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기의 추억 -

털이 부숭부숭한 사내들과 고기를 구워 먹고직립 보행하여 집으로 왔다동굴 속은 어두웠다재를 툭툭 털며사위어가는 불씨의 문을 열고아내가 기어나왔다조 피 기장 수수를 담은 빗살무늬토기가 바닥에 떨어졌다박살난 빗살무늬 사이로곡식들이 쏟아졌다곡식을 퍼 담으며 아내가 울었다잠 깬 아이들이 함께 울었다밥상 밑으로 식은 국물이 뚝뚝 떨어졌다갈다 만 돌을 꺼내 갈고 또 갈았다단번에 몸 베는 칼 한 자루 차고一生一代의 길을 떠나고 싶었다 詩가 있는 아침그 먼 옛날에도 가장은 밖으로 돌며 호구를 책임졌겠구나. 그게 힘들고 부담스러워 가끔은 삼겹살에 술을 먹고 지쳐 돌아왔겠구나. 살아도 살아도 맨날 쪼들리는 살림살이, 자꾸 보채며 우는 아이들, 삶에 찌들어 부스스한 아내와 보일러마저 식은 싸늘한 집에 돌아와 괜히 상다리 분질러 화풀이 했겠구나. 직립의 슬픔! 좀 더 멀리 보고자 했던 것이 내일에 대한 공포가 되어 사람을 지치게 하였구나. 그렇구나, 그렇게 수시로 집안을 들쑤시고 들러 엎고 싶었으나, 가장들은 다시 칼을 갈았구다.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보일러에 기름을 채워 넣고 학원에 보내고 좀 더 안락한 움막으로 이사를 가기 위해, 단칼에 초라한 삶을 결단내기 위해, 여전히 어금니를 물고 묵묵히 일생일대의 칼을 갈고 있구나. 이덕규 시인

귀거래사

술잔을 끌어당겨 스스로 부어 마시고마당의 나무들을 쳐다보며 얼굴에 편한 미소를 짓는다남창에 기대어 제멋대로 내다보고 좁은 집이라도 무릎을 펼 수 있는 정도라면 충분히 편안함을 알겠다정원을 매일 거니니 아취가 생기고 문이 있지만 오가는 이 없어 항상 닫혀있다지팡이를 짚고 돌아다니다가 아무 곳에서나 쉬고때때로 고개 들어 주위를 둘러본다 고향에 돌아와 혼자 술을 마시며 자연과 벗하니, 편안하다. 두발 뻗고 밖을 내다보며 중늙은이 도연명은 너무 좋아서 채신머리 없이 키득키득 웃기도 했을라, 집이 좁아도 좋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도 그만이고, 아무 곳에서나 쉬고 경치를 살피는 눈빛이야말로 얼마나 평화로운가 아늑한 정취의 전원생활을 노래한 도연명은 벼슬을 버리고 41세에 고향에 돌아와 그렇게 유유자적했다. 그 어느 것에도 구애됨이 없이 참 자유를 노래한 제멋대로의 편안함이란 무엇인가, 당연히 어떤 응분의 세속적 가치들을 포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귀한 것. 말이 쉽지 그것은 스스로 나를 떠메고 저 오지의 벽촌 돌무더기에 던져 묻는 일과 같다. 그러니, 세속의 질서와 가치 속에서 출세가도의 절정에 올랐을 때, 자신이 가장 잘 나갈 때, 자신을 버리고 저렇게 자연 속에 자신을 방기할 때, 비로소 나는 다시 한 번 더 사는 것이리. 이덕규 시인

