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들은 나이가 들자하나 둘 그동안 쌓아둔 세월들을방바닥에 와르르 쏟아 붓고이민용 가방에 차곡차곡 담는다.가만히 내려다보는 어미 가슴은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질듯 아프고아름답게 곱게 자라준 뜨거운 시간들이억새풀처럼 힘없이 손 흔들며 안녕을 고한다.사람은 때가 되면 보따리를 꼭 싸야 하나보다나도 말없이 보따리 싸서 이곳에 삶의 뿌리를 내리듯내 딸들은 한수 더 떠서 비행기를 탄다.텅 빈 허공이 내 방바닥에 떨어져 떼굴떼굴굴러다니고 자식들과 함께한 세월이뽀얀 수증기 되더니 내 눈에서 한없이 흘러내린다.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듯장롱 문을 열어보고 또 열어보고내 손과 마음은 정전되듯장작개비처럼 뻣뻣해지고떠나버리고 난 뒷자리에는꺼져버린 신호등마냥차갑게 식은 내 사랑만 가득 남아 있다. 정인자경남 남해 출생.<문학 21> (수필) <문예비전>(시)으로 등단.한국문인협회 화성지부 5대 지부장 역임. 한국수필가협회 회원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수원시인협회 회원
그대는 정녕정녕 그대는먼길을 걸어 걸어고단한 꿈 눕히셨나요꿈 밖에 흩날리는 꽃잎모두 다 보셨나요 김영재전남 승주 출생197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시집 『다시 월산리에서』등 다수중앙시조대상, 한국작가상, 이호우시조문학상가람시조문학상 대상 수상
정 조 대 왕 서 수 연뒤주 속 아버님 하늘가에 모셔두고애증의 궂은 시간 오려내어 잠재웠네구절초 낮게 핀 팔달산 바람 없는 양지녘에성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의 그리움무명의 벽을 넘어 화성장대 오르는데오로지 외곬으로 향한 그 하늘 별빛이여한 생애 가슴 서늘한 눈물의 思父曲백성사랑 위민정신 찬란하게 꽃 피우고수원벌 가슴에 품어 영원을 일구었네 <수원시 주최, 한국경기시인협회 수원시인협회 주관 제2회 정조대왕 숭모 전국백일장 대학 일반부 장원작품 >
원천호 냇가길에는잘 가꾸어 놓은 순결한 백합과 코스모스이름 모르는 들꽃살랑살랑 도리질하는 강아지풀푸르고 익숙하게 자리 잡고 피었다.내 어버이 살던 고향처럼천년을 지켜온 저 山세월을 품에 안고 냇물이 흐른다.밤이면 달빛되어오랜 세월의 흔적 숨겨놓고바람도 잠재우는 원천호.호수 냇가길은아련한 추억과 사랑이 숨쉬는데풀꽃 열매 속삭이는 기억가을 하늘처럼 높고 푸르다. 김순덕 강원도 영월 출생. <순수문학>으로 등단. 시집 사랑은 빚쟁이야 등 한국문인협회국제PEN한국본부한국경기시인협회수원시인협회 회원
애들이 어렸을 때서울에 일이 있어애 둘을 데리고 기차를 타고 갔다서울 역에서 내려애들 손을 잡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누비며서소문 쪽 길로 접어 들어남편이 일러 준 장소쯤에 가서좀 한적해진 길가저 아래로 보이는 철로 길의기차를 보고 있었다어리버리한 내 모양이 불안했던지엄마 여기 아는 길이야?아빠가 여기 있으랬어?큰애가 물어왔다나는 놀라 안심을 시키려고그럼 알지여기는 내 학교 길이었어기차 타고 와서 이 길로 해서학교를 다니던 길이란다사실 그랬다그 때 작은 애가 소리쳤다아빠!내 눈에도싱글거리며 잰 걸음으로 다가오는 남편이 보였다우리 삼모녀에겐 정말 좋은 순간이었다. 홍 명 희인천 출생(1932년).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대숲에서 묻는다 등 9권. 인천시문화상 수상. 한국문인협회한국현대시인협회국제PEN한국본부 인천광역시지역위원회 회원.
