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중독증

나는 없고 너와 함께 있는 나만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의학용어가 관계 중독증이다. 끊임없이 친밀한 관계를 맺고 유지할 누군가를 찾는다는 점에서 중독이다. 내 삶의 의미를 너에서만 찾는 사람들이다. 대인 관계에서 특정인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우다. 사귈 때는 하루라도 안 보면 미칠 것 같고, 결혼 후엔 배우자가 자신의 생일이나 기념일 같은 것을 잊을 경우 서운하다 못해 마음의 상처를 받는 식이다.관계에 중독된 사람들은 친밀한 누군가가 곁에 없으면 불안하고 그에게만 촉각을 곤두세워 사소한 말이나 행동에도 쉽게 상처를 입는다. 남편, 자녀 등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생활의 전부를 이루고, 그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며, 그들을 돌보는 것으로 나란 존재의 의식체계를 채워버렸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때로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어린애같이, 때로는 제 정신이 아닌 것처럼 격한 감정을 드러내 다른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극히 소수이지만 애인이 변심했을 때 자살하는 경우도 생긴다. 부부 중 한 사람이 먼저 떠나면 따라 죽는 경우를 순애(純愛) 라고 하지만 이도 사실은 관계 중독증이다. 관계 중독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아 개념이 서 있지 않아 나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 특징이다.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대해선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고, 그들을 뒷바라지하는 데도 비상한 통찰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진단하고 해결하는 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관계 중독이 대개 한 개인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잘못된 자아 상실 문제를 스스로 인정하고 변화하지 않으면 그것들이 계속 문제를 일으키고, 그로 인해 생기는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된다. 관계 중독에서 벗어나는 치료의 첫걸음은 한 걸음 떨어져 자신을 냉철하게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두번째는 자존감을 회복하는 일이다. 즉 나는 소중하고 아름답고 유일한 영적 존재라는 걸 인정하고 대인관계에서 나를 바로 세워야 한다. 세번째, 타인과의 경계선을 확실히 긋는 일도 중요하다. 홀로 서기는 그래서 중요하다. / 임병호 논설위원

감정노동자

먹고살기 어려운 세상이라지만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점 등엔 쇼핑을 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연말연시, 명절전후나 무슨 날(day)이면 더욱 붐빈다. 경영주에겐 좋은 현상이지만 유통업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죽을 노릇이다. 백화점 등이 하루도 쉬지 않고 문을 열고, 고객이 늘어날수록 감정노동 스트레스가 커지기 때문이다.판매직콜센터 등 서비스산업 종사자들이 자신의 표현을 고객에게 맞추면서 일하는 것이 감정노동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말고는 아무 내색 않고 일을 해야 한다. 서비스 경쟁이 날이 갈수록 치열해져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감정노동자들이 많다. 서비스산업 종사자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백화점 노동자 가운데 56.2%가 우울증 등 스트레스질환을 가지고 있다.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이른바 진상 고객만이 아니라 열악한 근무여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제대로 쉴 수 없는 탓이다.최근 백화점 업계가 대형 점포 시설과 함께 영업시간 연장에 나서면서 노동자들의 근무여건은 더 크게 후퇴했다. 1990년대까지 있었던 주 1회 휴점은 없어졌고, 월 1회 휴점도 거의 지켜지지 않는다. 추석, 설 명절 연후에 이틀씩 쉬었던 것도 하루에 그쳤다. 백화점 판매 노동자들은 일주일 평균 6일을 일한다. 회사에 감정노동 해소 프로그램 같은 게 없는 상태라 직원들이 같이 쉬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게 유일한 방법인데, 영업시간이 연장돼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게다가 백화점에서 일하는 직원들 대부분이 백화점에 직접 고용되지 않은 협력업체 직원이어서 이들의 복지는 뒷전으로 밀린다. 직원 휴게실 자리에 고객 편의시설이 들어서고, 갑자기 30분씩 연장영업을 해도 협력업체 직원들은 문제를 제기하기 힘들다.서비스산업이 발전하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감정노동의 문제는 심각해졌다. 매장의 직원이 손님한테 뺨을 맞고 폭언을 듣는 경우도 발생한다. 모멸감이 들지 않는다면 감정이 없는 로봇이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너무 힘들다는 게 백화점 등 대형 서비스산업 종사원들의 하소연이다. 힘들면, 하기 싫으면 그만두라는 협박도 받는다. 고객이나 관리자가 서비스 노동자를 인격체로 대우해 줘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서비스 산업계도 빈부의 벽이 높다. /임병호 논설위원

비인기 종목과 대기업인

세계 무대의 엘리트 스포츠 강화는 꿈나무 인재의 조기 발굴과 꾸준한 지원이 관건이다. 한국 스포츠를 빛낸 몇몇 종목의 이면에는 기업인들의 그 같은 지원이 있었다.이번에 밴쿠버 영광을 이룬 덴, 스피드 스케이팅쇼트트랙피겨 스케이팅 등 빙상 3대 종목을 전략화한 대한빙상연맹의 밴쿠버 프로젝트가 주효한 사실은 이미 밝힌 바 있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은 이 프로젝트 등을 포함, 지난 13년간 120억원을 지원했다. 김연아는 이의 꿈나무대회 출신으로 3연속 우승했다. 이 전 회장은 1982년부터 1996년까지 대한레슬링협회장으로 있으면서는 한국 아마추어 레슬링을 세계적인 강국으로 육성했다. 한국 탁구가 난공불락이던 만리장성 벽을 허문 것은 그가 1978년 제일모직 탁구단을 창단, 이때 발굴한 꿈나무 양영자가 10년 뒤 88 서울올림픽에서 중국을 물리치고 금메달을 따면서 시작됐다.한국 양궁이 불패의 신화를 창조한 것은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이 1985년부터 1990년까지 대한양궁협회장으로 있으면서 심혈을 기울였던 기여가 절대적이다. 선수들에게 레이저 조준기가 달린 연습용 활을 쓰도록해 명중률에 자신감을 높이도록하고, 심리전담 컨설턴트를 두어 선수들 평상심에 안정감을 유지토록 했다. 초중고 양궁부 또한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땐 베이징 양궁경기장과 똑같은 시설을 세트로 만들어 선수들이 현지 실전처럼 연습하게 했다.한국의 핸드볼 강국이 이어지고 있는 덴 최태원 SK 회장의 지원이 크다. 특히 2007년 핸드볼큰잔치와 국가대표의 후원이 끊겨 위기에 처했을 때 후원사로 선뜻 나서 한국 핸드볼을 회생시켰다. 대한핸드볼협회에 300억원을 지원, 핸드볼 활성화를 위한 전용경기장 신축을 오는 5월에 착공해 내년에 완공할 예정이다.주목되는 것은 이 같은 지원 종목이 축구나 야구에 비해 비인기 스포츠 종목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비인기 종목이면서도 국제무대에서 당당하게 두각을 나타내어 국위를 선양한 이면에는, 이를 지원 육성한 대기업인들의 숨은 공로가 고여있다. / 임양은 본사주필

