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살인 용의자 유영철이 부유층 노인과 출장 마사지 여성 등 시민 22명을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26명을 죽였다”는 검거 초기 진술이 정확한 수치인 것 같아 더욱 소름 끼친다. 천인이 공노하는 살인사건이 밝혀지자 좋은 말 잘 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좌절감은 곧 폭력성으로 이어진다”며 “소외계층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마련되지 않으면 유씨의 연쇄살인과 같은 강력범죄는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힌다. 그는 중1 때 아버지가 사망했고, 고등학교 때부터 수감생활을 했는데 인생에서 가장 민감한 시기에 사랑을 받지 못하고 수감돼 좌절감을 느끼며 자란 것이 ‘반사회성 인격장애’의 원인이 된 것 같다고 진단한다. “21세부터는 사회에서 지낸 기간보다 교도소에서 더 오래 있었다. 20대 초반 결혼했지만 2년 전 이혼 당한 후 더욱 고립감에 시달렸다. 그런 외로움을 내적으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인을 요구했을 것”이라며 ‘살아있음을 확인하려는 범행’이라는 말도 한다. ‘섬뜩한 소외가 빚은 참극’이라는 동정론도 나온다. 그러니까 이 사회가 범행을 초래했다는 얘기다. 심지어 살인 행각을 옹호하는 ‘팬카페’도 개설한 얼빠지고 정신 나간 네티즌들도 있었다. 아마 ‘성선설(性善說)’만 알고 ‘성악설(性惡說)’은 모르는 모양이다. 청소년 시기에 애정결핍이나 좌절감을 경험했다고 모두 반사회성 인격 장애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그보다 훨씬 그늘진 곳에서 성장한 청소년들이 많으며, 그들은 지금 성실하게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더구나 윤영철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체의 지문을 도려내고 유전자 감식을 피해 범행중 실수로 흘린 피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범행 현장에 불을 지르는 등 가증스러운 치밀함을 보였다. 시신을 전기톱으로 토막내고, 범행현장을 몰라보게 청소한 그를 ‘정신 이상’자로 생각하는 건 무리다. 게다가 이번 살인극은 우발적 범행이 아니다. 따라서 이 범죄를 특정 질환 탓으로 돌리면 안된다. 이미 이 부류의 질환자들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고 고통스런 삶을 살고 있다. 사건이 발생할 때 마다 신경정신 질환을 언급하는 것은 사회의 편견을 조장할 뿐 아니라 환자들을 두번 울리는 행위다. 경찰 얘기는 다음에 하겠다. 문제는 사형제도다. 아무리 극악한 죄를 지었다고 해도 신(神)이 주신 생명을 인간이 심판할 수 없다는 종교적 폐지론과 마땅히 죄에 상응하는 값을 치르게 하고 사회로부터 완벽하게 추방해야 한다는 폐지반대론이 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을 징계 수단으로 삼는 것은 지나치고 인권을 무시하는 행위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형제도 대신 200년 징역형 등으로 강화하는 방안도 그렇다. 우리 사회에서 극악한 범죄를 격리시키기 위해서는 상징적이 아니라 실질적인 사형제도가 존속해야 한다. 살인이나 잔혹한 수법으로 인간의 생명을 다룬 사람에게 국가가 마지막으로 적용할 수 있는 형벌이 사형제도다. 타인의 목숨을 앗는 살인을 저지른 자는 그의 목숨을 거두는 것이 당연한 응징이다. 정의의 관념에 맞는다. 그렇게 정의의 칼이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있을 때 살인이라는 부정의를 저지르는 일이 일어나지 않거나 줄어든다. 과거에도 고재봉(1963년)·김대두(1975년)·지존파(1994년)·온보현(1994년)·막가파(1996년) 사건 등 엽기적인 살인 범죄들이 있었지만, 피해자 숫자는 이번이 가장 많다. 당시에도 살인범들은 인명을 해친 것을 반성하기 보다 “불평등한 사회적 모순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등 범죄의 원인을 사회 탓으로 돌린 궤변과 간계를 늘어놨었다. 하지만 무고한 인명을 잔혹한 수법으로 죽이고 토막을 냈거나 심지어 생매장한 살인범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이다. 인권은 인간을 존중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기본권이다. 계획적인 살인행위는 스스로의 인권을 함께 죽인 행위다. 물론 전과자라는 낙인 속에서 일자리를 찾고 주변의 인정을 받으며 건전한 인간으로 살아 가기는 쉽지 않을 게다. 