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GM

GMC는 제너럴 모터스 회사(General Motors Corporation)로 약칭 GM이라고 한다. 2차 대전 직후 미국 자동차 시장의 절반을 출하했다. 이 가운덴 미군 군용 트럭이 있었다. 군용 트럭을 GMC가 독점 생산했다. 미군용 트럭은 국내 민간인과도 인연이 있다. 그러니까 6·25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중반까지다. 그 무렵엔 버스가 흔치 않아 트럭이 빈차로 갈 땐 길가는 행인이 손 들면 태우곤 했다. 물론 유료다. 그런데 국내 트럭중엔 미군이 전쟁 때 쓴 군용 트럭을 민간에게 넘긴 GMC 트럭이 많았다. 길손을 맞은 주인이 “뭘 타고 왔느냐?”고 물으면 으레 “GMC를 타고 왔다” 할 정도로 GMC는 트럭의 대명사가 됐었다. 한데, 촌로들은 GMC를 ‘제무시’라고 발음해 “제무시 타고 왔다”고 말했다. 그 ‘제무시’가 유명한 미국의 GM이다. 근로자 수가 6만1천여명이다. 이를 4만명으로 줄인다. GM 노조는 또 2015년까지 파업을 않기로 했다. 임금 또한 협의에 따라 낮추기로 노사가 합의했다. 주요 자산도 매각했다. 법정관리에 들어가 파산 직전까지 몰렸던 GM은 이렇게 해서 파산보호 상태에서 벗어나 뉴 GM으로 거듭났다. 지난달 1일 파산보호에 들어간 지 1개월 10여일만이다. GM사태는 미국 자동차계의 관심사였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다. 오바마는 한미 FTA협정에서 자동차 부문에 문제가 많다며 재협상을 말할만큼 자국의 자동차산업에 관심이 깊다. 이런 오바마지만 GM에 대해선 단호했다. 자구 노력의 방안 제시가 없는 GM은 파산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끝내 굽히지 않았다. GM 노조는 회사 쇠락을 가져온 원인이 됐을 정도로 강성이었던 것이다. 오바마는 자구 방안의 제시로 파산보호를 졸업한 GM에 비로소 정부 차원의 지원을 강구키로 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자신은 가만히 있으면서 남더러 날 살려내라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GM은 40여일만에 파산보호에서 벗어났는 데, 쌍용자동차는 50여일째 파업농성이 계속되고 있다. /임양은 주필

위구르족

중국 신강성(新疆省)은 러시아 몽골 아프가니스탄 등과 국경을 접한 최서단이다. 고산과 초원 그리고 사막으로 형성됐다. 기원 전후 중국과 지중해 연안을 이은 내륙 아시아 횡단의 고대 통상로 중 요충지였다. 그러나 해상교통의 발달로 수 세기동안 번창을 누리던 실크로드가 쇠퇴하면서 신강성은 별 볼일 없는 땅으로 전락했다. 고대 중국의 유방이 초패왕 항우에게 밀려 그 당시 최대의 오지인 지금의 사천성 중부 파촉(巴蜀)으로 쫓겨간 땅보다 더 변방인 것이 신강성이다. 오늘날은 금·은·철·석유·석탄 등 지하자원이 풍부한 중국의 보고로 꼽히지만 예전엔 거의 버려진 땅이였다. 버려지다시피한 땅에 지금 터키계 종족이 주민의 대부분을 이룬 것은 중세기의 십자군전쟁에 연유한다.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 순례를 처음엔 이곳 원주민인 아랍인들이 방해하지 않았으나, 11세기 들어 이 지역을 점령한 터키가 기독교도의 순례에 거부 반응을 나타내어 로마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성지 회복을 제창하며 일으킨 것이 십자군 운동이다. 1096년 시작된 십자군전쟁은 1270년까지 무려 174년 동안에 대규모 원정만도 8회나 거듭했지만 터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끝내 실패했다. 그런데 터키 진영에서도 오랜 전쟁에 염증을 느껴 터키를 이탈한 일련의 부대가 있었다. 행방불명으로 알려졌던 그 부대가 마침내 정착한 곳이 바로 신강성인 것이다. 이들의 후손인 신강성 터키계 위구르(uyghur)족은 생김새도 터키인과 같고, 이슬람교를 신봉하며 터키와 비슷한 고유의 문자와 말과 풍습을 지녔다. 위구르인의 한족(漢族) 여성 강간설의 유언비어가 발단이 된 대규모 유혈사태는 양측에 큰 인명 살상의 피해를 내어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었다. 이의 강경 진압에 나선 중국 정부를 터키 정부는 “위구르족 사태는 중국 정부의 대학살”이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위구르족과 한족의 감정 싸움에서 터키가 위구르편을 든 것은 피는 역시 진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임양은 주필

사십구제

죽음에 대한 보편적 표현 가운데 사거(死去)가 있다. 죽어서 세상을 떴다는 것이다. 종교적으로는 사거의 높임말을 불교에선 열반(涅槃) 구교는 선종(善終) 신교에서는 소천(召天)이라고 한다. 일상의 높임말로는 타계(他界) 별세(別世)가 있다. 잘 쓰진 않지만 같은 뜻의 기세(棄世) 하세(下世)란 말도 있다. 임금이나 황제의 죽음엔 표현이 많다. 승하(昇遐) 붕어(崩御)는 아는 말이다. 이외에도 예척(禮陟) 척방(陟防) 선어(仙馭) 안가(晏駕) 빈천(賓天) 등이 있다. 거의가 하늘에 오른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용어는 지금은 쓰지 않는 시대다. 현대적 사거의 최고 존칭은 서거(逝去)다. 이렇긴 해도 타계나 별세보다 뜻이 크게 다른 건 아니다. 국어대사전은 타계는 ‘귀인의 죽음에’ 별세는 ‘웃사람의 죽음에’ 라고 풀이해놨다. 아울러 서거는 ‘사거의 높임말’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타계·별세·서거가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상의 관념으로는 서거가 타계나 별세보다 훨씬 높은 존칭으로 쓰인다. 국어대사전의 풀이가 틀리지 않았다면 아마 관습일 것이다. 고(故)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십구제가 지난 11일 봉하마을 인근의 정토원에서 있었다. 안장과 함께 마을에 ‘아주 조그만한 비석’도 세워졌다. 송기인 신부는 고인의 정신적 스승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그의 말이 생각난다. “(비판에서 지지로 반전된 죽음의 전환에 대해) 동정이겠지요. 죽었다는 그 점을 놓고 정치적 지지라고 볼 수 있을까요. 죽고 보니까 그래도 소통할 수 있는 대통령이라고 본 겁니다. 소탈한 어투로 친구처럼 소통했던 최초의 대통령이었지요”라고 했다. 그는 이어 “과도한 의미 부여도 좋은 현상이 아니라고 봐요. 죽음을 과도하게 활용하는 측, 그런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해요. 민주당은 실리를 취하려고만 해선 곤란해요. 한나라당도 양보할 수 없다는 거지만”이라고 말했다. 사십구제는 이승을 떠난 영가(靈駕)의 후생안락을 위하여 공양독경으로 명복을 발원하는 제(齊)다. 그런데도 이른바 ‘서거정국’의 불씨를 되살리지 못해 부리는 민주당의 안달은 영가를 혼란스럽게 한다. 이미 떠난 분이다. /임양은 주필

