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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분권은 곧 지방화시대를 동반한다. 지방화를 수반하지 못하는 지방분권은 허울 뿐 내실이 있을 수 없다. 지방정부·지방정치·지방경제·지방사회·지방문화가 다 독자적 정립속에 그 실질적 기능이 입체화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래야 중앙집권의 근대적 국가사회 구조에서 미래지향의 역동적 국가사회 구조로의 탈바꿈이 가능하다. 언론 역시 예외가 아니다. 지방언론의 활성화 또한 지방분권의 전제 요건이다. 지방언론 육성의 화두가 이래서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지방언론이 지역사회의 매스미디어 역할을 제대로 다 하기 위해서는 지방언론의 책임이 수반된다. 지방언론의 육성과 지방언론의 책임은 바로 한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어제 저녁 본사 주관으로 전국지방신문협의회의 올 3차 사장단 모임을 수원 경기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에서 가진 것은 이같은 지방언론의 육성과 책임 양면에서 실로 의미가 깊다. 지역신문발전지원특별법을 비롯, 이밖의 당면사항에 대한 정책적 차원의 대책을 강구하는데 의견을 모은 것은 새로운 변화의 다짐이다. 지난 4·15총선 때 가진 회원사간 공동취재 보도에 대한 평가를 가졌다. 이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자 하는 드높은 도약의 시동이다. 일부 전국지는 아직도 경품과 무가지를 대량 살포하는 등 부당한 방법의 지방지 침해로 불공정 판매행위를 일삼고 있다. 이에 강구한 강력한 대책은 신문시장의 왜곡을 시정키위한 분발이다. 전국지방신문협의회 회원사의 이같은 의지는 앞서 밝힌 지방언론의 육성 및 지방언론의 책임을 다 하기 위한 결의다. 지방분권이 산적한 과제를 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방언론 위상의 정립 또한 산적한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지방언론의 육성은 무엇보다 재정의 건전화가 이뤄져야 하고, 지방언론의 책임은 독자의 욕구를 충족할 만한 양질의 신문제작이 있어야 하는 것은 절대적이다. 변화와 격동의 시대를 헤쳐 이에 부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비상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시대적 소명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경기도 수부, 수원에서 가진 전국지방신문협의회의 모임을 지역사회에 이렇게 보고하는 연유 또한 그같은 시대적 소명을 다하기 위한 다짐인 것이다.
전국 정수장 4곳 중 1곳 꼴로 수인성 질병을 일으키는 ‘지아디아’ 소독능력이 기준치에 못미치는 것으로 드러나 수질관리에 비상이 걸렸다. 지아디아는 현미경으로만 보이는 편모충류의 하나로, 염소소독에 견디는 지구력이 바이러스보다 수십배 강할 뿐 아니라 이 미생물에 오염된 물을 마시면 설사와 복통 등의 증상이 나타날 위험이 커 심각하다. 환경부가 서울대와 함께 지난 2 ~3월 전국 562개 정수장의 정수처리 기준 준비현황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경기도의 경우 기준미달 상태가 6곳, 인천은 3곳으로 나타났다. 기준에 못미친 정수장들은 7월부터 시행되는 정수처리 기준에 맞춰 배수지나 송수관로를 소독하거나 시설을 개선해야 한다. 그러나 시설용량이 하루 5천t 미만인 중·소규모 정수장 43곳은 대부분 예산 뒷받침도 없어 시설개선 자체가 불투명하다. 지난 2001년 하남 등 5개 중·소규모 정수장 또는 거기서 물을 받은 가정 수돗물에서 바이러스가 검출된 이후 마련된 정수처리 기준은 바이러스 제거율 99.99%, 지아디아 제거율 99.9%를 목표로 정했다. 하지만 전국 정수장 중 27%인 146곳이 수인성 질환을 일으키는 지아디아를 없앨 만한 소독 능력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조시됐다. 또 기준 불만족 정수장 중 82%인 119곳이 수돗물 생산능력이 하루 1만t 이하이고 절반 가까운 69곳이 5천t 이하의 중·소규모 정수장이다. 더욱 큰 문제는 기준 위반을 알면서도 개선 계획 없이 손을 놓고 있는 70여 중·소규모 정수장이다. 새 기준을 시행하기에 앞서 2년의 준비기간이 있었는데도 상당수 자치단체장들이 소극적으로 대처한 것은 주민들의 건강을 소홀히 여긴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시청·군청 건물 등은 최신규모로 지으면서 지역 주민들에게 안전한 물을 공급하는 데 예산부족 운운하는 것은 적합지 못하다. 새로 시행되는 정수처리 기준은 소독능력 기준에 미달할 경우 이를 즉시 해당지역 주민에게 공고하여 대책을 세우도록 규정돼 있다. 여름철을 맞아 경기·인천의 정수장들은 맑은 물 생산 시설을 개선하는 가운데 지아디아는 물론 바이러스 완전제거에 주력하기 바란다.
