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한 출연자

방송, 특히 TV는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는 것이어서 방송 출연자는 엄연히 공인이다. 그동안 일부 출연자들이 상식을 넘어선 발언으로 지탄을 받은 적이 많았지만 최근엔 더욱 심해져 여간 불쾌한 게 아니다. 특히 연예 프로그램이 더하다. 방송 출연자는 개인적인 관계를 떠나 서로 ‘oo씨’나 직함을 부르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작금 TV에서는 ‘누님’ ‘선배님’ ‘오빠’ ‘언니’ 등 진행자와 출연자간 개인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호칭을 사용하거나 이름을 부르는 사례가 빈번하다. 마치 친목회나 동문회의 뒷풀이 장소 같다. 진행자와 출연자들이 사용하는 말 중에 반말도 많다. 조금 지난 예를 들면 태진아 가수는 KBS2 ‘해피투게더’에 출연해 “응 그렇지…. 웃기는 친구 아니야?”하고 말하는 등 진행자에게 시종 반말로 일관했다. 한술 더 떠 “왜 안해! 가을 운동회인데… 여자들(떡)물고 있어”, “야 황보! 너 왜 했어”등 일부 진행자는 출연자에게도 반말을 사용했다. 상대방을 낮추는 호칭이나 비속어가 그냥 마구 나온다. “야! 지원아 너나 잘해”, “니네 다 죽었어”, “뭐야! 아이씨∼”, “싸가지가 없네요”등이 이러한 사례다. 또 ‘돼랑이’, ‘윤덤’ ‘만갑이 형님 등 별명을 부르기도 했다. 드라마속의 대화라고 하여도 거부감이 드는데 선후배들이 모인 사석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 지겨울 정도다. 진행자나 출연자들이 시청자를 우롱하는 게 심히 불쾌하다. 이런 저질 방송을 보며 재미있어하는 일부 시청자들의 모습도 한심하다. 도대체 방송국들의 제작자는 무슨 마음으로 저질·막말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또 수준미달의 진행자나 출연자들을 등장시키는 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닌 말로 출연시키는 대가로 그들에게 혹 뇌물이라도 받았는가, 저절로 의심이 간다. TV를 안볼 수도 없고 정말 황당하다. 저질 연예인들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강력히 제재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임병호 논설위원

매춘

우리나라에서 매춘(賣春)을 전업으로 하는 창기(娼妓)가 등장한 것은 1876년 개항 이후다. 일본은 부산 원산 인천 등 개항지를 중심으로 집창촌(集娼村)인 유곽을 설치했다. 1916년에는‘유곽업 창기 취제규칙’을 만들어 매춘을 공식화하고 창기들에게서 세금을 받았다. 한반도에서 생긴 최초의 공창(公娼)제도다. 1947년 미 군정청에 의해 폐지됐으나 이번에는 미군 주둔지에 사창가가 들어서 ‘양공주’들이 독버섯처럼 번져 나갔다. 1961년 ‘윤락행위방지법’을 만들었으나 내용이 빈약했고 그나마 시행령은 8년 뒤에야 제정됐다. 1968년 당시 김현옥 서울 시장은 일명 ‘나비작전’으로 국내 최대의 윤락가였던 ‘종삼(鍾三)’소탕에 나섰다. 그러나 윤락가는 되레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는 부작용이 생겼다. 요즘엔 속칭 ‘미아리 텍사스촌’ ‘청량리 588’ ‘천호동 텍사스촌’ 등 서울의 대표적인 윤락가들이 뉴타운 및 균형발전촉진지구에 포함돼 개발과 함께 자취를 감출 것으로 전망하고 있지만 ‘종삼’의 경우와 비슷할 것 같다. 매춘의 역사는 기원전 4천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사원(寺院)매춘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의 매춘 봉납제(奉納制)에서 유래를 찾기도 하는데, 최근 성남지역의 대표적 윤락가로 알려진 중원구 중동 텍사스촌에 근무(?)하는 여성들 10명 중 8명이 하루 9시간 넘게 중노동(?)에 시달리는 등 인권침해가 심각한 것으로 드러나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다. 성남 남부경찰서 방범과가 지난 10월 한달동안 95개 중동 유흥업소에 근무하는 여성 종사자 57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다. 사창이 무서운 것은 성병만이 아니다. 청소년들이 그릇된 성 세계에 빠져 드는 게 가장 우려된다. 대낮에 공원 등지에서 공공연하게 이뤄지는 남성 노인들을 상대로 한 윤락행위도 보통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니다. 매춘이 필요악이라면 숫제 공창을 제도화하면 어떻겠느냐는 얘기는 그래서 나온다. 공창제도를 놓고도 찬반으로 엇갈리지만, 어쨌거나 매춘이 없을 동물의 세계가 인간세계 보다 낮지 않나 싶다. /임병호 논설위원

이해인 수녀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난 이해인 수녀는 1964년 입회 후 유학이나 서울에서의 몇 년 소임기간을 빼곤 줄곧 부산에서 생활해 왔다. 텃밭에서 배추·무·허브가 자라고 아름다운 광안리 바다가 보이는 수녀원에서 수녀 100여명과 더불어 산다. 31세 때인 1976년에 낸 첫시집 ‘민들레의 영토’이후 ‘내 혼에 불을 놓아’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를 출간했는데 세 시집이 한꺼번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최근의 산문집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까지 그가 펴낸 책은 10권이 넘는다. 수도생활 틈틈이 대학 및 각종 기관 단체에서 시낭송이나 아름다운 언어활동을 주제로 강의하는 일이 이해인 시인의 근황이다. 나이 60을 바라보고 있지만 특강 중 성가나 ‘초록바다’ ‘과수원길’같은 동요에 율동도 마다하지 않는 인기강사다. 10여년 전, 안양 수리산 성지에서 있었던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원모임 때에도 이해인 수녀는 ‘과수원길’을 청아하게 불렀다. 그 기억은 언제나 고요하고 신선하다. “시를 빚어내는 일은 늘 행복하지만 그만큼의 아픔이 따릅니다. 마음 안에 숨어 있던 어떤 시상이 제 모습을 갖추고 한편의 시로 탄생되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고, 애를 쓰다 보면 실제로 여러 번 몸살이 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시가 너무 착한 내용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듣는다는 그는 “착해 보이기 위해 속으로 얼마나 아픈 시간을 가졌겠느냐”고 반문한다. 시를 함부로 쓰고, 남의 시를 함부로 말하는 시인들이 명심해야 할 소금같은 말이다. 그런데 이해인 시인이 내년 1년은 글발표와 강연 등 외부활동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시는 쓰되 발표하지 않으며 2004년도 강의 요청은 진작부터 거절해 왔다. 한때 유명세가 부담스럽고 편치 않던 힘든 나날도 경험했지만 50대 후반 이후 연륜이 주는 여유가 생기고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 세상을 대하는 시선이 한결 여유로워 졌다고 한다. 내년에는 수도자로서 수녀회에 칩거하며 기도와 사색에 몰두할 계획이라는 시인 이해인 수녀의 모습이 지순지고하다. /임병호 논설위원

