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농촌에 가서 봉사활동을 통해 일손을 돕고, 농촌에 사는 노인들을 부모님처럼 돌보는 일을 하는 것이다. 또 사찰에서 불교적 가치에 의거해서 생태운동을 하는 것도 보청에 속하는 것이고, 사찰에 있는 불교문화재를 널리 알리는 활동, 곧 문화재해설도 보청에 포함된다. 이처럼 보청의 범위를 확대한다면, 이는 시민의식과 만나게 된다. 시민의식은 국가구성원으로서 가져야 하는 공통된 생활태도 또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약자를 돕고 배려하며, 자연을 보호하는 활동에 참여하고, 한국의 전통을 지키고 알리는 일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권장할 만한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이러한 시민의식이 점차로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시민의식의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할 상황에 놓여 있다. 『선원청규』에서 제시하는 보청은 바람직한 행위를 하라고 규정하는 것만이 아니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정신세계를 고양시키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불교에서 주장하는 형식적 내용을 수용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시민의식을 지켜가야 한다고 말할 때에 사회의 발전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의 내면세계를 풍부하게 하는 측면도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할 때 시민의식을 더욱더 고양하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병욱 불교학연구회 부회장

[삶과 종교] 시종, 시대를 따름

예수가 살았던 시기의 유다인은 코르반 규정을 준수하였다. 이에 따라 소유 재산을 코르반(qorbn),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로 서약하면, 이 재산은 하느님께 귀속돼 그 외 어떤 목적으로도 사용할 수 없었다. 코르반 규정을 둘러싼 논의는 예수 시대를 지나 기원후 2세기 무렵까지 이어졌다. 누군가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봉헌을 위하여 코르반 서약을 하기도 하였지만, 다른 누군가는 분별없이 혹은 부정적 의도 하에 서약을 맺어 사회적 혹은 종교적 갈등을 야기하였기 때문이다. 랍비들은 계명의 준수와 코르반 서약의 준수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들에게 먼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것을 가르쳤고, 서약의 엄격함에 묶여 있는 이들에게는 규정 준수의 면제를 허락하기도 했다. 2021년 코로나19가 세상의 변화를 재촉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는 오늘날의 노력도 우리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 1월 화상 제사로 진행된 퇴계 이황 선생(1501~1570)의 450주년 불천위 제사는 좋은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퇴계 문중을 포함해 퇴계 선생을 존경하는 수많은 이들이 퇴계 종택(宗宅)에 모여 선생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제사를 지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제한 속에서 소수의 제관만이 종택에 모여 제사를 바치고, 다른 사람들은 비대면으로 제사에 참여하였다. 작년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이색적 풍경이다. 도산서원은 코로나 시대를 맞아 심각한 도전을 받았지만, 새로운 시험을 통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시대를 따르라는 퇴계 선생의 가르침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선생은 의어금이불원어고(宜於今而不遠於古: 오늘날에 마땅하고 옛날과 멀리 벗어나서는 안 된다)를 설파하며, 전통 예법의 기본을 존중하면서도 현실의 상황에 맞출 수 있는 개방성과 유연성을 강조하였다. 코로나가 지나간 그 자리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할 수는 있지만,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이른 바 새로운 시대가 찾아올 것이다. 그 시간이 찾아왔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옛것에 대한 그리움이나 집착이 아닌, 새것을 수용할 수 있는 용기이다. 시종(時從), 곧 시대를 따르라는 퇴계 선생의 가르침은 포스트 코로나를 준비하는 우리의 길잡이가 아닐까? 정진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이치에 잘 통달한 이는 마땅함만을 따를 뿐