수족구병

입안이 헐고 손과 발, 얼굴 등에 발진이 생기는 수족구병(手足口病)은 주로 영·유아들에게 걸린다. 대체적으로 열감기 정도로 쉽게 지나가지만 뇌수막염 등 심각한 합병증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심상치 않은 병이다. 지난달 30일 현재 전국 140곳 의료기관에서 2천180명의 수족구병 환자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다. 올해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이 병에 의한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충격을 주었다. 지난 4월28일 수원에서 12개월 영아가 수족구병 발진이 생긴 뒤 무기력 증상을 보이다가 혼수상태에 빠져 5월5일 숨졌다. 서울에선 12개월 된 또 다른 영아가 지난 5월말 수족구병 증세를 보이다 6월초부터 뇌사상태에 빠졌다. 올해 벌써 46건이나 발생해 결코 안이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다. 더구나 사망 영아와 뇌사 영아에서 검출된 수족구병의 원인이 중국 전역을 강타하고 있는 엔테로바이러스71(EV71)형으로 확인됐다. 경계의 끈을 더욱 당겨야 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는 최근까지 엔테로바이러스에 의한 수족구병 환자가 10만명 가량 발생해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난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도 국내·외에서 전개되는 이 같은 상황을 우려해 수족구병과 엔테로바이러스 감염증을 법정전염병으로 지정하는 등 관리체계를 강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보건당국의 대처가 충분한 지에 대해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질병관리본부가 수족구병 사망자 첫 발생 사실을 2주나 지나 밝혔으며 예년과 비교해 수족구병이 크게 유행할 조짐은 없다는 전망도 당시 내놓았었기 때문이다. 병·의원이 환자 발생을 보건소에 신고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실제 환자숫자가 집계보다 훨씬 많지 않을까 우려되는 이유다. 늦은 봄과 여름철에 많이 발생하는 수족구병은 전염성이 강해 면역력이 약한 영·유아들에게 걷잡을 수 없이 번질 수 있다. 아직 예방백신도 개발되지 않은 상태다. 보건당국은 물끓여 먹기와 손씻기 등 개인 위생수칙을 널리 알리는 데 더욱 노력하고 어린이집 등 보육시설 종사자들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해야 한다. 영·유아가 있는 가정들도 수족구병 예방을 경시해선 안 된다. /임병호 논설위원

생수값

최근 판매가 급속히 증가한 생수값이 ‘바가지’ 수준이다. 품목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보통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생수의 경우 유통 마진이 최고 65%에 달한다. 반면 생수 한 병에 실제로 들어가는 물값은 전체 가격 중 3% 선인 20원에 불과하다. 생수의 경우 제조원가에 비해 유통 마진이 너무 과도하다는 지적이 안 나올 리 없다. 예컨대 편의점 판매 가격이 750원인 N 생수(500㎖)는 생수업체가 유통업체에 납품하는 가격이 275원에 불과하다. 475원의 차익은 유통업체의 몫이다. 역시 편의점 판매가 700원인 L 생수(500㎖)도 업체 납품가는 275원이다. N 생수의 편의점 마진은 납품가의 1.7배, 판매가격의 63%다. L 생수도 마진율이 60%가 넘는다. 대부분의 생수제품도 마진율이 60~65% 내외다. “편의점에서 생수를 구입하는 소비자들은 일상적으로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그때 그때 구입하는 사례가 많아 권장소비자가로 판매한다. 편의점은 임차료나 인건비 등 비용이 높은 구조라서 다른 업체보다 불가피하게 가격이 비싸다”고 편의점은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권장소비자가격 제도 자체가 없어졌다. 권장소비자가격 때문에 비싸게 판매된다는 해명은 말이 되지 않는다. 생수 제조업계의 불만이 없을 리 없다. “유통업체에서 납품가격은 무조건 낮추라고 요구하면서도 소비자들에게 판매하는 가격은 낮추지 않는다”며 “국민 음료수인 생수는 제조원가에 비해 유통마진이 터무니없이 높은 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옳은 말이다. 일반적으로 생수 생산업체는 도매나 대기업에 생수 원제품을 넘길 때 500㎖ 1개당 120~140원 가량의 가격을 받는다. 여기엔 물을 담는 용기 값, 라벨·뚜껑 값, 공장에서 물류센터까지의 물류비가 붙는다. 이들 비용을 제하면 실제 물값은 20원 정도다. 소비자들에겐 비싸게 팔리면서도 몇몇 생수 제조업체를 제외한 상당수 업체들은 공장유지비용조차 벌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생수값이 석유값에 버금간다’고 근래 나온 말이 과장만은 아니다. 그저 생수가 양질이면 다행이지 싶다. 소비자를 위해 생수값을 낮추는 제도적인 보완이 필요하다. /임병호 논설위원

