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구릉 위 철로에 한 무리 소 떼가 지나간다. 기관사는 낡은 철마의 탄력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재촉이나 하듯 시커먼 연기를 하늘을 향해 토해낸다. 느긋한 목동은 기적 소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막대기로 바닥만 툭툭 내리치며 재촉한다. 눈앞에 펼친 정겨움과 느림의 여유가 묻어 있다. 정겨움이 담긴 낭만적인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려 하자 기차는 시샘하듯이 굽은 철길을 돌면서 사진 찍는 것을 방해한다. 시꺼먼 연기를 내뿜는 낡은 기차 이 지역 기후와 토양은 사탕수수 경작에 알맞아 식민 초기부터 농업이 번성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초 원주민만으로는 노동력이 턱없이 부족하여지자 쿠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왕실의 허가를 받아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하였다. 설탕 산업 전성기에는 이곳에 상주한 노예가 3만 명이 넘었고 이들은 농장 일 외에도 항구로 설탕을 운반하기 위한 철로와 도로 건설에 동원되었다. 철길 옆으로 스치는 자연 속 아름다운 풍경과 현지인의 치장하지 않은 남루한 속살을 가림 없이 바라보며 20여 분쯤 지나자 기차는 마나카 이즈나가에 도착했다는 알림 신호를 우렁찬 기적소리로 대신한다. 플랫폼에 발을 내딛자 제일 먼저 정복자의 탐욕스러운 상징인 노예감시탑이 보이고 농장 입구에는 장사할 채비를 마친 상인들이 관광객을 향해 손짓한다. 1795년 스페인 바스크 출신 악명 높은 노예상 페드로 이즈나가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광활한 땅을 사들여 사탕수수농장을 조성하였다. 그는 사업이 번창하자 1816년 노예를 감시하려고 7층으로 된 45m 높이의 이즈나가 탑을 세웠다. 이 탑은 노예가 동원되어 자신들을 감시하는 망루를 스스로 지은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즈나가는 이 망루에 올라 노예를 감시하며 사탕수수 생산량을 늘렸고 당시 이 지역에 있던 57개 설탕공장 중 15개를 소유하였을 정도로 부유한 농장주가 되었다. 지금은 없지만, 망루 꼭대기에는 서로 다른 소리를 내는 세 개의 종이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큰 종은 작업 시작과 끝을, 중간 종은 휴일을, 작은 종은 부활절 성주간을 알리는 용도였다. 종 셋이 모두 울리면 노예가 탈출하거나 반란이 일어났다는 신호이고 해적이 침입할 때도 함께 울렸다. 농장주인의 모진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유를 찾아 탈출하거나 반란을 일으키면 죽임을 당하였고 때로 해적이 출몰하여 전투가 벌어지면 수탈자 이즈나가를 위하여 목숨 바쳐 싸워야 했던 아픈 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상징물이다. 박태수 수필가
광장 주변에는 우리나라 여행객도 많고 연령층도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다. 단체여행을 온 듯한 50대 여인 무리는 가이드가 가리키는 곳을 향하여 눈을 떼지 못한다. 작년 봄 어느 TV에서 방영한 트레블러라는 프로그램에서 제훈과 준열이 콘스피레도레스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돌계단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던 장소다. 이곳을 찾는 한국 관광객에겐 이 드라마도 한몫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음악의 집 돌계단에 걸터앉아 한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음악과 춤을 구경하다 보면 마치 인종 전시장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여행 온 사람을 만난다. 겨울밤 라틴 리듬에 온몸을 맡기고 살사를 추는 열기 속에서 카리브의 밤은 깊어간다. 훈훈한 밤바람에 실려 온 싱그러운 내음과 밝은 달빛의 길 안내를 받으며 게스트하우스로 향한다. 쿠바는 한때 오랜 세월 정복자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으며 깊은 상처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따랐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투쟁하여 자유를 쟁취하였다. 세월이 흘러 상처와 고통은 아물었고 지금은 새로운 역사와 아름다운 문화를 형성하는 격동기에 있다. 특히 21세기 들어 장막을 걷어치우고 여행자를 받아들이는 개방은 쿠바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마중물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아나톨 프랑스는 여행이란 장소를 바꾸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편견을 바꿔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행 오기 전 쿠바는 사회주의 국가로 우리와는 이념적으로도 많은 차이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그것은 편견이었다. 다소 인프라가 부족하나 관광 여행 분야에서는 여느 나라 못지않게 활기차고 적극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매력적인 나라다. 하지만 아바나 역사지구와 콜로니얼 도시 트리니다드에서 접한 개방과 상업화된 현장은 쿠바가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을 잊게 할 정도로 빠르게 시장경제체계로 변하고 있다. 특히 관광 여행 분야에서는 지나치게 상업화되어가는 것을 볼 때 자칫 이런 변화가 지금까지 지켜온 쿠바의 문화 향유체계를 손상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박태수 수필가
트리니다드 시내 전망을 보려고 역사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곳도 19세기 초에 지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역 부호 보렐 가문 소유의 저택이었으나 노예무역으로 부호가 된 사탕수수농장주 칸테로가 매입하여 살았던 저택이다. 박물관은 4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전시실에는 빛바랜 사진 속에 대서양을 건너 이곳으로 끌려온 아프리카 노예의 이동 경로와 타고 온 배 모습을 담은 판화가 있다. 그리고 명령에 따르지 않거나 반항할 때 사용했던 형틀과 설탕을 추출하던 도구도 전시하고 있다. 이 외에도 트리니다드의 발전 과정과 해적과 전투할 때 사용한 대포가 전시되어 있고 18세기 이 지역 발전에 이바지한 설탕 산업의 발전과정을 알리고 있다. 박물관의 명소인 전망대로 가기 위하여 나선 계단을 오른다. 시선을 멀리 두고 한 바퀴 돌아보면 트리니다드는 늘 푸른 산과 옥빛 바다에 둘러싸인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파노라마 전경을 본다. 그리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산티시마 대성당과 마요르 광장은 한 장의 엽서처럼 아름답다. 당시 이 건물은 트리니다드에서 제일 아름다워 칸테로 궁전이라 불렀다. 밤이 되면 트리니다드를 찾은 여행객이 모두 대성당 옆 카사 데 라 뮤지카 앞 광장으로 모여든다. 낮에 보면 평범한 돌계단이 있는 빛바랜 건물 같지만 해가 지면 여행자는 모히토나 피나콜라다를 마시고 취기가 오를 땐 아프로 쿠반 밴드의 살사 리듬에 맞춰 춤 향연을 펼친다. 주변에는 이곳 외에도 레스토랑과 팝이 있고 춤출 수 있는 곳도 많아 트리니다드 밤의 랜드 마크다. 박태수 수필가
