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이 부숭부숭한 사내들과 고기를 구워 먹고직립 보행하여 집으로 왔다동굴 속은 어두웠다재를 툭툭 털며사위어가는 불씨의 문을 열고아내가 기어나왔다조 피 기장 수수를 담은 빗살무늬토기가 바닥에 떨어졌다박살난 빗살무늬 사이로곡식들이 쏟아졌다곡식을 퍼 담으며 아내가 울었다잠 깬 아이들이 함께 울었다밥상 밑으로 식은 국물이 뚝뚝 떨어졌다갈다 만 돌을 꺼내 갈고 또 갈았다단번에 몸 베는 칼 한 자루 차고一生一代의 길을 떠나고 싶었다 詩가 있는 아침그 먼 옛날에도 가장은 밖으로 돌며 호구를 책임졌겠구나. 그게 힘들고 부담스러워 가끔은 삼겹살에 술을 먹고 지쳐 돌아왔겠구나. 살아도 살아도 맨날 쪼들리는 살림살이, 자꾸 보채며 우는 아이들, 삶에 찌들어 부스스한 아내와 보일러마저 식은 싸늘한 집에 돌아와 괜히 상다리 분질러 화풀이 했겠구나. 직립의 슬픔! 좀 더 멀리 보고자 했던 것이 내일에 대한 공포가 되어 사람을 지치게 하였구나. 그렇구나, 그렇게 수시로 집안을 들쑤시고 들러 엎고 싶었으나, 가장들은 다시 칼을 갈았구다.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보일러에 기름을 채워 넣고 학원에 보내고 좀 더 안락한 움막으로 이사를 가기 위해, 단칼에 초라한 삶을 결단내기 위해, 여전히 어금니를 물고 묵묵히 일생일대의 칼을 갈고 있구나. 이덕규 시인
술잔을 끌어당겨 스스로 부어 마시고마당의 나무들을 쳐다보며 얼굴에 편한 미소를 짓는다남창에 기대어 제멋대로 내다보고 좁은 집이라도 무릎을 펼 수 있는 정도라면 충분히 편안함을 알겠다정원을 매일 거니니 아취가 생기고 문이 있지만 오가는 이 없어 항상 닫혀있다지팡이를 짚고 돌아다니다가 아무 곳에서나 쉬고때때로 고개 들어 주위를 둘러본다 고향에 돌아와 혼자 술을 마시며 자연과 벗하니, 편안하다. 두발 뻗고 밖을 내다보며 중늙은이 도연명은 너무 좋아서 채신머리 없이 키득키득 웃기도 했을라, 집이 좁아도 좋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도 그만이고, 아무 곳에서나 쉬고 경치를 살피는 눈빛이야말로 얼마나 평화로운가 아늑한 정취의 전원생활을 노래한 도연명은 벼슬을 버리고 41세에 고향에 돌아와 그렇게 유유자적했다. 그 어느 것에도 구애됨이 없이 참 자유를 노래한 제멋대로의 편안함이란 무엇인가, 당연히 어떤 응분의 세속적 가치들을 포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귀한 것. 말이 쉽지 그것은 스스로 나를 떠메고 저 오지의 벽촌 돌무더기에 던져 묻는 일과 같다. 그러니, 세속의 질서와 가치 속에서 출세가도의 절정에 올랐을 때, 자신이 가장 잘 나갈 때, 자신을 버리고 저렇게 자연 속에 자신을 방기할 때, 비로소 나는 다시 한 번 더 사는 것이리. 이덕규 시인
