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상추

농업과 관련된 속담은 매우 과학적이고 지혜가 담겨 있다. ‘가뭄 때 배를 사 두고 장마 때 수레 사두어야 한다’는 말은 어떤 일이고 닥쳐서 대하는 것보다 미리미리 대비해야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뜻이다. 자연재해에 대비했다면 태풍 ‘매미’의 피해를 덜 입었을 것이다. ‘농부는 논가에, 어부는 물가에 살아야 한다’는 속담은 정성껏 생업에 종사하라는 뜻이다. 농부가 논에 자주 나가 봐야 벼가 자라는 생육 상태나 병충해 발생 상황을 알 수 있고, 어부는 바닷가에 자주 나가 봐야 물의 흐름, 고기의 상태를 알 수 있지 않은가. ‘샛바람 불면 비가 온다’는 속담이 있다. 샛바람은 동풍계열의 바람으로써 온난전선의 전면(주로 동남풍)으로 불기 때문에 동풍이 불면 전선의 통과에 따라 비가 온다는 뜻이다. 태풍이 북상하면 바람의 방향이 시계바늘 반대방향으로서 동북풍이 불게 되고 곧 이어 큰 비가 올 것이란 경험으로 생긴 속담이다. ‘까치집 낮게 지으면 태풍이 잦다’도 기후를 예고한다. 까치는 기상에 민감한 조류다. 집을 높게 짓는 습성이 있다. 그러나 낮게 짓는다는 것은 그 해에 태풍이 자주 발생할 것을 예견하여 바람피해를 막기 위한 대비로 까치집을 낮게 짓는다. ‘오이밭에 웃옷을 벗고 들어가면 오이 맛이 쓰다’. 농부가 일을 하면서 웃옷을 벗을 정도라면 날씨가 매우 덥고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심한 상태다. 오이를 심은 밭의 토양 수분이 부족하게 돼 오이 맛이 쓰다는 뜻을 지녔다. ‘가을 상추는 문 걸어 잠그고 먹는다’는 속담도 재밌다. 상추는 서늘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채소다. 따라서 상추는 여름철 높은 온도에서는 각종 병충해 발생과 생육이 나빠 상추잎의 질이 좋지 않아 맛이 떨어진다. 하지만 가을에는 서늘한 기후 때문에 잘 자라므로 상추잎이 부드럽고 맛이 특히 좋다는 것을 이르는 속담이다. 오이나 시금치가 요즘은 비닐하우스에서 재배되기는 하지만 가을 상추는 그래도 맛이 다르다. 가을 상추가 싱그러운 식탁에서 햅쌀 밥을 먹는 맛은 정겹다. /임병호 논설위원

국악경연대회

국악경연대회에서 입상대가로 심사위원에게 거액의 뒷돈이 거래됐다는 소식은 유감천만이다. 서예계에서 심사위원이 ‘대필(代筆)’을 해준 대가로 출품자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사건이 터져 실망이 컸는데 국악대회마저 ‘검은 고리’가 드러났다. 국악대회 참가자들이 입상을 하기 위해 심사위원들에게 수십만 ~ 수천만원의 사례금을 ‘후불제’로 내놨다니 그동안의 실상이 한눈에 보인다. 한 예로 A씨의 경우 1998년 11월 광주광역시가 주최한 국악대전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대회가 끝난 뒤 대통령상 수상자로부터 자그마치 2천만원을 건네 받았다고 한다. 문제점은 국악대회 참가자들에게도 적지 않다. 심사위원들에게 입상을 대가로 어느 정도 ‘인사’를 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기 때문이다. 더구나 받는 사람도 이를 뇌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동안 전국에서 열리는 국악대회의 절반 정도가 심사위원들의 담합과 뒷돈 거래 등으로 잡음이 끊이지 않았었다. 특히 판소리의 경우 ‘대통령상 = 명창’이라는 공식이 일반화해 금품 로비가 더욱 치열했다. 국악대회의 심사비리가 끊이지 않는 것은 국악대회가 전통문화 보전이라는 취지에서 벗어나 계파간 전승 세력 확보와 국악인으로서 ‘상품가치’를 높이는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는 데서 비롯됐다. 국악대회 대상만 타게 되면 지명도가 높아지는 것은 물론 문하생이 많아져 학원 운영이 잘돼 생활하는 데 걱정이 없어진다. 예술보다 생존이 먼저라면 참가자들이 수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가 없다. 현재 문화관광부의 시상 지원 대상 국악대회만 79개다. 이 중 대통령상이 주어지는 대회가 19개다. 국악대회 난립에 따른 심사비리가 끊이지 않자 지원대상 대회를 지난해 104개에서 18개로 대폭 줄였으나 대회 주관 단체 등의 거센 반발로 다시 늘렸다. 돈을 주고 상을 타려는 참가자도 문제지만 심사위원의 공정성, 도덕성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인간문화재라는 사람이 대통령상을 받게 해주겠다며 2천만원, 1천만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데 5년 전의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부인했다고 한다. ‘받은 사실이 없다’가 아니라 ‘기억이 안난다’니 정치판을 닮아가는 모양이다. /임병호 논설위원

