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전차는 철로를 베개 삼아 잠자고 있던 많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그들의 목은 순간에 잘려졌다. 안개가 걷히고 해가 떠오르자 참혹한 광경이 드러났다. 광포해진 노동자들은 운이 나빴던 차장을 공격했으며, 전차를 전복시킨 후 불을 질렀다. 1899년 서울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개설된 국내 최초의 전차가 빚어낸 끔찍한 사고였다. 어이없게도 당시 전차 선로는 목침대용으로 인기가 높았다. 한여름밤에 모기·파리떼가 들끓는 비좁은 방보다는 선로를 베개 삼아 야외에서 잠자기를 즐겼기 때문이었다. 전차가 개통된 지 10일째였던 1899년 5월26일에는 ‘전차소각사건’이 일어났다. 종로2가 앞을 달리던 전차가 다섯살짜리 어린이를 치어 죽인 것이다. 이 광경을 목격한 아이 아버지가 도끼를 들고 전차에 달려 들었고 전차는 멈추지 않고 지나가려 했다. 분노한 군중들은 차장과 운전사들에게 돌을 던졌고 차량에 불을 질렀다. 식민지 수탈을 위한 일제의 침략 도구이면서 근대문명의 첨병인 철도와 우리 민족과의 만남은 이처럼 난폭했다. 일본은 1899년에 경인철도에 이어 경부·경의·경원선도 개통했다. 철도는 일본 군대의 이동을 신속하고 편리하게 하고 조선에서 수탈한 자원을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기차에 대한 거부감은 까닭없이 돌멩이를 날리고 ‘손감자’를 먹였다. 조선 땅에 처음으로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 1899년 9월 18일, 노량진과 제물포 사이 경인선이 개통됐을 때 당시 독립신문 기자가 시승기를 썼다.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굴뚝 연기는 반공에 솟아오르더라. 수레 속에 앉아 영창으로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달리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쳐 따르지 못하더라” 걷거나 말 타고 다니는 게 전부였던 시절의 경탄은 오래지 않아 신음으로 바뀌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철도는 일제가 조선의 골수를 빼가는 도구가 됐기 때문이었다. 비록 일제에 의해 개통은 됐지만, 9월 18일 오늘이 한국의 ‘철도의 날’ 이다. 1964년 11월 26일 제정됐다. /임병호 논설위원

이민 열풍

이민 상품이 불티 나듯이 팔린다고 한다. 이민 박람회는 장사진을 이룬다고 한다. 국내를 떠나 살려는 사람들이 이처럼 많다. 가히 이민 열풍이다. 고향 떠난 타향 살이만도 서럽다는 데 하물며 모국을 떠난 타국 살이가 얼마나 서러울까. 하지만 이민을 원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 ‘너무 각박한 삶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기 싫다’고 한다. ‘직장에서 장년층 선배들을 보면 빨리 외국에 나가 살고싶다’고도 한다. ‘자녀들을 유학 보내는 비용보다 이민이 더 싸게 먹힌다’고도 말한다. 이민을 가고싶어 하는 사람들의 말은 한마디로 국내에선 희망이 없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이민은 장려할만 하다. 좁은 국토에서 보단 세계로 나가 사는 것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좋은 것은 사실이다. 중국은 1억이 넘는 이민 인구를 세계 도처에 갖고 있다. 우리 나라는 522만여명의 해외 동포가 140여국에서 살고 있다. (통일원 발행 ‘세계의 한민족총서’ 1996년판) 지금은 더 많은 해외동포가 살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국내에서는 희망이 없으므로 이민 나가 살고싶어 하는 데 있다. 우리는 이처럼 절망의 땅에서 사는가 하는 마음도 든다. 1970년대 까지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또 날 게 두려워 미국같은 곳으로 이민가는 풍조가 많았다. 그 때는 큰 부자들이나 갈수가 있었다. 지금은 서울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값이면 어렵지 않게 이민을 갈 수가 있다. 이민 가는 게 어렵지 않은 건 좋지만 모국이 이처럼 절망의 땅으로 비치는 게 원통하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눈물겹도록 열심히 살고 있다. 그런데도 왜 제나라를 버리고 낯설고 물설은 타국 땅으로 그토록 나가 살고싶어 하는 지, 위정자들은 깊이 반성해야 한다. 백성들이 자기 나라에 정 붙이고 살 수 없게 만든 것은 위정자들이 지 백성들의 잘못은 아니다./임양은 주필

미국의 전투병 파병 요청

전례없는 웬 환대인가 싶었다. 지난 3일 워싱턴을 방문한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을 부시가 자신의 백악관 집무실에서 맞아 30여분간 얘기를 나눈 것은 지극히 이례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연유가 이내 나타났다. 이라크에 대한 전투병 파병 요청이 환대의 배경이었던 것이다. 요즘은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가 방미 길에서 환대를 받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최대표의 방미는 의문이었다. 정기국회가 개회 중이고 태풍 ‘매미’의 피해를 비롯한 갖가지 현안이 산적해 있는 마당에 갑작스런 방미는 야당 대표로서 시의가 심히 적절치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최대표가 백악관 콘돌리자 라이스 안보보좌관, 국무부 리처드 아미타즈 부장관, 국방부 폴 울프위츠 부장관 등 부시 행정부 요인들이 줄줄이 면담을 희망하는 환대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 역시 두말 할 것 없이 전투병 파병을 위한 회유일 것이다. 전투병 파병 요청도 그렇다. 파병설은 아직껏 공식 채널로 알려졌다기 보단 비공식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파병 규모도 수백명에서 1개사단 등 중구난방이다. 정부는 미국의 파병 요청을 공식으로 받았는지, 받았으면 규모는 어느 정도며, 현지 조건은 뭣인지를 구체적으로 국민에게 당장 밝힐 의무가 있다. 전투병 파병에 대한 국론을 모아도 알아야 할 것을 제대로 알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무역기구(WTO) 5차 각료회의에서도 프랑스와 독일을 ‘왕따’시킨 가운데 유럽연합(EU)과 세를 모아 한국 일본 등 농산물 수입국에 대한 관세 상한선 등 농산물 개방에 강력한 압력 작용을 했다. 가히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 미국 주도의 세계화 힘을 여전히 과시하고 있는 현실이다. 참으로 기분 나쁜 현상이다. 우리가 전투병 파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실로 고민이다. 북 핵 관련의 후속 6자회담도 있다. 무엇이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국익인가를 깊이 헤아려야 할 것 같다. 분명한 것은 감정적 대응은 금물이라는 사실이다. ‘알고도 속아 넘어가 준다’는 속담이 있다. /임양은 주필

