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의 벽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1886~1947)은 1918년 중국 상해에서 청년 동포들을 규합하여 민단을 조직, 광복운동의 터전을 마련하였고 신한청년당 총무간사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1919년 3월 임시정부 수립에 가담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을 역임하였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이 돼 언론을 통해 항일운동을 하였다. 1934년 조선체육회장에 취임하였으나 1936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말살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사가 폐간되자 사장직을 물러났다. 1944년 9월 일본의 패전을 예상하고 조선건국동맹의 지하조직을 전국적으로 확산, 그 위원장에 취임하여 광복에 대비하였으며 10월에는 출생지 경기도 양평 용문산 속에서 농민동맹을 조직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그 위원장이 되었고, 9월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 스스로 부주석에 취임하였다. 이어 10월에는 인민당을 결성, 당수직에 앉았다. 몽양은 1946년 10월15일 신민당과 공산당과의 공동 명의로 ‘좌우합작지지’ ‘입법기관설치 반대’라는 3당합동 결정서를 발표하고 11월 사회노동당을 조직하였다. 1947년 5월 사회노동당을 근로인민당으로 개편, 밖으로는 영국 노동당좌파, 안으로는 좌우 중간노선을 모색하였다. 1947년 7월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이라는 19세의 청년으로부터 2발의 권총사격을 받아 절명했다. 몽양에 대한 소개를 보면 이희승 편저 국어대사전에 독립운동가·언론인으로, 민족대백과사전엔 독립운동가·정치가로 기재돼 있다. 그러나 정작 국가보훈처에선 몽양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중도좌파’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몽양의 후손들이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냈지만 ‘아예 심사를 안했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일제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인정해 1995년 이동휘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 적이 있지만 광복 이후까지 사회주의 색채를 유지한 경우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독립운동 여부가 독립유공자 서훈의 기준이 돼야 할텐데, 분단된 현실이 안타깝다. /임병호 논설위원

기고/경기도는 봉인가

세상을 살다보면 참으로 말도 안되는 웃기는 이야기가 있다. 서울시의 원지동 추모공원의 포기와 국립의료원 유치계획 발표가 바로 그것이다. 서울시는 최근 민원을 이유로 서초구 원지동 추모공원을 포기하고 경기도가 유치하려던 국립의료원을 유치하고 이곳에 11기의 화장로를 설치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서울시는 당초 수많은 시민·종교단체와 전문가들의 의견수렴을 거쳐 서초구 원지동에 화장로 20기와 납골당 5만위를 건립하겠다고 밝힌바 있다. 그러나 원지동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사실상 이를 백지화하고 국립의료원을 유치하고 화장로 11기만 설치한다고 돌아서기에 이르렀다. 서울시의 추모공원조성사업은 늘어나는 화장 및 납골수요를 충족한다는 의미외에 납골시설은 혐오 시설이라는 편견을 불식시킨다는 매우 의미 있는 사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이를 포기하고 국립의료원을 유치하는 대신 이곳과 경기도관내에 84기의 화장로와 납골시설을 설치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25개 자치구에 납골시설을 분산 설치토록 할 계획이라면서 자치구에서 2005년까지 납골시설을 건립할 경우 사업비의 100%를, 2010년까지 건립할 경우 50%를 지원한다는 사탕발림까지 하고 있다. 이렇게 되자 서울의 각 구청에서는 경기도의 각 시·군에 추파를 던지며 장사시설을 공동으로 건립하자는 유혹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그렇다면 서울시는 지역주민의 이기주의에 떠밀려 추모공원을 백지화하고 골치 아픈 문제를 자치구에 떠넘기려는 정말 보신주의적인 작태를 보이고 있다는 비난을 자초하고 있다고 하겠다. 더구나 경기도나 파주시와 사전 협의도 없이 파주시 용미리에 있는 서울시립 묘지내에 10만명 규모의 유택(幽宅)공원을 조성하겠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죽하면 서울의 경실련에서도 서울시를 성토하고 나섰겠는가. 이러한 행태에 대해 경기도 즉각 대응하고 나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경기도는 우선 서울시에서 원지동 추모공원을 백지화하고 아무런 사전 협의없이 파주지역에 대규모의 유택동산을 조성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반대의견을 분명하게 전한 바 있다. 또한 혐오시설을 경기도에 떠넘기고 의료시설을 가져가려는 것은 전형적인 행정이기주의라며 중앙정부에 조정신청을 제출하는 문제를 심각히 검토하고 있다. 서울시와는 달리 경기도에서는 각 시·군에 있는 기존 공설묘지를 납골시설로 전환하거나 공원화 하는 계획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1천만 도민들의 장사수요를 충족시키고 질 높은 장사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가칭 경기도립장사시설을 조성키 위해 현재 타당성 용역을 실시 중이다. 도립 장사시설은 20개의 화장로와 12만위 규모의 납골시설, 빈소수 10실 규모의 장례식장과 매점, 식당, 휴게실, 휴식공원은 물론 농·특산물 판매전시장을 갖춘 초현대식으로 건립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중이다. 누가 뭐래도 자치단체에 있어서의 고객은 바로 주민이다. 기업이나 종교단체·시민단체는 물론 각종 법인 등의 모든 객체들도 빼놓을 수 없는 고객이다. 그렇다고 집단민원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주민의 신뢰를 확보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공익의 실현과 지역사회와 국가발전을 위해 어떻게 일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대승적인 차원에서 행정·재정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하더라도 장기적인 발전계획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자치단체의 의무이자 시대적 소명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장사정책은 지자체가 해결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책무라는 사실에 이론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회피하려는 행태는 있을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될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다. 경기도는 더 이상 서울시의 봉이 아니다. 지난날 서울시가 마치 작은집 취급하던 경기도는 이제 서울을 능가하는 전국 최대의 광역 자치단체로 성장했다. 시대가 변화를 낳는다면 서울도 이제 변해야 한다. /홍승표.시인.道가정복지과장

