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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열린우리당 일부 386의원들 대북관의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북을 사사건건 무작정 두둔만하는 균형잃은 편향적 시각이 심히 걱정된다. 미 하원에서 의결된 ‘북한인권법안’에 대한 이들의 힐난 역시 그러 하다. 정치범수용소 및 기아, 탈북자들에 대한 탄압 등 인권상황에 대한 25개 항목의 열거와 함께 인권 및 난민개선 등에 연간 2천400만달러를 지원하는 것이 이 법안의 골자다. 탈북자에 대해선 중국이 유엔의 관련 기구에 무제한 접근을 허용해야 한다는 권고적 내용도 담겨 있다. 대북지원을 인권 개입과 연계하는 이 법안은 인도주의를 내정간섭에 이용하려 든다는 여당내 일부 386의원들의 말에 수긍이 안가는 것은 아니다. 북핵 해결을 위한 6자회담에서도 논란이 될 소지 또한 없진 않다. 그러나 전제적 요인은 북의 인권 문제다. 북에 대한 동포애는 평양 정권이 아닌 다만 평양 정권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인민 대중이 그 대상이다. 그 인민 대중이 기아에 허덕여 탈북 사태를 이루고, 그중에 붙잡힌 인민은 정치범 수용소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등 북의 참혹한 인권 상황은 이미 국제사회에 정평이 나 있다. 동포애의 실체가 이같은 고초를 겪는 인민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맞다면, 평양 정권의 눈치만을 살피는 일은 차마 있을 수가 없다. 남에선 인권을 위해 국가보안법을 없애야 한다면서 인간의 기본권마저 유린된 북의 인권에는 눈을 감고, 남에서 인권을 누린 이들이 북에서 살면 숨도 쉬지 못할 위인들이 북의 인권 개선을 힐난하는 것은 이만저만한 자가당착이 아니다. ‘북한인권법안’은 앞으로 상원에 넘겨져야 하는 등 의결 절차가 남아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나 어떤 형태의 인권개선이든 굳이 토를 달 이유는 없다. 이에 반발을 하자면 오히려 평양 정권이나 중국 정부가 비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당사자들 보다 오히려 앞서 마치 대변이라도 하듯이 ‘내정간섭’만으로 몰아치는 비난은 심히 적절치 않다. 여당내 일부 386의원들이 보이는 의문의 대북관은 정부를 위해서도 유익한 게 못된다. 편향적 감성에서 벗어나는 오성의 회복이 있기를 충심으로 당부해 마지 않는다.
강화도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불릴 만큼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고장이다. 선사이전 고대인류의 흔적인 패총(貝塚), 지석묘, 입석을 비롯, 개국이래 고성(古城) 등 민족문화의 소중한 유적이 오늘날에도 역연(歷然)하다. 특히 농촌문화, 철새와 개펄, 우거진 산림이 잘 보존된 생태공원으로도 손색이 없다. 이러한 강화도에 시속 80㎞이상 달릴 수 있는 준고속화도로 건설이 추진되는 것은 지역입지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사업이다. 서울지방국토관리청이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강화읍~화점면 이강리까지 기존 48번 국도를 시속 80㎞의 준고속화도로(왕복 4차로·12.7㎞)로 만들려는 것은 적합지 못한 일로 평가된다. 20년 뒤의 교통량 등을 고려해 기존도로와 접근이 가능하도록 교차로를 만들고 도로 아래로 통로박스를 설치해 차량이나 주민 통행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할 계획이라고 국토관리청은 말하고 있으나, 강화도 주민들은 준고속도로 건설을 전면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시속 80㎞이상 달릴 수 있는 차도가 아니라 마음 놓고 다닐 수 있는 인도가 확보된 도로, 편안하고 안전한 농로 등이라는 게 반대 이유다. 2003년 1년 동안 강화도에서는 316건의 교통사고가 발생, 434명의 사상자가 났었다. 이는 보행자 전용도로가 없고 차량 위주로 건설된 도로에 원인이 있었다. 현재의 교통체증은 김포와 서울, 인천 등 수도권 교통문제로 인한 지체일 뿐이지 강화도 지역 내 교통소통은 매우 원활하다는 게 강화도 주민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두 말 할 나위 없이 강화도는 고색창연한 역사의 현장이다. 준고속도로보다는 주민과 관광객들이 안심하고 보행하며 유적지를 관광할 수 있는 인도가 확보된 도로가 제격이다. 1천600억원이라는 막대한 국고를 투입해 강화도의 시민연대·환경단체 등이 반대하는 준고속도로를 굳이 건설할 이유가 없다. 특히 지역을 양분하는 등 지역주민의 삶과 정서에도 맞지 않는다. 강화도의 역사와 자연환경을 보존하는 차원에서 고속화도로 건설은 백지화해야 한다. 1천600억원의 예산이 확보됐다면 보행도로 개설과 문화재보호 및 보수비로 전환,사용하는 방안을 강구하기 바란다.
