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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청은 교통안전대책으로 교통사고가 점점 줄어 많은 개선이 이뤄지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자동차보험업계는 오히려 증가했다고 상반된 통계를 내놓아 논란이 일고 있다. 이는 도로교통환경의 안전성 여부를 단순히 교통사고 발생 빈도로 측정하려는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식적인 통계로 나타나는 교통사고의 감소는 물론 경찰과 도로관리 당국의 지속적인 안전개선 노력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는 지금은 폐지됐긴 하나 ‘카파라치’에 의한 고발과 안전띠 미착용 및 음주운전에 대한 경찰의 집중단속의 결과가 크게 작용하였다고 본다. 현재 일반적으로 접하는 교통사고 통계는 경찰에 보고된 사고만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사고의 심각도가 낮은 교통사고는 당사자, 또는 보험회사 간의 합의를 거쳐 처리되므로 통계에서 누락된다. 따라서 보험회사의 사고통계가 교통안전 상황을 더 정확하게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WHO(세계보건기구) 통계에 따르면 하루 평균 3천242명(2002년 기준)의 세계인이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우리나라의 교통사고 사망률은 10만명 당 22명이다. 더욱이 우리나라 14세 이하 어린이 교통사고 사망률이 10만명 당 7.8명으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가 중 1위다. 또 14세 이하 어린이 사망의 주원인이 질병이 아닌 안전사고다. 특히 교통안전사고로 매년 약 600명의 어린이가 목숨을 잃고 3만명의 어린이가 병원치료를 받는다. 이처럼 교통사고가 빈발하는 첫째 원인은 도로 시설의 절대 부족이다. 혼잡 상황에서 운전자는 무리한 운전, 때로는 위법운전의 유혹을 받는다. 두번째는 도로시설 자체와 운영의 불합리성이고, 세번째는 사고 처리의 비합리성이다. 해마다 개정돼 전문가조차 어떤 내용이 바뀌었는 지 조차 잘 모를만큼 도로교통법 관련 법령의 혼란으로 운전자를 당혹케 하기가 일쑤다. 지금까지의 교통안전정책은 교육과 홍보, 그리고 규제를 근간으로 해왔다. 과속, 신호위반, 음주운전 같은 극단적 행위를 예방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교통사고 증감의 공과를 따지는 소모성 논쟁보다는 우선적으로 운전자들이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는 도로환경을 먼저 조성해야 한다. 근원적인 교통대책을 세우는 것도 민생대책이다. 당국의 적극적인 추진을 거듭 촉구한다.
4·15 총선이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승리로 끝남에 즈음하여 탄핵소추의 취하 문제가 거론되는 것은 이해한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철회설 역시 있을법 하다. 이미 대통령에 대한 신임 평가가 내려진 마당에 재판 계류는 의미가 삭감된 점을 본란은 앞서 시인한 바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방법이다. 우리는 소추가 국회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취하 역시 국회가 해야한다고 보는 것에 흠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이 또한 소추 의결정족수와 같은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취하가 가능하므로 야당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한데, 제17대 국회가 오는 5월29일 이후 원 구성이 가능한데 어려움이 있다. 다시 말하면 현 임기인 16대 국회의 취하 의결이 기대하기 어렵고 17대 국회에서 하자니 대통령의 직무정지 기간이 더 오래 가는 것이 난제인 것이다. 한나라당은 여전히 탄핵소추는 헌법재판소에 귀결을 맡기자는 생각을 굽히지 않고 있다. 미루어 짐작컨대 이는 탄핵소추가 헌재에서 받아들여지든 기각되든 상관없이 이렇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적 권력 구조의 순기능이라고 보는 것 같고 이를 또 탓할 수만은 없다. 