바람과꽃구름이밀회하는하늘과바다를숨 쉬는영혼의허물 벗는초록의 숨결소리예나 이제나한결같은童心은시간의강물을헤적이며달빛 밝은밤 하늘에은하수 길 트는별꽃으로 피어나新生의 아침을열어와라. 김 연 식서울 출생 .<시문학> <현대문학>으로 등단.단국문학상 수상 . <연성문학> 발행인농민문학회 회장 대행 역임시집 『내 안의 풍경화』등 19권 한국문인협회한국현대시인협회 중앙위원 국제PEN한국본부 인천광역시지역위원회 회원
시루봉 형제봉아버지 어깨처럼 든든하다.날마다 숲 향기 찾아천년수 약수터힘차게 오고 가면봄 여름 가을 겨울새롭게 태어나는 신비의 山.병든 몸 일으켜 세우고포근히 맞아주는어머니 앞가슴처럼초록 물결 넘실거리는골짜기에생명의 푸른 소리 흐른다. 허 정 예강원도 홍천 출생<문파문학>으로 등단한국경기시인협회문파문학회수원시인협회 회원
부들 숲에하루를 흘러온 시간몸을 내리면여울 밑바위 근처깊고 얕은 물속에서이름 부르는 소리한창 신나몰려다니다가은빛으로 튀어올라순간의 경계를 허무는 피라미들징검다리 한가운데 서면적막한 호롱에 불 밝히는부들 속 집 어딘가에서대답하는 아득한 나의 이름 경북 안동 출생. <문예비전>으로 등단. 시집 연꽃, 나무에서 피다한국경기시인협회 수원시인협회 회원이 계 화
허허 벌판잔가지 없는 나무에칼바람 불어와도나무는 봄을 믿고노래를 한다.그 노래 속으로 봄이 오는가,허리 낮춰 절하는그 나무 밑수 없이 오갔지만몸을 낮추는 기다림오늘에서야 알았다.삶 주변에서폭설 같은 마음,장맛비처럼 진저리나는가시 돛친 말,지울 수 없는 흔적, 혹 남기지 않았는가.나는 나무를 쳐다 보며 산다. 김 석 규(金錫圭)경기 화성 출생.<문예비전>으로 등단. 화성시농어민단체협의회장 역임.화성문인협회한국경기시인협회수원시인협회 회원
세상의 밑바닥에 있는 것처럼가슴이 무거운 돌멩이로 채워지고빗방울도 연잎도 나를 감싸주지 못하는 날뼈마디가 녹는 사랑이 있어서열매와 꽃을 떠나보낸 나무처럼헐렁한 몸에 새겨지는 주름들을 보네아름다운 열매와 꽃으로 흔들리던세상 너머의 또 다른 나무를 생각하네빈 몸에 채워지는 따사로운 햇살과낡아가는 기억들을 일으켜 세우는 바람 한때는 큰 나무의 견고한 뼈마디였고한때는 살이었고 피돌기였다네그 나무를 지탱시키던 은빛 이파리였다네 이제는 늙어버린 나무를 위해꽃이 지는 소리에 어두운 귀를 캄캄하게 열어놓는내 몸은 조금 더 헐렁해져도 좋겠네꽃과 열매가 떨어진 헐거운 그 자리에 신화의 바람이 다시 채워지고 있네. 박현솔제주도 출생. 동국대 대학원 문창과 졸업아주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1999년 한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2001년 현대시 신인상 수상.한국경기시인협회수원시인협회 회원.시집 <달의 영토> <해바라기 신화>
설악산 오색약수터 한참 지나 인적 드문 계곡 깊숙한 바위틈에서 보았다, 4월의 짓무른 흰 눈 한 무더기진즉에 식량이 바닥난 헐벗은 겨울 산중의 누더기 잔설들이 산그늘 쪽으로 밀리고 밀리어 항복하듯 백기를 내걸었다가아니다, 아니다,다시 돌아선 희끗한 목숨 몇몇이 골짜기를 따라 쫓기듯 숨어들어와 함께 나누어 먹다 두고 간, 동무의 허벅살 두어 근봄 깊은 골짜기 바위틈에 처박힌 흰 눈 한 덩이를 보며 시인의 자화상으로 여긴 적이 있다. 아니, 어느 가난한 시인이 아껴 먹다 두고 간 지상의 마지막 식량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 후 백기를 내걸듯 산속 그늘로 희끗희끗 숨어든 잔설 앞에 쭈그리고 앉아 내 발목이 녹아내리는 줄도 모르고 오래 들여다보다가 목이 메어온 적이 있다. 그 갸륵한 흰빛 앞에서 내가 뭘 어쩌지 못해 술에 취해 돌아오는 늦은 밤, 겨우내 마당 끝으로 몰아붙인 먼지투성이의 눈 더미를 발길질로 걷어찬 순간, 그 속에서 하얗게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캄캄한 의식의 눈사태에 매몰된 적이 있다. 이덕규 시인