차는 골목을 돌고 돌아 3박 4일 머물게 될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한다. 집주인의 안내를 받아 집에 들어서자 아바나 게스트하우스와 다른 분위기를 느낀다. 길에서 현관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거실로 연결되는 독특한 구조다. 이 숙소도 콜로니얼 시대 노동자가 살았던 집을 몇 차례 증ㆍ개축해 지금 모습이 되었다고 주인이 설명한다. 쿠바에서 식민지 주택을 쉽게 식별하는 방법은 테라코타 기와지붕과 파스텔 색조 페인트로 벽을 칠한 집이 그 당시 주택의 정형이다. 트리니다드도 남미의 다른 식민지 도시처럼 중앙에 작은 마요르광장이 있고 그 위쪽에는 산티시마 대성당이 있다. 정원처럼 아늑한 광장 주변에는 식민시대 건물이 즐비하다. 불과 몇백 제곱미터 크기에 불과한 역사구역에는 조약돌 거리와 파스텔 색상으로 벽을 칠한 주택이 줄지어 있다. 트리니다드의 모든 길은 마요르 광장으로 통한다는 말처럼 도시의 중심이다. 여행 떠나기 전 찾아본 자료에서 빠지지 않던 산티시마 교회를 마주하자 눈에 익은 듯 낯설지 않다. 이곳은 트리니다드를 상징하는 성당 건물이고 19세기 후반에 불어 닥친 허리케인으로 파괴되었으나 1892년에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교회 안에는 1713년 나무로 만든 성스러운 십자가의 그리스도상과 다른 성물도 함께 보존하고 있어 당시 신앙생활을 엿볼 수 있다. 산티시마 교회 옆에는 1808년에 지은 로만티코 박물관이 있다. 원래 사탕수수농장을 소유한 스페인 크리올 출신 브루넷 백작 소유였으나 지금은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박물관으로 변신했다. 특히 안달루시아 안뜰 형태를 갖춘 파티오는 매우 아름답고 디자인은 무데하르 건축과 신고전주의 건축 스타일을 혼합한 형태로 쿠바에서 최고로 인정받는다. 내부는 19세기 부유한 가정의 생활상과 그들이 사용한 골동품 가구, 도자기, 은으로 만든 식기와 초상화 등 예술작품을 볼 수 있는 14개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발코니에서는 안뜰의 건축적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이곳은 입장료 외에 카메라당 1쿡을 별도로 내야 내부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박태수 수필가
-시골 같은 클래식 도시 트리니다드 둘러보기- 식민시대 노예의 상흔을 찾아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로 떠난다. 섬 중부에 있는 이곳은 아바나에서 315km 떨어져 있다. 도시라기보다는 소박한 시골 마을 같고 많은 박물관과 콜로니얼 시대 건물이 즐비하여 이곳을 쿠바의 클래식 도시라 한다. 트리니다드는 1514년 쿠바의 초대 총독인 디에고 벨라스케즈가 아바나를 포함하여 7곳에 식민지 정착촌을 건설할 때 세운 네 번째 도시로 1719세기 설탕 산업 호황기에 번성하였다. 그 후 아바나는 거점 도시로 성장하였으나 트리니다드는 지금까지 섬에서 가장 잘 보존된 식민지 도시로 남아 있어 쿠바를 찾는 여행객이 즐겨 찾는 곳이다. 아바나 도심을 떠나 해변 길에 접어들자 카리브의 옥빛 파도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너풀너풀 춤추고 낡은 차는 신바람 난 듯 아스팔트 상태에 장단 맞추며 달린다. 푸른 하늘은 티끌 한 점 없이 해맑고 청수처럼 상쾌한 공기가 코끝을 스치자 풋풋한 싱그러움을 느낀다. 쿠바 섬은 적도와 가까워도 위도상으로는 북반구다. 해변 길을 벗어나 내륙 도로에 들어서자 빛바랜 카키색 겨울 초지가 끝없이 이어진다. 길옆 가녀린 나뭇가지에 매달린 색 바랜 잎은 버티지 못하고 한잎 두잎 떨어지는 모습에서 카리브의 겨울을 느낀다. 멀리 허름한 집들이 띄엄띄엄 눈에 띄고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소몰이하는 풍경에서 미국 서부영화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을 한다. 겨울철이라 농사짓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황량한 벌판 메마른 초지에는 바람결에 건초만 나풀거린다. 4시간쯤 달려 트리니다드 외곽에 다다르자 먼발치에 바다가 보이고 나지막한 산자락에는 테라코타 기와지붕을 이고 있는 콜로니얼 시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보인다. 건축 재료나 양식은 그 시대 흔적을 비추는 거울이다. 점토는 선사시대부터 전 세계 모든 지역에서 사용한 가장 인간 친화적인 건축 공예 재료다. 점토를 구운 후 띠는 황적색은 인간에게 가장 거부감이 없는 색감이다. 북미 원주민은 이 색을 인디언 핑크라 하고 용맹한 전사의 상징으로 얼굴과 몸에 붉은 점토로 문양을 그리는 풍습이 있다. 공예에서도 이탈리아『베이오의 아폴로』 그리스 『타나그라 인형』 그리고 고대 중국 『도용』과 같은 예술 작품도 모두 점토로 빚은 테라코타다. 박태수 수필가
산 프란시스코 성당 앞 길가에는 1950년대 아바나에 살았던 사람들이 기억하는 우아한 방랑자 아바나 컬트 피규어로 불리는 엘 카발예로 데 파리스의 동상이 있다. 이 조각은 이곳 출신 조각가 호스 비야 소베론이 2001년에 설치한 작품으로 지금도 아바나 시민은 그를 기억한다. 엘 카발레로 드 파리는 항상 검은 망토 같은 코트를 무더운 여름에도 입었고 자르지 않은 긴 갈색 머리에 수염과 손톱도 길렀다. 그는 서류로 가득 찬 가방을 지니고 아바나 전역을 버스 타고 여행한 기인이었다. 그는 인간의 이성과 정의는 탐욕스러운 악을 이길 힘이라고 역설하며 다녔다고 한다. 그는 만나는 사람과 인사하고 철학, 종교, 정치에 관해 토론하고 컬트인처럼 일도 하지 않고 살았다. 그는 아는 사람들이 주는 돈을 받았지만, 모르는 사람이 주는 돈은 받지 않았다고 한다. 말년에는 망상과 환각 증상으로 고통을 받았으나 당시 아바나 젊은이들은 열광적으로 그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올드 아바나 여행에서 중세 매력을 제대로 느끼려면 조금 힘들어도 두 발로 좁은 뒷골목을 돌아보는 것이 좋다. 택시나 올드카를 타고 다니면 드라마 같은 음악과 춤이 있는 풍경을 볼 수 없고 가까운 거리에서 현지인의 일상을 느낄 수 없다. 때로는 그 시절로 돌아가 올드 아바나 거리에서 헤밍웨이처럼 칵테일을 마시고, 그들과 어울리며 현장에서 느끼는 짜릿한 순간이 여행의 묘미다. 아바나 만에 접한 이 지역은 1519년부터 정복자 스페인이 수 세기에 걸쳐 건설했다. 이곳에는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콜로니얼 건축물이 즐비하고, 독립 후 지은 건물과 조화롭게 자리 잡은 명소다. 20세기 중반 미국의 제재로 경제 사정이 좋지 못해 다소 복구가 느리지만, 여전히 이곳은 매력적이라 관광객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유럽 중세 도시는 대부분 시대적 눈높이에 맞춰 개선한 것이 편안해 보이지만, 올드 아바나는 복구나 개발이 더뎌 꾸미지 않은 것이 더 매력적이다. 일상생활에서 스키니 스타킹보다 헐렁한 바지가 편하듯이 쫓기지 않고 두 발로 걷는 골목길 도보여행이 좋다. 시간이 멈춰버린 빈티지한 올드 아바나는 오랜 인고의 세월이 응축하여 만든 화석 같은 흔적이 남아 있고 이곳은 가난한 사람이 모여 살아도 아바나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그리고 골목에서 마주한 올드 아바나는 현대화란 잣대로 볼 때 불편할지 몰라도 이곳은 편안함과 익숙함에서 느낄 수 없는 결이 다른 순수함이 있다. 이처럼 아바나 뒷골목 여행은 쿠바 중세 역사를 읽는 독서이자 그들의 삶을 엿보는 여행이다. 박태수 수필가