헌재도 정치상황에 고려하지 않고 법리절차에 따라 예단없이 재판을 진행하겠다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이런 가운데 요구되는 것은 명실공히 여대야소의 집권 여당이 된 열린우리당의 정치력이다. 제16대 아니면 17대 국회에서 소추취하를 의결하는 것도, 한나라당을 설득하는 것도 모두 열린우리당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렸다. 이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대화정치, 상생의 정치를 해야하고 소추취하 협상은 이의 첫 시금석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또 이런 분위기 조성을 숙성시키는 덴 재개된 장외 촛불집회 같은 건 결코 유익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열린우리당이 대통령의 탄핵소추 자체를 원천적으로 매도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비록 총선 민심을 통해 탄핵소추가 정치적으로는 패하였지만 그 시점에선 의미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은 국회의 의결인 데 있다. 여소야대의 국회 의결을 부인해서는 여대야소의 국회 의결도 존중될 수 없음을 깊이 성찰하여야 한다.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명령을 받은 정인지 등은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선대 육조(목·익·도·환·태조·태종)의 덕을 중국고사에 비유해 칭송한 서사시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세종 27년(1445년) 10권 5책 125장으로 나온 한글 최초의 문헌이 바로 용비어천가다. 최근 시흥시청 공무원들의 소식지 ‘늠내바람’이 발간됐다. 공무원들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은 늠내바람 창간호(계간지)는 35쪽 분량으로 1천500권이 제작, 시 소속 공무원과 전국 자치단체, 사회단체 등에 보내졌다. 그런데 ‘꽃을 든 남자와 나비를 닮은 여자’란 제목의 장문의 한꼭지 인터뷰 기사가 유독 눈에 띈다. 시장 부부의 가정 생활을 밀착 취재하고 쓴 3쪽짜리 탐방 글이다. 시장의 고향에서 학력, 결혼, 공직생활, 포상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적고 있다. 부시장을 지낸 뒤 2년여만에 민선시장으로 복귀한 것을 영화 ‘터미네이터’ 끝장면 대사 ‘나느 반드시 되돌아 온다(I will be back)’와 비유했고 취미나 부인의 봉사활동까지 소개하고 있다. ‘시흥의 짱’,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작은 거인’ 등으로 표현하거나 소제목을 뽑고 부부의 다정한 모습을 담은 사진 등을 무려 5장이나 실는 파격에 가까운 편집까지 단행했다. 이 기사를 읽은 다른 자치단체, 사회단체 관계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지 매우 궁금하다. 늠내바람의 편집행태나 관련 글을 탓하려는 게 결코 아니다. 다만 객관성이 결여된 글은 많은 오해와 논란을 불러 올 위험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기록성이 있는 인쇄물인만큼 보다 신중한 접근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쓸데 없는 걱정이 되길 바란다. /이 동 희 (제2사회부 시흥) dhlee@kgib.co.kr
바이런과 셸리, 그리고 키치는 19세기 초반 낭만주의 시대에 별처럼 빛났던 시인들이다. 바이런과 셸리가 낭만주의의 시발점이 된 ‘슈트롬 운트 드랑(질풍과 노도)’의 세월을 살았다면 키츠의 삶은 좀더 은밀하고 영적(靈的)인 향기로 채워졌다. 바이런은 ‘시단(詩壇)의 나폴레옹’이었고,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으리’라던 셸리는 인류의 개조를 꿈꾸었다. 셰익스피어의 진정한 후계자였던 키츠는 고전에 뿌리를 두고 지극히 미학적인 예술세계를 지향했다. 바이런의 뜨거운 정열이나 셸리의 웅변에 비해 키츠의 정서는 섬세하면서도 단아했다. ‘희랍의 옛 항아리’라는 詩에서 키츠는 “들리는 멜로디는 달콤하다 / 들리지 않는 멜로디는 더 달콤하다”고 노래했다. 바람을 맞으면 저절로 울린다는 에을리언 하프처럼 섬세한 감성을 지닌 키츠는 1821년 이국 땅에서 연인 패니 브라운이 준 흰색 조약돌을 손에 꼭 쥔채 폐결핵으로 숨졌다. 