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주실 뽑아내는 누에고치의 숨소리처럼 어머니의 쪽진 머리 빗어 넘기는 참빗 소리처럼 현을 희롱하는 떨림의 소리 가느다란 손끝으로 세월을 바느질한다 뒷산 숲속의 솔바람 소리처럼 새싹 어루만지는 이슬비 소리처럼 오르내리는 현의 음률이 바람의 나래에 앉아 들을 지나고 구름을 애무하며 바다 위를 난다 황혼의 금빛 물결 노를 저으며 석양 노을 날아가는 기러기 나래 소리 고향집 초가지붕 새끼줄을 타고 돌담 사이로 미끄러져 내려 오다 나비처럼 사쁜사쁜 날아오르는 저 떨림의소리 백미숙 제주시 출생. <한국문인>으로 등단. 시집 <나비의 그림자> <리모델링하고 싶은 여자> 창시문학상새한국문학상황진이문학상 본상 수상 한국문인협회ㆍ국제펜한국본부한국수필회 회원. 창시문학회장 역임문파문학회 명예회장
여린 너의 입술에 앉고 싶다 고향집 마루에서 그랬던 것처럼 노을이 길게 그림자 드리우듯 내게 남은 것 다 끌어내어 자줏빛 사랑 전하고 싶다 거미줄처럼 토해 내고 아침 이슬에 몸 부리듯 환하고 투명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어디로 가려는 것인지 그렇게 무덥던 날 몸부림을 알지 못했던 순수를 용서받고 싶다 고구마꽃 여린 입술에 마지막 소망을 얹는다. 조미애 전북 진도 출생 전북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풀대님으로 오신 당신> <흔들리는 침묵> <풍경> <바람 불어 좋은 날> 전북문학상새천년한국문인상전북여류문학상전북예술상 수상
햇살이 분진처럼 날아 오르고 어머니는 벚꽃을 이고 감자를 심으신다. 無名의 바람결이 아직 여유롭지 않아 어머니의 흙발이 어색하다. 어머니는 山門에 겨울을 내려 놓으시고 길고 긴 여행에서 막 돌아온 사슴처럼 하얗게 벚꽃 피어 오르는 밭고랑을 걸어 나오신다. 밤새도록 비바람치고 불가능을 노래했던 어머니의 겨울은 가고 없다. 허리 숙여 하늘 위로 납작 엎드린 새처럼 어머니는 땅으로 힘껏 날으신다. 굵고 주름 지어진 손 마디가 육체의 길고 긴 더듬이가 되어 그 봄의 꽃가루를 바르고 계신다. 지금 어머니는 단장 중이시다. 잔약한 어머니의 등에 가슴 시리도록 하얀 벚꽃 피어 올랐다. 아, 어머니는 벚꽃이었다. 이 봄, 영원히 지지 않는 나의 벚꽃이었다. <제28회 경기여성 기예경진대회 백일장 운문부 최우수작품>
여고행 버스 안에서 훅 끼친 그 냄새 초경 꿈도 아닌데 몸이 왜 저릿한지 쓸쓸히 되짚어보는 꽃들의 비린 行狀 - 그때마다 핏자국쯤 웃으면서 치웠거나 - 패 하나 못 잡은 채 피박이나 썼거나 - 문 닫은 가을 절간에 빈 달만 드높거나 달의 운행 따위 따질 일도 이제 없고 후끈한 열꽃이나 열적게 씻는 녘을 閉와 完, 아슬한 행간 낭화들만 난만해라 정수자 경기 용인 출생. 1984년 세종대왕숭모제전 전국시조백일장 장원 등단. 아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시집 <허공 우물> <저녁의 뒷모습> <저물 녘 길을 떠나다> <탐하다> 중앙시조대상, 현대불교문학상, 이영도시조문학상, 한국시조문학상, 수원문학작품상 수상