호주제 폐지 입법예고

이혼·재혼 가정의 자녀들이 가정법원 결정으로 새아버지 성(姓)으로 바꿀 수 있고, 남자 형제없이 여성 자매만 있는 집에 국한하여 가능했던 입부혼(入夫婚·남편이 아내의 호적에 들어가 자녀 성을 아내 성으로 하는 것)이 앞으로는 혼인신고서란에 부부가 합의만 하면 무조건 가능하게 된다. 법무부는 며칠전 이같은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민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이에 따라 가족별 호적이 없어지는 대신 개인별 신분등록제가 시행되는 것을 두고 가족개념의 파괴다 아니다 하는 논란이 일고 있다. 또 새아버지의 성으로 바뀌어도 새아버지의 재산 상속과 관련된 권리는 전혀 없다. 오히려 성을 바꿔도 친아버지의 재산은 계속 상속권을 갖는다. 어머니가 개가를 가령 두·세번하면 자녀의 성이 두·세번이나 바뀔 수 있는 반면에 자녀가 성장하여 친아버지의 성을 되찾으려면 가정법원의 결정으로 본 성의 회복이 가능하다. 민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자녀를 혼자의 힘으로 키운 어머니되는 여성이 쥐 뿔도 한 일 없으면서 다만 아버지라는 것만으로 친권 행사를 하려하는 남성의 횡포는 능히 막을 수가 있다. 그러나 예상되는 혼란도 많다. 가령 이름만 바꿔도 동일인 증명 등 입증자료가 번잡한 판에 성을 한번도 아니고 더 이상 바꾼다면 동일인 입증자료가 더욱 번다하여 사회생활에 혼란이 있을수 있다. 또 성씨를 이러저리 마구 바꿈으로써 족보의 개념도 달라질 우려가 많다. 하지만 분명한 한가지 사실은 있다. 호주제 폐지가 어떻든 간에 건강한 가정에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되도록이면 이런 가정이 많은 사회가 되면 좋겠다. 민법 개정안이 입법예고는 됐지만 국회 통과는 더 두고 보아야 한다. 정부는 이번 정기국회에서 통과되기를 기대하고는 있다. 그렇지만 미루적 거리다가 본회의에 상정않고 회기를 넘길 가능성도 없지않다. 제16대 국회의원 임기 만료로 민법개정안이 자동폐기 되지 않겠나하고 보는 일부의 관측도 있다. /임양은 주필

추석 귀성

올 추석 연휴는 유별나게 길다. 10일, 11일(추석), 12일의 법정공휴일에 이은 13일이 토요일이다. 연휴와 일요일 사이에 낀 징검다리 반공일(토요일)을 관공서가 아닌 일반 업체는 아예 휴일로 한 곳이 대부분이다. 출근을 해도 오전 한 나절의 일을 제대로 하기가 어렵다고 보고 휴일 선심을 쓴 것일 게다. 이렇다 보니 추석 연휴가 5일이나 되어 휴가기간과 거의 맞먹는 셈이 된다. 2천만명의 이동이라고 하던 게 어느 매스컴에서는 ‘3천만명의 이동’이라고 하는 것을 보았다. 좀 과장되긴 했지만 아무튼 굉장한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된다. 외국인들 눈에는 더러 이러한 명절 이동이 잘 이해되지 않은 것 같다. “뭐 하려 그토록 애를 써가며 시골을 가느냐?”는 것이다. 뿌리가 별로 없는 이민족들 눈엔 그렇게 보일 지 모르겠다. 그렇다. 명절의 대이동, 이는 뿌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여느 땐 객지에 나와 먹고 살기가 바쁘다 보니 내가 누군가를 잊다가도 때가 되면 이렇게 고향을 찾아 나서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공동체사회를 지탱케 해주는 구심점인 것이다. 1년에 설과 추석의 두 명절은 그래서 우리사회의 공동선을 형성해준다. 고향 찾아가는 마음은 누구나 다 똑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름답다.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이다. 특히 어린 자녀들에게는 더 할 수 없이 좋은 생활교육인 것이다. 꼭 먼 시골 고향을 찾는 것만이 명절 귀성은 아니다. 가까운 도시에서 조상의 차례(茶禮)를 지내려 후손들이 큰댁을 찾는 것도 뿌리를 찾아가는 귀성이다. 오랜만에 가족과 친인척들이 모여 덕담을 나누며 회포를 푸는 명절 귀성은 참으로 지혜로운 전래의 뿌리문화다. 올 여름엔 비가 워낙 잦아 농사가 잘 안됐다고는 하나 가을 들녘은 역시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교통체증으로 귀성길이 고생스럽긴 하지만 고생을 재미로 알면 그래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좋은 귀성길, 즐거운 추석 명절이 되기를 빈다./임양은 주필

조영남 쇼 '차기 대통령설'