천자춘추/보육위원의 역할과 기대

서울시 보육정보센터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모 구립 어린이집의 재위탁 관련 글을 읽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 본인이 재직하고 있는 대학교에서 경기도내의 한 어린이집을 위탁받은 적이 있다. 재위탁 시기가 되어 재위탁 서류를 제출하라는 통보를 받아 제출하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공개위탁으로 변경되었다고 하더니 심사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이번에 제외시켜야 한다면 전에는 왜 위탁을 주었느냐고 물었지만 믿기 어려운 어이없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 당시 많은 학부모가 ‘시장에게 바란다’와 ‘자유게시판’ 등 인터넷에 항의 글을 올리고 서명을 하여 시에 보냈다. 학부모 대표들이 시장과 면담을 하고 심지어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민원을 넣는 등 거부의사를 밝혔어도 보육위원들이 결정한 사항이라고 책임을 보육위원에게 넘겼다. 이런 과정이 지금 서울시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보육위원은 각 시나 구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복지 및 유아교육 전문가, 시 소재 보육시설의 대표, 보육시설에 재직중인 보육시설종사자 대표, 보육시설에 영유아 또는 아동을 위탁한 보호자 대표, 보육업무 및 재정업무를 담당하는 5급 이상의 관계공무원으로 일견 구색은 잘 갖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위원들은 담당공무원이 임의로 뽑은 사람들이다. 보육위원 선정에서부터 포장은 그럴 듯 하였으나 실제로는 얼마든지 시나 구의 입김이 작용할 수 있다는 데 문제점이 있다. 보육위원회가 국공립어린이집의 위탁을 결정한다는 것은 정말로 좋은 취지이고 바람직한 제도이다. 그러나 아무리 잘 만들어진 제도라 할지라도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보육의 질을 높이는데 큰 기여를 할 수도 있고, 시나 구의 입장만을 대변해주는 방패막이용의 허울좋은 보육위원회가 될 수도 있다. 객관적이고 올바른 기준에 의하여 보육위원이 선정되어 합리적인 평가내용과 배점으로 위탁을 결정한다면 보육위원회의 진가가 발휘되고 보육의 질도 향상 될 것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전국의 국공립 어린이집 위탁, 재위탁 과정이 좀더 객관적이고 공정하며 투명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원주.협성대 아동보육과 교수