수원문화원

우리나라에 문화원이 생겨난 시기는 1950년대 초기다. 당시엔 복지관·문예관·공회당·국민문화원·공보원 등의 여러 이름을 사용했다. 재정은 지방자치단체나 미국공보원(USIS)의 지원 또는 지방 유지들의 성금, 원장의 사재 등으로 충당했다. 문화원이 국가적인 보호육성책으로 정상화된 것은 1961년 5·16이후였다. 수원문화원은 1957년 10월28일 개원됐다. 초대부터 4대까지의 원장은 당시 수원시장이었던 김한복(金漢福·1957.10.8~1960.10.30), 2대 윤긍렬(尹兢烈·1960.12.27~1961.5.24), 3대 이백일(李白日·1961.5.25~1963.2.1), 4대 허철(許哲·1963.2.12~1964.10.20) 씨였다. 시장이 겸직했던 문화원장 시대를 거쳐 5대 (김승제·金承濟)부터 민간인이 원장으로 선출됐다. 김승제씨는 7대까지 연임(1964.10.21~1973.9.10)했고 안익승(安益承·1973.9.11~1979.9.25)씨가 8·9대 원장으로 봉사했다. 10대 홍사일(洪思日·1979.9.26~1983.9.14), 11대 이수영(李秀榮·1983.9.15~1987.9.7), 12·13대 심재덕(沈載德·1987.9.8~1995.6.29), 14대 김종기(金鍾基·1995.9.26~)에 이르는 동안 수원문화원은 명실상부하게 수원지역 문화발전에 이바지했다. 1960년대엔 수원지역 청년·학생들의 모임인 장원회, 난파합창단, 문학동인회 서호림·에뜨랑제 등이 문화원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1980년대부터 ‘수원시사’ 편찬, 월간 ‘수원사랑’ 발간, 서호 및 수원천 살리기, 수원 ‘화성행궁복원추진위원회’ 발족, 한 여름밤의 음악축제, 수원사랑 백일장 등 많은 사업을 펼쳤다. 그런데 2개여월 전부터 원장 권한에 이상이 생겼다. 지난 7월29일 총회를 열어 전국문화원연합회 경기도지회장으로 선출된 김종기 원장의 후임으로 유병헌(劉秉憲)씨를 15대 원장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법원등기서류에 원장 임기가 올 12월 18일까지로 돼있어 유병헌씨가 직무대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등기서류상의 원장과 행정적인 원장, 그러니까 지금 수원문화원은 원장이 2명인 셈이다. 문화원 내외에서도 묵시하고 있는 모양인데 무슨 일을 이렇게 하는 지 걱정스럽다. 만일 임기만료일 이전에 불상사라도 생기면 ‘좋은 일은 내 덕분, 나쁜 일은 네 탓’이라고 서로 원장 책임을 전가할텐데 그런 민망한 일이 생긴다면 뒷모습, 앞모습이 아름답지도 당당하지도 못하다. 문화적인 조치가 속히 있어야겠다./임병호 논설위원

훗카이도의 지각변동

고대의 세계지도 추정도를 보면 동남아의 인도네시아가 따로 없다. 지금의 인도네시아는 아시아 대륙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다. 이밖에도 아프리카가 유럽과 연결돼 있는 등 현재의 오대양 육대주 양상과는 판이하다. 이러한 추정은 수억 또는 십수억년 전을 가상한 것으로 지질학계 등 전문가들의 견해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결국 지구가 약 35억~40억년 전 태양계의 아홉 행성 중 하나로 생긴 이후 대지진 등으로 천지 개벽의 지각 변동을 일으켜 육지의 형태가 크게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지구 표면의 4분의3이 바다이고 겨우 4분의1에 불과한 육지 중에도 곧 넘어질 듯이 더러 아슬 아슬한 형태의 산봉우리도 있고 바위 등이 있다. 설악산의 흔들바위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이같은 형태는 아마 바닷속도 비슷할 것이다. 알고 보면 흔들바위처럼 아슬 아슬하게 솟아 있는 육지가 있을 수도 있다. 지난 달 26일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도카치 앞바다에서 발생한 강진으로 인해 진원지 부근의 땅이 남동쪽으로 최대 1m가량 이동한 것으로 일본의 국토지리원이 측정해 냈다. 도카치 앞바다의 태평양판 암반이 가라 앉으면서 일어난 지진 이후에 미처 다 어긋나지 못한 도카치 땅의 단층이 서서히 미끄러져 가라앉는 바람에 이같은 지각 변동이 생겼다는 것이다. 고대 도시 폼페이는 베수비어스 화산의 폭발로 멸망했는가 하면 지각 변동으로 바다에 잠긴 이집트의 수중 고도시가 발견된 적도 있다. 지진으로 인한 지각 변동이 비록 이번이 처음인 건 아니지만 지구의 인류에 대한 위협은 무수한 떠돌이 별의 충돌설만이 아닌 것 같다. 알고 보면 기껏 바닷속 단층에 떠받친 육지의 지구촌에 웬 분쟁도 많고 전쟁도 많은 건지 생각해 보면 허망하다. 그래도 최선을 다 해야하는 것이 인간사회이고 보면 누구 말처럼 설사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할 지라도 종말이 아닐 지 또 모르는 내일을 위하여 사과나무를 한 그루라도 더 심어야 할 것이다. 각박한 마음에서 벗어나는 여유를 갖고 싶다. /임양은 주필

강금실 법무

서울 용산경찰서 법조 브로커 비리와 관련된 검사 4명 중 강금실 법무장관의 측근만이 유일하게 법무부 징계위원회에서 무혐의 처리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궁금한 것은 무혐의 처리가 과연 강 장관의 법무·검찰 개혁을 주도하는 측근 때문인 게 맞는가 하는 그 진위다. 계좌추적에서 10만원짜리 수표 10장을 받은 정황이 잘못 판단된 것이라는 게 무혐의 사유다. 그럼 정직 및 중근신처분 받은 다른 3명의 징계위원회 회부 내용은 얼마나 정황이 뚜렷한 건지 알 수 없다. 더 자세한 내용을 모르므로 잘했다 못했다 할 수는 없으나 상벌의 잣대는 누구에게나 똑같아야 객관적 권위를 지니는 사실은 분명하게 말할 수가 있다. 나일강의 악어에 아들을 붙잡힌 어머니가 돌려줄 것을 간청하자 악어는 “내가 돌려줄 것인지, 돌려주지 않을 것인 지 정확하게 맞추면 돌려주겠다고 말했으나 그 어머니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말하든 저렇게 말하든 맞추지 못했다면서 아이를 해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우화인 이 악어의 논법은 논리학상 일종의 상관궤변법이다. 상벌의 불공정은 이러든 저러든 부정적으로 둘러대는 상관궤변법을 구실 삼는 것이 상례다. 사물의 경위가 결론을 낳는 게 아니고 이미 난 결론을 두고 경위를 해석하는 것이 이런 경우에 속한다. 그렇다고 이번 법무부 징계위원회 결정이 이와 같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강 장관에게 아쉬운 점은 있다. 얼마 전엔 조사를 앞둔 송두율씨를 두고 ‘기소 불가’ 의견을 밝혀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강 장관은 취임 당초의 선입견 보단 상당히 긍정적인 면모를 보여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갖게하는 사람이다. 물론 일마다 모든 이들의 마음에 다 들게할 수는 없는 것이 고위공직 생활이지만 그엔 또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별로 이유가 되지않는 일로 강 장관의 이미지가 흐려지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 /임양은 주필

