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없는 지구촌을 상상하면 태고적의 대자연 그대로다. 온갖 생물체가 헤알릴 수 없이 많지만, 이들이 어울리는 생태계가 자연을 파괴하진 않는다. 환경 보존면에서 보면 유독 인간이 생긴 게 실책이다. 인간의 지능이 끝없는 문명의 발달을 추구하면서 환경이 파괴돼 간다. 인간의 삶은 그 자체가 환경파괴다. 예컨대 석유는 인류의 문명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천혜의 선물이지만 지구촌을 오염시켜 온난화 현상을 가져왔다. 남극의 빙산이 녹아내리고, 북극의 빙벽 또한 녹아 무너지고 있다. 이만이 아니다. 대기권의 오존층이 파괴돼 재앙은 하늘에서도 예고되고 있다. 지상에서는 세계 곳곳에서 홍수와 가뭄 등 기후 및 기상 이변이 심화돼 간다. 먼 나라 얘기만 할 일이 아니다. 국내 연안에서 나타나는 이상 징후는 지구촌 이변이 우리 주변에도 가까이 다가왔다는 신호다. 예전에 볼 수 없었던 괴상한 바닷고기가 잡히곤 하는 건 조류변화에 의한 남방 어류의 북상인 것이다. 문명의 발달은 이에 수반되는 환경파괴를 비례한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문명은 더 발달하고, 앞으로 또 더욱 발달할 것이다. 이로인한 재앙의 끝이 언제일지는 예기치 못해도 언젠가는 치명적인 종말이 있을 것이다. 이를 알면서도 멈출 줄 모르고, 멈출 수도 없는 것이 또한 인류문명의 발달이다. 환경론자들이 환경파괴를 성토한다. 지구촌을 지키자고 들고 나서는 것은 절실한 과제다. 지구는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지구가 망가지면 인류는 갈 곳이 없다. 그러나 환경론 역시 절대적이지 못하고 상대적인 것은 인간생활이 하나에서 열까지 다 환경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가령, 집을 짓는데 단독주택을 짓거나 아파트를 짓거나 자연을 훼손하긴 마찬가지다. 이러한 정도 차이를 두고 어디까지를 환경보호고, 어디서부터 환경파괴라고 획일적으로 선을 긋기는 어렵다. 생활편의를 위한 모든 시설, 모든 사업이 다 이렇다. 환경론은 존중돼야 하지만 답을 내리기가 난해한 데에 문제가 많다. 환경 문제엔 절대적 정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임양은 주필
보부상은 장돌뱅이다. 닷새만에 서는 5일장 장터를 날마다 번갈아 가며 찾았다. 행상을 하는 보부상도 있었지만 장돌뱅이 보부상이 많았다. 신문 방송이 있을 수 없었던 옛날에 이들은 이 지역 소식이며, 저 지역 소식을 가는데마다 전하는 뉴스 전달자 역할도 했다. 재래시장은 전통시장을 말한다. 5일장 장터가 재래시장이다. 지금 명맥을 유지하는 재래시장은 성남의 모란시장 등 정도다. 맨마당 장터에 차일 등을 치고 멍석을 깐 난전에서 갖가지 상품을 팔았던 장터는 장꾼들을 위한 국밥 노점이 있었고 대장간이 있었다. 한데아궁이 가마솥에 끓이는 국밥은 구수한 냄새가 장꾼들의 입맛을 당겼고, 대장간은 농기구 보수를 위한 필수 코스였다. 지금 재래시장을 살리자고 흔히들 말하지만 5일장 장터같은 재래시장은 없다. 집단상가를 재래시장이라고 하는데 이는 어폐가 있다. 재래시장이라기 보다는 재래상권 또는 지역상권이란 표현이 옳다. 초대형 유통상가가 거의 외래자본인데 비해 옛 장터가 집단상가화한 재래시장은 토박이 지역상권인 것이다. 초대형 유통상가에 들어가는 소비자들의 돈은 그날로 지역을 이탈, 서울로 간다고들 말한다. 서울 뿐만이 아니고 외국 자본의 초대형 유통상가는 소비자들의 돈이 외국으로 빠진다. 이 때문에 지역상권을 이용하자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물건이 싸면서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소비자들의 소비심리다. 물건을 사는데 애국심이나 애향심을 호소하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 재래상권, 즉 지역상권도 초대형 유통상가와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속담에 “외삼촌 떡도 커야 사먹는다”는 말이 있다. 초대형 자본과 경쟁하는 덴 자본 외적인 것도 있다. 이런 것을 잘 찾아 지역 소비자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재래상권이 부하받은 전략인 것이다. 또한 기왕이면 재래상권을 이용하는 지역 소비자들의 소비 의식도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기 위해서는 지역 소비자들의 돈이 지역의 재래상권에 들어가면, 그 돈이 지역사회를 위해 어떻게 나타나는 가도 재래상권이 보여줄 도의적 책임이 있다. /임양은 주필
김대중(DJ)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서울 장충공원에서 10만 청중에게 민주화의 사자후를 뿜어 박정희 대통령의 간담을 서늘케 한 것이 1971년이다. 그후 일본으로 망명, 괴한에게 납치돼 배로 현해탄을 건너 오면서 수장될뻔 했던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겼다. 전두환 정권에서 사형선고를 받는 등 민주화의 역정에 그를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도 누렸다. 국회의원 5선에 평민당, 새천년국민회의 총재를 지냈다. 제15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재산도 축재했다. 그가 야당 총재 시절에 누구 집 웃방에 싸아둔 DJ 돈더미 돈냄새 때문에 집주인이 머리가 아팠다는 것은 알려진 얘기다. 김영삼(YS)과의 관계는 DJ가 정치에 입문한 신민당 시절부터 라이벌이었다. YS와 DJ는 민주화의 두 거목으로 정적이면서도 친구 사이다. DJ가 15대 대선에서 당선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YS가 있었다는 숨겨진 비화가 있다. YS가 이따금씩 DJ를 호되게 공격해도 DJ가 아무 소리 않는 것은 비화에 얽힌 약조를 깬 실신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노무현을 대통령에 당선시킨 것이 DJ인 것이다. DJ는 YS가 대통령일 때 YS 둘째 아들이 모종의 비리가 연루된 사건을 두고 “대통령 아들을 구속시켜야 한다”고 맨 먼저 목소릴 높였다. 아무리 정적이지만, 친구의 아들을 그렇게 말한 것은 너무 심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랬던 자신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세 아들이 모두 비리에 얽혀 구속되는 수모를 겪었다. DJ가 요즘 바짝 대정부 공격을 일삼고 있다. “이명박 정권은 독재정권”이라면서 “국민의 행동을 촉구한다”고 민중 봉기를 선동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전생에 형제였던 것 같다”며 지난 국민장에서 보인 추모 민심을 자극한다. DJ의 이 같은 선동은 현 정부가 자신의 햇볕정책을 따르지 않는데 대한 반감이 극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현 정부가 독재정권이라는 것은 터무니 없는 망발이다. 누구보다 권위주의 의식에 가득찬 사람이 바로 DJ 그 자신이다. 6·15 남북공동선언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무려 5억달러를 진상하고 평양 방문을 허용 받은 소산이다. ‘송금사건’ 때문에 측근인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만 옥고를 치렀다. 햇볕정책은 후세에 역사가 평가할 일이다. DJ가 원로라면, 원로다운 신중한 처신이 요구된다. /임양은 주필
