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원망하지 말라, 炎凉世態

지난 2월26일에 있었던 일이다. 민주당 김홍일(金弘一)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 입장하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퇴임한 지 불과 이틀만의 일이었다. 평소 걸음걸이가 불편한 그는 오후 2시 민주당 의원총회 참석을 위해 수행원 2명의 부축을 받으며 입장했다. 하지만 의총이 끝나고 맞은편 본회의장으로 이동할 때는 혼자였다. 아슬아슬하게 몇발자국 발걸음을 떼던 그가 갑자기 쓰러지듯 앞서가던 2명의 동료의원 등을 짚었다. 왼쪽은 이○○, 오른쪽은 설○○의원이었다. 김의원은 나름대로 반가움을 표시하려는 제스처를 보였다. 하지만 이·설 두 의원은 표정이 굳어졌다. 별다른 부축을 할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두 의원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5m 정도 끌려가다 결국 힘이 빠져 스르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순간 뒤에 있던 수행원 2명이 와서 부축했다. 그러나 두 의원은 곧바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본회의장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곁을 스쳐 지나가는 민주당 의원들이 여럿 있었지만 힘들게 바닥에서 일어서는 김의원을 부축하거나 눈 여겨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홍일 의원에겐 신체장애가 있다. 우선 오래 걷기가 힘들다. 자주 넘어진다. 발음도 부정확하다. 열 마디를 하면 반정도 알아 들을 수 있다. 3년 전인가, 목포에서 열린 전국예총지도자대회 때 김의원이 한 환영사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의 병명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본인에게 물어봐도 대답을 안한다. 주변 사람들은 군사정권이 가한 고문 후유증이라고 한다. 1980년 광주항쟁 당시 그는 옥중에서 자살을 기도했다. 조사실 책상에 올라가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받으며 뛰어 내렸다. 그러나 죽지 않고 살았다. 대신 목을 크게 다쳤다. 그로부터 15년 뒤 그의 몸엔 이 같은 변화가 찾아왔다. 김의원은 두번이나 수술을 받았다. 1988년 첫 수술은 국내에서 받았다. 척추를 열고 신경을 손 대는 대수술이었다. 그러나 별차도가 없었다. 두번째 수술은 2002년초 미국 UCLA 대학에서 받았다. 4개월에 걸친 치료였다. “바늘구멍만큼씩 좋아지고 있어요” 부인 윤혜란씨의 말이다. 바늘구멍만큼씩 좋아지는 건강, 그것은 김홍일 의원을 지탱하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김홍일 의원은 DJ의 아들로서 대접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특히 정치인들은 그의 신체장애도 모른 척 해주었다. “건강해 보이십니다”는 그를 향한 인사였다. 그러다보니 그는 왕성한 정치활동을 하는 것처럼 세상에 비쳐졌다. 그것이 그를 각종 비리사건의 단골손님처럼 등장시킨 요인이 됐다. 2002년말부터 DJ의 후광이 김의원에게서 사라져 갔다. 우선 점심 약속이 거의 없다. 오전 11시를 넘겨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면 대부분 선약이 있다고 한다. 예전 같으면 만사를 제쳐 놓고 달려왔던 그들이다. 옛날 감옥에 있을 때 분노의 대상은 독재권력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상이 다르다. 그래서 더 외로운 지 모른다. 이제 김의원은 그 말 많은 나라종금 퇴출저지 로비의혹에 연루돼 홍업. 홍걸 두 동생처럼 법정에 설 운명에 처했다. 이미 검찰에 소환된 적도 있다. 지난 6일자 일간지 K신문에 국회 본회의장에서 괴로운 표정의 김의원을 민주당 이낙연 의원이 위로하는 사진이 한 장 실렸다. 다른 의원들은 아마 외면했을 지 모른다. 김홍일, 그는 무엇이 괴로운 것일까. 야당 지도자의 아들로 태어난 과거? 대통령의 아들 신분으로 된 국회의원? 권력은 꿈과 같다. 깨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게 권력이다. 그러나 깨기 전엔 그 이치를 모르는 게 또 권력이다. 알았을 땐 이미 떠나가고 없는 게 권력이다. 한때 ‘황태자’였던 자신을 괄시하는 오늘날 염량세태를 원망하지 말라. ‘황태자 시절’도 빨리 잊어라. /임병호 논설위원