그렇다고 자신의 상황을 사회나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고, 더구나 살인에 기댄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살인범이 ‘공공의 적’이라는 데 이견은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면 자력과 타력이 관계하면서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력이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말한다. 예컨대 내가 지닌 신체의 힘, 또는 재력, 지식의 힘, 권력, 등등. 타력이란 나 아닌 다른 대상이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말한다. 그런데 이 자력과 타력은 얼핏 생각하면 상호 상대적이어서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하기 쉬우나 조금 깊이 생각하면 이것은 대단한 착각임을 깨닫게 된다. 자력과 타력을 서로 대립되는 관계로만 파악할 때는 나의 자력을 강화하기 위하여는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나 아닌 남이 가진 모든 힘을 나에게 가져오기 위하여 온갖 짓을 다 행한다. 그렇게하다 그 일이 뜻같이 이루어지지 못할 때에는 상대를 해까지 나를 위하려고 한다. 보통 세상의 많은 일들은 이러한 사고위에서 행해지므로 결국 대단히 어리석은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면 자력과 타력이 과연 그처럼 상호 대립적인 것일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자력과 타력은 서로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상호 바탕이 되는 불가불리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력이라는 것이 어디서 왔는지 자세히 분석해보면 그 무엇하나도 스스로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타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 몸도 알고 보면 과연 내 힘만으로 된 것인가? 삼척동자도 이 몸은 부모님이 주신 것임을 안다. 그러면 부모님의 힘만으로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자라오는 동안 천지의 힘도 스승의 힘도 수많은 동포의 힘도 다 나에게 작용되어 현재의 내가 구성되어 있다. 그렇게 보면 이 나라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동원되어 이루어진 것이니 과연 타력이 없이도 자력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큰 자각이 있어야 하리라 본다. 이 세상의 모든 타력은 곧 나를 살려주고 있는 힘이며 그러기 때문에 타력은 곧 나와 같다. 이러한 자각이 있게 되면 타력을 함부로 함이 곧 나를 함부로 함이 됨을 안다. 요즈음 환경을 말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환경을 함부로 하는 것은 곧 나를 함부로 하는 것이다. 모두를 나로 알 때 밝고 크고 아름다운 세계가 열린다. /김주원.원불교 경인교구장
근래 엽기적 살인마 유영철과의 인터뷰를 할 때 그가 반성하기는 커녕 죽은 사람은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태도로 일관하는 말을 여과없이 내보낸 것은 큰 문제점이다. 아직 경찰의 수사가 계속되는데 그와의 인터뷰를 그대로 방영해서 국민에게 끼치는 해악도 생각해야 한다. 범죄자의 말은 항상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또한 송두율씨가 며칠전 석방되면서 인터뷰할 때 자신이 끼친 잘못된 부분은 한마디의 송구하다는 말도 없이 오히려 자기는 온전한 피해자로 부각을 시키고 국가보안법은 악법 그 자체인 것처럼 말을 했다. 자신의 석방으로 국가보안법은 종식되었다고 말하는데 그 표현에 있어서 많은 문제가 있는데도 여과없이 방송을 내보냈다. 엽기적 살인마와 사상적 이념적 문제가 다분히 있었던 사람들을 그렇게 인터뷰해서 내 보내면 국민들의 가치관에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그렇치 않아도 현 정부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으로 혼미를 거듭하는 정국에서 그리고 언론개혁 운운하는 이 시점에서 방송사들은 자정능력을 가지고 국익차원에서 균형과 중용이 상실되지 않은 신중한 방송을 해야 할 것이다. /인터넷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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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전반에 걸친 안전불감증이 1999년 어린이 등 23명의 목숨을 앗아간 ‘화성 씨랜드 화재 사건’처럼 포천의 한 민박집에서 대형 인명사고를 일으킬뻔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한 중학생의 침착한 구조활동(본보 24일자 19·18면)으로 인명 피해는 적었지만 초등학생 1명이 연기에 질식해 숨지고 10여명이 부상을 당한 참사를 빚었다. 