독자투고/실효성 없는 '차없는 거리' 반대

과천시가 주말에 차없는 거리를 선언했다. 10월말까지라 하지만 별 효과를 못보고 있다. 시에서 심도있게 검증했어야 했다. 문화 행사를 싫어하는 시민이 있겠는가마는 장소 자체도 협소하고 과천은 상권 자체가 협소하다. 안양시 1개동만 못하는 상권과 차없는 거리의 장소가 매우 협소하다. 굳이 차없는 거리의 명분을 내세우지 말고 동별 아니면 과천시에 골고루 문화 행사를 나눠서 하는게 좋겠다. 시에서 예산을 들여 문화 행사를 리더하지 말았으면 한다. 토요일 오후 뉴코아 앞에서 불우이웃돕기형 노래부르기 행사를 예총 산하에서 열고있고, 코오롱 앞마당에선 매주 토요일 마다 음악회를 여는데 굳이 차없는 거리라는 모방을 흉내낼 필요가 없다고 본다. 시는 중앙공원 무대를 학생들 기를 펴는 무대로 이끌어 가고 시민회관 뜨락에서 무대를 펼치고, 주암동 일대와 문원2단지에 로데오 거리를 조성해 생동감 넘치는 문화 사업을 추진하기 바란다. 굳이 별양동 상권을 지목해서 사업을 강행하지 말기를 바란다. 혜택 못받는 주암동 그리고 문원쪽에 특설 무대를 동 자체에서 개발하고 젊음과 낭만이 어우러지는 문화 행사를 펼치기 바라며 차없는 거리의 문화 행사는 접는게 낫다. 실리위주의 문화 행사를 펼쳐 나갔으면 싶다. /인터넷독자

8월 22일 경기만평, 당구公

{Image}

무산된 빈곤층 지원 예산 반영돼야

시작단계에서 제동이 걸린 빈곤층 지원은 재추진돼야 한다. “예산당국이 빈곤층에 대해 지원을 시작하면 해를 거듭할 수록 돈이 더 들어가는 점을 걱정해 반영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보건복지부는 말하고 있으나 실은 애당초 계획부터 어설펐다. 숫자(320만명)도 얼추 추정했다. 질병 현황 등 생활 실태 조사도 안돼 있었다. 극빈층(기초생활보장 수급자)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빈곤층(4인가족 최저생계비 월 122만원)에 머물고 있는 지, 아니면 다시 극빈층으로 전락했는지 추적관리가 안돼 있었다. 의료비 지원 일정도 지난 4월 대통령에게 보고할 때는 ‘2003 ~ 2004년 50만명’이라고 했다가 지금은 ‘향후 5년간 연간 10만명씩 확대’로 달라졌다. 정책 추진이 이렇게 불분명해 예산당국이 요구를 보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 빈곤층의 처지는 매우 심각하다. 극빈층보다 벌이가 약간 낫다는 빈곤층에게 당장 절실한 복지혜택은 의료비 지원이다. 빈곤층에 대한 복지제도는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 상태다. 전부는 극빈층에게, 전무는 빈곤층에 해당된다. 135만명에 달하는 극빈층에게는 생계비, 의료비에서부터 집 수리비까지 20여가지의 혜택이 있지만, 빈곤층 320만명에게는 경로연금, 모부자 가정 아동 양육비 등으로 51만명에게 연간 1천800여억원이 지원되는 것이 전부다. 가장 큰 차이는 의료비다. 극빈층에게는 연간 2조3천억원을 지원하지만 빈곤층은 한푼도 없다. 월 소득이 최고 20만원 더 많거나 부양능력이 있는 자식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보건복지부는 내년부터 고혈압·당뇨병 등 만성질환자 7만3천명과 희귀·난치병 환자 2만7천명 등 10만명에게 우선적으로 의료비 1천241억원을 지원해 무료로 진료받거나 일부(진료비의 20%)만 부담하도록 할 방침이었다. 400억원을 들여 1만여명에게 자활 근로용 일자리를 제공할 계획도 세웠다. 이같은 빈곤층 지원에 대한 복지부의 내년 예산안은 계획을 보완해서라도 필히 반영돼야 한다. 예산 당국의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해둔다.