광장 주변은 마치 중세 스페인의 옛 도시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다. 주변 중세 건물은 데살로 시각예술센터, 메일페스 박물관과 쿠바 사진예술관, 호텔과 상가, 레스토랑과 카페로 변신하여 관광객을 맞는다. 중세 건물 앞 테라스 카페에서 은은한 향이 일품인 크리스털 마운틴 커피 한 잔으로 여행의 망중한을 즐긴다. 쿠바에서 생산하는 여러 품종의 커피 중에서도 이 커피는 산도가 낮아 엷은 신맛이 있어도 부드럽고 감미롭다. 그리고 마신 후에도 깔끔한 뒷맛과 향이 그윽하게 코끝에 맴돈다. 쿠바 사람들은 커피를 생각하는 향기라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아바나 핀카 비히아에 머물며 《노인과 바다》를 집필할 때 이 커피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소설에서 노인과 소년의 대화가 떠오르고 이곳 사람들이 말하는 커피가 생각하는 향기라는 의미를 연상하게 하는 대화다. 일어나지 마세요. 소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우선 이걸 마시세요. 그는 커피를 잔에 조금 따랐다. 노인은 그것을 받아서 마셨다. 광장에서 멀지 않은 깔레 오피시오스 거리에 아시스의 산 프란시스코 성당과 수도원이 있다. 바로크 양식의 이 건물은 16세기 중반인 1548년에 착공해 1591년 준공할 때까지 53년이나 걸려 완성했다. 중세 고전미를 간직한 성당은 예수의 십이사도를 의미하는 기둥 12개가 건물을 지지하고 있는 형태다. 건물 내ㆍ외관은 빛바랜 사진처럼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수도원 뒤편에는 당시 귀족들의 묘지도 있고 다른 한쪽에는 캘거리의 성녀 마더 테레지아를 기리는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수도원은 1719세기에는 철학, 신학, 문학, 수학을 가르치는 학교로 사용했다. 몇 차례 허리케인으로 큰 피해가 발생했으나 1731년에 복원을 시작해 7년에 걸친 공사 끝에 지금 모습을 갖추었다. 그 후 1846년에 쿠바를 강타한 허리케인으로 종탑에 있던 산 프란시스코 성인 동상이 땅으로 떨어지는 피해를 보았다. 복구할 때 성인의 동상은 성당 입구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1941년 건축가 훌리오 알레마니에 의해 또 한 번 복원을 거친 성당과 수도원은 문서 보관소와 관청으로 사용하다 혁명 후에는 식민지 역사박물관이 되었다. 지금은 성당은 콘서트홀이 되었고 수도원은 예술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곳은 몇 차례 자연재해와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변화를 겪은 대표적인 중세 유적이다. 바로크 양식의 건축미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수도원의 회랑은 지금도 변함없이 아름다운 자태를 간직하고 있다. 성당과 수도원에 있던 유물은 가까운 곳에 있는 산 아구스틴 성당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저물녘 성당 지붕에 올라가면 돔 넘어 카리브해를 감상할 수 있는 뷰포인트다. 박태수 수필가
반 총장은 2014년 12월 아바나에서 열린 라틴아메리카-카리브국가공동체(CELAC)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쿠바를 찾았다. 그때 이 숍에서 머리를 다듬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 총장 옆 사진에 영국 찰스 황태자가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헤어숍은 아바나에선 손 맵시가 있는 곳인 것 같다. 미용실 안 중년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우리 부부를 보고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살포시 미소로 인사를 대신한다. 이 기구는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해에 있는 33개 나라가 대화를 통하여 정치적 합의를 끌어냄으로써 지역 내 공동 발전을 성취하기 위한 국가 포럼이다. 이 지역 공동체에 속하는 6억 5천만 명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적 다양성을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통합과 단결을 도모하고자 2011년 12월에 창립했다. 회원국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스페인과 유럽 열강의 식민지배에 시달렸던 아픈 역사가 있고, 지금도 이 지역에는 이념 갈등과 정치적으로 불안한 국가가 있으며 경제적으로도 열악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이 기구는 정치와 경제 등 역내 현안 중 상호 협력 분야에서는 한목소리를 내고 합리적인 정책 결정을 도출하기 위해 회원국 간 토의를 거쳐 최종적으로는 정상 간 회의에서 결정한다. 반 총장이 UN 사무총장으로 있을 때 이 기구에 관심을 가지고 포럼에 참석한 적이 있다. 발길을 플라자 비헤아로 옮긴다. 이른 시간임에도 스페인어, 영어, 불어, 중국어를 사용하는 여행객이 삼삼오오 그룹별로 모여 가이드로부터 주변에 있는 중세 건물에 얽힌 역사와 당시 삶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들 곁을 서성이며 잠시 귀동냥으로 모자라는 정보를 채운다. 1559년에 조성된 플라자 비헤아는 올드 아바나에 있는 아르마스와 산 프란시스코와 함께 아바나 3대 광장에 속한다. 이곳을 처음에는 누에보 플라자로 불렀다. 세 곳 광장중에서 아르마스와 산 프란시스코 광장이 정부 관료와 귀족, 군인을 위한 광장이었다면, 플라자 비헤아는 아바나에서 상권을 가지고 있는 부자와 상인들의 광장이었다. 주변에는 1719세기에 지은 콜로니얼 건물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후 20세기 초에 지은 건물이 광장을 에워싸고 있다. 서로 다른 시기와 형태로 건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비화성음이 화성적 맥락과 상관없이 화음의 조화를 이루듯이 이들 건축물은 서로 조화롭게 자리 잡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불균형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18세기 이 지역은 아바나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광장이었고 시장이 조성되어 상인이 몰려들자 명칭도 시장 광장으로 바꿨다. 박태수 수필가