정대 스님의 다비식

중도 여러 가지다. 산중에 칩거만하는 산승(山僧)있다. 불학(佛學)에 조예가 깊은 학승(學僧)이 있고, 참선지도를 일깨운 선승(禪僧)이 있다. 이런가 하면 집집마다 찾아 목탁을 두드리며 시주를 받는 탁발 수도승으로 걸승(乞僧)이 있다. 또 중은 중이지만 속태를 벗지못한 중으로 속승(俗僧)이 있다. 고매한 중으로는 걸출한 중을 일컫는 걸승(傑僧)이 있고, 학행이 드높은 고승(高僧)·성승(聖僧)이 있다. ‘부처의 눈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엔 돼지만 보인다’고 했다. 이러므로 사물을 통해서 일깨움을 받는다면, 예컨대 하잘 것 없는 창녀를 통해 깨친 바가 있으면 창녀 또한 부처라는 것이다. 하물며 속인도 아닌 중을 두고 구분하는 것이 큰 속절이 있을까 마는 그래도 중 또한 중 나름인 것 같다. 이 시대 불교의 표상이었던 성철 스님이 고승이라면 얼마 전에 입적한 장좌불와 1일1식의 청화 스님은 선승인 것이다. 두 스님 다 또 산승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 지난 22일 화성 용주사에서 다비식을 가진 정대 스님은 동국학원 이사장 등을 맡아 현대 불교사에 큰 공을 세운 대표적인 학승이다. 조계종 총무원장인 법장 스님이 “산에 큰 나무가 쓰러진 것처럼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고 한 정대 스님의 법체도 이젠 사리만 남긴 채 한 줌 재로 돌아갔다. 불가에서는 이승을 떠나는 열반을 중인의 괴로움과 번뇌를 끊고 불생 불멸의 법성을 증험하는 해탈의 경지로 설명한다. 그러나 석가가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한 열반도에도 제자들과 천룡 귀축 등이 통곡하는 모습이 그려진 것을 보면 이승에 남는 사람들로써는 역시 슬픔이 아닐 수 없다. 가면 또 온다던가, 큰 중이 가면 작은 중이 큰 중이 되어 중생을 제도하겠지만, 어떻든 큰 중들이 자꾸 떠나는 게 허전해진다. 비단 불교만이 아니다. 종교계의 거인들이 좀 더 장수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임양은 주필

거짓말

플래치 리드는 소송에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짓말을 일 삼는 변호사다. 그는 또 일 때문에 가족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항상 변명만 한다. 거짓말 때문에 그는 이미 아내와 아들 맥스에게 신용을 잃었다. 플래처는 아들의 생일 파티에는 꼭 참석하겠다고 약속한다. 아들은 기대에 부풀어 친구들을 초대한다. 하지만 거액의 수임료를 챙기고 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은 아빠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실망한 아들은 생일 소원으로 아빠인 플래처가 하루만이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플래처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룻동안 정직한 말만 하면서 생활이 뒤죽박죽된다. 그러다가 법정에서 진심으로 아이를 사랑하는 상대편 의뢰인을 보고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미국의 코미디 영화 ‘라이어 라이어(Liar Liar·감독 톰 새디악)’의 줄거리다. 미국의 37대 닉슨 대통령(재임 1969∼1974)은 ‘워터게이트’사건으로 물러났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1972년 6월 대통령 재선을 위해 비밀공작반이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본부에 몰래 들어가 도청장치를 하려다 들킨 사건이다. 닉슨은 처음에 “아니다” 또는 “알지 못한다”고 했지만 나중에 들통나 결국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미국과 일본의 정치인 등 사회지도층이 가장 무서워 하는 낙인이자 최상급의 욕은 ‘거짓말쟁이’라고 한다. 거짓말쟁이로 한번 낙인 찍히면 닉슨 대통령처럼 공직생활은 끝장이다. 국제투명성기구(TI)가 발표한 나라별 부패인식지수(CPI)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조사 대상 133개국 중 50위로 지난해보다 10계단 떨어졌다. 모든 부패는 거짓말에서 비롯된다. 우리나라에서 거짓말을 가장 많이 하는 계층이 정치인들이라고 하면 아마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것 같다. 요즘 한국정치판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면 거짓말들을 하도 많이 하여 국민이 오히려 불안하다. 영화 ‘라이어 라이어’의 플래처 아들처럼 하루만이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해도 씨가 안먹힐 게 분명하다. 우리 정치판, 도대체 왜 이러는가. /임병호 논설위원