뿔뿔이 ‘지정市’보단, 큰 힘의 ‘특별道’

지정시 추진은 재고돼야 한다. 수원·안양·부천·안산·고양·성남 등 도내 6개 대도시가 추진하는 준광역시 성격의 지정시 승격은 긍정적 요인보다 부정적 요인이 훨씬 더 많다. 행정업무의 자율화엔 다소 접근하는 측면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지정시가 되어야 주민에 대한 사회복지 등 삶의 질 향상이 이루어 진다는 논거는 허구다. 다른 광역시 사회복지 행정이 경기도 보다 못하면 못했지 더 나은 게 없다. 가령 지역 유지들은 도단위급 각종 관변단체장이나 시민단체장이 되어 좋을 지 모르지만 일반 주민들은 오히려 세 부담만 더 무거워 질 뿐 아무 실익이 없다. 도내 대도시는 비수도권 지역과 달라 인근과의 수도권 생활이 보다 밀접해 인접 자치단체와 연계되는 광역행정의 요소가 갈수록이 많아진다. 지정시 난립은 이에 필연적으로 행정구조상 업무협조의 효율을 떨어 뜨린다. 자치단체의 소단위 규모에서 대단위 규모를 지향해 힘을 키우고자 하는 자치선진국의 합병 추세에도 역행된다. 지금은 지정시 수준의 인구가 6개시 이지만 조만 간에 자꾸 늘어 ‘지정시공화국’ 투성이가 되면 경기도의 정체성이 상실된다. 기전사회에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지정시가 아니라 특별도 제정의 추진이다. 예컨대 대도시 자치단체 공무원 정원이 다른 시·도에 비해 월등하게 적음으로써 겪는 부당성을 개선하는 특례인정 방안 또한 특별도 제정이 순리다. 행정업무의 자율화 증진 역시 특례인정의 특별도 제정을 통해 기대할만 하다. 법에 없기는 특별도나 지정시나 마찬가지지만 지정시를 위해 법을 고치기 보다는 특별도 제정을 위해 법개정을 서두르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경기도는 서울특별시와 버금가는 세계적인 광역자치단체다. 이런데도 기껏 인구 100만여명의 광역시와 동등한 지위의 광역자치단체인 것은 부당할 뿐만이 아니라 국가경쟁력에도 흠결이 된다. 마땅히 특별시에 준하는 특별도의 제정이 있어야할 시기다. 걸핏하면 나오는 분도론도 심히 당치않은 터에 이제는 지정시 할거론까지 나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나눠먹기 식의 소규모 광역단체로는 아무런 공익적 가치가 없다. 드넓은 시야가 요청된다. 우리 모두의 지역사회, 지역주민을 위해선 크게 뭉쳐야 한다. ‘경기특별도’ 제정의 추진에 큰 인식이 있기를 바라고자 한다.

매국의 극치

창덕궁(昌德宮·사적 제155호)은 처음에는 이궁(離宮)으로 창건됐다. 그러나 임진왜란때 정궁(正宮) 경복궁이 소실된 후 복구될때까지 300여년간 역대 임금이 이 궁에서 정사를 봄으로써 본궁 구실을 했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관대궐’ 또는 ‘동궐’이라고 불렸다. 조선 초기 제3대왕 태종이 즉위하여 도성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조성을 명하여 1405년(태종5)에 완성됐다. 이때 도성에는 이미 종묘(宗廟)·사직(社稷)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조성돼 있어 이 궁은 하나의 별궁(別宮)을 도성내에 두기 위하여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하지만 제9대 성종이 즉위하고부터는 왕이 창덕궁에 머물면서 정사를 보는 일이 많아졌고 특히 연산군은 재위중 주로 이 궁에서 정사를 봤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때 큰 화재를 당했으나 1647년(인조25)에 옛 모습으로 복구됐으며 효종·현종·영조가 창덕궁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점한 지 2년 뒤인 1912년 창경궁(昌慶宮)과 함께 창덕궁인정전(仁政殿)과 후원(後苑)을 일반에게 관람하도록 하여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을 실추시켰다. 광복 후에도 시민에게 개방되었으며 1980년 그동안 훼손되었던 궁내시설을 정비, 관람을 제한하여 옛 궁궐의 면모를 지켜 오고 있다. 이 창덕궁을 한·일병합에 앞장선 친일파의 거두 이완용(1858 ~ 1926)이 3·1만세운동 직후인 1920년과 이듬해에 잇따라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에게 일본 왕실에 헌납해 이를 별궁으로 만들자고 요청했다는 문건이 얼마전 일본 국립공문서관에서 발견됐다. (일본이 경성에) 새로운 별궁을 만든다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고 시간 또한 오래 걸리는 일임을 지적하면서 당시 창덕궁에 거주하던 순종을 아버지 고종이 살던 덕수궁으로 옮기는 대신 창덕궁을 (일본왕족의)별궁으로 개조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이완용의 이런 요청에 대해 사이토 총독이 오히려 “(조선인들의) 반발문제를 야기할 우려가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고 거절했다니 아무리 고인이지만 일본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입증하려던 이완용의 ‘친일 매국행위’가 생각할수록 가증스럽다. /임병호 논설위원