구한말(조선조) 마지막 황태자(세자) 이은(李垠) 전하의 부인인 이방자(李方子) 태자비(세자빈)께서 살아 계셨을적 일이니까 오래되긴 했다. 그 무렵 서울 프레스센터에 있는 중앙 일간지 기자였던 지지대子는 낙선제로 이방자 여사를 찾아뵙게 됐다. 가수 조용필, 조영남씨 등과 함께 가야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두 가수는 그 때도 모두 쟁쟁한 가요계의 거물이었다. 이여사는 특히 조용필씨가 부른 ‘한 오백년’을 좋아한다고 했다. 말씀은 어진 미소를 지어 보이며 했지만 왕세자빈의 비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한국인임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하셨다. 자연히 조용필씨와 나누는 이야기가 많자, 동석했던 조영남씨가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게 심상치 않아 뒤따라 나갔다. 가까스로 설득하여 다시 합석은 했다. 가평서 가진 제14회 경기도지사기 생활체육대회 개회식 식후 공개행사에서 ‘손학규 차기 대통령설’을 폈다는 조영남씨 기사를 보면서 그간 잊었던 옛날 일이 생각나 앞서 몇줄 적었다. 조영남씨는 “(손학규지사는) 반드시 대통령이 돼야할 분”이라면서 ‘손학규 차기 대통령설’에 상당한 막간의 시간을 무대에서 할애했던 것 같다. 이젠 경기도에서 대통령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맞는 말이긴 하다. 또 두 사람의 전공은 달라도 서울대학교 선후배 사이다. 조영남씨가 손지사의 차기 대통령설을 폈다하여 허물이 될 것은 없다. 그러나 그는 초청가수로 그 무대에 섰다. 장소는 생활체육대회다. 노래를 부르다가 난데없는 대통령설이 왜 나왔는지 그것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무대에 선 가수는 노래만 부르면 되는데도 굳이 왜 그런 시나리오가 연출됐는가에 대해 객관적 설득력이 빈곤하다. 약속된 자리에 동석했다가도 이탈하는 엉뚱한 데가 없지 않은 조영남씨이긴 하다. 하지만 과공비례(過恭非禮)라 했다. 막상 본인의 당자가 있는데서 벌인 그같은 쇼가 과연 손학규 경기도지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만 하다. /임양은 주필

'물럿거라' 행차

전직 대통령들 나들이를 위해 시민의 교통 통제가 잦은 것으로 나타난 보도가 있었다. 경찰청이 한나라당 박종희 국회의원에게 낸 국감자료에서 이같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 5명 중 4명이 지난 한해동안에 425회, 올들어서는 지난 7월말까지 261회에 걸쳐 나들이 편의를 위한 교통통제 요청을 했다는 것이다. 이는 1일 평균 1.2회에 해당하는 것이다. 교통통제 요청은 김영삼, 노태우, 전두환, 최규하 전 대통령 순으로 많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7월말 현재까지는 외출을 잘 하지 않은 탓인 지 한번도 요청하지 않았다. 전직 대통령의 경호를 위한 교통통제는 교통 신호기를 조작하거나 차량소통을 일시 차단하는 것으로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 등에 근거한다. 그렇긴 하나 외식이나 이발하러 가는 사사로운 나들이에까지 시민들의 교통을 통제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볼만 하다. 바쁜 것도 아니고 위해로운 일도 없는데도 거침없이 씽씽 달리는 게 전직 대통령들은 기분이 좋을 지 몰라도 교통을 통제당하는 시민들 입장에서는 썩 기분좋은 일은 아니다. 필리핀에서는 전에 라모스 대통령이 탄 차량이 교통법규를 위반했다 하여 교통경찰관이 운전기사에게 딱지를 뗀 적이 있다. 국내 민도가 필리핀보다는 낮다고 여기지 않는데도 현직 대통령이 아닌 전직 대통령들까지 교통통제 요청을 남발하는 것은 매우 언짢다. 마치 ‘아무개 대감 행차시다. 썩 물럿거라!’고 호통치곤 한 조선조 시대의 물럿거라 행차를 연상케 한다. 신호등에 파란 불이 켜지기를 기다리면서 일반 시민의 승용차와 나란히 선 차창 너머로 서로 눈인사를 하거나 손인사를 나누는 그런 멋있는 전직 대통령들의 모습을 보고싶다. 전직 대통령은 많은데도 그런 멋있는 전직 대통령을 한 분도 갖지못한 게 웬지 씁쓸하다. /임양은 주필

고교평준화

고교평준화 30년사는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교평준화는 교육 문제이긴 하지만 당대의 사회상황을 그대로 반영한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1974년 서울과 부산을 시작으로 도입된 고교평준화는 지난해 과천·안양·군포·의왕·부천·고양 등 수도권 6개 도시가 논란 끝에 도입함에 따라 현재 23개 지역에서 실시중이다. 인천은 1975 년, 수원은 1979년, 성남은 1981년 도입했다. 일반계 고교수의 50.4%, 학생의 68%가 적용받고 있다. 작년 대선 때 불붙기 시작한 고교평준화 논쟁은 지난 7월22일 교육인적자원부가 고교평준화 실시지역 지정 권한을 시·도교육감에게 위임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하면서 증폭됐다. 1969년 실시된 중학교 무시험제는 중학교 입시 병폐를 철폐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결과적으로 명문고 진학 열풍을 초등학교에까지 끌어내리는 악순환을 낳았다. 이같은 고교입시제도의 과열을 막기 위한 대책으로 추진된 것이 고교평준화였다. 고교의 전형시기를 전·후기로 나누고 공·사립 인문계의 경우 학군을 선정, 선발고사를 실시한 뒤 추첨을 통해 학교를 배정하는 것이 평준화 정책의 뼈대이다. 평준화 옹호론자들은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평준화 정책’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비판론자들은 능력에 맞게 학교 선택권을 부여하는 것이 진정한 평등이라며 고교 입시제도의 전면적인 개편을 요구하고 있는 상태다. 문제는 교육관련 단체 뿐 아니라 학부모·동문회, 심지어 학생들마저 사분오열돼 있는 점이다. 중학교 교육의 정상화, 과열 과외의 완화, 재수생 해소 등 긍정적 평가와 고교생 학력저하 등 부정적인 평가를 동시에 갖고 있는 고교평준화 정책의 미래는 파란이 예고된다. 무엇보다 민선 교육감들이 여론의 눈치를 살피며 정책결정을 차일피일 미룰 우려가 크다. 당사자인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한다면 찬반 결정이 가장 정확할텐데 기성세대들이 너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 안타깝다. /임병호 논설위원