서울 중구 태평로 1가에 위치한 ‘서울광장’이 현재의 잔디광장으로 조성된 것은 2004년 5월이다. 총면적 1만3천207㎡로 대청마루에 뜬 보름달을 연상케 하는 타원형으로 만들어졌다. 이전엔 1963년 조성된 대형분수가 있는 도로광장이었다. 서울광장의 역사는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월산대군 개인 집이었던 덕수궁으로 돌아온 1897년부터 시작된다. 고종은 나라의 기틀을 새로이 하기 위해 덕수궁 대한문 앞을 중심으로 하는 방사선형 도로를 닦고 앞쪽에는 광장과 원구단을 설치했다. 이 때부터 대한문 앞 광장은 고종보호 시위, 3·1운동, 4·19혁명, 한일회담 반대시위, 6월 항쟁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요무대가 됐다. 1987년 6월 전두환 정권에 맞서 독재 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다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 열사의 노제가 서울광장에서 열렸다. 그 힘이 6월항쟁의 물결로 이어졌고 민주화라는 결실을 맺었다. 서울광장이 잔디광장으로 변모하게 된 동기는 2002년 한·일 월드컵축구경기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월드컵 거리응원 열기를 간직하고 시민들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하겠다며 서울시청 앞에 잔디밭 광장을 조성했다. 교통난을 우려한 반대여론이 거세게 일기도 했지만 이명박 시장의 강한 의지에 따라 광장 조성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이 시장은 공사 완공에 맞춰 광장 한편에 세운 ‘서울광장을 열며’라는 제목의 동판에 “(전략) 8·15 광복과 산업화, 민주화, 월드컵에 이르는 우리 겨레의 역사를 면면히 이어온 이곳이 통일의 환호로 가득하기를 기원하면서 2004년 5월1일 대한민국 영원한 수도 서울의 중심에 서울광장을 만들어 시민에게 바칩니다”라고 새겼다.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4년 탄핵되자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서울광장 거리로 나와 탄핵반대를 외치기도 했다. 지난해 5월엔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가 서울광장을 중심으로 열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노제가 5월29일 서울광장에서 있었다.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직 시절 조성한 서울광장이 지금은 이명박 정부에 반대하는 잇단 정치 집회 및 시위장으로 바뀌었다. 대통령 자신이 개방에 앞장섰던 서울광장을 이제는 스스로 닫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임병호 논설위원
‘철마’ 루 게릭의 고별 연설은 스포츠 역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의 주포로서 2천130경기에 연속으로 출장해 ‘철마’로 불렸던 게릭은 근육이 마비되는 희귀병에 걸려 1939년 7월5일 양키스타디움에서 팬들에게 작별 인사를 남겼다. 게릭은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나는 지구상에서 최고의 행운아”라는 말을 남기고 17년간 성원을 아끼지 않았던 팬들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그는 훗날 ‘루 게릭 병’으로 명명된 이 병으로 투병하다 2년 후 삶을 마쳤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는 명언을 남긴 복싱계의 신화 무하마드 알리는 “챔피언은 체육관에서 탄생하는 게 아니다. 마음 속 깊이 품어 온 열망, 꿈, 비전이 챔피언을 만든다”고 말했다. 흑인 차별에 대항하고 베트남전 징집을 거부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던 알리는 “상상력이 없는 이는 날개가 없는 사람”이라며 자유로운 영혼을 중시했다. 1952년 헬싱키올림픽 남자 육상 5천m, 1만m, 마라톤 등 3종목을 동시에 석권한 ‘인간 기관차’ 에밀 자토벡은 기자회견에서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사람은 달린다”는 말로 우승소감을 피력하고 “러너는 가슴 가득 꿈을 안고 뛰어야 한다. 호주머니 가득 돈을 채운 자는 진정한 러너가 아니다”라고 일갈했다. 국내 프로야구 김인식 한화 감독은 후배 감독들에게 “300승, 300패는 해봐야 야구를 알게 될 것”이란 말을 남겼다. 2002년 월드컵축구 4강 신화를 일군 히딩크 감독이 선수들에게 즐겨 쓴 “우리는 70%의 플레이만 훌륭했다. 나머지 30%는 더욱 노력해서 채워야 한다”,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는 어록도 유명하다. 1950년대 메이저리그를 주름잡았던 뉴욕 양키스의 명포수 요기 베라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란 명언을 남겼다. 끝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 하라는 이 말은 ‘요기즘’이란 신조어를 낳았는데 역대 미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과 유명 인사들이 단골로 인용하는 코멘트가 됐다. 역경을 극복한 스포츠 스타들의 한마디는 시대를 초월하여 감동을 준다. /임병호 논설위원
