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사각지대 철저한 대책을

전국이 엽기적 살인행각을 벌여온 희대의 30대 살인용의자 때문에 국민들이 불안하다. 도대체 이렇게 잔인하게 그것도 19명이나 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불우한 가정에서 자라 사회로부터 천대를 받아 수많은 범죄에 연루되어 세상을 저주하더라도 최소한 인간의 탈을 썼다면 이런 끔찍한 살인행위는 할 수 없음에도 대명천지 서울 복판에서 발생하였으니 참으로 무서운 세상이다. 이번 범죄 대상은 비교적 저항력이 약한 노인들과 여성들이다. 돈 많은 부유층 노인과 전화방 및 출장 마사지 여성들을 대상으로 너무도 치밀하게 범죄를 자행하였다. 수사 경찰관들이 오히려 놀랄 정도이니 범인 체포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은 충분히 짐작된다. 그러나 범인이 경찰조사에서 밝힌 내용대로라면 경찰 수사가 초기단계에서 너무 허술했다. 더욱 철저했더라면 인명을 다소나마 줄였을 것으로 보여 앞으로 이에 대한 철저한 수사체계가 요구된다. 범인이 특히 불법 행위를 하는 전화방이나 출장마사지 여성들을 노려 완전 범죄를 추구한 사실은 범죄 사각지대에 대한 경찰의 범죄예방과 신고체계가 너무 허술하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번 사건도 전화방 업주가 신고하지 않았다면 결국 미제로 남을 사건이라는 점에서 새삼 신고체제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전화방이나 출장 마사지 같은 불법 영업 행위에 종사하는 업주나 여성들은 불법이라는 사실 때문에 설령 범죄가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처벌이 두려워 신고하기가 어려운 약점이 있다. 범인도 이 약점을 이용하여 더욱 많은 끔찍한 살인을 일삼았다. 초기에 신고만 제대로 하였더라도 이렇게 많은 무고한 여성들이 희생되진 않았을 것이다. 범죄 사각지대는 항상 흉악 범죄의 제일차 대상이 되고 있으므로 철저하게 관리 단속해야 된다. 비록 불법 행위를 하더라도 경찰은 범죄예방 차원에서 순찰강화는 물론 범죄발생시 신고체제를 분명하게 확립해 두어야 된다. 한편 소외 계층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사회적 관심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부유층에 대한 지나친 적개심을 확대시키는 사회적 분위기도 개선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데 서로 협력해야 한다.

불편함만 준 새도로

당국이 원활한 교통 소통을 위해 최근 개설한 도로 일부 구간이 오히려 주민들에게 골칫거리로 대두되고 있다. 덤프트럭에 화물을 적재하고 이 구간을 통과하다 보면 급경사로 앞바퀴가 들리거나 비가 조금만 내려도 도로에 물이 고여 차량이 지나 가면 주민들이 물벼락을 맞기 일쑤인데다 오후만 되면 도로인지 주차장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의 진원지는 부실공사인 셈이다. 문제의 구간은 강화군 강화읍 강화우체국부터 강화중학교까지 이어지는 곳으로 주민들은 수차례 당국에 대책 마련을 호소했지만 시원한 답변을 듣지 못하고 있다. 당국도 공사기간중 지도·감독은 물론 공사가 완료돤 뒤에도 꼼꼼히 따져 이런 문제가 발생되지 않도록 했어야 했다. 이처럼 헛점 투성이인데도 이 구간에 대한 준공검사는 분명 승인됐다. 더구나 이 구간 주변에는 군청과 교육청, 경찰서, 우체국 등 관공서들이 즐비해 민원인들이 많이 찾고 있어 불편을 겪고 있는 대상은 이미 인근 주민들만이 아니다. 한 주민은 “인도와 차도 지반이 공사 당시부터 낮아 비가 내리면 물이 발목까지 차는 경우가 다반사”라며 “횡단보도를 이용하기 위해선 차도로 우회해 건너 다녀야 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당국은 공사에 대한 감독은 물론 부실하게 시공한 건설업체에 대해선 공사를 수주하지 못하도록 관련 조례를 고쳐 주민들의 불편을 예방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선 ‘주민들을 위한 행정’이란 군정목표는 요원하기 때문이다. /김 종 섭 (제2사회부 강화) jskim@kgib.co.kr

