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연기전공 입시

올해 수능일 역시 참 추웠다. 수능일 한파의 전통이 어디 가랴 싶을 추위였다. 수험생들로서는 성적에 대한 부담과 살을 에는 추위로 이중의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그들의 가족들 역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에 대한 과잉 상징에 목매는 한 매년 11월에 어김없이 찾아올 숙명의 빙점이라 하겠다. 수험생들 모두가 십 수 년 동안 쌓아왔던 실력을 잘 발휘했기를 짠한 심정으로 바랄 뿐이다. 사실 올해 대입고사는 수능일 이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이미 10월에 수시고사가 치러진 것이다. 필자가 속한 대학에서도 수시실기고사가 진행되었다. 10명의 연기전공자를 뽑는 연극영화과 고사에 수백 명이 지원했다. 8시 못 미친 이른 시간부터 초조한 표정으로 대기실에서 서성이던 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학부모 대기실에도 절박함이 밴 오만 가지의 표정이 있었다. 문화산업의 시대에 연기자로 살면서 명예와 부를 누리고 싶은 지원자들로 넘쳐나는 대입고사장 모습은 이제 낯설지 않은 늦가을 풍경이 되었다. 실기고사 연기에는 어떤 흐름이 나타난다. 남학생들은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택하는 경우가 많고, 여학생들은 <한 여름 밤의 꿈>을 포함한 세익스피어의 작품들, <벚꽃동산>, <갈매기> 등 안톤 체홉의 일련의 작품들과 존 필마이어의 <신의 아그네스> 등을 즐겨 연기한다. 연극예술의 대표적인 명작들이 대본으로 선택되는 것이다. 진지하고 긴장된 표정으로 무대에 선 수험생이 명작 속의 인물이 되어 열연을 펼친다. 수험생은 혼신을 다하는데, 바라보는 심사위원은 안쓰럽다. 나이와 경험, 그들의 감성과 재능을 고려하지 않고 선택한 인물을, 어울리지 않는 거친 호흡과 표정으로 절규하듯 연기하는 걸 보면서 답답하고, 한숨이 나는 것이다. 물어보면 답은 비슷하다. 학원 선생님과 상의하여 6개월 안팎의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작품 설명을 청한다. 작품이요...? 생뚱맞거나 당황한 표정으로 자기 역할에 대해 설명한다. 역할이 아니라 작품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거듭 청하면 그 때서야 질문을 잘못 이해했음을 느끼나 대답하지 못한다. 그 작품의 작가 세계와 장르와 주제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다. 그와 상담을 했거나 지도했던 사람들 중의 누구도 역할 이해의 기본이 되는 면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연기전공자 심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험생의 가능성이다. 가능성은 확고한 신념과 전공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 물론 지원자의 용모로 드러나는 외적 조건이 고려될 수 있다. 입시학원 관계자들이 이 점을 염두에 뒀으면 좋겠다. 대학은 가능성 있는 학생들을 선발하여 능력을 키워주는 곳이다. 설익은 연기술로 격정에 쌓여 열연하는 수험생을 뽑아 잘못된 연기관과 습성을 고쳐주는 데 시간을 뺏기는 일은 비경제적이며 불합리한 것이다. 이것은 비단 연기실기에 국한되는 얘기는 아니다. 세월호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의 허약성은 기초에 소홀한 채 결과를 탐하는 비윤리적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수험생들이 자신이 연기할 작품 전체를 꼼꼼히 읽고, 그 작가에 대해 이해하고, 주제를 알고 연기했으면 좋겠다. 설령 이에 대한 질문을 받지 않더라도 말이다. 입시철은 만추의 계절이다. 연기 전공 수험생들이, 가끔은, 서투른 연기술 습득의 부담을 벗어놓고, 낙엽 고운 공원길을 걸었으면 좋겠다. 일상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인간사의 드라마를 생각해보는 여유를 즐겼으면 좋겠다. 좋은 영화나 연극을 감상하면서 소양을 쌓는 일도 입시에 도움이 될 것이다. 모든 일에 기초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김영빈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

[문화카페] ‘슈스케6’ 곽진언이 던진 자랑이 자랑스럽다

필자는 웬만해서 TV를 안 본다. 시간이 없어 못 보는 것이 더 맞을 수도 있지만 볼만한 것도 없고 기대도 하지 않아 외면하게 된다. 간혹 볼라치면 다큐프로 보는 정도일 것이다. 대학에서 학생들 수업하랴 여느 기업 버금가는 어렵고 많은 행정 따라가랴 거기에 더해져 작품연출이라도 들어가면 집은 순식간에 몇 달 동안 잠자러 들어가는 숙소가 되어 버린다. 불특정 다수 관객에게 감동이나 교훈을 주겠다고 작품을 만들면서 정작 필자가 받아야할 교훈과 감동은 어디서도 받고 살지 못하는 자기모순과 이율배반에 젖어있는 것이다. 그러 그렇게 살아가는 작금에 어제는 늦은 밤 집에 들어가 상황이 혼자가 되어 TV를 틀었고 화면을 이리저리 돌리다 약간 흥분한 진행자의 소리에 화면을 멈추고 들은 것이 슈퍼스타K6라는 프로였다. 거액의 상금이 걸린 서바이벌 음악프로그램이었고 곽진언이라는 최종결승에 올라간 젊은 친구의 자랑이라는 노래를 듣게 되었다. 그리곤 이내 곽진언의 오로지 통기타 하나에 의존한 깊은 울림이 있는 저음의 노래와 노랫말에 압도되어 난 멍하니 한참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대체로 생각하는 그런 속물적인 자랑이 아니었다. 그의 가사가 말하고 있는 자랑은 그동안 모른 체 하며 살아온 자랑이라는 단어에 가장 어울리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현대인에 있어 자랑이라는 단어는 그저 물질과 권력 힘 이런 따위들을 쟁취 했을 때 쓰는 그저 욕망의 곁에 두는 그저 그런 단어로 어느새 변질 되어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24살의 곽진언은 자랑이라는 단어를 가장 아름답게 쓰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진한 감동과 교훈을 전했다. 머리 나쁜 필자가 애써 가사를 좀 기억해 보면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의 품이 포근하게 위로가 될 수 있도록 사랑을 나눠 줄만큼 행복한 사람이 되면 그대에게 제일 먼저 자랑할거에요라고 말하고 있다. 자랑이라는 단어를 나만의 성취, 나만의 행복, 나만의 기쁨이 아닌 타인에게의 위로와 나눔을 줄 수 있는 진정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제 위치를 찾아 준 것이다. 마음이 따듯한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는 이 비극의 시대에 24세의 젊은 청년에게서 흔히 나올 수 있는 감성이 아니었다. 필자는 그가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어찌 살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경쟁만이 화두이고 승리만이 미덕이 되어버린 사회에 깊은 울림을 줬다. 그것은 자기 것만이 진리라는 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멋진 한방이 되었다. 적어도 필자가 바라보는 우리사회는 자극보다 정화가 필요하다. 이미 선정적이고 물질적인 인간본성의 영혼을 흐리게 하는 것이 훨씬 득세하는 세상에 대중은 지독히도 중독되어 있다. 젊은이들은 희망을 버렸고 늙어가는 민중들은 절망에 빠져들고 있다. 답은 자랑의 가사처럼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남을 위로 할 줄 알아야 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알게 되면 세상은 자랑할 만한 사회로 변화될 것이다. 그것이 한 청년이 어제 내게 준 아름다운 울림이었다. 장용휘 수원여대교수연출가

[문화카페] 지방자치단체 문화예술회관의 발전방향

최근 약 10여 년 동안 우리나라는 국민의 문화적 욕구 증가와 함께 문화공간의 건립 붐이 일었다. 1995년에 실시된 지방자치제로 인해 각 지방의 자치단체는 1區 1문예회관 건립운동이 추진됨에 따라 지역 간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문화기반시설 확충에 주력하게 되었다. 2000년 이후부터는 서울시을 및 수도권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문화예술 전문공간 신축 및 문화인프라 확충에 나서면서 각 지방자치단체들의 문예회관들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잇따라 개관을 하였다. 지방자치단체가 직접 운영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화예술회관은 많은 비용을 들여 건립을 하지만 그 운영에 있어서 고비용, 저효율에 대한 문제제기가 끊임없이 제기되면서, 최근에는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별로 주민들의 수요에 따르는 차별화된 지역밀착형 문화공간으로 운영이 된다면, 장기적으로 지역주민들의 문화예술적 성숙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 수도권 자치단체들의 공연장 건립에 있어서 최대, 최고를 고집하고 대형화하는 추세는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서울의 자치구 사례에서 보듯이 중소규모의 공연장운영이 우리나라에서 필요한 지역문화공간형태라 볼 수 있겠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현실은 수요가 한정되어 있으며 공급 또한 제한적이다. 향후 상당수의 자치구 및 시ㆍ도에서 문예회관들이 계속 건립되어질 예정이지만 하드웨어에 담을 소프트웨어의 부족이 커다란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역주민들의 다양한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지역사회의 특성에 맞는 문화공간 구성과 소프트웨어 공급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이다. 자치단체 문예회관의 건립이 단순하게 타 자치단체와의 전시효과적인 측면에서의 경쟁이 되어서는 안되며, 진정으로 지역민을 위한 문화예술 복지와 서비스 및 지역 문화예술의 진흥과 예술인들의 활동의 거점의 차원에서 선의의 경쟁과 협력을 하는 것이 상호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하겠다. 자치단체가 소유한 운동장 등의 체육시설과 문화회관 등 각종 체육, 문화시설을 통합 관장하는 운영형태로 시설관리공단 형태나 사업소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시설의 통합운영으로 기본경상비 등 운영경비절감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수익성이 높은 체육시설과 비교하여 공연시설은 공단 전체 수익적인 측면에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의 태생적인 한계의 이유로 그 운영에 많은 제약이 있다. 이의 대안으로 재단법인의 설립을 들 수 있다. 재단법인은 비용집행은 공공부문이, 실질적인 서비스 생산자는 민간이라는 점이 특징적이라 할 수 있으며 재정적인 면에 있어서 효율적인 재정운영이 가능하다. 재단법인은 재정적인 면뿐만 아니라 인사권 및 운영권에 있어서도 자율성이 상대적으로 높고, 직원 채용의 자율성 확보가 용이하고 전문가를 채용하여 전문성을 충분히 발휘하여 문화예술사업을 활성화 시킬 수 있다. 장기적인 측면에서 많은 비용을 들여 건립한 지방자치단체 문화예술회관 운영의 성공을 위해서는 민간의 경영방식을 도입한 형태의 재단법인으로의 운영형태의 변화가 현재로서는 최적의 방법이라도 볼 수 있다. 박평준 삼육대 음악학과 교수