경기도 기념물 19호

수원의 ‘노송지대’는 딸기 집단재배지 ‘푸른지대’와 함께 관광지로 각광받았던 명소였다. 노송지대는 210여년 전 조선조 22대 임금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를 참배하기 위한 능행차 길목에 소나무를 심은 지역이다. 현재의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1번 국도 인접 5㎞ 구간이다. 정조대왕이 내탕금 1천량을 하사해 1789년 낙랑장송 500그루를 심은 노송지대는 1960 ~ 70년대 들어 이 일대에 교통량이 급속히 증가, 매연 등으로 인해 노송들이 병들거나 고사(枯死) 했다. 1973년 경기도와 수원시가 소나무 전수조사를 실시, 살아 남아 있는 137그루를 ‘경기도 기념물 19호’로 지정해 관리인까지 두어 소나무에 영양주사를 주입하는 등 정성을 다해 집중 관리에 들어갔다. 그러나 노송들의 고사가 계속돼 현재 39그루만 남아 있다. 수원시가 1990년대 후반부터 노송지대에 500여그루의 후계목(後繼木)을 심고 연간 3천만원 가량의 예산을 들여 집중 관리하고 있지만 인근에 중고차 매매단지와 음식점들이 즐비한 데다 최근엔 인근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 정자지구까지 생겨 하루 종일 차량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군데 군데 남아 있는 노송들은 줄기가 크게 휘고 자동차 매연으로 검게 변색해 안타깝기 그지 없다. 송정초등학교 앞 2그루와 인근 10여그루의 노송은 정상적인 지탱이 어려워 철근기둥에 의존, 그 옛날의 정취와 기풍은 사라졌다. 전문가들은 노송지대 보호의 근본 대책으로 차량통행 금지나 제한을 내놓았다, 그러나 인간편리 우선인 요즘 세상에서 이런 조치를 취하기는 당국으로써도 사실상 어려운 노릇이다. 탄식하자면 인간 의사도 늙고 병 들면 죽는데 산도 아니요 바위도 아닌 식물 소나무가 어찌 영생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늙으면 노인이 되듯 청송(靑松)도 이제 노송(老松)이 됐지 않은가. “매연때문에 사람도 목이 아픈데 하루 종일 일년 내내 서있는 소나무야 오죽 하겠느냐”는 주민의 걱정이 고마울 뿐이다. 후계목들이 세월이 수백년 흐르면 노송이 될테니 그나마 다행이다. /임병호 논설위원

시흥문학상

올해로 4회를 맞은 ‘시흥문학상’은 지방자치단체가 제정했지만 응모자가 전국 각 지역 사람이라는 점이 돋보인다. 문단에 등단하지 않은 신인만 응모하는 것이 아니라 기성문인도 응모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이채롭다. 시흥문학상은‘시흥을 전국에 알리기 위하여’ 처음에는 응모작품 소재를 ‘시흥의 자연, 역사’ 등으로 한정했었다. 시흥은 서해안 시대를 꽃피울 지리적인 여건을 갖췄다. 서해안에서 낙조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오이도, 신석기의 패총, 청동기의 지석묘, 통일신라 말엽 청자·백자 가마터, 고려초기의 마애상 등 선사유적지가 역사의 숨결을 전해 준다. 해안 따라 펼쳐지는 황홀한 해넘이, 월곶 포구, 오이도 해양 단지도 유명하다. 사철 시민을 반겨주는 소래산은 늘 아름답다. 이러한 시흥을 문학작품을 통해 널리 자랑하고자 제정한 시흥문학상이 지금은 문학인구 저변확대에도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다. 제3회 때 詩부문 대상은 울산 사람이, 수필부문 대상은 부산 사람이 당선됐다. 응모작품을 시흥시 인터넷 홈페이지로만 접수하고 응모자의 이름이 없는 작품을 놓고 심사하기 때문에 공정성도 확실하다. 한국예총 시흥지부 및 한국문인협회 시흥지부가 주관하면서 올해 제4회 심사에도 시흥거주 문인은 참여하지 않았다. 주관측이 스스로 결정한 심사방법이다. 올해 시흥문학상 당선자 중 시부문 대상은 고양시에 거주하는 하백수씨가, 수필부문 대상은 서울의 김문호씨가 당선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전국 각지에서 544명이 응모했고 작품은 1천982편에 이른다. 응모한 작품이 이렇게 많은 것은 시흥문학상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지만 상금이 많은 이유도 있을 수 있다. 시·수필 대상자는 200만원, 금상 100만원, 은상 50만원, 동상은 20만원을 각각 지급한다. 시흥시가 문학에 투자하는 예산이 결코 적지 않다. 응모작품을 심사하던 날 조동진 예총시흥지부장은 “대상 상금을 500만원으로 올리는 계획을 시흥시와 추진하는 등 시흥문학상을 더욱 활성화 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었다. 시흥시의 문화예술행정을 경기도 각 시·군이 본받았으면 좋겠다./임병호 논설위원

長幼有序와 주사위

장유유서(長幼有序), 어른과 아이(아래사람) 사이에는 순서와 질서가 있음을 일깨우는 오륜(五倫) 중 하나다. 오륜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다섯가지 도리다. 유학(儒學)의 삼강오륜에서 나온 말이다.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다’는 전래 속담과 뜻이 같다. 물론 이는 일상생활의 범주다. 조직생활에서는 나이가 아닌 위계질서란 게 따로 있다. 흥미있는 외신이 있었다. 미국 유타주 워싱턴테라스시에서 주사위를 던져 시장 당선자를 정했다는 것이다. 현직 시장과 이에 도전한 후보의 득표수가 같았으므로 주사위를 각기 두번씩 던져 나온 수를 합쳐 많은 사람이 당선자로 합의한 끝에 현직시장 후보가 당선된 것으로 전해졌다. 유타주 법에는 동점이면 제비를 뽑게 되어있으나 이들 두 사람은 주사위 던지기가 더 공정한 걸로 의견을 모았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의 이런 제비 뽑기나 주사위 던지기는 이를테면 모험심이다. 불안과 공포에 도전하면서 황무지를 일군 개척민 후예들 특유의 기질인 것이다. 그러나 동양, 특히 우리의 선인들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렸다. 모험보다는 규범이 앞섰다. 장유유서는 일상생활의 규범이지만 공공생활에서도 장유유서를 앞세우는 규범이 이래서 생겼다. ‘동점이면 연장자를 당선자로 한다’는 법규 조항은 선거법을 비롯해 각종 선거관련 법규에 으례이 규정된 조문이다. 총선으로 새로 소집되는 국회의 임시 사회는 최연장자가 맡아 의장단을 구성한다. 동점 연장자 우선은 일반 사회단체 등에서도 대체로 적용되어 통념화 됐다. 워싱턴테라스 시장의 두 후보 중 누가 연장자인 지는 몰라도 우리 같으면 주사위를 던지지 않고도 장유유서 개념의 법규에 의해 당선자가 절로 결정된다. ‘오륙도’(50~60대), ‘사오정’(40~50대)에 이어 ‘삼팔선’(30대 후반)이란 풍자어가 나돌고 있다. 사회의 조로 현상이 무척이나 안타깝다. 고령화사회에서 젊은 세대가 퇴출 대상으로 거론되는 것은 심각한 사회불안이다. 빨리 안정시킬 수 있는 정책대안이 나와야 한다. 이러다가는 장유유서의 전통문화, 이마저 아무 대책없이 무너질 수가 있다. /임양은 주필