흠흠신서

‘흠흠신서(欽欽新書)’는 조선조 23대 순조 때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저술한 형법서로 ‘경세유표(經世遺表)’‘목민심서(牧民心書)’와 함께 다산의 대표적인 저서다. 다산은 당시 살인사건의 조사·심리·처형 과정이 매우 형식적이고 무의성의하게 진행됨을 보고 개탄하였다. 다산은 이를 바로 잡고 계몽할 필요성을 느껴 형법서 집필에 착수, 1819년에 완성한 후 1822년에 간행하였다. 흠흠신서는 경사요의(經史要義) 3권, 비상전초(批詳雋抄) 5권, 의율차례(擬律差例) 4권, 상형추의(詳刑追議) 15권, 전발무사(剪跋蕪詞) 3권 으로 구성돼 있다. ‘경사요의’에는 당시 범죄인에게 적용하던 ‘대명률’과 ‘경국대전’ 형벌규정의 기본원리와 지도이념이 되는 고전적 유교경전 가운데 중요 부분을 요약, 논술하였다. ‘비상전초’에는 살인사건의 문서를 작성하는 수령과 관찰사에게 모범을 제시하기 위하여 중국 청나라의 비슷한 사건에 대한 표본을 선별, 해설과 함께 비평을 하였다. ‘의율차례’에는 당시 살인사건의 유형과 적용법규 및 형량이 세분돼 있지 않아 죄의 경중이 무시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모범적인 판례를 체계적으로 분류, 제시하여 참고토록 했다. ‘상형추의’에는 정조가 심리하였던 살인사건 중 142건을 골라 살인의 원인·동기 등에 따라 22종으로 분류했다. 법의학·사실인정학(事實認定學)·법해석학을 포괄하는 종합재판학적 저술이다. ‘전발무사’에는 다산이 곡산부사·형조참의로 재직 중 다루었던 사건과 직접·간접으로 관여하였던 사건, 유배지에서 문견(聞見)한 16건에 대한 소개와 비평·해석 및 매장한 시체의 굴검법(掘檢法)을 다뤘다. 한국법제사상 최초의 율학연구서이며 동시에 살인사건심리 실무지침서다. ‘흠흠’이란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흠흠신서의 서문은 “오직 하늘만이 사람을 내고 또 죽이니 인명은 하늘에 매여 있다”고 시작해 “삼가고 또 삼가는 것이 형을 다스리는 근본이다”는 충고로 끝난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실에 지난 1일 ‘흠흠신서’의 서문이 적힌 대형 액자를 걸어 놓은 것은 의미가 깊다. 법을 다루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 임병호 논설위원

'특화 발전 특구'

재정경제부가 경기도를 특구신청 지역에서 배제한 것은 큰 실책이다. 재경부가 지난 7월8일 지자체가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특화사업을 종합해 이달초까지 보고하라는 공문을 전국 시·도에 보낼 때 경기도와 인천 등 수도권을 아예 제외한 일도 묵과할 수 없는 처사다. 재경부 홈페이지를 통해 이 같은 내용을 확인하지 못했다면 특화발전 특구 신청 사실조차 모를뻔 했다. 경기도가 자체적으로 각 시·군으로부터 특구지정 사업을 신청받아 8월30일 재경부에 신청한 내용은 모두 절실한 당면 사업들이다. 수원시의 수원 일반지방산업단지, 고양시의 국제화훼특구, 부천시의 해양레저관광특구, 용인시의 골프장특구, 남양주시의 실학문화특구, 이천시의 도자산업특구, 파주시의 남북경협단지특구, 양주군의 섬유산업특구, 연천군의 전곡리 선사유적특구 등 25개 시·군 45개 사업은 매우 중요한 사업들이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수도권에 포함돼 있다는 이유만으로 특구지정에서 제외된 것은 납득할 수 없다. 만일 과밀억제권역은 빼더라도 군사시설보호구역, 상수도보호구역 등의 규제를 받는 경기 동북부 지역은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현재 경기 북부지역의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은 682만원으로 전국 최저인 대구시(729만원)보다 적다. 더구나 20년 전에 비해 가평군의 인구는 3만7천명, 연천군은 1만5천명이 줄어드는 등 접경지역은 인구가 격감했다. 지금까지 대구와 광주 등 9개 시·도에서 298개 특구 사업이 재경부에 접수됐는데 경기도가 신청한 사업들이 전부 배제되었다니 실색을 금할 수 없다. 손학규 지사가 지난 1일 제2회 경기도 세계도자비엔날레 개막식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에게 지역 특화 발전 특구에 경기도를 포함시켜 줄것을 공식 건의한 바 있다. 재경부는 가뜩이나 규제지역이 많은 경기도를 특화발전 특구에서 배제해서는 안된다. /임병호 논설위원