목요칼럼/'데모천국'.'데모망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서울 도심지 남대문통 데모 군중에서 이런 외침이 백주에 나왔다. 국회의사당이 데모대에 피습당해 개회 중이던 국회의원들이 이 복도 저 복도로 피해 도망 다녔다. 당시 국회의사당은 지금 서울시청 별관으로 쓰는 태평로 건물이다. 1960년 자유당(이승만 대통령) 정권의 3·15 정·부통령 부정선거 규탄이 독재정권 타도로 번진 4·19 유혈 민중의거는 이승만의 하야를 가져왔다. 그해 6월 대통령의 장기 집권과 독재에 혼난 것을 경험삼아 헌법을 내각책임제로 개헌, 7월12일엔 장면(총리) 정권의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그러나 집권당인 민주당은 민생 등 당면 과제는 뒷전인 채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정쟁으로 편할 날이 없었다. (장총리는 신파였으며 당시 김영삼은 구파, 김대중은 신파에 속했다.) 정부란 게 이 모양이다 보니 연일 데모 투성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데모로 날이 새고 데모로 날이 지는 가운데 “인민공화국 만세!” 소리가 나와도 잡혀가지 않고, 국회의사당을 습격해도 당하기만 할 정도의 무법천지 세상이 돼버렸다. ‘京畿道史’(경기도사)는 ‘제2공화국의 붕괴’ 대목을 ‘치안부재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에 사회는 크게 불안하게 되었으며 연일 항의집회와 시위가 끊일 사이 없어 집회와 시위의 범람을 초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데모 덕에 정권을 잡은 장면 정부는 그래선지 10개월만에 역시 데모 바람에 망하고 말았다. 이듬해 1961년(육군소장) 박정희가 5·16 군사혁명을 일으켜 데모가 자취를 감추자 ‘차라리 잘됐다’는 것이 당시의 대체적 사회감정이었다. 5·16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불행하게도 이같은 대중의 긍정적 정서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SBS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정치깡패로 한창 득세하고 있는 이 아무개 등이 ‘나는 깡패입니다’라는 팻말을 목에 걸고 서울 도심지 거리를 조리 돌림당한 끝에 혁명검찰부와 혁명재판소를 거쳐 처형(사형)된 게 그 무렵이다. 1979년 10·26사건으로 박정희가 시해당한 이듬해 이른바 유신철권이 철폐되고 나서 ‘서울의 봄’이 한창이었다. 유신독재에서 되찾은 민주주의가 3김씨를 중심으로 만발한 것 까지는 좋았으나 데모천국의 사태가 재발되었다. 이 혼돈의 틈새를 타고 세력을 키운 것이 전두환 노태우 (두 육군소장) 중심의 신군부였다. 참으로 기이한 독재와 데모의 악순환이 이 나라 정치사의 한 축을 이루었다. 데모 열풍은 도져 지금도 드세다. 물론 옛날 데모와는 다르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염려된다. 위도 원전폐기물처리장, 미군 용산기지 평택 이전 등 국책사업에서 시·군이 길을 내는 것에 이르기까지 뭐 하나 하는 것마다 반대에 부딪히지 않는 게 없다. 과천 정부청사나 지방자치단체엔 데모가 끊일 날이 드물다. 데모마다 ‘결사반대’를 내건다. 그같은 데모가 과연 죽음을 각오할 만큼의 명분을 지녔다고는 믿기지 않는다. 고액 연봉의 노동자들,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들, 통일운동가란 선동자들, 극우세력 등 이밖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데모할 궁리만 하는 세상이 됐다. 물론 데모의 이유가 다 부당하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다 정당하다고 할 수도 없다. 문제는 떼 쓰기로 밀어붙여야 뭐가 돼도 된다고 보는 굴절의식에 있다. 원칙이 변칙에 의해 파괴돼 가고 있는 게 두렵다. 세상을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데모도 민주주의 한 수단이라면 데모의 방종보다는 책임이 더 큰데도 방종만 있고 책임은 실종됐다. 명색이 집권당이라는 민주당은 신주류·구주류로 나뉘어 싸우는 게 마치 옛 민주당 신·구파의 이전투구를 방불케 한다. 이 정권은 데모문화의 품질과 품격을 재정립해야 할 책임이 있다. 데모의 혼란이 보다 나은 사회문화의 성숙으로 가는 과정일 지라도 부정적 실험 과정은 되도록 빨리 끝내는 것이 국익이다. 이러다간 ‘인민공화국 만세’소리가 (데모 군중서) 또 나오고,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데모대에게 짓밟힐 수도 있다. /임양은 주필