중국의 권력부패

중국은 겉만 사회주의일 뿐 속은 자본주의화 한 지 오래다. 헌법도 공산당 규약도 변질됐다. 이러한 변화로 잘 사는 인민 계층이 생긴 것은 잘된 반면에 못된 부정부패가 심화하고 있다. 근래만 해도 허베이(河北)성장, 헤이릉장(黑龍江), 신장(新彊)성 등 지방 고위 관료들이 독직사건에 휘말려 출당조치 됐다. 우리 돈으로 1억원대의 뇌물을 받아도 사형시키는 등 엄벌주의로 나가는데도, 돈 맛을 안 권력부패는 갈 수록이 더 기승을 부린다. 권력부패는 또 사회부패를 낳아 각종 범죄가 판을 친다. 이 바람에 구치소가 범죄인들로 넘쳐난다. 광둥(廣東)성의 경우엔 140여 구치소 중 상당 수가 수용 능력이 넘쳐 인권을 말하기가 사치스럴 만큼 재소환경이 열악하다. 어느 구치소는 수용자들이 옆으로 누어자는 칼잠과 앉아서 잠을 자는 수가 3분의2고 나머지 3분의1은 서서 잠을 잘 지경이라고 전한다. 중국 대륙이 공산화한 것은 장치에시(蔣介石) 국민당 정부의 부패와 인민의 극심한 빈부차이 때문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 공산군이 대륙을 예상보다 쉽게 석권할 수 있었던 게 다 그같은 정치적·사회적 취약점으로 인해 스스로 붕괴된데 연유한다. 중국이 사회주의 겉옷을 벗어 던지면서 무서운 잠재력으로 경제대국을 향해 치닫고 있긴 하나,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빈부의 격차가 점점 더 크게 벌어지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런 시점에서 새차게 불고있는 마오쩌둥 회고 바람이 이념성이 아니고 청렴성인 것은 주목할 대목이다. 푸젠(福建)성에서 가진 그의 회고전엔 누더기수건 등 생전의 갖가지 생활유품과 근검절약한 생활비장부, 검소했던 일상생활 사진 등이 전시됐다고 한다. 관람객들은 특히 ‘측근이 수건을 새것으로 바꾸려고 하자 마오 주석이 조금 기우면 더 쓸 수 있다며 거절했다’는 안내문이 적힌 ‘누더기수건’ 앞에선 발길을 오래 멈춘 채 숙연해한다고 보도됐다. 중국의 미래는 부정부패와의 싸움에 달렸다는 생각을 갖는다. /임양은 주필

최.정 '폭탄주' 뒷풀이

신문에 났다. 술자리를 추리해 본다. “너무 소원했습니다” “뭘…아무튼 고맙소” 아니면 무슨 말들이 오갔을까. 방송이 끝나고 정연주 KBS 사장의 초청에 따라 술자리로 이동하는 길은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의 승용차에 두 사람이 동승했다고 한다. 거기서는 또 무슨 밀담이 있었을까. 단순히 술에 기갈이 들려 술먹으로 간 것은 아니고, 또 두 사람이 술잔을 나눌만큼 평소부터 교분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 말이다. 지난 13일밤 KBS-1TV 4당대표 순회 토론회는 한나라당 차례였다. 최 대표가 방송을 마치기가 바쁘게 그길로 가진 정연주 KBS 사장과의 이른바 뒤풀이 술자리 회동은 여러모로 부적절하다. 한나라당측은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지만 서로 오해한 부분을 푸는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했고, KBS측은 “의미있는 만남이었다”고 양측은 밝혔다. 도대체 ‘오해’는 무엇이고 ‘의미’는 뭣이란 말인가. 좌경방송이나 편향방송에 오해가 풀려 수신료 분리입법 추진을 그만 두는 의미가 있단 말인지 뭔지 도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방송은 물증이 있는 마당에 오해가 있을 수 없고 수신료 분리는 사리가 당연하여 그만 두어야할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오이밭에서는 신을 고쳐신지 말라’ (瓜田不納履·과전불납리)고 했고, ‘복숭아나 자두밭 배나무 밑에선 갓 끈을 고쳐매지 말라’(桃李梨下不整冠·도리이하부정관)고 했다. 공연한 오해를 받을 처신은 삼가라는 선인들의 잠언이다. 최 대표가 술자리 회동에 응한 것은 제1야당 대표로는 굉장히 경솔한 처신이다. 술자리는 여의도의 한 거창한 카페다. 한나라당측은 무려 20여명이 떼거리로 참석했고, KBS측도 주요 본부장 등 대여섯명이 참석한 모양이다. 좌중에 폭탄주 돌림까지 등장했다는 것으로 보아 매상이 팁까지 합쳐 천만원 가까이 나왔을 법 하다. 최 대표가 술값을 냈다면 기업에서 뜯은 돈으로 호화판 술판을 벌렸다는 비난을 듣고, 정 사장이 냈다면 시청료에 광고비까지 주체키 어려울만큼 번 돈으로 흥청망청 로비를 벌렸다는 비난을 들을 것이다./임양은 주필