[문화카페] 문화의 벤치마킹

경기도는 2011년부터 도내 미술, 박물관을 대상으로 전시, 교육, 체험 지원 사업에 대한 평가를 시행해 왔다. 2014년 경기도는 도내 미술관, 박물관 중 66개 미술ㆍ박물관을 지원하였고, 지원 사업에 대한 평가를 시행한 결과를 지난 10월 10일 발표하였다. 양평군립미술관은 1등으로 평가 받아 도내 최우수 미술관으로 선정되었다. 2013년에 우수 미술관으로 선정된데 이어 2014년에는 최우수 기관으로 선정된 것이다. 선정된 이후 양평 미술관의 어떤 점 때문에 최우수 기관으로 선정되었을까 하는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벤치마킹(bench marking)의 사전적 의미는 우수한 상대 기업의 경영 노하우를 통하여 기업 경영의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벤치마킹 대상 기업의 여러 경영 조건들이 충분히 검토 분석하여 자 기업의 새로운 경영 방식을 개발하려는 의도다. 양평군립미술관을 벤치마킹한다는 것은 양평미술관의 경영 노하우를 전례삼아 해당 자치단체의 미술관, 박물관 운영에 반영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벤치마킹을 통한 경영 개선은 운영 방식의 모방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더욱이 대상 기관의 방법을 그대로 따라하는 운영방식은 아류에 머물게 할 뿐이고 해당 기관의 운영 특징을 생산하는데 제약이 될 수 있다. 오히려 벤치마킹의 효용은 대상 기관을 살핀 뒤에 대상기관을 뛰어넘는 그 이상의 노력으로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역설이 더 요긴하다. 기획 전시와 연계하는 체험학습, 양평군 외각에 위치한 학교를 찾아가는 학교 수업은 벤치마킹의 결과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양평미술관 운영 원칙을 수행하려는 수단으로 실행되었다. 기획중심의 미술관, 참여하는 미술관, 창의미술관, 질 높은 미술관이라는 4대 운영 원칙 중에서 참여와 상호작용(interactive)의 원칙을 시행하기 위한 수단이 전시와 연계된 참여, 체험학습이고 찾아가는 미술교육이었다. 타 기관 운영 사례를 통해 해당 자치단체의 미술관 운영에 반영하고자 하는 벤치마킹이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타기관의 운영방식 노하우를 모방하는 것으로는 벤치마킹의 본래 의도를 살릴 수 없다. 우수 사례를 통한 수단, 방법의 모방 보다는 해당 기관의 명확한 미션과 설득력 있는 운영 비전의 능동적 설정이 우선이다. 이를 시행하기 위한 전략은 단순히 어떤 기관의 모범 사례를 좆기 보다는 명쾌한 미션과 달성 가능한 설득력 있는 비전을 명확하게 설정할 때에 가능하다. 미션과 비전이 제대로 설정되었다면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미션과 비전은 건립 전에 설정되어야 하고 또한 지속성 있게 유지되어야 한다. 자치단체장이나 기관장이 바뀔 때마다 바뀌는 미션은 더 이상 미션이 아니다. 기관장이 단명인 경우에는 비전의 실현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양방향 시대의 소비 행태가 문화 부분에도 일상화 되었다. 소비 욕구를 반영하는 운영은 지역 공공 미술관의 당면 과제이고 이러한 흐름을 벗어나기 어렵다. 미션과 비전 설정이 잘되어 있다면 이런 현상은 자연스럽게 반영될 것이다. 이철순 양평군립미술관장

[문화카페] 연극 ‘프랑켄슈타인’과 서양극 대본의 힘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연극 프랑켄슈타인을 최근에 보고 왔다. 영국 여성작가 메리 셸리의 소설을 영국 극작가 닉 디어가 각색한 대본을 바탕으로 제작한 이 공연은 2011년 영국 국립극장이 제작하여 무대에 올리면서 큰 인기를 누렸던 화제작이다. 한국 공연에는 대본 원작을 그대로 가져왔지만, 원작의 의도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약간의 변화를 시도했다. 특히 피조물역을 맡은 국내 배우의 혼신을 불사르는 연기가 아니었더라면 이번 공연이 빛을 발하지 못했을 정도로 그의 존재감은 특별한 것이었다. 원작 소설이 나왔던 1818년 당시 18살의 영국 소녀가 만들어낸 천재 과학자 프랑켄슈타인과 그 피조물의 이야기에는 후일 고딕, 공상 또는 호러와 같은 수식어가 진부하게 따라 붙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로부터 100년 후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가 표명한 실존주의 철학을 그 속에 담고 있다. 200년 전의 소설 속에서, 인간이 아닌 괴물의 눈을 통해 세상에 내던져진 인간의 삶과 부조리한 세상을 이미 얘기하고 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기존의 원작들을 발굴해 변형ㆍ발전시켜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고 극(劇) 대본을 창작해내는 극작가들의 힘은, 서양극(西洋劇)이 오늘날까지 세계의 공연예술 시장을 지배하게 만드는 원천이 되고 있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시작된 서양극은 BC 5세기 디오니소스 제전으로부터 기원하는데, 그때부터 극 안에서는 이미 극의 매체인 말과 음악의 주도권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로 대사 중심의 언어극(연극)과 음악이 주도하는 음악극은 서로 경쟁하기도 하고 때로는 협력하면서 서양극의 역사를 이끌어온 두 축이 된다. 중세 천년의 암흑기를 거치며 소멸한 듯 보였던 음악극의 형태는 르네상스 시대를 맞아 이탈리아에서 오페라라는 형식으로 부활하여 언어극 무대의 세력을 넘어서게 되었다. 음악혁명가이자 작곡가였던 몬테베르디가 오페라를 급진적으로 발전시켜 오늘날의 오페라 양식이 자리 잡는데 중요한 기틀이 만들어 졌다. 한편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오페라가 태동하던 16세기 후반 영국 런던에서는 언어극이 기지개를 펴게 되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이 바로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탄생과 그의 위대한 창작활동이었다. 셰익스피어가 초석을 마련한 언어극 주도의 전통, 즉 탄탄한 문학적 대본을 바탕으로 한 연극의 전통이 지배적인 위상을 차지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서양극이 장구한 역사 속에 언어극과 음악극으로 분리되면서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여 각자의 길을 걷게 되지만, 어떤 양식에서건 극(劇)의 바탕이 되는 대본은 그 작품의 질과 품격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힘으로 작용해 왔다. 450년 전에 태어난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바탕으로 재창조된 극(劇) 대본이, 연극, 오페라, 뮤지컬 등 다양한 양식의 공연예술을 위해 얼마나 많은 활약을 해왔는지 생각해 본다면, 서양극의 힘의 원천은 원작과 함께 창조적으로 각색된 또 하나의 예술, 대본에서 온다고 얘기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연극 프랑켄슈타인은, 연극이 발달한 영국의 전통과 그 것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극(劇) 대본 창작의 힘이 새삼스레 느껴지는 공연이었다. 임형균 톤마이스터