-아바나 대성당과 뒷골목에서 만난 낯익은 얼굴- 여행지에서 현지인의 삶을 느낄 수 있는 골목길 여행은 또 다른 묘미다. 화려한 불빛에 가려진 뒤편에 숨은 그림자처럼 순수한 삶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올드 아바나는 여행객으로 넘치는 오비스포 거리에서 출발하여 아바나 대성당 광장부터 플라자 비헤아로 이어지는 다양한 광장과 헤밍웨이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바나 카페 등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넘친다. 먼저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아름답고 오래된 산크리스토발 대성당으로 간다. 이 성당에는 콜럼버스의 유해가 1796년부터 102년간 이곳에 안치되어 있었으나 1898년 쿠바 독립 전쟁 이후 스페인 세비야 대성당으로 옮겼다. 카리브해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이 대성당 주변 광장은 중세 건물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매력적인 장소다. 정면에 비대칭 종탑이 있는 산크리스토발 대성당은 이탈리아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가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했다. 성당은 식민 초기에 세운 교회 부지에 1748년에 착공하여 30여 년이 걸려 1777년에 다 지었다. 완공한 성당은 아바나의 수호성인인 크리스토퍼에게 헌정한 후 아바나 대주교좌 성당이 됐다. 성당 외관은 같은 교구 성당인 산 카를로스 교회와 유사한 형태고 아바나의 많은 건물과 마찬가지로 대성당도 카리브 바다에서 채취한 돌로 외벽을 마감하여 벽면에는 화석화된 해양 동식물을 볼 수 있다. 본당의 중앙 아치는 대성당 외부의 측면 통로 위에 위치한 8개의 플라잉 아치로 지탱하고 트랜셉트 위에 돔이 있으며 광장에서는 지붕 기와가 보이지 않는 구조로 지었다. 전체적인 성당 평면 구조는 십자가를 형성하고 있다. 성당 내부는 신고전주의 스타일로 장식되었고 본당의 제단에는 로마에서 만든 조각품과 금세공 작품이 있다. 한쪽에는 1632년 스페인 세비야 출신 마르틴 칸토스가 조각한 성 크리스토퍼 조각상이 있고 측면 통로에는 8개의 작은 예배당이 있다. 이 외에도 많은 성화와 프레스코 그림이 있는 아름다운 성당이다. 대성당을 둘러보고 떼니엔테 레이 골목을 따라 플라자 비에아로 향한다. 골목 옆 건물 사진을 찍으려 당긴 줌 렌즈 속에 낯익은 사람이 있다. 깜짝 놀라 카메라를 내리고 피사체를 확인한다. 작은 헤어숍 입구 사진 속 인물은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다. 이분이 왜 여기 계시지하며 순간 눈을 의심하였지만 사진 속 그분은 반 총장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왠지 우쭐하고 기쁘다. 박태수 수필가
혹자는 훔볼트를 과학자, 지리학자, 탐험가로 부르지만, 그를 인류 마지막 위대한 보편인이라고 칭하는 사람도 있다. 자연과 인간, 세계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통합된 하나의 세계로 파악하려고 한 그는 기술적 의미의 과학자를 넘어 사물을 성찰하고 고찰하는 철학자 면모까지 갖춘 통합적 지식인이다. 그리고 좁게는 훔볼트를 현대 생태학의 창시자로 추앙하나 그는 또 다른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르네상스 형 만능인이다. 올드 아바나 뒷골목에서 만난 훔볼트는 기록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그는 하늘과 땅, 그 사이에 있는 모든 창조물을 측정하여 기록하고자 했고 죽음을 맞는 최후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은 선구적인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큰 별이자 학자다. 수많은 선택이 계속되는 인생의 중요한 순간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되도록 하는 것이다. 훔볼트처럼 선택의 의미를 현명하게 판단하고 기록하는 삶을 산다면, 훗날 인생을 복기할 때도 아름답게 되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훔볼트는 죽음 직전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얼마나 장엄한 햇살인가! 마치 지상을 하늘로 불러들이는 듯하구나!라는 마지막 말에서 그는 마치 천상여행을 떠나듯 우리 곁을 떠났다. 존 러스킨은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무엇으로 채워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알차게 채워가는 삶을 살자. 스스로 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노력해도 실패할 수도 있고 그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할 수 없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그 어떤 것도 도전할 수 없고 성공할 수도 없다.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즐거운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는 것이 성공을 향한 가장 중요한 첫 걸음이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여행이 자유롭진 않지만, 자연을 찾아 늦가을 호젓한 산길을 느릿느릿 걸으며 한 마리 풀벌레의 애달픈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그리고 김대규 시인의 가을의 노래를 들으며 허전한 가슴을 채워보자. 박태수 수필가
훔볼트는 수많은 탐험을 통해 자연과 인간, 세계를 통합된 하나의 체계로 파악하려 했고, 인간은 자연에 대한 올바른 생각과 행동을 할 때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환경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자연에서 인간의 본성을 찾을 수 있도록 사회화하는 정교한 과정이 필요하고 쿠바섬의 파괴를 막기 위해서는 더 활동적이고 지속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그의 이런 업적은 19세기의 유럽 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나폴레옹이고, 다음가는 사람은 훔볼트이다.라고 브리태니커 사전에 기록돼 있다. 이처럼 훔볼트는 베이컨의 과학적 전통을 수용하는 자연 과학자이자 괴테, 쉴러, 피히테 등과 교분을 나누며 헤르더의 관념론적 철학에 큰 영향을 받는 철학적 면모도 갖추었다. 과학자로서 훔볼트가 가진 강점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그는 경험주의적 실험과 과학적 탐구, 그리고 관찰 방법에서도 독일의 철학적 관심을 접목했다. 그리고 그는 실증주의적 과학의 단점을 극복하고, 인간의 감성과 창조성의 의미를 투철하게 인식하여 양자를 결합한 보편과학을 구상했다. 여행하다 보면 가끔 뜻하지 않은 만남이나 일이 생긴다. 느껴보지 못한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하면 절로 감탄하고 새로운 그 무엇인가를 만나면 신기함에 빠져 정신을 빼앗기며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갑자기 닥치면 두려움이나 공포심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오늘처럼 뜻밖의 만남은 평생 지워질 수 없는 추억이 되고 글을 쓰기 위해 그의 작품 세계를 탐구하다 보면 단단한 연결 고리로 묶이는 인연이 된다. 훔볼트는 프로이센의 귀족인 아버지와 엄청난 자산가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많은 유산을 물려받는다. 유년 시절 《젊은 로빈슨》과 《아메리카의 발견》을 읽고 키워온 꿈길을 따라 귀족 청년 훔볼트는 화려하고 편안한 생활과 성공이 보장된 자신의 삶을 벗어 던지고 장엄하고도 거친 대자연의 품으로 뛰어든다. 박태수 수필가