손으로 집어먹을 수 있는 꽃, 꽃은 열매 속에도 있다 단단한 씨앗들 뜨거움을 벗어버리려고 속을 밖으로 뒤집어쓰고 있다 내 마음 진창이라 캄캄했을 때 창문 깨고 투신하듯 내 맘을 네 속으로 까뒤집어 보인 때 꽃이다 뜨거움을 감출 수 없는 곳에서 나는 속을 뒤집었다, 밖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은 밖으로 쏟아져나왔다 꽃은 견딜 수 없는 구토(嘔吐)다 나는 꽃을 집어먹었다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캄캄하다. 뜨겁다. 숨을 쉴 수가 없다. 누군가를 지독하게 사랑하거나 증오할 때, 꽃은 자폭한다. 꽃은 한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낱낱이 드러내고 죽는다. 꽃은 단 한 번 생의 오르가즘을 위해 폭발한다. 황홀한 죽음이다. 동시에 어둠과 빛의 자리바꿈이다. 안과 밖의 자리바꿈이다. 아 아 어둔 내 몸속에서 째깍째깍 돌아가는 생의 시한폭탄이여! 나는 이 캄캄하고 구역질나는 세상을 증오한다. 아니, 사랑한다. 그리하여 언젠가 나는 만개할 것이니, 나를 집어 먹으라. 이덕규 시인
감나무쯤 되랴,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 뒤로 벋어가서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려질까본데,그러나 그 사람이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의 내 전 설움이요 전 소망인 것을알아내기는 알아낼는지 몰라!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詩가 있는 아침사랑의 끝이 죽음이라면, 저승길에라도 나는 그대 등을 지나는 휘어진 나뭇가지로 벋어가서 휘드려지겠다는 저 한 서린 사랑의 독백이 왜 이렇게 느껴울까 몰라. 그 나뭇가지에 온 생애를 바쳐 붉게 물들인 그 감빛의 사랑을 당신은 몰라, 그 한 서린 사랑을 당신은 몰라, 당신은, 또 어디 나 아닌 그런 사랑 때문에 서럽게 살다 갔을 당신은. 이덕규 시인
나무 한 그루의 아픔과벽돌 한 장의 고통이 모여힘이 됩니다시멘트와 모래 자갈들의 상처가 모여주춧돌이 되고 기둥이 됩니다불과 물과 땀의 분노와 절망이 모여튼튼한 옹벽을 구축합니다목수와 철근, 미장과 설비와 전공들의 피와 뼈가 조화를 이루어마침내 한 채의 집을 완성합니다오오, 연탄 보일러의 따뜻함이여!문풍지 사이로 마구 몰려오는 북풍한설이여!집 한 채가 오롯이 서있는 것은 거기에 쏟은 일꾼들의 공력과 자연에서 생짜로 베어 넘겨 다듬은 나무와 불속에서 구워진 벽돌과 시멘트 모래자갈들의 아프고 쓰린 상처들이 모이고 모여 서로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분노와 절망이, 눈물과 한숨이, 피와 땀이 서로의 가장 아프고 힘든 곳을 받쳐주고 맞잡아줄 때, 집은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게 힘겹게 완성된 집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아무리 힘겨워도 집은 사람 때문에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집의 희망이다. 집은 사람을 품고 사람은 그 속에 깃든다. 비바람을 막아주고 추운 밤에도 함부로 주저앉지 못하는 집은 그리하여 또 사람의 희망인 것이다. 이덕규 시인
