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홍범도 장군의 귀환

봉황새와 오동나무를 섬기던 북간도의 작은 마을이었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왕칭(汪淸)현에 있다. 독립군이 처음으로 일본군을 통쾌하게 무찔렀던 곳이다. 봉오동(鳳梧洞) 전투 얘기다. 1920년 6월7일이었다. 승장(勝將)은 여천(汝千) 홍범도(洪範圖) 장군이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시절부터 산과 들녘에서 맹수를 잡았다. 1907년 함경ㆍ평안도 포수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 일본군을 타격했다. 이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북간도에서 대한독립군을 창설, 함경도 혜산진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는 등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다. 이듬해 거둔 대첩(大捷)이 봉오동 전투다. 일본군 19사단 추격대대를 섬멸했다. 일본군 전사자는 157명, 부상자도 200여명에 달했다. 독립군 전사자는 4명에 그쳤다. ▶같은 해 10월 보복전에 나선 일본군 대부대를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합세, 궤멸시켰다. 청산리 전투다. 무장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1921년 1월에는 연해주로 옮긴다. 이듬해는 김규식여운형 선생과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했다. 1923년 군복을 벗은 뒤 연해주 집단농장에서 근무했다.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으로 카자흐스탄으로 쫓겨갔다. 극장 수위 등으로 일하며 말년을 보냈다. ▶항일 무장투쟁에서 첫손에 꼽혔지만, 해방 후 남북한 모두에서 소외됐다. 북한에선 김일성과 비교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남한에선 옛 소련 영토에서 활동했다는 연유였다. 정부는 1962년에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정부는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카자흐스탄 측에 유해봉환을 위한 협조를 요청해왔다. ▶정부가 유해봉환계획을 공표한 건 지난해였다. 코로나19로 미뤄졌다. 그러다 이번에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이 성사되면서 장군의 유해가 고국 땅을 밟을 수 있게 됐다. 만주벌판 등지를 누비며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백두산 호랑이의 귀환이다. 100년만이다.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지지대] 민원 공무원 보호조례

공무원을 향한 민원인들의 폭언ㆍ폭행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욕설ㆍ고성은 비일비재하고 폭행ㆍ협박도 난무한다. 여성 공무원에 대한 성희롱도 적지 않다. 민원인과 어쩔 수 없이 대면해야 하는 부서의 공무원들은 악질 민원인들 때문에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민원인들에게 행패나 폭행을 당한 공무원은 정신적 충격으로 병원 치료를 받기도 한다. 직장을 떠나는 경우도 있고, 극단적 선택을 한 사례도 있다. 지방자치단체와 공공기관에서 민원실에 투명 가림막과 112 비상벨 등을 설치하고 있지만 피해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2020년 중앙행정기관, 지자체 및 교육청 소속 민원 담당 공무원에 대한 폭언ㆍ폭행 등의 피해 사례는 4만6천79건이다. 2019년 3만8천54건 대비 7천575건(19.7%) 증가했다 민원 처리 공무원은 행정 절차에 따라, 규정에 따라 일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고 요구대로 되지 않는다고 욕부터 하고 집기와 서류를 집어 던지고 난동을 부리면 공무원들은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다. 폭행ㆍ폭언이나 협박을 당한 경우, 또는 이를 목격한 공무원 상당수가 직업에 대한 회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으로 업무 수행을 못한다.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폭행ㆍ폭언이 용인되고 묵인돼선 안 된다. 다행히 최근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공무원 보호조례가 제정되고 있다. 안산시는 악성민원 피해 보호조례를 11월부터 시행한다는 계획이다. 조례엔 CCTV비상벨 설치, 비상대응팀 운영, 자동녹음 전화 설치, 상호존중 안내 멘트 송출, 안전요원 배치 등의 보호조치 내용이 포함된다. 피해 공직자에게 심리상담 및 의료비 지원, 휴식 시간ㆍ공간 확보, 법률상담ㆍ소송 등 행ㆍ재정적 지원 등의 내용도 담긴다. 경기도도 경기도 민원업무 담당공무원 등의 보호 및 지원에 관한 조례를 추진한다. 조례엔 민원업무 담당공무원의 정의와 범위를 규정하고, 그들에 대한 심리상담, 의료비, 피해 예방 및 치유 등을 위한 교육ㆍ연수 등을 지원하는 내용이 담길 예정이다. 민원 공무원 보호조례는 악성ㆍ악질 민원인으로부터 공직자를 보호해 시민들에게 더 좋은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국가의 역할과 원폭피해자

오는 15일은 제76주년 광복절이다. 올해 광복절은 일요일이라 다음 날인 16일을 대체 휴일로 쉬게 된다. 코로나19로 하루하루 지쳐가는 국민에게는 단비 같은 휴식이 될 테다. 76년 전 그날도 한반도의 온 국민이 만세를 외치며 즐거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공포에 떨며 고통에 몸부림치던 이들이 있었다. 원자폭탄 피해자들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일본은 항복하고 한반도는 해방을 맞았지만, 무려 10만여명의 한국인들이 원자폭탄에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피해자 대부분은 나라가 힘이 없어 일본으로 강제징용된 이들이다. 피해자들은 방사능에 노출된 몸을 이끌고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많은 이들이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로부터 76년이 지났다. 직접 폭탄 피해를 입은 1세대뿐만 아니라 그들의 후손인 23세대까지 유전적 질환으로 병마에 고통받고 있는 등 외로운 싸움이 지속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반가운 소식들이 연이어 들려 온다. 경기도가 전국 최초로 원폭피해자 3세까지 지원을 실시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도는 경기도의료원을 통해 진료비와 종합검진비 등을 할인해 주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피해자가 심리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심리프로그램도 지원할 계획이다. 또 박물관과 미술관 입장료 감면 등 다양한 문화혜택도 지원한다. 대통령 선거 경선을 치르고 있는 민주당 대선주자들 역시 원폭피해자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약속했다.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사업 확대는 물론, 추모묘역 및 위령탑 건립 등 기념사업도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모두 나라가 힘이 없어 강제징용돼 원폭 피해를 입은 만큼 끝까지 나라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최근 대통령을 해보겠다고 나선 한 후보가 국민의 삶을 국민이 책임져야지 왜 정부가 책임지나라는 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제76주년 광복절이다.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지 되돌아보는 것과 함께, 원폭피해자들에게도 사회적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호준 정치부 차장