철도대란

지난 6일 일어난 ‘철도 대란’은 우발적 단순사고가 원인이었다. 이날 오전 8시16분께다. 서울 충정로3가 재건축아파트 현장 타워 크레인이 300㎏ 가량의 자재를 옮기던 중 오른쪽 지반이 내려 앉아 크레인이 철길을 덮치면서 선로의 공급 전선이 끊겼다. 크레인 기사는 크게 다쳐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이 바람에 경부고속열차·새마을호·무궁화호 등 경부·호남·경의선을 비롯한 전철 등 100여편의 열차 운행이 막히는 등 장애를 받았다. 열차 지연으로 피해를 입은 교통 인구가 약 1백만명으로 추산된다. 수원역 등 도내 역에서도 항의, 환불 요청 등 승객들의 비난이 빗발쳤다. 승객들 가운덴 예정된 시간을 못지켜 손해를 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크레인 사고의 안전 결함 여부다. 아무래도 불가항력의 사고라고 볼 수 없는 인재다. 크레인이 잘못됐거나 아니면 현장의 안전 관리에 잘못이 있었는지에 대한 조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시설 복구의 늑장이다. 이날 열차를 기다리는 승객들이 더욱 분통을 터뜨린 것은 언제 차가 올지 모르는 예측 불허의 상태가 장시간 지속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경의선은 사고 이튿날 아침 5시10분께 비로소 복구되어 소통이 될 수 있었다. 네트워크가 발전한 사회일수록 사소한 사고가 사회에 치명적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건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네트워크가 발전하면 그 같은 위험의 개연성이 많을수록 안전 및 복구대책 또한 강구돼야 한다. 이번 사고의 복구 늑장은 평소 그 같은 대책에 소홀했거나 무대책이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우발적 단순 사고가 이토록 열차 소통에 치명상을 입혔다면, 고의적 계획 사고가 자행될 경우의 피해를 상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고의적 계획 사고는 국가 안보 관계상 있을 수 있고, 사회 교란을 위한 불량 세력이 자행할 수도 있다. 철도 관계 당국의 좀 더 긴장된 대비 태세가 있어야 하겠다. /임양은 주필

청계재단

청소년 장학과 복지사업을 위한 청계재단이 설립된다. 법무부 장관을 지낸 송정호 변호사가 설립추진 위원장이다. 재단 기금은 이명박 대통령이 낸 부동산과 동산 등 331억4천200만원 규모다. 대선 후보 때 집 한 채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사회에 내놓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킨 것이다. ‘청계’(淸溪)는 대통령의 아호다. 그는 재산 기부의 소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음은 중간 부분이다. ‘야간 고등학교라도 꼭 가야 한다고 저를 이끌어 주셨던 중학교 담임선생님, 주경야독의 고등학교 시절, 시장통에서 가게 앞에 좌판을 놓고 장사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가게 아저씨, 일용직으로 일하는 저에게 책을 주시면서 대학입학시험을 보라고 강하게 권유하셨던 청계천 헌 책방 아저씨, 막상 대학에 합격하고도 등록금이 없자 등록금을 미리 당겨 마련해 주면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할 수 있도록 대학 4년간 일감을 주셨던 이태원 재래시장 상인들…. 이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오늘이 있기까지 저를 도와주신 분들은 하나같이 가난한 분들이었습니다. 그 분들에게 보답하는 길의 하나가 오늘도 가난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분들을 위해서 제 재산을 의미롭게 쓰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또 이런 말도 했다. ‘제가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사회를 위해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꽤 오래 전이었습니다. 기업을 떠나면서 저는 이미 그 생각을 굳혔고 ‘신화는 없다’라는 책에서 그 생각을 밝힌 바 있습니다.’ 말미 부분에서는 ‘확신하건대, 재산보다 더 귀한, 더욱 큰 사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라고도 했다. 흔히 재물을 탐하는 대통령이 있다는 말은 들었어도, 이미 지닌 재산을 모두 사회에 내놨다는 대통령이 있다는 말을 듣기는 국내외에서 이번이 처음이다. 외신에서도 주요 뉴스로 타전했다. 호사가들의 비아냥이 있다면 ‘당신은 남을 위해 뭘 했느냐?’고 묻고 싶다. 인간은 어차피 ‘공수래 공수거’다. ‘청계’의 재산 환원은 숙연하다. 기부문화의 새 장을 열었다. /임양은 주필

안보 불감증

전투력 장애 요인으로 꼽는 세 가지가 있다. 핵 공격, 전력 차단, 사이버 테러 등이다. 이 가운데 가장 능률적이라고 보는 것이 사이버 테러다. 상대의 전산망을 해킹하거나 교란시키는 것이 사이버 테러다. 해커들의 군 전산망 시도가 하루 평균 9만5천건에 이른다. 국군 기무사령부가 얼마전 국방정보보호콘퍼런스에 이 같이 밝혔다. 놀라운 현상이다. 이 중에는 절반 이상이 중국을 경유해 들어오는 등 세계 도처의 해킹 공격이 해가 갈수록 심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양정권 역시 예외가 아니다. 북측은 해커 전문의 정예부대를 두고 있다. 물론 한국군 전산망 공격이 주목적이다. 군의 기밀 정보를 빼내기 위한 것이다. 국방의 기밀 정보는 곧 국가의 안위와 관련된다. 우리 군의 전산망 공격을 부단히 시도하고 있는 것이 이 때문이다. 사이버 안보기능의 정보전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정보전선은 음지에서의 싸움이다. 보는 사람도 없고 보여줄 수도 없다. 이래서 일반은 잘 모른다. 잘 모르긴 해도 정보전은 평화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안보관의 경각심이 너무 느슨하다. 음지의 정보전엔 그런다 쳐도 양지에서 나타나는 도전에도 마냥 무덤덤하다. 북의 지난 2차 핵 실험에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지난 2일에는 동해에 또 미사일을 쏘았다. 함경남도 함흥시 신상리 미사일 기지에서 단거리 미사일 4발을 발사했다. 5월29일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리에서 지대공 미사일을 쏜지 34일만이다. 이에 이어 4일엔 깃대령서 단거리 미사일 7발을 또 쐈다. 한두 번도 아니다. 자꾸 쏘아대는 미사일이다 보니 ‘또 그러는가 보다’라고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진 모르겠다. 정부에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안보에 과민성을 갖는 것도 바람직하진 않다. 예컨대 라면 등 사재기다. 그러나 ‘북이 설마한들 전쟁을 일으키랴’하고 태무심해서는 허점의 노출이다. 저들은 속전속결로 승산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남반부 해방의 혁명을 완수한다’는 것이 불변의 대남 전략이다.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은 우리측의 대비 태세에 달렸다. /임양은 주필