바오로 2세

로마시의 바티칸 언덕에서 발달한 나라, 바티칸 시국(市國)은 면적 44만㎡에 인구는 2천여명에 불과하다. 1929년 교황 비오11세가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땅을 사들였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지만 그 영향력은 세계적으로 막강하다. 교황청인 바티칸 궁전·성 베드로 대성당·대광장·도서관·박물관·카톨릭 대학·시스틴 성당·천문대·방송국·인쇄소 등 이밖에 많은 시설이 있으며 화폐와 우표를 독자적으로 발행한다. 60여 나라와 대사나 공사 등 해외 사절을 교환하는 등 외교 관계를 갖고 있다. 교황은 세계에서 약 10억에 이르는 카톨릭 교인의 최고 수장으로 존경을 받는다. 초기엔 일반 성직자와 평신도 속에서도 선출 되도록 됐으나 추기경만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도록 교회법이 다시 정해진 지가 오래다. 교황청의 각 성장(省長·장관)을 맡기도 하는 추기경은 80세로 정년이 있는데 비해 교황은 종신직이다. 교황이 서거하면 전 세계 각지의 추기경들이 시스틴 성당에 모여 새 교황을 선출한다. 따로 입후보란 게 없고, 한 사람도 반대가 없는 전원 일치로 선출해야 하기 때문에 선거를 몇날 며칠 걸려 계속할 때가 있다. 이윽고 새 교황이 선출되면 시스틴 성당 굴뚝에 흰 연기를 뿜어 새 교황 탄생을 알리는 신호를 내보이면 이를 기다리며 지켜보던 군중들이 축제의 함성을 터뜨린다. 교황 대관식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이어 군중이 임립한 대광장이 내려다 보이는 대성당 발코니에서 대관이 이루어진다. 교황 바오로 2세의 위독설을 외신들이 전하고 있다. 교황은 지병인 파키슨병으로 시달려 왔다. 올해 83세로 즉위 25주년을 맞는 바오로 2세는 세계 여러 나라를 두루 순례하는 왕성한 활동을 보여 왔다. 거동이 불편한 지금도 핀란드 방문을 희망하는 것으로 전한다. 어쩌면 또 시스틴 성당 굴뚝의 흰 연기를 기다려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되도록이면 핀란드 방문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임양은 주필

벼 익어가는 냄새

한자 ‘향(香)’은 벼 화(禾)자에 날 일(日)자를 하고 있다. 뜻풀이를 하면 ‘벼가 익어가는 냄새’다. 고문(古文)에는 기장(수수와 비슷한 곡류) 서(黍)자 아래 달 감(甘)자를 하고 있다. 기장에 단맛이 나게 하려면 발효를 시킬 때 가능한 일이다. 이 기장으로 빚은 술을 울창주(鬱?酒)라고 한다. 울창주는 신을 내리게 하는 강신주(降神酒)로서 오늘날에도 천제(天祭)나 종묘제례(宗廟祭禮)와 같이 나라 규모의 큰 행사에서 쓰인다. 이는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이 하나가 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향’은 술과 함께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의 어울림을 이루는 매개체다. 선비들은 차를 마실 때 선향(線香)을 피웠다. 선향은 예로부터 문인들이 즐겨 찾던 향이다. ‘한 줄기의 향’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정신적인 부분이 강조되어 선비들이나 의식을 치르는 곳에서 사용됐다. 집중이 필요한 경우엔 향을 곧바로 피우고, 마음의 여유를 찾고자 할 때는 비스듬히 피우기도 했다. 사대부들은 선비가 사는 집을 난형지실(蘭馨之室)이라 불렀다. 또 선비들의 운치 있는 네 가지 일, 즉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고 그림을 걸고 꽃을 찾는 4예(四藝)에 향을 즐기는 행위를 맨 앞에 포함시켰다. 연인들은 사랑을 위해 향을 바르거나 먹기도 했다. 향의 은은함과 정신적인 내면세계를 중요시 여겼던 이들은 향을 받아들이는 자세 또한 남달랐다. 향을 피우면 눈을 감고 좀 더 섬세한 향의 의미, 향의 흥취에 빠져 들었다. 이런 행위를 일컬어 ‘문향(聞香), 즉 ‘향을 듣는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향을 만드는 재료와 효능도 다양하다. 감송향(甘松香)·단향(檀香)·목향(木香)·안식향(安息香)·용뇌(龍惱)·울향(鬱香)·유향(油香)·육계(肉桂)·침향(沈香)·회향(回香)이 있는데 우리 향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가치 외에도 향기 요법과 같은 실용적인 가치가 무궁무진하다. 이틀이 멀게 비가 오고, 태풍 ‘매미’가 참으로 혹독한 시련을 주었어도 바야흐로 논에서 벼 익어가는 냄새가 그윽하다. 올 쌀 생산량이 23년만의 최대 흉작이어서 가슴은 아프지만 그래도 가을은 향기로운 계절이다. /임병호 논설위원

