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투고/선관위 단속권한 축소 '반대'

선관위의 선거법 위반행위 단속권한은 확대·지속되어 우리나라에 공명선거의 꽃이 활짝 피어나야만 한다. 최근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일부 정치권에서 선관위의 선거법위반행위 단속권한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선거법을 개정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정말 개탄스러운 일이라고 본다. 제17대 국회의원선거가 얼마남지 않은 상황에서 오히려 선거법 위반행위에 대한 단호한 대처를 위하여 선거관리의 주무기관인 선관위에 공명선거의 정착을 위해 더욱 힘을 실어 주는 법안은 고사하고 있는 권한까지 없애려는 일부 정치권의 생각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총선을 얼마남지 않은 상황에 불철주야 추운 날씨에 단속 비디오카메라의 플레시를 켜고 현장에서 비협조적인 위반행위자들에게 멱살을 잡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함에도 사명감 하나만으로 열심히 일하는 일선 선관위 직원들을 알아주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선관위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불충분한 단속권한마저도 두려워 이를 삭제하려는 일부 정치인들에게 묻고 싶다. 선거법을 지켜 떳떳하면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는가. 얼마전 선관위가 제출한 정치개혁안중 선관위에 통신자료제출요구권 확대, 선거법위반행위에 사용된 증거물품 수거권 확대, 선거범죄혐의자에 대한 동행명령권부여등의 권한 확대와 선거법 위법행위자 고발사실을 일간신문 또는 인터넷언론기관에 공고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선거범죄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는 법안이 채택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간 선거법은 많은 국민의 열망과 소망을 담고 깨끗한 선거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발전하여 왔다. 이번 선거법개정도 국민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개정되기를 바라고 몇 명 안되는 단속인력으로 최선을 다하는 선관위에 단속권한을 주어 공명선거풍토가 하루빨리 정착되기를 바란다./박경우·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12월 24일 경기만평, 당구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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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단체 과세권 회수라니

행정자치부가 서울 강남의 재산세 7배 인상을 두고 현지 자치단체와 티격태격하더니, 2005년 부터는 자치단체의 과세권을 박탈하겠다고 한다. 이 무슨 소린가.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다. 우리는 부동산 투기 문제를 둔 강남의 재산세 대폭 인상은 현지 자치단체와 서울시가 알아서 할 것으로 믿어 여기에 새삼 언급할 이유는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행정자치부에 있다. 자기네 말을 일선 자치단체가 잘 안들어 준다 하여 과세권을 회수하는 지방세법 개정을 추진하겠다는 것은 참으로 반개혁적이다. 행정자치부 사람들이 어느 시대에 살고 있어서 이같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인지 심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정부는 지방분권을 한다고 한다. 이 또한 당연한 시대의 흐름이다. 진정 지방분권을 할 의향이면 주무부처가 되는 행정자치부 부터 전향적 사고를 지녀야 할 것이다. 이런터에 과세권 회수를 말하는 퇴보적 언동이 결코 지방분권 취의에 합당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방세 우위의 세제개편이 절실히 요구된다. 일본은 지방세 55% 대 국세 45%의 비율로도 중앙정부가 나라 살림을 알차게 꾸려가고 있다. 우리는 그 반대다. 지방세 45% 대 국세 55%로 국세위주의 정부 예산편성에도 불구하고 세제개편을 미뤄오고 있다. 중앙정부는 그래서 국고보조를 하는 게 아니냐고 말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니다. 국고보조를 덜해 주어도 좋으니까 선진 외국처럼 지방세 위주의 세제개편을 바라고자 한다. 한데, 이건 또 뭔가. 세제개편은 고사하고 자치단체의 과세권을 회수하겠다니 이 사람들이 정신이 있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지방분권을 한다는 이 정부의 행정자치부 사람들인지를 의심케 한다. 회수란 용어부터가 당치않다. 과세권은 원초적으로 일선 행정기관에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법적 사상이다. 실정법이라고 하여 이에 심히 일탈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데도 실정법으로 과세권을 찬탈하겠다는 것은 조세정의에 어긋난다. 지방자치단체의 과세권은 축소돼야 하는 것이 아니고 더욱 폭넓게 보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지방분권이다. 행정자치부의 과세권 회수의 망발은 즉각 취소돼야 한다. 아울러 그같은 말이 나온것 자체부터 부끄러움을 아는 당국자들의 맹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대학졸업을 미루지 말라