[문화카페] 국제영화제

19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일전에 끝났다. 해운대와 서면, 남포동에 넘쳐났던 영화제 참관인들은 지금쯤 일상 속으로 돌아가 분주할 것이다. 그때 거기서 만났던 드라마와 환상세계의 여운을 가끔은 되새겨 음미하면서 다음 영화제를 기약하기도 할 것이다. 영화 속에서만 볼 수 있었던 유명 배우를 해운대의 밤, 조는 듯 몽롱한 가로등의 산책로에서 스치기라도 했다면 감상의 정도는 말로 다할 수 없으리라. 그런 경험은 보통 사람들을 꿈같은 환상의 세계 속으로 인도하는 것이니 국제영화제가 있어 가능한 일이겠다. 세계적으로 국제영화제는 헬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리고 국내에도 수십을 헤아리는 국제영화제가 매년 열린다. 이런 영화제가 있었나? 할 정도로 생소한 영화제를 만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국제영화제가 너무 많다는 여론도 있다. 그럴 때면 그들 신생영화제들이 생존을 위해 겪고 있을 여러 부대낌을 생각하며 동병상련의 기분을 갖기도 한다. 사실 국제영화제의 존재 의미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최근의 영화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개중에는 일반 극장에서는 볼 수 없는, 상업성은 부족하나 독창적인 영화들이 있다. 영화애호가들에게 폭넓은 영화향유의 기회가 제공되는 것이다. 신인 영화인들로서는 발표의 장에서 얼굴을 알리는 기회를 갖는다. 영화역사를 빛낸 거장들의 회고전을 열어 그들의 예술혼을 기리기도 한다. 게다가 영화인들이 모이니 시민들이 그들을 직접 만나는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다. 마켓이 있어 영화를 파는 사람들도 좋고, 사는 사람들도 골라잡아 선택하는 편리함이 있다. 전문영화인들이 모여 세계영화의 흐름을 읽고, 영화의 길을 토론하는 컨퍼런스가 열린다. 덩달아 항공, 숙박, 유통, 관광 등이 활성화 된다. 개최지의 세계화는 덤이다. 이런 점들이 국제영화제가 많아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들을 보면 앞의 사실들이 선명해진다. 프랑스의 깐느, 이탈리아 베네치아, 독일 베를린영화제 등을 세계 3대영화제라 한다. 이중 가장 규모가 큰 깐느영화제는 프랑스 남부, 지중해변의 인구 7만의 작은 어촌도시 깐느에서 1946년에 시작되었다. 예술영화를 존중하는 이 영화제는 세계적인 감독, 배우들이 기꺼이 참석하는 권위 있는 영화제다. 약 60만원을 지불해야하는 마켓뱃지를 구입하는 사람들만 해도 2만5천여명을 헤아리는 큰 영화제다. 일반 관람객과 관광객들을 더하면 이 도시의 인구보다 많은 방문객들로 기간 동안 북새통을 이룬다. 이런 환경을 토대로 깐느에서는 국제방송제, 국제포르노영화제 등이 이어진다. 2011년 11월에는 G20정상회담이 이곳에서 열렸다. 인구 7만의 작은 도시가 세계적인 컨벤션 도시로 역할 한 것이다. 실로 영화와 영화제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성공사례라 할만하다. 국내에 국제영화제가 여럿이다. 깐느가 되기를 꿈꾸는 도시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디나 깐느가 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영화제의 명분과 전략, 이해와 투자를 거듭하다보면 깐느 근처에 못가란 법도 없을 것이다. 개최국 문화의 수준이 세계적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충족할 수 있다면 말이다. 김영빈 인하대 교수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

[문화카페] 내 안전 내가 지켜야 한다

이번에는 판교 야외공연장에서 일어난 환풍구붕괴다. 마우나 리조트붕괴, 세월호참사, 고양종합터미널화재, 군의 엉터리고문훈련, 홍도유람선 좌초 등 인재로 인한 대형 참사들이 잊혀 지기는 고사하고 아직 해결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또다시 지난주 금요일 일어난 판교 야외공연장 환풍구 추락 사고는 안전 불감증에 정점을 찍는 초원시적 범후진국적 재난사건이다. 가히 참사공화국이라 불러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가 한심한 선장과 선원들에 더해져 정부의 최악의 무능한 대처로 일어난 참사라면 이번 환풍구 추락 사고는 공연 관계자들의 안전 불감증과 시민들의 무의식이 더해져 만들어진 개별적 인재라는 점에서 더 심각하고 안타까운 사건이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잠재적 사고 발생 위험을 안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 은폐되고 엄폐된 위험 속에서 우리는 매일 전쟁터에 선 기분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필자는 수많은 공연현장에서 연극이나 뮤지컬 행사 등을 연출하는 연출가이며 대학에서는 제자들을 길러내는 선생이다. 평생을 공연 현장에서 살다보니 수없이 많은 안전사고를 경험했고 나의 안전은 내가 지켜야 한다는 단순하지만 굉장히 중요한 교훈을 얻으며 살고 있다. 실제 일어났던 상황 몇 가지를 예를 들어보면 오래전 필자가 연출 하고 어느 국제연극제에 출품했던 창작뮤지컬 야외공연장에서 일어난 조명감독 추락사건이다. 비오는 날 어쩔 수 없이 다음날 공연을 위하여 리허설을 하고 있었는데 비오는 날 조명기기 시설에 올라가서는 안 되고 설사 올라가더라도 전원을 차단하여야 했는데 이것을 무시하고 조명감독이 시설에 오르다 떨어져 많은 사람들이 놀란 적이 있다. 아름다운 조명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잠시 잊은 것이다. 다행히 무사해서 지금은 안전을 최우선하는 조명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실제로 공연현장에는 수많은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배우가 공연을 마치고 커튼콜을 하는데 암전상태에서 성급히 나오다 무대 아래로 추락하는 장면도 보았고 아주 오래전 세종문화회관 대 공연장에서는 공연 중 실제로 막에 불이 붙어 큰 사고로 이어 질뻔한 적도 있었다. 국립극장에서는 무대장치가 무너져 많은 배우들이 다치기도 하였다. 판교 야외공연장 환풍구 붕괴 추락 사고는 일차적으로 아무런 안전장치나 안전펜스 없이 방치한 제작사 그리고 오르지 말아야 할 곳에 오른 시민들 떨어지면 죽을 수밖에 없는 수십 미터 깊이의 환풍구 설치 매뉴얼이 없는 나라 모두가 책임일 수밖에 없다. 안타깝지만 우리의 안전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 세월호에서 엄청난 비극을 당하고 진실을 밝히고 제대로 된 안전 국가를 만들자는 외침을 하는 자식을 잃은 부모들에게 적당히 시간을 벌고 욕하고 비난도 마다 않는 정치인들 몰상식한 단체들과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 땅에서 누구에게 기대고 안전을 바랄 것인가! 참사가 일어날 때마다 정치판이고 언론이고 학자들까지 요란을 떨지만 적어도 지금 까지는 안전국가로 만들려는 의지는 없어 보인다. 그런 것 따질 시간에 먹고살아야 하니 경제를 살려야 하고 부동산을 활성화해야 하고 그래서 금리도 최저로 내려야 하고 서민 증세도 슬쩍 해야 하고 그러려니 머리 쓸 일이 많고 그러니 안전은 나중에 해도 되는 사람들이 작금의 이 나라를 끌어가고 있다. 집을 나서기 전에 기도하고 눈 크게 뜨고 내 안전 내가 지켜야 한다. 장용휘 수원여대교수연출가

[문화카페] 모차르트와 계급사회

4살 때부터 작곡을 시작해서 35년의 짧은 일생동안 방대한 양의 아름다운 작품을 남긴 모차르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던 천재 음악가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그의 음악이 오늘날에도 왜 이토록 가깝게 우리의 삶에 다가오는지에 대한 이유를 탐구해볼 필요는 있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그의 선배들이 이루어낸 서양음악의 근간, 즉 바흐가 완성한 대위법이나, 헨델이 확장시킨 화성법, 그리고 하이든이 집대성한 소나타 형식 등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악곡 구성의 틀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모차르트는 이러한 기존의 틀을 개혁적으로 바꾸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틀 안에서 자신만의 음악 언어를 찾아 독창적인 창작 활동을 펼쳐 나감으로써 순백의 아름다운 음악의 궁극적 이상향을 제시했다. 이러한 모차르트의 창작성향은 일면 내성적인 그의 성격과 삶의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 16C말 르네상스를 기점으로, 혈통귀족 지배계층에 대한 서민들의 불만과 욕망이 분출되면서, 부를 쌓은 신흥 상인계층의 신분상승을 위한 사회적 심리적 수단으로서 오페라가 탄생하고 발전해 왔다. 모차르트가 태어나 활동했던 35년간(1756~1791)의 기간 또한 그러한 유럽 계급사회의 전통이 여전히 지배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몰락하는 귀족계급과 부상하는 시민계급 간의 투쟁으로 인한 역동적 갈등이 사회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하면서, 혁명과 계급충돌의 전운이 전 유럽을 감싸고 있었고, 18C 후반에 터진 프랑스혁명과 영국 산업혁명의 씨앗이 태동하고 있었던 격동의 시기 한가운데에 모차르트의 삶이 놓여 있었다. 이 시대의 예술가들이 사회적 사건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감을 얻고 또 거기에 직접 관계했던 것처럼, 모차르트도 사망하기 전 해인 1790년, 프랑스혁명이 터진 이듬해에 정치적인 프리메이슨 운동을 위한 선전용 오페라 마술피리를 만들었다. 시민계층으로 태어난 모차르트는 궁정음악가로 근무하며, 자신의 음악적 재능의 주된 소비자가 궁정의 귀족계층임을 잘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개인의 품위와 음악활동을 위해 놀랄만한 용기로 자신의 귀족 고용주와 위임자를 상대로 저항운동을 벌였다. 당연하게도 궁정에서 일하던 시민계급 출신자의 운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의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모차르트의 비극이 그의 음악적 환상과 음악적 양심이 아직 그 사회의 전통적 취향에 묶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나 창조적 작업에 있어서 순전히 혼자의 힘으로 사회 권력구조의 벽을 부수려 했다는데 있다고 말했다. 신이 내린 음악적 재능이 있었으나 볼품없는 외모의 소시민이었던 모차르트는, 자신의 음악적 세계와 인격보다는 경제적 재능과 사회적 성공에 관심이 더 많았던 부인 콘스탄체, 그리고 너무나 자주 천박한 음악으로 변덕을 부렸던 빈의 청중들로부터 지속적인 사랑을 받지 못했다. 당연히도 그는 사회적 실존감을 잃고 체념하여 혼자만의 고독한 싸움을 포기하고 스스로 추락했다. 그리고 1791년 12월 6일, 쓸쓸히 죽어갔고 빈민 묘에 매장되었다. 이번 가을엔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러 혼자서 콘서트홀을 찾아야겠다. 임형균 톤마이스터