화(火)는 화(禍)다. 몹시 못마땅하거나 언짢아서 내는 성이 화다. 하지만 참는 끝은 있어도 성낸 끝은 없다. 화를 내면 해(害)가 돌아와 화를 입는다. 대체로 성질머리가 급한 사람이 화를 잘 낸다. 우리나라 사람은 대개 성질이 급하다. 나도 성질이 급해 화를 잘내곤 했다. 참질 못했다. 그런데 살다보니 그게 아니다. 성질을 부리고 나면 사람을 잃는다. 친구를 잃게 된다. 상대가 아무리 잘 못하고, 또 화를 낸 것이 꼭 나쁜 의도가 아닐지라도, 당하는 상대는 기분이 좋을리 만무하다. 그럴 땐 신경질이 나도 좋게 타이르는 것이 순리다. 흔히 “성질은 급해도 뒷끝은 없다”고들 말한다. 뒷끝은 없으니 화를 내도 이해해달라는 뜻의 이 말은 참으로 이기적이다. 상대에게 스트레스를 줄대로 주고는 이해하라는 건 말이 안된다. 무책임한 소리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특히 아랫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은 정말 모양같지 않을 때가 많았다. 한참 성질을 부리다가 문득 자신이 경솔하고 천박스럽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화는 위엄이 될 수 없다. 화를 내는 모습은 내가 생각해도 어른답지가 않다. 화를 자주 내는 것도 습관이다. 즉, 참을 줄 모르는 것은 버릇인 것이다. 습관은 버릇 들이기에 달렸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화가 또 화를 불러내곤 한다. 그런데 화를 잘 내는 사람치고 진짜 화를 내야할 장합에서는 화를 안내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살다보면 화를 내야 할 때가 아주 없진 않다. 한데, 평소에는 화를 잘 내던 사람이 정말로 화를 낼 자리에서는 아뭇 소릴 않는 것을 더러 보는 것은 비열한 침묵의 타협인 것이다. 그러나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생활에서 대체로 화를 내기보단 화를 참다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참기를 잘 했다고 생각될 때가 많다. 그러다 보면 행복한 마음이 든다. 화낼 일이 있어도 화를 참으면 상대가 더 내 맘을 알아준다. 설령, 몰라준다 해도 화를 내어 화를 불러들이는 것 보다는 낫다. 화를 참는 것을, 성질머릴 부리지 않는 것을 거창하게 수양이랄 것 까지는 없다. 마음 먹기에 달렸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참으로 부끄러운 것은 이를 진즉 터득치 못하고 근래들어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임양은 주필
원시시대의 모계사회는 먹을거리를 자연에서 채취하던 때다. 남성우위의 사회가 된 것은 노동력을 필요로하는 농경문화가 열리고 나서다. 농경문화로 인해 땅의 가치가 올라가면서 영토 분쟁이 생겨 군대의 중요성과 함께 남성 우위가 더욱 두드러졌다. 그러나 고대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아주 낮았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고구려와 백제의 두 나라 건국 이면에는 소서노(召西奴)라는 여걸이 있었다. 소서노는 주몽의 아내로서, 또 온조의 어머니로서 고구려를 건국한데 이어 백제를 세운 산파역을 했다. 신라에는 선덕·진덕·진성 등 세 여왕이 있었다. 정치적인 지위 말고도 고구려 벽화나 신라 향가에는 여성의 활달한 사회적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 많다. 고려시대에도 여성의 지위가 위축되진 않았다. 남존여비 사회가 현저해진 것은 조선시대 들어 유교정치가 지배하면서 시작됐다. 신사임당은 이런 유교사회에서 잠재된 재능을 서화로 분출, 규방문화를 꽃피웠다. 이에 비해 민비는 유교사회에선 금기였던 여성의 정치 참여로 금녀의 벽을 깼다. 지난 20세기 종반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사회로 접어든 격변의 변화기다. 인류사회가 시작된 이래 이처럼 숨 가쁜 변화를 보인적은 없다. 우리는 지금 그런 격변의 시대에 산다. 정보사회 들어 남성 우위가 거의 퇴색된 것은 농경사회는 물론이고, 산업사회에서도 노동집약형이었던 산업구조가 무너지면서 점점 더 두드러지고 있다. 작금의 사회적 역할에는 남녀의 구별이 거의 없다. 남자가 할 일, 여자가 할 일이 따로 있는 사회가 아니다. 사법·행정·외무 등 각종 국가 고시에 여성의 합격률이 더 높아지는 등 각계의 여성 진출이 활발하다. 사무직뿐만이 아니고, 좀 더 있으면 노동 현장의 중장비 등 기사도 여성의 진출 또한 많아질 것이다. 장차에는 여성이고 남성이고 간에 전문직 인력이 우대받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얼마전에 도내 여성의 정치 참여도가 낮다는 경기도가족여성연구원의 조사 발표가 있었다. 도내 여성의 정치 참여도가 낮은 것은 타 시·도에 비해 상대적일 뿐, 전반적으로 낮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타 분야에 비해 여성의 정치 참여도가 낮은 것은 여성 전문 인력이 정치에 큰 매력을 아직은 갖지 않기 때문이다./임양은 주필
단군신화에 나오는 호랑이는 예부터 많은 얘기를 남겼다. 선인들에게는 외경스런 동물이었던 것이다. 호랑이를 ‘산군’(山君)이라고 했던 것은 산신령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호환은 산촌에 살거나 산길을 가야하는 나그네에겐 항상 두려웠던 횡액이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거나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는 등 호랑이를 둔 속담도 많고, ‘호랑이가 담배먹던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는 호랑이에 얽힌 옛 이야기도 많다. ‘호질문’(虎叱文)은 실학자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나오는 것으로, 도덕군자란 자가 과부와 내통하다가 호랑이를 만나 톡톡히 꾸지람을 듣는 내용은 당시 부패한 유생들의 위선을 빗댄 것이다. 한국 호랑이가 백두산 호랑이로 유명한 것은 백두산 원시림에 가장 많기도 했으나, 단군신화의 장소가 태백산이었기 때문이다. 태백산은 지금은 경북 봉화, 강원 삼척에도 있지만 원래는 백두산의 옛 이름이다. 학계에 의하면 한국 호랑이는 1924년을 마지막으로 한반도 산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보고됐다. 도로교통의 발달 등이 생태계 변화를 가져온 탓으로 알려졌으나, 분명한 원인은 아직도 미궁이다. 사람들이 무서워하면서, 한편으로는 가깝기도 했던 한국 호랑이는 몇몇 동물원에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할 뿐, 야생에서는 볼 수 없는 전설의 동물이 되고 말았다. 서울동물원 등 국내에 현존하는 한국 호랑이는 52마리다.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의 마스코트였던 ‘호돌이’ ‘호순이’, 미국 미네소타 동물원에서 4마리를 수입한 한국 호랑이 등이다. 지난해 6월엔 남한 출신 암컷 ‘성주’와 북한출신 ‘코아’ 사이에 3남매의 아기 호랑이가 태어났다. 국내 한국 호랑이가 얼마 전 국제적인 호랑이 혈통 족보에 올랐다. 세계동물원수족관협회는 세계의 호랑이 혈통 족보를 통합 관리하는 기구다. 이 족보에 오르려면 유전자 분석 검사를 통과해야 하는 등 혈통 확인 절차가 까다롭다. 한국 호랑이가 이 같은 절차를 모두 통과한 것이다. 한국 호랑이는 위풍이 특히 당당한 면모에 털 색깔이 진하면서 윤기가 나는 게 특징이다. 혈통의 세계적 정통성을 인정받은 국내 호랑이는 각각 고유번호를 지녀 국제사회의 보호를 받는다. / 임양은 주필
