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력에 대하여

낙원 간다밥값이 싸서허기진 호주머니 깊숙이체면을 구겨 넣은 남자들이 식당마다 줄을 서는 곳나는 강원도 집에 들러낙원의 명물인 돼지머리고기를 시켜놓고고름 같은 막걸리를 마신다껌을 든 노인이 내 앞에 선다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흘리며,저토록 악착스럽게피골에 달라붙은 그의 목숨도서른 살까지는 상쾌하게 씹혀으리라접시 한쪽 구석에 젓가락질 한번 받지 못한 채 식어가는두툼한 비계를 베어 문다하악에 힘주지 않아도물컹, 비계 속으로이가 푹 박혀버린다탄력이란 그런 것이다제 몸에 박히는 세월의 일격을부드럽게 받아들이는스무 살 겨울 강진 백련사에 가서 보았다. 시뻘건 동백꽃이 시들기도 전에 모가지 째 뚝뚝 떨어지는 것, 그때 나는 늙어 죽는다는 것은 어쩌면 잔인한 일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모두들 끓어오르는 피를 주체하지 못하고 팽팽한 탄력으로 밀어붙인 젊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왼손에 도끼 들고 오른손에 창검 비껴들고 오는 白髮 막아봤자, 다 헛일이라고 옛 어른들 말씀하셨던가, 탱탱하게 물오른 살들도 세월의 잔 펀치에 쭈글쭈글해지는, 그 세월의 무자비한 폭력을 조용히 부드럽게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탄력의 진수임을 알겠다. 이덕규 시인

운문사 뒤뜰 은행나무

비구니 스님들 사는 청도운문사 뒤뜰 천년을 살았을 법한 은행나무 있더라그늘이 내려앉을 그늘자리에 노란 은행잎들이 쌓이고 있더라은행잎들이 지극히 느리게 느리게 내려 제 몸 그늘에 쌓이고 있더라오직 한 움직임나무는 잎들을 내려놓고 있더라흘러내린다는 것은 저런 것이더라 흘러내려도 저리 고와서나무가 황금 사원 같더라 나무 아래가 황금 연못이더라황금빛 잉어 비늘이 물 속으로 떨어져 바닥에 쌓이고 있더라 이 세상 떠날 때 저렇게 숨결이 빠져나갔으면 싶더라바람 타지 않고 죽어도 뒤가 순결하게 제 몸 안에 다 부려놓고 가고 싶더라내가 죽을 때 눈 먼저 감고 몸이 무너지는 소릴 다 듣고 가고 싶더라 시단의 어느 노시인이 저 새파랗게 젊은 시인에게서 終心(종심)을 읽었노라 말 한 적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은행나무 아래 제 그늘 넓이만큼 조용히 떨어져 쌓이는 은행잎들을 보면서 생의 종착지에 다다른 자가 길게 내쉬는 한 호흡을 듣는다. 꽃잎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라는 조지훈의 시를 넘어서 그는 나무의 내면으로 한 발짝 더 걸어 들어가 바람 타지 않고 죽어도 뒤가 순결하게 제 몸 안에 다 부려놓고 가고 싶다고 내면의 나직한 울림 너머 울음에 가까운 나무의 흐느낌을 듣는 것이다. 더욱 더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것은 내가 죽을 때 눈 먼저 감고 몸이 무너지는 소릴 다 듣고 가고 싶다는 저 귀신 곡하는 소리이다. 그는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정말이지 생의 끝에서나 들을 수 있는 제 안의 귀신이 하는 소릴 받아 적는다는 것인가. 이덕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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