'동춘 서커스'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서커스단 ‘동춘’은 일본 서커스단에서 활동하던 박동춘씨(1970년 작고)가 1925년 창단했다. 30여명으로 출발한 초기 ‘동춘’은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서커스 뿐만 아니라 신파극, 춤, 만담 등 다양한 레퍼토리로 명성을 날렸다. 1950~1960년대엔 단원 250명 규모의 거대 공연단으로 명성을 날렸는데 허장강, 서영춘, 배삼룡, 백금녀, 남철, 남성남 등이 당시‘동춘’의 멤버들이었다. 1962년도에 텔레비전이 생기고 극장 쇼와 영화 등이 발달하면서 ‘동춘’은 쇠락해졌다. 이 과정에서 초대 단장이 별세하고 잠시 그의 아들이 2대 단장을 맡았다가 1975년부터 현 박세환 3대 단장이 ‘동춘’을 이끌고 있지만 관객은 갈수록 줄고 마스코트 코끼리가 혹한을 못 이겨 숨을 거두었는가 하면, 태풍으로 무대와 장비가 몽땅 떠내려가기도 했다. 천막무대이긴 하지만 다행히 지난 3월 부천시 중동에 상설공연장을 마련했고 더욱이 오는 2005년 4월엔 부천시의 도움으로 현 공연장 자리에 1천800석 규모의 전용공연장이 완공될 예정이다. 이 곳엔 단원들의 숙소는 물론 인재 양성을 위한 서커스아카데미도 들어선다. 상설공연장과 아카데미가 완공되면 떠돌이 생활은 일단 끝이다. ‘동춘’이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6월 평양교예단의 서울 공연을 보고 나서다. 오랜 전통만을 믿고 별 다른 기술 개발없이 고정 레퍼토리에 집착하던 ‘동춘’에 평양교예단의 공연은 그야말로 가슴 아픈 충격이었다. 서커스가 인기를 끌지 못하는 게 사회적 무관심 탓으로 돌렸던 일이 후회스러웠다. 박세환 단장은 바로 중국으로 가서 대륙 곳곳을 헤매며 150여개 중국 잡기단(서커스단)과 접촉하며 그들의 기술을 탐색했고 국내에 초청, 합동공연을 수차례 가졌다. ‘동춘’ 단원들은 여기에서 그들의 신기에 가까운 기예를 커닝하듯 익혀왔고 박 단장은 공연·연습 장면을 ‘X파일’에 구축했다. 어릿광대와 구슬픈 색소폰 소리, 진한 화장과 애처로운 표정의 소녀 곡예사 줄타기 등으로 삶에 지친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서커스의 부활’을 ‘동춘’에서 다시 봤으면 좋겠다./임병호 논설위원

양재천 복구

서울 강동구 둔촌동 212 일대 2만4천600여㎡(7천400여평)는 학교, 아파트가 인접한 지역이다. 지난 1996년 폭 12m의 도로가 건설될 예정이었지만 주변 주민들의 반대로 개발계획이 철회되고 2000년 생태계보존지역으로 지정됐다. 둔촌동 아파트 바로 뒷산이다. 습지기능을 유지해 주는 지하수가 솟아 나오는 서울의 유일한 자연습지인 이 생태계보존지역에 지금 천연기념물 제323호인 황조롱이와 서울시 보호야생동물인 오색딱따구리, 꾀꼬리, 흰눈썹황금새, 박새 등 야생조류 30종 394마리가 다양하게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 토종식물수가 지난 2000년 87종에서 104종으로 증가했고 외래종식물은 48종에서 40종으로 감소됐다. 습지에 부들 등 습지식물 군락지가 있고 희귀수종인 오리나무와 물박달나무, 상수리나무도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도심 한 복판에 새소리가 들려오는 환경을 조성한 서울시가 이달말부터 환삼덩굴, 개망초, 고마리 등 유해식물 제거작업과 생활쓰레기 청소, 새집 달기, 겨울철 조류 모이 주기 등 종합적인 생태계 보전지역 관리계획을 수립하고 주민단체인 ‘습지를 가꾸는 사람’들과 함께 본격 관리를 해나가기로 했다고 한다. 특히 둔촌동 생태계 보존지역에 일반인들의 출입을 원칙적으로 제한하고 동식물을 포획 채취하는 행위, 덫이나 올무 등을 설치하거나 농약 등을 뿌리는 행위 등을 금지시켰다는 소식이다. 둔촌동 생태계보전지역이 대부분 사유지여서 서울시가 토지매수를 진행중이라는 사실도 반가운데 올해안에 고덕동 한강고수부지, 청계산 원터골 등 2개 지역을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추가 보존한다니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자연환경 보전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청량감을 준다. 시행초기에는 망설여지지만 결과가 주는 만족감은 형언하기 어려울만큼 크다. 그런데 과천시도 도심을 관통하는 양재천 복개 시설을 철거, 자연형 하천으로 복원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물론 많은 장애와 파장이 예상되지만 과천의 백년대계를 생각한다면 적극적으로 추진돼야 한다. 둔천 습지일대처럼 과천 양재천에 물고기가 헤엄치고 온갖 풀들이 자라날 것이다./임병호 논설위원

위작(僞作)

미술·서예 등 작품 위작(僞作)은 동·서양이나 예나 지금이나 항상 골칫거리다. 대가의 작품일수록 위작을 선호한다. 문화재 역시 위작의 대상이다. 문화재 모조품은 오히려 진품보다 정교한 게 있다. 전문가들도 진위를 가리기 어려운 가짜가 있다. 신라 왕의 능을 도굴하여 경주경찰서에 붙잡힌 도굴범이 도자기를 가리키며 “이것도 도굴한 것이냐?”는 경찰관의 신문에 “내가 만든 모조품”이라면서 “누구라고 하면 다 알만한 전문가에게 보여 주니까 보물급 진품이라고 말하더라”며 가짜 문화재 만드는 솜씨 자랑까지 한 적이 있다. 그 가짜 전문꾼은 흙 속에 오래 묻힌 천년의 티가 나도록 하기 위해 하수구를 연결한 땅 속에 묻어두는 비법을 너스레를 떨며 말 하기도 했다. KBS-1TV ‘TV 진품 명품’은 시청자들이 소장한 것을 출품하는 갖가지 서화나 골동품을 감정하는 이색 프로그램이다. 게스트로 나오는 연예인 등이 어림잡아 전문가의 최종 감정가격을 예시하는 추정가격이 크게 높거나 낮게 빗나가는 의외성이 이 프로그램의 흥미를 유발하는 초점이 된다. 비록 이렇긴 해도 무려 7억원의 감정가격이 매겨진 고려청자가 한 달만에 모조품으로 밝혀져 지난 일요일 방영된 프로그램에서 재감정 과정이 소개된 건 해프닝이다. 지난 달 29일 녹화에서 진품의 ‘청자상감동채운학문매병’으로 감정했던 이 청자가 아무래도 미심쩍어 X-레이 촬영 등으로 다시 정밀감정을 한 결과 가짜로 판명됐다는 것이다. 그래도 감정위원들이 재감정에 나서 결국 위작을 가려냈으니 가까스로 체면은 선 셈이다. 문화재 모조품은 수년 전 도내 박물관에서도 상당 수가 드러나 구입 경로를 놓고 말썽이 된 적이 있었다. 골동품 등은 비지정 문화재이긴 하나 세월이 흐를 수록이 희귀가치가 더 하므로 이런 저런 가짜가 나온다. 문제의 가짜 청자는 중국산 모조품이 유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산이 홍수를 이루다 못해 이젠 가짜 청자까지 유입되는 모양이다./임양은 주필