월급봉투

2010년 1월25일부터 사원들 월급을 본인에게 직접 월급봉투로 쥐어주는 사장님이 있다. 전체 사원이 40여명인 화성시의 한 중소기업체 사장이다.이 기업체도 지난해까지는 사원들 월급을 은행 계좌로 입금시켰던 것을 올 들어 월급봉투로 바꿨다. 하긴, 은행 이용이 대중화하면서 직장마다 계좌 입금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월급날이면 기다려지곤 했던 것이 월급봉투였다.월급봉투가 계좌 입금으로 바뀐 것을 가장 환영한 것은 주부들이다. 남편들이 월급봉투를 제멋대로 축내는 삥땅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빠듯한 한달 살림살이 가계를 망가뜨리는 것이 월급봉투 삥땅이었다. 계좌 입금이 되고 나서는 남편들이 아내에게 용돈을 타써야 하므로 주부들 지위 또한 향상됐다.그러나 월급봉투의 좋은 점도 있다. 남편이 월급봉투를 아내에게 안겨주면서 적지만 살림을 잘 꾸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수고가 많았다고 위로하기도 하는 것이 월급봉투를 가운데 두고 나누는 부부의 대화다.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월급봉투를 건네면 저렇게 벌어서 우릴 키우는구나!하는 심성교육의 영향을 주기도 한다. 또 월급봉투를 타면 평소 아내가 먹고 싶어 했던 것이나, 아이들이 갖고 싶어 했던 것을 사서 싸들고 집에 일찍 가곤 했던 게 가장의 멋스러움이었다. 전엔 주부들이 남편의 월급봉투를 버리지 않고 다 모았다. 지금은 맞벌이 부부가 많아 아내도 돈을 벌지만, 아무래도 가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남편벌이의 몫이다.한마디로 월급봉투에서는 사람의 냄새가 풍긴다. 물론 계좌 입금도 월급의 노고를 인정치 않는 것은 아니지만, 기계적이다 보니 사람 냄새가 덜 난다. 그렇다고 월급봉투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나, 앞서 말한 월급봉투 사장의 생각이 특이하다는 생각은 든다.그 사장님은 월급봉투를 사원들에게 일일이 주면서 수고했다!며 축내지 말고 집에 가져가라고 당부한다고 한다. 사원들의 반응 또한 월급봉투를 손에 쥐다보니까 노력의 대가를 실감한다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 사는 사회에서 사람 냄새가 그리운 시대다. /임양은 본사주필

여판사 시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판사는 황윤석(黃允石)판사다. 1952년 제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판사시보를 거쳐 이듬해에 서울지법 판사가 됐다. 이에 앞서 1951년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여성으로 이태영(李兌榮)씨가 있다. 그러나 판검사가 되진 못했다. 남편되는 정일형 박사가 야당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자유당 정권하에서 이태영씨 남편은 구 민주당 중견이었다. 일찍이 이화여자전문대학 가사과를 나온 뒤 자녀까지 둔 주부로 만학의 법률공부를 하여 고시에 합격했다. 91013대 국회의원을 지낸 민주당 정대철 전 의원이 그의 아들로 어머니가 고시 공부를 할 적에 곁에 재워둔 아이였다. 이태영씨는 변호사로서 가정법률상담소장, 세계여류법률가협회 부회장을 지내는 등 활발한 재야 활동을 벌였다. 이태영 변호사는 천수를 다 했고, 황윤석 판사는 아깝게 요절했다. 두 분 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지금은 여성 법조인이 보편화 됐다. 여판사여검사여변호사들이 많이 배출됐다. 이들 판검사 앞에 여성이란 말을 붙이기가 새삼스러울 정도다. 지난 22일 대법원에서 올 판사 임관식을 가진 89명 가운데 여성이 무려 63명으로 71%다. 여성판사가 3년 연속 남성판사에 비해 70% 이상을 차지했다. 이 같은 여초현상은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다.여성판사로 이미 김영란 대법관이 나왔다. 여성지방법원장, 고등법원장이 나올 날도 멀지 않다. 이만이 아니다. 판사라고 하면 으레 남성으로 여기기 쉬운 사회적 인식이 깨질 날 역시 곧 온다. 사법시험만이 아니고 행정고시, 외무고시 합격 비율도 여성이 두드러진다. 이런 가운데 특히 판사직의 여성 약진이 특히 주목되는 것은 독립된 사법부의 주요 구성원이기 때문이다.판사직에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순 물론 없다. 남자든 여자든 판사는 다 같은 판사인 것이다. 이렇긴해도 천부적 기질인 여성의 섬세함이 남성과 또 다른 점이 있지 않겠나 생각된다. 무엇보다 남성의 일상적 교만이 사라질 것으로 기대된다. 그렇다고 여성판사라 해서 외경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법원의 여인천하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 임양은 본사주필

‘예뻐 죽겠네’