한국소비자 보호원이 전국의 신혼부부들과 혼주 4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평균 결혼비용이 9천만원이었다고 했다. 서울·부산 등 5대 도시에 국한한 조사여서 전국의 평균치로 보기는 어렵겠지만 웬만한 가정이라도 비명이 나올 금액이다. 응답자의 60% 이상이 결혼비용을 몽땅 부모들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통계도 착잡하다. 부모 도움 없이 검소하게 결혼준비를 하는 젊은이들에겐 허탈감을, 자녀의 혼사를 앞둔 부모들에겐 좌절감을 안겨주는 조사결과다. 작년의 조사이니까 지금은 더 많아졌을 것이다. 결혼비용 내역을 보면 사회·경제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난다. 주택자금 부담이 전체의 70%를 차지한다. 예식·피로연·신혼여행비가 급속하게 늘어난 것도 고비용의 원인이다. 혼수도 문제다. 김수현씨가 쓴 TV드라마 ‘혼수’는 부잣집 남자와 가난한 집 여자가 만나 사랑하지만 결국은 혼수문제로 이별하고 만다는 내용이다. 이런 사연은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이다. 현실이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다. 혼수 제대로 못해와 매일 구박 받는 며느리, 혼수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결혼 못한 연인, 또 자녀의 혼수비용을 장만하느라 아파트에서 전세로 이사간 부모의 이야기는 허다하다. 혼수비용을 장만하기 위해 강도짓을 하다 붙잡힌 예비신부도 있었다. 부잣집으로 시집갈 경우 기본적인 혼수에다 시어머니 밍크코트나 명품 핸드백은 기본이라고 한다. 작년 9월 신은경 영화배우와 연예기획사 김정수 대표는 5천평에 달하는 식장에서 하룻 밤 1천500만원 짜리 호텔 속의 호텔방에서 지냈다. 지금 잘 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팬들로부터 부러움보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런 호화결혼식에 비하면 9천만원 정도의 결혼비용은 검소(?)한 편이다. 결혼비용과 혼수에 대한 부담감으로 그렇게 결혼하느니 차라리 혼수비용 받아 창업해서 돈 벌며 혼자 살겠다는 여대생들까지 생겨나고 있다. 시집 안간다는 딸을 칭찬할 수는 없다. 미혼 자녀를 둔 부모들의 가슴만 타고 있다. / 임병호 논설위원
정치권력은 쟁취의 전리품인가, 아니다. 권력 장악은 쟁취의 모진 과정을 거치긴 한다. 하지만 처분이 자유로운 전리품일 수는 없다. 정치권력의 장악은 책임을 수반한다. 영원한 정치권력은 동서고금 그 어디에도 없다. 거머쥔 권력을 놓았을 때가 거머쥘 때 못지않게 중요하다. 권좌에서 내려오는 게 홀가분한 마음은 책임의 고통에서 풀려나는 것이며, 권좌에서 내려오는 게 두려운 마음은 남용의 발목으로부터 붙잡히는 공포다. 이를 모르지 않으면서 남용의 유혹을 좀처럼 뿌리치지 못하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권좌를 생전 누릴 것 같은 착각속에 빠지는 것이 또한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그를 가리켜 세인은 ‘부통령’이라고 했고 ‘소통령’이라고도 했다. 새천년민주당 정권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누구보다 가까운 지근에서 항상 실세의 중심에 섰다. 문화관광부 장관을 하면서 직명과는 거리가 먼 6·15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비밀 특사로 평양에 다녀온 것은 DJ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 가를 말해 준다. 그리고는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기용됐다. 그가 곁에 보이지 않으면 DJ가 불안해 했다는 말이 과히 틀린 게 아니다. 그의 충성심은 실로 대단하였다. 그래서 대북송금에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사법처리에도 후회없는 역사관과 함께 여전히 불변의 충성심을 보였다. 그러한 그가 현대 비자금 150억원을 받은 특가법상의 뇌물수수 혐의로 항소심이 계류중인 법정에서 마침내 눈물을 흘렸다. “생명보다도(소중한) 하나 남은 제 오른쪽 눈을 (제발) 지키게 해주십시오….” 재판장에게 이렇게 20여분간 호소했다고 (신문)보도는 전했다. 녹내장으로 30년 전 실명하여 의안을 한 왼쪽 눈에 이어 근래 오른쪽 눈마저 녹내장이 악화됐다며 장기 입원치료를 위한 구속집행정지를 읍소했다. 영어의 몸으로 과거의 여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수인에 불과하다. 밥 못 먹는 것을 딱하게 여긴 어느 모범수가 사준 빵을 보고 울었다는 나약한 여느 인간에 불과하다. 이제 ‘부통령’도 ‘소통령’도 아닌 병자에 불과한 지난 영화가 그리 먼 세월인 것은 아니다. 겨우 1년 남짓 된다. DJ조차 그의 절규를 들어주는 데 아무 힘이 되지 못하고 방관만 하는 처지가 됐다. 권력이란 원래가 이런 것이다. 권력을 행사함에 있어 흠이 없어도 권좌에서 물러나면 줄 떨어진 두레박이다. 하물며 흠이 있으면 추궁을 받음에 있어 더욱 가혹한 건 마땅하다. 