[문화카페] 미술관의 수익성

대체로 공공요금은 생산원가에 미치지 못한다. 생산 원가에 미치지 못하므로 적자가 발생하고 적자는 국민세금으로 충당된다. 이런 공공요금 대상을 우리는 공공재라 한다. 지하철, 버스, 전기 등 공공요금을 적자가 예상되면서도 원가 수준에 맞추지 않는 것은 국민의 기본 생활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공공 예술기관의 사용료 또한 원가에 미치지 못한다. 법률과 조례로 정하는 공공 미술관의 이용료는 무료 내지는 최소 경비로 산정한다. 미술관을 국민의 향수권 보장을 위한 공공재로 보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미술관을 공공재로 보아 관람료를 받지 않는 것에 대해, 시장주의자들은 경쟁원리와 수익자 부담원칙을 적용하여 수익을 증대할 것을 주장한다. 예술 애호가 개개인의 편익을 증진하는 것이므로 이를 즐기는 개개인이 편익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대중예술이나 산업으로 분류되는 뮤지컬, 상업주의 화랑에는 설득력이 있다. 공공미술관 운영의 적자를 문제 삼는 것을 받아 들여 운영 현실화를 한다하더라도 공적자금에 의해 운영되는 공공미술관은 수익 창출 수단이 제한되어 있다. 화랑처럼 그림 판매 수익을 올릴 수 없고 건립 목적 사업 이외의 수익 사업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미술관 운영비는 개관 초기에는 시설유지관리, 인건비 대 사업비가 1:1의 비율로 편성되지만 시간이 지나 시설이 노후화된 경우에는 시설: 인건비: 사업비가 1:1:1의 비율로 관리비 증가율이 사업비를 능가하게 된다. 이때 직접 사업 수입은 사업비 지출의 50%를 유지하기 어렵다. 전체예산의 15% 자립도가 쉽지 않은 것이다. 미술관 운영의 수입원은 입장료, 대관료 그리고 카페운영 등 부대사업, 협찬, 기업이나 개인후원 등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개인협찬이나 기업 후원은 공공미술관 운영에서 원칙적으로 불가능하고, 카페운영을 자치단체가 별도로 임대하는 경우에는 주 수입원을 잃게 된다. 가령 10억 원의 공적 자금을 집행하는 미술관이 있다고 가정하고, 연간 관람객이 20만 명이고 입장료가 천원이라고 한다면 최대 수입은 2억 원이다. 일부 대관료를 포함한다하여도 재정자립도는 20% 수준이 될 것이다. 방만한 운영 결과가 아니라면 나머지 8억 원은 적자 의미만 있는 것일까? 공공재를 통한 공적자금 집행은 부의 재분배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보면 수지계산으로는 적자이지만 20만 명에게 1인당 4천원의 세금 환급을 해준 셈이다. 예술 창작이 활성화되고 어린이의 인성과 창의력을 키우는 인적 투자비용이다. 인재로 자라서 사회적으로 기여 하는 원동력이 되고 행복 지수가 높아진다면 공공 미술관 고유의 목적에 부합하는 적은 비용의 큰 투자 효과가 아닐까? 왜냐하면 공공 미술관은 이를 목적으로 건립되었고 문화 환경이 열악한 군 단위 지역에서는 더더욱 향유기회 제공이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IMF 이후 예술기관에 대해 재정자립도를 높일 것이 요구되었다. 국정 감사의 단골 지적사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재정 자립도 보다는 얼마나 더 그 예술기관이 주어진 소명을 다하고 문화 향수권 신장에 노력하였는가를 중시한다. 완전한 공공재로서의 무료입장보다 유료관람이 바람직하다고 하는 것은 수익성 증대보다는 예술적 가치에 대한 인식을 키우고, 예술 구매 만족도를 높이는 데에 있다. 건강한 예술 환경을 만드는 것에 더 큰 목적이 있다. 공공 미술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때이다. 이철순 양평군립미술관장

[문화카페] 인간이 희망

올해 추석을 전후한 극장가는 백가쟁명의 대회전장이었다. 한국영화 대표적 메이저 배급사들이 만든 대작영화 4편이 사운을 걸고 맞붙은 싸움판이었다. 결과는 알려진 대로다. 어떤 영화는 기대를 넘었고, 어떤 영화는 재앙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당사자들로서는 환호와 상심의 양극단에서 흥행세계의 냉엄함을 절감했을 것이며, 성적에 따른 저마다의 후일담이 있을 수 있겠으나, 4편 모두 상업성을 염두에 두고 만든 극장용 영화였다는 점에서, 관객들의 선택을 금과옥조로 이해해야 할 듯하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4편 중 명량의 성적표는 괄목수준의 것이다. 1천750만을 훌쩍 넘긴 관객 수는 전무했고, 후무할 수준이다. 이와 관련하여 숫자에 매몰되지 말고 작품에 대해 얘기했으면 좋겠다.고 한 이순신 역의 배우 최민식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스스로 경신해 나가는 흥행 신기록에 대한 부담과 만듦새에 대한 온도차 큰 견해들을 동시에 환기시키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기실은, 작품으로 보면, 명량은 완성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영화로 보여지는 면이 있다. 영화를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에 관해 살피다보면 다중 공유의 지점이 도출될 것이다. 물론 이 일은 업계의 책임 있는 당사자들이 맡아야 할 일이며, 이 지면의 몫이 아니므로 이쯤에서 접어야 할 논점이기도 하다. 다만 명량이 오늘의 한반도인들에게 남긴 시사점에 대해서는 곱씹고 또 새기면서 질리도록 반추해도 지나치지 않을 시대적 요청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명량의 시의성은 압도적이다. 세월호가 남긴 분노의 사회학을 읽게 하는 거울로서의 이순신의 현현이 놀랍고, 그 상징의 파격성이 놀랍다. 남해안 진도의 울돌목과 맹골수도, 격류의 바다에 뜬 배의 운명, 다중의 생명을 담보한 절체절명의 선택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상징의 합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517년의 세월을 건너 2014년을 회오리 속에 던져 놓은 세월호라니! 물론 명량이 이러한 사태를 예견한 기획일 순 없다. 그렇긴 해도 50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우리들에게 던지는 시사점들은 전율을 느끼게 한다. 궁금한 것은 관객 1,700 몇 십만 속에 우리 사회의 소위 지도층 인사들이 몇 명이나 포함됐을까 하는 점이다. 그들은 뭘 봤을까,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정략을 계산했을까, 그들은 혹시 극장을 나오면서 대중영화를 깨달음의 경로로 인정할 수 없다는 투의 중뿔난 선민의식 같은 걸 갖진 않았을까? 피로중후군이 너무 오래,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어 드는 의문일 것이다. 세월호 사태가 없었다 해도 명량의 대중적 소구력은 분명했을 것이다. 난세를 타개하는 지도자 이순신의 존재성 때문이다. 조선 최악의 임금 선조의 어깃장과 도요토미의 침략 앞에서 본분에 충실했던 이순신. 그도 한산섬 수루에 앉아 깊은 시름에 잠겼던 한 인간이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이해, 소명의식, 사려와 분별력이 강한 사람이었다고 평가 받는 한 인간이었다. 이순신 역시 한 인간이었다는 점은 오늘의 한반도 남쪽에 4천800만 여 명의 인간이 있다는 걸 생각하게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세임이 분명할진데, 지금 이 땅에 또 다른 이순신이 출현하길 바라는 일은 구상유치의 어리석은 소망일까? 김영빈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