거꾸로 박힌 비늘 하나

가지런하게 한쪽 방향을 향해 누운 물고기 비늘 중엔 거꾸로 박힌 비늘이 하나씩은 꼭 달려있다고 한다역린(逆鱗), 유영의 반대쪽을 향하여 날을 세우는 비늘 하나더러는 미끼를 향해 달려드는 눈먼 비늘들 사이에서 은빛 급브레이크를 걸기도 하였을까역적의 수모를 감당하며 외롭게 반짝이기도 하였을까제 몸을 거스르는 몸, 역린, 나도 어찌할 수 없는 내가 나를 펄떡이게 할 때가 있다십년째 잘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낙향 물고기 비늘 털며 사는 친구놈의 얘기다 정신과 몸이 황폐해져서 술로 세월을 살던 친구가 어느 날 제 몸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어린 딸아이를 보고 거짓말처럼 술을 끊었다. 逆鱗(역린)이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타이르며 죽음을 향해 달려가던 친구의 몸에 붙은 그 작은 비늘 하나가 친구를 추스른 것이다. 이제 우리 헤어져야 해! 연인들 앞에 툭 떨어지는 눈물방울, 차마 돌아설 수 없게 만드는 역린이다. 거센 인생 항로에 문득문득 방향키를 잡아주는 역린, 급하게 달려가는 아이를 넘어뜨리는 돌부리 같은 역린, 천천히 가거라 방향을 잡아주고 브레이크를 살짝살짝 밟아주는 올바르고 침착한 정신 하나 누구든 하나씩은 박혀있다. 이덕규 시인

복사꽃 - 송찬호

옛말에 꽃싸움에서는 이길 자 없다 했으니그런 눈부신 꽃을 만나면 멀리 피해 가라 했다언덕 너머 복숭아밭께를 지날 때였다갑자기 울긋불긋 복면을 한나무들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바람이 한 번 불자나뭇가지에서 후두둑 후두둑,꽃의 무사들이 뛰어내려 나를 에워쌌다나는 저 곡우(穀雨)의 강을 바삐 건너야 한다고사정했으나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럴 땐 술과 고기와 노래를 바쳐야 하는데나는 가까스로 시 한 편 내어놓고 물러날 수 있었다詩가 있는 아침꽃 피는 봄날, 모두들 꽃놀이 가서 음주가무로 즐거운 날, 복사꽃 아래 깊은 사색의 포로가 되어 꼼짝 못하고 앉아 있는 시인의 꼴이라니! 어서어서 신록으로 가는 저 곡우의 강을 건너야 이 어지러운 심사를 정리하고 평상심을 찾겠는데, 그러나 시인을 압박하는 봄(꽃)의 폭력의 수위는 절정에 이르고 끝내 그 복면 무사 같은 봄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겨우 봄의 시 한 편을 써 내놓고 간신히 봄을 빠져나왔다는 시인이여! 가까스로 시 한 편을 쓰고 봄으로부터 빠져나왔다고 엄살을 부렸지만 흥청망청 술과 고기로 봄의 제단을 차리지 않고도 봄과 깔끔하게 맞장 뜨고 빠져나온 시인은 중원의 고수검객 아니랴. 이덕규 시인

폐병쟁이 내 사내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 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속 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 주고 싶었네산가시내 되어 독 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 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뿐이랴 시절이 수상하여 남정네들 뿔뿔이 흩어져 험한 세상 떠돌 때, 어린 것들과 부모와 고향 선영을 지킨 것은 여자였다. 나라를 되찾겠다고, 세상을 바로 세우겠다고 떠돌다가 몸 망가져 간신히 눈빛만 살아서 돌아온 사내를 살려낸 것도 여자였다. 독 오른 뱀을 덥석덥석 움켜쥐는 땀내 나는 산가시내면 어떻고 피칠갑의 여자 백정이면 어떠랴! 어느 남자를 막론하고 이런 여자 앞에서 무릎 꿇지 않을 자 누구인가, 겨우 스물 갓 넘었을 때, 이미 세상을 다 끌어안고도 남을 만큼 품이 넓었던 저 시인을 감히 대모라 불러도 되겠다. 이덕규 시인