1951년 4월11일 미국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전쟁에 참전 중인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을 전격 해임했다. 인천 상륙작전과 태평양 공격 등으로 미군과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어낸 최고의 장군을 해임한 것은 폭발적인 사건이었다. 트루먼의 조치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쏟아지고 LA에선 ‘맥아더 장군의 정치적 암살에 대한 묵념’ 시간이 주어졌다. 트루먼은 1945년 4월 루스벨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대통령직에 올랐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인기를 따라가지 못했다. 반면 맥아더는 당시 일본 주둔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1947년 트루먼은 맥아더와 국내 정치 현실에 관해 의견을 나눌 생각으로 귀국을 제안했으나 맥아더는 특별한 이유 없이 거절했다. 1950년 10월 10만여 명의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대규모 공격을 가했다. 맥아더는 압록강 다리를 폭파할 것을 요청했으나 트루먼은 중국을 너무 자극할 것을 두려워해 허가하지 않았다. 12월 유엔군은 전면적인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고 이듬해 2월 트루먼은 교착상태에 빠진 전쟁을 협상으로 끝내는 방안을 모색했다. 맥아더는 이를 항복이나 마찬가지라며 격분했다. 존 F 케네디와 리처드 M 닉슨, 대통령 자리를 향한 두 사람의 대결은 미국의 현대사를 바꾸었다. 케네디가 전형적인 바람둥이 기질이었다면, 닉슨은 공부벌레 스타일이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케네디가 승리했지만 그는 저격 당했고, 닉슨은 이후 대통령의 꿈을 이뤘지만 불명예를 안고 퇴진해야 했다. 당시 선거에서 처음 도입된 TV토론은 다른 나라에도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와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3세는 서사적 영웅의 시대를 살았다. 그들은 왕이자 전사였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 무력외교를 배경으로 한 그들의 관계는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적대적 상황이었다. 둘은 4년에 걸쳐 세 번의 전투를 일으켰으며 결국 알렉산드로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후 서구문명의 중흥을 이끈 헬레니즘 시대가 도래했다. 만일 트루먼과 맥아더가 원만한 관계였다면 한국전쟁의 양상과 우리 현대사는 지금과는 다른 흐름으로 진행됐을지 모른다.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았다면 암살 당하지 않았을 터이다. 지도자들의 라이벌 의식은 역사와 운명을 갈라놓는다. /임병호 논설위원
외국의 검찰은 권한이 분산돼 있을 뿐 아니라 여러 제도를 통해 민주적 통제를 받는다. 미국 검찰의 경우 플리바기닝(유죄협상제도) 등 폭 넓은 재량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여러가지 제한을 받는다. 각 주의 검사장과 지방검사를 주민들이 4년마다 선거로 뽑기 때문에 민주적 정당성이 확보되고, 연방 검찰총장을 겸하고 있는 법무부 장관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다. 유권자들이 견제와 균형을 위해 주지사와 정당 성향이 다른 검사장을 선출하는 일도 많다. 또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대배심제도(Grand jury)가 있어 검찰의 공소권 남용을 방지한다. 검사는 배심원에게 증거를 제시하는 역할만 할 뿐이다. 미국 검찰은 한국과 같이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권을 갖고 있지도 않다. 독일 검찰은 ‘머리만 있고 손발은 없는’ 구조다. 자체 수사 인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힘을 분산시킨 것이다. 수사는 경찰이 맡고, 검찰은 수사 절차를 주재하는 역할에 그친다. 검사가 작성한 신문조서는 법정에서 증거능력이 없다. 독일 검찰도 연방경찰과 주 검찰이 분리돼 있다. 연방검찰은 주 검찰에 대한 지휘감독권이 없다. 프랑스는 사법부에 소속돼 있는 ‘예비판사’가 수사를 맡는 독특한 구조다. 사실상 예비판사가 한국의 검찰에 해당되는데 법원의 통제하에 있는 셈이다. 일본에선 지역 주민들로 구성된 독립기구인 검찰심사회가 공소 제기가 적절한지를 심사해 검찰권을 민주적으로 통제한다. 영국은 수사는 전적으로 경찰이 담당하고 검찰은 기소 결정과 공소유지, 수사에 대한 법률적 조언만 맡는 구조다. 공소권도 여러 기관이 나눠 갖고 있다. 그러나 한국 검찰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갖고 있어 그 힘이 막강하다. ‘무소불위의 권력 조직’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원인이다. 유신 시절 최고 사정기관은 중앙정보부,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선 보안사령부였다. 김영삼 정부 이후 검찰은 20년 가까이 국가 최고 사정기관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하지만 ‘정치검찰’ ‘권력의 시녀’라는 오명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검찰이 휘두른 칼은 자칫 잘못 쓰면 ‘악마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을 검찰은 명심해야 한다. 검찰은 국민을 대리해 정의를 구현하는 신성한 조직이다. 명예를 훼손해선 안 된다. /임병호 논설위원