[지지대] 탄소중립 실현할 ‘화이트 바이오’

바이오가 연일 세상의 이슈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물론 지난해부터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때문이다. 최근에도SK바이오사이언스는 식품의약품안 전처로부터 코로나19 백신 후보물질GBP510의 임상 3상 시험계획을 승인받았다는 소식과 함께, 송도에 본사와 연구소, 생산시설을 만든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바이오는 영어로 Bio라는 접두사로 생명, 생물, 인간의 삶과 관련된 것들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금은 자칫코로나19 백신이나 치료제 등 의약품분야를 통칭하는 단어처럼 쓰이고 있다. 정확하게 구분하자면 바이오는 의약품치료와 관련한 레드 바이오, 농수산업환경제어와 관련한 그린 바이오, 그리고 옥수수콩목재류 등 재생가능한 식물자원을 원료로 화학제품또는 바이오연료 등을 생산하는 화이트 바이오가 있다. 당장은 코로나19로 우리에게 레드바이오가 중요하다. 하지만 멀리 내다보면 화이트 바이오가 우리 생활에 훨씬 더 밀접하다. 바로 기후변화를 이겨내기 위한 탄소 중립에 이 화이트 바이오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종전 화학 산업에 쓰이던 석유 등을 바이오 기반으로 바꾸면,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줄어들고 원료인 식물 등 바이오매스가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탄소 중립적이다. 이 때문에 국제기구 및 미국유럽을중심으로 탄소세 인상, 탄소 국경세 도입 논의, 플라스틱세 도입 등 환경규제강화를 통해 탈화석 연료저탄소 경제로 대전환을 추진하고 있다.인천시도 올 초 화이트 바이오산업육성 전략을 마련했다. 탈플라스틱 사회를 만들고 바이오 기반 제품 수요의활성화, 생분해성 바이오플라스틱 제품의 공급 촉진 등을 이뤄내겠다는 것이다. 특히 이와 관련한 정부 공모사업을 잇달아 따내기도 했다. 화이트 바이오란 말이 아직은 어색하지만, 곧 우리 생활에 많은 영향을줄 단어이다. 모두가 화이트 바이오에 작은 관심을 기울여볼 시점이다. 이민우 인천본사 정치경제부장

[지지대] 가면무도회

가면무도회(Masquerade)는 중세 유럽 귀족들의 이벤트였다. 가면을 쓰고 사교춤을 췄다. 가면의 종류도 각양각색이었다. 1268년 베네치아에서 비롯됐다. 날렵한 연미복과 화려한 드레스 차림으로 모였다, 그리고 갖가지 가면을 뒤집어쓰고 밤새 즐겼다. 그렇게 얼굴을 가리면 과연 위선도 감출 수 있었을까.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면무도회를 자주 열었던 군주였다.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에도 가면무도회란 제목의 작품이 있다. 부하의 아내와 사랑에 빠져 몰락한다는 리카르도 백작 이야기가 얼개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가면무도회만 열리면 펼쳐졌다. 점잖던 신사들이 무척 대담해지고, 심지어 음탕해졌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탓이었을까. ▶같은 제목의 팝송도 있었다. 카펜터스(Carpenters)의 This Masquerade다. 1972년 발표됐다. 이 어리석은 게임을 계속한다면 우리는 과연 행복해질까로 시작된다.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이젠 아무래도 좋다. 이 가면무도회에서 헛되이 시간을 보낸다라고 끝난다. ▶지구촌은 지금 가면무도회 중이다. 사교춤만 안 출 뿐, 하루하루가 가면무도회장이다. 마스크를 쓴 채 생활한 지 햇수로 2년도 넘었다. 기괴한 고정관념들도 만들어졌다. 가까운 지인 외에는 사람을 알아볼 수 없다. 눈으로만 사람 얼굴을 인식할 수 있을까. 타인의 감정과 속내도 알아내기가 어렵다. 마스크 쓴 얼굴이 더 친숙하다. 화장을 하지 않아도 된다. 상대방의 말에 눈으로 대충 반응해도 된다. ▶마스크의 잠재적인 심리학은 복종이다. 입과 코를 가리는 행위를 따르겠다는 명령에 동의한다는 의미다. 아예 마스크 끼는 게 더 편하다. 착각일까. 마스크를 벗으면 얼굴이나 표정이 노출될 것 같아 두렵다. K방역 성공 원인은 투명하고 민주적인 방역시스템이다. 역설적으로 마스크 착용이 서로 간의 거리를 더욱 멀게 만들고 있다. ▶어쩌면 마스크를 벗는 날 서로의 얼굴을 쉽게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 This Masquerade의 노랫말이 오버랩된다. 서로 대화하는 게 무섭다 어쩌면 우린 종말이 명쾌한 게임에 헛되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스크를 벗을 가까운 미래가 미심쩍어서 하는 말이다.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지지대] 선거판 네거티브戰

