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대사는 고려 태조 왕건을 비롯해 여러 국왕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불교 발전에 공로가 높았다. 광종은 원종대사가 입적하자 신하를 보내 조문하고, 시호를 ‘원종(元宗)’, 탑호를 ‘혜진(惠眞)’이라 내렸다. 이 탑비는 원종대사가 입적하자 그를 기리고, 살아생전의 행적을 비문으로 새겨 후세에 전하기 위한 것이다. 이 거북 받침돌과 머릿돌은 규모가 크고, 생동감 넘치는 조각 기법을 보여 고려 건국 초기의 역동적이고 웅장한 풍조를 반영한다. 탑비는 광종이 당대 최고의 문장가 김정언에게 비문을 짓도록 했으며, 최고의 장인 국공(國工)을 파견해 진영을 조성하고 승탑과 한 쌍으로 건립하도록 했다. 문화재청 제공
1892년 이곳에는 현대식 화폐를 만드는 기관인 전환국이 설치돼 1900년 서울 용산으로 옮겨갈 때까지 운영했다. 현재 공영주차장이 들어서 있는 옛 인천여고의 운동장 자리가 바로 전환국이 있던 곳이다. 전환국은 1885년 서울 소공동에 처음 설치됐다. 당시 조선은 일본에서 동을 수입해 동전을 만들었는데, 그 동을 인천항을 통해 수입했기 때문에 동을 서울로 운반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전환국을 옮겨왔다. 그러나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하자 1900년 다시 서울 용산으로 옮겨갔다. 표면적으로는 동의 운반 편리성 때문이라고는 하나 당시 인천의 일본 영향력이 커 이를 저지하기 위한 내면적 이유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천시 제공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후 간행된 최초의 한글 활자본 ‘월인천강지곡 권상(月印千江之曲 卷上)’은 1963년 보물 398호로 지정됐다가 지난 2017년 국보 제320호로 지정됐다. 월인천강지곡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이 그의 아내인 소헌왕후의 공덕을 빌기 위해 직접 지은 찬불가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가장 빠른 시기에 짓고 활자로 간행한 점에서 한글 창제 후 초기의 국어학 연구와 출판인쇄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문화재청 제공
동인천역 앞에서 배다리에 이르는 경인철도 남쪽 대로를 일컫던 명칭이다. 1908년 경인철도 선로와 축현역사가 현재의 동인천역 위치로 옮겨지며 생긴 공터가 그대로 대로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경인선 개통 당시 인천역이 주로 항만에서 하역되는 화물을 운송하는 역할을 했다면 축현역은 승객 위주였다. ‘이 거리는 동인천역 배다리 철로문을 통해 금곡동, 창영동, 송림동으로, 청과회사 쪽으로 뚫린 샛길을 통해 용동, 경동, 욜목동, 유동, 그리고 배다리를 지나 도원동, 숭의동에 이르는 중요한 간선도로다’라는 신태범 박사의 기록을 통해 교통의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이 일대는 사람의 왕래가 많은 지역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993년 인천부 공설시장사용조례에 의해 이곳에 새로운 시장 건물을 짓고 경영에 들어가면서 참외를 비롯한 과일 시장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6·25전쟁 이후 채미전거리 철로변은 과일도매상 등이 모여 있었고 청과시장 쪽은 야채시장과 과일가게, 고추나 마늘을 판매하는 도매상이 모여있었다. 백화점 같은 대형 매장에서의 과일 판매가 늘어나고 철도 복복선 건설과 대로 정비 등으로 철로변 상가는 대부분 문을 닫고 청과시장 쪽에 몇 군데 모전이 남아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과일 상가의 쇠퇴와 더불어 참외전거리는 시민 기억에 사라지고 이제는 거리 이름으로만 남아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에서부터 철종 때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년)의 역사를 편년(編年)으로 정리한 책이다. 완성된 실록은 재난에 대비하고자 춘추관사고(서울), 정족산사고(강화), 태백산사고(봉화), 오대산사고(평창), 적상산사고(무주)의 전국 5대 사고(史庫)에 보관했다. 조선 후기에 어람용(御覽用) 실록을 특별히 제작해 창덕궁 후원 봉모당에 보관·관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로, 조선왕조실록 제작 전통의 다양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우현 고유섭은 경성제대 철학과에 입학해 미학 및 미술사를 전공했다. 1930년 졸업과 함께 모교 미학연구소 조수로 발탁됐고, 1933년 28세에 개성부립박물관장에 취임해 1944년 향년 40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한국 미술사와 고고학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짧은 생애 동안 남다른 학구열과 초인적인 정력으로 황무지와 다름없는 한국미술사를 개척하고,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광복 후 황수영을 비롯한 제자들에 의해 여러 권의 저서로 간행됐다. 그의 30주기를 기념해 1974년 문무대왕의 해중릉이 바라다보이는 경북 감포와 선생의 고향인 인천의 시립박물관 앞에 기념비와 추모비가 세워졌다. 인천시 제공