내 력

몸져누운 어머니의 예순여섯 생신날 고향에 가 소변을 받아드리다 보았네한때 무성한 숲이었을 음부더운 이슬 고인 밤 풀여치들의사랑이 농익어 달 부풀던 그곳에황토먼지 날리는 된비알이 있었네비탈진 밭에서 젊음을 혹사시킨 산간 마을 여인의 성기는 비탈을 닮아간다는,세간 속설이 내 마음에 천둥 소낙비 뿌려어머니 몸 닦아드리다 온통 내가 젖는데겅성드뭇한 산비알열매가 꽃으로 씨앗으로 흙으로되돌아가는 소슬한 평화를 보았네부끄러워 무릎을 끙, 세우는어머니의 비알밭은 어린 여자아이의밋밋하고 앳된 잠지를 닮아 있었네돌아갈 채비를 끝내고 있었네 우리들의 고향은 어머니 뱃속이다. 한때 더운 이슬 고인 밤 풀여치들의 사랑이 농익어 달 부풀던 그 뜨거운 대지에서 우리는 태어났다. 그러니 우리는 어머니라는 이름의 대지의 아들 딸들이다. 우리들은 그 어머니라는 대지의 자양을 빨아먹고 살았다. 그렇게 젊음을 혹사시킨 끝에 늙어버린 어머니의 황량한 비알밭을 훔쳐본 젊은 시인은 생성과 소멸의 순환 원리를 자연의 이법에 기대어 읽는다. 씨앗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어찌 죽음이라 말하랴, 어머니는 이제 새로운 생산을 위해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황토먼지 날리는 된비알밭 넘어 어린 여자아이의 밋밋하고 앳된 잠지처럼 머지않아 푸른 숲으로 싹을 틔울, 그 멀고 먼 당신의 대지로. 이덕규 시인

어둠의 집의 기록 - 조용미

서편은 달이 기우는 곳붉은 해가 현의 가장 낮은 음으로 스러지는 곳별들이 고단한 몸을 누이는 곳/그들이 따뜻한 남쪽 바다로 향할 때,해와 달과 구름과 바람의 고향인 카일라스 산 근처에서내 영혼은 한 철 헤매었지/파도가 높아 다다를 수 없다는새와 짐승의 빛깔이 모두 희다는불사의 영약이 있다는봉래산은 그러나 꿈꾸지 않았네/서쪽을 향해 자라는 측백처럼봉오리가 북쪽을 향해 솟아오르는 목련처럼서쪽으로, 북쪽으로어둠 쪽으로/밤마다 일어나 어둠을 포식했지주좌등을 밝히고 앉아 밤이면 오래도록 책을 읽었지긴 한숨처럼 낮은 음으로 해가 지는 곳에 그녀가 있다. 애당초 있지도 않은 온갖 희망이 천박하게 북적거리는 동쪽엔 가지 않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간신히 책장만 밝히는 불을 켜고 긴 하루의 기대가 풀 꺾여 들어오는 저녁의 책을 읽는다. 기름진 음식과 열대 과일이 넘쳐난다는 따뜻한 남쪽나라도 믿지 않는다. 설령, 어딘가 있다하는 불사의 그 유토피아에 요행히 다다른다 해도 그것은 너무 싱거운 세상, 그녀는 그냥 어둠 속에서 한 철 헤매다 간다. 모든 생명의 고향인 어둠, 어둠에서 태어나 어둠으로 지는 해와 달과 구름의 고향인 어둠 쪽으로 측백처럼 비스듬히 기울어 조용히 삶을 읽는다. 가만가만 나직나직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바로 다음 세상 저승 같은 책의 흰 지면에 반사된 그녀의 얼굴이 백랍인형처럼 슬프다. 이덕규 시인