국제펜클럽

런던에 본부가 있는 ‘국제펜클럽’(International P·E·N Club)은 1921년 영국 런던에서 도슨 스코트 여사에 의해 설립됐다. 초대 회장으로는 영국의 극작가이며 1932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존 골즈워디가 추대됐다. PEN이라는 단체 명칭은 ‘시인(poets)·극작가(play wrights)·편집자(editors)·수필가(essayists)·소설가(novelists)의 머리글자들을 따서 만들었다. 범세계적 작가 모임으론 유일한 조직이다. 문학을 증진하고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며 범세계적인 작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데 그 목표를 두었다. 특징은 언론인도 참여하는 점이다. 표현의 자유 없이는 문학은 물론 국제적인 문화 협력과 이해 증진이 이루어질 수 없다. 국제펜클럽은 그래서 정치적인 검열에 반대하며, 박해 받거나 투옥되거나 혹은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다가 살해된 작가들을 위해 강력한 목소리로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 바로 국제펜클럽 본연의 임무다. 국제펜클럽 초창기엔 유럽에만 지역본부(Center)가 있었다. 유럽 외 지역의 작가들이 국제펜클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1926년 15개국의 회원이 베를린에서 회동했고, 2008년 현재 104개국 145 지역본부에 이른다. 국제펜클럽 한국본부(P·E·N· Korean Centre)가 바로 104개국 145 지역본부 중 하나다. ‘펜 헌장’에 명시했듯 국적, 언어, 인종, 피부색이나 종교를 불문하고 저작물을 출판한 모든 작가들에게 회원 자격을 열어 놓았다. 국제펜클럽한국본부는 1954년 6월 비엔나에서 열린 제27차 세계 PEN대회에서 인준을 받고 정식 회원국으로 출범했다. 초대 회장으론 변영로 선생이 추대됐다. 이후 주요섭·모윤숙·백철·전숙희·문덕수·김시철·성기조 선생 이 한국본부를 이끌어 왔다. 사단법인으로 바뀌어 문효치(32대) 시인에 이어 올해부터 이길원 시인이 33대 이사장의 중책을 맡았다. 특히 2012년 제78차 국제펜클럽 서울 총회 개최를 위해 국내외로 동분서주하는 노고가 남다르다. 1988년의 제52차에 이어 한국에서 두번째 열리는 제78차 총회는 대한민국의 문학과 역사는 물론 민주주의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대단히 큰 행사다. 국가적인 지원과 협력이 요구된다. /임병호 논설위원

‘음란클럽’

남녀가 노골적인 음란행위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신종 ‘음란클럽’이 등장했다. 최근 서울 강남구 번화가에 있는 속칭 ‘커플 테마 클럽’에선 그룹섹스나 스와핑까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일삼고, 나머지는 ‘관음(觀淫)’ 차원에서 이런 장면을 시각적으로 즐긴다고 한다. 물론 단속이 요구되지만 문제는 실정법 위반 여부에 대한 판단과 규제 법규 마련의 필요성에 대해서 형사법학자들의 의견이 갈리는 점이다. 하지만 대법원 판례는 몇 차례 있있다. 가장 최근 판례는 2006년 요구르트 제품 홍보 이벤트 사건이다. 전라의 여성 누드모델들이 일반 관람객 수십 명이 있는 자리에서, 알몸에 밀가루를 바르고 무대에 나와 분무기로 요구르트를 몸에 뿌려 밀가루를 벗겨내는 방법으로 알몸을 드러내는 행위를 공연음란죄로 인정했다. 당시 대법원은 ‘음란한 행위’를, 일반인의 성욕을 자극하며 성적 흥분을 유발하고 성적 수치심을 자극하는 행위로 규정했다. 성행위를 묘사하거나 성적인 의도를 표출한 것이 아니라도 음란한 행위로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공연음란죄에 관한 법 조항인 형법 제245조는 ‘공연히 음란한 행위를 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50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공연(公然)’이란 불특정 다수인이 인식할 수 있는 상태란 뜻이다. 부부나 연인 간의 성행위라도 타인의 눈에 띄는 장소에서의 행위는 ‘공연한 음란행위’가 될 수 있다는 해석이다. 인간은 성적인 자유와 만족을 누릴 권리가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혐오감을 주거나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사회윤리를 파괴하면서까지 자신의 성적 만족을 추구할 수는 없다. 그 것이 사회적 도덕이며 통념이다. 일명 ‘성행위 훔쳐보기 클럽’은 앞으로 이보다 더한 사회 병리현상을 초래할 게 분명하다.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사회적 제재를 가해야 되지만 ‘개인의 성생활 자유’라는 투명장벽에 가로 막힌다. 원죄와 같은 인류의 성생활, 스와핑 같은 탐닉행위를 누가 제지할 수 있으며, 법적으로 아무리 단속하더라도 근절되지 않는다는 논리다. 지키지 않고 적용하지 않으면 범죄 앞에서 모든 법은 무용지물이 된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법이 점점 그 기능을 잃어간다. /임병호 논설위원