그제 오후 1시 전 국민의 관심은 피겨퀸 김연아 선수에게 쏠렸다. 김연아 선수가 밴쿠버 퍼시픽콜로세움에서 연기를 펼친 2분48초 동안 가정과 직장, 식당, 버스터미널, 철도역 대합실, 달리는 버스택시 안에서도 TV와 라디오 중계에 눈과 귀를 모았다. 기술점수 44.70에 예술점수 33.80을 합쳐 총점 78.50, 역대 최고점으로 1위에 오른 김연아의 연기는 세계가 인정한 빙상예술이었다. 1984년 사라에보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미국 NBC 해설을 맡은 스캇 해밀턴의 말 그대로 김연아의 프로그램이 아시다 마오의 것보다 훨씬 대단하였다. AP통신은 진짜 본드걸처럼, 김연아가 라이벌을 쓰러뜨렸다. 그보다 잘해낸 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보도했다. 본드 걸 김연아가 경쟁자들을 물리쳤다(AFP통신), 한국의 국민적 영웅인 김연아가 매력적인 연기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월스트리트저널), 정신적 압박감은 김연아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뉴욕타임스)고 외국 언론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실황을 중계한 일본 NHK도 아사다가 완벽한 경기를 펼쳤다고 흥분하다가 김연아가 경기를 마치자 역시 김연아라고 찬사를 보냈다. 김연아의 간결한 점프 준비 동작과 우아한 팔동작, 풍부한 표정, 창의적인 연결동작은 누가 봐도 흠잡을 데 없었다. 전세계를 매료시킨 김연아의 진가는 오늘 더욱 빛을 발한다. 프리스케이팅은 4분10초 동안 12가지 과제를 연기한다. 점프 3번의 쇼트프로그램보다 4번이 추가돼 초반 점프 성공이 승부를 좌우한다. 24명이 연기를 펼치는 프리스케이팅은 조별로 6명씩 4조로 꾸며진다. 쇼트프로그램 1~6위는 마지막 4조에서 함께 연기한다. 김연아는 4조 3번째 연기자가 됐다. 2위 아사다 마오는 쇼트프로그램과 반대로 김연아의 바로 뒤에서 연기한다. 아사다 마오가 조금 신경에 걸리지만 오늘 김연아는 더도, 덜도 말고 쇼트에서처럼만 기량을 발휘하면 피겨스케이팅 올림픽 제패는 아무 걱정이 없다. 피겨퀸이 올림픽 퀸이 된다. SBS 여성 해설위원이 중계 방송을 하면서 (김연아 선수가) 예뻐 죽겠다를 연발했다. 빙상의 꽃으로 향기로운 김연아, 정말 아름답다. 김연아의 예쁜 목에 걸린 금메달이 보인다. / 임병호 논설위원

밴쿠버 신드롬

밴쿠버 동계올림픽 열기가 점점 뜨거워진다.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들의 금은동메달 획득으로 스케이팅 붐이 조성됐다. 아이스링크 입장객과 스케이팅 수강생이 지난해보다 20%가량 증가했다. 스피드스케이팅 장비 매출도 2월 들어 30~40% 증가했다. 피겨스케이트와 함께 스피드스케이트에 관심을 보이는 아이들이 부쩍 많아졌다. 미래의 김연아를 꿈꾸는가 하면 이상화 언니도 우상이 됐다. 금벅지, 꿀벅지로 불리는 스케이팅 선수들의 굵은 허벅지에 자극받아 몸 만들기에 뛰어들고 스포츠센터엔 이상화 선수의 건장한 허벅지가 화제가 되면서 20~30대를 중심으로 트레이닝 문의가 늘었다.새벽부터 중계방송을 보는 올림픽 중독 직장인들도 등장했다. 17시간의 시차로 인해 경기가 새벽부터 오전 시간대에 진행돼 중계방송을 보려는 직장인들의 풍경도 가지각색이다. 오전에 직장에서 인터넷으로 몰래 방송을 보는 사람도 적잖다. 일하는 척 조용히 있다가 갑자기 환호를 해 옆 자리의 동료를 깜짝 놀라게 한다. 근무시간에도 중계방송을 보느라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는 직장인들이 많다. 중계방송을 빠짐 없이 챙겨보느라 뜬 눈으로 밤을 지새기도 한다. 퇴근 후 각종 모임을 자제하고 일찍 귀가해 초저녁 잠을 잔 뒤 새벽에 일어난다. 주요 경기가 아침 식탁을 차리는 무렵에 열려 주부들의 시선이 자꾸 TV화면으로 간다. 아예 TV 앞에 앉아 시청하다가 찌개가 끓어 넘치는 걸 모르는 경우도 생긴다. 이렇게 국민을 즐겁게 하는 밴쿠버의 쾌거에 세계가 놀라고 있지만 이는 기적도 이변도 아니다. 그동안 세계 정상을 거머질 만한 노력을 기울였고, 그만큼의 성과도 거뒀다. 선수들은 하루 6시간씩 훈련에 매달렸다. 총알 같은 속도, 강철 같은 지구력 등은 모두 훈련의 결과다. 그런 패기는 지도자와 선배들의 공이기도 하다. 지도자들은 예전의 강압적인 훈련 대신 선수들의 컨디션과 분위기를 맞춰가며 스스로 노력하게 만들었다. 이규혁이강석 등 선배들은 여러 국제대회에서 최고의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후배들의 꿈과 자신감을 북돋웠다. 국민은 선수들을 뜨겁게 격려한다. 어제는 이승훈 선수가 금메달을 딴 데 이어 피겨퀸 김연아 선수가 역대 최고점을 기록하며 중간 선두로 나섰다. 밴쿠버에서 한국의 국격을 높여 주는 선수들이 정말 자랑스럽다. /임병호 논설위원

소년·소녀병

어느덧 70여명의 학도병들이 화약에 심지불이 붙듯이 만세를 부르며 적병을 향해 쇄도해 갔다. (중략) 처절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중략) 티 없이 청순한 젊음이 8월의 태양 아래 붉은 피를 토하며 쓰러져 갔다. 김용섭을 뒤따르던 소년이 뜨거운 피를 내뿜고 있는 중대장(필자 주석김용섭)을 끌어 안았다. 그는 목덜미에 다발총을 맞고 피를 분수처럼 쏟아냈다. 소년은 용섭 형! 형!! 하며 울부짖었다. (중략) 윤재성이상헌김훈식길안영서성룡정문호가 죽어갔다. 적의 시체 위에 학도병의 시체가 덮이고, 학도병 시체 위에 적의 시체가 엎어져 있었다. 시신조차 온전하지 않는 아비규환의 지옥이었다. (중략) 1950년 8월11일 새벽 4시에 시작된 전투는 71명의 학도병 가운데 김춘식외 47명이 포항여자중학교 앞 벌판에서 이렇게 산화했다.이상은 625와 학도병 책자에 쓰인 한 대목이다.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남상선(육군 예비역 대령)김만규씨(목사)가 함께 썼다. 1974년 7월25일 서울 혜선문화사에서 발행된 367쪽짜리 책이다. 인용한 내용은 학도병은 죽어서 말한다편에서 나온다. 육군 3사단에 예속됐던 두 저자는 나덕자나미옥 자매 등 여학생 학도병의 활약도 기술했다.그러니까, 벌써 60년이 됐다. 학도병은 16~17세가 대부분이다. 즉 소년병이다. 소년병의 참전 사실은 외견상 18세 미만은 징집을 금하는 국제법에 저촉된다. 이 때문에 공식으로 인정되지 못했던 소년소녀병의 병적과 활약상이 이제 한국전쟁 전사(戰史)에 기록으로 남게 됐다.소년소녀병은 징집된 것이 아니다. 지원병이다. 국방부가 625 참전 소년소녀병의 실체를 인정키로 한 단안은 만시지탄이지만 정말 잘한 일이다. 전사한 이들이나, 살아있는 이들이나 응분의 예우를 해야 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다.625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려 나라의 명운이 실로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을 적에 펜 대신 총을 들고 나선 것이 학도병, 즉 소년소녀 지원병들이다. 우리 국민이 오늘날 누리는 자유와 번영에는 이분들의 희생이 깔려있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임양은 본사주필