서울 수유리 B교회 성경학교 어린이·인솔교사 등 90여명이 2박3일 일정으로 캠프를 간 포천시 영북면 산정리의 한 민박집 3개동 중 남학생 33명이 3개 방에서 나눠 자고 있던 B동에서 23일 새벽 화재가 발생한 것은 예견된 불상사다. 우선 무허가 건물이라는 점에서 단체적으로 어린이 캠프 등을 여는 데 적합치 않다. 산 속으로 1㎞ 가량 들어간 야산 정상에 있는 이 민박집은 허가 없이 건물을 지은 뒤 캠프에 참가하는 어린이들의 숙소로 사용해 왔다. 더구나 불법건물 내부는 불에 약한 합판 등 목재로 돼 있고 소화기마저 한 대도 비치돼 있지 않았다. B동에서 불과 1m 떨어진 야외 화장실, 그것도 목재건물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촛불을 켜둔 것은 화재를 자초한 셈이다. 20명이 넘는 인솔 교사들이 화재 현장과 수십m 떨어진 다른 동에서 별도로 묵고 있었다면 도의적 책임을 면키 어렵다. 적어도 2~3명의 교사가 각동에서 학생들과 함께 있어야 했다. 대형 민박집이 소방안전 사각지대인 것도 심각한 문제점이다. 문화관광부는 지난해 10월 지방자치단체에 ‘관광펜션업 지정 세부지침’을 시달하면서 객실이 8실 이상인 민박집과 7실 이하라도 농어촌 민박집에 해당되지 않는 경우 숙박업 신고를 받도록 했다. 그러나 경관이 빼어난 지자체들은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있는 펜션 및 민박집 등에 대한 현황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특히 포천시 산정호수 주변은 도시계획 구역 밖에 위치해 60평 미만 주택을 신축할 경우 건축법상 허가나 신고대상이 아니어서 펜션 및 민박집 수와 규모조차 정확히 모르는 실정이다. 현재 포천지역에는 7개 마을이 민박 마을로 지정돼 있으나 단 한 차례도 소방 및 위생점검을 받지 않았을 정도다. 강력한 관련법 제정, 시행만이 민박집에서의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
경기도가 지역사회의 여러 사회단체와 봉사단체에 도비 보조를 해주는 것은 당연하다. 목적이 사회 공공의 이익에 합치되기 때문이다. 이 목적에 일치하는 시민 참여는 또 그같은 보조를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지금 실시되고 있는 각종 도비 보조가 목적성과 일치된다고 보기에 심히 어려운 건 유감이다. 각 국별로 여러 군데에 책정된 막대한 지원 및 보조금 예산 중엔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게 없다할 수가 없다. 주민 세부담인 예산의 낭비며 목적성을 상실한 행정의 누수다. 관변단체에 대한 관행적 지원은 이로 인하여 지원받아야 할 단체마저 함께 휩쓸려 비판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년 내내 가야 별 하릴없는 단체에까지 상당 금액이 지원되는 것은 예산 집행이 요구받는 합리성에 위배된다. 일반 사회단체 역시 마찬가지다. 단체 이름만 번드레할 뿐 하는 일 없는 사회단체에 상당 금액이 지원되는 사례가 적잖은 것으로 들린다. 봉사단체에 대한 보조 또한 일부의 경우 예외가 아니다. 대상 선정이나 보조금액 책정에 적정성과 형평성에 위배되는 일이 있어서는 예산 집행의 효율을 기한다고 할 수 없다. 봉사의 개념 또한 자원봉사가 아닌 직업봉사, 즉 월급받고 하는 봉사는 직장이지 사회적 봉사가 아니다. 또 거의 보조금에만 의존하는 봉사단체와 거의 자비 부담으로 어렵게 운영하는 봉사단체를 식별치 못하는 도비 보조는 재정의 건전운용에 반한다. 일반적으로 도비 지원이나 보조에 처분만 기다려서는 안되고 로비를 해야 한다거나, 신청 금액을 부풀려야 깎여도 일이 되고 실제 금액을 요청해서는 안된다고 보는 인식이 사실이라면 실로 우려되는 바가 크다. 심지어는 지원금이나 보조금 심사에서 외부 심사위원으로 신청한 당사자를 위촉하는 사례가 없지 않다면 그 경위를 의심치 않을 수 없다. 근본적으로 책상 머리에서 서류와 서식만을 따지는 안일한 행정이 문제가 된다. 현장 실사를 과연 한번이라도 해보았는지 의아스럽다. 지원금이나 보조금은 재원이 어려운 가운데서 편성된 실로 소중한 예산이다. 이런 예산이 마치 먼저 본 사람이 임자인 것처럼 쓰여서는 공공의 목적을 크게 해친다. 손학규 경기도지사는 이를 확인해 보아야 할 의무가 있다. 도비 지원금이나 보조금을 제대로 집행해야 하는 것은 지역사회와 지역주민에 대한 지사의 직접적 책임인 것이다.