천자춘추/인공기와 대통령 사과

지난 19일 이동중에 뉴스를 들으며 또 나라가 시끄럽겠구나 생각을 했다. 대통령의 인공기 훼손 관련 유감표명에 대해 우리 국민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 것인가. 이로 인해 새로운 갈등이 시작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되었다. 저녁식사중 참석자 대부분(일반국민)도 “내일 신문이 볼만하겠어”라며 걱정의 뜻을 내비쳤다. 최근 우리나라의 집단간 내부 갈등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모 언론기관 조사에 의해서도 알 수 있듯이 국민 다수(80%)는 갈등이 심각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북한 문제에 대한 우리 내부의 갈등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으며 이번 8·15집회도 이의 연장선인 것이다. 이런 갈등이 심각한 상황에서 북한이 문제를 제기하고 대통령이 직접 사과성 유감을 표명했으니 우리 내부의 갈등 증폭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북한과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지만 세계에 유례가 없이 서로 전쟁을 했고 그 상처가 아직 치유가 되질 않았다. 냉전이 끝난 지금 우리는 같은 민족끼리 계속 싸워야하는가. 과거를 털고 하나의 민족으로 협력하고 도와야 하는가. 협력해야한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해야하는가. 이를 위한 우리정부와 국민의 역할은 무엇인가. 또한 북한은 어떠한 노력을 해야하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질 않았고 정치권에서도 합의를 위한 노력보다는 항상 대립의 각을 높이고 있어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다. 우리 국민은 이제 북한을 적국이라기 보다는 협력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북한을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수가 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북한에 엄청난 지원을 하면서도 너무 끌려다니고 있고, 북한은 얻으려고만 하지 진정 남한에 협력하는 자세가 덜되었다고 생각하기에 우리 국민의 불만이 큰 것 같다. 이번 대통령 사과도 그 충정은 이해할 수 있으나 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리고 북한은 툭하면 약속을 깬다는 생각을 우리 국민에게 더욱 심화시킬까 걱정이다. 우리 정부는 대북 관련 정책 수립시 국민적 합의를 얻는 일과 북한에 요구할 것은 요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며, 북한은 남한에 대해 적극 협력한다는 자세의 전환이 있어야 남북교류는 힘을 얻을 수 있다. 국민의 지지가 뒷받침되는 정책이어야 그 생명은 오래 간다. 우리 국민도 일부겠지만 이제는 성조기이든 인공기든 국기를 태우는 과격한 행동은 국가 이익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장선.국회의원(민주.평택 을)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