레닌은 일찍이 공산주의 이념의 수정과 공산주의 혁명의 종파행위를 경계했다. 이념의 수정화는 공산당 선언의 훼손을, 그리고 혁명의 종파화는 정체성 훼손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이런 레닌의 경구를 어긴 전형적인 수정주의와 종파주의가 김일성주의의 세습제다. 북녘은 이를 ‘우리식 사회주의 체제’라고 말한다. 3대 세습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후계자로 세 번째 아내 고영희가 낳은 3남 김정운(26)이 확정됐다는 소식이다. 고영희는 2004년에 사망했다. 김정운은 고영희가 낳은 아들로는 두 번째며 김 위원장의 첫번 아내인 성혜림이 낳은 김정남(38)까지 치면 세 번째 아들이다. 성혜림은 2002년에 사망했다. ‘척척 척척척 발걸음 / 우리 김대장 발걸음 / 2월의 정기 뿌리며 / 앞으로 척척척 / 발걸음 발걸음 힘차게 한 번 구르면 / 온 나라 강산이 반기며 척척척’ 김정운 후계자를 칭송하는 북측 가요의 ‘발걸음’이라는 가사 1절이다. 평양정권은 로동당과 군부, 핵심 권력 기관과 공민사회는 물론이고 재외 공관에까지 벌이는 김정운 후계자에 대한 충성심 경쟁이 한창이다. 위로는 두 형이 있고 또 권력 기반이 미약한 취약점에 대비한 아버지 김정일 위원장의 배려인 것이다. 그런데 언론 보도에 나타난 후계자의 사진은 15년전 11살 적에 찍은 어린 아이 사진이다. 청년 김정운의 자료 사진이 없는 것이다. 사진을 구하지 못한 것은 그만큼 북녘 사회가 장막에 가려진 폐쇄사회이기 때문이다. 후계자로 지명, 충성심 경쟁을 벌이면서도 막상 본인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어떤 신비감을 남기기 위해서다. 이것이 북측의 통치 스타일이다. 김정운 후계자가 아버지 위원장 사후에 과연 권력을 제대로 장악할 것인지, 아니면 집단체제가 나올 것인가 하는 것은 나중 일이다. 문제는 이러한 평양정권을 그래도 좋다고 하는 일부의 남쪽 사람들이다. 그렇게 좋으면 여기서 분탕치지 말고 북에 가서 살면 되겠는데, 가서 살 위인들도 아니다. 북에서도 안 받아주는 것은 말 많은 지식인은 질색이기 때문이다. 남조선에서 저들 말대로 자생적 혁명과업이나 완수하길 바라는 것이다. /임양은 주필
인간사는 소통의 생활이다. 소통은 곧 생각의 교류와 마음의 교감이다. 소통이 잘 돼야 인간지사 만사가 매끄럽다. 소통에는 상대가 있다. 즉 타인과의 소통인 것이다. 그런데 소통은 꼭 타인과 하는 것만은 아니다. 자신과의 소통도 있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자신과의 소통이다. 자신을 반성해보는 것은 훌륭한 자신과의 대화인 것이다. 한데, 자신과의 소통도 심적 소통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영육(靈肉), 즉 영혼과 육체를 지녔다. ‘영육일치’는 영혼과 육체는 차별이 있는 별개의 것이 아니고, 불가분의 하나로 보는 사상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풍미했다가 중세기 기독교에서 부인된 후 문예부흥기에 부활했다. 근데, ‘영육일치’를 인정하든 부정하든 인간은 영육을 지닌 존재인 건 틀림이 없다. 자신의 맘을 돌아보는 것이 영적 소통이라면, 자신의 몸을돌아보는 것은 육적 소통이다. 영적 소통은 이해할 수 있어도 육적 소통은 아마 생소하게 들릴 것이다. 심령학은 영적 주체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런 심령학에서 육신의 생명력을 인정하는 것은 육신을 영적 주체의 외연으로 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오장육부(간장·심장·비장·폐장·신장, 담·위·대장·소장·삼초·방광)는 각기 독립된 생명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오장육부만이 아니고 머리며 눈·코·귀·팔·다리도 매 한가지다. 이러므로 아픈데가 있으면 아픈 부분을 쓰다듬으며, 예컨대 “그래, 그동안 너에게 너무 무심했어. 날 위해 고생 많이 했는데 널 몰라봤구나”하고 위로해주면 혹사 당했던 아픈 부위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속상한 일이 생겨서 마음이 아프면 눈을 감은채 두손을 가슴에 대고 “널 아프게해서 미안해!”하고 한참 위로하면 자신이 위로를 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육적 소통은 제 몸을 스스로 아끼고 사랑하는 것으로, 이기심과는 구별되는 자애심(自愛心·self love)이다. 윤리학에서는 이를 ‘자기보존’이라고 한다. 인간사에 타인과의 소통이 물론 중요하지만, 자신과의 소통 또한 소홀히 해선 안되고, 자신과의 소통은 영적인 심성 소통과 함께 육적 소통도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임양은 주필
거울은 판유리 뒷면에 수은을 칠해 만든다. 유리는 또 석회암 등을 고온으로 용해하여 만든다. 국내에 출토된 가장 오래된 유리는 낙랑시대의 것으로 유리구슬 유리귀걸이 같은 장식 유리다. 신라시대에는 유리그릇이 발달했다. 그러나 판유리에 대한 기록은 없다. 고려와 조선시대 들어서는 청자·백자 등 도자에 밀려 유리제품은 쇠퇴했다. 유리제품의 근대화가 시작된 것은 고종 때인 1902년 이용익이 세운 국립유리제조소가 효시다. 근대화 이전엔 거울이 귀했던 것은 거울을 만드는 판유리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동경(銅鏡)은 구리로 만든 거울이다. 동판을 얼굴이 비치도록 번쩍거리게 만들었다. 사대부 집에서나 썼다. 석경(石鏡)도 있었다. 돌거울이다. 특히 중국 강서성 북부 여산의 벼랑에 있는 돌은 얼굴이 잘 비쳤다. 면경(面鏡)은 얼굴이나 들어다 볼 정도의 작은 손거울을 말하는데 이를 또한 석경이라고도 했다. 명경(明鏡)은 근대 문물이 도입되고 나서 지금 같은 거울이 나온뒤 동경이나 석경보다 훨씬 더 잘 비치는 밝은 거울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명경의 출현과 대중화는 근대사회의 생활상에 큰 변화의 획을 그었다. 지금은 흔한 게 거울이다. 웬만한 덴 안 걸린 데가 없다. 도처에 걸려 있는 것이 거울이다. 집에도 방마다 거의 거울이 걸려있다. 집집마다 이렇다. 거울을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걸려있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절로 비치는 것을 보곤한다. 개인 얘길해서 미안한데 나는 거울을 피해왔다. 