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산의 아침/또 한해의 끝에서

얼마전 끝난 TV드라마 ‘완전한 사랑’(김수현 극본)이 주부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남편을 끔찍이 사랑하는 영애(김희애)가 특발성 폐섬유증이라는 불치병 판정을 받고 6개월의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 삶을 마무리하는 과정이 그려졌다. 아내밖에 모르는 남편 시우(차인표)는 포기하지 말자며 입원치료를 애원하지만, 영애는 무의미한 치료를 받으며 시간을 낭비하느니 가족곁에서 생을 마감하겠다고 한다. 이 드라마를 지켜보는 동년배의 주부들은 “내가 만일 죽음을 앞두게 된다면…”하는 상황을 그리며 ‘아름다운 죽음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 보기도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모든 사람은 죽는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고, 태어나서 죽는다는 것은 하나의 이치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죽음을 잊고 지낸다. 만약 그렇게 믿는다면… 오늘과는 다른 삶을 살고있을 것이고,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당장 어떻게 죽을까를 고민할 것이고, 아름답게 생을 마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기억에 남는 책중 하나인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멋지게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주인공은 죽는 순간까지 웃으면서 베풀고 주변 사람들에게 가슴 뜨거운 감동을 전한다. ‘아름다운 죽음’을 가르쳐주는 이 책은 루게릭 병에 걸린 모리라는 노은사와 함께 나눈 지상에서의 마지막 시간들을 제자 미치 엘봄이 정리한 글이다. 모리가 세상을 떠나기 전 서너달 동안 매주 화요일에 만나 인생의 의미에 대해 가진 수업(?) 내용을 적었다. 사회학과 교수인 모리 슈워츠는 사지를 쓰지 못하다가 결국은 숨쉬기도 힘들어지는 루게릭 병이라는 희귀한 병을 앓는 죽음을 앞둔 환자다. 그런 그가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살아있음의 의미, 죽어감의 의미를 들려준다. 모리 교수는 시한부 생명 선고를 받은후 시름시름 앓다 사라지기 보다는, 자신의 죽음을 삶의 중심이 될 마지막 프로젝트로 삼고 싶어한다. 그는 ‘누구나 죽는 것이니 기왕이면 자신의 죽음을 대단히 가치있는 일로 승화시킬 수 없을까’를 고민한다. 그리고는 제자에게 얘기한다. “천천히 참을성있게 생명이 사그러드는 나를 연구하시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 보시오. 나와 더불어 죽음을 배우시오”라고. 노교수는 ‘어떻게 죽어야 할지 배우게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배울 수 있다’면서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따뜻한 지혜를 배우라고 나지막히 설파하고 있다. 세상, 후회, 죽음, 두려움, 돈, 결혼, 가족, 사회, 사랑, 용서, 의미있는 삶…. 이것을 통해 독자들은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곱씹어보게 된다. 세상이 중요하다고 떠들어대는 무의미한 것들에 매달리는 대신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동정하고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을 배우게 된다. 또 사는 것과 함께 나이 들어 가는 것, 죽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도 배우게 된다. 헐레벌떡, 또 한해가 지나고 있다. ‘사람은 인생에 흔적을 남겨야 한다’며 이제까지의 인생에, 혹은 올 한해 뭘 남겼느냐고 종종 곤혹스런 질문을 하는 어느 교수님의 말이 생각난다. 이것이다, 자신있게 내세울 것도 없으면서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온 한해가 아니었나 싶다. 한해의 끝자락에서 모리 교수가 한 말이 가슴을 울린다. “의미없는 생활을 하느라 바삐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 자기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느라 분주할 때 조차도 반은 자고 있는 것 같다구. 그것은 그들이 엉뚱한 것을 쫓고있기 때문이지. 자기의 인생을 의미있게 살려면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위해 바쳐야하네.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헌신하고 자기에게 의미와 목적을 주는 일을 창조하는데 헌신해야 하네” /이연섭 문화부장