대학 졸업반 중 상당수가 졸업 후 취업이 어렵다고 졸업을 미루는 풍조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더구나 졸업반 학생들이 졸업을 미루기 위해 교수에게 낙제점수인 F학점을 요청한다니 개탄을 금할 수 없다. 각 대학 학사담당 부서마다 “어떻게 하면 졸업을 안할 수 있는 지 방법을 알려 달라”는 문의전화가 매일 줄을 잇고 있다니 실로 한심하다. 학기 초 취업이 될줄 알고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모두 신청하고 졸업준비를 마쳤는데도 직장을 잡지 못한 4학년 학생들이 졸업을 안하고 연기하는 방법이 없겠느냐는 문의 전화가 계속된다는 것이다. 졸업논문을 내지 않아도 학부과정은 수료된 것으로 처리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학생 신분을 유지할 수 있는 현행 학사 행정도 문제가 있다. 더구나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F학점을 주는 교수들이 있다고 한다. 1980년대에는 학생운동과 정치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일부러 졸업을 늦추는 경우가 있었지만 최근에는 취업 때문에 일부러 F학점을 받는다니 세상이 변해도 너무 변했다. 최근 기업들이 정규인력을 채용하기 보다는 임시직이나 일용직 인력으로 대체하고 신규채용을 줄이는 대신 즉시 활동이 가능한 경력자 채용을 선호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특히 우리 사회는 대학졸업자가 급격히 증가하는 반면 고급인력시장은 오히려 인력부족이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오는 2006년 까지 정보기술(IT)등 신기술 분야에 필요한 인력은 43만명인 데 비해 공급은 22만명에 불과할 것이라는 예측은 그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대학졸업을 일부러 미루는 것은 옳지 않다. 대학이 학문의 전당이기보다는 취업 과정이라는 지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사회 현상에 미리 겁을 먹는 것은 자신을 비하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패기도 없다. 대학을 졸업하지 않으려는 것은 날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둥지를 떠나지 못하는 새와 같다. 실패가 거듭되더라도 도전하는 것은 젊음의 상징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 활로를 찾아라.

괴담이설

세상이 험한 탓인지 조류독감이라고 전엔 듣도 보도 못했던 괴상한 전염병이 생겨 애를 먹인다. 괴상한 일은 이만이 아니다. 나라 안에선 웬만히 괴상해서는 괴상하지도 않게끔 됐다. 괴상한 일이 하도 많다보니 이도 면역성이 생기나 보다. 근래 들린 나라밖 괴상한 일로는 이런 게 있다. 중국 하난(河南)성에서는 어느 취객이 이웃집강아지가 자신의 바지를 물어뜯는다고 개를 집어들어 코를 깨물어 죽게 했다는 것이다. 수습기자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되어도 개가 사람을 문것은 뉴스가 안된다고 배웠던게 생각난다. (개에 물린 인명 살상기사가 가끔 나긴 하지만) 또 중국 상하이(上海)에서는 최고 추녀에 성형수술비 10만위안(1천500만원)을 주는 추녀 선발대회가 열렸다고 한다. 미국 뉴욕에서는 지난 9·11테러로 희생된 동료 소방관들 가족을 돌보던 소방관들이 1년이 지나면서 그만 숨진 동료 소방관 부인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기 위해 이혼하는 사람까지 있다는 것이다. 인종도 많고 인구도 많다보니 별의별 일이 다 있는 모양이다. 하긴 국내에서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독신의 파병장교가 전사한 부하 가족을 돌보다가 역시 미망인과 사랑이 싹터 결혼한 사례가 없지는 않다. 이런 저런 괴상한 일은 그래도 남을 해치진 않는다. 듣기에 따라선 재미있는 점도 있다. 나라가 국민을 걱정하기 보다는 국민이 나라를 걱정하는 지경이 됐다. 정부가 하는 일이 하도 미덥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개를 무는 뉴스꼴이 돼가고 있는 것이다. 불법대선자금이 많다 적다하는 것으로 도덕성을 평가 받으려는 어거지는 마치 성형비를 탐낸 추녀대회와 같다. 대통령 측근의 386세대 비리는 동료부인과 사랑에 빠진 뉴욕 소방관과 비유할 수 있을는지. 세월은 가는 데 사람은 흙탕물 속에서 도시 믿을 사람이 없다. 말들은 번드레 하는데도 이 모양인 것 또한 괴상한 일이다. 조류독감이란 게 날 법도 하다. /임양은 주필

기고/새 출발을 앞두고...