삼촌은 도축업자사실 피 묻은 칼보다 무서운 건삼촌이 막 잡은 짐승의 살점을 입에 넣어줄 때,입속에 혀를 하나 더 넣어준 느낌입속에선 토막난 혀들이 뒤섞인다.혀가 가득한 입으론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다.고기에서 죽은 짐승의 체온이 전해질 때나는 더운 비를 맞고 있는 것 같다.바지 입고 오줌을 싼 것 같다.차 속에 빠진 각설탕처럼나는 조심스럽게 녹아내린다.네 귀와 모서리를 잃는다.삼촌이 한 점을 더 넣어준다면심해 화산의 용암처럼 흘러내려나의 눈물은 금세 돌멩이가 될 것 같다. 칼보다 무서운 건 아직 따뜻한 체온이 남아 있는 육고기 한 점이다. 혀와 뒤섞이는 또 다른 혀는 일종의 폭력이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는 폭력에 그는 바지를 입은 채 오줌을 싼 것처럼 속수무책이다. 으 뜨거운 물 속에서 조용히 모서리가 사라지는 각설탕처럼 녹아내리는 그의 의식의 저 깊숙한 곳에서 솟는 눈물은 금세 용암처럼 굳어버릴 것 같다. 정말 세상엔 차마 삼킬 수 없는 슬픔이 있다. 그러나 시인은 곤란한 척 제 혀를 깨물어 먹으면서도 피를 뚝뚝 흘리며 웃는 그런 존재이다. 이덕규 시인
버스비 900원버스 타서 죄송하다고百拜謝罪하며 내는 돈화장실 100원오줌 눠서 미안하다고百拜謝罪하며 내는 돈(중략)돼지고기 한 斤 8,000원처먹어서 죄송하다고 百拜謝罪하며 내는 돈서러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을 수 있는 것이다恨이 있기 때문에含笑入地할 수있는 것이다詩가 있는 아침무소유보다 더 찬란한 극빈에 빛나는 천하의 가난뱅이 김영승 시인은 무엇을 하든 먼저 돈부터 지불해야 하는 이 이상한 나라의 숫자놀이를 백배사죄의 댓가로 뒤집어 놓는다. 언젠가 들은 얘긴데, 돈을 맷돌처럼 무겁게 만들면, 라면 한 개 사는데 맷돌 두 짝을 들고 가거나 굴리고 가야 한다면, 길바닥에는 내다버린 뒹구는 돈으로 가득찰 것이다. 부자들은 밤마다 돈을 덤프트럭에 싣고 가난한 사람들의 마당에 몰래 갖다 버리고 도망갈 것이다. (이덕규 시인)
싸리꽃을 애무하는 山 벌의 날갯짓소리 일곱 근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 평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微動 두 치 반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 구천 발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 울음 서른 되 상다리 부러지겠다. 저 푸짐한 밥상! 배부르다. 먹은 것도 없이 넉넉해져서 저 양철집 안에 들어 한잠 달게 자고 싶다. 소리와 향기와 작은 움직임들을 잘 섞고 버무리고 끓이고 부치고 무쳐서 한 상 잘 차려 내놓은 저 공양은 고요한 산사 주변의 풍경이 그 재료이다. 그런데 겁나게 긴 저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 구천 발의 국숫발을 누가 다 먹나, 그야말로 요량도 못하고 쏟아지는 소낙비와 방앗간 쌀 쏟아지듯 금세 수북이 쌓이는 저 서른 되의 매미 울음, 그리고 이 시의 백미인 제 몸이 열리기 전의 백도라지, 꽃 피기 전의 그 미세한 떨림은 정말 너무 슬프고 귀하고 그 양이 적어서 함부로 젓가락을 갖다 댈 수도 없겠다. 저런 반찬은 이제 막 사경을 헤매다가 눈을 뜬 사람의 한 숟갈 흰 죽 위에 한 점 올려주면 금세 기운이 나서 벌떡 일어서겠다. 이덕규 시인