사랑詩

“쓸쓸한 뫼앞에 후젓이 앉으면 / 마음은 갈앉은 앙금줄같이 / 무덤의 잔디에 얼굴을 부비면 / 넋이는 향맑은 구슬손 같이 / 산골로 가노라 산골로 가노라 / 무덤이 그리워 산골로 가노라” 김영랑 시인이 15세 때 첫번째 부인과 사별한 후 쓴 시 ‘쓸쓸한 뫼앞에’ 전문이다. 한하운 시인의 사랑시 ‘려가(驪歌)’도 절절하다. “님 오시면 피어라 진달래꽃 / 한식에 소복이 통곡할 때에 // (중략) // 봄마다 피는 / 옛날의 진달래꽃은 // 무너질 수 없는 / 님이 쳐다보는 얼굴(하략)” 나환자였던 한하운 시인이 사랑한 R은 시인의 인생만큼이나 기구했다. 자신의 병력을 알고 자살하려는 한하운을 붙잡아 준 R은 모든 것을 바쳐 시인의 삶을 이어가게 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이 땅의 역사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8·15 해방이후 한하운의 동생과 R은 형무소에 수감되고 한하운만 단신 월남, 생이별을 하였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 바람이 서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 한낮이 기울며는 / 밤이 오듯이 / 우리의 사랑도 / 저물었네 /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가곡으로도 잘 알려진 ‘이별의 노래’의 주인공은 박목월 시인 자신이었다. 박목월과 서울의 명문여대생 H의 사랑이야기는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답게 갖가지 주해를 낳으며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옛 시조에도 사랑은 애틋하다. “꿈에나 임을 보려 잠 이룰까 누웠더니 / 새벽 달 지새도록 자규성(子規聲)을 어이하리 / 두어라, 단장춘심(斷腸春心)은 너나 내나 다르랴” 인적 사항과 지은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청구영언’에 작품이 실려 전하는 호석균의 시조다. “임 그린 상사몽(相思夢)이 실솔이 넋이 되어 / 추야장 깊은 밤에 임의 방에 들었다가 / 날 잊고 깊이 든 잠을 깨워볼까 하노라” 조선 고종 때의 박효관이 지은 시조로 ‘실솔이’는 귀뚜라미다. 가을이 점점 깊어 가고 있다. 깊어진 가을 속에 빠져죽고 싶다는 시인의 말이 생각난다. 기러기도 울어옌다. /임병호 논설위원

나귀, 여우, 사자

사자가 나귀와 여우를 데리고 사냥을 했다. 많은 사냥을 한 후 사자가 수확을 나누라고 하였다. 나귀가 똑 같이 세 등분하여 나눴다. 사자가 노하여 나귀를 잡아 먹어 버린 후 여우더러 몫을 나누게 했다. 여우는 사냥한 것을 모두 모아 놓고 큰 덩어리를 사자의 몫으로 정하고 자기는 극히 작은 일부분을 차지했다. 사자가 좋아하며 여우를 칭찬하고 그런 지혜가 어디서 나왔느냐고 물었다. 여우는 “나귀의 신세가 가르쳐 준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얘기다. 가까운 사람의 불행이 나의 분별을 알게 한다는 것이지만 나귀가 눈치를 채고 알아서 사자 몫을 많게 만들었다면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강한 자가 많은 몫을 차지하려는 것은 동물의 세계 뿐만이 아니다. 사람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니 더 하다. 이 점에서 인간은 늑대나 사자 등에 가까운 동물이다. 결코 토끼나 양이나 소와 같은 유순한 동물은 아니다. 이솝 이야기 속에는 여우 못지 않게 사자가 자주 나타난다. 그 다음이 늑대, 원숭이, 양, 산양, 당나귀, 개의 순서다. 다른 동물들의 출신지는 온대지방인데 사자만은 열대 지방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지금의 아프리카 뿐만 아니라 동으로는 인도의 변경에서부터 페르시아를 거쳐 소아시아의 산중에 이른 흔적이 있다. ‘페르시아 전쟁지(戰爭誌)’에 “마케도니아에 라이온이 출몰하여 페르시아군의 낙타를 습격했다”고 한다. 이솝 이야기가 씌여진 것은 그리스의 고전기(古典記)를 지난 기원전 3세기 전후이다. 시민 사회가 한창 번영하던 시기에 비하여 사회상은 훨씬 거칠어져 있었다. 당시의 대표적 시인 메난드로스는 ‘무치(無恥)의 여신이 세상을 지배하고 폭력이 지성을 능욕한다’고 한탄했다. 그는 양민들이 모두 힘을 합쳐 폭력과 불법을 추방해야 한다고 선언했으나 그의 말은 세상 사람을 움직이지 못했다. 광범위한 세계에서 나귀를 잡아 먹고 여우를 자기편으로 삼는 사자와 같은 부류들이 많은 탓이다. 오늘날 인간사회는 더욱 심하다./임병호 논설위원