천자춘추/북한산에 오르며

일요일이 되면 산에 갈 때가 많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기분이다. 지난 일요일에도 북한산을 올랐다. ‘더오름 산악회’와 약속이 되면 함께 가기도 하지만 오늘처럼 혼자 갈 때가 많다. 혼자라서 조금 쓸쓸하다. 하지만 그런 마음 곧 잊는다. 내 힘에 맞게 걷거나 쉬는 걸 마음대로 할 수 있어 편하다. 북한산 들머리에 들어서니 겨울 찬 공기가 코끝에 싸하게 닿는다. 그래도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어 산을 오르기에 좋은 날이다. 산줄기에 이르니 언제 오셨는지 하얀 눈들이 희끗희끗 내려앉아 있다. 계곡의 얼음장을 타고 잘잘잘 흐르는 물소리가 반갑다. 멀찍이서 까마귀 한 녀석이 까옥까옥 우짖는데 듣기 싫지 않다. 경국정사에서 똑똑똑 목탁소리가 번져나온다. 산사 앞에 현수막 글씨가 큼직하게 다가온다.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 그 여름내 푸른 잎사귀를 팔랑대던 나무들은 모두 옷을 벗어 던졌다. 신갈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갈참나무, 떡갈나무 같은 참나무 식구들은 잎사귀를 다 떨궈서 누가 누군지 구별하기 어렵다. 층층나무, 단풍나무, 함박꽃나무도 가지만 앙상하다. 소나무들만 산허리를 푸르게 두르고 있다. 지난 봄에 산길 귀퉁이 곳곳에서 피어나던 봄맞이꽃, 양지꽃, 노랑제비꽃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풀 숲 사이에서 수줍게 웃음짓던 족도리꽃들도 그리워진다. 오늘도 어김없이 산길에는 나이 지긋한 부부들이 자주 눈에 띈다. 나이 든 부부들을 만나면 복스러워 보인다. 세상일 접고 함께 주름진 세월을 이야기하며 등산하는 모습이 얼마나 정겹고 따뜻한가. 젊은 부부들도 앞으로 지나간다. 함께 온 아이들이 깡총댄다. 산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생기가 돌고 믿음직스럽다. 마치 곧게 자라는 푸르른 아기나무 같다. 사랑스런 아이들아, 산처럼 푸르게 자라거라. 어느덧 백운대 정상에 올랐다. 아내가 떠오른다. 지금쯤 아내는 교회에 가 있을 게다. 아침에 나올 때 함께 교회에 가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래도 자기 뜻을 말하지 않고 산에 갈 준비하는 나를 지켜본 사람! 아내는 세상의 평화와 모두의 건강한 삶을 기도하겠지. 나도 산 위에 서서 두 손을 모은다. ‘세상 사람들이여! 나무, 풀, 새, 풀벌레, 산짐승, 달빛, 비바람 눈보라 가리지 않고 모두 품에 안은 산처럼 늘 건강하고 행복하소서.’ /최창의 경기도교육위원

선행이 지구를 살린다

‘종말(終末)’의 사전적 의미는 ‘맨 나중의 끝’이다. ‘끝판’이다. ‘종말론’은 유태교·기독교에서 세상의 종말을 믿고, 그때에 최후의 심판이 있으며 선인과 악인은 그 운명을 달리하여 신(神)의 선(善)이 영원히 승리한다는 설(說)이다. 종말관이라고도 한다. 신학(神學)에서는 종말을 두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말로는 똑같으나 영어로는 두 가지로 표현한다. 하나는 ‘마지막 날들(last day)’이고 다른 하나는 ‘마지막 날(the Last Day)’이다. 처음 것은 예수의 초림에서 재림 때까지의 모든 기간을 말하고, 두번째 말한 것은 예수의 재림의 때(말세지말)를 말한다. 사람들은 흔히 ‘마지막 날’을 말하기 때문에 혼돈이 일어난다. 마태복음 24장 30절에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은 그 날을 꼭 알고 싶어한다. 그래서 교회사를 보면 여러번 예수의 재림의 날을 예언하여 물의를 일으킨 소위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몇몇 사이비 종교의 시한부 종말론 주장이 나왔었다. 바울은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종말)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살전 5:1 ~2)고 경고했다. 바울은 종말의 징조에 대해서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나니”(살후 2:3)라고 예언했다. 마태복음 24장에는 네 가지 징조를 말하고 있다. 첫째, 거짓 그리스도가 일어날 것이고 둘째,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해 일어나고 셋째,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게 되고 넷째,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을 것이라고 하였다. 폭우나 태풍 전에 먼저 바람이 불고, 구름이 끼고 날씨가 후텁지근하듯 먼저 여러 징조가 일어나는 것과 같다. 사회가 말할 수 없이 혼탁해지면 ‘말세’라는 탄식이 나오지만, 선행이 종말을 막아 주는 것이다. 종말이 오지 않는 것은 악행보다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 임병호 논설위원