기호없는 선거직

기호 (몇)번 (아무개)군을 국회로 보냅시다라고 했다. 그 무렵은 국회의원 후보자를 선거운동 과정에서 유권자에게 겸손하게 불러 군이라고 지칭했다. 지프에 확성기를 달고 다니면서 확성기에 대고 그런 길거리 선거운동을 했다.여기서 기호는 선거구별로 갖는 입후보자 고유의 막대기 수다. 입후보자 이름위의 IIIIIIIIII 같은 막대기 수에 따라 기호 몇 번이라고 했다. 1948년 5월10일 제헌국회의원 총선부터 시작된 이 막대기 기호는 문맹자를 위한 것이다. 당시엔 한글도 모르는 유권자들이 너무 많았다. 후보자 이름을 몰라보는 유권자에게 기호 몇 개로 알아보도록 하기위해 나온 것이 막대기 기호다. 막대기 기호는 총선은 물론이고 1956년, 1960년 정부통령 직선에서도 사용됐다.지금은 투표용지에 적히는 입후보자 이름 순위 기호가 아라비아 숫자인 1234 등이다. 정당별 원내의석 수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같다. 다만 무소속 입후보자들은 추첨에 의해 원내 의석수가 가장 적은 정당의 순위 뒤로 결정된다. 그런데 입후보자 순위 결정이 문제가 된 선거직이 교육감 선거다. 교육감은 정당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원내의석 비율이 적용되지 못해 가나다 순으로 순위를 정했다. 그러나 이에 의한 1234 등 기호가 일부 유권자들에게 정당 기호로 오인되어 12번이 유리한 로또선거라는 비판이 제기됐었다.이에 지난 18일 국회를 통과한 지방교육자치법 개정에 따라 이번 62 지방동시선거에서는 교육감 후보자에게 1234 등 기호 부여가 사라진다. 대신, 투표용지에 교육감 후보자 명단을 게재하는 순서를 추첨으로 정하게 된다. 즉 아라비아 숫자 기호 없이 후보자 이름만 게재하는 것이다.하지만 맨 앞부터 적힌 순서를 정당별로 보는 오인의 우려가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일부의 의구심이 없지 않다. 유권자의 의식 문제다. 막대기 기호 시대가 아닌 터에, 아직도 막대기 기호 때 같은 유권자가 있다는 것은 진정한 민의의 반영을 해친다. 지금은 한글 이름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아라비아 숫자 기호가 없는 교육감 선거는 입후보자 게재 순서에 상관없이 후보자 이름을 잘 보고 투표를 해야 하는 것이다. / 임양은 본사주필

잡곡밥

가난의 상징이던 잡곡이 조명을 받는 이유는 잡곡에 건강을 되살리는 해답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영양 편중이나 서구식 식문화로 생긴 각종 질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데 잡곡이 상당히 유용하다는 것은 최근의 각종 연구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잡곡에는 탄수화물지방단백질 등 필수 영양소 외에 각종 미량 요소가 고루 들어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 풍토 속에서 자란 토종 잡곡은 한국인의 인체에 필요한 생리활성물질들을 함유하고 있어 약리효과 또한 뛰어나다.주요 잡곡 가운데 하나인 조의 경우 차조는 서숙, 메조는 좁쌀이라고 한다. 무기물과 비타민 등 쌀에 부족한 영양분을 고루 가지고 있어 임산부나 허약자, 환자들의 건강회복용 식품으로 애용돼 왔다. 옥수수는 단백질당질섬유질이 고루 들었으며, 씨눈엔 양질의 지방이 25~27% 함유돼 있다. 옥수수 속의 비타민E는 피부건조와 노화를 예방한다. 기장은 인류가 최초로 재배하기 시작한 식량 작물 중 하나다. 주성분은 조와 비슷하며, 조보다는 알곡이 굵다. 수수는 화본과 작물 중 특이하게 타닌을 함유하고 있으며 문배주의 원료로 사용한다. 찰수수는 정월대보름 약식의 필수 곡물로, 수수전병과 수수떡이 유명하다. 팥은 붉은 색을 띠기 때문에 제사떡, 동지팥죽 등 악귀를 물리치는 상서로운 식품으로 대접 받아 왔다. 진액을 빨아들이는 성질이 있어 각기병수기병 등 부종관련 질환에 좋다. 메밀은 조단백질을 다량 함유하고 있고 비타민과 필수아미노산도 풍부하다. 녹두는 주성분이 당질과 단백질이다. 떡고물죽빈대떡숙주나물 등 다양한 용도로 이용된다. 아밀라아제우라아제 등 소화효소가 들어 있고 혈압강하소염해열 등에도 좋다. 우리 조상들이 조귀리수수녹두팥메밀 등 잡곡을 꾸준히 재배해 온 것도 바로 의료행위와 먹을거리 농사는 한뿌리라는 의식농동원(醫食農同源)의 이치를 꿰뚫고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조선왕조 때 환갑을 넘겨 산 임금은 태조정종광해군영조광해군 등 5명인데 모두 잡곡밥을 즐겨 먹었다. 특히 83세까지 장수한 영조는 하루 세끼 잡곡밥을 즐겼다고 한다. 쌀에 잡곡을 섞은 밥은 보기에도 좋다. 잡곡이 약곡(藥穀)이라는 세상이다. 날마다 잡곡밥을 먹을 순 없지만 옛날 장수한 임금처럼 잡곡밥을 즐기는 것도 건강에 좋다. / 임병호 논설위원