절로 비쳐도 외면했다. 거울에 보이는 내 얼굴이 내가 보아도 싫었기 때문이다. 젊었을 적이라고 잘 생긴 것은 아니지만 젊어서는 젊음 자체가 광채를 뿜기 때문에 그런대로 보았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할아버지’ 소릴 듣게 되면서는 더 볼품이 없게 됐다. 내가 거울을 봐도 내 모습에 화가 날 지경이다. 한 번은 어느 지인(知人)에게 이런 심경을 털어놨더니 깜짝 놀라면서 “무슨 망발이냐!”는 것이다. 평생 살아온 얼굴을 이제 와서 거부하면 살아온 지난 평생을 부정하는 것이라면서, 자신의 얼굴에 대해 오히려 고맙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인의 말에 나는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나처럼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또 없지 않았을 것 같아 하는 얘기다. 나는 이제 명경을 보는데 전처럼 겁을 안 낸다./임양은 주필
중국의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은 평생을 국가와 인민만을 생각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나라에 바친 대표적 사례는 화장 유언이었다. 그는 각막과 장기 일부를 해부학 연구용으로 쓰고 나머지는 화장해 홍콩이 바라다보이는 바다에 뿌려 달라고 당부했다. 그 염원 덕분인지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은 1997년 중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덩샤오핑이 화장 방식으로 삶을 정리한 것은 중국 초대 총리를 지낸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영향이었다. 그는 1976년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유해를 화장해 조국 곳곳에 뿌려 달라고 유언했다. 당시 장례위원장을 맡은 덩샤오핑은 저우언라이의 유언대로 시신을 화장한 뒤 비행기로 전국을 돌며 하얀 뼛가루를 흩날렸다. 한국의 지도자 가운데 화장 방식으로 육신을 자연에 돌려준 이는 극히 드물다. 대통령을 비롯해 지금까지 타계한 정치 지도자 중 화장 유언을 남긴 사람은 찾기 힘들다. 조상의 묫(墓)자리가 후손의 발복(發福)에 영향을 준다는 풍수지리설에다 호화분묘로 가문의 위세를 떨치려는 과시문화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일부 대통령 후보는 선거 전에 조상의 묘를 이른바 명당으로 이장했다. 이런 터에 화장 방식으로 장례를 치른 첫 전직 대통령이 나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유서에서 “오래된 생각”이라면서 “화장해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을 ‘무교’로 분류했지만 생사관은 불교적 영향을 받은 듯하다. 유서의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라는 표현은 서산대사가 입적 전에 남긴 게송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삶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남이요)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죽음은 한 조각 뜬구름이 스러짐이다)’을 떠올리게 한다.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고 유언했다. 오늘 경복궁에서 영결식을 마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수원시 연화장에서 유골로 변해 고향이며 영원한 안식처가 된 경남 김해 봉하마을로 떠난다. 인간은 죽음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 홀로 이승을 떠난다. 전직 대통령이 자살로 삶을 마감한 한국 정치현실이 서글프다. /임병호 논설위원
노무현 전 대통령은 권위적인 경호를 지양한다는 이유로 전통적으로 군 출신이 맡아왔던 대통령 경호실장을 대민 접촉이 많은 경찰 출신에게 맡겼다. 청와대 주요 진입로의 바리케이드를 모두 철거하고, 일반인의 청와대 앞길 통행시간을 늘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열린 경호’는 시대의 변화에 발을 맞췄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국가원수 보호라는 측면에선 부정적 여론도 없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 재직시절 경호와 관련된 다양한 사건·사고가 발생했다. 취임 직후인 2003년 4월엔 청와대 경내를 관람 중인 한 할머니가 창문을 내린 채 승용차로 이동 중이었던 노 전 대통령을 향해 비닐봉지로 둘러싼 편지를 던진 사건이 있었다. 같은해 7월 노 전 대통령이 프로야구 올스타전을 관람하던 중에는 한 구단주가 자신의 지정석에 앉지 않고 대통령 옆자리로 다가가 사인볼을 받는 등의 돌출 행동을 해 경호 논란이 일었다. 2004년 12월 이라크 아르빌의 자이툰부대 방문 당시 한 해병대 상병이 노 전 대통령을 포옹한 뒤 번쩍 들어 올린 채 한 바퀴를 돌렸던 것도 경호실에서 제지하지 못한 일종의 사고다. 2006년엔 ‘노사모’ 회원이 청와대의 비공개 행사에 녹취가 가능한 전자장비를 반입,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을 녹취한 사실이 알려져 대통령 경호의 허점이 지적됐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봉하마을에서도 ‘열린 경호’의 원칙을 유지했다고 한다. 가끔 경호원을 대동하지 않고 혼자 산책을 다녔고, 새벽에 혼자 나와 논을 둘러보거나 권양숙 여사와 같이 나갈 때도 있었다. 하지만 23일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할 당시 경호는 의문점이 많다. 우선 경호원의 1차, 2차, 3차 진술이 달라진 것이 석연찮다. 게다가 MBC가 26일 저녁뉴스에서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당시 경호원의 무전 내용 중에 ‘놓쳤다.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고 보도했는데, 도대체 누구를 ‘놓쳤다’는 것인가. 무엇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추락환자에 대한 구급조치 요령을 모를 리 없는 경호원이 119 구급대에 신고하지 않고 낙상한 노 전 대통령을 들쳐 업고 옮겼다는 것도 비상식이다. ‘괴이한 루머’가 사실 무근이기를 바랄 뿐이다.