‘자기표’ 농장

여름철 먹을거리는 푸성귀다. 상추·오이·토마토·깻잎·고추 등 이밖에도 많다. 이런 푸성귀를 소비자들이 직접 가꾸는 도심속 텃밭이 점점 늘어간다. 집안의 손바닥만한 땅에 가꾸는 푸성귀 밭도 있지만, 도시에선 자기 땅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래서 가장 많은 것이 옥상농장이다. 흙을 담은 수십 개의 화분에 온갖 푸성귀를 재배하는 것이다. 이 바람에 옥상 공간을 서로 다퉈 옥상농장도 경쟁시대로 가고 있다. 주말농장도 인기다. 근교일 것 같으면 주말농장 임대 가격이 보통 26.4㎡(8평)에 10만원이다. 요즘 같으면 감자 수확이 한창이다. 여름비에 옥수수가 무럭 무럭 자라고 있다. 수경법(水耕法)도 있다. 수경재배라고도 한다. 발코니나 거실을 이용해 푸성귀를 가꾸는 것이다. 흙을 사용하지 않고 물로 식물을 배양한다. 물에는 질소·인·칼슘·마그네슘·철·유황 등을 녹여 수경재배의 자양분으로 쓴다. 이런 집안의 텃밭은 물론이고 옥상농장, 주말농장, 수경법 등은 정서가 메마르기 쉬운 도시 생활에서 자연친화의 심성을 갖게 한다. 심신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 또한 취미생활로 재배한 푸성귀는 그야말로 무공해 작물이다. 시중에 유통되는 푸성귀가 잔류농약 과다로 말썽이 되곤하는 마당에 농약 한방울 치지 않은 ‘자기표’ 재배 작물은 100% 청정물인 것이다. 무엇보다 어린 자녀들에게 참 좋다. 아이들과 함께 씨를 뿌리고, 작물이 자라는 것을 관찰하다가, 또 아이들과 더불어 수확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느끼는 감성은 인격 형성에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이다. 한데, 이 같은 ‘자기표’ 농사도 농사다. 농사는 그냥 파종만 하면 절로 수확되는 게 아니다. 마치 애기 키우듯이 키워야 하는 것이 농사다. 정성과 땀을 들이면 더 들인 것만큼 수확이 달리 나타난다. 같은 푸성귀라도 ‘자기표’ 푸성귀는 맛이 다르다. 자가 소비하는 가족들에게 기쁨을 준다. 인간은 역시 자연과 접근하는 것이 더 건강하다. /임양은 주필

한맹(漢盲)

경기도청 공무원 6명 중 1명이 경기도(京畿道)를 한문으로 못쓴다고 하여 화제가 됐었다. ‘한맹’(漢盲)인 것이다. 좀 오래된 얘기다. 도내 한 중학교 축구팀이 자매학교인 일본 어느 중학교 축구팀과 원정 경기를 가졌다. 물론 친선 경기다. 경기는 3-1로 완승을 거뒀다. 여기까진 좋았다. 사단은 경기가 끝나고 나서 벌어졌다. 일본 선수들이 자기 이름과 주소를 한문으로 써주면서 우리 선수들더러 역시 이름과 주소를 한문으로 써달라는 것이었다. 한문을 모르는 우리 선수들은 우르르하고 감독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한문을 모르긴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편지로 우정을 나누고 싶어 했던 일본 선수들의 순수한 우의는 이렇게 해서 결국 불발되고 말았다. 우리 선수들은 경기에서는 이겼지만 망신을 당한 셈이다. 일본에서는 자기네 글인 ‘히라가나’에다 한문을 병용해 쓰기 때문에 중학생만 되어도 한문 실력이 상당한 것이다. 한문은 까다롭고 귀찮은 글이긴 하다. 그러나 한·중·일 동양 삼국은 어차피 한문문화권이다. 엄연히 존재하는 한문문화권을 부정한다고 해서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전엔 신문에서 한문을 사용하여 신문 읽는 정도의 한문은 상식으로 알았던 것이, 지금은 신문도 한글 전용이 되어 한문 익힐 데를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한문을 모르는 성인이 어찌 경기도청 뿐이겠는가, 한문으로 쓸줄 모르는 글자가 어찌 ‘京畿道’ 만이겠는가, 자기 부모 이름도 한문으로 쓸줄 모르는 사람이 숱하다. 영어는 외래어도 아니고 얼핏 들어선 무슨 소린지 모를 갖가지 조어를 만들어 쓰는 세태다. 그런데 한문문화권에서 한문은 아주 등한시 한다. 뭐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컴퓨터를 모르는 ‘컴맹’은 흉이 되면서 한문을 모르는 ‘한맹’은 으레 그러는 걸로 친다. 이 바람에 멀쩡한 젊은이들로 하여금, 알게 모르게 지적 결함을 갖게 만든다. 학교에서 한문을 잘 가르치지 않는 것이 잘못이다. 역대 정부의 교육정책에 문제가 많은 것은 사교육 분야만이 아니다. 한문교육을 소홀히 한 죄가 크다. /임양은 주필

5만원권

어느 택시 기사의 얘기다. “글쎄, 반나절이 되도록 5만원을 못벌었는 데, 기본요금에 5만원짜릴 덜렁 내는 손님이 있잖아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거스럼 돈이 없어 요금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날품꾼들도 하는 말이 있다. 진종일 품 팔아 삯을 받으면 돈을 세는 맛이 있어야지, 달랑(5만원짜리) 한 두장 쥐면 금액은 같을지라도 허망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5만원짜리 고액권이 나온지 일주일이 다 된다. 유통 첫날인 지난 23일 은행 창구엔 새로 나온 고액권으로 돈을 바꾸려는 고객들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고액권을 바꾸기는 고사하고 만져도 못 본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희한한 것은 고액권 유통 직후 도둑이 부쩍 늘었단 사실이다. 더러 집 장롱에 비상금으로 놔둔 돈을 고액권으로 바꾸는 것이 아무래도 편할 것 같아 바꿔둔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됐다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 도둑협회에서 틈을 노린 것 같다”며 농조로 말문을 연 어느 피해자는 자신만이 아니고, 주변의 아는 사람들 중에도 피해자가 적잖다고 말했다. 고액권을 노린 도난 사례는 집 열쇠를 바꾸는 사람들이 갑자기 는 것으로도 많을 것으로 보는 짐작이 간다. 이 며칠 들어 도둑 때문이라면서 열쇠를 바꾸는 손님이 심심찮게 찾는다는 것은 한 열쇠상의 말이다. 5만원짜리 새 돈이 생김으로써 10만원짜리 수표 발행에 드는 비용이 절감된다고 한다. 경제규모에 걸맞는 유통 편의가 증대 된다고도 한다. 하지만 서민들은 돈이 헤퍼질 것을 걱정한다. 그러잖아도 인플레이션의 요인이 없지않은 판에 고액권 유통이 물가 상승을 더 부채질 할까봐 걱정인 것이다. 이런 익살꾼도 있다. 그간 보아온 지금까지의 뇌물 거래에서 사과상가 하나면 만원짜리 돈이 1억원 들어가는 것으로 아는 것이 통상적 인식이다. 그런데 이제 사과상자 하나에 5억원이 들어가게 됐으니, 뇌물 단가가 5배로 뛰게 됐다는 것이다. 모든 일엔 순기능과 역기능이 다 있다. 경제를 운용하는 것은 사람이지 5만원짜리 돈인 것은 아니다. 고액권의 역기능 보단 순기능을 살려 서민들이 잘 살 수 있는 경제가 되면 좋겠다. /임양은 주필

