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인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로 했다. 경기도에 있었을 때부터 알던 지인이 인천에서 만나자고 해서 약속을 잡았다. 인천을 잘 아는 직원에게 어디가 좋을지 추천해 달라고 했다. 지인과 인천에서 오붓한 식사를 할 수 있는 정감이 있는 곳을 원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오래된 듯하며, 딱히 정해진 메뉴가 없고, 딱히 간판도 없지만, 지역의 냄새가 나는 음식이 나오는 내가 원하던 바로 그곳이었다. 약속 날, 예약이 안된다는 직원의 말에 서둘러 약속장소로 나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이날 누군가에게는 청년 시절의 전부였던, 추억거리로 채워져 있을 신포동거리의 분위기는 이곳이 고향이 아닌 나에게도 옛 시절 향수를 자극했다. 약속 장소 앞에서 간판을 보니 옛날 ‘라사’라고 쓰여 있을 법한 간판에 ‘다복집’이라고 쓰여 있었다. 간판을 보면 전화번호 앞자리 숫자가 2개인 것만 봐도 노포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노포답게 여닫이가 아닌 미닫이문으로 돼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만석으로 아저씨들이 소주를 들이켜며 하루의 피곤을 풀고 있었고 지인은 나를 기다리며 병맥주와 함께 ‘함박스텍’을 먹고 있었다. 이 오래된 분위기는 도대체 뭘까. 둥그런 테이블에는 호스로 연결된 옛날 가스 화구 같은 것이 놓여 있고, 옛날 무늬로 된 바닥에 메뉴를 보니, 붓글씨체로 스지탕, 함박스텍, 고추전, 홍어찜, 게장, 굴 등이 쓰여 있었다. 스지탕을 주문하니 주인장이 단출한 기본 찬을 내어준다. 갖가지 양념장과 폭삭 익은 김치와 새콤한 동치미가 시장한 뱃속을 더욱 깨운다. 가게 안을 찬찬히 둘러보니 50년을 거저먹은 게 아니었다. 신포를 비롯한 인천의 이야깃거리와 삶이 묻어있는 글들과 사진들이 세월의 무게를 말해준다. 아마 신포동 인근 선술집과 라이브클럽들은 당시 문화 예술가들의 놀이터였나 보다. 술잔을 돌리고 있자니, 진보니 보수니를 논하다가 싸우다가도 화해를 하고, 논의를 하다가도 이해를 하고, 고민을 하다가도 해결이 되고, 논쟁을 하다가도 같이 부둥켜안고 우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많던 손님들은 이미 나가고 거의 우리만 남아 있었다. 50년 된 집에서 주인이 돌아가시고 따님이 가게를 돌보는 듯했다. 그러나 지금 시간이 지나고 나니 할머니 한 분이 가게를 보시고 계신다. 아마 사모님인 듯하다. 어떤 젊은 손님들이 나가면서 이 할머니주인장에 소리를 지른다. “내가 여기 얼마나 많이 왔는데,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 거의 술 취한 객기다. 이 할머니 주인은 그저 “알았어~미안해”하면서 사과를 한다. 주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런 풍경마저도 너무 살갑다. 거의 70년대나 봤을 분위기다. 그때는 술 먹고 뭐 그리 싸웠는지…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낄 무렵. ‘앗! 집에 갈 시간이다’ 헤어지고 밖으로 나와서 정문을 다시 바라보았다. 비는 오고 있었고, 나는 술에 취해 옛날 내가 20대 때 시장에서 순대 한 접시에 소주를 마시던 때가 기억났다. 그때가 88올림픽 전이었다. ‘응답하라 1988’ 보다도 전 세대다. 그때의 낭만을 2016년에 느끼게 될 줄을 몰랐다. 이건 회춘이 아니라 회포다. 그렇다. 노포를 찾아서 나는 오늘도 이 도시를 떠돈다. 황준기 인천관광공사 사장
오피니언
황준기
2016-09-05 2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