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산골 오두막

그때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지금은 모른다눈이 길을 막아 머문 곳, 오두막에는 눈보다 따듯한 노인네가 있었다 날마다 온돌이 절절 끓어 방문을 열면 장작을 한 아름 안고 부엌으로 들어가던 노인의 모습밤이면 더욱 맑게 깔리던 고요, 백설은 스스로 빛을 뿜어 어둠을 녹였다그때 무엇을 하러 가던 길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소리는 없었고 빛과 온기만이 흐르던 곳, 눈이 산과 산을 덮고 오두막을 덮어 산도 오두막도, 노인과 나도 눈이었다그때 어떻게 그곳을 떠나왔는지 지금은 모른다 왜 그곳을 떠나야 했는지그때 그는 세상일에 지치고 사람에 지쳐 문명의 반대쪽으로 무작정 걸었으리라. 바람이 불어오는 곳, 눈보라를 뚫고 가다가 큰 눈이 막아선 곳, 거기 세상일과는 무관하게 사는 첩첩산중의 노인네 한 분을 만났으리라. 그는 그 노인과 세상 일이 아닌 먼 곳의 얘기로 밤을 지새웠으리라. 그런 밤이면 마치 선계에 내린 눈처럼 백설이 뿜어내는 흰빛들이 깊은 산중에 만건곤하여 골짜기 골짜기를 오래 포근히 안아주었으리라. 그리하여 마음의 향방을 몰라 지상에 내려앉지 못하고 떠도는 눈송이처럼 바람에 떠밀리고 떠밀리던 그는 결국 다시 그 심심산골 품으로 들어가 영 나오지 않는다는데. 이덕규 시인

음악들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했지, 산뚱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가령, 서해안 먼 바다 어디쯤, 먼 대륙의 끝자락이 보일 듯 말 듯 외따로이 낯선 곳, 혼자서 배를 타고는 아무리 가도 가 닿을 수 없는 곳, 너를 껴안고 잠든 밤 눈보라 하얀 돛배를 타고서야 갈 수 있는 곳, 누구나 한번쯤 가보았을 법한 아니, 누구나 한번쯤 꿈꾸었을 그 환상의 섬, 멀리 서역 어딘가에서 사랑을 잃고 떠도는 자들의 밤바람 소리가 간간이 걱정스럽게 들려오기도 하는 곳, 영원히 유폐되고 싶은 사랑의 섬, 거기엔 불면의 입맞춤으로 날이 새는, 영원히 식지 않는 사랑의 묘약이 처마 끝 고드름에서 밤새 음악처럼 조금씩 녹아 떨어지는 곳이다. 그리하여 불멸의 사랑을 꿈꾸던 시절 누구나 한 번쯤 가봤을 법한 그 곳, 오늘밤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고 있을 그때 그 어디쯤 청춘의 격렬비열도! 이덕규 시인

노루-함주시초2 -백석(1912~?)

장진 땅이 지붕넘에 넘석하는 거리다자구나무 같은 것도 있다기장감주에 기장차떡이 흔한데다이 거리에 산골사람이 노루새끼를 다리고 왔다산골사람은 막베등거리 막베잠방등에를 입고노루새끼를 닮었다노루새끼 등을 쓸며터앞에 당콩순을 다먹었다 하고서른 닷냥 값을 부른다노루새끼는 다문다문 흰점이 배기고 배안의 털을 너슬너슬 벗고 산골사람을 닮었다신골사람의 손을 핥으며약자에 쓴다는 흥정소리를 듣는 듯이새까만 눈에 하이얀 것이 가랑가랑한다함경남도 장진 땅 아래 어느 작은 장터거리에 노루새끼를 팔러 나온 저 산골사람의 계산법을 좀 보자. 집 앞 텃밭에 강낭콩을 수확하면 예년 평균 서른닷 냥 정도가 나왔는데, 올해는 어린 노루새끼가 몰래 와서 그 콩순을 다 뜯어 먹어 농사를 망쳤으니, 이 괘씸한 노루새끼 값을 그 정도는 받아야한다는 것이다. 말이 되는지 모르지만, 콩값이 곧 노루값이 되는 저 산골 셈법은 설득력이 있다. 요즘 같이 실물은 없고 숫자놀이에 불과한 증권이니 주식이나 하는 경제논리에 비하면 얼마나 정확하게 똑 떨어지는 계산법인가, 거기다가 노루새끼를 무슨 병에 약재로 쓰는지 모르지만 쉽게 성사되지 않을 것 같은 저 지루한 흥정 끝에 백석은 덤으로 노루새끼 눈에 그렁그렁 비치는 눈물까지를 약으로 내놓았다. 이덕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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