“언제 나가실거죠?” 처음엔 무슨 말인가 하고 의아해 했다. 지금은 이 말에 이골이 났다. 그저 웃기만 한다. 묻는 말의 뜻이 내 본의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일이 그렇지 않다고 해명하기에도 솔직히 귀찮을 때가 있다. 하긴 사회의 인식이 그런 것 같다. 조금이라도 색다른 일을 하면 정치적으로 보는 게 관행화하다시피 됐다. 경로 무료급식 봉사를 좀 하다보니 어디 지방의원이라도 출마할 것으로 지레 짐작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도 내 부덕의 소치가 아닌가하고 생각해 본다. 이해 타산이 바쁜 세태에서 거의 자력으로 힘겹지만 급식 봉사를 꾸려가다 보니 그런 출마 포석이 아니고는 사람이 맹하게 보일진 모르겠다. 하지만 맹한 내 자신이 좋다. 그리고 나보다 훨씬 더 맹한 의인들을 존경한다. 이 기회에 개인적 입장을 밝히자면 임기가 있는 선거직 보다는 임기가 없는 봉사직이 좋다. 또 선거직을 맡을 훌륭한 분들은 많다. 내친 김에 말을 더 해야겠다. 급식소로 사용하던 컨테이너는 맞춤 컨테이너 두 박스를 연결해 주방과 식당으로 썼다. 지금은 초라해 보이지만 4년여 동안에 연인원 5만5천여명의 노인 분들이 여기서 경로급식을 즐기셨다. 두 아들까지 동원해 안해본 일을 시키면서 설치했던 것으로 그 무렵 두 아들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다만 쟤 엄마가 좋아해서 하는 일이라 쟤들 아빠 눈치 보아가며 도와 주었던 게 생각난다. 만석공원 앞 만석공원경로당 건물 확장으로,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있다. 우리 자원봉사 어머니들은 그동안 적잖은 고생을 했지만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설레이는 가슴을 주체하기 어려운 감격을 안고 있다. 잡다한 준비가 비록 힘은 들고 남편에게 다 말할 수도 없어 어떻게 어떻게 해내고 있지만 마음은 밤잠을 설칠만큼 마냥 즐겁다. 역시 사람이 맹한 탓인 지 모르지만 아무튼 오는 26일이 기다려진다. 이날은 만석경로당과 함께 송년모임 행사를 겸한 경로잔치를 갖는다. 만석공원경로당에 계신 분들은 회장·부회장님을 비롯하여 모두 마음이 너그러워 참으로 고맙다. 경로급식은 경로당 회원들만 드시는 게 아니다. 멀리서 오시는 분들도 많다. 노인들만이 아니다. 노숙자들도 찾는다. 이런데도 경로당측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마음편하게 대해준다. 대한노인회 경기도연합회 그리고 수원시노인회 등에서 심적으로 도와 주시는 게 여간 큰 힘이 되는 게 아니다. 경로급식을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또 안한다고 해서 누가 탓할 사람도 없다. 역시 나는 맹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임기가 없는 봉사직은 그 자체가 즐거움인 것이다. /이지현.사단법인 한길봉사회

천자춘추/대인관계의 비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이 되면 감사해야 할 사람들을 챙기게 된다. 그 과정에 자신의 대인관계를 회상하게 되고, 그러면서 행복감과 슬픔, 만족감과 서운함, 기쁨과 분노 등의 만감이 교체하는 걸 경험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난 대인관계라고 하고 싶다. 정신과의사인 이동식박사의 ‘현대인의 정신건강’이라는 책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인간이란 누구나 자기를 존중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남이 좋아하는 것을 존중하고 남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대인관계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지 말라고 누차 경고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한다면 어떤 사람이든 자기를 무시한다고 밖에 달리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대인관계의 비결은 한 마디로 상대방을 존중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존중은 과잉충성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과잉충성을 하는 사람은 주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충성을 받는 사람이 자기의 모든 욕구를 채워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기대가 채워지지 않게 되며, 그런 불만족이 한 겹 두 겹 쌓이게 되면, 서운한 감정이 올라오게 되고, 상대방에게 화가 나며, 배신감까지 느끼게 되어 결국 원수지간이 되면서 관계를 끝내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상대방에게 그런 기대를 갖고 있는지 조차 모른다. 사실 상대방의 문제보다는 자신의 과잉충성으로 인한 기대가 더 그 사람과의 관계를 그르치고 있는데도 말이다. 자수성가한 분들 중에는 이런 대인관계 패턴을 보여주는 부모가 많다. 자녀가 무엇이 필요한 지 물어보지도 않고, 말해도 듣지 않고, 자신이 어렸을 적에 가졌던, 그리고 충족되지 않았던 욕구, 즉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필요를 일방적으로 채워준 다음, ‘이제 성장조건이 완비되었으니까 넌 완벽한 사람이 되어야 해’라는 암시를 준다. 자녀에겐 부모와 달리 다른 것이 부족한데 말이다. 돈이 아니라 신뢰, 존중 말이다. /유순덕.경기도청소년종합상담실장

열린글밭/평양에 다녀와서...