선거 때마다 네거티브(negative)가 판을 친다. 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도 여야 대선 후보들이 아니면 말고 식의 음해성 발언과 상대방을 깎아 내리는 흠집내기를 하고 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 대권주자 중 양강인 이재명 경기지사와 이낙연 전 국무총리는 명낙 대전으로 불릴 정도로 네거티브 공방이 치열했다. 이 지사와 이 전 총리 측은 경선 초기 노무현정부 적통 논쟁과 노 전 대통령 탄핵 당시 행적을 둘러싼 공방에 이어 백제 논쟁으로 지역주의 논란이 불거졌다. 두 후보는 과거 518 구속자부상자회장과 찍은 사진을 서로 들이대며 조폭 유착 의혹도 제기했다. 이 지사의 음주운전 전력도 갑론을박 시끄러웠다. 국민의힘에선 양식장 논란이 일었다. 정진석 의원이 페이스북에 가두리 양식장에서는 큰 물고기가 못 자란다는 글을 올리며 돌고래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체급이 다르니 다른 대선주자와 달리 취급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이준석 대표는 멸치와 돌고래를 동일하게 대할 것이라고 했다. 졸지에 멸치가 된 홍준표 의원은 돌고래는 사육사가 던져주는 생선에 따라 움직이는 조건반사적인 물고기에 불과하다고 공격했다. 여야 간 아내ㆍ장모 리스크가 있는 윤 전 총장과 여배우 스캔들에 휘말린 이 지사를 향한 네거티브 공격이 계속되더니 최근엔 윤 전 총장 측이 이 지사를 향해 성남FC 후원금 뇌물수수 의혹 사건을 부각시켰다. 이 지사는 윤 전 총장은 검사로서도 무능할 뿐만 아니라 악의적 특수부 검사라고 대응했다. 네거티브 공방은 국민들에게 짜증과 피로감만 더해준다. 검증을 빙자해 상대후보를 물어뜯는데 혈안이 된 막장 공방은 정치혐오만 부추긴다. 국민이 관심있는 것은 후보들의 정책과 비전이다. 이재명 지사가 네거티브 중단을 선언했다. 실력과 정책에 대한 논쟁에 집중하고, 다른 후보들에 대해 일체의 네거티브적 언급조차 하지 않겠다고 8일 밝혔다. 이낙연 전 총리는 환영 입장을 내며 말이 아닌 실천으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했다. 비방전이 두 사람 지지율에 부메랑이 되고 정권 재창출에 독이 될 것이라는 현실적 판단에 휴전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과연 네거티브가 사라질까?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부스터 샷

부스터 샷(Booster Shot)은 백신의 면역 효과를 강화하거나 효력을 연장하기 위해 일정 시간이 지난 뒤 추가 접종 하는 것을 뜻한다. 2020년 말부터 접종이 시작된 코로나19 백신의 경우 화이자ㆍ모더나 등 대부분의 백신이 2번 접종하는 방식인데, 여기에 한 번 더 추가해 3차 접종을 하는 것이다. 코로나19 백신 공급의 글로벌 양극화가 심각하다. 어떤 나라에선 1회 접종도 못했는데, 어떤 나라에선 부스터 샷 접종을 한다니 백신 불평등 문제로 논란과 갈등이 일고 있다. 현재 백신을 1회 이상 접종받은 인구 비율이 북미와 유럽연합(EU)은 60%가 넘지만 아프리카는 3.6%에 불과하다. 1인당 GDP가 1천달러에 못 미치는 라이베리아나 감비아는 각각 0.2%와 0.5%의 성인만 접종을 받았다. 이런 상태에서 부자 나라들은 델타 변이의 급격한 확산을 이유로 부스터 샷 도입 계획을 확정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지난 1일부터 60세 이상 노인에 한해 부스터 샷 접종을 시작했다. 영국과 독일도 9월부터 고령자와 면역력이 약한 이들을 대상으로 3차 접종을 한다. 미국도 방침을 바꿔 부스터 샷 도입을 결정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 부스터 샷 도입을 확정했거나 추진하는 미국, 유럽 등 선진국들을 겨냥해 적어도 9월까지는 부스터 샷 접종을 유예해 달라고 촉구했다. 테워드로스 WHO 사무총장은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접종이 이뤄진 40억회분 이상의 백신 중 80% 이상이 전체 인구의 절반이 안 되는 중상위 소득 국가에 돌아갔다면서 부유한 국가에서 가난한 국가로의 백신 공급 전환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자국민을 보호하려는 각국 정부의 염려가 이해는 된다. 고소득 국가들은 꼭 필요한 만큼만 맞고 나머지는 백신 부족 국가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백신이 없어 한번도 못 맞는 나라가 많은 만큼 당장의 부스터 샷은 인류애 차원에서라도 유예하는 게 좋겠다. 코로나 사태는 지구촌 전체의 위기로 일부 국가의 백신 접종만으로 극복할 수 없다. 인류의 공동 위기 앞에서 자국 우선주의보다는 연대와 협력이 절실하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이기적 유전자’ 이길 ‘이타적 사람들’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일까. 유전학적 관점에서 이기적이냐 이타적이냐의 논쟁은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다. 1976년 영국에서 출판한 리처드 도킨스 교수의 이기적 유전자는 많은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긴다. 모든 생명체가 자기 보존을 위한 목적에 프로그래밍 돼 있고, 인간은 유전자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일 뿐이라는 이론. 이 때문에 마치 이타적으로 보이는 부모의 태도도 결국은 자신의 유전자를 지켜내려는 이기심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것. 하지만 이 같은 이기적 유전자론은 최근까지도 수많은 논쟁을 불러온다. 인간을 단순히 유전자에 종속해 있는 하나의 기계로 볼 수 있을까. 물론 인간의 유전자가 태초에 이기적일 수 있다는 점에는 공감한다. 저렇게 이기적인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타인의 노고에 무임승차를 서슴지 않는 이들이 분명히 있어서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분명히 이타적인 성향을 지니게 됐다. 남들과 어울려 함께 협력하고, 어느 때는 나에게 이익으로 돌아오지 않을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선다. 얼마 전 대한적십자사 인천혈액원에서 500회 헌혈 달성자가 탄생했다. 1993년 6월11일 처음 헌혈을 시작해 28년째 헌혈을 이어온 인천시민 유재결씨(65)가 그 주인공이다. 헌혈은 생명입니다라는 표어를 보고 2주마다 헌혈에 참여하는 그의 행보를 이기적 유전자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지난달에는 인천 남동구의 한 길거리에서 쓰러진 시민을 본 2명의 의인이 자신들의 일도 미뤄둔 채 심폐소생술(CPR)을 해 생명을 구하기도 했다. 그 짧은 시간, 이 행동이 나의 유전자를 보존하려는 목적을 가진 이기적 유전자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연일 폭염과 코로나19에 지쳐가는 요즘이다. 유씨 등 처럼 이기적 유전자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타적 유전자가 더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김경희 인천본사 사회부장