가지런하게 한쪽 방향을 향해 누운 물고기 비늘 중엔 거꾸로 박힌 비늘이 하나씩은 꼭 달려있다고 한다역린(逆鱗), 유영의 반대쪽을 향하여 날을 세우는 비늘 하나더러는 미끼를 향해 달려드는 눈먼 비늘들 사이에서 은빛 급브레이크를 걸기도 하였을까역적의 수모를 감당하며 외롭게 반짝이기도 하였을까제 몸을 거스르는 몸, 역린, 나도 어찌할 수 없는 내가 나를 펄떡이게 할 때가 있다십년째 잘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낙향 물고기 비늘 털며 사는 친구놈의 얘기다 정신과 몸이 황폐해져서 술로 세월을 살던 친구가 어느 날 제 몸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어린 딸아이를 보고 거짓말처럼 술을 끊었다. 逆鱗(역린)이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타이르며 죽음을 향해 달려가던 친구의 몸에 붙은 그 작은 비늘 하나가 친구를 추스른 것이다. 이제 우리 헤어져야 해! 연인들 앞에 툭 떨어지는 눈물방울, 차마 돌아설 수 없게 만드는 역린이다. 거센 인생 항로에 문득문득 방향키를 잡아주는 역린, 급하게 달려가는 아이를 넘어뜨리는 돌부리 같은 역린, 천천히 가거라 방향을 잡아주고 브레이크를 살짝살짝 밟아주는 올바르고 침착한 정신 하나 누구든 하나씩은 박혀있다. 이덕규 시인
옛말에 꽃싸움에서는 이길 자 없다 했으니그런 눈부신 꽃을 만나면 멀리 피해 가라 했다언덕 너머 복숭아밭께를 지날 때였다갑자기 울긋불긋 복면을 한나무들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바람이 한 번 불자나뭇가지에서 후두둑 후두둑,꽃의 무사들이 뛰어내려 나를 에워쌌다나는 저 곡우(穀雨)의 강을 바삐 건너야 한다고사정했으나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럴 땐 술과 고기와 노래를 바쳐야 하는데나는 가까스로 시 한 편 내어놓고 물러날 수 있었다詩가 있는 아침꽃 피는 봄날, 모두들 꽃놀이 가서 음주가무로 즐거운 날, 복사꽃 아래 깊은 사색의 포로가 되어 꼼짝 못하고 앉아 있는 시인의 꼴이라니! 어서어서 신록으로 가는 저 곡우의 강을 건너야 이 어지러운 심사를 정리하고 평상심을 찾겠는데, 그러나 시인을 압박하는 봄(꽃)의 폭력의 수위는 절정에 이르고 끝내 그 복면 무사 같은 봄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겨우 봄의 시 한 편을 써 내놓고 간신히 봄을 빠져나왔다는 시인이여! 가까스로 시 한 편을 쓰고 봄으로부터 빠져나왔다고 엄살을 부렸지만 흥청망청 술과 고기로 봄의 제단을 차리지 않고도 봄과 깔끔하게 맞장 뜨고 빠져나온 시인은 중원의 고수검객 아니랴. 이덕규 시인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 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속 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 주고 싶었네산가시내 되어 독 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 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뿐이랴 시절이 수상하여 남정네들 뿔뿔이 흩어져 험한 세상 떠돌 때, 어린 것들과 부모와 고향 선영을 지킨 것은 여자였다. 나라를 되찾겠다고, 세상을 바로 세우겠다고 떠돌다가 몸 망가져 간신히 눈빛만 살아서 돌아온 사내를 살려낸 것도 여자였다. 독 오른 뱀을 덥석덥석 움켜쥐는 땀내 나는 산가시내면 어떻고 피칠갑의 여자 백정이면 어떠랴! 어느 남자를 막론하고 이런 여자 앞에서 무릎 꿇지 않을 자 누구인가, 겨우 스물 갓 넘었을 때, 이미 세상을 다 끌어안고도 남을 만큼 품이 넓었던 저 시인을 감히 대모라 불러도 되겠다. 이덕규 시인