기고/행정수도 이전 정당화 안된다

천도(遷都)는 그에 따른 손익과 천도를 둘러싼 여러 여건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국민적 합의를 전제로 해야된다. 천도에 대한 논의는 감정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장기적이고 전문적인 인식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결코 단기적이고 부분적인 정파 또는 지역 이기주의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수도의 입지는 국기(國基)에 준하는 기능으로 시행착오를 허용하지 않으며, 공간적 관성을 갖는 물리적 실체로서 한번 정해지면 쉬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예로 드는 브라질의 경우 그 비용이 국가발전의 발목을 잡을 만큼 부담이 되었고, 파키스탄의 이슬라마바드는 여전히 명목상의 수도에 머무르고 있으며, 한동안 천도를 논의하던 이웃나라 일본은 천도 자체를 포기한 상태다. 세계화가 잠시의 머뭇거림도 용납하지 않을 만큼 급속히 진전되고 있고, 동아시아의 질서도 이해관계를 첨예하게 대립시키면서 요동치고 있다. 이런 때에 천문학적 규모의 예산을 신수도 건설에 쏟아 붓는다면 그것은 호사가의 놀음에 다를 바가 없다. 천도는 국가 정체성을 훼손하고 국가발전의 비전에 역행하는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천도론은 수도권의 기능을 약화 시키는데에 초점이 모아져 있고, 또 실제로 천도계획이 착수되는 것만으로도 서울은 대내외적 위엄과 신뢰도 등의 경쟁력이 약화될 것이다. 천도후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한 세대 후의 이 지역 주도권은 동경권, 서울권, 북경권과 상해권의 경쟁에서 판가름 난다. 서울과 수도권이 세계 도시 선점 경쟁에서 밀리면 정부가 내놓고있는 동북아 중심의 비전도 허구가 되고 만다. 또한 천도는 반통일적·분단 고착적이라고 생각한다. 한반도를 통일되어야 할 하나의 땅으로 본다면, 분단 이전에 한반도 전체의 수도서울을 유지하는 것이 공간적 논리의 일관성을 지키는 일이다. 천도는 한반도의 일체성과 함께 서울이 통일된 한국의 수도로 회복되고 나서 논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국회에서 고건 前총리가 통일수도의 적절한 위치로 ‘서울’을 거론한 것은 올바른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국민 여론수렴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수도를 이전하면 강한 국민적 반대에 부딪힐 것이며, 현 정부가 의도하고 있는 그 어떤 목적도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다. 권력은 변하고, 정권은 오고 간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고 수도는 남는다. 수도는 우리 삶의 터전을 상징하고 과거와 미래를 잇는 곳이다. 조상의 얼과 후손의 삶을 잇는 땅의 역사가 바른 흐름을 찾기를 기대한다./김광선 경기도의회 의원

천자춘추/미술관 관람 예약

“미술관에 오실 때는 사전에 예약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 말을 듣고 잠시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항상 조용하고 널찍한 미술관에 가는데 무슨 예약인가? 의아해 할 것이다. 나 홀로, 혹은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 미술관에 갈 때에는 물론 예약이 필요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만일 학생들을 인솔하고 오는 경우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가끔 전시장 입구에서 전시장 담당 큐레이터와 학생들을 인솔하고 온 교사들간의 실랑이가 벌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 실랑이의 원인이 대부분 이 ‘예약’에 관한 문제다. 미술관은 또 다른 의미의 교육기관이다. 교육기관에는 어디든 교육을 책임질 교육자가 있게 마련이다. 물론 미술관에도 학생들을 인솔하고 온 교사들보다 더 전문적인 교사가 있다. 바로 교육담당 큐레이터들은 전시를 기획할 때부터 전시에 출품될 작품을 관람객들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한다. 그들에게는 미술에 관한 전문 지식과 교육자로서의 자질 또한 요구된다. 전시를 관람하기 위해 오는 단체의 상황과 연령에 따라 각기 다른 교육이 이루어져야하기 때문이다. ‘내가 잘 아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내가 평소에 다른 모든 것을 가르치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미술관에서도 내가 교육시킬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미술을 가볍게 생각한 것이거나 미술관의 전문성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학교를 비롯한 제도권의 교육기관이 오랜 시간동안 검증되고 정리된 보편적인 지식을 교육하는 곳이라면 미술관 교육은 지금 한창 진행되고 있는 동시대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교육하는 곳이다. 이제 막 작가의 작업실에서 건져 올린 활기 넘치는 새로운 작품을 첫 대면하는 곳이다. 그래서 미술관에 오면 어렵다.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 낯설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 큐레이터들이다. 이 큐레이터들에게 아이들을 맞이하고 수업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일이 사전에 관람 예약하는 일이다. 아무런 준비없이 아이들을 맞아 무슨 교육을 할 수가 있겠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리 화낼 일도 성가신 일도 아니다. 모두가 아이들을 문화적 감수성이 풍부한 시민으로 잘 키워내자는 것이기 때문이다./이승미 제비울미술관 학예실장