고려 말과 조선 초 시기 가장 중요한 불교학자는 아마도 함허당 기화(涵虛堂己和, 1376-1433)일 것이다. 그는 고려조의 왕씨에서 조선조의 이씨로 왕조가 교체되던 시기에 산 인물이다. 이때는 왕조만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이념이 불교에서 유교로 교체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에 고려조의 불교 교단은 조선조에 선종으로 강제로 통폐합되고 축소되는 과정을 거쳤다. 이외에도 유학자들은 강력하게 배불론을 전개하며 불교의 진리성에 대해 도전했고, 승려들은 이에 대해 응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응답을 한 이는 드물다. 불교적 입장에서 이에 대한 응답을 가장 충실하게 더 나아가 유일하게 한 이가 기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의 우리는 그 대 전환기 시대에 기화가 전통을 어떻게 계승하고, 새로운 전통을 어떻게 세워나갔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기화는 기본적으로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의 사상을 이어받고 있다. 기화는 불교 진리의 가르침에 근본적으로 선과 교의 차별이 있다고 보지 않았다. 이는 지눌의 선교일치(禪敎一致)의 정신에 뿌리를 두는 것이다. 지눌은 궁극적으로 교학을 버리고 선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에, 기화는 선이나 교라는 분별적인 의식도 버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당시 유학자들의 배불론에 대해 기화는 호불론을 전개했다. 그는 승려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불교 우위 입장에 있지만, 유교와 불교가 본질적으로 동일성이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기화의 『현정론(顯正論)』에 나오는 이야기 일부를 정리해보겠다. 유교 특히 『대학(大學)』에서 명덕(明德) 즉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강령이다. 유교의 밝은 덕에 해당하는 것이 불교에서는 묘정명심(妙精明心) 즉 묘하고 깨끗하며 밝은 마음이라는 것이다. 모든 중생에게 내재돼 있는 바로 이 마음을 알아차려 일깨우게 하는 것이 중생 구제의 불교라면, 모든 사람들이 그 자신 안에 갖추는 그렇지만 아직은 숨겨져 있는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이 중생 교화의 유교다. 기화는 불교와 유교가 말하는 이치가 이미 같다고 말하고 있다. 기화는 순임금은 물어보기를 좋아했고, 가까운 데에 있는 말을 살펴 악을 감추고 선을 드러내기를 좋아했으며, 우임금은 훌륭한 말을 들으면 절을 했다고 하며, 만일 순임금이나 우임금이 부처님 말씀을 만났다면 부처님 말씀을 아름답게 여길 뿐만 아니라 부처님 말씀에 의지하였을 것이라고 역설한다. 기화는 더 나아가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의 가르침이 은밀히 서로 들어맞아 마치 한 입에서 나온 듯하다고 고백한다. 현대의 우리에게 기화의 다음 말은 여전히 큰 울림을 준다. 그가 가리키는바, 훌륭한 사람이란 무엇인지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 자기만이 전적으로 옳다 하고 남을 소홀히 하며, 이것을 옳다 하고 저것은 틀리다 하는 것은 사람의 보통 마음이다. 그러나 이치에 잘 통달한 이는 마땅함만을 따를 뿐이다. 이런 이가 어찌 남과 나, 이것과 저것으로써 옳고 그르다 하는 사람이겠는가?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누가 세상을 움직이는가

성경에 다니엘이라는 인물이 있다. 나라가 바벨론에게 망하여 포로로 끌려갔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총명이 워낙 뛰어나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측근에서 모시게 됐다. 어느 날 괴상한 꿈을 꾼 왕이 해석을 원하는데 아무도 해석하지 못했다. 그때 다니엘이 그 꿈을 해석하여 줬다. 그런데 그 해석이 참 맹랑하다.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나 칠 년 동안 들짐승과 살며 소처럼 풀을 뜯어 먹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천하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회복되고 왕의 나라가 견고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정말 꿈의 내용이 그렇더라도 사실을 바르게 말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담대하게 바른말을 왕에게 전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다니엘은 서슬 퍼런 왕에게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고 왕은 그 말을 귀담아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그 꿈을 꾼 지 열두 달 후에 꿈대로 이뤄졌다. 왕은 사람들에게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뜯어 먹고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은 독수리 털 같이 손톱은 새 발톱처럼 됐다. 그리고 칠 년이 지난 후 왕의 총명이 돌아와 회복하게 된다. 그때 느부갓네살 왕이 이런 고백을 한다.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왕은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해졌다. 영원한 하나님의 권세와 나라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 말에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의 권세는 순식간에 지나는 바람과 같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을 때 어떻게 했는지는 기록에 남을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할 수 없는 일들을 겁 없이 한다. 특히 영향력이 있는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어떻게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있다. 듣기 좋은 말만 따르면 필망(必亡)의 길로 갈 것이다. 쓴소리를 들을 줄 알면 잘못된 삶의 자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권세를 누릴 때, 권력에 취해 중심을 못 잡으면 바람결에 지나간 자신의 부끄러운 흔적을 고통스럽게 돌아보게 될 것이다. 앞선 사람들이 남긴 흔적에서 배우지 못하면 불행한 역사는 반복된다. 사의 교훈을 보고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혐오하던 삶을 반복하게 된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나마 감사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제부터라도 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안용호 기흥지구촌교회 담임목사