오늘 당신의 어쩌면 빈 우편함 속으로 편지 한통, 어쩌면 마음 한구석 보여주는 음악 한 소절, 당신이 미쳐 보지못한 채 열어버린 햇살 한줌 공기 중에 흩어져 혼자 놀고 있을지 모릅니다. 외롭다고 눈물 흘리며 창문 밖에서 툭툭 떨어지는 문 열어주세요. 당신에게 보냅니다. 최자영 경기 안성 출생 <한국문인>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ㆍ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시인협회 사무국장
달과 별이 밤새 빚어 놓은 붉은 연지곤지 바르고 선 조선 명기의 수줍은 미소 임께 보일 양 새벽부터 길가 서성이다가 들키어 홍안이 되었는가 물안개도 오금 저려 우뚝 서 버린 강변에 이슬 머금은 청초한 소녀의 입술아 내 무지는 그대 보기가 부끄럽다 남몰래 피었다 지는 생의 끝자락 한 장씩 떼어 강으로 보내면서도 웃을 수 있는 너는 누가 보낸 아름다운 영혼이냐 벌나비에게 먹이고도 내가 이리 취할 수 있음은 젊은 날 나에게 향만 남기고 달아났던 아름다운 그 첫사랑 아니냐 임현택 전북 고창 출생 <창조문학>으로 등단 시집 <양평터미널> <연못에 든 달> 등 5권 한국문인협회양평문인협회 회원 국제펜한국본부 경기지역위원회 부회장
겨우내 빈 약속으로 사는 기 죽은 하늘은 문 틈 사이 한 줌 햇살도 실낱처럼 믿고픈 초승달빛도 작은 빗방울조차도 마른 땅에 보여주지 않는다 종종걸음 꼬깃꼬깃 쌈짓돈 털어 게으른 하늘에 이슬방울로 어깨 다독여 기우제 지냈다 때 아닌 폭풍우 동반하고 엉뚱한 혼령 돌아와 창문이 멍들고 등불이 흔들린다 그리하여 봄이 오겠는가 그래도 봄은 오겠는가 최연숙 전남여수출생. <예술세계>로 등단 예술세계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시집 <밥 차리미 시인의 가을>
설탕이 사르르 녹고 있다 말 없는 말들 커피잔 파문에 감기며 저녁해를 끌고 가는 긴 그림자 통유리창 밖으로 흐르는 흐릿한 강 시인들이 하얀카페에서 강물을 보고 있다 문득 굵은 빗줄기가 강물을 두드려 준다면 강물은 어떤 노래를 부를까 연필을 깎아 수첩에 시를 쓴다 향나무 연필향이 강의 속내를 종이 위에 내리는 사각사각 글발 말 없는 말을 주고 받는 시인들 강은 자유로自由路를 따라 황해와 섞이면서 이따금 얼음덩이가 깨지는 소리를 지른다 강물에 반쯤 잠긴 하얀달을 우右로 돌아 천천히 가고 있다 함께 부르고 싶은 노래를 사각사각 쓴다 이솔 (본명 李聖子) 함남 함흥 출생. 수도여사대 국문학과 졸업. <시문학>으로 등단. <푸른 시학상> 수상. 시집 <수묵화 속 새는 날아오르네> 등 다수 국제펜한국본부ㆍ한국시문학문인회 회원. 한국현대시인협회ㆍ한국시문학아카데미 회원.