월요칼럼/친일청산은 국론분열이 아니다

16대 국회 막판에 통과됐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특별법’은 많은 국민들로부터 ‘친일보호법’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조사 대상과 권한에 온갖 단서와 규제조항이 붙어 친일행위 규명 자체를 사실상 어렵게 하는 조문들로 가득찼다는 이유에서였다. 지난 14일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한나라당 일부 의원, 무소속 일부 의원 등 172명이 국회에 제출한 ‘일제 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은 16대 국회 때 만들었던 기존법을 개정한 것이다. 군 계급을 중좌 이상으로 했던 것을 소위 이상으로 고쳤고, 친일행위의 범위중 ‘전국·중앙’ 단위로 했던 단서 조항도 없앴다. 창씨개명에 앞장선 사람과 언론을 통한 일제전쟁 협력자도 대상에 포함했다. 이 특별법안이 제출되자 한나라당과 일부에서 입법 후 (9월)시행도 하기 전에 개정하는 것은 박근혜 의원과 보수언론을 겨냥한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즉각 반대하고 나섰다. 특히 박 의원은 야당탄압, 정치보복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故 박정희 대통령이 1942년 만주 신경군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조선인으로는 드물게 ‘다가키 마사오’라는 이름으로 일본 육사에 편입해 1944년 졸업했으며, 일제 패망 직전 만주군 중위로 복무한 사실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중-일 전쟁이 발발한 1937년 이후 1면 머릿기사와 사설, 사고 등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를 칭송한 것 역시 당시 신문을 통해 오래 전 드러났다. 조선일보는 그해 7월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을 ‘아군’ 또는 ‘황군’으로 표기하기 시작했으며, 8월12일에는 조선 동포들에게 국방헌금과 군대위문금을 내도록 독려하는 사고를 냈다. 1938년 6월15일에는 육군지원병훈련소 개소를 맞아 사설과 1면 머릿기사로 “조선통치사의 한 신기원을 이룩한 것”이라며 “황국에 대하여 갈충진성(竭忠盡誠)을 다할 것”을 촉구했다. 동아일보도 중-일전쟁이 시작된 뒤 일제가 명절로 꼽았던 명치절에 대해서 “명치 천황의 어성덕을 흠앙하는 명치절! 아침부터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하늘까지도 이날을 축복하는 것 같았다”(1937년 11월4일자)고 찬양했다. 1938년 4월3일엔 침략전쟁을 위한 육군특별지원병제에 대해 사설에서 “조선민중도 이 제도가 실시되는 제1일부터 당국의 지도에 순응하여서 그에 협력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故 박정희 대통령과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일제시절 과거지사는 이렇게 명백하다. 그런데도 친일 진상규명 특별법을 놓고 갑론을박 하고 있는 것은 보기에 딱하다. 한나라당은 “어두운 역사를 털어내고 민족정기를 세우는 노력에는 동참하겠지만 법 상식을 깨고 마녀 사냥 식으로 벌이는 행태는 용납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열린우리당은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한 민족적 염원이 담긴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박근혜 (한나라당)전 대표가 친일진상 특별법 개정안이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다고 반대한 것이야말로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조선일보는“조선·동아일보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로부터 한층 가혹한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다. 이 시기의 일부 기사만을 대상으로 조선·동아일보를 공격하려는 시도”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두 신문사가 당시 불가항력적인 상황하에 따른 피해자며 희생자라는 얘기다. 하지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노무현 대통령의 부모도 옛날에 창씨개명을 했다고 대통령 자신이 밝혔다. 앞으로 조사범위가 확대되어 친일행위들이 만천하에 밝혀진다 해도 예컨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개발독재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는 여전할 것이다. 일순의 친일성 보도는 있었지만 막강한 조선·동아일보에 변동이 있을 리 없다. 시인 서정주와 난파 홍영후의 친일행적이 드러났지만 미당의 문학, 난파의 음악이 외면 당하지는 않았다. 선인들의 친일행적이 나타난다면 대신 용서를 구하는 게 오히려 후련할 수도 있다. 가리고 숨긴다고 치부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신행정수도 이전, 민생고 해결 등 할 일이 산적해 있는 마당에 왜 하필 지금 국론을 분열시키느냐는 주장도 있지만 친일청산은 어느 때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어두운 과거를 털어버리는 것은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역사(役事)다. 새출발은 빠를수록 좋다./임병호 논설위원