키츠의 묘비명(墓碑銘)엔 그의 유언에 따라 이렇게 씌었다. “여기 물 위에 이름을 쓴 자 잠들다” 묘비명은 죽음의 형식이자 매장의 양식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인의 공적을 기리는 취지는 같다. 서양에선 교회 내에 매장하는 풍습에 따라 석관의 뚜껑에 묘비명을 새겼다. 우리 나라는 입석(立石)에 치적을 열거함으로써 고인의 명예를 빛냈다. 한때 조선 선비들 사이에선 스스로 짓는 묘비명, 즉 자명(自銘)이 유행했었다고 한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숨지기 나흘 전 4언(言)24구(句)로 이렇게 자명을 썼다. “나면서부터 크게 어리석었고 / 자라면서 병이 많았네 / 말년에 외람되게 벼슬이 높았네 … 근심 속에 즐거움 있고 / 저 세상으로 떠나며 생을 마감하는데 / 다시 무엇을 구할 것인가” 안분지족(安分知足)하고 삶에 감사하며 떠나는 마음 가짐이 표연하다. 올해 73세인 원로작가 한말숙씨는 지난해 “평생 감사하며 살다가 한점 미련없이 생을 마치다”라고 미리 남기는 유서를 썼다. 퇴계의 자명을 연상케 한다. 이 생각 저 생각이 많을 때는 자명을 쓰고 싶다. /임병호 논설위원
지난주 오래간만에 아내와 함께 영화를 봤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예수의 수난)는 미국 박스 오피스에서 3주동안 흥행 성적 1위를 차지하고 3월 셋째주 현재 입장수입만도 3억달러를 달성하고 있는 인기 영화다. 자막이 걷히면서 검은 화면에 “이사야서 53장”의 한구절이 떠오른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로 인함이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 말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예수의 삶이나 기적이 아닌 고난과 죽음에 초점을 맞추었음을 의미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중 마지막 만찬을 끝낸후 기도하기 위해 갔던 게세마니 동산에서 배신자 유다의 안내를 받은 바리새인들에게 체포되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가시기까지 가장 극적인 12시간의 수난 장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로마총독 ‘본시오 빌라도’는 바리새인들의 주장에 따라 그 앞에 끌려온 예수를 어떻게 처리하여야 할지 고민한다. 예수가 태어난 ‘갈릴레아’ 지역은 로마황제가 헤롯에게 부여해준 봉토였기 때문에 빌라도는 예수를 헤롯에게 보냈는데 헤롯 또한 예수에게서 별다른 죄목을 찾지 못하여 빌라도에게 다시 돌려 보낸다. 여기서 빌라도와 헤롯은 공생관계임을 알 수 있다. 로마총독은 유대인을 다스리는 수단으로 종교 지도자인 헤롯을 활용하였던 것이다. 예수를 고발한 죄목은 성전 모독이었다. 예수는 성전을 허물고 3일만에 다시 지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죽은 후 3일만에 부활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외에 유대인들이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결정적 이유는 예수가 자신을 그리스도, 즉 사람들을 해방시켜줄 ‘메시아’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대사제들은 빌라도에게 예수가 로마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모함하므로 예수를 심문하지 않을 수 없도록 궁지에 몰아 넣는다. 실제 예수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바친다”고 말씀했다. 빌라도는 예수를 정치범으로 매만 때려서 석방시키려 한다. 이 태형과정에서 예수의 고문장면이 너무나 끔찍하여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관객이 생길 정도로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예수역을 담당한 짐 카비젤은 이 장면을 생동감있게 표현하려고 어깨뼈가 탈골되는 등 힘든 장면을 투혼의 연기를 보여 줌으로써 예수의 험난한 수난의 여정을 감동적으로 승화시켰다. 빌라도는 만신창이가 된 예수를 군중에게 보이며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하고 묻지만 피에 굶주린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외친다. 