오기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올림픽 도전사는 1936년 독일 가르미슈에서 열린 제4회 동계올림픽에서 시작됐다. 그해 창립된 조선빙상경기연맹 소속으로 일장기를 달고 출전한 김정연이 1만m에서 18분2초7의 일본신기록으로 12위에 올랐다. 태극기를 달고 처음 올림픽에 도전한 것은 1948년 제5회 스위스 생모리츠대회였다. 625 전쟁으로 1952년 제6회 노르웨이 오슬로대회에 불참한 것을 제외하곤 올림픽의 문을 끊임없이 두드렸다. 하지만 한국은 20위권 진입조차 쉽지 않았다.1970, 1980년대 빙속은 이영하와 배기태가 주도했지만 메달과는 거리가 멀었다. 배기태는 세계선수권 500m에서 3차례 우승했지만, 올림픽에선 1988년 캘거리대회 남자 500m에서 36초90으로 5위를 기록한 게 최고였다. 사상 첫메달은 1992년 알베르빌대회에서 나왔다. 김윤만이 남자 1천m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6년 토리노올림픽에서 이강석이 동메달을 따기까지 14년의 공백이 있었다. 이승훈이 지난 14일 5천m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장거리 메달리스트가 됐다. 이승훈의 은메달은 아시아 선수는 장거리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편견을 깨주었다. 이어 16일, 모태범이 드디어 금메달의 숙원을 풀었다. 1908년 국내에 처음 스케이팅이 보급된 이후 102년 만에, 태극마크 62년 만에 일궈낸 쾌거다. 모태범의 금메달은 체력과 폭발적인 스피드를 앞세운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이 단거리, 장거리 모두에서 통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스물한살 청년 모태범은 일곱살 때부터 부모의 권유로 취미 삼아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다. 중학생 때 골반을 크게 다치는 사고가 있었지만, 주니어 시절부터 꾸준히 국제경험을 쌓으며 한국 빙속을 이어나갈 기대주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규혁, 이강석이라는 큰 산이 있었다. 그러나 밴쿠버에서 남자 500m 스피드스케이팅의 영웅이 됐다. 모태범은 (국내에서)기자들이 나한테는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 해보자는 오기가 생겼다. 언론에서 무관심한 게 오히려 부담을 덜어주고 큰 도움이 됐다고 쾌활하게 말했다. 그 오기(傲氣), 실로 대단하다. 내친김에 1천m에서도 하나 더 땄으면 좋겠다. /임병호 논설위원

홍경희씨의 모정

설날 아침 SBS 밴쿠버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천500m 결승전 중계방송을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희비가 엇갈렸다.이정수(21단국대)가 2분17초611로 우승, 한국에 첫 금메달을 안겨준 것은 감격적 환희였다. 그러나 이에 앞서 불과 결승선 20m를 앞두고 3위로 달리던 이호석(25고양시청)이 인코스로 파고 들다가 2위인 성시백(23용인시청)과 부딪혀 둘 다 함께 쓰러진 장면은 너무도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금메달과 함께 은동메달까지 차지하는 싹쓸이를 눈앞에 두고 놓친 비운은 너무 참혹했다. 이에 겹쳐 분한 것은 오노(28미국)의 오만한 태도다. 그는 우리의 두 선수가 넘어진 바람에 2위로 결승선을 들어서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한국 선수들끼리 빚은 비운을 조롱하는 것이었다. 일본계인 오노는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때도 같은 종목에서 교묘한 반칙(할리우드 액션)으로 김동성의 금메달을 빼앗아간 악연의 장본인이다.금메달의 환희에도 어쩔 수 없이 가슴에 멍울진 아쉬움을 눈녹듯이 사라지게 한 것은 어제 아침에 일부 전국지 신문이 밴쿠버 현지에서 전한 따뜻한 모정의 소식이다. 이호석 선수가 성시백 선수의 어머니 홍경희씨(48)를 찾아 자신의 실수를 사과한 것도 용기있는 행동이고, 홍경희씨의 너그러운 관용 또한 대단한 것이다. 어머니 죄송합니다라는 이호석 선수의 말에 홍경희씨는 아니다. 둘 다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너도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주위에서 들리는 이야기는 무시하고 앞으로 남은 경기에 집중했으면 좋겠다며 따뜻이 안아주었다는 것이다.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것은 일생일대의 기회이고 또한 영광이다. 아들 성시백이 예선과 준결선을 거쳐 결선에서 이윽고 2위로 들어오는 것을 관중석에서 본 어머니 홍경희씨는 얼마나 가슴이 설레었겠는가,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사고는 청천벽력 같아 기절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인들 어찌 편할까마는, 이호석을 오히려 위로해주는 홍경희씨의 너그러운 마음은 아들의 동료 선수들을 모두 아들 대하듯이 하는 마음이 없으면 있을 수 없는 아름다운 모정인 것이다./ 임양은 본사주필

국사과목

현행 사법시험, 행정고시 전엔 1963년에 폐지된 고등고시(高等考試)가 있었다. 고등고시는 사법과와 행정과로 나뉘었다. 행정과는 또 1부(일반행정)2부(세무행정)3부(외무행정)4부(교육행정)가 있었다. 한 해에 배출하는 합격자가 사법과는 5~6명, 행정과는 10여명에 불과했다. 물론 지금보다 응시자 수가 적긴 했지만 사법시험의 경우, 근래 천명씩 합격시키는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 같은 합격률이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국사가 필수과목이었던 점이다. 사법과, 행정과 모두 본시험의 필수과목에 국사가 들어 있었다. 고인이 된 이병도 서울대 교수의 저서 국사대관은 고시생들의 필독서였다. 그 분은 고등고시 출제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국사과목이 이 같은 국가고시에서 사라진 것은 고등고시가 사법시험과 행정고시로 바뀌면서였다. 그런데 국사과목이 국가고시에서 부활한다는 소식이다. 행정고시나 외무고시 응시생은 먼저 한국사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공무원 임용시험령 개정안이 지난 9일 국무회의에서 통과돼 오는 2012년부터 시행을 본다. 이에 의하면 수험생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주관하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 응시해, 2급 이상의 인증을 받아야 행정고시나 외무고시에 응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에 비하면 국사를 본고사 과목으로 치르지 않고 본고사 응시자격 시험으로 치르는 것이 다르지만, 국사가 필수과목이 된 점은 같다. 이에 따라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연간 3~4회 시행하게 된다. 국가고시에 한국사를 중요시하는 이유로 행정안전부 측은 나랏일을 하는 공무원은 올바른 역사관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맞는 말이다. 우리의 국사를 알아야 하는 것은 국민의 도덕적 의무다. 하물며 고급 공무원이 되겠다는 사람이 국사에 무지해서는 도리에 합당하다 할 수 없다. 애초에 고등고시 폐지 이후 국가고시에 국사과목을 누락시켰던 것이 잘못이다. 사법시험은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코스에서 빠졌다. 로스쿨 졸업생 때문이겠지만 이도 포함시켜야 한다. 전문적 법조인이 되기 이전에 국민 소양의 필수 과목인 것이 국사다. 내친김에 모든 각종 국사고시에 국사를 포함시키면 좋겠다. 이울러 대입수능시험에도 국사의 비중을 높이는 정부 차원의 검토가 필요하다. /임양은 본사주필