극심한 경기침체로 일자리를 잃은 실업자들이 급증하면서 ‘가정 주부(主夫)’가 늘어났다. 하루에 만원 벌고 2만원을 쓰더라도 남자는 아침에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대문 밖을 나서야 한다는 데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 지 참 서글픈 사회 현상이다. 통계청의 ‘6월 고용동향’자료를 보면 지난 6월 비경제활동인구 중 가사활동을 하는 남자가 12만8천명으로 집계됐다. 지난 해 같은 달(6만9천명)에 비해 85.5%나 증가한 수치다. 올 상반기(1~6월) 중 가사활동을 하는 남자는 월 평균 13만4천300명으로 지난 해 같은 기간(10만8천500명)보다 23.7% 늘어났다. 가사활동하는 남자는 지난 1월까지만해도 지난 해 같은 달 대비 40.2%의 감소율을 보였지만 2월 4.1%, 3월 116.4%, 4월 112.5%, 5월 95.2% 등 큰 폭의 증가세를 보였다. 가정 主夫가 늘어나는 원인은 구직을 포기한 채 가사에만 전념하는 남자들이 급증한 탓이다. 명예·조기퇴직이나 직장 휴·폐업 등으로 실업자들이 증가, ‘집안 일 하는 남자’는 갈수록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올 상반기에 직장을 잃은 지 1년 미만된 실업자 중 일거리가 없거나 사업경영 악화로 실직한 사람이 지난 해 같은 기간에 비해 평균 16.0% 증가했다. 명예·조기퇴직· 정리해고를 당한 사람이 평균 27.2%, 직장 휴·폐업으로 직장을 잃은 사람은 평균 13.4% 증가했다. 반면 가사활동을 하는 여자는 점점 감소하는 추세다. 지난 6월 500만1천명으로 작년 6월(488만명)보다 2.5% 증가하는 데 그쳤으며 상반기 가사활동 여성은 509만6천800명으로 작년 같은 기간의 512만8천100명보다 0.6% 감소했다. 대부분 남편들이 직장을 잃거나 정년퇴직를 하면 등산이라도 가라고 강제로 내쫓기는 구박(?)을 받는다고 한다. 맞벌이하는 부부라면 몰라도 실업자가 된 남성이 직장에 다니는 아내 대신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모습은 아무리 넓게 생각해도 보기에 딱하다. 남성들이 보무도 당당히 일터로 나가는 날이 빨리 와야 할텐데 이 정부는 도대체 어디에 신경을 쓰고 있는지 답답하다. /임병호 논설위원
세상은 변하고 있다. 체험으로 터득했건 배워서 알아졌던 하루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다. 이런 변화하는 시대에 맞추어 우리의 생각과 가치도 마땅히 변해야 한다. 더욱이 우리 공직사회는 지금까지 공무원이라는 비옷을 입은 우월적인 지위에 있는 집단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적어도 국민들에게 공무원들이 그렇게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 오명의 그 비옷을 벗어야 할 때가 왔다. 나만을 위한 비옷이 아닌 우리가 함께 비를 피할 수 있는 우산을 펼쳐야 한다. 요즈음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집단민원과 시위소식을 접하게 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국민들의 의식수준의 향상과 다양한 욕구의 표출, 가치의 변화에 따른 제 목소리 내기가 한 원인이라 할 수 있겠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우리의 옛말이 강한 성취욕구의 발현이기도 하지만 거쳐서는 안될 과정을 거쳐서라도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결과중심주의를 파생시키기도 하였다. 더욱이 원칙을 중시하고 상대를 배려하기 보다는 나를 우기고 주장하는 것이 신념이라고 자랑스러워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민원인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 불만을 최소화 시키는 능력을 배양시켜야 할 때다. 행정도 이제까지는 ‘소품종 다량생산’이면 족했으나 이제는 ‘다품종 소량생산’, 다양한 욕구에 맞춘 ‘맞춤행정’ 서비스의 제공을 요구받고 있다. 이에따라 많은 공공기관에서도 민원인을 고객이라 규정하고 고객감동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노력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품질 좋은 고품격의 행정서비스 제공만이 기관의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경기도 교육청에서도 변화하는 시대에 부응하고 고품격의 행정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민원담당공무원들에 대한 직무연수를 실시한 바 있다. 