천자춘추/현충일을 보내며

지난 6일은 제48회 현충일로 오전 10시 정각에 전국에서 울리는 사이렌에 맞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빌었다. 1분간의 사이렌 소리는, 초 여름을 알리는 더위와 함께 서민들의 허허로운 마음을 더욱더 짖누르는 불투명한 경제 및 정치지표, 참으로 어쳐구니 없는 대북송금 그리고 극과 극으로 치닫고 있는 교육계와 노동계의 현황과 함께 먼저 가신 호국영령들의 모습이 어우러져 착잡하였다. 6월에 가슴깊이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초연이 쓸고간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세월로 이름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이 노래는 1964년 백암산 비무장지대에 배속된 한 초급장교(韓明熙 서울시립대 음대 교수)가 따스한 석양이 빨간 단풍에 물들기 시작한 초가을 오후 순찰 중에 잡초만 우거진 비무장지대의 양지바른 산모퉁이에서 이끼 낀 돌무더기 하나를 발견하고 팻말처럼 보이는 썩은 나무등걸을 바라보며 그 돌무더기가 어느 무명용사의 죽음을 기리기 위한 전우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을 되살려 1967년에 작사한 것을 장일남선생이 작곡한 것이다. ‘비목’은 그렇게 채 꽃피우지 못하고 산화한 젊은 무명용사를 기리기 위해 탄생된 헌시로, 강원도 화천군에서는 ‘비목’의 발생지인 백암산 기슭에 1995년 비목공원을 조성하고 1996년부터 매년 호국 보훈의 달 6월에 6·25 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순국하신 선열들을 추모하기 위해 비목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비목문화제는 평화적 남북통일을 열망하는 국민 모두의 희망을 노래하는 평화의 자리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넉넉한 모습 뒤편에는 언제나 국난극복의 시련이 응어리져 있다. 국난극복의 여정은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야 할 우리에게 희망의 빛을 이어나갈 확실한 이정표를 제시해 주고 있다. 더 이상 전쟁없는 세계를 위해, 더 이상 아픔없는 세대를 위해 더욱 정직하고 근면하게 생활해야겠다는 마음을 다시 한번 굳게 가져 본다. /선우 섭.경희대 체육학부 교수

6월 9일 경기만평, 당구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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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 지방직화 왠, 평지풍파인가?

대통령 직속 지방이양추진위원회 실무위원회가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시행을 둘러싼 교육계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판국에 적법하지도 않고 시급하지도 않은 ‘국가직 교원 지방직화 ’결정을 내린 것은 이 역시 책상머리 독단이다. 장학관, 교육연구관, 초·중·고등학교장, 교감, 교사 등의 임용관련 사무를 시·도교육감에게 이양하는 것은 교원의 신분을 현행 ‘국가공무원’에서 ‘지방공무원’으로 바꾸는 중차대한 교육제도 변경이다. 당연히 사전에 충분한 토론과 교육계 전체의 공감대를 형성한 후 결정했어야 옳았다. 교육자치를 정착시키고 인사업무의 효율성을 높여 행정 절차를 간소화하기 위해서는 교원의 지방직화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추진위는 밝히고 있으나 지방분권화 정책에 편승해 명분에만 집착한 나머지 현실적 검토를 소흘히 했다. 이에 반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교원의 지방직화는 교원의 사기 저하와 신분을 불안하게 해 교육의 안정을 해칠 뿐 아니라 교원의 시·도간 교류를 불가능하게 한다. 또 지역간 교육격차를 더욱 심화시킬 우려가 크다. 특히 지방자치 단체의 재정자립도가 매우 낮은 상태에서 교원 지방직화를 추진할 경우 신규교원 채용 감소 등 교육환경 악화가 금방 나타날 것이다. 또 지방교육재정의 상당부분을 중앙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에서 교원신분만을 지방직으로 이양하는 것은 교육자치 정책의 우선 순위가 바뀐 것으로 국가가 교육의 책임을 회피하여 지방에 떠 넘기는 것과 다름이 없다. 교육부가“교직사회의 정서상 시기상조 ”라는 이유로 반대하고, 한국교총과 전교조도 한결같이 지방직화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만일 대통령직속 지방이양위원회가 이를 강행한다면 또 한차례 저항에 부딪칠 것이다. NEIS 문제도 아직 진통을 겪고 있는 중인데 느닷없는 교원 지방직화는 그렇잖아도 혼란한 국정을 더욱 부채질 하는 격이어서 중단돼야 한다. 교원의 지방직화는 근본적으로 교원의 구조조정으로 이어져 신분불안과 교육의 질 저하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마땅히 철회돼야 한다.