우리 쌀 막걸리

국민 술 대접을 받는 막걸리의 80% 이상이 수입쌀을 원료로 사용하지만 소비자 대부분이 잘 모른다. 현재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막걸리 병의 성분 표시란엔 원산지 표시가 돼 있지 않다. 정부는 오는 7월부터 막걸리 원료에도 원산지를 표시하도록 할 예정이다. 막걸리는 우리의 대표적인 전통 술이다. 그러나 정작 시중에 나와 있는 막걸리의 99% 이상이 정부로부터 전통 술 인정을 받지 못했다. 농림수산식품부로부터 전통 술을 인정 받으려면 100% 우리쌀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 같은 조건을 충족시킨 업체가 극히 소수이기 때문이다. 전통술 인정을 받을 경우 현행 주세(5%)의 절반을 감면해준다. 현재 전국에 780여개의 막걸리 제조업체가 있지만 이 중 정부로부터 전통술 인정을 받은 업체는 15개 업체 뿐이다. 전통술로 인정 받은 막걸리가 전체 중 1% 안팎인 셈이다.막걸리 업체들이 사용하는 수입쌀은 정부가 쌀시장의 전면개방을 유예하기 위해 1995년부터 미국중국 등으로부터 들여오고 있는 의무수입물량(MMA) 쌀이다. 막걸리 업체들이 수입쌀을 직접 수입해온 것은 아니지만 수입쌀 막걸리 시장의 확대는 결과적으로 외국 쌀농가에 보탬을 주고 있는 셈이다. 막걸리 업체들이 그동안 우리쌀을 외면해 온 이유는 가격 때문이었다. 수입쌀이 훨씬 싸다. 작년 기준으로 수입쌀과 우리쌀 가격 차이는 약 3배에 달했다. 하지만 막걸리 한 병에 드는 생산원가 중 원재료인 쌀이 차지하는 비중은 10~20% 정도밖에 안 된다. 우리쌀로 대체하더라도 생산원가 상승분은 750㎖ 병당 150원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이 정도의 원가상승은 현재의 이윤에서 흡수할 수 있는 수준이다. 가격을 올리더라도 병당 생산원가 150원 정도만 반영할 경우 소비자들의 부담도 별로 크지 않다. 우리쌀을 사용하면 우리 농가에 직접적인 혜택이 돌아간다. 수입쌀 대신 우리쌀로 막걸리를 만들 경우 병당 200원 정도를 쌀농가에 안겨주는 것으로 파악됐다. 정부가 마침 우리쌀을 재료로 만든 막걸리를 지원해 쌀 소비 촉진과 막걸리 육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정책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매우 적절한 일이다. 술값을 조금 올려서라도 막걸리만큼은 우리쌀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임병호 논설위원

도소주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해 술 문화도 절기주(節氣酒) 형태로 발달했다. 봄엔 진달래꽃으로 빚은 두견주(杜鵑酒), 한식엔 찹쌀로 만든 청명주(淸明酒), 단오날에는 동동주의 일종인 부의주(浮蟻酒)에 창포뿌리를 넣어 숙성시킨 창포주(菖蒲酒)를 즐겼다. 설날 새벽엔 귀를 밝게 한다는 이명주(耳明酒)를 마셨다. 설날 아침에 마시는 술은 데우지 않는다고 해서 세주불온(歲酒不溫)이라고 하였다. 설날 아침에 마시는 술 가운데 도소주(屠蘇酒)는 악귀를 물리치는 술, 귀신 잡는 약술이란 의미가 있다. 한 사람이 먹으면 한 집에 역질이 없고, 한 집이 먹으면 한 고을에 역질이 없다(一人飮之 一家無疫 一家飮之 一鄕無疫)는 기록도 전한다.도소주는 청주에 약재를 넣어 끓인다. 동국세시기 동의보감 고사활요 등에 기록된 한약재의 종류는 조금씩 다르지만 길경천초방풍백출진피육계 등이 주재료다. 자양강장제이면서 피부병이나 혈관계 질병을 다스리는 약재들이다. 재료는 달라도 만드는 법은 같다. 한약재를 주머니에 넣어 섣달 그믐날 밤 우물에 담가 넣는다. 그리고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꺼내 청주에 넣어 몇 번 끓어오르게 달인 후 차게 식힌다. 이렇게 준비한 도소주를 설날 아침 차례를 지내고 가족이 모여 앉아 한 잔씩 돌아가며 마신다. 도소주는 알코올 도수가 낮아 아이들이 조금 먹기엔 괜찮은 술이다. 엷은 황금빛을 띠며 술맛은 부드럽고 약간 달다. 산초와 백자 등으로 술을 빚으니 그 향기 그윽하네/ 도소주는 옛날부터 이 세상에 이름이 나 있었구나 조선시대 학자 박순(1523~1589)이 지은 음도소주(飮屠蘇酒)란 시구다.도소주를 마시는 데는 법도가 있다. 술을 마실 때는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향한다. 가족이 둘러앉아 어린 순서부터 받아 마신다. 젊은이들이 나이를 먹어 점차 어른이 되어감을 축하해주는 뜻이다. 어른들에게 술 마시는 예법을 배우는 자리이기도 하다. 도소주를 마시는 풍속을 일컫는 말인 도소음(屠蘇飮)은 신라시대 중국에서 들어와 고려시대에 성행했다. 조선시대엔 상류층 일부만 즐겼다고 한다. 일본강점기를 거치며 잊혀졌다 최근 다시 풍속을 잇는 가정이 많아졌다. 설날 아침 도소주를 마셔보는 것도 멋 있겠다. /임병호 논설위원