훔볼트는 쿠바에 도착하여 흑인 노예무역 실태에 충격을 받고 그는 설득력 있는 묘사를 통하여 노예제도와 그에 따른 인간 본성에 대한 피해 사실을 유럽에 알린다. 그는 쿠바 자연의 아름다움과 문화를 예찬하고 존경하지만, 스페인 점령군에 의한 사악한 노예제도가 인간 본성을 훼손하였다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그는 〈인류와 정의의 원칙〉에서 노예제도에 대하여 교육받고 깨우친 사람의 마음에 어떻게 그런 모순이 존재할 수 있는지를 인간의 정의 측면에서 이 문제를 유럽 사회에 제기한다. 훔볼트는 낯선 곳에서 눈길이 닿는 창조물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여행을 하고 그가 남아메리카를 찾기 이전에는 이곳이 약탈 대상이 되었으나 그가 찾은 후에는 연구 대상이 된다. 이런 탐험 여행 결과로 페루 앞바다를 북상하는 훔볼트 해류 외에, 산강만대학 등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고 훔볼트 펭귄 훔볼트 오징어처럼 그의 애칭이 붙기도 하였다. 19세기 훔볼트의 남북 아메리카대륙 탐사는 많은 과학적 업적을 남기고 영향도 끼쳤다. 찰스 다윈은 훔볼트가 없었다면 비글호를 타지 않았을 것이고 《종의 기원》도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한 것을 볼 때,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였다면 훔볼트는 아메리카를 발굴하는 성과를 남겼다. 이처럼 자연 과학자이자 지리학자인 훔볼트는 《쿠바섬에 관한 정치적 에세이》 이외에도 많은 연구논문과 탐험기록을 남겼고, 19세기 전반의 과학을 다룬 그의 대표작 《코스모스 Kosmos》를 저술하였다. 이런 업적 때문에 그를 자연 지리학 또는 현대 생태학의 창시자라 일컫고, 당시 그를 종합적인 지식을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훔볼트는 25년이란 세월 동안 조사하고 연구한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일생의 역작 《코스모스》 전 5권을 저술한다. 이 책은 그의 나이 76세인 1845년에 제1권이 발간되고, 1859년 90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제5권의 반 정도가 완성되었을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다. 자연 과학자로서 관찰하고 얻은 지식을 사회과학적 언어로 저술한 그의 노력에 칭찬을 넘어 찬사를 보내야만 한다. 훔볼트는 자연과학적 깨달음을 통하여 얻은 지식이 그릇된 이념적 이데올로기로 변질하여 확산하는 것을 우려하면서 객관적 관념론에 기반한 철학적 사상을 구체화한다. 이런 훔볼트의 학문적 가치를 다윈 이전에 훔볼트가 있었다라는 평가처럼 그의 역작 《코스모스》도 칼 세이건 이전에 훔볼트가 있었다라고 평가할 수 있는 자연과학의 고전이다. 박태수 수필가
학예사인 그녀의 도움으로 박물관 이곳저곳을 차분하게 돌아본다. 가지런하게 정리된 각종 표본과 분석 자료를 감상하면서 훔볼트는 평범하지 않은 자연과학 탐험가라는 느낌에 흠뻑 빠진다. 하지만 오전에 이곳을 찾은 관람객은 우리 부부가 처음이라고 하는 것을 볼 때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 덕분에 학예사와 한 시간가량 호젓하게 훔볼트 박물관을 둘러보는 호사를 누린다. 전시물에 관심을 보이자 그녀는 개방하지 않은 곳까지 보여주는 환대를 하고 떠날 땐 영어로 쓴 쿠바 자료까지 선물로 주는 호의를 베푼다. 아바나 구시가지 오비스포와 무라야 거리 모퉁이에 있는 이 건물은 19세기 초에 건축되었고 훔볼트 박물관으로는 1997년 10월에 문을 열었다. 무심코 지나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이곳은 훔볼트가 동료와 함께 쿠바섬을 탐험하기 위하여 두 차례(1800.121801.3, 1804.45) 아바나를 방문하였을 때 머물며《쿠바섬에 관한 정치적 에세이》 집필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한 곳이다. 그는 이 책에서 과학적 엄격함과 국제적 인식, 그리고 깊이 있는 철학적 인본주의를 결합하여 쿠바의 노예 정책을 비판함으로써 유럽 제국에 정치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역작의 산실이다. 훔볼트의 쿠바 탐험 기록인 이 에세이는 섬에 대하여 쓴 첫 번째 지리학으로 간주하고 쿠바섬의 지형과 해안 그리고 자연과 기후뿐만 아니라 사회경제 전반에 대한 분석 자료를 기록하고 있다. 훔볼트의 이 에세이는 19세기 국제 정치사에서 쿠바인들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삶의 스냅숏이다. 그는 쿠바섬에 대하여 자상하면서도 체계적인 설명과 비판적인 분석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구와 복잡한 사회 구조, 그리고 당시 쿠바 국내 정치에 대한 외세 개입과 압력으로 펼쳐지는 열대 낙원의 실상을 가감 없이 담고 있다. 박물관에는 쿠바섬의 역사와 자연에 관한 것을 관찰하여 정리한 훔볼트의 기록이 가지런히 남아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당시 함께 살았던 가족 공간, 연구실과 표본실이 있고, 서재에는 독일 문학과 철학에 관한 3천여 권의 고서와 예술품 등 다양한 유물을 소장하고 있어 그의 삶과 학문적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훔볼트는 1800년 쿠바에 도착하여 섬의 사회적, 정치적 분위기를 설명하기 위하여 과학적 방법을 적용한다. 그것은 쿠바를 다른 카리브해 영토 중 독특한 식민지로 만든 지리적 위치, 경제, 인종 구성 및 정치적 계층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질적 양적 데이터를 모두 사용하는 과학적 업적을 남긴다. 박태수 수필가