[지지대] 유연함과 대범함

도쿄올림픽 2020이 한창 진행 중이다. 코로나19 탓에 역사상 가장 주목 받지도, 사랑받지도 못한 올림픽이라는 오명을 함께 안고 말이다. 통상 4년의 준비라고 하지만 올해 올림픽은 리우에 이어 5년만에 열리고 있다. 그동안 전 세계의 스포츠인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올림픽에서의 선전을 위해 피ㆍ땀ㆍ눈물을 흘려왔다. 환희의 순간도, 좌절과 절망의 순간도 느끼겠지만 그래도 올림픽에 출전했다는 자부심이 더 큰 것이 사실이다. 대한민국만 빼고 말이다. ▶대한민국은 1948년 7월29일, 태극기를 앞세워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제14회 런던올림픽에 첫 출전했다. 이후 대한민국 선수단은 국가의 명예와 자신의 노력에 대한 성과를 얻고자 올림픽에서 처절하게 싸워왔다. 하지만 메달을 따는 환희의 시간보다 좌절과 절망의 시간을 더 오래 보내왔다. 그러던 중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 등 총 33개의 메달을 획득하며 구 소련과 동독, 미국에 이어 세계 4위라는 엄청난 업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사고를 제대로 친 이후 대한민국에게 올림픽은 경직과 소심함이라는 명제와 함께 공공의 적을 만들어왔다. ▶유력 금메달 후보가 은메달을 땄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시상대에 선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간의 그 선수가 흘린 피ㆍ땀ㆍ눈물은 없고 5천만 국민에게 대역죄인이 돼 버린 것이다. 입상 조차 하지 못한 선수들 얘기는 할 필요도 없다. 왜일까? 중압감이 문제인가? 아니다. 즐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 도쿄올림픽에는 유독 아름다운 3, 4위가 많다. 육상 필드 종목(높이뛰기)의 우상혁 선수, 다이빙 우하람 선수에다 올림픽사에 길이 남을 부녀 메달리스트 체조 여서정 선수까지말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메달 색깔과 순위에 연연하지 않고 스포츠 자체를 즐겼다는 것이다. 이들이 보여준 유연함과 대범함이 앞으로의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의 모토가 되길 바란다. 태극마크의 자부심만 느끼면서. 김규태 사회부장

[지지대] 물구나무서서 읽는 ‘열하일기’

벼슬길에는 뜻이 없었다. 스펙은 초라하진 않았다. 집권층인 노론(老論) 출신이었다. 압록강을 건널 때가 불혹(不惑)이었다. 바야흐로 18세기 후반이었다. 이국(異國)은 낯설었다. 모든 게 기이했다. 벽안(碧眼)의 얼굴들도 흔하게 눈에 띄었다. 작은 나라에서 온 선비에게는 그렇게 보였겠다. ▶사신단이었던 친척 형의 개인 비서 자격으로 중국행에 가세했다. 하지만 자유로웠다. 격식을 갖춰야 할 위치에 있지 않아서였다. 눈에 보이는 문물을 끊임없이 눈에 담았다. 밤마다 뒷골목을 누비게 한 동력은 호기심이었다. 중국의 겉과 속이 오롯이 스테레오로 펼쳐졌다. 광활한 대륙의 대서사(大敍事)였다.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온 선비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물구나무서서 보는 광경 그 자체였다. ▶이렇게 쓰인 게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다. 오랑캐의 나라로만 알았던 청나라는 책 속에서 까마득하게 멀리 있는 문명국이었다. 청나라 타도가 국시(國是)였는데, 찬양했으니 금서로 지정되는 건 당연했다. ▶선비들이 숨죽이고 읽었다. 원본은 하마터면 잿더미로 사라질 뻔했다. 후손이 책을 불태우려다 식구들이 막았다. 이들이 아니었으면 열하일기 원본은 매장됐을지도 모른다. 조선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내용이 주류여서 집안을 거덜낼 수도 있었다. 그 위험의 핵심은 오랑캐 나라라도 배울 건 배우자였다. ▶연암은 건륭제의 칠순잔치 축하사절단 비공식 단원으로 중국을 찾았다. 1780년이었다. 건륭제는 더위를 피해 별장이 있는 열하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그곳은 만리장성 북쪽에 있었다. 연암이 대륙에 발을 내디딘 건 딱 이맘때였다. ▶그가 중국을 찾았을 때 프랑스에선 혁명이 싹트고 있었다. 미국에선 독립전쟁이 한창이었다. 정조의 개혁은 단행됐지만,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연암이 300년 시공을 넘어 보내는 메시지는 그래서 명쾌하다. 하루 동안 북대서양에서 85억t의 얼음이 녹아내리는 여름 끝자락에 열하일기를 꺼낸 까닭도 분명하다. 알량한 기존 질서에 집착하지 말고, 세상의 도도한 흐름도 거부하지 말자. 역사의 준엄한 명령이다.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지지대] 경기도 청년백서