중국 당나라에 위고라는 전도 유망한 젊은이가 있었는 데 혼담이 번번이 깨졌다. 하루는 새벽 달밤에 길을 가다가 좀 기이하게 생긴 노인을 만나 혼인 얘기가 나왔다. 그 노인은 마을 장터에서 채소 장사하는 노파의 딸이 위고의 배필이라고 일러 주었다. 위고가 장터에 가보니 노파의 딸은 세살난 아기였다. 화가 난 그는 하인을 시켜 아기를 해치도록 했으나 약간의 상처만 남겼다. 노총각이 된 위고는 그로부터 14년 뒤 지금의 하남성 어느 현장의 아리따운 딸과 혼담이 성사되어 장가를 들었다. 그런데 신부가 자꾸 이마를 가려 자세히 보니 조그마한 흉터가 있었다. 신부에게 흉터의 사연을 들은 신랑은 이윽고 아내가 채소장사 노파의 딸이었음을 알았다. 신부는 원래 귀한 집 딸이었으나 부모가 갑자기 죽으면서 가운이 기울어 유모이던 노파가 기르다가 현장의 딸로 입양됐던 것이다. 신랑은 크게 뉘우쳐 장인에게 자신의 과거를 이실직고하자, 현장은 위고가 기이한 노인을 만났던 자리를 정혼점(定婚店)이라고 이름지어 기렸다. 부부의 인연은 하늘이 맺어준다는 의미가 담긴 ‘월하빙인’(月下氷人)의 고사다. 빙인은 중매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으로 이 역시 얽힌 고사가 따로 있으나 내용은 생략하겠다. 지금은 중매가 아니고 선남선녀들 본인이 선택하는 연애결혼이 보편화 됐지만 혼사가 천정배필(天定配匹)의 인연이 아닌 것은 아니다. 짝을 이루는 혼사는 인연이 닿아야 이뤄진다. 인연이 아니면 아무리 좋아하는 사이일지라도 성사될듯 하다가 깨지고, 인연이 닿으면 어려울듯 하면서도 이뤄지는 것이 혼사다. 서울에서 200억원대 재산을 가진 49세 미혼녀 사업가가 동갑내기나 열살 연하의 미혼남을 대상으로 어느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공개 구혼을 하고 나섰다. 이렇게 해서 만나는 것도 인연인 진 잘 알 수 없으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여성이 재력을 앞세우면 신부를 보고 청혼하는 신랑을 만나기보단, 돈과 결혼하는 남자를 만나기가 십상이라는 것이다. 작년엔 천억원대 부호가 데릴사위를 공개 모집한 적이 있는 데, 혼사가 성사 됐으면, 그들 데릴사위 부부가 과연 얼마나 행복한 지 궁금하다. 돈은 행복의 요건이지만 또 화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임양은 주필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말이 있다. 동서양의 왕조에서 흔히 있었던 일이다. 나라가 요동칠만큼 임금을 미색에 빠지게 만든 여인의 미모를 일컫는다. 클레오파트라는 고대 로마 안토니우스를 사로 잡았다. 양귀비(楊貴妃)는 당나라 현종(玄宗)을 매혹시켰다. 경국지색이었던 것이다. 조선 왕조에서는 장희빈이 숙종의 총애를 어지럽혔다. 그런데 결과는 좋지않는 것이 경국지색의 말로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와 연합한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해 자살했다. 양귀비는 안녹산의 난을 유발해 죽임을 당했다. 장희빈은 폐서인되어 사약을 받았다. ‘경국지색’이란 말은 있어도 ‘경국지전’(傾國之錢)이란 말은 못 들었을 것이다.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경국지전’을 실감케 한다. 나라가 요동칠만큼 권력이 돈에 농락당한 것이다. 박연차 게이트가 이렇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결국 자살이란 비극적 종말을 고했다. 그런데 돌아보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 돈 받은 사람이 너무 많아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그에게 돈을 안 받았으면 축에서 빠졌다 할만 하다. 여야 국회의원들, 청와대 비서실, PK지역 단체장, 전 경찰청장, 고위 검찰 간부, 법원 부장판사 등등 정관계 요로에 안 걸린 사람이 거의 없다. 심지어는 이 정권의 실세 측근인 천신일 세중나모여행사 회장도 박 회장에게 코가 꿰였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는 평소 돈을 너무 밝혀 당해도 싼 사람이 있지만, 좀 아까운 사람도 없지 않다. 어쩌다가 잘못된 돈 그물에 걸린 인물이 아깝거나 전공이 가석하게 된 사람도 있어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박 회장의 돈살포는 뇌물 성격의 보험금으로 전방위적으로 뿌려졌다. 근데 추정해보면 이토록 뿌린 돈이 약 100억원을 웃도는 것 같다. 서민들이야 평생 만져보기는 커녕, 100억원 뭉칫돈을 볼 수도 없는 거금이다. 하지만 있는 사람에겐 돈 100억원이 그리 큰 돈은 아니다. 이즈음은 신도시사업 땅 보상금으로 100억원을 받은 사람이 숱하다. 태광실업 회장의 입장에서는 푼돈일지 모른다. 그런데 온 나라 안이 발칵 뒤집혔다. ‘경국지색’이 아닌 ‘경국지전’의 폐해를 절감한다. ‘경국지전’ 역시 끝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다. /임양은 주필
생명의 신비에 관해 일찍이 이런 말을 들었다. 국립의료원 의사들 얘기다. “별 문제 없이 입원했던 환자가 합병증이 생기는 등 이상하게 병세가 악화되어 죽어서 나가는가 하면, 희망이 비관적이었던 환자가 기적적으로 회복되어 걸어서 나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의사는 최선을 다할 뿐이지, 살고 죽는 것은 인간 능력의 한계 밖이라는 것이다. 결국은 병으로 죽는 것이 인간이지만 인간은 무한히 병을 극복하려고 한다. 그래도 언젠가는 불가피한 것이 죽음이다. 인간의 오복(五福)은 수(壽)·부(富)·강녕(康寧)·유호덕(攸好德)·고종명(考終命) 다섯 가지다. 고종명은 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것을 말한다. 즉 편안하게 죽는 것도 오복 중 하나인 것이다. 대법원 판결의 존엄사 인정 역시 고종명을 원용했다 할 수가 있다. 이미 식물인간이 되어 의식이 없는 환자에게 아직 목숨이 붙었다 하여 무작정 산소 마스크만 씌우거나, 뻔히 안 될 줄 아는 말기암 환자에게 고통만 더 주는 치료를 강행하는 것은 인도상의 문제다. 