리더십 두 종류

“내가 드릴 것은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밖에 없습니다.” 1940년 영국 총리가 된 직후의 의회 연설에서처럼 윈스턴 처칠(1871~1947)은 청중의 머리보다 가슴을 향해 직설적으로 호소했다. 처칠은 손수 연설문을 작성했는데 대면 접촉이 아닌 라디오 방송·의회 등을 통해 설득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전란의 폐허가 된 거리에서 눈물을 떨구거나 다우닝가(街) 10번지부터 의회까지 대중 앞을 자연스럽게 활보하는 친밀감이 밴 그의 행동은 대중과 소통했다. “히틀러가 지옥을 범한다면 악마한테라도 아양을 떨겠다”는, 미국의 참전을 이끌어낸 동맹전략과 승부욕도 제2차대전의 승인(勝因)이 됐다. 처칠은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기도 전에 이를 확정된 사실인 양 ‘선의의 거짓말’을 남발해 국민들을 다독였다. 처칠의 위대함은 자신에게 거역할 줄 아는 부하를 기용해 그들의 조언을 따른 점이다. 그는 신중하고 열정적인 앨런브룩 참모총장을 중용, 생산적 긴장관계를 통해 자신의 단점을 메웠다. 처칠은 숙적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1889~1945)를 ‘피와 약탈에 굶주린 탐욕스런 괴수’로, 히틀러는 처칠을 ‘유대인 꼭두각시’로 방송과 공석에서 맹비난했다. 히틀러는 알콜중독자이자 만취 상태에서 총기 오발 사건을 일으켰던 측근을 경호대장으로 기용할 만큼 처신에 문제가 있더라도 자신의 충복에겐 관대했다. 그는 선전장관 괴벨스, 외무장관 리벤트로프, 친위대장 히믈러 등으로부터 개별 보고를 받는 일을 즐겼고 적대적 파벌을 이룬 부하들 간의 경쟁·적개심을 부추긴 뒤 중재자 역할을 함으로써 권위를 다졌다. 히틀러는 장악하려 들었고 처칠은 배분하려 했다. 히틀러는 권력욕에서 비롯된 ‘권위주의적 리더십’이었고 처칠은 성취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영감을 주는 리더십’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해군 작전 실패의 책임자이자 1930년대 대부분을 야인으로 지낸 처칠과 1923년 뮌헨 ‘맥주집 반란사건’ 주모자로 1년여간 독방에 수감됐던 히틀러가 보여준 두 종류의 리더십은 지금도 지도자와 대중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임병호 논설위원

포장마차

신작로(新作路)라 하였던 그 무렵의 국도 등 대로는 모두 사리(砂利)도로였다. 아스팔트가 아닌 자갈 모래를 깔아 도로를 유지했고, 그러므로 해마다 인근 주민들이 부역 나와 자갈 모래를 깔곤했다. 이 신작로 위를 달렸던 게 포장마차였다. 아마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달렸던 포장마차를 기억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당시엔 택시는 고사하고 버스도 아주 드문 때여서 말 방울을 달랑거리며 말이 끄는 이런 포장마차를 탈 수 있는 것도 여간한 호사가 아니였다. 마부가 말 채를 휘날리며 끄는 포장마차엔 대여섯명의 승객이 탈 수 있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포장마차라고 하면 미국의 서부영화에 나오는 애리조나 마차를 연상하겠지만 우리나라에도 포장마차가 큰 교통수단이던 시절이 있었다. 포장도 없는 가게 술집이 ‘포장마차집’이라는 간판을 단 것을 더러 보는 건 포장마차가 지닌 어떤 낭만성 때문일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말 발꿉 소리에 맞추어 몸이 흔들기며 달리는 승차감은 그런대로 멋이 있었다. ‘포장마차’가 된서리를 맞고있다. 밤이면 말도 바퀴도 없이 포장만 친 ‘포장마차’가 술장사, 음식장사를 일삼고 있어 단속 대상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인도, 심지어는 차도까지 침범해 가며 의자를 수십개씩 늘어놓고 불야성을 이루는 성업으로 호황을 누린다. 이를 단속하는 게 생존권을 위협한다지만 단속해선 안될 진짜 생계형 노점상은 따로 있다. 가겟세도 안내고 세금도 안내면서 가게 이상으로 재미보는 기업형 포장마차가, 글쎄 단속 대상에서 보호받아야 한다고는 보기 어렵다. 기업형 포장마차의 단속 시비는 서울의 이야기이지만 서울에 국한하는 것만은 아니다. 수원 등 도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단속도 단속이지만 포장마차 하는 이들의 자제가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 옛날 진짜 포장마차가 알면 라이센스를 요구할 일이다. /임양은 주필

시인

시인이 왜 그리도 많은지, 신문에 나오는 ‘시인’ 직함이 참으로 많다. 시인이 많은 게 나쁠 건 없다. 다만 시인은 많아도 좋은 시는 드문 게 시문학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 무척 안타깝다. 손가락으로 쓰는 글이 있고, 머리로 쓰는 글이 있고, 가슴으로 쓰는 글이 있다. 시는 가슴보다 더한 온 몸으로 써야 한다. 아니 온 몸으로 쓰여져야 한다고 믿는다. 몸에 농축된 시상이 더 이상 억제할 수 없어 터질듯 분출되어 정리되는 글이 시가 아닌가 생각한다. 겨우 손가락 재주로 가슴도 아닌 잔머리를 굴려 재주만을 피우는 시들이 많다. 굳이 시인이 아니어도 그같은 낙서 수준의 시라면 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든 지 있다. ‘얇은 紗 하이얀 꼬깔은/고이 접어서 나빌네라/파르란이 깎은 머리/薄紗고깔에 감추오고/두 볼에 흐르는 빛이/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조지훈(趙芝薰) 선생의 시 ‘승무’(僧舞)의 몇구절이다. 박목월(朴木月) 박두진(朴斗鎭)선생과 함께 크게 활약한 청록파 시인이다. ‘승무’는 한국 고전문학의 백미다. 역시 지금 읽어도 고등학생 때와 마찬가지로 진한 동경과 연민의 정이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와 닿는다. 조지훈 선생의 부인 김난희 여사(81)가 선생의 유고 유품 260여점을 생전에 후학을 가르쳤던 고려대에 기증, 고대 역사관에 전시될 것이라고 한다. 1933년에 발표된 ‘승무’의 육필원고가 실린 보도사진이 특히 눈길을 끈다. 시 작품은 시 정신의 난산이다. 순산된 시엔 그러므로 시인의 혼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고전이든 현대 시든, 장르가 어떻든 간에 난산의 생산성 가치엔 변함이 있을 수 없다. 시는 기교보단 진실이 담겨야 한다. 요즘의 시인들은 너무 기교에 치우는 것 같다. 시 정신은 결핍하면서 발표욕이 앞서기 때문이다. 시는 시인의 얼굴이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나는 시인은 아니다. 그래서 시인은 많아도 시인이 무척 부럽다. /임양은 주필

정치인의 국외 피신처 '연구원'