친일파

북이 해방후 친일파를 일제히 청산할 수 있었던 것은 단원화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당(로동당)의 명령이면 하지 못할 일이 없다. 프랑스가 2차대전 후 다원화사회이면서 나치협력자, 이를테면 친독파를 숙청할 수 있었던 것은 공산주의와의 싸움이 없었으므로 깨끗이 청산할 수가 있었다. 남에서는 그러하지 못했다. 북처럼 단원화사회가 아닌 다원화사회인데다가, 또 프랑스처럼 종전후 평화를 구가하지 못하고 건국과정이 반탁운동 등 공산주의와의 싸움으로 일관하였기 때문이다. 해방후 처음엔 배척됐던 친일파가 첫 기용된 것은 일제시 고등계(정보계) 형사간부를 지낸 노덕술이었다. 남로당 등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의 극렬테러에 경찰 경험이 없는 당시의 치안 능력으로는 감당키가 어려워 노를 서울경찰청 사찰과장(정보과장)으로 기용한 것이 친일경찰의 출세길이 되었다. 경찰의 친일파 기용이 또 계기가 되어 군대에 이어 행정·사법분야에 까지 확대된 것이 이른바 오늘날 문제가 된 친일파 미청산이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친일파를 기용하긴 했으나 그의 재임시엔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란 말도 끄집어 내지 못하게 했을만큼 일본쪽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러한 그가 친일파를 특히 경찰과 군대에서 중용한 것은 당장 발등의 불이 된 대공 투쟁이 급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렇다 보니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가 유야무야하게 끝나고 말았다. 해방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잘못엔 이런 시대적 배경이 있다. 다만 전후 세대는 해방후 공산주의자들의 관공서 습격, 살인 방화 약탈 등이 얼마나 극렬했는가를 잘 몰라 이해가 안갈지 모르겠으나 건국을 끈질기게 방해했던 기록은 많고 아직도 당시 세대의 인물들이 상당수 생존해 있다. 국회에서 친일파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나쁘다 할 수 없으나 해방된지 이미 60년이 다 되다보니 일제시 직명이나 행위만을 가지고는 참으로 옥석을 가리기가 어렵게 됐다. 지지대子도 초등학생이었던 일제치하에서 창씨개명을 했고 ‘덴노헤이카 반사이’(천황폐하 만세)를 불렀으므로./임양은 주필

‘의문사위’ 의문의 성명, 정권 입장인가?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남파간첩 등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민주화 기여 재확인을 이 정권이 묵과하는 것은 결국 좌파 정권임을 자인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는 이 정권의 진보주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믿지는 않았다. 보수주의와 자본주의가 수정돼야 할 오만을 일깨우는 파트너십으로 알았고 또 개혁은 그같은 작업을 말한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좌파도 서구식 좌파가 아닌 낡은 이념성을 드러내는 재확인이 공공연히 묵인되는 덴 거듭 충격을 금할 수 없다. ‘유신정권 시절 교도소에서 불법 강제전향에 대해 항거해 민주화에 기여한 것’이라는 의문사위의 성명을 통한 입장 재확인은 실로 황당하다. 민주화는 자유민주주의 구현을 위해 유신독재나 군사독재에 항거한 투쟁을 말한다. 자유민주주의에 반한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남파된 간첩 등 장기수가 민주화에 기여했다면 그 민주화는 뭘 의미하는 지를 묻는다. 그러한 민주화 해석이 대한민국 헌법과 나라를 세운 건국의 정체성에 합치되는 지에 의문을 갖는 것이다. 비록 그 시기가 유신정권 시절이고 또 전향의 권유에 불법이 있었다 하여도 국내 민주화 투쟁 개념과는 전혀 별개인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다. 단순히 인권침해를 당했다 하여 민주화 기여일 수는 없다. 반국가사범에 이 나라 헌법이 정한 양심의 자유를 말하는 것은 나라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헌법정신을 심히 왜곡하는 위험한 발상이다. 또 사노맹 출신 조사관들이 허 일병 사망사건과 관련해 군 고위 장성과 전 국방부 장관 등을 조사한 것 역시 의문사위가 뭐라고 말해도 잘못된 것은 역시 잘못이다. 우리는 그들의 복권된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다. 그러나 직분의 적합성이란 것이 있다. 우리보다 인권이 더 발달된 나라에서도 국가기관에서 직분의 적합성을 따지는 게 인권을 경시해서가 아니다. 도대체 나라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게 민중사회의 많은 의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진보주의나 좌파 개념은 국가의 정체성 안에서 함께 한다. 만약 이를 일탈하여 국헌을 문란케 한다면 화두가 달라진다. 의문사위의 의문된 발상을 이 정권은 정리해 보여야 할 책임이 있다.