퇴근 길 시장 어귀 떨이로 사온 푸성귀 쑥국에 씀바귀 취나물 집안 가득 봄빛 물결 일렁인다. 창문 밖 소소리바람은 고향소식 물어오고 콜록콜록 아직 떠나지 못한 어머니의 겨울 전화선을 타고 인사한다. 울타리에 두릅은 자꾸 고개 내밀고 텃밭에 냉이 달래 돌나물이 벌써 나 있다. 주말에 내려가겠다는 한마디에 햇살처럼 환해지는 어머니의 목소리, 앞마당 매화 향이 묻어난다. 이분희 전북 임실 출생 <문예비전>으로 등단. <글타래> 동인
1 오늘은 코끝을 스치는 싱그러운 바람과 봄이 오는 소리만 들립니다. 2 하얀 눈雪을 한 입 머금은 노란 복수초를 봅니다. 3 꽃샘 눈이 하얗게 내린 아침엔 많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싶습니다. 정순영 경남 하동 출생. 1974년 <풀과 별>로 등단. 부산시인협회ㆍ국제펜한국본부 부산지역위원 회 회장ㆍ동명대학교 총장 역임. 시집 <조선 징소리> <추억의 골짝에서> 등 다수. 현 세종대학교 석좌교수
엄동설한 맺힌 恨 가슴에 품다 넘쳐 토해낸 설움 동백 숲 이파리 사이사이 숨겨 논 속내들 붉은 한 점 핏방울로 툭, 툭 툭!! 대지를 적신다 황보광 (본명 황정자) 이화여자대학교 졸업. <시와 비평>(시), <문예사조>(수필)로 등단. 시집 <나목의 노래><도시 배롱나무의 꿈> 등 다수. 미당 서정주 시회상ㆍ한국자유시인상ㆍ 문예사조문학상 대상 수상. 한국문인협회ㆍ국제펜한국본부 회원.
너는 우주의 장자다. 네 몸의 열이 육천 도가 넘는다고 한다. 네 몸이 그만큼 뜨거운 것은 네가 그만큼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너는 희망의 날개다. 네가 솟아야 지구도 솟구친다. 너는 오로지 밝고 빛날 뿐 어둠은 근처에도 두지 않는다. 너는 꿈의 과녁이다. 꿈의 중심, 그 중심의 초점이다. 억겁이 가도 시들지 않는 열정으로 오로지 꿈을 위해 자리를 편다. 너는 사랑의 천사다. 네가 있어야 뜰에서 나무도 자라고, 마음에 꽃을 안고 일터로 나간다. 너는 하늘의 눈이다. 네가 눈뜨면 세상도 눈뜨고 두려움도 사라진다. 김년균 전북 김제 출신. 제24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역임. 현재 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 시집 <장마>(1974년) 이후 <사람> <자연을 생각하며> 등 다수. 제20회 한국현대시인상ㆍ제19회 한국예총예술문화상 수상
겨울은 발도없이 성큼성큼 걸어온다 혹한에 그려 보는 따뜻한 저 한봄을 이번엔 두다리 가진 내가 마중 가련다 혹독한 겨을날에 받고 싶은 따산 햇볕 동산에 썩 나서서 반갑게 맞고 싶다 발자국 소리도 없이 철을 따라 오는 봄 이현주(아호 靑波) 1940년 경기 평택 출생 2007년 경인시조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2009년 시집 <춘산을 오르며>수필집 <앞만보고 걷다가 뒤돌아보는 인생> 2012년 경기시조시인상 수상
동백꽃이 지는 날은 완도나 진도 그 어디 섬에나 가 볼까나 벼랑 밑 파도가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 위에 동백꽃이 지는 걸 보러 갈까나 하늘이 너무 멀어서 차라리 가까운 바다에 지는 것일까 밤하늘에 별들이 수놓아 있듯이 물 위엔 왼통 꽃잎뿐 넋이여 떠다니고 있고나 그걸 보러 갈까나 갈까나 서정태(아호 又下) 1923년 전북 고창 출생 1939~1943년 일본 유학 1946~1978년 언론계 종사 1986년 첫 시집 <천치의 노래> 2013년 시집 <그냥 덮어둘 일이지> 출간