술이 심혈관 건강에 좋을지도 모른다는 과학적인 연구 결과는 1970년대 초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비음주자에 비해 적당히 마신 음주자에게서 우리 몸에 이로운 고밀도(HDL) 콜레스테롤이 높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러나 술이 건강에 대해 갖는 부정적인 측면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린다는 것이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91년 미국 CBS에서 ‘프렌치 패러독스’가 발표되면서 포도주와 건강에 관한 관심이 고조됐다. 즉 ‘프랑스 사람들은 다른 서구인에 비해 동물성 지방섭취도 많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높은 반면 심장병에 의한 사망률은 50% 이하로 낮은데 그 원인이 꾸준히 마시는 적포도주에 기인한다’고 하였다. 포도주가 몸의 어느 부분, 어느 질병에 유익한가는 여러 의학잡지에 발표됐는데 대략 생명 연장(노화 방지), 심혈관 질환 위험 감소, 각종 암 억제, 항균 효과, 뇌졸중 감소, 치매·당뇨병·감기 발생 감소, 골다공증 예방 등이다. 가히 ‘건강의 술’이다. 그러나 포도주가 건강에 좋다는 연구 결과에는 항상 전제조건이 따라 붙는다. 적당한 음주는 유익하지만, 과음자는 어김없이 이러한 질환의 위험성이 현저히 증가했다는 점이다. 또 술의 해악에 관한 논문이 유익성에 관한 논문보다 몇 배나 많다. 그런데 사람이 알코올로 목숨을 잃는 것보다 생명을 건지는 경우가 더 많다고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 인터넷판이 런던 의과대의 연구결과를 인용, 보도했다. 연구진은 알코올 과음으로 한해 1만3천명이 목숨을 잃는 반면 적당량의 알코올 섭취로 생명을 건진 사람은 1만5천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술이 건강과 생명에 이로움을 주는 효험은 연령별로 큰 차이가 난다. 혈기왕성한 20대 때는 남성들에게 술이 독약인 반면 35세부터는 하루 한 두잔씩 적당량을 마시면 보약과 같은 효험을 볼 수 있다고 보고서는 주장했다. 술로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이 많다니 애주가들이 좋아하겠지만 보고서는 술로 인해 사망에 이르지 않기 위해서는 남성의 경우 1주일에 최대 21잔, 여성은 1주일에 최대 14잔까지로 술을 자제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모름지기 애주가들이 명심할 일이다. /임병호 논설위원
요즘 국회의원들에 이어 생활정치, 또는 요즘 흔한 표현으로 상생정치의 초병이어야 할 지방의회들이 닮지 말아야 할 기성 정치인들의 샅바싸움을 모방하는 사태를 지켜 보는 심정은 차라리 곤혹스럽다. 그래도 아직까지 상당수 민초들은 ‘그래도 지방의회는 때가 덜 묻고 순박하고 잔머리를 돌리진 않겠느냐’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은 그 점이 더 문제인듯 싶다. 세상도 변했고 지방의원들도 적당히 때가 묻었는데도 말이다. 지방의회가 30여년만에 부활했을 당시만 해도 적어도 이같은 속설은 맞는 얘기였다. 13년 전 초여름 오후 하남시 모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시작된 지방의회선거 전국 최초 합동연설회장이 생각난다. 컴퓨터나 인터넷 등이 세상에 나오기 전인,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아날로그시대였었다. 지금도 별로 달라진 게 없지만 당시 연설회가 열린 학교 주변은 그린벨트로 논이나 밭, 또는 비닐하우스 투성이여서 운동장으로 몰려 든 청중들은 대부분 농민들이었다. 밀짚모자를 눌러 쓴 촌부에 수건을 머리에 두른 아낙네들 사이로 얼굴이 새까맣게 탄 코흘리개들도 끼어 있었다. 더구나 수십년만에 처음으로 지방의원을 뽑는 연설회인데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자리여서 방송사 중계차량들이 즐비하게 시골학교 운동장으로 모여 들었으니 시골 한적한 마을의 구경거리치고는 시쳇말로 ‘짱’이었다. 