미국의 대학은 국내 정치인의 피신처인가, 걸핏하면 미국의 무슨 대학에 연구하러 간다는 정치인들이 있다.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도 한동안 그랬고 정몽준 의원도 그랬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역시 그런 명분으로 미국에 가 있다가 귀국해 체류중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셋째 아들로 미국에 가 있는 김홍걸씨가 어느 대학의 연구원이 맞다 아니다하여 논쟁이 된 적이 있었다. 그곳 대학에서는 재직한 일이 없다고 했다. 설령 연구원이라 할 지라도 그 봉급으로 어떻게 호화 저택을 살 수 있겠느냐며 자금 출처의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연구원이라는 것이 사실은 객원연구원으로 돈을 버는 게 아니다. 오히려 미국 대학에 이름을 걸어놓는 이름 값으로 돈을 갖다가 바친다. 물론 연구 업적을 쌓을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대학측은 나와도 무방, 안나와도 무방이다. 미국에 그냥 가 있는 게 백두처럼 보여 안좋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 또한 거품이다. 정규 연구원도 아닌 ‘연구원’이라는 허울 좋은 위장 역시 이젠 벗어 던질 때가 됐다. 시도 때도 없이 돈만 있으면 아무나 들락거릴 수 있는 이런 연구원 자릴 아마 이력서에 자랑 삼아 내놓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미국 ○○○대학 연구원’하고 말이다. 차라리 그냥 가 있는 게 솔직해 보인다. 그나저나 그 막대한 미국 체류비는 무슨 돈으로 어떻게 조달하는 것인 지 이도 궁금하다. 열린우리당의 저격으로 낙마한 이광재 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이 미국 스탠퍼드대학 객원연구원으로 가 있기 위해 곧 떠날 것이라고 한다. 내년 총선에 출마할 동안 국내에 있으면 노무현 대통령에게 부담을 줄 우려가 있어 출국한다는 것이다. 그래봐야 미국에 머무르는 게 고작 3~4개월밖에 안된다. 이 짧은 기간에 무슨 연구를 어떻게 한다는 것인 지 참으로 알 수 없다. 미국의 대학은 아무래도 국내 정치인의 국외 단골 피신처인가 보다. 이러다간 진짜 연구원마저 값이 동반하락 하겠다. /임양은 주필

여우같은 사람들

‘이솝’은 기원전 6세기경의 그리스 사람으로 원래는 노예였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도 재밌게 잘하여 자유의 몸이 됐다고 전한다. ‘이솝 이야기’중에서 많이 알려진 것으로 ‘신포도’가 있다. 배고픈 여우가 선반 위에 있는 포도를 먹으려고 하였는데 키가 닿지 않자 “저건 덜 익은 신포도다”라고 내뱉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는 얘기다. 그 뒤로 맘속으론 탐이 나면서도 제 힘으로 안될 때 ‘저까짓 것!’하는 태도로 악평하는 사람을 여우에 비유하게 되었다. 여우는 지구상에서 비교적 온대지방에 널리 퍼져 서식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곳에서나 이 짐승은 좋은 평을 받지 못하고 교활하고 약삭빠른 대명사처럼 돼있다. 이것은 목축이나 농업을 주로 하는 종족에게 아주 오래 전부터 여러가지 피해를 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프랑스어로 여우를 르나르(renard)라고 한다. 르나르란 이름은 독일말로는 라인할트인데 이는 어엿한 기사의 이름이다. 그리스말은 아로페크스, 라틴말로는 우루페스, 이탈리아말로 버르페이다. 프랑스만이 좀 다른 것은 여우 이름이 설화에 기인한 것이다. 르나르는 중세의 유명했던 못된 여우의 이름이다. 그리스에서는 여우가 활약하는 이야기가 많은데 역사상에서도 용사 아리스토메네스를 구한 여우의 이야기가 있다. 이솝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여우는 특히 유명하다. 임금이 되고 싶어 하는 원숭이를 놀려 먹고 골탕 먹이는 여우의 이야기가 있고, 함정에서 제 꼬리를 잘린 것이 분해서 다른 여우들의 꼬리를 모조리 짧게 잘라 버리려고 한 여우의 이야기도 있다. 여우라는 동물의 체질을 잘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저건 덜 익은 신포도다”라고 내뱉은 여우의 말은 ‘신포도’에 관한 서양 고사성인데 무릇 인간의 마음이 그와 같을 것이다. 특히 정치판에선 ‘저건 신포도다’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러나 사실은 신포도가 아니다. 잘 익은 포도를 그렇게 비하시키는 여우와 같은 언행이 교활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측은하고 불쌍하다. /임병호 논설위원

잊혀진 사건

대검 중수부가 대선자금에 기세를 올리는 덕분(?)에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월드컵 휘장사업 비리’ ‘굿모닝시티 비리’ ‘나라종금 퇴출저지 로비’ ‘양길승씨 향응 및 몰카 파문’이 수면 속으로 가라 앉았다. 검찰이 “국민과 언론의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그렇지, 대부분의 수사는 원칙에 따라 잘 진행됐다”고 자평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호랑이’를 그리겠다던 수사들이 ‘고양이’만 그린 채 종결을 앞두고 있는 사례가 숱해서 하는 얘기다. ‘월드컵 휘장사업 비리’는 김재기 한국관광협회장, 이인제 의원 전직 보좌관, 최창신 전 월드컵조직위원회 사무총장만 구속됐지, 수사과정에서 뇌물 수수 의혹이 제기된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 여야의원 3∼4명은 소환조차 되지 않았다. ‘굿모닝시티 비리 사건’도 지난 7월 정대철 전 민주당 대표에 대해 4억원 수수 혐의로 사전 구속영장 청구라는 ‘한건’을 올린 뒤로는 진척이 없다. 탁병오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 윤창렬 전 굿모닝시티 회장, 윤석헌 우슈협회장만 수뢰혐의로 구속했을 뿐 3억원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는 전직 경찰관 K모씨가 도피 중이라 ‘벽’에 부딪혔다. ‘나라종금 퇴출저지 로비’는 안희정 전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 김홍일 민주당 의원을 불구속하고 박주선 민주당 의원에게 사전구속영장을 신청한 정도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이 ‘동업자’라고 표현한 최측근 안희정씨의 연루의혹이 제기되면서 지난 4월 대검 중수부가 재수사에 착수한 ‘나라종금 퇴출저지 로비 사건’은 지난 6월 중간 수사결과 발표 이후 사실상 수사가 끝난 상태다. 양길승 전 청와대 부속실장 향응 파문으로 시작된 ‘양길승씨 향응 및 몰카 파문’ 역시 김도훈 전 청주지검 검사를 구속했지만 의혹의 본체라고 할 수 있는 “양길승씨가 금품 로비를 받았느냐”는 부분은 여태 감감 무소식이다. 세상을 시끌시끌하게 만들었던 이런 사건들이 관련 정치인만 무더기로 거론했을 뿐 정작 실체가 밝혀지지 않아 국민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 또 우리 국민은 잊기를 잘한다. 그렇다고 유야무야할 사건이 아니다. 대선자금과 함께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임병호 논설위원