정부는 외국어 남용에 앞장서지 말라

우리의 언어생활을 잠시만 살펴 보면 우리 말을 잘못 쓰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특히 외국어 남용은 그 정도를 넘어서 매우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 ‘우리 말의 위기시대’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다.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은 일찍이 “말은 민족의 상징이며 민족 문화의 근원이요, 기초가 되며 민족적 생활의 힘이 된다”고 말했다. 그렇다. 우리가 우리 말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은 무분별하게 외국어를 받아 들여 쓰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우리 말을 살려 쓰는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언어생활 실상은 외국어와 로마자가 점령하여 국적 불명의 언어가 넘치고 국민의 어휘력과 사고력은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다. 어휘력이 떨어져 밀물처럼 들어오는 외국어를 우리 말로 순화하는 능력도 점점 메말라가는 악순환이 되풀이 된다. 국어순화에 앞장 서야 할 정부 부처나 교육 기관이 우리 말을 푸대접하는 것은 정말 실망스럽다. 예컨대 ‘어젠다’ ‘로드맵’ ‘태스크포스’ ‘클러스트’ ‘국정 브리핑’ 등 상당히 많다. 모두 우리 말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이다. ‘어젠다’는 ‘의제, 과제’로, ‘로드맵’은 ‘단계별 이행안, 청사진’으로, ‘태스크포스’는 ‘기획팀, 전략팀, 혁신팀’으로, ‘클러스트’는 ‘산업단지, 공업단지’로, ‘국정 브리핑’은 ‘국정 소식, 국정 보고’로 충분히 바꿀 수 있다. ‘참여 정부’라는 구호만 외칠 게 아니라 알기 쉬운 말로 국가 정책을 제시하고 홍보해야 국민이 참여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경제가 어렵다고 하는데 어려운 금융 용어부터 쉽게 풀어야 한다. 최근에 나온 금융 용어 중 ‘모기지론(장기 주택 담보 대출)’ ‘배드뱅크(신용 회복 은행)’ ‘방카쉬랑스(은행 보험 상품)’ ‘패닉(공황)’ ‘아웃소싱(외부 용역)’ 등은 대다수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이들도 우리 말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 언어는 사용하는 사람들이 갈고 닦는 만큼 빛이 난다. 지금처럼 아무런 대책 없이 외국어를 받아 들인다면 우리 언어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정부는 물론 특히 언론 기관과 교육 기관이 우리 언어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외국어를 많이 쓴다고 국제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7월 17일 경기만평, 당구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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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같은 나라'

외국의 저명한 작가가 우리 나라를 소재로 글을 쓴 예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펄 벅은 ‘살아있는 갈대’ ‘한국서 온 두 처녀’ ‘정오’ 등 한국을 배경으로 작품을 썼는데 특히 ‘살아 있는 갈대’를 일컬어 뉴욕타임스에서는 “펄 벅이 한국에 보내는 애정의 선물”이라고 묘사했다. 펄 벅도 책 앞에 “한국은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같은 나라이다”라는 헌정문을 썼다. 또 ‘기탄잘리’라는 시집으로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로 191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인도의 철학자이자 시인인 타고르 라빈드라나트가 우리 나라에 대해 시를 썼다. 1929년 그가 일본에 들렀을 때 어느 일간지에서 한국방문을 요청하자 이에 응하지 못함을 미안하게 여겨 대신 그 일간지에 기고한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앞부분만 알려져 있지만 전문은 이렇다. ‘기탄잘리’는 ‘신에게 바친 송가’라는 뜻이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코리아 /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 마음엔 두려움이 없고 /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 지식은 자유스럽고 /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 지성의 맑은 흐름이 / 굳어진 습관의 모래 벌판에 길 잃지 않은 곳 /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 그러한 자유의 천당으로 /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주요한 옮김) 자신도 영국의 식민지 국민으로서 일제의 식민 치하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보낸 일종의 송시(頌詩)다. 펄 벅과 타고르는 문학을 통해 한국의 밝은 미래를 예언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나라는 일제로부터 해방은 됐지만 아직도 국토가 분단된 상태로 살고 있다. 남북 통일의 그 날은 언제 올 것인가. 타고르가 기도한 말씀 ‘코리아여 깨어나소서’는 지금의 우리 현실을 염두에 둔 듯 하여 숙연해진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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