최 장관의 설화(舌禍)

아니나 다를까, 어제 ‘최 장관의 불수’ 제하로 보도된 최낙정 해수부 장관이 네티즌들의 도마위에 올랐다. ‘불수’(拂鬚)란 윗 사람의 수염에 묻은 국건더기를 닦아주며 아첨한 송나라 고관의 고사임은 이미 말했다. 네티즌들의 빗발친 비판은 ‘클린턴 미국 대통령(당시)이 하와이를 방문했을 적에 태풍으로 난리가 난 가운데 주지사가 클린턴을 골프장으로 안내하여 골프를 쳤는데도 이튿날 지역 신문에 긍정적인 기사가 실렸다’고 최장관이 말한 대목이다. 클린턴이 그같은 일이 있었던 일로 하와이에 간 사실이 없다는 게 네티즌들의 항의 요지다. 결국 최 장관은 근거없는 허위 사례를 들어 대통령에게 아첨했다는 비판인 것이다. 어제 지지대에서도 ‘의문의 사례’라고 지적하였지만 처음부터 납득되지 않은 소리였다. 1999년 9월의 태풍은 보통 태풍도 아닌 미국 동남부를 강타한 허리케인으로 하와이를 덮친 태풍 역시 A급이었다. 이러한 태풍 속에 클린턴이 날 수 없는 비행기를 타고 하와이까지 갔다는 것도 웃기는 소리고, 또 그같은 폭우 속에 골프를 쳤다는 것도 웃기는 소리밖에 안되는 것이다. 최 장관은 뒤늦게 어느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99년의 상황이 아니고 경제지에서 읽었던 내용”이라고 군색한 변명을 했다지만 도시 믿기지 않은 소리다. 아첨도 잘 해야 약발이 나는 것이 지 말을 억지로 비틀어 짜가며 해대는 것은 되레 윗사람을 욕보이는 것밖에 안된다. 말은 그 사람의 인성을 나타내고 행동은 그 사람의 인품을 드러낸다. 이 두가지 면에서 최 장관의 ‘불수’는 어느 수위라 할 수 있을 것인 지 매우 궁금하다. 자유당 정권 시절 이승만 대통령이 경회루에서 낚시를 즐긴 적이 있었다. 그 때 곁에서 낚시 바늘에 미끼를 달아주곤 하던 박모 비서관이 대통령이 ‘부웅’하고 방귀를 뀌자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했다는 그 무렵 유명했던 일화가 생각난다. 최 장관의 ‘불수’는 이보다도 정도가 더 심한 것 같다./임양은 주필

최 장관의 '불수'

‘다른 사람의 수염을 닦아 준다’는 뜻으로 불수(拂鬚)란 말이 있다. 송나라 재상 구준이 회식 자리에서 자신도 모르게 국건더기를 수염에 묻혔다. 이를 본 참정 벼슬에 있는 정위가 구준 앞에 공손히 다가가 손수건을 꺼내어 수염에 묻은 국건더기를 닦아내는 모습이 여간 공손한게 아니었다. 이를 본 구준은 껄껄 웃으면서 “여보게! 참정이면 당상관인데, 그래 윗 사람을 위한답시고 수염닦는 일(불수)까지 하는가. 체통을 지키게나!”라고 말했다. 십팔사략(十八史略) 송사(宋史) 구준전(?準傳)이 전하는 고사다. “왜 우리는 대통령이 태풍이 왔을때 오페라를 보면 안되는 이런 나라에서 살아야 하는가”라고 최낙정 해양수산부 장관이 어느 공무원 특강에서 열변을 토한 모양이다. 그러면서 일부 언론 보도를 “납득하기 어렵다”고 비판한 것으로 전한다. 결론부터 말해서 비록 대통령이 오페라 관람이 예정된 것이라 할 지라도 14호 태풍 매미가 불어닥쳐 온 나라가 긴장하고 국민들이 고통받는 시각에 취소하지 않고 굳이 구경한게 적절치 못한 것은 백번 말해도 부정될 수가 없다. 최 장관의 말 뼈는 이를 보도한 신문을 힐난한데 있는 것 같지만 당치않다. 어떤 이는 대통령도 사생활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권력 주변은 사생활도 감시의 대상이다. 최 장관은 클린턴의 하와이 방문을 예로 들었으나 의문이다. 오히려 사생활인 르윈스키 스캔들로 클린턴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게 미국의 언론이다. 그러나 저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께 송구하다”고 말해 일단락 지은 일을 두고 최 장관이 왜 그런 말을 꺼냈는지 이 점이 이해가 잘 안된다. ‘고정관념을 깨자’는 의미로 했다지만 이런건 고정관념 타파의 범주에 들지 못한다. 그는 해양수산부 차관으로 있다가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만약에 발탁해준 보은의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이라면 윗 사람의 수염을 닦아준 정위의 과공과 같다. 과공도 비례라고 하였다. /임양은 주필