악덕 음식점

상식을 벗어난 저질 식당문화가 발생하여 공분을 금할 수 없다. 아무리 황금만능시대라고 하지만 식당 손님을 이렇게 대할 수는 없다. 수년 전에도 유사한 사건이 일어나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데 주한미군이 먹다 남긴 음식 찌꺼기로 부대찌개를 만들어 판매한 식당업주가 또 적발된 것은 실로 역겹다. 어쩌다가 썩어 문드러진 생선으로 만든 어묵, 이빨자국이 남은 햄·소시지로 조리한 부대찌개, 공업용 황산 알루미늄으로 세척한 도라지 등 부패음식물이 늘비한 사회가 됐는지 통탄스럽다. 이러한 부정 식품이 제조, 유통되는 가운데 용산 미8군 근처 한 식당업자가 지난 2001년부터 미군부대 사병 식당 조리사들로부터 미군이 먹다 버린 스테이크 등 음식찌꺼기를 헐값에 구입, 부대찌개로 만들어 3억원어치를 팔았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이런 곳이 어디 한 두곳 뿐이겠는가. 특히 경찰이 압수한 스테이크와 소고기, 햄버거 고기 등 증거물 일부에서는 대장균 양성반응이 나타나 충격을 줬다. 미군식당에서 버려진 음식찌꺼기를 수거해 비닐봉지에 담은 뒤 개밥 등 가축사료로 사용한다고 속여 반출했으며, 먹다 남은 부분은 표시가 나지 않도록 한 뒤 부대찌개 원료로 썼다. ‘공업용 색소 고춧가루’ ‘공업용 감자떡’ ‘숯가루 냉면’ 등이 국민을 놀라게 한 게 엊그제 일이다. 전국적으로 적발되지 않은 업자들까지 추산하면 식품위생법 위반자는 그야말로 부지기수일 것이다. 문제는 부도덕한 업자들을 긴장케 하지 않는 현행 식품위생법 처벌 규정이다. ‘5년 이하 징역·3천만원 이하 벌금’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피의자들은 대부분 벌금만 내고 풀려 나오는 게 예사다. 이래서 법을 무서워 하지 않는다. 부정식품 제조·유통·판매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간접적인 집단살인 행위에 해당된다. 대상이 수백만, 수천명이 넘는다. 고도로 계산된 살인행위다. 중벌로 다스려야 함은 당연하다. 처벌 기준 강화와 단속만이 부정식품을 다소라도 줄이는 방법이다. 음식물 제조 및 판매자를 불신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임병호 논설위원

민초 義人들

정치판은 썩어 문드러 지고, 사회는 모두 남을 등치기 일쑤인 것처럼 살벌해 보여도 의인(義人)은 있다. 지난달 29일 별세한 수원의 홍문사 대표 이홍종씨(69)는 청소년사업을 위한 백암복지재단을 남겼다. 평생동안 문구점을 경영하면서 모은 재산 100억원을 사회에 되돌려 내놓은 것이다. 서울의 의류수출업체 대표인 이상철씨(57)는 50억원 상당의 땅을 지상4층 지하1층 규모의 공공도서관 부지로 서대문구청에 기증했다. 비록 미국유학 중 교통사고로 비명에 간 딸의 이름을 도서관 명칭에 붙여달라는 애틋한 부정(父情)이 동기이긴 하나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부산의 향토기업인 송금조씨(79·주·태양회장)는 부산대학 발전기금으로 305억원을 쾌척한데 이어 경암교육문화재단을 설립키 위해 1천억원의 사재를 출연했다. 송회장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근검절약과 성실근면으로 자수성가의 길을 걸어온 분이다. 그동안 연 1만5천여명의 노인들에게 무료급식을 해온 이가 있다. 사단법인 한길봉사회지부는 수원 만석공원 앞에서 경로급식을 시작한지 벌써 4년째 이토록 숨은 봉사를 해왔다. 남의 도움을 크게 받은 것도 아니고 무료급식을 핑계삼아 어떤 꿍꿍이 잇속을 챙기는 것도 아니다. 운영을 도맡은 지부장 되는 분이 무슨 선거에 나오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분담된 자원봉사자들의 고마운 도움을 받고 있을 뿐이다. “물론 어렵지만 노인봉사 자체가 그저 즐거워 선택한 길이므로 후회를 모른다”고 한다. 이밖에도 식당을 해가며 모은 재산, 바느질 품을 팔아 모은 돈 등을 사회에 내놔 각박한 세태속에 심금을 울리는 미담들이 종종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영악스럽지 못한 바보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바보 의인’들이 있으므로 하여 세상은 그래도 삭막하지만은 않다. 그러고 보니 의인들은 모두가 민초들이다. 남의 돈 먹기를 억대는 다반사고 수십억, 수백억원씩 먹고도 큰소리 치는 썩어 문드러져 몰염치한 정치꾼들이 더 더욱 괘씸하다./임양은 주필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