연단에 나온 후보들도 긴장했었다. 머리를 빗고 가리마를 타고 기름도 발랐지만 촌스러움을 가릴 순 없었던 그들이 사자후를 토한 연설의 주된 내용은 ‘주민들을 위한 지방자치’였었다. 한마디로 프로들이 아니라 순수한 아마추어였었다. 후보들이 내건 공약도 거창한 게 아니라 마을회관을 새로 짓고 마을 안길을 넓히고 TV가 잘 나오지 않는 난시청지역을 해결해주겠다는, 뭐 그런 내용들이었다. 당시 풋내기였던 기자는 설레는 가슴을 애써 누르며 후보들이 제시하는 공약과 뚫어져라 쳐다 보는 인심 좋은 청중들의 반응을 스케치하느라 분주했었다. 진지하게 연단을 응시하고 후보 정견 발표에 귀를 기울이던 모습들이 참 순박했었다. 그렇게 시작했던 지방자치였었다. 그런데 요즘 지방의회를 보면 웬지 미덥지 못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후반기 의장단선거를 놓고 계파간 정파간 다툼이 심화되고 있는 탓인가. 더구나 모 지방의회는 주민투표 관련 조례(안) 심의문제를 둘러 싸고 주민투표 청구인수를 행정자치부 권고안보다 더 많게 규정한 집행부 안을 그대로 통과시켜 말썽을 빚고 있다. 정부가 주민투표를 활성화하겠다고 발표하고 행정자치부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권고안을 만들었는데 정작 주민투표를 현실화하는데 앞장 서야 할 지방의회가 오히려 행정자치부 권고안보다 청구인수를 늘린 행위 자체를 놓고 보면 과연 지방의회가 어디로 흘러 가고 있는지 혼돈된다. 주민투표 청구도 따지고 보면 지방자치의 요체다. 지방자치단체가 시행하는 행정이 잘못됐거나 하다 못해 마을 인근에 쓰레기소각장같은 주민들의 의견에 반하는 시설들이 건립되는 사안에 대해 주민들의 반대여론이 거세지면 투표로 의견을 물을 수도 있고, 단체장이 섣불리 독단적으로 행정을 펼칠 기미가 있으면 주민들의 이름으로 쐐기를 박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방의회가 13년 전 초심으로 되돌아 갈 순 없을까. /허행윤 제2사회부장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이제까지 장애자, 장애인을 거쳐 요즘은 ‘장애우’라는 호칭을 쓴다. 단순히 장애를 가진 자라는 뜻에서 우리의 자연스런 이웃이라는 표현이 정감이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니라 관심인 것이다. 17대 국회의 특별한 모습은 장애우 의원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장향숙 의원, 한나라당의 정화원 의원. 언젠가 의원 휴게소에 앉아 있는데 나와 같은 당의 정화원 의원이 곁에 와 앉았다. 그는 선천적 장애인이 아니라 녹내장이 심해져 19세때 실명을 했다고 설명을 했다. ‘요즘 같으면 실명까지 가지 않았을 텐데’ 하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이제까지 비장애인보다 더 커다란 삶의 의지로 살아온 정 의원에게는 불필요한 인사치레였다는 것을 즉시 깨달았다. 나는 화제를 옮겼다. 늘 정 의원 곁에서 보좌를 하는 비서에게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정 의원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얘기 많이 들었지요?” 그의 대답에 나는 다시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껴야 했다. “제가 의원님 아들입니다.” 내가 부끄러웠던 것은 내 주변에서 늘 만나고 볼 수 있었던 정 의원이었고 그곁에 언제나 그림자처럼 함께 있었던 비서가 아들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 자체가 무관심이란 생각이 들었다. 미안함을 보태서 정 의원에게 말했다. “의원님, 젊었을 때 잘생겼다는 말씀 많이 들으셨지요. 아드님이 꼭 의원님 닮았어요.” 나에게는 변호사 일을 하는 친구가 한 명 있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불행하게도 그 친구는 정신 지체 중증 장애를 가진 딸을 키우고 있다. 