기고/금석문(金石文) 문화재의 가치와 중요성

우리 나라의 여러 기록 문화재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는 유물은 아마 금석문일 것이다. 경기도의 수많은 문화재 가운데도 무덤 앞에 자리한 신도비를 비롯해 묘소, 왕릉비문, 공덕비, 선정비 등 금석문이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다. 금석문이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쇠붙이나 돌 ,바위 등에 새겨진 글씨나 문양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쉽게 왜곡 할 수 없으며 오랜 기간 보존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높은 문화유산이다 특히 고려조 , 조선조를 합쳐 1000 년 동안 수도(首都) 역할을 한 경기도의 경우 우리 나라에서 가장 소중한 금석문자료를 가진 금석문 박물관과 같은 곳이다. 이름이 있는 명산과 고을에는 여지없이 묘소와 함께 가치 높은 석물(石物)과 금석문이 자리해 있다. 이들 금석문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당시 최고의 문장가가 글을 짓고 또한 최고의 명필가들이 글을 쓰는 것이 관례인 이유로 하여 옛 역사의 예술적 가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또한 금석문은 한번 쓰여지거나 새겨지면 쉽게 고치거나, 훼손되지 않는 점, 세운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다는 점은 늘 학계의 주목을 받는 금석문만의 큰장점이라 할 수 있다. 중원 고구려비, 단양 적성비(赤城碑)와 같이 고대의 금석문은 당시의 역사적인 사실을 그대로 전해주어 우리나라의 국정 교과서를 다시 쓰게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금석문은 재질이 귀하지도 않고, 크지도 않으며, 아름답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국보, 보물 등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또 역사 사료의 의미에 있어서도 문서화된 서지류(書誌類) 문화유산의 경우 후대의 역사적 평가에 따라 그 내용이 변경될 수 있으나 금석문은 수백, 수 천년의 기록이 원형대로 이어온다는 점은 너무도 소중한 문화유산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소중한 문화유산 금석문이 1990년대 이후 급속히 훼손 되고 있다. 대부분 보존장치가 없는 비문에서 이러한 상황이 뚜렷이 진행되고 있는데 특히 옥개석(屋蓋石) 없이 이수, 비두로 이루어진 신도비에서 이러한 훼손의 속도가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신도비의 제목 글씨인 두전(頭篆) , 전서는 물론이고 비신의 비문이 환경오염으로 인한 산성비로 돌이 마모됨으로써 비문이 훼손되고 있는 것이다. 한번 훼손되거나 마모된 금석문은 다시 복원될 수 없다는 점에서 빠른 보존대책이 필요한 것이다. 이제 금석문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와 함께 그 보존대책을 강구할 때가 되었다. 금석문의 가장 좋은 보존방법은 산성비 등으로부터 비석을 보존할 수 있도록 비각(碑閣)을 세 운 뒤 더 이상 훼손이 이루어지기 전에 탁본으로 원형을 남기며 금석문 책자를 제작하여 본 모습대로 보존하는 일일 것이다. 빠른 속도로 변모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에게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오래 전부터 전해주고 있는 금석문 문화재는 우리가 시급히 보존 해야할 너무도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정동일.고양시 문화재 전문위원

천자춘추/아직도 이 땅에는...