[문화카페] 담뱃세 인상으로 바라보는 서민문화

세월호 참사의 여파가 온 나라에 참상으로 남아 모두가 국가개조 운운하더니 뒷수습은 고사하고 정치권은 식물국회가 되어버렸고 그 엉성한 사후처리에 힘입어 국론은 사분오열 되어 버렸다. 아직도 수습하지 못한 10명의 실종자와 가족 그리고 단식으로 세월호 특별법을 요구하는 유가족 그 옆에서 폭식투쟁으로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사람들의 일탈 이 와중에 증세 그것도 서민증세가 입법예고 되었고 무지막지하게 세금들이 줄줄이 오를 판이다. 주민세인상 자동차세인상 등 피곤한 세금이야기는 뒤에 좀 더 하기로 하고 입법 예고된 인상품목 그 중에 하나 담배 값 인상이 눈에 띈다. 명목은 국민건강을 위한다니 뭐라 말하기도 좀 그렇지만 속내가 너무 드러나 보이니 만만한 게 서민이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담배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누가 뭐래도 서민들의 시름을 달래주는 역설이지만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인 것이다. 담배의 기원은 제각기 달라서 정설은 없지만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였을 때 인디오들이 피우는 것을 보고 유럽에 전파하여 세계로 퍼졌다는 이야기와 반대로 아시아권에서는 기원전부터 담배를 즐겼다는 설까지 다양하지만 대한민국에 담배가 들어온 것은 17세기 조선조 광해군 때라는 설이 가장 많은 것 같다. 일본에서 왔다는데 이 또한 정확하지는 않아 보인다. 담배는 아무나 피웠고 누구 앞에서도 피웠지만 초기에는 여자가 더 많이 피웠다고 하니 이 또한 조선시대 여성들의 삶이 쉽지 않아 스트레스 해소용이었다고 생각하면 다소 의외지만 여성들의 애환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일제압정에서 벗어나 독립이 된 후 기념으로 나왔다는 승리라는 담배이후 군대의 상징이었던 화랑담배 최초의 고급필터 담배인 아리랑 그리고 한산도 솔 88담배 등에 이르기까지 담배는 지금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지속되어온 가장 오래된 문화 중 하나라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 할 것이다. 필자는 담배를 피지 않지만 군대에 복무 중에는 너무나 고된 훈련 탓에 담배를 피웠고 훈련 후 잠시 휴식시간의 그 담배 맛은 지금까지도 잊기 힘들 정도다. 담배예찬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가 담배한대를 피우실 때 그리고 고된 육체노동자가 쉬면서 담배 한 모금 들이 마실 때 어쩌면 작은 행복일수도 있다. 하지만 담배로 인한 폐해가 현대사회에 너무나 심각하여 담배로 인한 사망자와 손실금이 엄청나기에 담배를 장려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금연운동을 펼치고 흡연 장소를 적극 제한하고 길거리 보행 흡연을 금지 하는 것에 당연히 적극 찬성하며 흡연자들에게는 아쉽지만 담배를 심지어 마약류로 분리하여 아예 뿌리를 뽑는다 해도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담뱃값 인상시기와 어정쩡한 해명 서민들의 주머니를 비워서 부족한 재정을 메꾸겠다는 무사안일한 행정편의 법인세 소득세 등 부자들에게는 절대 세금을 올리지 못하는 못된 정책이 문제라는 것이다. 영업용 자동차 주민세 담뱃값 모두가 서민에 해당되는 것이다. 증세는 누구나 동의하고 찬성할 것이다. 하지만 순서가 있다. 있는 사람들이 먼저 조금 더내고 그래도 부족하면 서민증세를 하면 될 것이다. /장용휘 수원여대교수ㆍ연출가

[문화카페] 문화예술교육에 대하여

우리사회의 격변기였고 절대 빈곤의 시절이었던 60년대에 바다가 푸른 한반도의 남쪽 작은 도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때만 하더라도 문화적인 경험을 한다는 것은 연례행사로 가끔 초등학교에서 단체로 영화를 관람하는 정도였으며 가끔 전국을 순회하는 천막 서커스단의 쇼를 구경하는 것이었다. 피아노를 소유하고 있는 가정은 거의 없었으며 초등학교에서 조차도 피아노가 없었고 대신 풍금(리드 오르간)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디오 기기는 부자들만이 누리는 호사품이었기 때문에 음악을 접할 수 있었던 기회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내가 살았던 집은 고등학교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는 깔때기 모양의 스피커가 조회대 옆에 양쪽으로 학생들이 서는 장소를 향하여 세워져 있었다. 그 스피커에서는 점심시간과 저녁 하교시간에 어김없이 아름다운 클래식음악이 흘러나왔다. 그 음악소리는 온 동네에 울려 퍼졌고, 감성이 조금은 풍부했던(?) 어린 소년에게 그 소리는 천상의 소리 같았고, 황홀한 소리였다. 그 학교 옆 집에서 5살때부터 초등학교 6학년까지 살았으니 거의 8년 동안을 클래식음악이 울려 퍼지는 동네에 살았던 것이다. 아마도 그런 동네에 살지 않았었다면 클래식음악을 접할 수 있었던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 다른 길을 걷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처럼 어려서의 교육과 경험은 인간의 삶의 방향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21세기는 문화 선도국가가 세계질서를 이끈다고 한다. 현 정부도 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문화융성을 핵심 국정지표의 하나로 삼고 있다. 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리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고 뒤이어 나타날 여러 정권에 걸쳐 지속적으로 펼쳐져야 할 과제인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학교 및 사회에서의 문화예술교육을 확대하고 강화해야 한다. 문화예술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창작과 표현을 통해 함께 하는 조화로운 삶과 인간의 잠재적 능력을 계발하고 창조적 통찰력을 갖게 하여 통합적 인간을 형성하는 데에 있다. 이런 이유로 어느 나라든지 문화정책이나 교육정책에서 문화예술교육은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21세기 들어서 정부의 문화비전 추진위원회가 발간한 문화의 세기가 오고 있다라는 제목의 보고서에도 창조적 인간을 만들기 위한 문화교육이 필요하다를 첫 번째 가치로 제시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교육, 문화산업을 위한 문화예술교육의 강화, 창조적인 문화주체의 육성, 학교 교육의 문화적 회복이라는 네 가지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공연장들의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은 많은 사람들이 문화예술을 향수하도록 돕는다는 공공성과 함께 실질적으로 관객 개발의 중요한 수단이 된다. 그러나 이는 해당 공연장만의 미래를 위한 투자보다는 공연예술 전반에 기여하는 측면이 더 강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 이유는 미래 잠재관객 개발 노력은 그 결과가 해당 공연장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중앙정부 차원에서의 지원 및 제도 정착이 더 중요하다고 하겠다. 이제 문화예술교육은 학교라는 특정한 시스템과 시기에만 머물러서는 안된다. 평생학습 개념에서의 사회 전반적인 환경이 더 중요하며 문화예술공간 및 공공공간이 문화예술교육적 기능을 가져야 한다.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은 국민과 문화예술계가 상호 득이 되는 시도이다. 국민의 삶의 질 향상과더불어 문화예술분야의 활성화를 동시에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융성은 현 정부에서 일시적으로 수행하는 과제가 아닌, 하나의 큰 흐름을 만들어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며 문화예술교육의 확대가 그 지름길이 될 것이다. 박평준 삼육대학교 음악학과 교수

[문화카페] 문화장

전기장(電氣場)은 전기력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전압이 높을 수록 전기장의 범위는 넓고 힘이 강하다. 고압 전선이 내 지역을 지나가면 주민들은 온몸으로 막는다. 전기장이 생활에 유용하면서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문화에도 적용할 수 있다. 한 문화가 지배하는 전 영역을 문화장(文化場)이라고 하자. 문화장을 발생시키는 주체는 중앙정부, 지방정부, 기관, 단체 등 다양하다. 문화장은 예술장(藝術場)으로 범위를 축소하여 사용할 수도 있다. 예술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낯설다고 말한다. 이때의 예술은 예술 전반을 의미하기보다 고급예술이란 개념을 전제로 한다. 예술을 대중예술과 고급예술로 구분하는 것은 문화향유 개념으로 보면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대중예술은 시장경제가 잘 작동하는 부분이므로 예술장을 중요시 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순수예술 내지는 고급예술은 시장실패의 전형적인 분야이다. 시장의 경제논리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공공 개입의 정당성이 있다. 그러나 공공개입이 전부 선은 아니므로 예술의 공공 서비스가 정책적 선의에도 불구하고 부작용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문화정책의 중앙 공급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확대되었다. 방과 후 학교, 복권기금을 재원으로 하는 전국 순회 공연 사업 등 적극적인 문화공급 정책과 다양한 문화 복지 사업으로 문화향유 기회가 확대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전기의 편익에도 불구하고 전기장이 인체에 해롭다는 것과 같은 부정성이 중앙 공급 식 문화장도 갖고 있다. 중앙 공급식 문화장의 강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전국이 단일 문화장으로 평준화됨으로서 지역의 문화 향유 선택권과 특성, 자생력을 약화시킨다. 더욱이 중앙정부가 지원하는 문화예산은 매칭 펀드를 전제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 예산 지출 방식은 문화부분의 가용예산이 적은 지방정부로서는 오히려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무상급식 등 교육부분 뿐 아니라 사회복지 부분에서의 재정 부담이 한계에 이르자 지방정부 단체장들이 디폴트를 선언할 정도로 경직성 예산 압박이 심하다. 일반적으로 불요불급한 지역의 인프라 투자와 기초 생활 정책을 시행하다보면 가용예산이 적게 마련이다. 문화는 상하수도 시설 개선과 같이 그 효과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그 효과를 측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문제는 복지예산 등 경직성 예산 확보를 위하여 이런 문화의 특성을 이유로 문화부분 예산을 축소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어느 도가 이미 그러한 전례를 보였다. 지방정부 문화예산은 1~2% 정도에 불과하다. 문화부분 예산 축소 유혹에도 불구하고 2015년 문화예산을 3%로 증액 배정한 양평군의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문화부분에 대한 예산을 축소할 것인가 확대할 것인가의 문제는 효용성과 성과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에 대한 가치와 평등권의 문제이다. 당장 효과를 측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문화예술 예산을 축소하는 것은 문화가 장기적인 인적 투자이자 행복지수가 높은 선진사회로 가기위한 인프라라는 점을 잊은 결과이다. 교육이 전 생애 교육으로 확대되고 있음에도 예술을 혹시 소수의 사치스런 개인적 취향으로만 이해한다면, 지금 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상상할 수 없는 사회 부작용에 대한 치유 기능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술이 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고 행복 지수를 높인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이러한 예술의 순기능을 받아들인다면 중앙공급 식 전국 단일 문화장은 지역 단위 문화장으로 전환되어 지역별 문화적 특성을 살리고 지역 주민들의 자율적 문화 선택과 향유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이철순 양평군립미술관장