‘드라마 ‘선덕여왕’

MBC - TV 사극 ‘선덕여왕’이 인기를 얻으면서 드라마의 내용과 역사적 사실이 또 여론에 올랐다. 작가의 상상력, 허구가 시청자의 관심을 높일 수는 있지만 자칫 잘못된 역사 지식을 주입할 수 있는 위험성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선덕여왕의 어린 시절 ‘덕만’은 쌍둥이동생으로 나온다. 이후 태종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의 어머니 ‘천명’은 덕만의 언니로 설정됐다. 그러나 김부식의 ‘삼국사기’ 5권엔 “선덕왕이 즉위했다. 휘는 덕만이다. 진평왕의 장녀로서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똑똑했다.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국인(國人)이 덕만을 세웠다.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를 올렸다”고 기술됐다. 반면 1989년 발견된 박창화의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덕만이 차녀로 등장한다. 드라마에서 덕만은 ‘미실’의 암살 계획을 피해 진평왕의 시녀 ‘소화’의 품에 안겨 중국으로 피신한다. 덕만은 그 곳에서 거간꾼 노릇을 하며 중국어와 로마어도 배우고 다양한 경험을 쌓는다. 그러나 이 부분은 드라마의 극적 재미를 위해 작가의 상상력이 동원된 부분이다. ‘신라사학회’는 “선덕여왕의 출생 연도와 성장과정을 기록한 사료는 없지만 중국에 간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한다. 권력욕의 화신 미실은 선덕여왕과 대립각을 세우며 ‘정치 전쟁’을 펼치고 즉위와 통치를 방해한다. 하지만 진흥왕부터 진지왕, 진평왕까지 3대 왕을 섬겼던 미실은 선덕여왕이 즉위할 즈음엔 이미 사망했을 것으로 보인다. 진위 여부에 따른 문제점은 있으나 ‘화랑세기’에 미실의 동생 ‘미생’이 550년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됐다. 즉 미실은 549년 이전에 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선덕여왕이 즉위한 632년에 미실은 적어도 83세다. 비교적 짧았던 당시 평균 수명을 감안하면 미실은 632년에는 이미 숨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선덕여왕은 즉위 당시 50세가 넘었을 것으로 학계에선 본다. ‘삼국사기’나 일연의 ‘삼국유사’에 미실은 나오지 않는다. ‘선덕여왕’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극 방영 때 정사(正史)에는 어떻게 기록돼 있는지 자막이나 내레이션 등으로 보충 설명을 할 필요가 있다. /임병호 논설위원

식인상어

우리나라 해역에 식인상어가 처음 출현한 것은 1959년 여름이었다. 충남 보령시 대천해수욕장에서 수영을 하던 대학생이 식인상어에 물려 숨진 이후 현재까지 6명이 상어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가장 최근의 상어 피해는 2005년 6월13일 태안 앞바다에서 발생했다. 태안군 근흥면 앞바다에서 전복 채취를 하던 이 모 여인이 수심 8m 깊이의 해역에서 작업을 하던 중 상어에게 왼쪽 종아리부터 허벅지를 물려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한 부상을 입었으나 부근에 있던 낚싯배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에 앞서 2002년 6월 전북 부안군 위도면에서 길이 1.5m의 청상아리가 잡혔으며 2001년 5월엔 보령시 오천면 대길산도 해상에서 2m 크기의 식인상어가 나타나 조업 중이던 잠수부가 긴급 대피하기도 했다. 또 1996년 5월에는 군산시 옥도면 연도 근해에서 잠수부 1명이 식인상어에 의해 희생되는 등 매년 5, 6월 식인상어가 중부 서해안권에 자주 출현했다. 이렇게 과거엔 주로 서해에서 상어가 출현했지만 올해엔 동해·남해에서도 식인상어가 잇따라 발견돼 한반도 연안해역 전역이 상어 안전지대가 아니다. 수온상승과 난류세력 확대로 인한 현상인데 한반도 연안에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위험 상어는 백상아리, 청상아리, 귀상어, 무태상어, 고래상어로 추정된다. 백상아리는 성질이 급하고 포악하다. 청상아리는 몸집이 약간 작을 뿐 백상아리와 비슷하다. 귀상어는 머리가 큰귀가 달린 것처럼 생겼으며 무태상어 역시 사람을 공격하는 식인상어다. 실제로 올 2월28일과 3월4일 강원 묵호 등 동해안에서 길이 3.5~4.7m, 무게 1~1.5t의 백상아리가 그물에 걸렸다. 또 3월5일에는 남해안인 제주도 북서부 해역에서 4.4m 길이의 백상아리가 잡혔다. 여름철을 맞아 난류 세력이 해안으로 확장되면서 상어의 먹이인 고등어, 삼치, 오징어, 소형 돌고래 등 소형 어류가 연안으로 몰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인데 수심이 얕은 연안에서도 상어 출몰 가능성이 높다. 영화 ‘죠스’처럼 우리나라 해안에서도 식인상어가 출현할 수 있다는 경고다. 여름휴가 중 해수욕장을 찾는 피서객들은 ‘설마가 사람 죽인다’는 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임병호 논설위원