제 나이라면 벌써 고등학교를 졸업할 정도이지만 그 아이의 정신 연령은 서너살을 넘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나는 친구의 부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속상할 때가 많지요” “물론 그럴 때도 있지만 요즘엔 우리집에 언제나 예쁜 세살짜리 딸이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뻐요.” 국회에는 얼마전 ‘장애아이, WE CAN’이라는 연구 모임이 생겼다. 그리고 그 모임은 한나라당의 얼짱 여의원인 나경원 의원이 주도했고, 그녀의 딸은 다운 증후군을 앓고 있는 장애아이다. 나 의원 역시 나의 친구 가족처럼 그늘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녀의 그토록 밝고 맑은 미소가 아직도 불행으로 생각하는 가족과 아직도 장애인 정책에 적극적이지 못한 정부당국의 뜻있는 변화를 이끌어 내길 빈다. /한선교 국회의원(용인을)
자기의 처지를 비관하여 남을 살해한다면 우리사회에서 신용불량자의 비율 정도로 살인자가 많을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 열 명중 여덟 명이 나를, 또는 내가족을 토막낼 수 있다고 생각해보라. 그래도 살인마를 사회에 내 보내겠는가. 저런 사람을 살려주든지 아님 늙어 출소한다고 해도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어찌보면 사실 교도소에 있는 것도 아깝다. 국민들의 세금으로 교도소에서 규칙적인 식사와 노동으로 어쩌면 민생고에 시달리지 않고 편한지도 모른다. 내 생각, 아니 내 주위의 생각은 사형제도 폐지는 절대 반대다. 사람을 몇 십명 취미로 죽여도 정녕 살인자는 죽음을 피하는 제도가 타당한가. 그리고 교도소에서도 죄수들이 형기가 끝났다고 무조건 내보낼 것이 아니고 수감생활중 인성테스트라도 해서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소자들의 범행이 교도관들의 책임으로 돌려진다면 이런 무참한 사건은 없을 것이다. 결론을 말씀드리면 외딴섬에 허름한 교도소 지어 인간으로서 저지를 수 없는 살인행위를 한 자들을 격리시켜 다시는 사회에 발 붙일 수 없도록 해야한다. /인터넷독자
이 세상에 죽음 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 준비는 하면서도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한 말이다. 무엇이든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 특히 아무도 그 세계에 대해 명확히 알지 못하는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더욱 그렇다. 신병 들어 누우면 과거지사라도 생각나지만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 그야말로 마지막이다. 가족에게 말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교통사고 등이 아니더라도 갑자기 쓰러져 최후를 맞을 수도 있고, 중풍이나 치매가 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채 삶을 마감할 수도 있다. 자녀에게 부모 마음을 전할 수 없다면 실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자식들 또한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그래서인지 요즘 삶의 마지막 단계인 ‘유서 쓰기’가 유행(?)하고 있다. 성남시 분당에 사는 67세의 K여사는 유서를 미리 썼다. 병이 들어 움직이지 못하면 간병인을 쓰도록 하고, 치매에 걸렸을 때는 요양원에 보내 달라고 했다. 또 죽었을 때는 머리엔 조바위를 씌우고 수 놓은 가죽꽃신을 신겨달라고 당부했다. 애도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들에게는 부의금을 받지 말라는 부탁도 남겼다. 