애국가 改詞

한 나라가 지향하는 이념을 리듬에 실어 노랫말로 표현한 것이 ‘국가(國歌)’다. 애국심이 담겨 있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프랑스의 국가 ‘라마르세예즈’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수구적인 오스트리아의 공격에서 지켜내려고 나선 마르세유 의용군의 노래에서 유래했다. 독일의 국가 ‘독일인의 노래’도 수백개의 영주국으로 분류된 국가를 통일시키고 인권과 자유를 실현하려는 정신에서 1841년 팔러스레벤이 지었다. “통일과 인권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우리 모두 형제처럼 한 마음 한 뜻으로 나서자. 통일과 인권과 자유야말로 우리의 행복의 바탕이니”라고 외치고 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한국 국가의 1절이다. 동해물이 마르고 백두산이 닳아질 리야 없겠으나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이라는 가사는 많은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다른 생각을 해 왔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아 없어지면 한반도만이 아니라 지구도 멸망한다. 그런 일은 없을테니 영원히“철갑을 두른 남산의 소나무 같은 기상”을 갖고 “가을 하늘 밝은 달과 같은 일편단심”으로 “충성을 다해 나라를 사랑하자”는 것이 애국가의 요지다. 4절까지의 후렴도 “(하느님이 보우하시는 가운데)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다. 국민이 애국심을 가져야 함은 당연하다. 마음만으로가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애국해야 한다. 조국에 충성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애국가’에는 애국심만 주입시키고 있다. 국가와 국민이 추구해야 할 보편적 이념이 없다.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할 때도 끝날 때도 ‘애국가’가 장엄하게 방영된다. 학교 입학식, 졸업식, 군대 입대식, 전역식 등 모든 행사 때마다 애국가를 제창한다. 그러나 요즘은 행사장에서 사회자가 “애국가는 1절만 불러 주시기 바랍니다”라거나 “애국가는 생략 하겠습니다”라고 말 해도 별탈이 없다. 안익태 선생이 작곡한 ‘애국가’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애국가 곡에 맞춰 새로운 가사를 붙였으면 어떨까 싶다. /임병호 논설위원

손주 사랑

조선왕조 왕세자 교육의 특이점은 ‘아버지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이다. ‘딸은 어머니가, 아들은 아버지가 가르친다’는 유교이념에 따라 부왕(父王)이 교과목을 정하는 일부터 교사진 선정, 수업시간 조정에까지 개입했다. 때로 신하들과 학부모인 부왕이 교육방식을 두고 대립하는 일도 있었다. 핵심 교과목은 유교경전과 역사지만 평소 생활을 통한 덕성교육, 예체능교육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일상생활에서 가장 강조되는 덕목은 효(孝)였다. 왕세자는 아침 저녁 국왕의 수라상을 살피는 ‘시선(視膳)’과 부모의 약을 먼저 맛보는 ‘시탕(侍湯)’을 해야 했다. 군 통수권자로서 활쏘기, 말타기, 사냥 등에도 일정 정도 이상을 연마했다. 자신의 몸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도 장래 왕이 익혀야할 중요 덕목이었다. 왕세자가 편식하거나 비만해지면 이를 관리하지 못한 내시들이 문책 당했다. 특히 아침을 거르면 학습 진도가 떨어진다 해서 내시들이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조선조 왕세자교육 코스의 단연 우등생은 제22대 정조(正祖)였다. 정조는 돌 지나면서부터 붓과 먹을 가지고 놀았다고 한다. 원손(元孫·훗날의 정조)이 네 살 되던 해 영조(英祖)는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 원손을 불러 앉히고는 글을 읽고 글자를 써보이게 했다. ‘신체발부수지부모불감(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을 막힘 없이 외운 원손이 ‘부모’ 두 글자까지 크게 써보이자 영조는 “하늘이 우리나라에 복을 주시려고…”라며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원손이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우던 여섯살 무렵 영조는 원손의 스승 남유용을 불러 호피 한벌을 내리면서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지금 경에게 이것을 주는 것은 원손을 위해 ‘호랑이 가죽을 깔고 앉은 엄한 스승이 돼라’는 뜻이다. 경을 포상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다.” 수원의 ‘화성(華城)’을 축성한 정조는 184권짜리 개인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를 썼다. 정조의 제왕적·학문적 성취 뒤에는 손주를 위해 손수 ‘어제조훈(御製祖訓)’이라는 교재까지 만들며 뒷바라지 했던 할아버지 영조가 있었다. 본받을만한 손주 사랑이다. ‘홍재’는 정조대왕의 아호다./임병호 논설위원

수리산

안양·군포·안산·시흥시가 경계로 삼는 수리산(修理山)은 높이가 475m로 일명 견불산(見佛山)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 안산군(安山郡)의 명산으로 봉우리가 매우 빼어났으며 산곡이 깊었다. 북쪽으로 안양시, 동남쪽으로 군포시, 서쪽으로 안산시와 접하고 있어 수도권 관광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는 산이다. 산의 북쪽 골짜기에 있는 안양동의 작은 산촌 담뱃골은 조선 후기 헌종이 천주교를 박해하던 기해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들어와 담배를 재배하며 살던 곳이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이들 중 이 땅의 두번째 신부인 최양업(崔良業)의 가족들이 겪은 수난은 매우 처참하였다. 천주교 신자들은 당고개에서 죽음을 당했는데 최양업의 어머니 주검은 못 찾고 아버지 최경환의 주검만을 거두어 수리산 골짜기에 묻었다. 그 무덤자리는 지금도 남아 있어 천주교 신자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이 수리산이 오늘날은 수도권 남부의 각종 도로 계획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기존의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동서로 산을 관통했고, 남북으로 산을 뚫을 수원~광명간 고속도로가 추진되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다 또 건설교통부가 새로운 국도대체 우회도로를 설계 중이어서 산이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될 위기에 처했다. 수리산에는 이미 서울외곽순환 고속도로 중 1천886m의 수리터널과 1천254m의 수암터널이 뚫려 있다. 게다가 올해 1월 수원~광명 간 수도권 서부고속도로 민자사업 승인신청서가 건교부에 제출된 상태다. 이 도로에는 148 ~ 500m의 짧은 터널 3개와 1천540m의 터널 1개, 그리고 3 ~ 4개의 고가교량이 개설돼 수리산을 종단할 계획이다. 도로계획이 모두 진행될 경우 수리산 자락을 통과하는 터널이 8개나 된다. 고속도로가 수리산과 의왕시 초평동 일대 1.7km 구간을 통과하게 되면 인근 구봉산, 생태계의 보고인 왕송저수지의 환경 파괴는 물론 마을이 분리되는 등 피해가 크다. ‘수리(修理)’라는 산명(山名)도 예사롭지 않은 터에 산자락에 도로터널만 8개가 된다면 각종 문화재와 녹지 훼손은 불을 보듯 뻔하다. 전설 속의 산신령이 계시다면 아마 대로할 것이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라니까 노선은 당연히 변경돼야 한다. / 임병호 논설위원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