[문화카페] ‘퀸’의 첫 내한공연과 SNS 홍보마케팅

최근 서울 잠실에서 영국의 전설적인 록(Rock) 밴드 퀸(Queen)의 첫 내한공연이 펼쳐졌다. 프레디 머큐리의 사망 이후 활동 중단을 선언한 베이시스트 존 디콘이 빠지고 리드 기타의 브라이언 메이와 드럼의 로저 테일러가 프레디 머큐리를 대신하는 아담 램버트라는 미국 청년이 함께 무대에 올랐다. 이 공연은 퀸의 2014년 오세아니아 4개국 8개 도시투어의 출발점이었다. 1960년대 중반, 천문학과 전자공학, 치의학, 미술을 각각 전공한 네 명의 젊은이가 모여 결성한 록 밴드 퀸은 록 음악의 상식을 초월한 악곡 구성과 독창적 음악 세계로 당대를 휩쓸던 록 그룹이다. 1970~198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우리나라의 중장년층도 당시 라디오와 레코드음반을 통해 Bohemian Rhapsody Somebody To Love 등 매력적인 곡들을 접하면서 퀸에 열렬히 빠져들었다. 특히 4옥타브 이상의 음역을 넘나드는 다이나믹한 가창력으로 화려하고 독특한 음악 색깔을 만들어냈던 보컬리스트 프레디 머큐리는 단연 퀸의 독보적인 아이콘이었다. 60대 중반이 된 퀸의 원년 멤버 두 명만이 출연하는 이번 내한공연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록 밴드의 추억팔이 공연이라 힐난받는다 해도, 한 때 그들에게 열광한 적이 있는 수많은 국내의 장년이 된 올드팬들에게는 충분히 가슴 설레게 하는 블록버스터 공연이라 할만 했다. 그래도 퀸은 퀸이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공연 전날까지도 이러한 축복받은 공연에 대한 광고나 홍보기사 등의 정보를 거의 접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아니나 다를까, 공연장에는 2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들이 보이긴 했지만, 정작 타깃 관객 연령층이라 할 만한 40~50대가 예상 밖으로 많이 나타나지 않았고, 전체적으로도 기대만큼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지도 않았다. 공연이 끝나고 일상에 돌아와 만난 40~50대의 친구들이나 선후배들도 정말 퀸이 서울에 왔었어? 내지는 광고나 언론기사에서 전혀 본 적이 없는데? 등의 반응이었다. 이는 40~50대 연령이 퀸의 내한공연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았더라면 선뜻 지갑을 열고 티켓을 구매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관객층임을 뜻한다. 공연주최사는 SNS(Social Network Service) 홍보마케팅에만 집중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티켓구매 방법이나 티켓판매 오픈 시기에 관한 정보조차도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같은 극도로 제한된 SNS만을 활용하여 조용하게(?) 알리는 방법을 택하였다. 기존 매체를 통한 기본적인 관련 정보나 홍보 내용은 거의 노출되지 않았다. 특히 이러한 홍보마케팅 방식은 SNS가 낯선 아날로그 시대를 살아온 40~50대 연령층의 타깃 관객들에게 기본적인 공연정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흔쾌히 공연티켓을 구매하여 공연장까지 올 수 있는 소비자들을 놓쳤으며, 이것은 저비용 고효율을 목적으로 하는 SNS 홍보마케팅이 효과적이지 못했음을 뜻한다. 막대한 자본을 퍼부어 성사시킨 대형공연의 주최사는 메인 타겟 관객시장을 정확히 설정하고, 그에 적합한 매체를 활용해 홍보마케팅을 전개해야 한다. 서울 잠실에서 브라이언 메이가 혼자 어쿠스틱 기타를 안고, 오래 전 떠나간 친구 프레디 머큐리를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 Love of My Life를 들을 기회를 정보 습득의 어려움 때문에 놓친다는 것이 퀸의 팬들에게는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임형균 톤마이스터

[문화카페] 타자와의 마주침

현대라는 것은 역사적 연대기 상의 고정된 한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롭게 되려는 노력의 표현을 지칭한다. 현대미술 역시 그렇다. 현대미술은 단지 동시대라는 시기에 국한되어 있는 미술행위를 일컫는 말도 아니다. 현대미술은 현대라는 시기의 삶이 생각하도록 요구하는 문제들에 미술이 밀착하고 대응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철학이나 미술은 유사한 과제에 시달린다. 철학과 미술은 사유하고 실천하는 일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인간의 삶 전반에 최대한 밀착하려고 시도한다. 더불어 현대미술이란 현재의 삶과 문화에 대응하는 미술이자 고정된 관습이자 통념에 저항해 늘 새로운 표현과 어법을 만들어내려는 시도이다. 전통사회에서 이미지제작행위란 나란 주체와는 무관한 채 당대를 지배하는 종교와 이데올로기에 복무하거나 지배계급에 종속된 도상화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은 미술이 아니라 주술적 물건으로서의 이미지제작이다. 반면 현대미술은 이른바 탈주술적 이미지다. 그것은 종교와 신화, 고정된 관념이나 권력과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로부터 자유로운 미술을 꿈꾼다. 동시에 그 미술행위는 한 개인의 독자적인 감수성과 세계관, 진정한 자아의 표출에 근접한다. 오늘날 현대미술은 그런 맥락 아래 출현한다. 그리고 그것은 타자와의 마주침을 전제로 한다. 다른 이의 삶과 생각과 마주치면서 비로소 한 미술가의 다양한 실험과 작업이 펼쳐지는 것이다. 고정된, 절대적인 미술의 어법이란 없다. 미술이란 개념도 늘 변화의 과정 속에서 단련된다. 니체는 고정적 진리란 없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진리의 나타남이란 관점 수립의 문제이다. 새로운 진리를 바라보는 관점은 기존의 가치와 진리에 대한 비판에서 나오며 그 기존의 가치를 비판에 부치는 것이 바로 힘의 의지다. 존재자들이란 힘의 외관이기에 힘의 의지는 존재자들이 서로 부정하지 않고 차이를 지닌 상태로 나타나게 해주는 요소이다. 니체에 따르면 존재자들이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 다른 존재자를 부정하지도 않고, 다른 존재자와의 차이를 지닌 채 자신의 본성 가운데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니체를 이은 들뢰즈를 비롯한 탈근대철학자들이 제기한 중요한 문제의식 중 하나는 나에 집착하는 존재론을 깨는 것이 되었다. 관건은 나라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나를 아우른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고 생성이라는 것이다. (강신주) 외부와의 마주침이 없으면 사유와 생성과 변화는 없다. 변화의 계기는 낯선 기호인 다른 사람과의 마주침에서 온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나를 벗어나 외부의 입장에 설 수가 없다. (이른바 재현의 한계) 그러나 역설적으로 내가 남이 될 수 없다는 한계로 인해 변화의 계기가 주어진다. 내가 생각하는 세계가 다른 이들의 그것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 이런 자기객관화의 능력을 지닌 이가 결국 성숙한 존재이다. 이것이 모자랄 때 독선이 생긴다. 카프카의 통찰에 따르면, 성숙한 이는 나와 세계의 투쟁에서 언제나 후자를 지지한다. 다양하고 풍부한 사람들의 세계에서 나라는 존재의 왜소함과 한계를 독자나 관객이 절실히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이 바로 걸작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걸작의 캐릭터들은 독자에게 낯선 기호이고 미지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이른바 그 기호들을 통해 타인의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읽어내는 한편 기호를 기호로 느낄 수 있는 감각 또한 예민하게 가다듬는 훈련을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를 절실하게 알기 위해 문밖의 낯선 기호와 만나는 일이 돼야 한다. 그로 인해 비로소 새로운 사유,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삶이 가능할 것이다. 박영택 경기대학교 교수

[문화카페] 영화산업, 흥행독주만이 해법일까?