몸져누운 어머니의 예순여섯 생신날 고향에 가 소변을 받아드리다 보았네한때 무성한 숲이었을 음부더운 이슬 고인 밤 풀여치들의사랑이 농익어 달 부풀던 그곳에황토먼지 날리는 된비알이 있었네비탈진 밭에서 젊음을 혹사시킨 산간 마을 여인의 성기는 비탈을 닮아간다는,세간 속설이 내 마음에 천둥 소낙비 뿌려어머니 몸 닦아드리다 온통 내가 젖는데겅성드뭇한 산비알열매가 꽃으로 씨앗으로 흙으로되돌아가는 소슬한 평화를 보았네부끄러워 무릎을 끙, 세우는어머니의 비알밭은 어린 여자아이의밋밋하고 앳된 잠지를 닮아 있었네돌아갈 채비를 끝내고 있었네 우리들의 고향은 어머니 뱃속이다. 한때 더운 이슬 고인 밤 풀여치들의 사랑이 농익어 달 부풀던 그 뜨거운 대지에서 우리는 태어났다. 그러니 우리는 어머니라는 이름의 대지의 아들 딸들이다. 우리들은 그 어머니라는 대지의 자양을 빨아먹고 살았다. 그렇게 젊음을 혹사시킨 끝에 늙어버린 어머니의 황량한 비알밭을 훔쳐본 젊은 시인은 생성과 소멸의 순환 원리를 자연의 이법에 기대어 읽는다. 씨앗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어찌 죽음이라 말하랴, 어머니는 이제 새로운 생산을 위해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황토먼지 날리는 된비알밭 넘어 어린 여자아이의 밋밋하고 앳된 잠지처럼 머지않아 푸른 숲으로 싹을 틔울, 그 멀고 먼 당신의 대지로. 이덕규 시인
내가 반 웃고 당신이 반 웃고 아기 낳으면 돌멩이 같은 아기 낳으면 그 돌멩이 꽃처럼 피어 깊고 아득히 골짜기로 올라가리라아무도 그곳까지 이르진 못하리라가끔 시냇물에 붉은 꽃이 섞여내려마을을 환하게 적시리라사람들, 한잠도 자지 못하리거기는 어딘가? 언젠가, 우리 먼발치서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을 사이였을 때, (그때 너와 나 반은 웃고 있었던가) 그때, 그 사이에서 태어난 우리들의 돌멩이 같은 아기가 꽃처럼 피어 아득히 올라간 곳, 가끔 사랑이 지극에 이르러 툭툭 떨어진 꽃 붉은 소식들이 시냇물을 따라 흘러 내려오는 곳, 아직 우리가 한 번도 올라가 보지 못한 곳. 사랑의 유토피아! 어딘가? 거기는. 그때 그런, 가슴앓이로 불 꺼진 캄캄한 창들이 얼마나 두근거렸던가. 이덕규시인
보일러 새벽 가동중 화염 투시구로 연소실을 본다고맙다 저 불길, 참 오래 날 먹여 살렸다 밥, 돼지고기, 공납금이다 저기서 나왔다 녹차의 쓸쓸함도 따라나왔다 내 가족의웃음, 눈물이 저 불길 속에 함께 타올랐다불길 속에서 마술처럼 음식을 끄집어내는 여자를 경배하듯 나는 불길에게 일찍 붉은 마음을 들어 바쳤다불길과 여자는 함께 뜨겁고 서늘하다 나는 나지막이 말을 건넨다 그래, 지금처럼 나와가족을 지켜다오 때가 되면육신을 들어 네게 바치겠다피를 따뜻하게 데워서 몸 구석구석으로 펌프질을 하는 심장처럼 건물 전체에 온기를 불어넣는 저 보일러 화염 투시구 속 불길이 한 가족을 먹여 살렸다. 웅웅 돌아가는 보일러 곁에서 불꽃을 조절하는 보일러공인 시인은 한 여자에게 들어 바치는 우련 붉은 청춘의 꽃처럼 뜨거운 마음을 일찍이 저 불꽃에게 바쳤다. 그러니, 한 생을 보일러 불꽃 덕에 먹고 산 시인이 언젠가 때가 되면 저 불길에게 한 몸 들어 바쳐도 되겠다. 빚 갚듯이 한 몸 던져 태워도 억울할 것 하나 없겠다. 이덕규 시인