애완견

“가슴이 저립니다. 우리 가족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온 샤넬이 드디어 하늘 나라로 떠났습니다…. 귀여운 샤넬이 편히 잠들기를 기원합니다….” ‘오호 통재라!’로 시작되는 옛글의 ‘조침문’을 연상케 하는 조사가 낭독되는 동안 검정 리본을 단 가족들은 정중히 묵도하는 가운데 이윽고 조사가 끝나면 쇼팽의 소나타 2번 B장조 3악장, 즉 장송곡이 울린다. 이어지는 추도식의 순서는 화장, 그리고 유골을 납골당에 안치하는 것으로 끝난다. 사람의 얘기가 아니다. 애완견 얘기로 샤넬은 개의 이름인 것이다. 이렇게 치르는 개의 장례비용은 약15만원이다. 개 전문 장례식장은 하루 평균 10여건으로 목하 성업 중이다. 돌아보면 명색없이 치르는 인간의 죽음이 적잖은 마당에 개의 이같은 호화 장례는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을 갖게한다. 그래도 동물 애호의 관점에서 보아 굳이 나쁘다고 탓할 것 까지는 없다. 이런 걸로 보아서도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 일깨워 지길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하다. 인간의 목숨이 개 같은 동물의 목숨보다 값어치가 없이 보여서는 우리 모두의 불행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이래 개는 인류와 가장 오랫동안 가깝게 지내온 동물이다. 이러한 가축 중엔 다른 동물도 많지만 인간과 깊은 감정을 교환하는 동물로는 개를 앞서는 더한 동물이 없다. 못된 인간보다 나은 충견의 숱한 얘기가 이래서 나온다. 개의 종류는 크게 사냥개와 일반견, 애완견으로 나뉜다. 모든 개가 다 그렇지만 애완견은 더욱 다양한 종(種)의 개량으로 별 희한한 개가 쏟아져 나온다. 안타까운 것은 길에 버려지는 애완견이 적잖다는 사실이다. 심지어는 산 채로 내다 버려지는 병든 애완견도 있다. 죽으면 그냥 땅에 묻어 애써 장례식까지 치르지는 않을 지라도 길에 버리는 일은 없으면 좋겠다. 병든 개를 산 채로 버리는 건 차마 해선 안되는 비정이다. 애완견을 기르는 주인들의 심성 역시 여러가지 모양인 것 같다. /임양은 주필

부시의 부메랑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항공모함 에이브라햄 링컨호 선상에서 대이라크전쟁의 승전 종식을 호기있게 선언한 것이 지난 5월1일이다. 그로부터 불과 3개월이 지난 부시는 지금 이라크 문제로 개전 전에 못지않은 속앓이를 하고 있다. 이라크 점령지의 평화유지 비용이 급증함에 따라 미 국민의 염원인 경제회생에 적잖은 타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기간 보다 더욱 심각해진 정치적 도전은 부시의 미래를 보장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다가 이라크 저항 세력의 테러공격으로 이틀이 멀다하고 이라크 주둔 미군들이 희생되고 있다. 지난 26일로 종전 후 미군 사망자 수는 139명에 달해 전쟁 중 사망한 138명을 넘어섰다. 이대로 가면 또 얼마나 많은 미군들이 더 희생될 지 모른다는 자국내 여론이 부시에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이라크 문제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궁에 처한 게 부시의 처지다. 그래서인지 지지율이 급강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한 여론조사 기관은 부시의 지지도가 57%로 지난 4월에 비해 13% 포인트가 떨어진 것으로 최근의 조사 결과를 밝혔다. 흥미로운 것은 파월 국무장관의 지지율이 무려 72%로 부시를 훨씬 더 능가하고 있는 사실이다. 파월은 부시 미국 행정부내의 유일한 비둘기파로 매파인 라이스 백악관 안보담당 특보, 럼즈펠드 국방장관 등 사이에서 상당히 고전을 면치 못하는 사람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보병부대 대대장으로 참전하기도 한 파월이 매파의 견제에도 부시보다 국민의 지지율이 높은 것은 주목할 대목이다. 어느 부호가 부시의 재선 저지를 위해 민주당에 대선 자금으로 무려 1천만달러를 기증한 적도 있고,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여론이 전보다 좋지않은 것에 비추어 부시가 어려움에 부딪힌 것은 꽤나 높은 장벽이다. 그토록 호언한 대량 학살 무기도 찾지 못한 가운데 후세인의 행방조차 묘연하다. 미국의 힘을 과시한 부시의 호전성에 한동안 보낸 미 국민의 박수갈채가 되레 염증의 부메랑이 된 것은 앞으로 더 두고 볼만한 관심거리다./임양은 주필

시위 소음

주택가 골목길에 들어선 자동차 행상의 스피커 소리가 귀에 거스를 때가 많다. 그것도 육성이 아닌 녹음 테이프를 돌려대는 덴 ‘다 먹고 살기위해 그러려니…’하고 생각하다가도 짜증이 나기도 한다. 기분이 괜찮으면 몰라도 어쩌다가 언짢은 일이 있을 땐 더욱 귀에 거스른다. 수년 전엔 부천에선가 자동차 행상의 짜증스런 스피커 소리를 듣다 못한 시민이 쫓아나가 행상인을 척살하고만 불행한 사건이 있었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시위는 자유다. 하지만 시위의 자유로 인해 다른 사람의 생활이 속박되지 않고자 하는 자유 또한 시민의 자유다. 그래서 시위의 자유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자유로움이 보장된다. 어떻게 된 판인지 시위가 다른 시민의 이런 자유 침해를 능사로 아는 세태가 됐다. 행상인의 하나 뿐인 스피커 소리도 견디기가 힘든 판에 시위대가 온통 나발을 불어대는 시위의 소음은 가히 공해다. 그것이 시위 당사자들에겐 아무리 절실하다 하여도 당사자가 아닌 일반인들까지 참고 들어야 할 의무는 없다. 경기도교육청 정문 앞, 과천 정부종합청사 앞 잔디마당은 집회시위로 인근이 몸살을 앓아온 시위의 해방구다. 이를 보다못한 일반인이 ‘집시법’상의 집회신고를 미리 함으로써 소음시위를 예방하는 기발한 착상이 있었다. 경기도교육청내 도립 중앙도서관 이용자 대표 10여명이 오는 9월 말까지 매일 도교육청 정문 앞에서 집회를 갖겠다는 신고를 경찰에 제출함으로써 전교조경기지부의 ‘연가투쟁 교사 징계 백지화 요구 집회’의 도교육청 정문 앞 집회시위를 무산시켰다. 또 과천지역 사회단체는 오는 10월까지 종합청사 앞 잔디광장에서의 집회신고를 경찰에 내어 다른 외부단체의 시위를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이로써 도교육청 정문 앞이나 과천 정부종합청사 앞 집회시위가 한동안은 잠잠하게 됐으나 그 다음이 또 걱정이다. 집회시위에도 품격이 있다. 품격없는 집회시위는 그들 스스로의 품격마저 행상 소음보다도 못하게 떨어 뜨린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임양은 주필