극장에 가면 명량 하나 밖에 없어서 그거 보고 왔다. 좀 너무 한 것 아닌가? 드디어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8월의 극장가 화제는 단연 명량과 이순신 밖에 없었다. 누구 하나 문제로 보지 않는 그런 시각이 과연 옳은 것일까?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 명량이 많은 스크린에서 상영한 것이 전혀 문제가 아니라는 시각이 과연 올바른 판단일까? 이미 영화인들 사이에선 2014년 여름 흥행은 대작 4편의 경합으로 점쳐졌었다. 맨 처음 시작한 영화는 역린이었다. 그 다음 군도, 명량, 해적 이렇게 네 편이 차례로 개봉하면서, 흥행의 판도가 판가름 나기 시작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명량을 제외한 나머지 세 편의 영화가 이렇게 압도적인 차이가 날 정도로 형편없거나, 재미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체 오락영화 판에서 흥행을 좌우하는 그 기준치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들 네 편을 비교하는 이유는 종래의 오락영화 대 예술독립영화를 비교하던 경우와 이번 여름의 흥행경쟁은 좀 더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경우는 돈을 많이 들인 블록버스터 영화들 끼리의 경쟁이고, 그런 점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동기, 즉 돈을 벌어야 하는 동기가 똑같이 작용한다는 점에서 어느 누구를 일방적으로 동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제작비를 비교해도 이들 네 영화는 비등하다. 역린은 120억, 군도는 160억, 명량은 190억, 해적은 160억 등이다. 이번 비교와 흥행의 결과는 미래 한국영화산업이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를 점치는 대단히 중요한 지표가 아닐 수 없다. 역린은 다른 세 편과 멀찌기 떨어져 있어서 손익분기점이란 계산에서 그래도 덜한 편이고, 서로간의 피해의식도 적은 편이다. 하지만 여름의 절정에 개봉한 세 편은 심각하다. 명량의 독주로 다른 두 편 군도와 해적의 피해는 만만치 않은 것이다. 관객이 원하는 것은 영화적 재미나 스펙터클의 차이, 스타의 활약 등 어느 것에서도 비등한 것으로 판단되는 세 편의 영화가 다 같이 흥행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런 바람이 비단 관객들만의 것일까? 100억 이상의 제작비를 쏟아부어서 그 이윤을 회수하고 나아가서 이익을 만들어내 참여한 영화사, 투자사, 영화인들이 다 잘 먹고 사는 길이 좋은 게 아닌가. 명량의 사례는 기업적 측면에서 보면 대박 신화를 이룬 쾌거일지 모르나 전체 한국영화산업의 측면에서는 대기업이 이제 중소기업을 억압한 정도가 아니라 같은 경쟁 대기업 마저도 제압해버린 대단히 위험한 시장상황이란 점을 시사한다. 먹이사슬이 없어지고 호랑이만 남은 영화의 숲에선 결국 호랑이 마저 굶어죽고 말 것이다. 2014년 여름은 특정 영화의 상영횟수 독과점이 그 어느 때 보다도 심각해서 대형 경쟁 영화사 및 대형 투자사들의 위기 의식마저도 불러온 중대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런 식의 배급상영 형태라면 앞으로 한국영화는 절체절명의 위기도 올 수가 있다. 하나의 대기업과 하나의 영화가 사는 것 보다는 세 개 이상의 대기업이 서로 경쟁을 하는 게 산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장기적인 면에서 훨씬 낫다는 교훈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관객의 측면은 문화적인 면이고, 제작의 측면은 산업적인 면이다. 문화와 산업의 양 날개로 비상하는 영화는 어느 한 기업이, 어느 한 영화만이 독주하는 그런 현실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어느 누가 그런 현상을 정상이고 상식이라 생각할 것인가. 정재형 동국대학교 교수

[문화카페] 자연과 예술의 아름다움

새 울음과 벌레 소리는 모두 마음을 전하는 비결이요, 꽃봉오리와 풀빛은 진리를 표현하는 명문 아님이 없도다. 배움은 타고난 슬기를 맑고 밝게 하고 가슴 속을 영롱히 하여 사물을 대함에 모두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한다. 명나라 말 홍자성이 엮은《채근담(菜根譚)》의 한 구절이다. 쉽고 간결하며 소박하며 담담한 글들이나 삶의 지침서로 평소에 좋아해 곁에 두고 이따금씩 펼쳐보곤 한다. 우리 인간이 주변에서 접하는 미미한 풀벌레와 풀꽃과 어떤 관계인지를 명확히 알려준다고나 할까. 말복과 입추가 동반 퇴장하고 난 사흘 뒤 맞이한 음력 7월 15일 뜬 달은 올 들어 가장 큰 보름달이란다. 그날 오후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렸으나 다행히 밤 11시경 그치자 얼굴을 드러낸 맑고 밝은 달의 아름다움은 그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절기가 이리도 분명하단 말인가. 대낮엔 폭염이나 아침과 저녁 삽상한 바람이 불며 특히 새벽녘은 확실히 달라졌다. 북송의 시인이며 대문장가인 소식(蘇軾1036~1101)의 명문인 덧없는 인생살이에서 벗어나 대자연과 합일을 읊은 임술지추 칠월기망으로 시작하는 전적벽부(前赤壁賦)가 입가를 맴돈다. 봄이 줄어들고 여름이 길어져 염장군의 긴 횡포에 시달렸으나 변함없는 대자연의 운행은 어김없이 가을을 향하고 있다. 올 추석은 빨라 제수(祭需)를 걱정하기도 했으나 높아진 기온에 서둘러 영근 과일들이 있기에 크게 문제가 안 된다고도 한다. 아침 출근길에 우연히 산사나무에 시선을 옮기니 열매인 아가위가 윤택 있는 붉은 색을 띄기 시작했다. 마로니에란 이름이 더 익숙한 칠엽수 열매는 이미 갈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밤송이도 제법 굵어졌으니 가을이 다가옴을 절감하게 된다. 박물관은 넓은 의미로 동물원과 식물원 나아가 수족관까지를 포함한다. 박물관은 아름다운 정원을 지니고 있거나, 뮤지엄 파크란 용어처럼 공원 속에 위치하기도 한다. 숨고르기를 하듯 일상에서 잠간 멈춰 여유를 가지고 자연과 예술의 아름다움을 함께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박물관이다. 실내는 유물 보존상 일정온도를 유지해야 되기에 전시실은 사뭇 시원하다. 올처럼 무더운 여름철 도심의 피서지로 이만한 곳이 또 어디에 있을까?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사무실 방충망에 말매미가 달라붙어 세차게 울더니 한 이틀 자리를 뜨지 않는다. 어린 시절 나뭇가지에 붙은 매미 허물은 꽤나 신비롭게 보였다. 알에서 애벌레를 거쳐 성충이 되기까지 몇 차례 탈바꿈은 신비롭기도 하며 꽤나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박물관에서 역사와 고고학과 함께 한 축을 이루는 미술사(美術史)는 흔히 인문학의 꽃으로 지칭된다. 학문의 목표는 시비(是非)를 가리는 것이나 미술사는 우리 인류가 창출한 걸작과 명작 등 아름다움과의 만남을 통해 미의 본질과 탐색이다. 대상이 조형미술로 일견 사치스럽기나 고급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엄연한 학문이기에 갖춰야 할 구비조건이 결코 녹녹하지 않다. 미학적 비평과 미술사 모두는 실기가 아닌 이론이 위주이나 이 분야 학자들은 창작인의 소양과 감수성 그리고 안목, 예술 전반과 인접분야에 대한 관심과 이해, 제작기법에 대한 파악 등이 요구된다. 아름다움은 찌든 일상의 삶에 생기를 부여한다. 해서 힐링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회화사 소재 중 동식물에 초점을 두면서 각종 새며 꽃들과 나비를 비롯한 각종 곤충들을 그림과 더불어 이들을 유심히 살핌은 생물학자의 관심에 버금간다 하겠다. 이들 그림이 단순히 곱고 예쁘다는 감탄사에 그침이 아니라 보면서 새와 풀벌레 울음소리와 꽃향기를 떠올리게 된다. 나아가 이들을 소재로 읊은 시문 등 문학과 역사, 철학 나아가 음악까지 아우를 때 조형적 예술적인 성취와 함께 진솔하며 종합적인 감상이 가능해 진다. 박물관에서 다가오는 가을소리에 귀기우리며 자연과 예술의 아름다움과 조우하는 낭만을 생각해본다.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

[문화카페] 공감을 통한 인간 이해의 장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는 축의 시대(Axial Age)라는 개념을 설파했다. 이는 약 기원전 800년 경에서 200년 경까지의 시기에 전세계의 주된 문화 중심지들에서 서로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면서도 심오한 철학과 영성, 그리고 보다 진지한 인간 이해가 태동되었다는 설명이다.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중국의 공자, 인도의 싯타르타 등이 이 시기의 이러한 변화를 이끈 대표적 인물들이었으며, 이후 오늘날까지의 철학과 종교의 발달은 바로 이 결정적 시대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말한다. 모든 극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이 바로 이 시기에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시기의 비극은 그저 귀족들의 심심풀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복잡한 인간사에서 야기되는 수 많은 질문과 대답, 인간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신을 무엇이라고 상정할 것인가 등의 철학적 몸부림들이 시와 음악 그리고 춤으로 정제되어 무대에 올려진 것이 고대 그리스의 비극이다. 이러한 비극에서는 인간의 고통과 신의 문제에대한 명료한 고답적 해결책을 결코 부여해주지 않는다. 비극의 관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했듯이, 등장인물들이 겪는 고통에 공감(compassion)하여 겪는 정화(catharsis)의 경험을 통해 무어라 딱히 말할 수는 없지만 일종의 공동체적인 인간이해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대 그리스의 비극을 닮으려는 르네상스 후기의 노력이 오페라라는 장르를 꽃피웠으며, 바로크 음악양식의 장단조를 기반으로 한 조성음악의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오늘날까지 걸작으로 각광받고 있는 작품들은 모두 인간에 대한 진솔하면서도 깊이 있는 질문과 이해를 잘 짜여진 시와 음악 그리고 여러가지 상징으로 버무려낸 것들이다. 훌륭한 작품일수록 등장인물들의 미묘한 심리와 인간본성이 대본과 음악을 통해 미묘하고 예리하게 표현되어 나타나며, 관객으로 하여금 무어라 말로 할 수는 없지만 심오한 공동체적 인간이해의 경지를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필자는 오는 9월 3일과 4일에 가톨릭대학교 음악과 학생들과 푸치니의 라보엠(La bohme)을 무대에 올린다. 흔히 가난한 젊은 남녀의 비극적 사랑이야기로 여겨지기도 하는 이 작품은 사실 그보다는 소외된 인간에 대한 연민과 이해, 그리고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는 따듯한 인간 본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플롯은 가난하지만 꿈 많은 젊은이들이 꿈을 펼칠 수 없는 비정한 현실을 넌지시 고발하기도 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여주인공 미미의 임종을 지켜보는이가 되게 만들어 우리가 일상에서 치워두었던 삶과 죽음의 문제, 인간의 고통과 신의 문제 등을 등장인물들과 공감(compassion)하게 이끈다. 미미가 숨을 거두자 로돌포는 마치 다른 모든 언어를 잊은 듯이 미미!라고 그녀의 이름을 외칠 뿐이다. 뒤따라 흐르면서 작품 전체를 종결짓는 오케스트라의 후주는 작품의 모든 슬픔과 갈등을 응축해 낸 가장 압도적인 지점이다. 필자는 재능과 열정이 있는 학생들과 그야말로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있다. 꽉 짜여진 연습일정으로 올해는 여름휴가도 없다. 하지만 좋은 공연이 기대된다.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땀 흘리며 울고 웃는 올 여름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휴가가 부럽지 않은 카타르시스의 향연이기 때문이다. 양승렬 수원오페라단 지휘자미주리대 박사