한·일 정상회담의 ‘외화내빈’

정상회담에 실패는 없다. 이번 한·일정상회담 역시 실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외화내빈을 부인하긴 어렵다. 과거의 대통령들이 방일할 때도 새로운 파트너십이 늘 강조되었고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서 가진 두 나라 정상회담 역시 그랬다. 이번 노무현 대통령의 일본 방문 또한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북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다짐은 지극히 원론적 수준이다. 새로운 말이 아니다. 오히려 고이즈미 일본총리의 시각에 온도차를 발견케 한다. 평화적 해결을 유도하기 위한 추가 조치로 해안봉쇄나 경제제재에 비중을 두는 것은 대화쪽에 무게를 두는 우리 정부 입장과 상치돼 오히려 입지를 좁힌 감마저 없지 않다. 두 나라 정상의 합의도 그 간 피차 입장을 확인하는 원칙론에 불과하다. 예컨대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도 그 시점을 담보잡지 못하고 막연히 ‘체결교섭의 조기개시’라고만 합의했다. 한국인에 대한 입국비자 면제도 한·일국교정상화 40주년 기념 코리아-저팬 축제가 열리는 2005년으로 하자는 우리측 명시요구를 일본 법무성이 반대하여 ‘조기실현 노력’이라는 막연한 문틀이 되고 말았다. 이나마 거론된 것은 저들이 요구한 일본 대중문화의 확대를 우리측이 수용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언제나 합의에 비해 실천이 빈곤했던 한·일 두 나라 정상회담의 결과가 이번이라고 뚜렷이 전전될 것으로 볼만한 근거는 희박하다. 특히 참여정부 외교팀의 취약성은 더욱 불안하다. 두 나라 정상이 회담을 갖는 날이 하필이면 국가의 기일이 되는 현충일이었던 건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일정상 불가피했다는 설이 있다. 또 일본의 재무장을 공식으로 선언하는 ‘유사법’ 통과가 있었다. 외교 관례에 어긋나는 이런저런 사정을 일본측에 미리 조정하도록 했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외교팀의 막중한 책무다. 설사 이런 외교 관례의 격식을 깨고 회담을 강행했다면 그에 상응한 내실이라도 이끌어 냈어야 한다. 과연 그만한 수확이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이토록 무력한 외교팀이 그나마 합의된 구체성 없는 구호성 합의사항의 난관을 얼마나 극복하여 실현해낼 수 있을 것인지 걱정된다. 노무현 대통령의 방일로 일본 기업인들의 한국 투자에 위축이 없기를 한가닥 기대하고자 한다. 그러나 정상회담은 상견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국민의 일반적 시각이다.