암각화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면 대곡리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盤龜臺 岩刻畵·국보 285호)’는 신석기 시대말부터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암각화다. 기원전 3000~300년에 걸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1972년 3월 대곡리의 강안 암벽상에서 발견돼 암각화 연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준 유적이다. 너비 6.5m, 높이 3m 가량의 주암면(主岩面)과 20여m 범위의 암반 곳곳에 수렵·어로의 광경과 사냥의 대상이 되었던 사슴·고래·거북·물고기·호랑이·멧돼지·곰·토끼·여우 등 296점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형식 및 내용과 대비되는 것으로는 스칸디나비아·시베리아 등지에서도 발견됐다. 반구대 암각화는 세 가지 형식으로 구분된다. 대상 동물들의 모습을 모두 파식기로써 표현한 가장 오래된 형식, 윤곽선을 가지고 생동감 있는 동물을 표현한 형식, 굵은 선 하나로써 대상동물을 표현한 아주 상징적인 형식이다. 반구대에서 1.5km 거리에 있는 천전리에도 또 다른 선사시대의 암각화가 있다. 그런데 울산시가 반구대가 있는 주변지역을 ‘선사유적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암각화 턱 밑에 까지 굴착기를 들이대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선사유적공원’을 조성한다는 데 문화예술계가 반대하는 이유는 1965년 사연댐 건설 이후 그렇지않아도 1년에 8개월정도 물속에 잠기는 바람에 원형이 훼손되는 터에 위락시설과 대형 주차장이 들어서면 주변 환경과 생태계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울산시측은 진입도로는 문화재보호법상 보호구역인 반경 0.5km 밖에 있기 때문에 환경오염 염려는 없다고 하지만 현장을 가본 적이 있는 지지대子의 생각도 문화예술계의 주장과 같다. 우선 주변여건이 파괴된 이후의 암각화는 ‘신성한 유적지’가 아니라 단순한 전시물로 전락하게 된다. 반구대 암각화는 많은 외국인들도 전세계 암각화 중에서 가장 예술성이 뛰어나다고 극찬하고 있다. 반구대·천전리 두 암각화가 있는 계곡과 하천·산세 등 자연환경은 사적지로 지정되고, 특히 ‘환경보호특구’로 보호받아야 한다. /임병호 논설위원

잠 이야기

독일군이 2차대전에서 패배한 원인 중 하나는 ‘잠’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펼쳐지던 날, 이 긴급한 비상사태에도 독일군의 대응은 마낭 늦어지고 있었다. 히틀러가 전날 수면제를 복용하고 잠이 들어 부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서부 전선의 롬멜 장군마저 부인의 생일파티로 전선을 이탈해 있는 바람에 히틀러의 세계 지배 야욕은 허무하게 사그러 들었다. ‘삼국지’의 호쾌하고 우직한 장비는 특이한 잠버릇의 소유자였다. 장팔사모(長八蛇矛)를 호기롭게 다루며 중원을 달리던 장비는 독특하게도 두 눈을 부릅뜨고 잠을 잤다고 한다. 원래가 험상궂은 외모인데다 두 눈마저 광채가 형형해 다들 잠을 자는 장비 보기를 두려워해 아무도 그를 건드릴 수 없었다. 그러나 장비에게 호되게 체벌을 받은 부하 범강과 장달은 잠자는 장비의 얼굴에 수건을 덮어 그 눈을 가리고는 그를 암살했다. 간디는 정확한 수면시간을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30분 후에 일어나겠다”고 했으면 단 1분의 오차도 없이 그 시간에 맞춰 일어났다. 또한 간디는 차를 타면 1분도 못되어 잠이 드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어느날 타고 가던 자동차가 전복되어 길 밖으로 튕겨 나간 때에도 친구들이 그를 구하러 달려가 보니 그는 잠들어 있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하루 중 적어도 열 시간은 잠자는 데 소비했다. 자칫 게으르고 생산성이 떨어져 보이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론인 상대성 이론을 침대 위에서 생각해냈다. 밤중에는 거의 잠을 못자고 낮이면 쉽게 잠 자는 사람도 있다. 버스에서나 영화관, 심지어 은행, 음악회에서도 코를 골며 잠드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밤에 못 자는 것보다는 수면제를 먹는 편이 낫다고 한다. 미국 여배우 마릴린 먼로는 잠옷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샤넬 NO.5 향수”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릴린 먼로는 수면제 과용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날 밤에도 그녀는 샤넬 NO.5를 잠옷으로 입고 영원한 잠에 들었다고 한다. 마릴린 먼로는 무슨 연유로 잠이 안 와 수면제를 먹었을까. 그러나 젊은 시절에 세상을 떠나 마릴린 먼로는 영원히 젊은 모습, 백치미로 살아 있다./임병호 논설위원