많은 청년들이 헬조선이라며 우리 사회를 비판하고, 심지어 혐오한다. 단군이래 최고의 스펙을 갖고도 취업이 안되는 현실, 곳곳에서 터지는 공정하지 못한 사건들에 분노한다. 미래 사회를 이끌어 갈 청년들이 긍정적인 사고를 가져야 사회가 밝고 희망이 있을 건데, 안타깝다. 청년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경기도가 도내 청년 1만명의 목소리를 들었다. 경기도일자리재단이 주도해 지난해 12월과 올해 3월에 19~34세 청년 5천명씩을 대상으로 토론과 설문조사를 했다. 청년들의 현재 삶과 희망에 대해 듣고, 청년정책을 수립하기 위한 것이다. 팬데믹시대 청년들의 삶과 생각은 어두웠다. 조사 결과 청년 10명 중 5명(50.2%)은 자신들을 경제적으로 하층이라고 했다. 중간층은 44.1%였다. 근로 청년 10명 중 7명은 월평균 소득 250만원 미만이었다. 100만원 미만도 15.3%였다. 정규직은 61%였고, 비정규직기간제근로자일용직은 28.4%, 자영업자프리랜서는 7.9%였다. 집을 언제 마련할 수 있을 것 같냐는 물음엔 29.4%가 평생 마련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청년들 44.4%는 부채가 있다고 답했다. 5천만원 이상이 13.7%였다. 빚이 생긴 이유(복수응답)는 주거비 46.4%, 학자금 39%, 생활비 마련 30.9%, 가족 지원 9.9% 등의 순이었다. 30.9%는 결혼 생각이 없다고 했다. 주택 마련 등 금전적 부담(28.6%), 혼자 살아도 별로 아쉬움이 없어서(21.7%), 결혼제도의 불합리함이 싫어서(20.2%) 등이 이유였다. 경기도는 토론과 설문조사를 통해 최근 경기도 청년정책 비전 수립 공론화 백서를 제작했다. 청년백서는 전국 처음이다. 청년들이 제시하는 청년정책의 방향이 담겼다. 청년들은 주거, 취업창업, 자산 형성, 일자리 등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경기도는 청년정책의 슬로건을 내일을 채우는 청년, 꿈을 그리는 경기로 정했다. 경기도뿐 아니라 정부와 정치권은 청년들이 체감할 수 있는 정책을 내놔야 한다. 청년들에게 혐오가 아닌 희망을 안겨줘야 한다. 진지한 고민과 대책이 절실하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섹시스트 유니폼 저항

지난달 초 불가리아에서 열린 유럽 비치핸드볼 선수권대회에 노르웨이 여자 선수들이 비키니 유니폼 대신 반바지를 입고 출전했다. 유럽핸드볼연맹은 비키니 착용 규정을 어겼다며 1천500유로(1인당 약 200만원)의 벌금을 부과했다. 모래 위에서 하는 비치핸드볼은 남자 선수와 달리 여자 선수들은 하의의 측면 폭이 10㎝를 넘으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다. 노르웨이 핸드볼연맹은 선수들이 편한 옷을 입고 경기할 수 있도록 유니폼 규정을 바꾸기 위해 싸우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사건은 세계 언론의 이슈가 됐다. 2020 도쿄올림픽에서도 여자 선수들의 유니폼이 화제다. 일부 선수들이 섹시스트(Sexistㆍ성차별주의적) 유니폼을 거부하고 나섰다. 독일 여자 기계체조 대표팀은 몸통에서부터 발목까지 덮는 전신 타이즈 형태의 유니타드를 입고 참가했다. 지금까지 올림픽에 출전한 여자 체조 선수들은 원피스 수영복에 긴 소매만 덧대진 레오타드 유니폼을 착용해 왔는데 암묵적인 금기를 깨버렸다. 이들은 4월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유럽선수권대회에서 전신 유니폼 데뷔전을 치렀다. 당시 독일체조연맹은 체조 기술보다는 몸매에 더 관심을 보이는 것을 막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독일 대표팀의 유니폼은 여자 선수들을 성적 대상으로 보는 일부 잘못된 시선에 경종을 울리고, 유니폼을 선택할 권리를 넓혔다는 점에서 호응을 얻었다. 이들이 원하는 건 기존 유니폼을 무조건 거부하는게 아니라, 무엇을 입을 것인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체조, 수영, 육상, 비치핸드볼 등의 유니폼은 노출이 심하고 몸에 착 달라붙는 의상 때문에 TV 중계 영상이나 사진에 선정적인 모습으로 비쳐질 때가 많다. 일부 종목은 여성스럽고 노출이 많은 옷으로 유니폼을 제한한다.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한 여자 선수들은 정해진 유니폼을 입으며 성적 대상화가 됐다.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입었던 유니폼에 여성 선수들이 반기를 들면서 관행이 깨지기 시작했다. 패션ㆍ문화계 등의 성차별을 뛰어넘는 젠더리스(genderless) 바람이 스포츠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탈출

탈출은 결국 죽음으로 끝났다. 용인 한 곰 사육장에서 탈출한 반달가슴곰 이야기다. 언론보도를 보면 지난 6일 용인시 이동읍의 A 곰 사육장에서 철재 사육장 바닥이 벌어지면서 그 틈으로 반달가슴곰이 도망갔다. 반달가슴곰은 같은 날 농장에서 1㎞가량 떨어진 숙대 연수원 뒤편에서 출동한 유해야생동물 피해방지단의 포수들에게 사살됐다. ▲탈출은 갇힘을 전제로 한다. 위키백과는 탈출을 어떠한 상황이나 구속 따위에서 빠져나오는 일을 가리킨다고 했다. 탈출은 종종 자유라는 말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럴 것이다. 자유를 주제로한 동물의 탈출 이야기는 우화(寓話)나 동화의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언뜻 떠오르는 동화만 해도 춤추는 홍학(오세발), 멧돼지와 집돼지(조장희), 놀이동산의 불곰대장(최인영), 자유를 사랑한 아기곰, 벨라(마리아 스트리안네제) 등이 있다. 중요한 것은 탈출을 행동으로 옮기든, 머뭇거리며 생각에 그치든 모두 매어있거나 갇혔단 상황을 알아챈 자만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갇혀있음에도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그것은 용인 반달곰에서 보듯 사육장(감옥)처럼 눈으로 확인되는 물리적인 것보다 보이지 않는, 정신과 관련된 부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지연, 혈연, 학연은 다 아는 것이니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 이념과 사상. 500여 년 전 프란시스 베이컨이 경고한 4가지 우상(종족, 동굴, 시장, 극장)은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가늠자로 손색이 없다. ▲용인 반달곰의 탈출은 사살이라는 비극으로 끝났다. 이 안타까운 사건은 필자에게 많은 성찰과 교훈을 주고 있다. 돈, 권력, 명예, 정의. 지금 너는 무엇에 갇혀있는가. 진보니 보수니ㆍ좌니 우니 하며 상대를 사살하는데 급급한 정치 현실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가. 스스로 만든 진영의 동굴에 갇힌 사람들의 폭거는 어디가 끝인가. 비만, 가난, 전세, 백수. 삶은 어쩌면 사람들 저마다의 탈출기를 써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박명호 지역사회부 차장