낙원 간다밥값이 싸서허기진 호주머니 깊숙이체면을 구겨 넣은 남자들이 식당마다 줄을 서는 곳나는 강원도 집에 들러낙원의 명물인 돼지머리고기를 시켜놓고고름 같은 막걸리를 마신다껌을 든 노인이 내 앞에 선다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흘리며,저토록 악착스럽게피골에 달라붙은 그의 목숨도서른 살까지는 상쾌하게 씹혀으리라접시 한쪽 구석에 젓가락질 한번 받지 못한 채 식어가는두툼한 비계를 베어 문다하악에 힘주지 않아도물컹, 비계 속으로이가 푹 박혀버린다탄력이란 그런 것이다제 몸에 박히는 세월의 일격을부드럽게 받아들이는스무 살 겨울 강진 백련사에 가서 보았다. 시뻘건 동백꽃이 시들기도 전에 모가지 째 뚝뚝 떨어지는 것, 그때 나는 늙어 죽는다는 것은 어쩌면 잔인한 일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모두들 끓어오르는 피를 주체하지 못하고 팽팽한 탄력으로 밀어붙인 젊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왼손에 도끼 들고 오른손에 창검 비껴들고 오는 白髮 막아봤자, 다 헛일이라고 옛 어른들 말씀하셨던가, 탱탱하게 물오른 살들도 세월의 잔 펀치에 쭈글쭈글해지는, 그 세월의 무자비한 폭력을 조용히 부드럽게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탄력의 진수임을 알겠다. 이덕규 시인
말복의 지리산 해발 900미터하늘 아래 첫 동네 가까이나만의 비밀 계곡에 들어가겨울 신갈나무처럼 훌훌 옷을 벗고가랑이 사이 산바람이 지나는 거풍을 한다 (중략)마침내 뱃가죽이 얇아져배를 움켜쥐면 손끝에 등뼈가 잡히도록허기가 지고 또 허기가 질 때쯤차고 맑은 물 한 모금의 충만으슬으슬 그녀의 온기 그림기도 하지만그나마 해발 300미터 아래의 이야기일 뿐뼈가 좀 시리면 어떠랴겨울 나이테처럼 단단해지거나고드름처럼 좀 더 투명해질 수도 있는 법거풍에 목욕재계하며 오늘 하루도 곡기를 끊었다입산 십 년의 뼈가 조금 더 투명해질 때까지생명 평화 탁발 순례의 멤버였던 그는 지리산에 있다. 그런 그가 가끔 산을 내려온다. 그가 산속에서 내려오는 것은 배가 고파서도 아니고 사람이 그리워서도 아니다. 다만, 세상이 어지러울 때 그는 산에서 내려온다. 내려와, 그는 늘 길 위에 있다. 마치 멸족한 인간의 미열을 찾아 헤매듯 그는 하염없는 노숙을 살다가 다시 산속으로 들어간다. 바라건대, 나는 그가 빙어처럼 뼛속까지 투명해져서 지리산 계곡물 속을 유유자적하며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이덕규 시인
달빛 찬 들국화길가슴 물컹한 처녀 등에 업고한 백리 걸어보고 싶구랴어디, 저 노총각에게 시집 갈 여자 없수? 농사는커녕, 송곳 하나 꽂을 땅뙈기도 없고 집도 없고 돈도 없고. 지은 죄도 없이 스스로 강화도 허름한 빈집에 유배된 남자, 날마다 봉당에 나와 앉아 집 앞에 펼쳐진 바다와 갯벌을 형형한 눈빛으로 갈아엎는 시인, 우직하게 시를 짓는 저 노총각 따뜻한 등에 업힐 여자 없수? 아직도 순정을 믿는 여자 없수? 송편에 참기름 발라놓은 것처럼 뺀질뺀질한 남녀들이 득세하는 세상에 이제 사라지고 없는 마지막 천연기념물 같은 저 순정파 시인의 넓은 등짝에 스스로 한 생을 유배시킬 여자, 천리 만리 발걸음도 가볍게 들쳐 업고 가고 싶은, 어디, 그런 묵직한 여자 없수? 이덕규 시인