보약

나폴레옹은 “남자는 3시간, 여자는 5시간, 그리고 바보는 6시간 잔다”고 말했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하루 3시간만 잤다는 기록이 있고, 4시간 정도는 눈을 붙였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나폴레옹이 하루 18시간을 일하는 일벌레였다는 점이다. 유럽 평정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나폴레옹은 전투 중 말안장 위에서 짧게 짧게 잠을 해결하며 수면시간을 충당했다고 한다. 토머스 에디슨은 하루 평균 세시간의 잠만 자며 연구에 매달려 주위에서 “수면에 대한 그의 천재성은 발명에 관한 천재성 못지 않다”고 평했고,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 역시 일에 집중할 때면 며칠 밤을 꼬박 새우기 일쑤였다고 한다. 다빈치는 부족한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 자신만의 독특한 노하우를 갖고 있었는데 4시간마다 15분씩 낮잠을 자는 것이 그 비결이었다. 피카소는 짧지만 달콤한 낮잠을 즐겼다. 침대 옆에 양철판을 놓고는 붓을 손에 든 채 낮잠을 청하는 습관이 있었다. 설핏 잠이 들어 붓이 양철판에 닿아 소리가 나면 피카소는 낮잠을 접었다. 10여 초도 안되는 시간이지만 그는 충분히 상쾌했다고 한다. 미국의 트루먼, 케네디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도 낮잠 예찬론자였다. ‘잠은 인구의 진화과정에서 벌어진 최대의 실수’라고 폄하한 과학자도 있지만 다른 과학자는 하루 8∼9시간 정도의 수면이 다음 날의 생산성을 20%나 증가시킨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해 ‘잠은 사치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잠은 개인차가 심해 누구는 10시간을 자도 마냥 졸립고, 누구는 2 ~ 3시간을 자고도 거뜬하다고 한다. 신생아는 보통 하루 중 19시간, 노인은 5시간30분을 잔다. 같은 사람이라도 환경의 변화에 따라 수면시간이 달라진다고 한다. 그러니까 잠은 양이 아니라 질이다. 인생의 3분의1을 잠으로 소비하기엔 너무 아깝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겠지만, 그러나 ‘잠’만큼 편안한 휴식은 없다. 잠은 재충전의 의미로서 뿐만 아니라 마음의 양식으로서도 존귀하다. 잠은 삶을 위한 짧고도 긴 휴가다. 잠은 몸과 마음의 보약인데 귀뚜라미가 우는 가을밤엔 잠이 쉽게 오지 않는다. /임병호 논설위원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이다. 백성이 배부르게 해야 하는 것을 으뜸으로 삼는 치자의 덕목을 예부터 이렇게 민이식위천이라고 했다. 루이 16세는 프랑스 혁명 당시 “빵을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는 민중의 외침을 전해 듣고 이렇게 말했다. “바보 같은 녀석들,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잖아!?”라고. 그는 빵과 고기의 가치 등분조차 판별하지 못했을 만큼 실로 우매한 군주였다. 이러고 보면 ‘민이식위천’의 치자 교범은 동·서양 간에 다름이 없었던 것 같다. 아니 동·서양만이 아니고 고금에도 이치는 역시 같다. 미국 뉴스위크지의 여론조사 결과 부시 미국 대통령의 재선을 바라지 않는다는 응답이 49%에 이르러 재선을 원한다는 응답의 44%를 웃돈다는 보도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라크 전쟁을 승전으로 이끈 부시가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고도 재선에 실패한 그의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전철을 예고하는 것 같아 백악관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미 국민들은 이라크 정벌의 긍지에 찬 흥분을 한동안 맛보긴 했지만 그것은 한 순간일 뿐, 전후 최대의 실업난에 허덕이는 현실을 더 걱정하여 부시를 ‘NO’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미국 같은 강대국이 이라크를 초토화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처럼 어렵지 않은 일로, 오히려 점령지 관리에 많은 돈이 들어 부시의 전승같지 않은 전승을 큰 부담으로 여기는 미 국민들이 많은 것 같다. 남의 나라 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역시 미국을 남의 얘기처럼 할 입장은 아닌 것 같다. 남 보기엔 그럴듯한 점포를 가진 점포주가 속으로는 빚투성이면서, 그래도 문을 닫지 못하는 것은 문마저 닫으면 빚쟁이가 덤벼들 게 걱정되기 때문이라는 고충은 많은 사람이 그같은 동병상련의 입장인 게 작금의 생활경제 실상이다. IMF 환란 때보다 더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 정부가 말하는 개혁이나 코드나 그런 것을 민중은 굳이 알 필요도 없고 알고자 하지도 않는다. 빵과 고기의 가치조차 판별하지 못하는 우매함이 없다면 경제살리기 ‘민이식위천’의 치자 도리가 급선무임을 알아야 한다. /임양은 주필