어김없이 성탄은 왔다. 종교인이든 아니든 저마다 성탄을 즐기고 있다. 예수와 관계없는 사람이 어떤 목적으로 성탄을 즐기든 이에 토를 달고 싶진 않다. 교회마다 성탄 축하곡을 부르고 선물을 주고받고 그야말로 축제인 것 같다. 그런데 왜 기독교가 성행하면서, 기독교 문화가 번성하면서 교회는 엄청 늘어나는데 종교지도자들은 더 좋은 교육을 받고, 더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육성되는데, 사회는 더 병들고 사람마다 마음은 더욱더 공허해져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교회에는 이 땅에 오신 예수의 처음 그 모습 그대로 계시는 걸까. 지금도 교회에서는 성탄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데, 이 땅의 어딘가 수많은 곳에서는 아침 점심 저녁을 라면으로 때워 라면가락처럼 누렇게 고들고들 시들어가는 아이들이 동서남북 곳곳에 퍼져있다. 그래도 희망이나마 품고 기약도 없는 내일을 꿈꾸는 수많은 이 땅의 아이들이 있는데, 성탄을 물질적 축제로 내 마음의 위안을 받는 축제로만 보내는 교회를 보면 진정 그곳에 2000여년 전에 사랑을 품고 마굿간에 오신 예수가 그대로 계신지 궁금하다. 대장간에 망치가 없듯이 교회에는 참사랑의 예수는 없고 종교지도자만, 교리만 있는 것이 아닌가. 혹시 예수가 있다 해도 예수는 십자가에서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인류구원을 위해 죽으셨는데 교회는 가시면류관 대신 금관을 씌워 놓고 교회 속에서만 예수를 즐기는 것은 아닌가. 머리 둘 곳 없이 떠도는 삶을 사신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살 수 없나요’ 라는 찬송을 하면서도 지상천국을 그리워하는 이기적인 기도만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명이 있는 신앙은 간데없고 세속화된 신학만이, 기독교문화만이, 기독교철학만이, 기독교사상만이, 기독교교육만이 번성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를 위해 교회와 종교지도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조직과 종교지도자를 위해 예수를 수단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직도 이 땅 구석구석에 라면가락처럼 누렇게 고들고들 시들어가는 아이들이 있는 한 이 축제의 성탄절에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서 기도하러 기도실에 갔지만 말 한마디 못하고 발이 저려 그냥 나온다. 기름진 배를 쓸면서 살찌는 것을 걱정하며 성탄을 축하하는 나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김재평.대림대학 전자정보통신과 교수

독자투고/언론 선거보도 '정당 정책.공약' 위주돼야

언론과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현대정치를 미디어정치라고 까지 한다. 이는 언론이 정치와 국민사이를 연결시켜주는 가장 효과적이고도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매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와 언론의 관계는 승자와 패자가 있게 마련인 선거철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유권자 대부분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신문과 TV로부터 쏟아지는 엄청난 정보를 통해 후보자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을 형성하고 결정을 내린다. 그런데 언론은 선거를 후보자나 정당의 정책대결의 장으로 이끌기 보다는 선거운동이나 전략 또는 우월의 보도에 치중함으로써 유권자로부터 합리적 판단의 기회를 뺏고 있는 경향이 있다. 즉 언론이 후보의 지연이나 학연·혈연등을 부각시키거나 ‘격전표밭’ ‘열전현장’등의 표제아래 인기도나 유세장의 청중수 같은 표피적인 내용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흥미위주로 과장보도하고 있다는 학계의 지적도 있다. 언론이 먼저 나서 각 후보등의 정견과 정책을 알아내어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게 한다면 정치권 역시 정책개발에 비중을 둘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언론의 역할 재정립이 꼭 이루어져야 한다. 또하나 우리 언론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공정성 제고가 아닌가 한다. 이기고 지는 것이 분명한 선거에서 언론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언론보도에 대해 독자나 시청자들은 ‘언론사들이 겉으로 표방하는 엄정중립과는 달리 기사의 행간, 말의 뉘앙스, 지면이나 화면의 구성, 사진의 배열, 방송시간대의 배정, 방송시간의 장단 등에서 한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한다. 특히 선거보도를 인기도, 청중수 등 흥미위주에서 탈피하여 유권자들에게는 후보자 판단 기준의 제공차원에서, 후보자간에는 공정경쟁의 대결장을 마련해준다는 차원에서 정당의 정강·정책이나 후보자의 공약사항을 보도의 초점으로 해야만이 공명선거가 실현될 수 있고 독자와 시청자들로부터 신뢰를 얻어 언론의 위상도 높아질 것이다. /최왕섭·의정부시 선관위

12월 26일 경기만평, 당구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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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인천시의원들의 도덕성 해이