당신이 나를 스쳐보던 그 시선그 시선이 멈추었던 순간거기 나 영원히 있고 싶어물끄러미물꾸러미당신 것인 줄 알았는데알고 보니 내 것인물 한 꾸러미그 속에서 헤엄치고 싶어잠들면 내 가슴을 헤적이던물의 나라그곳으로 잠겨서 가고 싶어당신 시선의 줄에 매달려가는조그만 어항이고 싶어詩가 있는 아침물끄러미,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흘린 눈물 한 꾸러미! 당신이 나를 바라볼 때 나도 모르게 주르르 흘린 눈물 한 꾸러미, 밤마다 꿈결에 헤적이며 건너는 당신과 나 사이, 흐르는 그 물의 나라. 눈물의 강! 이덕규 시인
비구니 스님들 사는 청도운문사 뒤뜰 천년을 살았을 법한 은행나무 있더라그늘이 내려앉을 그늘자리에 노란 은행잎들이 쌓이고 있더라은행잎들이 지극히 느리게 느리게 내려 제 몸 그늘에 쌓이고 있더라오직 한 움직임나무는 잎들을 내려놓고 있더라흘러내린다는 것은 저런 것이더라 흘러내려도 저리 고와서나무가 황금 사원 같더라 나무 아래가 황금 연못이더라황금빛 잉어 비늘이 물 속으로 떨어져 바닥에 쌓이고 있더라 이 세상 떠날 때 저렇게 숨결이 빠져나갔으면 싶더라바람 타지 않고 죽어도 뒤가 순결하게 제 몸 안에 다 부려놓고 가고 싶더라내가 죽을 때 눈 먼저 감고 몸이 무너지는 소릴 다 듣고 가고 싶더라 시단의 어느 노시인이 저 새파랗게 젊은 시인에게서 終心(종심)을 읽었노라 말 한 적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은행나무 아래 제 그늘 넓이만큼 조용히 떨어져 쌓이는 은행잎들을 보면서 생의 종착지에 다다른 자가 길게 내쉬는 한 호흡을 듣는다. 꽃잎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라는 조지훈의 시를 넘어서 그는 나무의 내면으로 한 발짝 더 걸어 들어가 바람 타지 않고 죽어도 뒤가 순결하게 제 몸 안에 다 부려놓고 가고 싶다고 내면의 나직한 울림 너머 울음에 가까운 나무의 흐느낌을 듣는 것이다. 더욱 더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것은 내가 죽을 때 눈 먼저 감고 몸이 무너지는 소릴 다 듣고 가고 싶다는 저 귀신 곡하는 소리이다. 그는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정말이지 생의 끝에서나 들을 수 있는 제 안의 귀신이 하는 소릴 받아 적는다는 것인가. 이덕규 시인
오늘도 온종일까치 산비둘기와 살았습니다늘 고만한 키, 생전에 입던 잠바색 바랜 운동모 쓰고먼발치에서 보면 누구라도신씨 노인 이 땡볕에 또 밭에서 일하네라고 중얼대며 오갔을 겁니다화투놀이 끝에 격조했던 읍내 사는 친구 한 분은버스를 타고 마을 회관 앞을 지나다비탈밭에 수그리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마음에 버스에서 내려한참을 지켜보다끝내 말을 걸고 말았답니다콩이며 참깨며 녹두며 호박이며 감자포기들 돋아난 비탈밭, 년 전에 돌아가신 신씨 노인이 평생 서리서리 땀방울 쏟던 곳, 못 잊어서 그 새 궁금해서 또 거기 와 서있다. 겁 없이 옥수수 어린 포기를 쪼는 까치랑 산비둘기랑은 더러 못 본 척 외면하고 가깝게 지내던 이웃집들 이윽히 내려다본다. 안녕하냐고..., 안녕하시냐고, 그간 자네도 잘 지냈느냐고, 지나가던 친구 분은 또 쉬엄쉬엄 하라고, 읍내 가서 국밥에 막걸리나 한 잔 하자고 손목을 덥석 잡았다가 쓸쓸히 돌아섰겠다. 이 땅에 발을 묻고 살았던 농삿꾼들은 저렇게 다시 온다. 돌멩이든 풀이든 나무든 무엇으로든 다시 돌아와 이 땅의 안부를 묻는다. 이덕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