[문화카페] 여름날의 독서

뜨거운 여름이고 한가한 방학이다. 종강하는 날 학생들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방학동안 힘이 닿는 대로 독서에 힘쓰라고 말이다. 타는 듯한 태양빛과 찢어지는 매미소리를 들으며 사물과 세계를 새롭게 보게 해주는 좋은 책의 행간에 파묻혀 지내는 것이 최고의 피서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간 지금 이 약속을 마음에 새겨둔 학생이 몇이나 있을까? 대부분 아르바이트에 힘쓰거나 학원에 다니며 토익공부에 열중일 것이다. 졸업 후의 취업걱정에 마음 졸이는 아이들이 한가하게 고전이나 인문학 서적에 눈길을 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정치에 무관심한 그들이 신문사설을 읽으리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그러나 나는 매순간 독서와 신문읽기, 당대의 정치와 역사에 부단한 관심을 기울이라고 반복한다. 그것이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온다 해도 선생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일 뿐이다. 이 체제가 만들어낸 실업문제를 대학과 교수가 책임지고 취업 시킬 수도 없고 그들이 겪을 암울한 미래를 해결해줄 수도 없다. 그 아이들의 공포와 불안을 진정시킬 수는 더군다나 없다. 그러나 공포와 불안을 지워내고 이 사회가 요구하는 획일적인 시스템에서 벗어나 개별적인 삶을, 진정으로 주체적이고 의미 있는 자신만의 삶을 도모하라고 격려할 수는 있다. 덧붙여 그 길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독서라고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대학과 교수들은 학생들의 취업률을 걱정하고 그들의 스팩을 쌓는 일을 강요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취업걱정에 시달리는 이 시간에 그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게으른 독서를 요구한다. 오지 않은 미래의 불안과 공포로 인해 마냥 시들어가는 대신에 현재의 시간에 몰입해 관능적인 독서에 빠지기를 권유한다. 그 독서의 양에 비례해 그 학생의 삶이 이전과는 다른 삶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공부는 지식과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게 되는 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몸으로, 감각으로 바뀌는 일이다. 오로지 좋은 책만이, 고전만이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해준다. 지금까지의 삶과는 다른 삶을 어떻게 추구해나갈까를 고민하게 해주는, 각성하게 해주는 것이 독서다. 대학은 학생들에게 그러한 길을 적극적으로 감행하도록 권유해주는 학문의 전당이다. 최근에 인문학 열풍이 부는 것도 같고, 관련 책들도 잘 팔리는 것도 같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런 열기가 다분히 의심스럽고 불안하다. 수사적인 차원에서의 치유나 가벼운 위로 따위로 상업화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책을 읽고 인문학에 대해 공부하는 이유 중 하나는 삶을 성찰하거나 체제에 사로잡힌 나를 탈주시키고자 하는 격렬한 반성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체가 되고 한 개인이 되고 이른바 예술가가 되는 일이다.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목소리를 따름으로써 자신만의 작품, 자신만의 삶의 길을 창조하고자 하는 일이다. 공부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독자적인 삶을 만들어가는 차원에서의 예술가들이다. 인문학 공부는 그렇게 예술가의 길, 진정한 주체의 길을 도모해가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다. 오늘날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진정한 자기가 되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 공부하는 이들, 예술 하는 이들의 책임이란 무엇보다도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서 인간의 삶과 정신의 가치에 대해 예리한 인식을 드러내고 더 나은 삶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다. 박영택 경기대학교 교수

[문화카페] 이순신과 아베, 그리고 국민을 위한 정치

김한민 감독의 명량이 개봉한다. 언론시사회에서 명량을 보고 문득 그 시대의 조선과 지금의 한국이 크게 다르지 않구나, 하는 감회에 잠겼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일본은 강하다. 그리고 일본은 항상 한국을 침략했다. 근대에 와서 일본은 또 전쟁을 일으켜 한국을 먹어버리더니 36년간을 지배했다. 지금 아베가 다시 전쟁을 시작하려 한다. 과거 일본의 조상이 전쟁을 일으킨 것처럼 아베가 한국을 침략한다면 한국은 일본을 이길 수 있을까? 일본은 군사력이 전 세계 3위인데 말이다. 그런 미묘한 시점에 이 영화가 나왔다. 다른 어떤 영화보다도 명량이 와 닿는 이유가 그곳에 있다. 명량은 2차 왜의 침략인 1597년 정유재란을 그린 것이다. 정유재란은 원균이 거북선 3척과 전선 100여 척, 병사 1만 명을 끌고 참전했던 칠천량 전투가 참패로 끝나고, 모진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던 이순신이 백의종군하여 남은 배 12척만을 갖고 왜군 333척과 맞서 싸워 이긴 명량대첩으로 이어진다. 전 세계 해전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이러한 전적은 이순신의 표현대로 하늘이 도운 전공이다. 여기서 하늘은 곧 백성이 아닌가. 감독에게 지금 이 시기 명량을 만든 이유를 물었다. 갈등과 분열 속 현재 대한민국에 통합의 아이콘으로 가장 가슴에 와 닿는 역사적 인물, 그리고 그 엑기스가 명량해전이라고 말한다. 한국은 과거 조선이 명과 왜의 사이에서 힘들어했듯이, 지금도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여 처량한 지경에 놓여 있다. 말로만 자주국방, 자주외교를 부르짖었지 국력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 언제 아베가 쳐들어와 독도를 내놓으라고 할지 두렵기만 하다. 우방이라던 미국마저 그때는 외면할 게 뻔한데 한국은 독도가 문제가 아니라, 나라를 보전하는 것조차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아베를 보면 이 세상에서 제국주의가 사라진 게 아니란 걸 실감하게 된다. 대체 한국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역사상 가장 자랑스럽게 살다간 한국인의 좋은 유전자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그 좋은 유전자를 잘 계승하여 국가와 민족을 잘 보존해야 하지 않을까? 세월호 참사를 떠올린다. 아이들을 버리고 도망간 선장들과 선원들, 국가재난 시스템을 엉망으로 만들어 국가를 위기에 몰고 간 공무원들, 파렴치한 국가 지도자들, 정쟁만을 일삼는 이기적인 정치가들은 이순신 당시 조선의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국민을 도탄에 빠트리고 국가를 적의 수중에 몰아넣는 자들은 하나같이 국가나 국민보다도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자들이다. 오직 이순신만 다르게 생각했다.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국가와 국민만을 생각하여 자신을 희생하고자 했다. 지금 정치가들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다. 자신의 정당만이 세상을 구원할 것처럼 국민에게 말하며 사람보다는 정당지지를 호소한다. 이순신도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면 당시의 정세에 따라 행동했지, 겨우 12척으로 왜적과 맞서 싸울 생각을 왜 했겠는가. 명량은 국민이 봐야 하는 영화가 아니라, 정치가와 관료들이 봐야 하는 영화다. 미국인에게 역사상 최고의 본보기는 링컨이고 남북전쟁의 게티즈버그 연설이듯이, 우리에겐 이순신과 명량해전이 있다. 링컨의 명연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은 이순신의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려워하게 할 수 있다라는 명연설로 대체된다. 이러한 자긍심이 지금 이 시기 한국 정치에 필요하다. 순천향대에 이순신 연구소가 있다. 일개 대학의 연구소일 뿐이다. 하지만, 이순신 정신을 오늘에 계승하는 중요한 연구소이다. 국회에 있어야 할 연구소를 민간이 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나서는 건 국민이다. 국가지도층은 부끄러워할 일이다. 국회가 정신줄을 놓은 지점을 선명히 보여준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국회의원들은 이참에 어서 명량 시사회를 열어 이순신정신을 생각하며, 국민을 위한 단합된 정치를 어떻게 할 것인지 대오각성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정재형 동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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