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사업(東北工程事業)을 통하여 고구려 유적을 보수하면서, 우리 민족의 자존심인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중국화된 만주족의 일부 학자들에 의한 왜곡된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오늘날의 만주족은 삼국시대에는 말갈족이라 불리던 문화 수준이 낮던 민족으로 일찍이 고구려에 예속(隸屬)되었다. 이들은 근세에는 한족(漢族)을 복속 시키고도 오히려 문화적으로는 한족에게 동화되어 자기들이 쓰던 언어조차도 잃어버린 민족이다. 이들이 말한 대로 중국이 고구려사의 주인공(主人公)이 되기 위해서는 BC 108년에 한(漢)나라가 세운 한 4군이 진(晉)나라 때에 와서 고구려에 의해 쫓겨가지 말았어야 한다. 분열되었던 천하를 통일한 수(隋)·당(唐)은 통일된 막대한 힘을 배경으로 고구려에 쳐들어 왔으나 살수(612)와 안시성(645)에서 릴레이식으로 패퇴되고 말았다. 이렇게 강력한 고구려를 중국의 분열기인 삼국시대나 위·진·남북조 시대에 지배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진(晉)의 현도군(302)·낙랑군(313)·대방군(314)이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요서 지방으로 쫓겨간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그들은 중국인이 고구려를 세웠으니 고구려가 중국 고구려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주몽의 아들 온조가 세운 백제도 중국 백제가 되겠다. 고구려를 세운 사람은 한족(漢族)이 아닌 동이족(東夷族)이다. 중국화된 만주족의 학자들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고 한다. 고구려가 시대에 따라 국력이 약해졌을 때에 일시적으로 중국의 책봉을 받고 연호를 사용하였으나, 이런 일은 어디까지나 당시의 피상적인 외교 형식일 뿐이지, 고구려가 중국에게 주권을 빼앗겼거나 중국의 지방 정권은 아니다. 그것은 근세조선이 중국의 명나라나 청나라의 책봉을 받고 그들의 연호를 사용하였어도, 그것은 외교형식이었지 내부적으로 완전한 독립국이었음이 이를 입증하여준다. 또 그들은 고구려가 황제 칭호를 사용하지 않고 왕이란 칭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이 중국 고구려가 될 수 있다는 또 하나의 트집이다. 그 예로 광개토대왕을 든다면 그의 묘호(廟號)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태왕(太王)이란 여러 왕을 아우르는 왕, 즉 왕의 위에 군림하는 황제란 뜻이다. 아울러 영락(永樂)이란 독자적인 연호를 쓴 것을 봐도 고구려가 독자적인 힘을 가진 강력한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인 학자들은 고구려와 수·당과의 수십 년간에 걸친 전쟁을 중국 내부 전쟁이라고 말한다. 이 전쟁은 중국 내부 전쟁이 아니라 한족(漢族)과 동이족(東夷族)간의 동북아시아 주도권 쟁탈전이었다. 1998년 중국의 북경대학의 장페이페이(蔣非非)·왕사오푸(王小甫) 교수 등 소장파 역사학자 6명이 발간한 중한관계사(中韓關係史) 서문에서 “중국에는 하, 상, 은, 주, 춘추전국시대, 진, 한, 삼국시대, 위진남북조시대, 수, 당, 5대, 송, 원, 명, 청 등의 왕조가 있었고, 한국에는 고조선, 삼한,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등의 왕조가 있어 양국간의 정치 경제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고 서술하고 있다. 비록 고구려의 옛 땅인 만주가 오늘날에 와서는 중국 땅이 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역사까지 빼앗아가서는 안된다. 그들에게 한가지만 묻고 싶다. 그들도 우리처럼 고대에 고구려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삼국사기(1145)나 삼국유사(1285)같은 사서(史書)가 있는가? 그들은 없다. 왜냐하면 고구려가 그들의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육광남.동두천 중앙중고등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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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일보
2004-06-26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