법은 국가 공권력에 의한 사회생활의 강제 규범이다. 사회생활이 다양한 만큼 규범도 다양하다. 법 규범의 배경 또한 다채롭다. 이를 구명하는 학문이 법철학이다. 법 개념의 분석, 존립의 근거, 법 세계의 구조적 성격 문화적 가치 등 제반 법 현상을 고찰한다. 장차는 법철학 만이 아니고 윤리적, 논리적 고찰을 영역으로 하는 법윤리학, 법논리학 등 새로운 법 관련의 학문이 나올 전망이다. 이미 법 관련의 밀접한 학문으로 법의학이 있다. 의학을 기초로 하여 법률적으로 중요한 사실관계를 해석하고 감정하는 일종의 응용의학이다. 또 법의학에서 사인이나 방법 등을 규명하기 위하여 하는 해부엔 사법해부와 행정해부가 있다. 사법해부는 범죄와 관련된 것인데 비해 행정해부는 단순히 행정상의 목적으로 하여 범죄와는 무관하다. 대부분의 해부가 사법해부로 행정해부는 사실상 지극히 드물다. 법의학은 인류의 범죄와 병행하여 발달해 왔을 만큼 오래된 학문으로 혈액형 발견과 지문 감식의 개발은 과학수사에 획기적 기여를 하였다. 지금은 유전자 감식(DNA)으로 머리카락 하나만으로도 범인을 가려낼 수가 있다. 조선시대엔 변사자의 얼굴색이 청색이면 중독사나 질식사로 추정하는 등 여러가지 특이 정황에 따라 감별했다. 적자색 적흑색 담홍색 미적황색 청자색 등으로 구분하였다. 동사(凍死) 아사(餓死) 역사(轢死) 늑사(勒死) 등 창상이 없는 변사체 감정법도 있었다. 이를 수록한 책이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으로 세종조(1440년)에 간행된 이후 1748년 증보판인 ‘증수 무원록’이 나왔다. 조선시대의 검시에 쓰인 법의학 전범이다. 책 이름부터가 죽은 사람의 원한이 없도록 한다는 뜻으로 ‘무원록’으로 한 게 공정수사 의지를 가늠케 한다. 서울대 규장각 책임연구원 김호씨가 원본을 번역하고 주석을 붙인 한글판 ‘신주무원록’이 간행됐다고 한다. 비록 고전이지만 현대 법의학에도 참고가 될만한 고전으로 생각한다. /임양은 주필

서울말. 평양말

북의 교과서를 번역해 읽어야 할 정도로 남북간 언어가 갈수록 소통이 어려워 진다는 보도가 있었다. (한국어문교열기자협회 남북어문교류위원회 조사) 자세한 내용은 얼마전 이 난에 보도된 바가 있다. 북측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돌아 보고는 ‘길거리에 웬 외래어 간판이 그리 많느냐’고들 흔히 핀잔 투로 말한다. 그들 말로는 주체 의식이 없다는 뜻이다. 외래어 간판이 많은 게 반성할 점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세평방 정리’, 소프라노를 ‘녀(여)성고음’이니 하는 평양 말은 세계 공통어에서 이탈되어 문제점이 없지않다. 폐쇄사회에서나 있을 법 한 일이다. 국내에서도 오래 전에 외래어를 없앤다 하여 축구 경기에서 프리킥을 ‘자유축’ 또는 ‘놓고차기’, 코너킥을 ‘구석차기’로 한동안 부르다가 아무래도 국제 공용어의 정서에 맞지않아 철폐한 적이 있다. 특히 북한의 정치 용어에는 함정이 많다. 가령 민족의 ‘자조공조’란 말은 미군 철수를 전제한 저들 방식의 고려연방제를 의미하는 정치 숙어로, 남쪽의 순수한 비정치적 민족 공조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 이밖에도 많은 어휘의 이질화 가운데 또 하나 예를 들수 있는 것으로 ‘통신’을 들 수 있다. 우리측은 전화와 우편을 통신으로 보는 데 비해 북측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등 방송까지 포함하여 통신이라고 부르고 있다. 만일 앞으로 남북통신회담을 갖는다면 이런 어휘의 혼란부터 먼저 정리해야 할 것이다. 말은 지역에 따라 다르긴 하다. 산하, 기후, 풍습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남측 말도 순수한 제주도 말은 알아 듣기가 어렵다. 사투리는 남북 간에 다 있기 마련이다. 사투리는 그 지방 특유의 토속이 담겨 어문학적 보존 가치가 또 있다. 하지만 남북의 언어 이질이 단순히 사투리 때문만이 아닌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저들의 말엔 조어가 허다하다. 북측은 평양 말을 표준어로 하고 있는데도 남측 표준어인 서울 말과 이질화된 평양 말이 분단 전보다 참으로 많다. /임양은 주필

군기(軍紀)

장교와 병사가 어울려 잡담하다 가도 성조기의 하기식이 시작되면 일제히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한다. 이것이 양키문화의 특징이다. 국내의 어느 진보주의자는 태극기 하기식에서 부동의 자세를 취하는 것은 우상이라고 힐난한 적이 있었다. 서구사회에서는 공개된 공론에서는 의견 충돌이 심하다가도 일단 결론이 나면 승복하는 데 뒷 말이 없다. 국내사회는 공개된 공론에선 아무 말이 없다가 결론이 난데 대해 뒷 말이 많다. 불행히도 대체로 이런 경향이 있다. 국방부가 ‘사고예방 종합대책’을 실시한 이후 군의 병영 생활이 많이 달라지 긴 한 모양인 데 이상하게 달라진 것 같다. 고참이 신병을 ‘○이등병님’이라고 부를 지경인 게 맞다면 이는 ‘홍길동 군대’가 아닌 가 싶다. 오합지졸의 민병처럼 군기 빠진 군대를 일컬어 ‘홍길동 군대’라고 했다. 식사를 마친 식판 닦기야 누구나 신병이든 때가 있었으므로 신참이 돌아가며 하는 게 당연한데도 신참·고참할 것 없이 가위바위보로 정한다고 한다. 심지어는 고참이 총기 손질을 하라고 해도 ‘소대장님 지시가 아니면 안한다’며 거부하는 신병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도 고참이 방관하는 것은 잘 못하다 가는 영창 가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권과 인격을 존중해야 하는 데 이의가 있을 수는 없다. 가혹행위를 추방하는 데, 마다할 이유는 없다. 당연하다. 하지만 군대는 군 특유의 조직을 활성화시켜야 할 고유한 특성이 있다. 군인은 직업군인이든 병역 의무병이든 모두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국가 조직이다. 이러한 군 조직이 여느 사회의 직장보다 상하관계가 느슨해서는 제대로 된 통솔이 어렵다. 한국전쟁 땐 분대장까지 명령 불복종 부하에 대한 즉결처분권이 주어졌다. 지금도 물론 유사시엔 달라질 것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만약에 ‘○이등병님, 돌격 하십시오’해서 전투가 옳게 치러 질 것인 지 의문이다. 다 이러 진 않겠지만 나사 빠진 군대가 민주군대인 것은 아니다. 요즘의 민주군대에서 하기식 땐 어떤 자세를 취하는 지 궁금하다./임양은 주필