민원담당자들의 전문성 향상과 고객 만족을 위한 민원사무 처리요령 습득을 위해 실시된 이번 연수에서 민원업무의 중요성을 깨닫고 업무에 대한 기본 지식과 자신감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는 호응과 함께 ‘커뮤니케이션 스킬(Communication Skill)’ 등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요구받기도 하였다. 한번의 교육으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바뀔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변화의 씨앗을 뿌리고 변화의 물꼬를 텄으니, 변화의 싹을 키우고 열매 맺으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이미 실시하고 있는 본청 전 직원에 대한 분기별 전화친절도 평가에 이어 하반기에는 교육청과 학교의 민원업무 담당자들에 대한 친절교육을 계획하고 있다. 행정서비스에 대한 고객들의 기대치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서비스의 질은 고객을 얼마나 감동시킬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고객만족이란 친절한 말 한마디, 친절한 미소와 같이 아주 작은 배려에서 부터 시작될 수 있기에 이러한 우리의 노력이 고객감동으로 이어져서 경기교육이, 학생과 교사 학부모 모두가 비를 피할 수 있는 커다란 우산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김동수 경기도교육청 총무과장
어린 시절 유난히 개구지던 나는 억새 줄기를 꺾어 개구리항문에 꽂아 풍선처럼 부풀려 놓고는 그 뒤뚱거리는 모습이 뭐가 그리 우습던지, 친구들과 눈물이 나도록 배를 움켜잡고 웃던 기억이 난다. 송아지를 보고 놀라서 달려온 아들개구리에게 자존심 상한 아빠개구리가 배를 부풀려 송아지 흉내를 내려다 배가 터져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하다는 사찰 앞 먹거리 장터마다 즉석에서, 개구리를 산채로 끓는 기름에 튀겨주는 가겟집들이 줄지어 있다. 온갖 미물들의 생명까지 소중히 생각하는 경건한 도량(道場) 근처에 기름 끓는 불지옥이 어이 그리 많은지. 그러고 보니 개구리 이야기들도 지금 생각해보면 잔인하기 짝이 없다. 팔자 좋은 개구리 이야기도 있다. 환희와 감동의 대 서사시, ‘2000년 호주 시드니 올림픽’의 ‘황금개구리’ 이야기다. 이름만 황금이지 전혀 황금 성분을 함유하지 않은 누런 개구리 한 마리가 숱한 지구촌 사람들을 가슴 뭉클하게 했다. 올림픽 주경기장을 건설하던 중 부지를 다 헤집어 놓은 상태에서 흙더미 틈새로 폴짝 개구리 한마리가 튀어 나왔다. 도대체 누가 발견했는지 모르지만 개구리로 인해 주경기장 공사가 전면 중지돼 막대한 예산을 들여 토지를 원상복구했고, 새로운 부지를 재선정해 지금의 주경기장을 지었다. 세계 각국의 손님들을 불러놓고 올림픽을 치르기엔 별로 내세울 것도 없던 호주가 이 황금 개구리 한마리로 가히 환산할 수 없는 광고효과와 함께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국가 이미지 쇄신과 더불어 엄청난 경제적 성공을 거둔 걸 생각하면, 떼돈을 들여 여기저기 들쑤시고 파헤쳐 그토록 공들인 88서울올림픽이 적자가 났느니, 실속이 없었느니 할 때마다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우리가 사소한 이익을 위해 파헤쳐 버린 자연과 환경이 얼마나 큰 손해로 우리에게 되돌아 오는지, 우리가 자연과 환경을 위해 들인 노력이 얼마나 큰 혜택으로 되돌아 오는지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세계 10대 물부족 국가’이면서도 세계에서 몇째 안가는 물값 싼(상수도) 나라에 살고있는 우리는, 1리터도 안되는 물 한병을 몇 백원씩에 사 먹으면서도 아직도 겁을 덜 내는 것 같다. 얼마 안가서 외국처럼 밥해 먹는 물 값이 쌀값보다 비싸질 것 같지는 않은지. 남들이 보기엔 우리가 6·25때 달러가 뭔지도 모르고 땔감으로 태워 감자나 구워 먹고있던 그 무지랭이 같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김용 이천환경운동연합 상임의장
부천 중동 LG 백화점 수리 공사중 철제 비계가 무너져 내려 인부들이 다친 사고가 있었다. 그와 같은 재질의 비계를 사용하여 엄청난 무게의 타이어를 쌓아놓고 있는 타이어 할인 판매점들 곁을 지날 때마다 아찔하다. 5cm 강관을 한줄로 얼기 설기 엮어 놓았는데 예전에는 조금만 쌓았으나 요즘은 3층, 4층, 5층의 엄청난 무게를 받치고 있다. 철물점도 마찬가지다. 정말 무거운 자재들을 외줄 비계에 의존해 설치해 놓고 있다. 하다못해 개인 단층 집을 지을때도 이런저런 검사와 허가를 받는데 이 업체들은 시설 허가를 받았는지, 구조계산을 해서 검토 받고 안전성이 확인된 것인지 궁금하다. 설마 설마 하지만 만에 하나 무너진다면 타이어가 도로에 굴러 지나가는 차량들을 덮칠 생각을 하니 아찔하다. 이 같은 방치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일반화 되고 있는 추세다. /인터넷 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