-올드 아바나 뒷골목에서 알렉산더 훔볼트를 만나다- 올드 아바나 뒷골목을 둘러보러 나선다. 오비스포 거리 끝자락에 있는 암보스 문도스 호텔에서 오른쪽 오피시오스 길을 따라 아바나 베이 쪽으로 걷는다. 아열대 겨울바람은 따스한 듯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찬 기운이 바람결에 숨어 있다. 종종걸음으로 곁을 스치듯 지나가는 쿠바 아낙의 휘날리는 스카프 결에서 카리브 바닷바람의 실루엣 같은 형상을 느낀다. 올드 아바나 중심에서 살짝 벗어난 이곳은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곳이다. 꾸미거나 다듬어진 것이 더 아름답다는 문명 세계 사고에서 벗어나 지금은 오히려 있는 그대로가 예쁘고 옛것이 더 매력적이라는 느낌에 빠른 걸음보다 느릿느릿 걸을 수 있는 이 길이 더 편하고 포근하다. 정비된 아바나 비에하에서 한발 비켜선 이곳은 마치 중세 유럽의 어느 뒷골목을 걷는 듯 착각한다. 구김 없이 있는 그대로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살피다 보면 자연스레 그 시절 그들의 삶에 빠져든다. 이런 느낌을 즐기는 것도 진한 감동이 깃드는 여행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다. 유럽 여행을 갈 때마다 그 시절을 반추하려 몽마르트르 언덕 골목길을 찾는다. 그러나 그 옛날 흔적이나 분위기는 세월이 갈수록 느낄 수 없다. 그 이유는 더 예쁘게 보이려고 꾸미다 보니 차츰 흔적이 지워지고 거리 미술가도 캐리커처 그릴 손님 찾기에 바쁜 일상을 보면서 발길을 돌리게 된다. 그러나 아바나 뒷골목에선 그런 변화의 물결은 유럽보다 아주 느리고 얼마 동안은 그 정취를 간직할 수 있을 것 같다. 벽이란 뜻을 가진 무라야 골목길을 따라 해안 쪽으로 가다 플라자 비에하에 있는 테라스 카페에서 진한 카리브의 아라비카 향이 물씬 풍기는 모닝커피를 마시고 여정을 시작한다. 주변 카페와 레스토랑은 이른 시간임에도 여행객 맞을 준비로 분주하고 광장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현판과 조형물은 여행자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광장을 한 바퀴 돌아보고 발길 닿는 대로 두리번거리며 골목길을 걷는다. 세월의 무게만큼 무거운 나무 대문이 열려 있는 건물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안내원으로 보이는 중년 여인이 안으로 들어오라 손짓한다. 벽에 붙어 있는 현판을 보고 그녀에게 질문하였으나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서로 안타까워하던 그때, 젊은 여인이 빠른 걸음으로 2층에서 내려와 유창한 영어로 안내를 자청한다. 그녀는 이곳이 자연 과학자이자 탐험가인 알렉산데르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 박물관으로 《쿠바섬에 관한 정치적 에세이 A Political Essay on the island of Cuba》의 모태라고 설명한다. 박태수 수필가
세 가지 형태의 집은 나뭇가지와 야자 잎이나 밀짚을 사용하여 짓는다. 그러나 스페인 점령군이 거주하면서 쿠바 건축 형태는 영구적인 주거 형태로 빠르게 변하면서 절충적이고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아바나에는 400여 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통치 시절에 지어진 건축물이 있고 이것들은 당시 건축 형태나 색상, 그리고 독특한 양식을 모두 갖추고 있어 중세 건축의 백과사전이라 한다. 특히 18세기 후반(1778, 1791) 두 번의 개혁으로 무역 자유화와 이민자가 늘면서 많은 변화를 받아들였고 그 과정에서 더 많은 다양성을 갖게 되었다. 또한 쿠바는 유럽과 달리 1, 2차 세계대전의 영향을 직접 받지 않아 중세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어 역사지구는 1982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유네스코는 남북미 대륙을 통하여 올드 아바나를 카리브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역사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도시의 중심이라고 하였다. 변동성이 컸던 식민 초기에는 군사 건축물이 주로 지어졌다. 구조는 원치 않는 적 공격으로부터 아바나 비에아를 보호하기 위하여 복잡한 구조를 가진 요새로 마요르 광장 옆에 있는 까스티요 데 라 레알 뿌에르따가 대표적이다. 식민 중기에는 유럽의 바로크 양식 건축물들이 기후와 지리적 위치를 고려한 다양한 쿠반-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고 대표적인 건물은 프랑스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가 설계한 아바나 대성당이다. 식민 후기에 들어서는 설탕 수출로 비축된 자금을 바탕으로 균형과 비율을 중시하는 프랑스 신고전주의 영향을 받아 구성의 치밀함과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주는 미적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마요르 광장에 있는 국영 레스토랑 엘 템쁠레떼와 카피톨리오 옆에 있는 호텔 인글라떼라가 대표적이다. 건물 전면을 지탱하는 원형 기둥을 기본 구조로 갖는 양식으로 바로크 건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형태다. 밤에 조명이 드리울 땐 주변 건물과 어우러져 더욱 화사함을 느낀다. 이 외에도 올드 아바나 역사지구에는 콜로니얼 때 지은 오래된 유럽풍의 건물이 수없이 많다. 광장 옆 18세기 후반에 건축한 부티크 호텔 산타 이사벨이 있고 주변에는 헤밍웨이가 이곳에 있을 때 머물렀던 암보스 문도스 호텔도 있다. 흔히 건축의 기본은 구조의 튼튼함과 쓰임새를 살린 기능 그리고 미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이론처럼 아바나 비에아의 콜로니얼 시대 건축물에서는 이들 3요소를 모두 갖추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아르마스 광장 주변을 거닐다 흥미로운 거리 캐릭터와 거리 예술가들도 만나고 골목 뒤편에 있는 벼룩시장도 구경한다. 오래된 헌책, 잊힌 20세기 초중반의 골동품 같은 카메라, 사회주의 메달, 혁명 전후 동전과 구권 화폐를 구경하다 보면 지난 시절 아바네로의 생활상을 엿보는 듯하다. 발길을 옮겨 성 앞 델 뿌에또 길 건너 모로성을 바라보며 바닷바람에 몸을 맡기고 말레꼰 방파제를 느릿느릿 걷는다. 찌뿌듯한 아침 날씨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카리브 겨울바람은 잔잔한 파도와 함께 쉬지 않고 방파제에 물보라를 일으킨다. 저물녘 햇빛에 반짝이는 파도 조각은 수정구슬이 되었다 사라진다. 해질녘 카리브의 감미롭고 감상적인 분위기에 젖어 수평선을 바라본다. 오늘도 올드 아바나의 콜로니얼 건축물을 돌아본 의미 있는 하루가 저문다. 박태수 수필가
박물관에 들어서면 콜로니얼시대에 활동하였던 전함과 선상 생활 모습항해 도구수중 유물금과 은덩이가 전시되어 있다. 위층에는 쿠바에서 건조한 많은 선박 모형이 있고, 옥상에는 당시 사용하였던 크고 작은 대포를 볼 수 있으며 이곳은 카리브의 자연경관과 아바나 스카이라인을 감상할 수 있는 멋진 곳이다. 1층에서는 터치스크린을 사용하여 쿠바 사람들이 자랑하는 전함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를 감상할 수 있다. 이 배는 1769년 아일랜드해군 건축가 매튜 멀란의 설계로 아바나에서 건조한 성자의 모후란 이름을 가졌다. 당시 세계 최대 배수량 4천950t과 112문의 대포로 무장했으며 지브롤터와 케이프 스파르텔 해전에서 무적 스페인 함대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1805년 트라팔가르 전투에서는 큰 덩치 때문에 순발력이 부족한 약점을 파악한 영국 전함의 집중포화를 피하지 못했고 아군의 전투 지원도 원활치 않아 결국 패전의 멍에를 안고 침몰하였다. 그러나 쿠바 사람들은 이전함을 건조한 자긍심과 사랑에는 변함이 없다. 네모 모양의 아르마스 광장 중앙에는 쿠바 영웅 카를로스 마누엘 데 체스페데스의 하얀 대리석 조각상이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드 7세 동상이 놓여 있었으나 쿠바 혁명 후 1955년 공원을 재단장할 때 그 받침대를 넘겨주었다. 