딜레마에 빠진 빌라도는 군중들이 원하는 대로 처형토록 부하에게 명령한다. 예수는 70kg 무게의 십자가를 지고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예루살렘거리를 지나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 낮 12시에 십자가에 못박힌다. 예수의 수난을 지켜 보면서 성모 마리아는 “내 아들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 고통을 벗어난단 말인가”하고 애통해 하는 모습에서는 눈물이 난다. 마리아역에는 마이아 모겐스턴이 맡았는데 그는 영화를 통하여 사랑하고, 믿고, 용서하는 헌신적인 모습을 훌륭히 소화했다고 생각한다. 십자가에 매달린지 3시간이 지난 오후 3시에 예수는 “다 이루었도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하고 말하면서 운명한다. 이 영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이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한 것으로 비춰져 반유대주의 논쟁을 일으키며 제작 초기부터 엄청난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바티칸 교황청에서 영화를 직접 시사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영화는 성서에 있는 사실을 그대로 표현한 작품”이라는 언급을 하여 논란의 대상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두시간 동안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나는 이해인 수녀의 ‘기도’라는 시가 생각났다. /조성헌.前 안성군수
옛날에도 나름대로 사훈 같은 게 있었나 보다. 개성 상인들 사이의 공익단체였던 송도계의 계훈(契訓)에 ‘콩이 되지 말고, 메주가 되어라’는 말이 있다. 됫박속의 콩을 땅에 부으면 뿔뿔히 흩어져 버리지만, 이 콩을 삶아 짓이겨 메주를 만들어 놓으면 굳게 결속함에 착안, 함께함의 소중함을 강조했던 부분이다. 또 홍길동전을 지었던 허균의 스승이면서 진보적 사상의 소유자인 조선시대 이달(李達)은 당시 서족(庶族)으로 원주 손곡에 묻혀 살았는데, 서족 출신의 문사(文士)들이 함께하는 삼분계(三分契)를 만들고 계훈을 정해, 소속 계원들의 이익이나 주장·재능·불행·명예 등 그 모든 것의 십중삼분을 서로 양보하고, 인화를 도모하자는 뜻의 정신적 규정들을 강조했다. 이렇듯 한국적 집단에서 인화는 예로부터 가장 소중히 여겨진 덕목중 하나였다. 필자가 가끔 우리나라 각종 기업과 단체들의 사무실을 찾다보면, 여러 사훈들 중 아직도 가장 으뜸을 차지하는 것 역시 인화단결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인화가 잘 안되기 때문에 혹은 고금을 불문하고 인화의 소중함이 함께 공유되기 때문에, 인화를 사훈으로 채택하는 것이리라. 요즈음 미국내 많은 기업들 사이에서도 동양적 사고의 발상이라 볼수 있는 ‘인화’를 기업방침으로 중요시하는 조짐이 완연하다. ‘인화’의 성격을 띤 사훈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제너럴 모터스의 사훈이 MR(Meaningful-Relation)로 인화를 통한 ‘뜻있는 관계’, 즉 운명공동체 형성을 지향하고 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자꾸만 정서적으로나 인심적으로 메말라만 가고 있는 우리사회 전반적인 세태들을 생각해 보면 씁쓸하기만 하다.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정보화의 물결 속에 설익은 구미제국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닥쳐온 바람에 우리 전통사회의 ‘메주’가 ‘날콩’으로 환원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얼마지 않아 심마니들의 본격적인 활동이 이어지는 푸르른 5월이 된다. 아마추어 심마니들 사이에서는 삼을 보게 되면 엔(N)분의 일(자기들끼리 사용하는 속어)이라고 해서 최초로 다수의 삼을 발견한 사람이 여타 일행 동료들에게 삼을 나눠 주는 나름대로의 불문율이 있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사훈으로 널리 표방되는 인화란 말이 하나의 구호로서 그칠 것이 아니라, 이를 실천하며 각 가정마다 어릴때부터 꾸준히 가르쳐 나감으로써 이 사회에서도 상생의 정치와 서로돕는 풍토가 무르익는, 그래서 뭔가 비전이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비단 필자 혼자만의 생각일까. /김석우.대한적십자사 경기지사 사무국장