[지지대] 세계 최강 양궁의 원칙과 공정

양궁 역사상 올림픽 최초 9연패. 올림픽 전체로 봐도 역사상 3번째다. 한국 양궁의 위대함. 그 이유는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양궁은 지금 현재 제일 잘 쏘는 사람이 올림픽에 나간다는 원칙이 있다. 양궁협회는 그 어떤 종목 협회보다도 투명하고 공정한 원칙주의를 내세우는 단체로 유명하다. 한국 양궁이 40년 가까이 최강자를 굳게 지킬 수 있는 배경이다. 한국 양궁 대표 선발전은 이러한 협회의 공정함의 산물이다. 과거 경력과 경험 등 정성 평가가 아닌 철저히 결과만 반영한 정량평가로 선수를 선발했다. 이 과정에서 신진급 선수들이 뽑히는 경우도 많았다. 이번 대회에도 여자 대표팀은 모두 올림픽이 첫 출전인 선수들로 구성됐지만 정상을 지키는 데 문제는 없었다. 막내 듀오 안산(20ㆍ광주여대)과 김제덕(17ㆍ경북일고)은 혼성 경기에서 금메달을 수확했고 남녀 대표팀 단체전 우승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코로나 19 확산으로 올림픽이 1년 연기되면서 2020 대표 선수들에게 그대로 자격을 부여할 것이냐는 문제가 제기됐다. 양궁협회는 기존에 진행하던 선발전을 재개했다. 스스로 세운 원칙을 지킨 것이다. 2021년 열리는 대회인 만큼 새로 대표를 선발하는 것이 마땅했다. 1년 전 최고의 선수가 아닌 지금 현재 최고의 기량을 뽐내는 선수를 선발했다. 이번 대회에서 처음 도입된 혼성 경기에서 막내 듀오가 출전했다. 남녀 각각 예선 1위를 차지한 원칙이 작용한 것이다. 경험 부족의 불안함도 있었지만 실력으로 이를 극복해내며 협회의 원칙주의가 옳았음을 입증했다. 스포츠계는 물론 사회 곳곳에서 권력 다툼과 편 가르기, 선수 선발의 공정성 논란이 일고 있다. 내년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을 진행과정에서 각 후보의 힘겨루기가 도를 넘는 양상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 사회가 양궁의 원칙과 공정성에 더욱 주목하길 기대해 본다. 최원재 정치부장

[지지대] 일곱송이 수선화

추사 김정희의 제주 유배 시절이었다. 길섶에서 함초롬히 핀 꽃을 발견했다. 뭍에선 볼 수 없었던 식물이었다. 벗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꽃 얘기를 했다. 천하에 큰 구경거리입니다. 마을마다 땅마다 없는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의 편지는 계속된다. 한줄기에 많게는 10여 송이에 꽃받침이 8~9개나 5~6개에 이릅니다. 산과 들, 밭두둑 사이가 마치 흰 구름이 질펀하게 깔려 있는 듯, 흰 눈이 광대하게 쌓여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토착민들은 수선화가 귀한 줄 몰라 소와 말에게 먹이고 함부로 짓밟아버립니다. ▶추사는 이 꽃이 보리밭에 잡초처럼 많이 피어 장정이나 아이들이 보자마자 호미로 파내 버린다며 안타까워했다. 파내고 파내도 다시 나기 때문이다. 그처럼 생명력도 질긴 꽃이었다. 흔히 서양 꽃으로 알고 있는 수선화(Daffodil) 얘기다. ▶한문으로는 물에 핀 신선이란 뜻으로 水仙花다.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수선화는 추사에 의해 뭍에 처음 알려졌다. 당시 한양의 선비들 사이에서도 수선화는 생소했다. 여기서 반전이 있다. 조선시대 선비의 절개를 나타내는 꽃은 매화였다. 하지만 추사는 수선화를 통해 선비의 지조를 표현했다. 무릇 선비가 정치적 양심을 갖추려면 학문의 깊이도 있어야 하지만 곱고 의로운 것에 대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학문을 통한 철학적 깊이와 정치적 양심은 선비들이 갖춰야 할 으뜸 덕목이다. ▶추사의 편지 속에서 수선화는 당파와 아무 관련이 없었다. 그저 선비의 지조와 절개, 신념 등을 상징적으로 드러냈을 뿐이다. 조선시대에서 학문적 신념과 정치적 양심을 지키는 건 반드시 고통만 뜻하진 않았다. 정치적 탄압을 받을 때도 선비는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백성을 아끼는 고운 심성도 의로운 선비의 몫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정치권이 곱씹어 봐야 할 대목이다. ▶1960년대 포크그룹 브라더스 포(Brothers Four)의 일곱 송이 수선화(Seven Daffodils) 첫 소절이 생각난다. 당신께 손에 쥘 지폐 한장 대신, 소담스런 일곱 송이 수선화를 드리겠습니다 폭염에 코로나19로 힘들고 고단하겠지만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바라보면 우리 가슴에도 수선화 일곱송이가 활짝 피어 있지 않을까.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지지대] 에너지 빈곤층