이래서 기왕 죽음을 피치못할 병세 같으면 연명의술 대신 병고를 들어주는 것이 호스피스(Hospeace)다. 호스피스는 ‘Hospital of peace’의 약어다. 그런데 존엄사는 병고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편히 임종을 맞게하는 것으로 죽음과 직결된다. 환자의 존엄사를 인정하는 치료 포기, 즉 불가능의 한계를 어디까지로 보느냐는 것은 정작 난해한 문제다. 살릴 수 있는 환자를 자칫 죽게 만드는 과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의 존엄사 인정 판결은 났어도 이를 법제화하는 덴 앞으로 상당한 논란이 예상된다. 물론 엄격히 제한해야 하겠지만, 천차만별의 임상을 구분하기란 쉽지가 않다. 의학계를 중심으로 관련 학자들로 구성된 모임에서 시안을 만들어 공청회 등을 통한 사회적 동의를 구해야 할 것이다. 작고한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의 병상에서 산소 마스크를 사양했다. 신의 소관인 인명의 한계에 인공연명을 거부한 것이다.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르겠으나 이도 참고할만 하다. /임양은 주필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예술을 대표하는 미켈란젤로는 당시 최고 권력자인 교황의 주문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교황의 명령으로 1512년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를 완성했으나 노예상 연작은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권력자의 변덕과 교체에 따라 다른 작품의 주문에 밀려났기 때문이다. 후대 사람들은 이 노예상들의 모습에서 예술가의 저항과 고통, 그리고 자존심을 읽기도 한다. 음악가 푸치니는 60대의 나이에 이르러 웅장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이겠다는 포부로 열정을 쏟았다. 오페라 ‘투란도트’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대본 작가들의 글이 함량에 미치지 못하자 직접 쓰고 작곡할 정도로작품에 몰두했으나 후두암으로 숨지는 바람에 완성하지 못했다. 이후 작곡가 프랑코 알파노가 뒷부분을 완성하고, 1926년 밀라노 스카라극장에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초연됐다.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고딕 양식에서 한발 나아간 새로운 건축물이었다. 가우디는 이 성당이 기부를 바탕으로 한 속죄의 사원이라는 취지에 충실하려 했다. 성당 건설은 그의 죽음으로 중단된 뒤 스페인 내란으로 파괴의 길에 접어들어 20년간 방치됐지만 지금 건설 중이다. 프랑스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가 연출한 단편 ‘시골에서의 하루’는 모파상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파리의 한 상인 가족이 소풍 갔다가 벌어지는 한나절 이야기를 그렸다. 그런데 촬영 기간 중 폭우 등으로 원하는 장면을 찍기 어려워진 데다 촬영 스태프의 불화가 겹쳐 영화는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이 작품은 미완성 상태로 개방됐으나 오히려 걸작이란 호평을 받았다. 마릴린 먼로의 30번째 영화가 될 뻔 했던 ‘섬싱스 갓 투 기브’는 1962년 4월 촬영을 시작했으나 20세기폭스사가 예산 부족 등을 이유로 그해 6월 제작을 중단했다. 다시 10월에 촬영을 재개할 예정이었으나 이에 앞서 8월에 먼로가 사망하면서 미완성작으로 남았다. 여기에 먼로의 순탄치 못했던 삶과 죽음을 둘러싼 소문 등 숱한 얘기를 남겼다. 문화와 시대를 통틀어 수많은 미완성 작품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여곡절이 많아 숨은 사연 자체가 걸작이 되기도 한다. 우리 인간의 삶도 결국은 미완성이다. 나름대로 의미가 깊다. /임병호 논설위원
건축장식자재 생산업체 LG 하우시스가 최근 세계 최초로 옥수수를 주원료로 하는 생(生) 분해성(미생물에 의해 완전히 분해되는 성질) 플라스틱 ‘바이오 PSA’를 개발했다. 이 제품은 유리창, 버스 등에 붙이는 광고용 필름으로 쓰인다. 그동안 일부 친환경 소재를 사용한 제품은 있었지만,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폴리염화비닐(PVC)을 전혀 쓰지 않으면서도 생 분해성을 갖춘 제품은 처음이다. 삼성전자의 ‘에코 폰’과 한국후지제록스의 최신 복합기 ‘아페오스포트 3C3300’은 옥수수를 활용한 식물성 플라스틱을 각각 휴대폰 배터리 덮개와 복합기의 드럼 카트리지 커버에 이용했다. 옥수수를 활용한 원료 개발이 이렇게 한창이다. 옥수수의 쓰임새는 무궁무진하다. 피죤이 내놓은 휴대용 탈취제 ‘쿨데오’는 옥수수에서 뽑은 전분을 효소 처리한 사이클론데그티린(녹말보다 분자량이 적은 당 물질)을 활용한 제품이다. 냄새가 밴 옷감 사이로 도넛 모양의 사이클론덱스트린이 침투, 구멍 안에 냄새 원인 균이나 냄새 분자를 가둬서 냄새를 없애준다. 웅진케미칼은 옥수수 원료에서 뽑아 낸 실로 만든 ‘에코웨이-소로나’라는 섬유를 개발했다. 이 섬유는 촉감이 뛰어나 등산복을 비롯한 아웃도어용으로 인기가 높다. 중앙대 명순철·이민원 교수팀은 옥수수 수염(옥수수의 암술) 추출물에서 항산화, 항염증 효과가 뛰어난 루테올린 등 3가지 물질을 찾아냈다. “기찻길 옆 옥수수밭 / 옥수수는 잘도 큰다 / 칙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 기차소리 요란해도 / 옥수수는 잘도 큰다” - ‘기찻길 옆’. “우리 아기 불고 노는 하모니카는 / 옥수수를 가지고서 만들었어요 / 옥수수알 길게 두 줄 남겨가지고 / 우리 아기 하모니카 불고 있어요 / 도레미파솔라시도 소리가 안나 / 도미솔도 도미솔도 말로 하지요” - ‘옥수수 하모니카’. 그 옛날 동요로 노래되고, 배고픔을 달래주던 추억의 간식 옥수수가 비디오 연료, 식물성 플라스틱, 기능성 섬유, 비뇨기 질환 치료제 등 2만여 가지 제품의 재료로 쓰인다니 신비롭다. / 임병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