세상을 떠나는 날 자신을 배웅하기 위해 온 친지들에게 들려줄 CD에는 “와 줘서 고맙다. 그동안 혹시 서운한 게 있으면 용서하고 잊어달라”고 부탁하고 ‘사의 찬미’를 라이브로 담았다. 유서가 법적으로 효력을 발생하기 위해선 반드시 자필로 쓴 뒤 주소와 이름을 적고 인장을 찍어야 한다. 컴퓨터·타자기 등으로 작성했거나 대필한 유서는 법률사무소 등에서 공증을 거쳐야 한다. 또 녹음을 했을 때는 2명의 증인이 필요하다. 수원문인협회(회장 김현탁)가 2004년版 ‘수원문학’지에 회원들의 ‘미리 쓰는 유서’를 특집으로 꾸민다고 한다. 미리 유서를 써 두면 이제껏 살아온 삶을 정리하는 한편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깊이 있게 할 것으로 짐작된다. “내가 죽으면 내가 죽었다는 말을 아무에게나 하지 말아 달라”는 어느 시인의 유시(遺詩)가 생각난다. /임병호 논설위원
“우리 경제가 일본의 90년대 이후 장기침체 때와 닮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박승 한은총재·국회 경제토론회), “98년 외환위기 때도 요즘처럼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가 뭔지, 대책이 뭔지도 예전엔 알았는데 요즘은 마음속이 꺼진다”(조동철 한국개발연구원 거시팀장·국회 경제토론회), “상황이 어려워도 시장경제가 자리를 잡아야 나라가 사는데 요즘은 한국이 진짜 시장경제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이헌재 경제부총리·기자회견). 청년 실업자 수는 지난달 2만1천명이 증가한 38만7천명으로 전체 실업자 수 76만3천명의 50.7%를 차지해 실업자 2명 중 1명이 청년실업인 것으로 나타났다.(통계청 6월 고용동향) 예를 든 이런 몇가지의 진단을 부정적으로 크게 보아야 할 것인지, 긍정적으로 작게 보아야 할 것인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이의 판단은 곧 “우리 경제가 부분적으로는 문제가 있어도 큰 틀로 보아서는 잘 간다”고 말한 노무현 대통령의 견해와 함께 하느냐 달리 하느냐와 연관된다. 민중경제는 아우성인데 민중을 볼모로 하는 파업이 여기 저기서 벌어지고 있다. 이 중엔 평균 연봉이 6천만원인 민중 아닌 고액 노동 선민층이 두자릿 수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단결’ ‘쟁취’를 외쳐대면서 주먹질을 하고 있다. 기업은 국내투자를 기피해 외국으로 빠져 나가려고만 든다. 경제난으로 군대도 어려움을 겪는다. 기름이 모자라 훈련을 제대로 못한다. 북의 얘기가 아니다. 우리의 얘기다. 공군 조종사는 연간 적정 훈련시간 160시간에 못미치는 145시간에 그친다.(미국 훈련시간은 252시간·대만은 180시간이다) 전차나 함정의 가동도 30% 이상이나 줄었다.(국방부보고서) 이런 실정에서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의 경비정을 경고 사격으로 물리치고 돌아온 해군 함정이 되레 혼쭐이 나고 있다. 지금 국방부를 비롯한 군 수뇌부는 대통령의 노여움과 질책으로 기가 꺾였다. 모를 일이다. 직보사항인 작전 상황보고 이후의 분석보고는 사후 관례인 것이 맞는지 틀린지는 알기 어렵다. 국제공용주파수를 사용하므로 민간 상선도 들을 수 있는 내용이 과연 군의 기밀인지 아닌지도 역시 잘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다. 북의 NLL침범 사실이나 북의 잇단 거짓말은 일언반구 없이 놔두면서(군 통수권자의) 제 자식같은 군대엔 왜 이토록 불호령인지는 참으로 모를 일이다. 민중은 불안하다. 빨간 띠를 이마에 질끈 동여맨 파업꾼들이 세상을 곧 거덜낼듯한 깃발을 높이 들고 뿜어대는 함성으로 불안해 한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날품팔이(진짜) 노동자들, 중소기업 근로자들, 장사꾼들은 살기가 더 어려워져만 간다. 