UN 세계기상기구(WMO)는 2019년에 기후변화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5년 연속 기록적인 더위를 전망했다. WMO의 전망대로 지구촌은 지금 펄펄 끓고 있다. 북극권 최고 기온이 30℃를 넘는가 하면, 50℃에 이르는 폭염이 이어지는 지역들도 있다. 전례없는 살인적 더위에 수백명이 숨지고 산불이 일어나 도시가 파괴됐다. 기온 상승 탓에 기상이변이 속출하면서 지난해 세계적으로 폭풍, 홍수, 산불, 가뭄으로 생활터전을 잃고 살던 곳을 떠나 국내 실향민(이주민)이 된 사람이 3천70만명에 달했다는 조사결과가 있다. 내부난민감시센터(IDMC)에 따르면 이는 전쟁과 폭력 사태로 인해 발생한 강제 실향민 수 980만명의 3배가 넘는다. IDMC 보고서는 재난과 기후변화의 영향은 새롭고, 2차적인 강제 이주를 유발해 사람들의 안전과 복지를 해친다고 지적했다. 기후 난민은 2050년이면 1억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됐다. 폭염은 예고된 재앙이다. 살인적 폭염은 올 여름 우리나라에서도 심각하다. 뜨거운 공기가 지면을 돔 모양으로 둘러싸는 열돔 현상이 지속되면서 사우나에 갇힌 느낌이다. 40℃에 육박하는 가마솥 더위는 특히 노약자와 에너지 빈곤층의 건강을 위협한다. 폭염이 한달 이상 지속된 2018년에 온열질환자가 4천526명, 사망자가 48명이나 됐다. 올해도 노약자, 중증장애인, 취약계층 등 에너지 빈곤층의 인명 피해 우려가 크다. 에너지 빈곤층은 적정 수준의 에너지소비를 감당할 경제적 수준이 안되는 가구다. 1970년대 영국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이다. 에너지 구매비용이 소득의 10%를 넘는 가구를 에너지 빈곤층으로 간주하지만 명확하게 합의된 정의는 아니다. 에너지 빈곤층은 겨울철 한파뿐 아니라 한 여름 폭염에도 취약하다. 노후주택ㆍ쪽방 밀집 지역에 거주하는 취약계층은 선풍기 하나에 의지해 헉헉대며 고통의 여름을 보내고 있다. 코로나19로 여느 해보다 더욱 힘겹다. 우리나라엔 아직 에너지 빈곤층에 대한 정의가 없다. 폭염이 일상화되는 상황이지만 에너지 빈곤 현황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에너지 빈곤층에 비상신호가 켜진 만큼, 빈곤 현황을 파악하고 그에 따른 지원이나 대책을 적극 마련해야 한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강유정의 삭발 투혼

운동 선수들의 몸무게와의 전쟁은 눈물겹다. 유도, 레슬링, 복싱, 태권도 등 몸무게로 체급을 나누는 종목의 선수들은 체중 조절을 하느라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100~200g의 차이로 경기에 나설 수 없기 때문에 몇 g이라도 줄이기 위한 노력은 처절하다. 올림픽 등의 경기에서 몸무게를 재는 계체(計體)는 중요한 통과 의례다. 선수들은 계체 통과를 위해 2~3일 전부터 아예 굶기도 한다. 사우나에 들어가 수분을 빼내기도 하고, 때를 밀기도 한다. 손톱, 발톱도 다 깎는다. 계체 전 계속 침을 밷기도 한다. 몸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선수들의 노력에는 피와 땀, 눈물 등이 녹아 있다. 도쿄올림픽에 참가한 한국 유도 여자 48㎏급 대표 강유정(25)은 24일 경기에 삭발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전날 공식 계체를 앞두고 몸무게가 줄지않아 머리카락을 밀어버린 것이다. 지난해 10월부터 왼쪽 무릎 통증이 심했던 그는 혹독한 훈련을 하면서 체중 조절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결국 경기 전날까지 계체 통과가 어려웠다. 48㎏급은 48.5㎏까지 계체를 통과할 수 있다. 강유정은 종일 음식을 먹지 않았지만, 전날 오후 6시 몸무게는 48.850㎏이었다. 계속 뛰었지만, 오후 7시의 체중은 48.750㎏였다. 포기하지 않고 또 뛰었다. 침을 뱉고 또 뱉었다. 결국 탈수가 와 쓰러졌다. 긴급처치를 받고 침을 뱉어 수분을 더 빼냈다. 그리고 오후 7시 55분, 체중계에 올랐을 때 눈금은 48.650㎏이었다. 150g을 더 줄여야 했다. 강유정은 삭발을 결심했다. 급하게 문구용 가위를 구해 머리카락을 모두 잘랐다. 오후 8시, 체중계에 올랐을 때 그의 몸무게는 48.5㎏이었다. 강유정은 그렇게 머리카락을 포기하며 경기에 나섰으나 아쉽게 첫 판에서 패했다. 만신창이가 된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슬로베니아 선수에게 한판승을 내주며 탈락했다. 강유정이 도쿄올림픽 무대에 선 시간은 2분이었다. 그는 경기 뒤 머리카락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며 아쉬운 결과가 나왔지만 무너지지 않고 일어나겠다고 했다. 목소리는 살짝 떨렸으나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착한 휴가

여름 휴가철이지만 시절이 하 수상하다. 코로나19는 올여름에도 여전히 확산세고 유례없는 폭염까지 덮쳤다. 왠지 마음이 무겁다는 한숨 섞인 말들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아직 휴가 계획을 세우지 못한 이들도 많다. 최근 잡코리아 조사 결과, 직장인 10명 중 4명만이 여름휴가를 간다고 대답했다. 나머지는 휴가를 아예 가지 않거나, 여름휴가 계획을 세우지 못한 것이다. ▶대신 착한 휴가를 즐기려는 움직임도 있다. 줍깅(플로깅)은 이 시대 휴가철 하나의 트렌드로 떠올랐다. 일상에서 산책하거나 휴양지에 갔을 때 걸어다니면서 주변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행위를 뜻한다. 쓰레기를 주우면서 동시에 건강도 챙길 수 있는 일석이조의 활동이다. 쓰레기를 줍는 동작이 런지, 스쿼트와 비슷해서 운동 효과가 있다고 한다. ▶탄소 중립 휴가를 위한 방법도 나왔다. 기후변화청년모임 빅웨이브는 한 매체를 통해 4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첫째, 대중교통이나 전기차, 수소차를 이용한 여행계획을 세울 것. 둘째, 가져온 쓰레기는 도로 가져가고, 버릴 때 쓰레기 수거함에 버릴 것. 셋째, 휴가 기간 낭비될 에너지를 소모할 가전제품이나 집안의 전등을 꼭 확인해서 분리하거나 끌 것. 넷째, 일회용품 대신 에코 백, 평소 사용하던 세면도구, 텀블러 등을 준비하기다. 탄소 중립이라는 묵직한 주제이지만 실천 방법들은 일상적이고 가볍다. ▶코로나19와 기후변화는 지금까지의 삶을 성찰하고 자연과 공존하라는 경고음이다. 손쉬운 방법으로 먼저 올여름 지구를 생각하는 나만의 특별 휴가 리스트를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탄도항에서 꼭꼭 숨은 소라게를 찾으며 줍깅 하기, 캠핑을 떠나며 일회용품은 사용하지 않기, 자동차 대신 대중교통이나 자전거로 안전하게 휴가지로 떠나기 등이다. 나와 주변을 둘러보며 진정한 쉼을 생각하는 꽤 낭만 있는 휴가가 될 것 같다. 정자연 문화체육부 차장