지구대에 근무하는 경찰관이다. 요즘 들어 차량 내 절도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어 각별한 주의가 요망된다. 특히 심야시간이나 새벽시간대에 주택가나 도로 야외주차장에 주차한 차량을 상대로 절도가 발생하고 있다. 절도범들이 노리는 물건은 차량 내에 있는 현금이나 귀중품은 물론이고 고가의 카오디오가 주 범행의 대상이 되고 있다. 범행 방법으로는 철사나 노끈을 이용하여 차량 문을 열거나 차량의 보닛 속에 있는 경보기 선을 절단한 뒤 예리한 도구를 이용하여 차량 문을 열고 침입하는 방법, 차량의 유리창을 깨고 침입하는 방법 등을 사용하고 있다. 야간에 차를 주차할 때는 이점을 유념하고 주차를 했으면 한다. 차량 내 절도를 방지하기 위한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차량 경보기를 설치하는 방법이 있는데 경보기를 설치할 경우 선을 되도록 보닛 안쪽으로 설치하도록 하고, 차량 경보기 중에서 양방향 경보기를 설치하는 것이 절도예방에 유리하다. 현재 일반 승용차나 승합차는 시정장치를 해도 100% 안전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차량 내에 현금이나 귀중품은 두지 않도록 하고 고가의 차량 내 장착물은 부착하지 않는 것이 절도예방의 지름길이다. /홍정수·성남중부경찰서 단대지구대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입은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의 이변 중 하나다. 비록 교섭단체구성 요건의 인원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 민주당과 자민련을 제치고 3당으로 떠오른 것은 괄목할만 하다. 진보정당의 원내 진입은 제1공화국의 진보당 이래 처음이다. 그러나 정치토양은 진보당 시절과는 아주 판이하다. 조봉암 등을 중심으로 한 진보당은 극우의 안보관 시각에 의해 궤멸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법익의 보호속에 대중적 좌파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 작금의 여건이다. 그리고 원내 진입에 성공한 것은 곧 대의정치의 책임 부하다. 이에 즈음하여 민주노동당에 한두가지 석명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아 묻고자 한다. 당의 사회주의 강령이 유럽의 좌파정당과 어떻게 다른건 지 궁금하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는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는 것으로 안다. 그렇다고 제3의 길을 추구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연방제 통일방안이 북측 방안과 어떻게 구분되는 건지도 모르는 민중이 많다. 분배 우선의 정책이 과연 책임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인 지도 알고 싶다. 담보할 수 있으면 성장에 우선하는 분배 수요를 무슨 방법으로 충당할 것인 지도 의문이다. 아울러 당부할 것도 있다. 이제 더 이상 투사나 투쟁의 수단화는 원내 정당의 자세가 아니다. 대화와 설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정책 구현의 방법 또한 장외가 아닌 장내에서 추구하여야 한다. 주먹을 쥐고 구호를 외쳐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숙련된 새 면모를 보고 싶다. 또 있다. 계급사관에 의한 급진적 좌경이 당의 지상주의가 아니라고 보아 보수와의 차별화가 합리적으로 있어야 할 것으로 안다. 시장기능을 존중하고 보다 유연한 노동시장의 유도 또한 기대하고자 한다. 민주노총을 둔 민주노동당의 세는 이미 막강하다. 당비를 꼬박꼬박 내는 진성 당원을 갖고 있기는 국내 정당 가운데 유일할 정도로 조직의 응집력 또한 철저하다. 노동귀족의 출현을 자제하는 노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개혁은 폭력이 아니다. 불법적 폭력에 의해 시도되는 개혁은 개혁이 아니다. 무엇보다 민중사회를 편안하게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