여차하면 가리라옷깃만 스쳐도발자국 소리만 들려도너에게 확 옮겨 붙으리라옮겨 붙어서 한 열흘쯤두들두들 앓으리라살이 뒤집어지고 진물이 뚝뚝 흐르도록앓다가 씻은 듯이 나으리라네 몸의 피톨이란 피톨은모조리 불러내어 추궁하리라나는 지금 휘발유 먹은 숨결,너를 앓고 싶어 환장한 몸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오랜 진화의 과정을 거쳐 터득한 지혜 중의 하나가 제 몸에 독성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독성이 지나쳐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옻나무, 지나친 보호본능으로 독을 키우다가 끝내 왕따를 당하고 외로움의 천형을 받은 옻나무는 너무 외로워서 누군가 가까이만 가도 확 옮겨 붙는다. 한 번 옮겨 붙으면 밤 낮 네 몸에 진물이 흐르도록 몸을 탐하며 네가 사랑을 아느냐고 세포 깊숙이 추궁하다가 어느 날 감쪽같이 떠나버리는 사랑. 한쪽 옆구리가 시려 사랑을 앓고 싶어 환장한 사람들아, 옻나무에게 가서 한번 안겨봐라. 아-흐 옻나무에게 연애 한 수 배워보아라. 이덕규 시인
여기서부터, - 멀다칸칸마다 밤이 깊은푸른 기차를 타고대꽃이 피는 마을까지백년이 걸린다詩가 있는 아침칸칸마다 푸른 꿈을 싣고 수직으로 달리는 열차, 하늘을 찌를 듯 곧장 수직으로 올라가 백 년에 한 번 꽃을 피우고 죽는다는 대나무는 그래서 정신의 상징이다. 대나무는 죽더라도 그냥 화톳불에 던져지지 않는다. 어떤 시인은 그런 대나무를 또 이렇게 노래했다. 행여 내 죽어 창과 활이 되지 못하고 변절처럼 노래하는 악기가 되어도 한 가슴 후벼파고 마는 피리가 될지니 이덕규 시인
독락당 대월루(獨樂堂 對月樓)는벼랑 꼭대기에 있지만옛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린 이詩가 있는 아침세속의 대척인 저 암자에 누더기 같은 육신을 걸친 한 정신주의자가 문 걸어 닫고 있다. 문 걸어 닫고 희미한 별빛마저 등 돌리고 후르륵후르륵 늦은 저녁을 먹고 있다. 아니다, 이미 육신은 먼지가 되어 공중에 흩어진지 오래 되었다. 아니다, 애당초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아무 것 없이도 즐거운 정신의 높이가 까마득하게 있었을 뿐이다. 돈도 명예도 전기도 수도도 밥도 여자도 화장실도 없이 다만, 혼자 충만한 그 집, 까마득하다. 이덕규 시인
서편은 달이 기우는 곳붉은 해가 현의 가장 낮은 음으로 스러지는 곳별들이 고단한 몸을 누이는 곳/그들이 따뜻한 남쪽 바다로 향할 때,해와 달과 구름과 바람의 고향인 카일라스 산 근처에서내 영혼은 한 철 헤매었지/파도가 높아 다다를 수 없다는새와 짐승의 빛깔이 모두 희다는불사의 영약이 있다는봉래산은 그러나 꿈꾸지 않았네/서쪽을 향해 자라는 측백처럼봉오리가 북쪽을 향해 솟아오르는 목련처럼서쪽으로, 북쪽으로어둠 쪽으로/밤마다 일어나 어둠을 포식했지주좌등을 밝히고 앉아 밤이면 오래도록 책을 읽었지긴 한숨처럼 낮은 음으로 해가 지는 곳에 그녀가 있다. 