인민군 병사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38선 일원에서 남침이 시작된 6·25전쟁이 터졌을 당시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전남 담양군에 주둔했던 국군 중대장이던 선친은 후퇴했으나, 국군 가족이라고 하여 인민군 병사가 나와 사택을 감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따발총을 든 인민군 병사가 무서웠으나 이내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거의 비슷한 또래였기 때문이다. 신기해 보인 따발총을 분해도 해보이던 그는 3월까지 평양 고급제1중학교 4학년 재학 중 갑자기 소집되어 인민군이 됐다고 들려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보다 불과 두 살 더 많은 그는 서너 달 전만도 학교엘 다니다가 남침전쟁에 동원된 것이다. 따발총 말인데 원래는 다발총(多發銃)이다. 50발이 장전됐기 때문에 ‘따르르’하고 쏘아대면 근거리에서는 공포의 대상이 되는 당시로서는 인민군만 가진 신무기였다. 그런데 지금도 기억되는 건 분해 해 보인 총기 내부 구조는 무척 간단했다는 점이다. 낙동강 전선이 한창일 때 남쪽 장정들을 군인민위원회에서 강제 징집한 것이 이른바 의용군이다. 그 무렵 중학교 3학년 부터는 의용군 징집 대상이 됐었다. 그래서 동네 어른들로부터 “양은이 너는 까닥하면 아버지하고 맞총질하겠다”며 걱정삼은 놀림을 받기도 했다. 끌려가면 겨우 총쏘는 것만 배우고 이내 전선에 투입됐다. 한 마디로 인민군들 총알 받이가 의용군이었던 것이다. 그땐 잘 몰랐으나 한달 쯤 사택을 지키던 인민군 병사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것은 전황이 급박해져 부대가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병사가 아니고 전사다. 인민군은 장교는 군관이라고 하고, 병사는 전사라고 한다. 그 전사는 전선에서 국군을 죽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 죄인이지, 그는 하수인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도 생각되는 것은 나나, 그 전사나 얼굴에 복숭아 털이 가시지 않은 소년이었다는 사실이다. 6·25가 다가오면 문득 생각나는 게 그 전사의 생사 여부다. 전쟁에서 죽지않고 살았다면 많이 늙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내 머리엔 “전쟁이 끝나면 빨리 학교로 되돌아가 공부하고 싶다”며 미소짓던 소년 전사의 얼굴로 남아 있다. 전쟁은 참으로 무섭다.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든 용서 될 수가 없다. /임양은 주필

MB의 파격 인사

연공서열 중심의 인사는 안정감은 있으나 무사안일에 흐르기 쉽다. 연공서열을 깬 발탁인사는 불안한 반면에 개혁성이 있다. 대체로 정돈된 시기에는 연공서열, 비상시기에는 발탁인사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천성관 서울지검장을 검찰총장, 백용호 공정거래위원장을 국세청장으로 내정한 인사는 충격이다. 백용호 내정자의 국세청장 외부 영입은 국세청이 생긴 이래 처음이다. 고질적 비리 폐습을 수술키 위해서는 기존의 내부 조직과 무관한 청장이어야 한다고 본 것이 외부 기용의 배경인 것 같다. 천성관 검찰총장 내정자는 검찰 내부 기수를 두 단계나 건너뛴 고강도 파격이다. 하지만 연공서열을 깬 총장인사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김태정 전 검찰총장은 서열 순위 3위에서 총장으로 발탁되는 등 서열 파괴의 사례가 없지 않다. 법무부 장관은 검찰총장과는 좀 다르지만 그래도 검찰총장에 대해 지휘권을 지닌 직위다. 이런 자리에 강금실,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이 기용된 것 역시 서열 기수가 가장 높아 임명됐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서열 파괴의 전례가 있었긴 해도 천성관 서울지검장의 검찰총장 내정은 가히 기록적인 서열 파괴다. 검찰 내부의 필연적 물갈이가 대대적으로 예견된다. 대통령의 검찰총장, 국세청장의 고강도 발탁인사는 현 시점을 비상시기로 보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문제는 평가다. 성공한 인사냐, 실패한 인사냐는 속단은 이르다. 앞으로 두 내정자가 청문회를 거친뒤 정식으로 임명되고 나서 일하는 것을 보고 판단할 일이다. 백용호 국세청장 내정자는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부터 함께 일해온 ‘MB맨’이다. 천성관 검찰총장 내정자 또한 각별한 인연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 내정자가 50대 초반으로 ‘연부역강’하다. 걱정되는 건 개혁의 실패 전철을 이들도 되풀이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연공서열이 능사인 것은 아니다. 유능한 후배가 있으면 선배를 앞질러야 조직의 활성화, 즉 발전을 기한다. 그러나 개혁성을 살리지 못한 발탁인사는 조직의 불안만 가져오는 폐단이 있다. 과거의 발탁인사가 성공하지 못한 연유가 개혁성을 살리지 못한데 있다. MB의 이번 파격 인사는 성공할 것인가? /임양은 주필

도의회는 ‘개꼬리’?