문학의 자유

보리스 파르테르나크의 대하 장편소설 ‘닥터 지바고’는 러시아혁명을 배경으로 시인이자 의사인 한 지식인의 운명적 삶을 그렸다. 195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소련 정부의 압력으로 파스테르나크는 수상식에 참석하지 못했고 이 책의 소련내 출간도 금지됐다. 작품 속 주인공들이 혁명의 이념에 어울리지 않는 ‘반동적인’ 인물들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닥터 지바고’는 데이비드 린이 감독하고 오마 샤리프가 주연한 영화로도 유명하다. 철로에 쌓인 눈(雪)을 분수처럼 양쪽으로 뿜으며 달리는 열차, 눈과 얼음의 성(城)안에서 언 손을 입김으로 녹여가며 시(詩)를 쓰는 주인공, ‘내 사랑은 어디에(Somewhere my love)’로 시작되는 감미로운 주제곡은 한없이 마음을 사로 잡는다. 소설로서 수많은 독자를, 영화로서도 세계적인 팬을 갖고 있는 ‘닥터 지바고’가 최근 러시아에서 다시 수난을 당하고 있다는 외신(外信)이 들어왔다. 러시아 연방교육부가 이 소설을 청소년 필독도서 목록에서 제외키로 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결정은 푸틴 정권하에서 싹트고 있는 러시아 민족주의가 과거 공산주의 치하의 ‘그림자’보다는 제정 러시아와 소비에트의 ‘영광’을 재현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파질 이스탄터 등 러시아 저명작가 13명이 공개 항의 서한을 보내고 “푸틴 정권의 관료주의 집단이 역사를 자기들의 입맛대로 왜곡하려 한다. 어린 학생들에게 역사의 비극을 있는 그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집권층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목적에 따라 역사적 진실이 통제되고 재단돼 온 사례를 우리도 짧은 근·현대사 속에서 여러 차례 목격해 왔다. 그러나 소위 ‘역사 바로 세우기’는 권력자들이 늘 빠지기 쉬운 치명적인 ‘자기 함정’이 될 수도 있다. 소설‘닥터 지바고’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지배적이던 당시 문학 풍토에서 보리스 파르테르나크가 제정 러시아로부터 러시아 혁명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격동의 러시아 근·현대사를 ‘피와 살’을 가진 탁월한 문학작품으로 형상해 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학작품이 자유에서 구속돼서는 안된다. /임병호 논설위원

남북교과서 언어차이

분단 반세기를 넘기면서 남북간 언어의 이질화가 매우 심각해졌다. 특히 초·중·고 교과서는 번역없이는 뜻이 통하지 않을 정도다. 한 예를 들어 북한 고등중학교 1학년 (중 1) 국어 교과서 내용 중 “일남이는 고기를 잡느라고 물참봉이 된 바지를 억이 막혀 내려다 보았다. (중략) 일 없어, 난 오늘 물고기를 꼭 잡아야 해. 못 잡으면 꽝포장이가 되거던” 은 남한에서 “일남이는 고기를 잡느라고 물에 흠뻑 젖은 바지를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내려다 보았다. 괜찮아, 난 오늘 물고기를 꼭 잡아야 해. 못 잡으면 허풍쟁이가 되거든”이라는 문장이다. 한국어문교열기자협회와 남북어문교류위원회가 분단 이후 최초로 지난 4월부터 4개월간 북한 초·중·고 교과서 7개 과목 9권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이질화된 언어가 여간 안타까운 게 아니다. 사이시옷·두음법칙이 없고 외래어는 어원대로 쓴다. 예컨대 홰불(횃불), 내물(냇물), 메돼지(멧돼지), 로동자(노동자), 량심(양심), 래일(내일) 등이다. 외래어는 어원대로 주무랑마봉(에베레스트산), 마쟈르(헝가리), 뽈스카(폴란드), 에네르기(에너지) 등 철저하게 원음 주의에 따르고 있다. 더부치(호주머니), 물드레(하늘소), 솔솔이(물뿌리개), 삼촌 어머님(작은 어머님), 값이 녹다(값이 싸다), 칼자리(칼자국), 짜르다(짧다), 피타다(애타다), 내굴(연기), 매게나라에서(나라마다), 농마(녹말) 등 표준어도 상당히 다르다. 하지만 북한은 1949년 한자 폐지·한글전용 실시 이후 지속적으로 말다듬기를 펼쳐와 세평방정리(피타고라스의 정리), 녀성고음(소프라노), 소리표(음표), 집짐승(가축), 산줄기(산맥) 등 언어순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남한과 비교된다. 우리 말과 글은 민족의 얼이며 정신적 고향이다. 우리 민족은 온갖 역사적 수난과 상처 속에서도 말과 글을 지켜 왔다. 그러나 분단 50여년 세월은 남북의 언어를 ‘번역’해야 이해할 지경이 됐다. 표준어와 사투리는 다르다. 남북 교과서 언어통일을 위해 남한의 표준어, 북한의 문화어(표준어)를 연구하는 공동대책기구 설립 문제가 절실해졌다./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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