6월 7일 경기만평, 당구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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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는 인류 최초의 등대로 알려져 왔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까닭은 높이가 무려 135m에 이르는 데다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건축형태 때문이다. 학설이 분분하지만 둥글게 만들어진 꼭대기에는 커다란 화덕이 있어 항상 불을 지폈고, 그 뒤에는 거대한 반사경이 있어 강력한 빛을 멀리 보냈다는 설이 유력하다. 파로스 등대는 단순히 항로 표지의 구실만 한 것이 아니라 300여개의 방을 가지고 있어 대규모 군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는 성곽이기도 했다. 파로스 등대는 기원전 280년쯤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는 인천에서 서쪽으로 16.7km 떨어진 섬 ‘팔미도’ 에 있다. 팔미도엔 등대지기와 인천방위사령부 소속 군인들만 있고 주민은 살지 않는다. 조선 침탈을 노리던 일제의 강요에 의해 1902년 5월부터 건설을 시작, 이듬해 6월 1일 해발 71m 정상에 높이 7.9m, 지름 2m의 등대를 완공한 것이다. 팔미도 등대는 사연도 많다. 6·25 한국전쟁 초기 북한 수중에 넘어 가자 미극동사령부 주한연락처(KLO) 특공대원들이 상륙, 북한군과 교전 끝에 탈환했다. 감격적인 것은 1950년9월15일 새벽, 등대가 불을 밝히는 가운데 이뤄진 인천상륙작전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암초가 많은 인천 앞바다의 특성상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UN연합군 261척의 함대는 팔미도 등대불이 켜지자 차례로 인천연안쪽으로 진격, 상륙작전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등대불로는 처음에 석유등을 사용했다. 1954년 자가발전시설을 갖춘 뒤 백열등, 수은등, 할로겐등 등을 거쳐 1991년부터는 태양광발전장치를 이용해 불을 밝히고 있다. 100년 애환과 역사를 간직한 이 팔미도 등대가 내년초 바로 옆에 들어서는 최첨단 등대에 자리를 물려주고 인천시 지방문화재로 보존된다. 그러나 30여년을 등대지기로 근무한 팔미도 등대소장 허근씨는 오늘밤도 뱃사람의 안녕을 위해 불을 밝힌다. 망망대해, 밤바다에서 등대는 고독을 잠재우고 희망을 일깨워 준다. 지금 우리나라엔 2천40개의 등대가 있다. / 임병호 논설위원

기고/여름철과 식보(食補)

한 여름철은 더위에 지쳐 입맛을 잃기가 쉬운 계절이다. 땀을 쏟곤하여 에너지 보충이 더 긴요한데도 잘 먹지 못하면 생병이 날 수가 있다. 닭백숙 같은 건 원래 이래서 생긴 여름철 별미다. 수박도 충분한 수분을 섭취토록 조물주가 인간에게 계절따라 선물한 여름 식품이다. 입맛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또 있다. 수입 식품의 범람은 뭘 만들어도 예전 맛 같지 않다. 우리 몸엔 우리 농축산물이 좋다는 ‘신토불이’를 마다 할 입맛은 있을 것 같지 않다. 우리 것을 먹고싶어도 웬만한 건 중국산 등 수입품 투성이다. 국산이라도 그렇다. 예를 들어 상추도 앙증스럽고 파란, 그런 토종 상추가 아니고 널따랗게 퍼진 외래 품종 씨앗의 상추는 국내서 생산했어도 완전 국산으로 보기 어렵다. 닭도 놔먹여 벌레 등을 잡아먹지 않고, 돼지는 구정물을 먹이지 않고, 소는 여물과 풀을 먹이지 않고 모두 배합 사료만을 먹여 키우니 토종이라도 옛 토종맛이 날리가 없는 것이다. 농축산물만이 아니다. 생태계 환경은 절묘하여 같은 바닷물 속에서 나는 생선 등 해산물도 국산과 수입품이 다르다. 가령 국산 고등어는 옆구리의 비단 무늬가 선명하고 구울 땐 비린내가 나도 먹을 땐 비린내가 없고 쫄깃 쫄깃하다. 이에 비해 수입 고등어는 옆구리 얼룩 무늬가 희미하고 구울 땐 비린내가 안나도 먹을 땐 비린내가 나고 푸석푸석하다. 그러나 뭐든 먹지 않고는 장사가 없다. 아무리 입 맛이 없어도 먹어야 힘을 쓴다. 여름철 더위에 지쳐 보약을 먹기 보다는 국산이든 수입품이든 우선 뭐든 잘 먹는 것이 더 좋은 보약이다. 약학박사인 홍문화 서울대 명예교수가 그래서 영약보다 식보를 으뜸으로 꼽은 것은 새겨 들을만 하다. 음식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잘 먹는 것 이상으로 더 좋은 약은 없는 것이다. 이리하여 모든 음식의 색깔은 그러니까 빨간 토마토는 빨간 간에 좋고, 검정 콩은 검은 쓸개에 좋고, 돼지고기 흰 비계는 흰 색깔의 장에 좋다는 등 음식마다 음식 색깔 따라서 맞는 오장육부에 도움이 간다는 속설이 있게 된 것 같다. 내가 음식을 가리지 않고 다 잘 먹게된 것은 순전히 친정 어머니 덕분이다. 설사 맛이 덜한 음식일 지라도 맛있게 먹는 것 역시 어머니때문에 생긴 식성이다. ‘여자는 고루 고루 먹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어릴 적에 귀에 못이 배기도록 들은 어머니 말씀이다. 여자가 먹기 싫은 음식이라고 안먹고 편식을 하면 나중에 시집가서 남편과 자식 등 가족들 특히 남자들이 제대로 못먹는다고 늘 타일르곤 하셨다. 이렇다 보니 처음엔 먹기싫은 것도 자꾸 오랫동안 씹으면 그런대로 맛을 알게 되는 습성이 생겨 지금은 쓰디 쓴 우황청심환을 먹는데도 맛있게 먹는다는 우스갯 소릴 주위 사람들로부터 곧잘 듣곤 한다. 입 맛이 없다고 안먹으면 더욱 입 맛이 없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면서도 잘 고치지 못하는 것은 생활의 습관 탓이다. 병원 신세를 지는 환자의 병은 물론 의사가 고치는 것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환자 자신의 의지가 중요한 것처럼, 더위를 이기기 위해선 뭐든 잘 먹는 것도 본인 스스로가 마음 먹기에 달린 게 아닌가 생각한다. 더위를 피해 산이나 바다로 가는 피서법도 좋지만 입 맛을 잃지 않도록 잘 먹는 식보야 말로 더위와 맞싸워 이기는 최고의 납량법이다. 가족들의 건강을 돌보는 식보를 위해 더욱 세심한 주부들의 손길이 아쉬운 계절이다. 우리 모두가 입맛을 잃어 건강을 잃는 일이 없도록 잘 먹는 지혜로 이 여름 한철을 건강하게 보내면 좋겠다. /이지현.(사)한길봉사회 경기도지부장