‘아미타불도’는 서방 극락세계에서 펼쳐지는 아미타불의 설법장면을 표현한 불화다. 화기에 의하면 1873년 삼각산 흥천사(興天寺)에서 만들어 영장산 봉국사에 봉안했으며, 불화를 그린 화승은 덕운긍윤(德雲亘胤), 창송초연(蒼松楚演), 장전(壯典), 보형(普亨) 등 12명이다. 시주자로 상궁 이씨 등이 등장하고 있어 왕실 후원 작품임을 알 수 있다. 화면 구성이 안정되고 존상 묘사가 뛰어나며 세부 묘사가 정교해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경기도 불화 중에서도 수준이 높은 편이다. 또 코발트블루 계열의 색채 사용 등에서 19세기 후반 경기 지방의 지역색을 보인다. 문화재청 제공
과거 상업은행 인천지점에 있던 언덕 일대를 이르는 지명이다. 이곳에 싸리나무가 많아 이 같은 명칭이 붙었다고 하나 실제 싸리나무에 대한 기록이나 구전은 없다. 인천시사의 “싸리재는 높은 곳을 뜻하는 순 우리말 수리에서 변형된 것으로 보는 해석이 훨씬 타당하다. 또 한 가지는 삼리채 관련설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길이가 3리쯤 되는 울타리’라는 뜻으로 이 말이 생겨난 어원은 불명하다. 청국 조계지 개설 이후 청상의 이주가 급증해 애초에 설정된 조계지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청은 지계장정의 규정에 따라 삼리채 신조계장정을 체결해 조선인들이 살고 있던 곳으로 거주지를 넓혔다. 그 확충조계는 지금의 내동에서 경동 입구를 거쳐 싸리재로 뻗어있던 당시의 경인가도 양측에 위치했다. 이것이 청국조계에서 3리 거리, 따라서 중국인이 상점을 내고 거주하던 경동 일대를 부르던 ‘삼리채’가 와음돼 싸리재로 통용됐다는 설이다. 인천시 제공
화촉은 궁중이나 상류층에서 사용하고 민간에서는 혼례식에서나 사용하던 귀한 초였고, 소비재였기 때문에 많은 유물이 남아 있지는 않다. 전형적인 화촉은 혼례 등 의식에 쓰일 때는 항상 쌍으로 사용됐다. 그 형태는 길이 30~40cm, 굵기 5cm 전후의 크기로 굴림법으로 만들어 속이 비어 있고, 종이 등으로 심지를 끼워 사용했다. 표면은 모란꽃을 색을 넣어 화려하게 양감 있게 조각했으며, 하단에는 세 줄의 경계선을 두르고 그 사이마다 기하학 문양을 둘러 새겼다. 문화재청 제공
현 애관극장의 전신이다. 협률사가 창설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대략 청일전쟁 무렵 용동에 창고로 지어진 건물을 부호 정치국이 1890년대 말경 연극장으로 개조했다고 한다. 이 극장은 전면을 벽돌 2층으로 증축하는 등 여러 차례 확장했다. 특히 정치국이 사망하고 건물이 퇴락하자 1927년 인천경찰서장, 중추원참의 등을 지낸 김윤복이 비용을 대 개축하기도 했다. 6·25전쟁 당시 소실됐으며 이후 경동 대로변에 접하도록 개축한 뒤 다시 증개축 했다. 개관 후 잠시 축항사라는 이름으로 개칭했다가 1920년 무렵 애관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2004년 제1관에서 5관에 이르는 복합관으로 변신해 오늘에 이르렀다. 인천시 제공
‘윤씨 자기록’은 해평윤씨의 회고록이다. 해평윤씨는 1834년 태어나 17세에 혼인했으나 24세에 남편을 여의고 평생 수절하며 살아갔다. 어린 시절, 결혼, 남편의 투병과 요절,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 등이 한글로 기록돼 있다. 조선 후기 여성의 글쓰기를 기피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여성의 목소리로 자신의 인생을 회고했으며, 현존하는 여성의 ‘자기록’이 매우 드문 상태에서 전근대 여성의 삶과 의식을 심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여성의 회고록이 동아시아에서 한국 외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희소성이 높고 한글 서예사 연구 방면에서도 자료의 보존과 활용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았다. 문화재청 제공
유항렬은 충남 공주 출신으로 신순성에 이어 2번째로 1925년에 도쿄상선학교를 졸업했다. 귀국 후 1926년 조선유선주식회사에 입사해 영강환, 평안환 등의 기선 함장으로 10여년 간 인천-칭타오-상타이 간을 운항했으며, 1937년 한국인 최초로 인천항 도선사 자격을 취득했다. 1947년 인천항으로 상륙하는 미국의 리퍼블릭 선단을 입항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고, 인천상륙작전과 1·4후퇴 당시 수천 척의 유엔군 함정과 군용선의 수로 안내를 맡아 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했다. 1970년 정년퇴임했다. 1930년 후반에 건축된 그의 저택은 벽돌조 2층 건물로 현재까지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인천시 제공