[지지대] 보이지 않는 손

최근 몇 년 사이 가격이 급등한 수도권의 아파트를 놓고 갑론을박이다. 특히 연이은 정부의 대책이 적절했는지에 대한 쓴소리도 이어지고 있다. 현 정권은 부동산 가격을 잡겠다고 무려 26차례에 걸쳐 크고 작은 대책을 내놨다. 2017년 6ㆍ19 대책에서는 조정대상지역 추가, 주택 대출 축소 등의 내용을 담았다. 이어진 8ㆍ2 대책에서는 서울 25개 구, 과천시, 세종시를 투기과열지구로 지정했으며, 다주택자의 양도소득세를 강화했다. 2019년 12ㆍ16대책에서는 15억 초과 아파트의 담보대출 전면 금지, 주택 보유세를 강화했다. 2020년 6ㆍ17 대책에서는 수도권 조정대상지역 및 투기과열지구 지정, 갭투자ㆍ대출 규제를 담았다. 이어진 7ㆍ10 대책에서는 다주택자의 세율을 인상했고, 등록임대사업자를 폐지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들을 종합해보면 현 정부는 다주택자의 세금 부담을 높이고 규제를 강화하면, 매물이 풀리고 집값이 안정될 것으로 기대했다. 부동산을 주거의 대상이지 투기의 대상은 아닌 것으로 본 것이다. 이에 투기를 막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쏟아냈다. 평가는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우선 많이 올랐다.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아파트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넘치는 정부의 각종 규제에 집을 살 수도, 팔 수도 없는 거래절벽의 상황에 내몰렸다. 외려 가격을 거꾸로 급상승시키는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는 비난이 나온다. 대한민국의 미래인 MZ세대는 물론 일반 서민들이 집을 장만하는 꿈은 요원해지고 있다. 부동산 가격이 급등해 상대적으로 빈곤해진 무주택자를 뜻하는 벼락 거지라는 신조어도 이제는 식상할 정도다. 큰 정부를 지향했던 현 정부의 기조에서 한 발짝 물러나자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자유주의 경제의 사상적 기초인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의미도 한 번쯤 되새겨봄 직하지 않을까. 이명관 경제부장

[지지대] 억새와 수달, 그리고 군문교

관병식(觀兵式)을 보는 것 같다는 표현이 있었다. 옥수수밭이 춘원 이광수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나 보다. 바람에 서걱대는 갈대밭을 보면 또 어떤 느낌이 들까. 뭐 허투루 하는 괜한 걱정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갈대의 사촌격인 억새밭은 또 어떨까. ▶억새는 볏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식물이다. 근경은 옆으로 뻗고, 잎은 너비 1~2㎝다. 가장자리 톱니가 딱딱해 잘못 만지면 손이 베일 수도 있다. 꽃은 길이 20~30㎝로 9월에 핀다. 전초는 지붕 덮는 데 이용하고 뿌리는 이뇨제로도 사용한다. ▶억새라는 풀의 신상명세서다. 녀석들의 향연을 마음껏 볼 수 있는 들녘이 있다. 평택시 원평동 군문교 부근 억새밭이 그렇다. 이곳에 가면 파스텔 톤으로 펼쳐지는 억새들의 향연을 구경할 수 있다. ▶바람보다 먼저 눕는 김수영 시인의 시구처럼 군문교 수변길은 이맘때면 제법 진지하다. 도회지에선 바람 한줌 없이 뙤약볕만 쏟아지지만, 이곳에 서면 바람의 향연도 펼쳐진다. 원평동이란 이름은 원래의 평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군문교 부근에서 안성천으로 가면 제방으로 만든 수변길이 일직선으로 멋지게 펼쳐지는 모습도 제법이다. 한여름의 초록빛이 가로수에 물들고 걷기 좋은 길이 아득히 이어진다. 그래서 누구나 걷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한다. ▶최근 이곳에서 수달 서식 흔적이 발견됐다. 수달은 천연기념물 제330호이자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이다. 평택시는 군문교 일원을 수달과 사람이 공존하는 여가공간으로 조성한다고 한다. 군문교에서 바라보는 노을은 덤이다. 뉘엿뉘엿 떨어지는 붉은색 구름의 향연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최근에는 수달 서식현황 조사용역 최종 보고회도 열렸다. 용역은 지난해말 군문교 인근에서 수달이 서식한 흔적이 발견됨에 따라 진행됐다. 평택시는 군문교 일원에 꼬리명주나비 서식지 등도 조성한다. 시는 이달 중 한강유역환경청과 사전협의한 뒤 하천점용허가를 받아 연말 착공할 예정이다. ▶자연의 넉넉한 품 안에서 억새와 수달의 어울림도 꽤 근사한 수채화가 아닐까. 앞으로 군문교에서 펼쳐질 억새와 수달의 공존이 기다려지는 까닭이다.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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