“온통 회색빛이었다. 하늘도, 땅도, 건물도, 사람까지도…. 내 머릿속에 막연히 자리잡고 있던 우울하고 칙칙한 회색의 이미지가 마치 벌레로 되살아나 내 온몸으로 기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이것이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의 갈등과 분노, 회한과 애증의 인큐베이터인 평양에 첫 발을 내딛는 소감이다. 숙소로 향하는 버스안에서 소위 안내원이란 북쪽 젊은이의 ‘남쪽에서 오신 선생님들 북쪽사람들 모두 새빨갛고 머리에 뿔이 난 줄 아셨을텐데, 직접와서 보시니까 어떻습니까’ 그 시니컬한 미소를 띈 첫 멘트는 소위 그들이 말하는 미제 앞잡이 부르주아 집단의 기선을 제압하려는 프롤레타리아의 선전포고와도 같았다. 4박5일 일정동안 나는 끝없이 이어지는 가치충돌의 파열음 때문에 늘 ‘이명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차창밖의 풍경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30년쯤 되돌아간 느낌이었고, 역사적 사실 보다는 그 역사적 사실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셨다는 (?) 수령님과 장군님을 열심히 칭송하는 유적지 강사들의 설명은 힘겨운 인내심을 많이도 요구했다. 그러나 그곳도 역시 사람 사는 곳임엔 틀림이 없었다. 유치원에서 와락 품에 안기던 어린아이의 응석과 살 내음, 묘향산에서 소풍왔다 만나 내가 주던 사탕을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받던 12살 소녀의 새까만 눈동자는 가슴 시린 예쁨이었다. 보현사에서 환갑기념으로 구경왔다던 중 늙은이의 인생을 달관 한듯한 한마디 ‘아무러면 어떻소. 북이나, 남이나 거저 한평생 사는 것 아니겄소’는 이데올로기가 비집을 틈이 없었다. 그들이 우리와 같은 말과 글과 역사를 공유하는 한 민족이라면 모두 죽는 대립보다는 다같이 더불어 사는 방법을 택하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위정자들에 의한 통일은… 글쎄, 요원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민초들이 하기 쉬운 것부터 해야만 할 것 같다. 우리가 그들을 무시하지 않고 내게 덜 필요한 것들을 깨끗이 해서 정성들여 그들에게 전해 준다면 고마워 하며 마음을 열지 않을까. 감히 ‘북쪽 주민 돕기 시민운동’을 전개키로 하였다. 평양 방문의 그 소중한 경험을 사장시키기엔 방문단원 모두의 이성이 용납하지 않아서 마음을 모으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으면 참 좋겠다. /김석일.북녘동포사랑 시민운동 본부회장

12월 23일 경기만평, 당구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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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세모를 보내면서…

인간사는 유상하여도 세월은 무상하다. 이리 하다보니 올 한해도 저물어 가는구나. 21세기의 여명을 예찬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 데 벌써 2003년의 세모를 맞고 있다. 인간의 삶이 뭔가. 전체주의 사회가 아닌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선 개인의 행복 추구권이 우선된다. 각기 저마다의 생활, 그리고 가족과 가정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사회발전과 국가발전이 이룩된다. 국가발전을 가져오는 것은 ‘개인의 자비심이 아니라 개인의 이기심’이라는 아담 스미스의 설파는 이래서 지금도 적중한다. 여기서 다만 염려되는 것은 개인의 이기심이 남의 이기심을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나의 이기심을 보호받기 위해서는 남의 이기심 또한 보호함을 알아야 나의 이기심 역시 침해당하지 않는 것이다. 세태가 참으로 어지럽다. 예컨데 자기 자식을 던져 죽이고 제 아비를 때려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던 때가 지금처럼 심각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역시 인간사회 속에 존재한다. 세상이 아무리 어지러워도, 정치가 아무리 무슨판 같아도, 경제가 아무리 어렵고 어려워도, 사회가 아무리 혼돈하여도, 문화가 아무리 권력화하여도 우리는 인간사회가 있으므로 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성이다. 사람이 인성을 잃으면 그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더불어 살기가 무척 어렵다. 세모는 인성 발현의 성찰을 요구한다. 개인적으로는 과연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가, 가정의 일원으로는 얼마나 충실한 노력을 기울였는가, 사회적으로는 과연 얼마나 가치행위를 창출하였는가에 대한 저마다의 반성이 있어야 하겠다. 물론 충분한 자기만족의 결론은 없다. 또 있을 수도 없다. 하지만 이같은 자기 성찰을 통하여 보다 나은 새해를 다짐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인간사다. 우리들 다 같이 이 세모를 보내면서 좀더 겸허하면서 좀더 자긍심을 갖자. 아울러 불의에는 그게 권력일지라도 더욱 용기있게 대하고, 약자에게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일지라도 따뜻한 마음을 갖자. 여러가지를 생각케하는 세모가 다가오고 또 가고 있다. 올 한해가 얼마 남지 않아 가는 세월 속에서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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