인천시의회 일부 의원들이 연구활동 명목으로 수천만원의 예산을 지원받아 친·인척에게 인건비로 지급하거나 해외 시찰 때 가족을 동반한 사실이 드러났다. 물의를 일으킨 시의원들의 도덕적 해이가 참으로 심각한 수준이다. ‘몰염치’가 따로 없다. 도대체 내년 유급제를 앞둔 지방의회에서 왜 이런 부조리가 자꾸 발생하는 지 개탄스럽다. 비록 일부라고는 하지만 의원들의 이 같은 행각은 전체 인천시의회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킨 부조리다. 문제의 시의원들이 의원연구활동을 핑계로 귀중한 세금을 악용한 방법이 지능적이어서 더욱 공분을 느낀다. 만일 이번에 밝혀지지 않았다면 계속 혈세가 낭비됐을 것 아닌가. ‘치매노인 복지서비스의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자신들의 인건비로 각각 80만원씩, ‘장애인 복지를 위한 생활체육 활성화에 관한 연구’를 한 전의원도 70만원을 인건비 명목으로 썼다. ‘강화군 관광수익의 활성화 방안’을 연구한 모의원은 매달 30만원씩 5개월간 150만원을 친·인척에게 인건비로 지출했는가하면, 2박3일간 일본의 도시를 집단으로 방문하면서 몇몇 의원이 가족들을 동반해 관광성 해외여행을 즐겼다고 한다. 낭비한 예산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다. 감시자인 시의원이 되레 낭비했으므로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더구나 인천시의회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의원연구 활동경비 지원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이는 의원들이 의정활동 과정에서 요구되는 정책개발 및 연구활동을 보완하기 위한 취지에서 도입한 제도다. 그런데 연구활동 명목의 예산을 다르게, 그것도 시의원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유용했다. 특히 지난 23일 열린 의원연구활동 결과 심사위원회의 경우 객관성이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8명의 위원 중 4명이 현재의 논란에 직접 관계돼 있는 의원이란 점에서 그 객관성은 인정받기 어렵다. 연구활동 결과 보고에 대한 심사를 전면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함은 물론이다. 따라서 연구활동비 자진 반납, 의장단의 도의적인 책임을 추궁한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 인천경실련 등 시민단체들의 주장은 타당하다. 오늘 열리는 의원총회에서 이 문제를 엄중히 처리할 것을 촉구해 둔다.

바람몰이를 자청하고 나선 ‘대통령’

“내년 총선에서 민주당을 찍는 것은 한나라당을 도와 주는 것…” 한나라당의 타이타닉호 비유 등, 이런 노무현 대통령의 청와대 발언은 심히 적절치 않다. 이는 총선출마를 위해 사표를 낸 박범계 전 청와대 비서관 등 6명에 대해 격려할 수 있는 덕담의 수위을 넘어섰다. 마치 열린우리당 총재를 방불케 한다. 여당 대표일지라도 그렇다. 당 대표실이 아닌 대통령 관저에서 대통령으로서 할 얘기가 못된다. 그러나 정치권끼리의 문제이므로 여기서 더 언급할 생각은 없다. 정작 문제인 것은 대통령의 ‘바람론’이다. “선거는 구도도 중요하고 바람도 중요하다”면서 “내가 바람이 일도록 하고 여러분에게 득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전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총선을 공명정대하게 치르겠다”는 얼마전의 대통령 말을 믿기가 심히 어렵다. 사실상의 여당이라는 열린우리당을 위한 바람몰이를 대통령이 자청하고 나선다면 그 역시 선거운동이다. 한쪽의 주장노릇을 노골적으로 들고 나오는 심판을 관객더러 믿으라는 것은 무리다. 다가오는 총선 분위기의 혼탁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 간과키 어려운 것은 대통령의 바람이란 것에 대한 인식이다. 선거에 바람이 있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바람은 어디까지나 이성보다는 감성에 치우친다. 지각적 판단이 아닌 감각적 느낌인 것이 바람이다. 이러므로 대중의 감각적 자극을 위해 부단히 작용하거나 쇼맨십을 일삼는 인기몰이가 횡행하기도 한다. 대통령은 아마 지난 대선에서 당선된 게 바람몰이가 상당히 주효했던 것으로 여기는 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도 알아야 한다. 당시 노 후보를 찍은 것을 후회한다는 유권자가 40%에 이른다는 어느 여론표본조사 결과가 보도된 적이 있다. 선거에서 바람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대통령이 총선에서 일으키겠다는 바람이 뭣인지는 아직 잘 알수는 없으나 무슨 착각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든다. 민중을 설복시키거나 감동케하는 데는 진실 이상으로 더 좋은 왕도는 없다. 좀 더 겸손하고 좀 더 솔직하면서 측근의 부정과 그간의 실패를 자신의 책임으로 인정하는 가운데 가시적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바람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상지상책임을 알아야한다. 대통령은 “ (선거구도에) 이대로는 안된다는 자연스런 정서가 생겨야 바람이 불게된다”고 말했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생각은 이미 민중의 정서로 싹터있다. 바람이 자칫 부메랑이 될 수 있는 점을 대통령은 직시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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