새봄이 들어선다 그 봄이 다시 온다 대문을 열자 겹문을 열자 해마다 해마다 키 작은 냉이도 민들레도 다시 피는데 왜? 영장인 사람이 회춘을 恨하는가 마음속 어둡고 젖은 내 자리를 비워 환한 봄볕에 이 자리를 말리자 천지에 공평한 봄이 왜 나만 피하겠는가 외려 봄의 자리에 내가 들어앉아 봄만 나무란다 영원한 봄에 내 자리를 내주자 이춘우(본명 이만길) 1929년 전남 영암 출생 시집 <다시 부른 목가>(1989) 지리산 중군리에 보덕선원 건립 (1989~2009), 수도 생활 저서 <관음심경비해>(1990) <불경의 거울>(2003) 시집 <霜降 이후>(2012) 한국문인협회ㆍ한국시인협회 회원
녹기 전의 저 눈밭은 얼마나 눈부신가 지기 전의 저 꽃잎은 얼마나 어여쁜가 세상의 값진 것들은 사라지기 때문이리 사랑도 우리의 목숨도 그래서 황홀쿠나 임보(본명 강홍기) 1945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과 졸업 196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목마일기> <날아가는 은빛 연못> <자연학교> 등 다수 논저 <현대시 운율 구조론> 등 다수 충북대 교수 역임 (사) 우리시진흥회 평의원
소한 대한 다 지나고 창 너머로 보이는 세상 봄이 온 듯 햇빛이 눈부시다 벌컥 문이 열리고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 찬바람과 함께 얼음 한 자락씩 안고 온다 내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보이는 것만 마음을 지배하던 시절 수면 아래의 더 크고 넓은 것을 위해 꿈속을 뒤져서라도 찾아봐야겠다 계절이 나보다 먼저 알고 얼음장 밑에서 수런대는 봄 나이 든 다음에야 들리는 소리 보이지 않는 소리까지 듣고 싶다 김행숙 경기 파주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졸업.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유리창 나비> <햇살 한 줌> <볼륨을 높일까요> <여기는 타관> 외 영역시집 <램프가 켜지듯이> 한국문인협회ㆍ한국현대시인협회ㆍ국제펜한국본부 회원, 한국기독교문인협회 감사,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어느 지인이 정월 덕담으로 세월을 아끼지 말라 하네 평생 소금처럼 절제하고 살아온 내게 아낌없이 살라하네 방향 없이 달려온 삶, 조금 더 후련하게 달릴 황야가 있을까 나를 전율케 하는 만남이라도 있을까 내 지평선에 태양이 머무는 동안 하찮은 것에 목말라 하지 말고 세상에 대해 겁 많았던 미련을 버리고 지혜를 찾아 여유로워지라는가. 남궁연옥 시집 <나는 늘 그 자리에 있다> <하나의 이름으로>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펜한국본부 회원 한국문학예술 양평지부장 경기도문학상 수상
빛을 모아 불이 되고 싶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 세상을 황홀하게 하고 싶었다 바람아 불어라 천지간 붉은꽃으로 물들여 세상을 하나 되게 하라 저, 용광로의 쇳물에 나를 넣어 달인의 몸을 통과하게 하라 삼천리 방방곡곡 숨막히는 불꽃의 지문 찍게 하라 지은경 서울 출생 시집 <사막의 꽃> 외 6권, 칼럼집 <알고 계십니까> 평론집 <최승자 시 연구> <한국현대시 사회적 변화상 수용 연구> 황진이문학상 대상 수상 한국문인협회ㆍ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국제펜한국본부 경기지역위원회 운영위원 <인사동 시인들>동인회장, 월간 <신문예> 발행인
마음이 너무 무겁고 몸도 많이 어두웠구나. 이제는 빈 그릇이 되어, 쓸지 않은 눈밭으로 내 안의 지옥을 찾아, 점 하나 찍고 선 하나 그을 밖에야! 홍해리 1942년 충북 청원 출생 고려대 영문과 졸업 시집 <投網圖>로 등단 시집<푸른 느낌표>등 16권 시선집 <시인이여 詩人이여> 등 3권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 1,2대 이사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