돌로 만든 벤치와 분수대를 갖춘 아르마스 광장은 중세 유럽 스타일과 쿠바 현대성을 결합하여 재단장함으로써 아바나를 찾는 관광객과 시민이 즐겨 찾는 공간이다. 아르마스 광장 주변에서 만난거리의 예술단원 모습. 아르마스 광장 벤치에 앉아 아침에 산 빵과 커피로 간단하게 늦은 점심을 해결한다. 부드러우면서도 진한 향이 사방으로 퍼진다. 이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것이 배낭여행의 맛이다. 깃발 든 가이드를 따라 이동하는 관광객의 눈총을 받는다. 허름한 옷차림에 아시아인이 점심때를 넘겨 맨 빵을 먹는 모습이 안타까웠을까. 물라토, 메스티소, 흑인과 백인들로 뒤섞인 그들은 스페인어로 소통한다. 카리브제도나 중남미에서 온 여행자로 보인다. 그들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불편함이 없다. 광장을 오가는 관광객을 볼 때, 쿠바는 미국의 경제봉쇄에 따른 어려움을 관광 수입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1492년 콜럼버스가 상륙하기 전 쿠바는 카리브 주변의 토착 원주민(Ciboney Indians, Arawak Indians)들이 거주했다. 그들의 초기 건축은 아열대 기후에 적합한 생활양식을 기반으로 갈대나 나뭇잎으로 엮어 만든 집이 전부였다. 그들은 곁채 형태인 카네이(Caney), 직사각형 필로티 구조의 대발(Barbacoa)로 지은 카네이, 아메리카 오두막(Bohio)에 살았다. 박태수 수필가
예술품은 기독교 성화와 도자기공예품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실로 바뀐 건물은 원형을 최대한 유지함으로써 당시 건축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 쿠바 정부는 이 건물을 바로크 양식의 주요 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하고 있다. 외관은 굵은 벽체 중심의 사각 형태로 이 양식을 쿠반-바로크라며 스페인과 차별화한다. 전면에는 기둥으로 지지가 된 아치와 아케이드가 있고 그 위에는 카리브 해저에서 채석한 석회석으로 외관을 마감했다. 이 석재에 박혀 있는 수많은 해양 화석은 건물과 함께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바로크 양식의 외관을 한층 돋보이게 하는 작은 발코니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은 아래 기둥 상단과 수평을 이룬다. 건물 중앙에서는 사방의 갤러리를 내려다볼 수 있는 개방형이라 안뜰에 있는 콜럼버스의 대리석 조각상과 한가로이 노니는 공작과 예쁜 정원을 조망할 수 있다. 완벽하게 내외관의 조화를 이뤄낸 이 건물은 전면 마요르 광장과 연계돼 콜로니얼 시대 최고 건축물로 평가한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바다 쪽에 있는 카스티요 데 라 레알 푸에르자 성은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해적으로부터 아바나를 방어하기 위해 건축한 요새 중 가장 오래됐다. 그러나 처음에 지은 요새는 1558년 프랑스 해적 공격으로 대부분 파괴됐으나 같은 위치에 20년 걸려 지금 모습으로 새로 지었다. 성의 형태는 네잎 클로버 모양으로 각 모서리에 감시탑을 새웠고, 외곽은 방어 목적으로 해자를 만들어 성을 외부와 차단함으로써 도개교를 통해서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중세 유럽 성의 디자인을 따랐다. 성의 구조는 기초 바닥에서 10m 높이 벽체를 앞바다에서 채석한 석회암으로 쌓았고 스페인이 카리브해를 지배하는 동안 만든 여러 군사 요새 중에서 가장 건축적으로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성의 서쪽 망루에는 스페인 세비야 대성당 종탑의 히랄다를 모방한 히랄딜라라는 청동 여인상 복제품이 30m 높이에 서 있다. 쿠바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 조각상 진품은 아바나 장인 제롬 마틴 핀존이 1634년에 만들었으며, 박물관 입구는 이 장인이 주조한 산타클라라수녀원 성당의 종과 함께 보관하고 있다. 세비야 대성당 종탑의 히랄다는 기독교로 개종한 무어족 출신 여인을 신앙의 상징으로 삼았지만, 이 성은 쿠바 최초 여성 총독 이사벨 데 보바딜라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 미국 플로리다로 탐험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않자 무사 귀환을 기다리며 매일 이 망루에서 기도하다 죽었고 그녀의 애틋한 사랑과 충정을 상징으로 삼아 종탑에 세웠다. 성을 완성한 후 초기 몇 년은 획득한 왕실 소유의 금과 보물을 스페인으로 이송할 때까지 보관해 일명 왕실의 성이라고도 한다. 그 후 18세기 후반까지는 꼭대기 층에 경비대장과 왕실 경비병이 상주했고 정부 수립 후에는 국립기록문서보관소와 국립도서관으로 사용했으며 1959년 쿠바혁명 이후에는 국립기념사업회를 비롯한 혁명사업 용도로 사용했다. 건축 400주년이었던 1977년부터 해양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박태수 수필가
어제와 그제는 아바나 하늘이 맑아 도보 여행에 좋은 날씨였으나 오늘은 카리브답지 않게 흐리고 바람까지 불어 비가 내리지 않을까 염려하자 카사 주인은 건기라 괜찮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여행자의 거리 오비스포는 이른 시간이라 한산하다. 관광객은 늦잠 자는지 길 양쪽에 늘어선 레스토랑에선 종업원만 영업 준비로 분주하다. 오늘따라 이 길은 헐렁한 옷을 입은 듯 편안하게 골목길을 걷다 허전함을 느낄 즈음 어디선가 갓 구운 고소한 이스트 냄새가 좁은 길을 따라 흐른다. 무심코 산호세 빵집으로 들어서자 효모 냄새가 더욱 코를 자극하고 침샘에서 침이 솟구친다. 광주리에 담긴 빵은 화려함보다 소박하고, 예쁘게 보이려고 모양을 다듬지 않았어도 담백한 손맛이 절로 느껴진다. 하얀 벽면엔 유기농이니 몸에 좋은 것을 넣었다는 광고성 글귀도 없고 토핑 올린 빵도 찾을 수 없는 것을 볼 때, 인공 첨가물은 사용하지 않고 천연재료만 만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빵은 돌아다니다 허기지면 커피나 음료수와 함께 손쉽게 먹을 수 있다. 여행지에선 아침에 만나는 첫 가게에서 비상식량처럼 그날 먹을 빵을 사는 습관이 있다. 오늘 만난 이곳은 헤밍웨이가 아바나에 머물 때 머문 암보스 문도스 호텔 바로 옆에 있어 혹시 그도 먹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빵 몇 개를 산다. 오비스포 골목 끝자락에서 콜로니얼 시대(15111898) 스페인이 가장 먼저 만든 아르마스 광장을 찾는다. 이 광장은 아바나가 조성된 직후 공공기관 관리와 군인이 머물 주택과 함께 1519년에 건설했고 16세기 후반에는 사열과 훈련 공간으로도 활용했다. 광장 정면에는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 빨라시오 데 로스 까피타네스 헤네랄레스 가 있다. 1776년에 짓기 시작해 1792년에 카사스 아리고리 총독이 거주할 때까지도 완공하지 못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당시 최고의 재료로 짓기 위해 자재 대부분을 스페인에서 가져왔다. 벽돌은 말라가 철재는 빌바오 대리석은 제노아에서 가져왔으며 노동력은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노예가 동원됐다. 이 건물은 콜로니얼 시대부터 현대까지 쿠바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처음에는 스페인 식민 정부 본부가 있었고 그 후 미군이 사용했다. 쿠바 정부가 회수한 후에는 대통령집무실과 아바나 시의회가 사용했으나 지금은 역사박물관이다. 박물관에는 콜로니얼 시대 다양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꼭대기 층에는 총독과 가족이 사용했던 여러 형태의 가구와 다양한 장식을 보존하고 있어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재미가 쏠쏠하다. 박태수 수필가