동두천 자유수호평화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6∙25전쟁기에 피난민이 구해준 미군에게 제공한 후 동두천시에 기증된 것이다. 바탕 천은 가운데 가지런히 이어붙인 손바느질 자국이 선명하고 태극, 4괘에 밑그림용 연필자국이 보이며 천안 독립기념관 소장의 태극기 목판처럼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비율인 점이 특징이다. 6∙25전쟁 당시 피란민이 간직한 태극기로 당시 긴박했던 정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며, 상징과 역사적 의미 그리고 콘텐츠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문화재청 제공
내리교회는 1888년 정식 선교사로 임명된 초대 롤링거 목사, 2대 아펜젤러 목사가 뿌린 감리교 신앙의 씨앗과 영화학교를 개교하고 하와이 이민을 주선한 3대 존스 목사 등 선교의 역사를 간직한 교회다. 또 우리나라 최초로 조선인 목사를 배출했고, 최초의 우리말 잡지 월보인 ‘신학월보’의 발간 등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복음 전파와 함께 시민사회 계몽운동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해 오기도 했다. 인천시 제공
금사면 장흥리 상두산 내 남쪽 골짜기인 절골 장흥사터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황창부위(黃昌副尉) 변광보와 경순군주의 합장묘를 위한 묘막으로 조성됐다. 1686년(숙종 12년) 여주 장흥사를 훼철하고 그 절터에 무덤을 옮기고 제청을 건립했다. 이때 건립된 제청 주변에 살림채를 들여 가옥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시립도서관 자리는 종전 일본인 정미업자 리키다케의 별장이었다. 시립도서관은 1922년 1월6일 인천부립도서관으로 출발했다. 공공도서관 설립으로는 우리나라 최초다. 광복 후 시립도서관을 리키다케별장 자리로 이전해 운영했다. 이후 1962년 7월15일 도서관 옆 언덕에 3층 신관을 지어 그해 10월15일에 개관했다. 이때 리키다케별장 본채 건물을 구관, 신축한 건물을 신관으로 불렀다. 신관 신축 초기에는 일시 문화센터라고 명명하면서 인천예총, 인천문화원, 인천체육회 등을 입주시켰다. 이후 다시 시립도서관 신관으로 활용하다가 2009년 시 중앙도서관 역할을 미추홀도서관에 넘겨주면서 율목도서관으로 격하됐다. 구관과 더불어 옛 신관 자리에 새롭게 단장한 열람실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인천시 제공
김포성당은 6·25전쟁 직후 건축된 석조 성당의 전형적인 의장적 특징(종탑과 뾰족한 아치 창호)과 공간적 특징(단일 홀로 구성된 강당형 평면), 화강석 조적 구법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는 1950년대 건물로 건축적 가치가 크다. 문화재청 제공
인공으로 바닷물을 저장해 대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도록 한 선거(船渠)다. 인천 중구 항동 7가와 북성동 1가에 있다. 일제는 지난 1884년과 1893년 인천항만 축조 공사를 했다. 이어 1906년에는 대대적인 축항 공사를 했다. 또 1911년 지금의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밑에 이르는 해안 사이를 매립하고, 이곳에 인공 항만 제1선거 축조를 시작해 1918년 완공했다. 1974년 월미도와 소월미도 사이에 갑거를 축조하고 구항로를 없애 기존 제1독을 포함한 인천내항 전체를 선거화한 공사가 완공했다. 현재는 48척의 선박이 동시 접안할 수 있는 규모다. 우리나라 최초의 독이자 세계 5대 독 중 하나다. 인천시 제공
불암산 남쪽 능선의 해발 420m 봉우리에 있다. 전략적인 요충지에 쌓은 보루성은 요즈음의 초소와 같은 감시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동지지’ 양주조에는 “검암산(불암산) 고루는 선조 임진년에 의병장 고언백(高彦伯)이 쌓은 것”이라고 기록됐다. 임진왜란 때도 이용됐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문화재청 제공
1896년 최초로 설립된 본점의 위치는 중앙동 2가 17번지, 1910년경 해안동 3가 1-1인 현 KB국민은행 신포동지점 자리로 이전했다. 1932년 1월 일제는 경성주식현물시장과 인천미두취인소를 합병하여 조선취인소로 단일화했다. 1939년 전시체제가 되면서 미곡의 수급 통제를 위한 조처로 주식회사조선미곡시장을 설립해 인천미두취인소의 기능을 정지시켰다. 인천미두취인소는 조선의 미곡시장을 점탈하려는 일제의 야욕으로 세워진 것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피해를 보았다. 1942년 중앙동 1가에 있던 조선은행인천지점이 이전해 왔으며, 광복 후 한국은행인천지점으로 상호가 바뀌었다. 1955년 청사를 신축해 영업하다가 1983년 현 신흥동 건물을 신축해 이전했다. 현재 국민은행 신포동지점이 건물을 신축해 영업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인천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