[삶과 종교] 불교개혁론의 대중불교와 민생 안정

흔히 일제강점기라고 하면 암흑시대와 같은 이미지를 갖는 것이 보통이지만, 불교의 경우에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 일제강점기 때에 불교문화는 상당히 진전된 모습이었다. 이때 여러 가지의 불교개혁론도 등장하였다. 여기서는 불교개혁론 가운데에 대중불교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조선불교의 개혁안」(1931년)에서 대중불교의 건설을 주장했는데, 여기서 대중불교는 불교사상 등을 대중이 공부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가 인간사회를 떠나서 인적이 드문 산간벽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세간 속으로 파고들어가 세상 사람을 구제한다는 것이다. 한용운은 당시의 불교가 사찰의 종교이고 승려의 종교라고 비판하면서 산간에 있는 불교를 거리의 불교, 곧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불교로 바꾸고, 승려의 불교를 대중의 불교로 바꾸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한용운만이 제시한 것이 아니고 불교개혁론자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이었다. 한용운은 대중불교의 건설을 위해서 그 방법의 하나로서 불교도의 생활을 보장하자고 주장한다. 당시의 일반 대중이 바라는 것이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 곧 생활을 보장하는 데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점을 무시하고 불교의 교리만을 전하고자 한다면 이는 사회현실을 무시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한용운은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한용운만이 제시한 것이 아니다. 3ㆍ1운동 때에 33인의 대표로 참가했던 백용성(1864~1940)도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도시에서는 공장을 세워서 불교인을 취업시키고 포교사가 이들에게 불교를 가르치도록 하고, 농촌에서는 생산소비조합 등을 세워서 농민의 생활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불교를 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록 이들의 주장이 현실에서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경청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2021년 새해의 여론조사에 차기 대통령으로 경제를 살릴 사람을 가장 선호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국민의 31.9%가 경제를 살릴 사람이 차기 대통령이 되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바람은 20대와 30대의 젊은 층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20대의 절반 정도가 경제를 살릴 사람을 선호하고, 30대는 33.4%가 경제문제에 능력 있는 사람을 희망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의 안목으로 보자면 대중불교의 건설을 위해서 불교도의 생활을 보장하자고 주장한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불교개혁론에 따르면 일반 대중의 경제적 삶이 안정되고 윤택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일반 대중의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추상적 구호는 그다음 순위에 있다. 불교개혁론자들이 이와 같은 입장을 추구하였다면, 오늘의 정치인에서는 더욱더 요구되는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민생안정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고, 그 바탕 위에서 여러 가지 개혁의 깃발을 휘둘러야 대다수 국민의 호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의 불교개혁론자도 생활의 보장을 우선시하였는데, 현실의 정치에서 민생의 안정을 추구하는 데 부족한 점이 나타나는 것은 안타까운 현상이다. 이병욱 불교학연구회 부회장

[삶과 종교] 균형을 위한 나눔

인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점으로 시대를 구분한다. 예수 탄생 이전(BC: Before Christ)의 시기가 있었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시기는 예수 탄생 이후, 곧 주님의 해(AD: Anno Domini)에 속한다. 이러한 시대 구분 방식은 예수라는 인물이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을 반영하는 하나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2020년이란 시간이 흐른 시점에서 인류는 커다란 역사적 전환점을 마주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코로나 19가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2020년 전 세계를 휩쓸어버렸고 여전히 그 힘을 잃지 않으며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수많은 이들이 코로나 이전의 시기를 그리워하지만, 회귀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인류가 처한 시대적 위기를 바라보며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스먼은 세계가 코로나 이전(BC: Before Corona)과 코로나 이후(AC: After Corona)로 나뉠 것이라 주장한 바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 12월 21일 BOK 이슈노트 코로나19 위기 이후의 성장불균형 평가를 발행하면서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심화된 성장 불균형 현상을 주목하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 위기는 과거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다. 연구자들은 이번 위기가 취약부문에 영구적 충격을 미칠 수 있으므로 성장 불균형은 일시적 현상으로 끝나지 않고 장기간 지속될 수 있으며, 이럴 때 부문 간 불균형과 양극화가 심화될 것이라고 분석하였다. 부유한 계층과는 달리 저소득층을 포함하는 취약 계층은 가중되는 생활고를 피할 수 없게 되었으니 실로 안타까운 심정이다. 코로나가 초래한 난국을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까? 국가 차원에서 위중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묘수도 필요하겠지만, 취약 계층을 위하여 정책 여력을 집중해야만 한다. 이와 함께 사회 구성원 모두의 형제적 참여가 긴요하다. 위기 상황에 대한 공감대 형성, 코로나로 인하여 소외된 이들을 위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나눔이라는 적극적 실천이 요구된다. 공동체는 나눔의 실천 없이 존속할 수 없다. 함께 소유하고 나누었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사도 2,42-47 참조)은 오늘날 코로나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표본이다. 경제적 균형을 강조했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나누고 싶다.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어 나중에는 그들의 풍요가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준다면,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2코린 8,14) 오스트리아 유학 시절 자주 들었던 Vergelts Gott!이란 말이 떠올랐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갚아주신다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거나 기부를 받았을 때, 감사합니다.라는 표현보다는 하느님께서 갚아주신다.라는 인사를 더 많이 한다. 이 짧은 문구는 깊은 신앙심에 뿌리를 두는 감사의 표현이다. 그들은 소유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복음적 정신과 가치를 실천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가진 것을 나누는 일에 개인적 이익과 명예는 시선에서 멀어져 있다. 코로나가 초래한 사회경제적 불균형의 위기에서 필요한 것, 그것은 소유한 것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과 실천이 아닐까? 정진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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