까스띠요 데 산살바도르 데 라 뿐따 요새에 도착한다. 이곳은 해적의 공격으로부터 아바나를 방어하기 위하여 1582년 스페인 펠리페 2세의 명에 따라 1590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40년 걸려 완공하였다. 올드 아바나에 있는 여러 방어 요새 중에서 모로 성채와 함께 군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아쉽게도 1762년 영국의 쿠바 원정대의 침공으로 심각한 손상을 입은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요새에서 잠시 카리브의 정취에 취해 본다. 출렁이는 옥빛 바다 왼쪽에는 웅비하는 아바나의 신도시가 보이고 마주 보면 위풍당당한 모로 성채가 있으며 오른편으로는 올드 아바나 역사지구가 펼쳐진다. 모로 성채 쪽으로 걸어가면 영국과의 해전에서 입은 포탄의 흔적도 볼 수 있다. 푼타 쪽에는 3개의 거대한 포대가 당시 치열하였던 전투를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쿠바 정부는 2002년 요새 복원공사를 마무리하고 현재 해양군사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에는 요새의 역사와 건축, 해군 전함과 자료, 그리고 수중 고고학에 관한 자료를 골고루 갖추고 있다. 요새를 뒤로하고 안토니오 마세오 공원 쪽 말레콘 방파제를 따라 걷는다. 가는 길에 낚시하는 아바나 젊은이들을 만난다. 그들은 고기잡이보다는 자연과 유유자적 유희를 즐긴다. 한쪽에서는 바다 가마우지가 하늘로 날아올라 배회하다 수면 아래 물고기가 시야에 들어오면 비호처럼 낙하하며 먹이를 사냥한다. 십중팔구는 실패하나 운 좋은 녀석은 성공하여 먹잇감을 물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먹고 먹히는 자연의 일상이 한 폭의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쪽빛 푸른 파도가 쉬지 않고 바위에 부딪히고 부서지면서 물보라를 일으킨다. 자연의 소리에 눈과 귀를 내어주고 느릿느릿 걷는다. 카리브해를 뒤로하고 올드 아바나 역사지구 뒷골목으로 간다. 1874년 신 고딕 양식으로 지은 까필라 라 인마쿨라다 교회는 콜로니얼시대 중남미 다른 나라 교회보다 소박하다. 쿠바 혁명 후 한동안 여학교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성당으로 복원되었다. 건물 밖에서 10개의 뾰쪽한 종탑 형태의 옥상 구축물과 아치 형태의 창문을 바라보면 신 고딕 양식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교회를 나와 몇 블록 뒷길로 접어들자 현지인들이 사는 주거지역이 빛바랜 사진처럼 펼쳐진다. 화려하고 깨끗한 역사지구와 달리 이곳은 아바나의 가려지지 않은 속살을 볼 수 있다. 뒷골목에는 쿠바의 어려운 경제 사정과 이데올로기의 허상이 눈에 들어온다. 즐비한 콜로니얼 건물들이 방치되어 있고 그들의 경제 사정을 고려할 때 언제 복구될지 알 수 없어 안타깝다. 무엇인가 배급받으려 길게 줄지어 기다리는 군상들과 의욕을 체념한 것처럼 비치는 무표정한 모습을 볼 때, 그들과 눈 맞춤을 할 수 없어 먼 허공을 쳐다보며 큰길로 발길을 재촉한다. 갈리아노와 아니마스 골목길을 따라 파세오 델 프라도 공원길을 향하여 빠르게 걷다 보니 현지인의 위험 구역(?)에서 벗어난다. 박태수 수필가
카사 안주인은 아침 상차림으로 커피와 열대 과일 몇 쪽, 에그 프라이, 마른 빵과 치즈로 차렸으나 준비해간 라면을 곁들여 식사한다. 카사는 숙박비와 별도로 한 끼에 5쿡(미화 5.5달러)을 현금으로 받는다. 숙박비는 숙박업동맹과 배분하지만, 밥값은 카사 운영자가 모두 갖게 되므로 식자재비를 한 푼이라도 아끼려다 보니 가격대비 식사의 질은 좋은 편이 아니다. 한 집에 머무는 벨기에 친구는 커피를 마시며 차려진 식단을 쳐다보고 닷새 동안 아침 메뉴가 단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았다며 투덜거린다. 그는 반도체 관련 사업을 하며 우리나라를 여러 차례 다녀간 적이 있는데, 한식 차림이 좋았고 음주 다음 날 해장국이 일품이라며 엄지 척을 한다. 여행 전 인터넷에서 쿠바를 다녀온 젊은이들이 쓴 블로그를 보았다. 예쁜 컬러 사진과 함께 올린 아침 식사는 시각적으로 보기 좋았으나 막상 현지에서 이것만으로 아침 식사를 해결하기에는 왠지 부족함을 느낀다. 쿠바를 거쳐 멕시코까지 두 달여 가까이 여행하려면 아무래도 누룽지와 라면, 구운 김과 깻잎 조림, 고추장 등 우리 식품으로 마련한 밑반찬이 있어야 할 것 같아 미리 준비하여 갔기에 오늘도 우리 음식을 곁들여 아침을 해결한다. 여러 달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땐 밑반찬을 준비하지 않으면 음식 문제로 낭패를 볼 수 있다. 일 년 전 100여 일 동안 터키와 코카서스 세 나라, 이란과 중앙아시아 다섯 나라 여행 중에 밑반찬이 떨어졌다. 현지 음식에 들어간 향신료가 맞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나이 탓인지 길든 우리 음식이 입에도 맞고 몸에도 좋은 것을 느낀다.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서 파르크 광장 중앙에 있는 쿠바의 국부격인 호세 마르티 동상을 마주하고 파세오 델 프리도 공원길을 따라 말레콘 방파제로 향한다. 길 양쪽엔 오랜 세월의 역사와 에피소드를 간직한 콜로니얼 시대 지은 호텔과 움직이는 명물 올드카가 시간여행을 떠나자고 속삭인다. 길 왼편에는 1914년 스페인 사교클럽으로 지은 팔라시오 데 로스 마트리모니오스가 있다. 네오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은 건물의 안과 밖은 지금도 화려하고, 우아한 계단과 프레스코 벽화는 눈길 끈다. 한때는 화려한 사교클럽이었으나 지금은 하바네로가 선호하는 결혼식장이 되었다. 옷깃을 스친 인연이 닿았는지 어제 만난 화가와 눈 맞춤으로 인사를 한다. 오늘도 그는 시가를 입에 물고 연기를 내뿜는다. 쿠바의 주된 농산물이 담배여서인지 아바나 길거리에서는 성인 못지않게 어린 청소년들이 흡연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광장 앞 호텔 잉글라테라 테라스 카페에서는 여행자들이 쿠바 특산 시가를 쉬지 않고 피워댄다. 멀리 보이는 푸른 바다는 이곳이 카리브라는 것을 자랑하려는 듯, 파스텔 톤의 푸르디푸른 쪽빛 하늘과 새하얀 구름이 조화를 이루고 해풍도 질세라 감미로운 바다 향을 실어 얼굴을 스친다. 10여 분 정도 걸어 호텔 파세오 델 프라도 앞길을 건너자 카리브해를 향해 와!하고 외치며 말레콘 방파제에 첫발을 딛는다. 이곳은 매력적인 콜로니얼 도시풍경과 방파제가 어우러진 올드 아바나 사진 때문에 여행자는 이곳을 쿠바의 대표 아이콘으로 여긴다. 박태수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