애당초 있지도 않은 온갖 희망이 천박하게 북적거리는 동쪽엔 가지 않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간신히 책장만 밝히는 불을 켜고 긴 하루의 기대가 풀 꺾여 들어오는 저녁의 책을 읽는다. 기름진 음식과 열대 과일이 넘쳐난다는 따뜻한 남쪽나라도 믿지 않는다. 설령, 어딘가 있다하는 불사의 그 유토피아에 요행히 다다른다 해도 그것은 너무 싱거운 세상, 그녀는 그냥 어둠 속에서 한 철 헤매다 간다. 모든 생명의 고향인 어둠, 어둠에서 태어나 어둠으로 지는 해와 달과 구름의 고향인 어둠 쪽으로 측백처럼 비스듬히 기울어 조용히 삶을 읽는다. 가만가만 나직나직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바로 다음 세상 저승 같은 책의 흰 지면에 반사된 그녀의 얼굴이 백랍인형처럼 슬프다. 이덕규 시인
온 동네가 가난을 식구처럼 껴안고 살던 시절언니와 나는 일수 심부름을 다녔다우리 집의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던 일수(日收)월곡동을 지나 장위동을 거쳐 숭인동까지 카시오페아좌처럼 뚝뚝 떨어져 있는 다섯 집을 다 돌면일수 수첩 사이에서 돈의 두께가 부풀어 오르고내 가슴에도 도장밥 빛깔의 별들이 철없이 떠올랐다일수 수첩 속에는 각기 다른 여러 겹의 삶들이 붉은 도장의 얼굴을 하고 칙칙하게 접혀있었다어느 날 추위를 툭툭 차며 집에 도착했을 때벌써 갔다 왔니? 하던 엄마의 이마에 송송맺혀있던 땀방울과 아버지의 헝크러진 머리칼과파도처럼 널브러진 이불, 들킨 건 나였다아무 것도 못 본 척 문을 닫고 나오던 내 뒤통수를 쌔리며 사춘기는 내게로 급하게 휘어들었다삼십 대 후반의 젊은 부모에게 꼭 묶어두어도 터져나오던,때론 밥생각보다 더 절박했을,한 끼의 섹스가 가난한 이불 위에 일수 도장으로 찍혀있던, 겨울 그 단칸방언니와 나는 일수 심부름을 다녔다제정러시아 때라던가, 혹독한 추위에 천지가 다 얼어붙은 시베리아 벌판으로 유배된 남녀가 눈 속에 굴을 파고 들어가 살다 결국 얼어 죽었다는데 그 절체절명의 시간이었을 그곳에서 섹스의 흔적이 발견되었단다. 확실히 생(性)은 모든 생명의 기본 단위인 밥과 같은 항렬이거나 그보다 우선한다. 호기심에 찬 어린 눈알들이 또륵또륵 굴러다녔을 단칸방에서 언제 생겼는지, 한 집에 예닐곱씩 터져 나오듯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 없던 시절에도 건강했다. 그러니 틈틈이 짬짬이 성(聖)스런 일수 도장을 찍던 부모도, 그 후 천천히 먼 길을 돌아서 일수 심부름을 다녔을 어린 시인도 모두 모두 장하다. 이덕규 시인
탑이 춤추듯 걸어가네5층탑이네좁은 시장 골목을 배달나가는 김씨 아줌마 머리에 얹혀쟁반이 탑을 이루었네아슬아슬 무너질 듯 양은 쟁반 옥개석 아래사리합 같은 스텐 그릇엔 하얀 쌀밥이 사리로 담겨서저 아니 석가탑이겠는가다보탑이겠는가한 층씩 헐어서 밥을 먹으면 밥 먹은 시장 사람들 부처만 같아서싸는 똥도 향그런탑만 같겠네식당 아줌마가 땀을 뻘뻘 흘리며 무슨 염원처럼 켜켜이 쌓아올린 쟁반을 이고 좁은 골목길을 헤치며 간다. 저런 밥상을 받아들 자격은 아무에게나 있는 게 아니다. 그 밥 먹고 노는 사람 하나 없는, 밥 먹으러 갈 시간이 없는 시장 사람들이야말로 생불이다. 눈코 뜰 새 없는 생불들에게 나눠줄 공양을 머리에 이고 나르는 아줌마는 쟁반 탑신을 떠받치고 걸어다니는 연화대이다. 그렇다, 저자에 道(도)가 있다. 거기 어디쯤 공중변소에 소복이 차오르는 똥탑! 그것이 우리네 먹고사는 문제의 결론이다.이덕규 시인