안양시의 업권침해

안양시가 시청자리에 100층짜리 복합건물을 지어 임대업을 하겠다는 취지를 모르는 게 아니다. 경영행정의 기법이다. 세외수입의 극대화를 위해서일 것이다.스카이 타워로 부르는 100층 건물을 지으면 우선 수도권의 명물로 등장한다. 안양시 청사로 쓸 부분은 극히 일부분이다. 컨벤션센터나 비즈니스센터 등 문화공간을 둔다고 해도 공공공간의 용도는 아마 10%도 안 될 것이다. 100층 건물의 90% 이상은 뭘로 쓰던 민간인이 쓸 것이다. 시비로 신축할 수도 있지만, 민자를 동원하는 방법도 있다.문제는 자치단체의 건물 임대가 과연 타당하느냐에 있다. 민간 임대엔 호텔식당사무실 등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만큼 업종도 다양하고, 그 수 또한 방대할 것이다. 잘은 몰라도 임대가 수천건에 이를 것이다.현대식 시설의 100층짜리 복합건물에 입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이에 쏠리면 안양시내 민간인 빌딩 등 일반 건물의 임대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된다. 가뜩이나 공실이 많은 판에 공실이 더 늘 것이다. 아니면 임대 조건을 파격적으로 완화하든지 해야 된다. 이런 현상을 지역경제를 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다.100층짜리 건물을 지어 얻어지는 세외수입이 연간 370억원이라고 한다. 생각보다 많지 않다. 370억원이 아니라, 그 곱절이 된다해도 재정자립도 신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면서 지역 임대업에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 과연 합당한지 이 또한 의문이다.자치단체의 경영행정은 공공기관에서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선택돼야 한다. 예를 들면 경상북도 영덕군이 조성한 해상공원 등이다. 이에 비해 건물 임대업은 지역사회의 기존 업권이다. 이를 안양시가 100층짜리 건물을 지어 우월한 입장에서 민간 임대업과 경쟁을 벌이는 것은 업권 침해다. 대기업은 대기업다운 기업 활동을 해야 하는데도, 중소기업 업종의 업권을 잠식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안양시의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다. 재정자립도를 높이고자 하는 노력은 이해한다. 그러나 100층 건물 임대업은 방법이 아니다. 스카이 타워가 명물이 아닌 원성의 괴물이 될 수 있다. / 임양은 본사주필

어느 할머니

돈, 돈은 참 좋은 것이다. 돈이 있어야 부모노릇을 한다. 돈이 있어야 자식노릇도 한다. 돈이 없으면 친구 만나기도 겁난다. 돈이 없으면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한다. 돈을 경멸시 하는 것은 위선이다. 사회적 경제활동은 소득, 즉 돈을 벌기 위해 서 하는 것이다.이러한 돈을 얼마쯤 지녀야 하는 것일까, 정답이 있을 수 없다. 필요한만큼, 쓸만큼 있으면 된다지만, 돈이 많아지면 필요한 데가 늘고 쓸 데가 더 많아지는 게 돈이다.돈은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는 것도 중요하다. 쓰길 잘 써야 한다는 말이 있다. 물론 낭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한데, 돈을 쓰는 덴 베푸는 씀씀이도 있다.근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말이 신문 지상에 자주 나온다. 지도층의 사회 기부행위를 말한다. 원래는 프랑스어로 귀족(노블레스)의 의무(오블리주)란 뜻이다. 즉, 베품을 귀족의 품격으로 꼽았던 데서 유래한다. 물론 중세기의 귀족은 베품은 커녕 착취를 했으나 본연의 품격은 베푸는 것으로 꼽았던 것 같다.국내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대표적인 이는 신양문화재단 이사장 정석규씨(81)다. 태성고무화학 창업주인 그는 빛바랜 양복을 입는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1987년부터 모두 300억원이 넘는 돈을 장학사업에 기부했다. 그러나 우리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선진국만큼 보편화되지 못했다. 이웃 사랑의 온정은 오히려 사회저변층이 더 두드러지곤 했다. 안산시사할린사업소에는 10여년 동안 연말이면 거액을 남 모르게 보내는 익명의 독지가가 있어 홍길동으로 불려졌다. 며칠 전엔 전남 담양군청에 장학금으로 써달라며 돈상자를 보낸 얼굴없는 기부가 있었다고 신문에 났다.김춘희씨(85서울시 양천구 신정동)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다. 생계비로 받은 정부 보조금을 푼푼히 모아 재작년에 500만원을 이웃돕기 성금으로 내놓은 이다. 그가 옥탑방 전세금 1천500만원과 사후 시신을 의과대학 연구를 위해 써달라며,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에 기증한 채 지난 4일 지병으로 세상을 떴다. / 임양은 본사주필

전셋값

전세(專貰)제도는 외국의 입법례에선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에서 고유하게 발달한 부동산 거래라고 한다. 조선총독부가 1910년대 작성한 관습조사보고서(慣習調査報告書)에 따르면 전세란 조선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가옥 임대차의 방법으로서 임차할 때 차주(借主)로부터 일정한 금액(가옥의 대가의 반액 내지 7, 8分인 경우를 통례로 한다)을 가옥 소유자에게 기탁하여 별도로 차임(借賃)을 지불하지 않고 가옥반환 시에 그 금액의 반환을 받는 것이다 라고 적혀 있다.당시 경성, 지금의 수도권을 중심으로 많은 급전이 필요했던 양반들 사이에서 이뤄졌던 거래다. 전세 제도는 우리나라 경제가 고도 성장했던 1980 ~90년대에 완전히 고착화됐다. 80년대 전셋값은 집값의 50% 정도였다. 2억원짜리 집을 전세로 내놓으면 보통 1억원을 전세금으로 받았다. 당시 은행 금리는 연 10~15%를 넘어섰다. 예컨대 1억원을 은행에 예금하면 이자만 1천만원(10% 기준), 매달 약 80만원의 이자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전문가들은 국민소득 1만달러가 넘으면 이자율이 10% 밑으로 내려가 자연스럽게 미국, 일본처럼 렌트 개념의 월세제도가 전세를 대체할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금리가 5%대로 떨어졌는데도 예측은 빗나갔다. 집값 상승의 수익 구조가 그 이유다.새집을 샀을 때 초기비용이 많이 들어가는데, 보통 전세금을 받아서 초기비용에 메워 넣는다. 무이자로 대출받는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금융권 대출+전세금까지 합해져서 레버리지가 높아진다. 집값이 상승할 경우, 레버리지 효과로 투자비용 대비 수입금액은 이른바 따블이 되는 기대감이 생긴다. 이 때문에 내집 마련의 꿈을 안고 사는 사람들은 전세를 끼고 주택을 사는 것이 다른 투자 대안들을 앞지른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전세를 얻는 무주택자들이다. 근래 수도권 전셋값이 치솟아 주택 매매가의 71%를 넘는 곳도 나오고 있다. 매매가가 1억7천만원 선인데 전셋값이 1억2천만원이면 심각한 일이다. 전세를 놓는 주택 소유자와 전세를 얻는 무주택자의 입장은 다르다.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전세 제도를 갖고 있다는 게 좋은 현상은 아닌듯 싶다. / 임병호 논설위원