어느 가난한 섹스에 대한 기억 - 김나영

온 동네가 가난을 식구처럼 껴안고 살던 시절언니와 나는 일수 심부름을 다녔다우리 집의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던 일수(日收)월곡동을 지나 장위동을 거쳐 숭인동까지 카시오페아좌처럼 뚝뚝 떨어져 있는 다섯 집을 다 돌면일수 수첩 사이에서 돈의 두께가 부풀어 오르고내 가슴에도 도장밥 빛깔의 별들이 철없이 떠올랐다일수 수첩 속에는 각기 다른 여러 겹의 삶들이 붉은 도장의 얼굴을 하고 칙칙하게 접혀있었다어느 날 추위를 툭툭 차며 집에 도착했을 때벌써 갔다 왔니? 하던 엄마의 이마에 송송맺혀있던 땀방울과 아버지의 헝크러진 머리칼과파도처럼 널브러진 이불, 들킨 건 나였다아무 것도 못 본 척 문을 닫고 나오던 내 뒤통수를 쌔리며 사춘기는 내게로 급하게 휘어들었다삼십 대 후반의 젊은 부모에게 꼭 묶어두어도 터져나오던,때론 밥생각보다 더 절박했을,한 끼의 섹스가 가난한 이불 위에 일수 도장으로 찍혀있던, 겨울 그 단칸방언니와 나는 일수 심부름을 다녔다제정러시아 때라던가, 혹독한 추위에 천지가 다 얼어붙은 시베리아 벌판으로 유배된 남녀가 눈 속에 굴을 파고 들어가 살다 결국 얼어 죽었다는데 그 절체절명의 시간이었을 그곳에서 섹스의 흔적이 발견되었단다. 확실히 생(性)은 모든 생명의 기본 단위인 밥과 같은 항렬이거나 그보다 우선한다. 호기심에 찬 어린 눈알들이 또륵또륵 굴러다녔을 단칸방에서 언제 생겼는지, 한 집에 예닐곱씩 터져 나오듯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 없던 시절에도 건강했다. 그러니 틈틈이 짬짬이 성(聖)스런 일수 도장을 찍던 부모도, 그 후 천천히 먼 길을 돌아서 일수 심부름을 다녔을 어린 시인도 모두 모두 장하다. 이덕규 시인

눈물 - 문인수

곤충채집할 때였다물잠자리, 길앞잡이가 길을 내는 것이었다그 길에 취해가면 오릿길 안 쪽에내 하나 고개 하나 있다고개 아래 뻐꾹뻐꾹 마을이 나온다그렇게 어느 날 장갓마을까지 간 적 있다장갓마을엔 누님이 날 업어 키운 누님이 시집살이하고 있었는데삶은 강냉이랑 실컷 얻어먹고집에 와서 으스대며 마구 자랑했다전화도 없던 시절,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느그 누부야 눈에 눈물 빼러 갔더냐며어머니한테 몽당빗자루로 맞았다다시는 그런 길그리움이 내는 길 가보지 못했다물잠자리는 어떻게 알았을까. 어린 시인이 누부야 보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알아차리고 너울너울 그 곳 등성이까지 길 일러주었을까. 나비가 삐뚤빼뚤 날아도 꽃을 찾아 앉는 것처럼 미물(微物)이 가는 길을 따라가 보면 거기, 어떤 향기가 있다. 그러니 꽃 같은 새색시 누부야는 업어 키운 어린 동생이 콧물 땟물 꾀죄죄해서 나타난 걸 보고 보고 얼마나 기막혔을라나. 시댁식구 눈치 볼 틈도 없이 이것저것 배불리 먹여 보내며 잘 가거라, 손 흔들어주었으리라. 그렇다. 어느 한때 우리는 가슴 속에 저 물잠자리 한 마리쯤 품어 부화시킨 적이 있다. 그리고 저마다의 가슴 속에서 한순간 포르르 날아오른 물잠자리 한 마리가 인도하는 길, 그리움이 내는 길, 엎어지고 자빠지며 따라간 적이 있었다.이덕규 시인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