내가 앉은 자리에 네가 거듭해서 앉는다면휘말린 먼지들이 혹은 가라앉고 혹은 떠돌아동심원 두 개가 고요하다면거기에 내 손을 가만히 얹는다면그 자리가 번져 나가 끝내 너를 적신다면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 서툴러서 그대가 머물렀다 떠난 자리에 가만히 앉아보거나 혹은 아직 따스한 온기가 남아있는 그 자리를 부드러운 손길로 조용히 어루만질 때. 그대 보고픈 마음 해질녘까지 기울어 길어지는 그림자처럼 조금씩 젖어가리. 작은 방에 웅크리고 앉아 그대 보고픈 마음에 굳게 닫힌 문이 바깥으로 둥그렇게 휘어지며 터질듯 부풀어 오르리. 아, 그러나 그대는 멀고 먼 밤을 날아온 새 한 마리 새벽이슬에 함초롬 젖어 울듯, 연애가 서투른 자. 지금도 어디선가 저렇게 떨며 혼자 울리.이덕규 시인
곤충채집할 때였다물잠자리, 길앞잡이가 길을 내는 것이었다그 길에 취해가면 오릿길 안 쪽에내 하나 고개 하나 있다고개 아래 뻐꾹뻐꾹 마을이 나온다그렇게 어느 날 장갓마을까지 간 적 있다장갓마을엔 누님이 날 업어 키운 누님이 시집살이하고 있었는데삶은 강냉이랑 실컷 얻어먹고집에 와서 으스대며 마구 자랑했다전화도 없던 시절,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느그 누부야 눈에 눈물 빼러 갔더냐며어머니한테 몽당빗자루로 맞았다다시는 그런 길그리움이 내는 길 가보지 못했다물잠자리는 어떻게 알았을까. 어린 시인이 누부야 보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알아차리고 너울너울 그 곳 등성이까지 길 일러주었을까. 나비가 삐뚤빼뚤 날아도 꽃을 찾아 앉는 것처럼 미물(微物)이 가는 길을 따라가 보면 거기, 어떤 향기가 있다. 그러니 꽃 같은 새색시 누부야는 업어 키운 어린 동생이 콧물 땟물 꾀죄죄해서 나타난 걸 보고 보고 얼마나 기막혔을라나. 시댁식구 눈치 볼 틈도 없이 이것저것 배불리 먹여 보내며 잘 가거라, 손 흔들어주었으리라. 그렇다. 어느 한때 우리는 가슴 속에 저 물잠자리 한 마리쯤 품어 부화시킨 적이 있다. 그리고 저마다의 가슴 속에서 한순간 포르르 날아오른 물잠자리 한 마리가 인도하는 길, 그리움이 내는 길, 엎어지고 자빠지며 따라간 적이 있었다.이덕규 시인
만져보는 거야네 입술을네 입술의 까슬함과 도드라짐한숨과 웃음만져보는 거야만져보는 거야네 귀, 콧망울과 콧등, 눈두덩까슬함과 보드라움헤아리지 않아그냥 만져보는 거야네 가슴네 등, 네 엉덩이허벅지와 발꿈치만져보면서 가는 거야경쾌한 촉각의 향연이다. 단순하지만 구체적이다. 삶이, 만져진다. 심지어 웃음소리도 만져진다. 한숨 소리에 다달아서는 담쟁이 손끝도 풀이 죽어 시들해졌으리라. 쓰다듬는다. 위무한다. 애무한다. 먼 산을 보거나 TV를 보거나 시선은 딴 곳에 가 있으면서도 곁에 앉아 있는 당신을 끝없이 만지고 쓰다듬는 손은 매끄럽고 아름답다. 사람들은 오감(五感)을 가지고도 늘 의견이 분분하고 엇갈리는데 담쟁이는 촉각 하나만으로도 저토록 푸르고 명징하게 뻗어간다. 일생을 담 쌓고 사는 깎아지른 절벽의 마음에 푸른 실로 수를 놓는 담쟁이는 세상에서 제일 부드럽고 예쁜 손을 가졌다. 이덕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