입춘대길

입춘(立春)은 새해를 상징하는 절기다. 24절기 중 첫번째다. 양력으로 2월4일경이다. 음력으로는 섣달, 정월에 들기도 한다. 예전엔 입춘날 여러가지 민속적인 행사를 가졌다. 그 중 하나가 입춘첩(立春帖)이다. 춘축(春祝)입춘축(立春祝)이라고 한다. 각 가정에서 대문기둥이나 대들보, 천장 등에 입춘대길 가화만사성 국태민안 등 좋은 뜻의 글귀를 써서 붙이는 일이다. 대궐에선 문신들이 지은 연상시(延祥詩) 중에서 좋은 작품을 뽑아 내전 기둥과 난간에다 써 붙였는데 춘첩자(春帖子)라고 불렀다. 사대부집에서는 입춘첩을 새로 지어 붙이거나 선인들의 아름다운 글귀를 따다가 썼다.입춘날은 농사의 기준이 되는 첫 절기여서 보리뿌리를 뽑아보고 농사의 흉풍을 가려보는 농사점을 봤다. 또 오곡 씨앗을 솥에 넣고 볶아서 맨 먼저 솥밖으로 튀어나오는 곡식이 그해 풍작이 된다고 믿었다.입춘날엔 각 지방의 민속이 있었는데 제주도의 입춘굿이 유명하다. 무당조직의 우두머리인 수신방(首神房)이 맡아서 했는데 관(官)에서 주관한 게 이채롭다. 해마다 입춘 전날엔 온 섬의 수심방이 관덕정(觀德亭) 또는 동헌에 모여서 전야제를 치르는데 나무로 만든 소에 제사를 지낸다. 이튿날 아침엔 호장(戶長)이 목우에 쟁기를 메운다. 예복(軍服巫服)을 입은 심방들은 목우를 앞세우고 그 앞엔 기장대엇광대빗광대초란광대갈채광대할미광대 등이 나아간다. 그 뒤로 어린 기생들이 따라가며 북장구징 등 무악기(巫樂器)를 울리며 호장을 호위하여 관덕정 앞마당에 이른다. 호장은 심방들을 민가에 보내 여러가지 곡물들을 얻어오게 하여 실한 종자를 고른다. 굿놀이 행렬은 다시 동헌에 이르러 농사 놀이, 새 놀이, 사냥꾼 놀이 등을 실연(實演)한다. 그때 목사(牧使)가 나타나 술과 담배를 권하면 구경꾼들도 함께 어울려 태평과 풍년을 축원한다. 관과 민(民)이 화합하는 흐뭇한 광경이 펼쳐진다. 입춘굿은 60여년 전만 해도 구경할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각종 민속놀이가 많다. 민속놀이는 소중한 고유문화다. 길이 전승돼야 한다. 오늘은 입춘날, 국태민안의 길운이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임병호 논설위원

젊은 치매

노망든 늙은이는 산 채로 산중 구덩이에 갖다가 버렸다. 고구려에서 유래됐다 하여 고려장이라고 했다. 노망든 아버지를 고려장하고 돌아가는 데, 데리고 간 아들이 버려둔 지게를 걸머지고 있어 왜 가져가느냐?고 물었다. 나중에 나도 아버질 고려장 할 때 쓰려고 가져간다는 아들의 말에 그만 버렸던 노인을 다시 데려갔다. 이리하여 고려장 풍습이 없어졌다는 고려장 설화다.현대판 고려장이 있다. 치매 걸린 아버지나 어머니를 바깥구경 시켜준다고 외지로 데려가 번화한 곳에서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혼자 길에 세워둔 채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리해서 노인복지시설에 수용된 노인들이 숱하다.예전엔 노망이라고 불렀던 치매가 심각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전국 의료기관에서 진단된 치매 환자가 2002년에 4만7천747명에서 2008년엔 17만5천749명으로 3.7배나 늘어났다는 것이다. 더욱 우려스런 현상은 40대~50대의 치매다. 2008년의 40대~50대 치매 환자가 8천266명으로 전체 환자의 4.7%를 차지했다. 치매는 노인에게만 일어나는 노망으로 알았던 것이 이제는 젊은 노망 환자가 생기는 추세다.치매는 전두엽의 이상 질환이다. 대뇌의 앞 부분이 전두엽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포유동물의 고등동물일수록 전두엽 또한 발달도가 높다. 이러한 전두엽을 감싸는 백질에 이상이 생겨 분별능력을 상실하는 것이 치매다. 현대의학으로도 뚜렷한 치료방법이 없다. 정신외과 수술이 불가하여 복용약으로 치매의 진전을 지연시키는 것이 고작이다.치매 환자 연령이 40대~50대로 낮아지는 원인을 흔히 말하는 중장년층의 스트레스로 건보공단은 꼽고 있다. 중장년기는 사회활동이 가장 왕성한 지라, 특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데다 고혈압이나 당뇨병 같은 성인병이 많아 이의 합병증으로 젊은 노망환자가 늘어간다는 것이다. 집안에 치매 환자가 생기면 뒷바라지 하느라고 온 집안이 엉망이 된다. 가족간의 불화로 번지기도 한다. 노부모를 둔 사람들은 부모가 치매에 걸리지 않은 것만도 축복받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 임양은 본사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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