언론인출신 관료

문화공보부가 사이비기자 단속 지침을 시달하면서 사이비기자 행태 사례를 들었다. 공문 빽빽이 나열된 사례 중 ‘일수기자’란 게 있었다. 당시 일반 행정기관엔 과비(課費)란 걸 썼다. 과비는 바닥나고 추경은 멀었고 하면 사채를 빌려쓰곤 했다. 이를 아는 출입기자가 과비로 사채를 빌려주는 것이다. 출입처에 돈놀이를 하니 떼일 염려가 있을리 없다. 더욱 가관인 것은 과비로 빌려주는 출입기자의 사채는 평소 각 과별로 돌아가며 일수돈 걷듯이 ‘돈 좀 달라’며 얼굴에 쇠판 깔고 모은 돈인 것이다. 30여과가 되므로 1개과에 한달 걸러 손을 내밀곤 한 것이다. 이리하여 기자실서도 외면되던 사람이 어떻게 문공부 서기관으로 들어가더니, 자신이 그 짓을 했던 행태를 사이비기자 사례로 시달한 공문을 받아본 공무원들이 실소를 터뜨려 화제가 됐었다. 전두환 정권이 막 들어서고 나서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의 언론 탄압은 언론계 출신들이 더 했다. 앞서 말한 ‘일수기자’야 서기관으로 들어 갔지만 언론계에 있다가 고관현직의 벼슬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그래서 정권에 충성심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던 지 언론 탄압에 한 술 더 떴다. 이리저리 이모저모로 숱하게 언론을 괴롭힌 전두환 정권의 언론정책 담당자들 거의가 다 언론계 출신으로 자신이 몸았던 언론에 권력의 칼날을 무소불위로 휘둘러 댔다. 정순균 국정홍보처장의 외지 기고문 파문을 보면서 불행하게 여기는 것은 그 역시 모신문사의 간부급 언론인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영문 번역에 잘못된 점이 있다는 해명도 참작하고 싶고, 언론 탄압의 의도가 꼭 있었다고도 믿고 싶지 않다. 그러나 ‘한국 언론은 1차적 사실 확인도 않고 기사쓰는 경향이 있다’는 등 무책임하고 파렴치하게 폄훼한 것은 유감이다. 언론인 출신의 윤리로나 고위 공직자의 품위로나 한국 언론을 왜곡하는 글을 굳이 외지에까지 기고한 것은 심히 당치않다. 국정홍보처장이 아니고 나라 망신을 자초한 ‘국치홍보처장’이란 생각을 갖게 한다. /임양은 주필

'복지만리'

김영수 작사, 이재호 작곡, 백년설 노래로 1941년 3월 태평레코드에서 발표된 ‘복지만리’는 지금도 중년층 이상들이 애창하는 대중가요다. “달 실은 마차다 해 실은 마차다 / 청대콩 벌판 위에 휘파람을 불며 간다. / 저 언덕을 넘어 서면 새 세상의 문이 있다 / 황색 기층 대륙길에 어서 가자 방울소리 울리며(1절) // 백마를 달리던 고구려 쌈터다 / 파묻힌 성터 위에 청노새는 간다 간다 / 다함 없는 대륙길에 빨리 가자 방울 소리 울리며(2절) // 노래를 부르자 뛰노는 흑마여 / 가슴에 고동치는 혈관의 피 / 하늘은 자주색 싸락눈 싣고서 / 동터 오는 광야의 저쪽으로 달려 가세나” 이 노래는 제목이 같은 영화 ‘복지만리’의 주제가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전창근이 감독했고 전창근 윤계선 전옥 전택이가 출연했다. 그런데 이 ‘복지만리’가 친일 유행가로 거론되고 있는 것은 재고할 여지가 있지 않나 싶다. 가사 3절이 일본어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1940년대 식민통치 압박을 느낄 수는 있지만 내용 자체는 노골적인 친일과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1941년 3월 개봉된 영화 ‘복지만리’는 일제의 정책에 협력한 어용적 작품이라는 평가와 함께 그래도 민족적 색채 또한 있다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영화 줄거리는 결과적으로 만주 이주를 미화하고 장려했다. 영화 ‘복지만리’는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노래 ‘복지만리’는 음반판매량 5만장을 돌파했다. 1940년대에 발표된 대부분의 친일 유행가들이 적은 판매고를 기록했지만 ‘복지만리’가 5만장이상 판매됐다면 대단한 인기였다. 식민정책에 순응하는 영화의 주제가로서 비록 한계는 있었지만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만주를 이민지가 아닌 해방공간으로 마음 속에 간직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2절 가사에 ‘백마를 달리던 고구려 쌈터’라고 나타낸 것은 친일이 아닌 한민족의 염원을 표출한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작사자는 ‘독립과 주권을 회복한 신천지를 복지만리로 상징’했을 것 같다. /임병호 논설위원

이데올로기의 벽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1886~1947)은 1918년 중국 상해에서 청년 동포들을 규합하여 민단을 조직, 광복운동의 터전을 마련하였고 신한청년당 총무간사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1919년 3월 임시정부 수립에 가담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을 역임하였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이 돼 언론을 통해 항일운동을 하였다. 1934년 조선체육회장에 취임하였으나 1936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말살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사가 폐간되자 사장직을 물러났다. 1944년 9월 일본의 패전을 예상하고 조선건국동맹의 지하조직을 전국적으로 확산, 그 위원장에 취임하여 광복에 대비하였으며 10월에는 출생지 경기도 양평 용문산 속에서 농민동맹을 조직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그 위원장이 되었고, 9월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 스스로 부주석에 취임하였다. 이어 10월에는 인민당을 결성, 당수직에 앉았다. 몽양은 1946년 10월15일 신민당과 공산당과의 공동 명의로 ‘좌우합작지지’ ‘입법기관설치 반대’라는 3당합동 결정서를 발표하고 11월 사회노동당을 조직하였다. 1947년 5월 사회노동당을 근로인민당으로 개편, 밖으로는 영국 노동당좌파, 안으로는 좌우 중간노선을 모색하였다. 1947년 7월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이라는 19세의 청년으로부터 2발의 권총사격을 받아 절명했다. 몽양에 대한 소개를 보면 이희승 편저 국어대사전에 독립운동가·언론인으로, 민족대백과사전엔 독립운동가·정치가로 기재돼 있다. 그러나 정작 국가보훈처에선 몽양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중도좌파’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몽양의 후손들이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냈지만 ‘아예 심사를 안했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일제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인정해 1995년 이동휘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 적이 있지만 광복 이후까지 사회주의 색채를 유지한 경우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독립운동 여부가 독립유공자 서훈의 기준이 돼야 할텐데, 분단된 현실이 안타깝다. /임병호 논설위원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