천자춘추/화랑의 전통과 난 화분

며칠 전 문을 연 새 전시장을 찾았다. 이전 건물을 헐고 새롭게 지어올린 이 건물은 인사동 한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2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갤러리다. 화랑이 20~30년쯤 되면 그 연륜에 걸맞는 안목과 권위와 기품이 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대부분의 상업화랑들은 그저 ‘구멍가게’라는 느낌이 든다. 손님이 원하는 것만 갖다놓는 비교적 편한 장사 말이다. 한국의 상업 화랑들은 일반대중들이 보편적으로 좋아하는 그림, 지명도와 장식성을 갖춘 그림들만을 대부분 다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상당수의 상업화랑들은 자기 화랑이 다루는 작가들이 변함없이 정해져있는 편이며 그 수도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비교적 유명작가, 대학교수작가, 상업성이 있는 작가, 집안이 부유하고 그 친척들이 잠재적인 고객이 될 수 있는 작가 등이 선호된다. 그러다 보니 한 작가가 여러 화랑에서 번갈아 전시를 하기도 하고 잘 팔린다는 소문이 난 작가들만이 화랑에서 다루고자 한다. 각 화랑들마다의 독특한 색깔과 기호, 취향이 부재하다는 얘기다. 결론적으로 말해 자기 색깔과 감각을 지니며 적극적으로 대중들에게 좋은 작업에 대해 설득력 있게 정보를 주고 교육을 시키는 화랑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지하1층과 지상 4층을 전시공간으로 쓰는 커다란 이 화랑에 신축 기념전으로 한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S대교수인 작가의 작업들이 전 층을 가득 채워놓았다. 우리 화단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빈번한 전시활동을 한 작가다. 다소 욕심이 많다 싶을 정도로 빼곡이 건 작품들을 보는데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방 벽을 뺑 둘러 갖가지 꽃과 난 화분들이 도열해있었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곳이 무슨 전시장인지 혹은 화원인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화랑주나 작가는 그처럼 많은 화분의 수가 작품의 질과 작가의 위상, 권력을 상징적으로 대변해 준다고 여겨서일까? 그 화환과 화분으로 전시장에 오는 이들의 기를 죽이고자 하는 걸까? 난 화분의 수에 비례해 작가의 유명도와 작품의 수준이 가늠된다고 소박하게 여기지는 물론 않겠지만 전시장 벽에 커다랗게 도배해놓은 인터뷰신문기사와 너무 많은 화분의 이 기이한 배열이 내겐 너무 황당해보인다. /박영택.미술평론가.경기대 미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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