‘개꼬리는 삼년 묵혀도 황모(黃毛)가 안 된다’는 속담이 있다. 황모는 족재비 꼬리털이다. 좋은 붓을 매는데에 으뜸가는 재료로 쓰인다. 경기도의회는 아무리 생각해도 황모가 될 수 없는 개꼬리인 것 같다. 걸핏하면 보채는 돈 타령 소릴 듣기에도 이젠 신물이 난다. 한데, 도의원들은 신물도 안 나는 모양이다. 염치를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전국에서 가장 높은 광역의원 월급을 받고 있는 것이 경기도의회다. 그런데 보도된 기사를 보니, 관광성외유로 지탄받기 일쑤인 해외연수비를 1인당 연간 180만원에서 250만원으로 39%나 올려 달라고 행정안전부에 건의한다는 것이다. 또 있다. 지금 받고 있는 의장 연간 업무추진비 6천360만원, 부의장 3천120만원, 상임위원장 2천304만원, 의원 610만원으로는 물가가 올라 모자란다며 20% 인상을 획책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모두 약 3억원의 추가부담이 생겨 도민의 혈세가 더 축난다. 돈이 궁한 사람들도 아니다. 대부분의 도의원들은 본업, 즉 생업은 따로 있고 의원직은 부업인 겸업의원들이다. 이런 터에 예산 부담을 늘리는 돈·돈 돈노랠 일삼는 건 예산을 한 푼이라도 더 빼먹고 보자는 심산인 것으로, 이는 지방자치정신의 위배다. 지방자치에서 지방의원 본연의 소임은 주민들이 세금을 덜 내도록하기 위해 되도록이면 예산을 줄이고, 편성된 예산은 제대로 집행됐는지를 감시하는데 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경기도의회는 마치 예산은 공돈인 것처럼 여기지 않고서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잇속 챙기기에 안달인 것은 유감이다. 정작 물가가 올라 고통받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도대체 도의원들이 물가 때문에 무슨 고통을 받는단 말인가, 경제난에 실직가장들이 속출한다. 최고 연봉에도 욕심이 차지 않은지 뭘 한다고 해외연수비며 업무추진비를 올려달라는 것인가, 오히려 깎아야 할 일이다. ‘앉을 자릴 보고 발 뻗으라’고 했다. 경기도의회의 그 같은 건의가 행정안전부에서 통할리 없다. 공연이 체신만 떨어뜨린다. 경기도의회의 이런 병폐가 한나라당 ‘1당 의회의 전횡’에서 비롯된 사실은 한나라당 경기도지부가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민심 이탈을 우려한다면, 한나라당 도의회의 민심 이탈 요인의 행태를 당 차원에서 걱정해야 할 것이다./임양은 주필

해병대

한국 해병대는 1949년 4월15일 380명으로 창설됐다. 현재는 2만6천여명이다. 현재 연평도(연평부대), 백령도(6여단), 포항(1사단), 김포(2사단)에 주둔하고 있다. 6·25 전쟁 당시 해병대는 ‘전략도서 확보작전(1951~1953)’을 통해 서해 5도(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를 점령했다.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1951년 함경남도 원산 앞바다 여도에 상륙했다. 영흥만 일대 신도 등 7개 도서지역을 점령하기도 했다. 함경북도 명천 부근의 양도와 평안남도의 석도, 초도에도 상륙했다. 1953년 휴전협정이 됐다. 북한과 중공군은 38도선을 경계로 각자의 영토를 원상복귀시키고자 했고 한국과 유엔군은 현재의 실 점령지를 기준으로 주장했다. 결국 ‘전략상의 이유’로 해병대가 북한 측 영해 깊숙이 위치한 여도와 양도 등에서 철수하면서 현재의 서해 5개 도서만 아군 통제 하에 두게 됐다. 해병대가 백령도, 연평도에 주둔하는 이유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서울을 탈환한 해병대는 북진했다. 한반도 통일을 위해 고성과 운산, 함흥까지 진격했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4 후퇴를 하게 됐다. 그해 2월 한미 연합군의 서울 재수복작전이 전개됐다. 1951년 3월부터 ‘김포지구 작전’을 통해 김포 반도를 완전히 장악한 해병대는 1953년 휴전 시까지 한강을 사이에 두고 중공군의 수도 서울 침공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지금 김포, 강화에 해병 2사단이 주둔하게 된 동기다. 1951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은 “수도 서울을 지킬 수 있도록 ‘가장 강한 부대’인 한미 해병대를 장단(사천강)지구로 배치해 달라”고 벤 플리트 미8군 사령관에게 요구했다. 당시 강원도 양구군 도솔산 지구에 있던 해병본진 1개 연대가 1952년 3월 파주 장단지구로 옮겨졌고 이듬해 휴전이 되면서 해병대는 1959년까지 파주지역에 머물렀다. ‘귀신 잡는 해병’은 용맹과 전우애에서 나온 말이다. “나는 국가전략 기동부대의 일원으로서 선봉군임을 자랑한다”는 ‘해병의 긍지’ 첫 마디다. 전역한 이후의 ‘해병전우회’ 봉사 활동도 대단하다. 해병대 병력을 감축하려는 계획은 당치 않다. 백지화해야 된다. /임병호 논설위원

김홍집

김홍집(金弘集·1842~1896)은 26세인 1867년 과거에 급제, 벼슬길에 나섰다. 1880년 수신사가 돼 일본으로 간 그는 서구문물을 일찍 받아 들여 일본에서 많은 것을 배워 돌아왔고,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과 깊이 사귀어 그의 논문인 ‘사의조선책략’을 받아왔다. “조선이 독립을 유지하려면 청나라와 친하고, 일본과는 평화를 지키고, 미국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조선이 일본과 청나라에만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김홍집은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만들고, 지석영으로 하여금 종두법을 널리 퍼뜨리도록 했으며, 일본의 발달된 문물을 배우기 위해 신사유람단도 만들어 보냈다. 또한 미국, 영국,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와도 조약을 맺었다. 그는 이렇게 해야만 조선이 많은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1884년 김옥균 등 개화파는 일본으로부터 군사, 재정 문제를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우정국 개설 피로연에서 정변을 일으켰으나 일본은 개화파와의 약속을 저버렸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함으로써 갑신정변은 이른바 ‘3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김홍집은 갑신정변의 뒤처리를 한 공로로 좌의정이 되었으나 청·일의 압박에 밀려 불리한 조약을 체결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그뒤 10년동안 한직에서 조용히 지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10년 뒤 조선은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맞았다. 일본 주도하에 갑오개혁을 선포하고 근대 국가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이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군국기무처’를 만들었고 다시 돌아온 영의정 김홍집이 그 책임을 맡게 됐다. 500년 넘게 이어오던 의정부와 6조를 없애고 총리대신 한 사람이 모든 일을 감독하고 책임지게 하였다. 이로써 김홍집은 우리 역사상 마지막 영의정이자 초대 총리대신이 됐다. 갑오개혁을 통해 조선은 빠르게 변해갔다. 양반 중심 사회에서 모든 백성이 주인인 나라로 탈바꿈했다. 누구나 교육 받고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이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가 꿈꾸던 새나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조선을 다스리기 쉬운 나라로 만들기 위해 강요한 것이다. 나라에 힘이 없으면 국익도 없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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