이런데도 이를 걱정해야할 사람들은 수도 이전을(다음 정권에선 취소할세라 걱정해 기정사실화하기 위해서인지)부랴 부랴 서둘다가, 군대 나무라는 일에만 정신이 팔린 것 같다. “큰 틀로 보아서는 잘 간다”는데 민중의 삶은 희망이 점점 더 멀어만 간다. 누군가가 그랬다. 사업체를 다 털고나서 한다는 말이 “말로만 기업규제 완화 한다는 정부꼴 안보고 노조 상대 안하니까 살 것 같다”는 것이다. 기막힌 이야기다. 기업자본이 이렇게 은둔되어 사업체가 문 닫으면 가진 것 없는 사람은 그나마 더 살기가 어려워진다. 정치권에 애국자도 많지만 이 시대의 진짜 애국자는 개혁주의를 팔아먹는 자들이 아닌 사업하는 이들이다. 업종이 무엇이고 업체가 크든 작든 간에 이 불경기에 그래도 남을 고용해 월급(재분배) 주어 더불어 살아가는 군소 사업주들이 어려운 민중사회를 받쳐가고 있다. 만약 잉여가치설의 망령을 아직도 신봉하는 위인들이 있다면 이들이야 말로 저주받은 굿판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임양은 주필
“저는 이 일을 하는 것이 너무나 재미있습니다.” 얼마전 안산에 있는 어느 여성경제인 회사의 공장방문시 여사장님이 하신 말씀이다. 공장방문전에는 일반적인 공장형태 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공장을 둘러보면서 새로운 세상을 보는 것 같았다. 우선 남성들도 하기 힘든 철구조물 가공업을 하면서 현장을 뛰어 다니는 여성기업인의 모습을 보는 것도 아름다웠지만, 그분은 내로라하는 남성 기업인과의 치열한 수주전에서도 남다른 솜씨를 보이며 요즘같은 불경기에도 매출신장 30%를 보이며 임대주고 있던 옆공장까지 새로이 확장해야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히면서 하는 일이 너무나 재미있다는 말에 나는 충격 그 자체였다. 우리 중소기업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기업 경영을 하고 있지만 요즘처럼 어려운 때는 없다고들 한다. 어려운 여건속에서 대부분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지만 남다른 세계속에서 살아가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우리 중소기업인들도 연간매출규모가 천억대를 넘는 경우도 있고 십억대 미만 기업들도 있다. 요사이 우리 중소기업인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유야 여러 가지가지가 있겠지만 그 원인중의 하나가 90년대 초반부터 부실의 징후가 있었다는 보고서도 있다. 즉 싼 노동력에 안주하여 기업경영을 하다보니 미래를 준비할 수가 없었으며 부가가치 창출에 소홀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노동력의 가치가 변한 최근에 와서 대안을 준비하지 못한 대부분의 기업이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또한 다들 어렵다고 하지만 앞으로의 10년 후는 또 어떻게 될까? 기술개발 추이와 새로운 수요자들의 요구 등을 종합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 즉 또 다른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절실히 필요하다. 좁게는 국내거래처나 국내시장, 넓게는 세계시장에서의 변화하는 흐름을 꿰뚫을 수 있는 통찰력이 요구된다. 이것이 정립되면 이에 맞는 기술개발, 즉 신상품개발 노력에 뛰어들어야 할 것이다. 이때는 내가 좋아하거나 선택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철저한 수요자 중심의 기술개발이 필요하다. 다음에는 철저한 마케팅 전략이 마련돼야 한다. 전략적인 마케팅은 개발된 기술의 판로를 여는데 큰 힘을 발휘한다. 이제까지는 이런 세상의 눈을 가지고 지내왔다면 이제는 또다른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준비해 가자. 지금 내가 사는 세상에 안주하지 말고 또다른 세상을 만들어 중소기업의 시대를 열어가자. /정영태 경기지방중소기업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