권좌와 수인의 나락은 하늘과 땅 사이지만 그 길은 결코 먼 게 아니다. 멀지 않는데도 자기만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으로 알고 자만을 버리기가 어려운 것이 바로 권력의 잘못된 맛이다. 노무현 정권의 뒤끝은 어떨지가 궁금하다. 하긴, 이미 드러난 것도 있다. 이른바 측근비리는 무척 슬프게 한다. 그들이 텔레비전 화면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조금도 뉘우침이 없이 당당해 보이는 모습은 정말 뻔뻔스럽다는 생각을 갖게 하여 슬프다. 권력을 정권 쟁취의 전리품으로 여겨 그러는 것 같다. 구태의 이런 해묵은 생각으로는 감히 개혁을 말할 수가 없다. 박지원의 법정 눈물이 호가호위의 소치라면 이 정권에서의 호가호위 역시 피눈물을 쏟게 된다. 그의 실명 위기가 사실인 지 엄살인 지는 외부에선 확인이 어렵다. 법은 그의 죄값에 상응하다면 그 어떤 중형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에게 빛을 잃게할 권리는 어느 법에도 없다. 재판을 마치고 병원으로 돌아가는 앰뷸런스 안에서 감정이 복받친 듯 대성통곡했다고 (신문) 보도는 전했다. 이 정권에서도 뒷날 대성통곡하는 불행한 권력이 없기 위해서는 그 통곡의 의미를 자신의 일처럼 되새겨 보아야 한다. 당부하는 이유가 있다. 불행한 정권을 두는 것은 곧 민중의 불행이기 때문인 것이다. /임양은 주필
호스피스라는 말을 사전적으로 풀이하면 순례자, 참배자를 위한 여행자 휴식소, 혹은 말기환자를 위한 병원을 뜻한다. 오늘날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호스피스는 후자를 뜻한다. 프랑스 남쪽과 스페인 사이에 루르드라는 시골마을이 있다. 1858년에 이곳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베르나데트라는 14세의 소녀앞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기적의 샘물을 솟게하여 그 물만 마시면 죽어가는 중병자가 낫는 것이다. 지금도 연간 300여만명의 중병을 앓는 순례자가 끊임없이 다녀가고 있다. 로마 법황도 신중한 의학적인 조사 후 이를 기적이라 말하며, 유럽의 의학계에서도 그 기적을 의학적으로 증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인간은 믿음이나 감정, 인간관계, 가족관계, 도덕같은 정신이나 정서작용이 생리기관 등 육체작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루르드의 임상연구에서 확인하고 기적적 쾌유도 가능할뿐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에게 어떤 정서적인 처방으로 보다 더 편안하게 죽을 수 있다는 생리원칙을 발견해 냈다는 걸 어느 책자를 통해서 들은 바 있었다. 요즈음 사람들은 안락하게 그리고 손쉽게 아기를 낳기 위해 산부인과 병원을 찾는다. 그러나 편안하게 죽어가기 위한 병원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보다 안락하게 죽어가기 위해 생긴 병원이 바로 호스피스로 주로 영국을 중심으로 발달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호스피스 관습이 있었다. 해원(解怨)이라 하여 임종 때 죽어가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자식들이 돌아가면서 손을 잡아주고, 다음 세상에서는 더 좋은 모습으로 환생할 것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제 우리나라 정치도 싸움질만 하는 정치가 아니고 훌륭한 정책으로 서구 유럽과 같이 호스피스 병동이나 민간 시설을 많이 만들어서 환자의 통증을 덜어주고 이들이 안락하고 편안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의사 간호사 사회사업가 영양사 자원봉사자 등을 부단히 개발하여 죽어가는 환자들에게 불안이나 두려움이 없이 편안히 생을 마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은 아직도 먼 나라만의 이야기인지. /김석우.대한적십자사경기지사 사무국장
우리 사회에서의 권위는 위치의 척도를 가늠하는 품격있는 말이면서도 관료적인 인상이 짙어 고압적이고 엄격한 느낌으로 회자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누구에게나 권위적이라고 말하면 기분이 유쾌할 리 없을 것이고, 특히 공직사회에서는 칭찬이 아닌 표현으로 오래전부터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표현을 조금 달리하여 “권위는 살아있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싶다. 권위는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권위는 이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긴요한 수단이며 사회와 조직을 움직이는 중심축인 것이다. 요즈음 이 사회에 권위가 있는가 라고 반문하면 더욱 가슴 답답함을 느끼게 되고, 믿고 따를 만한 권위의 상실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다. 권위는 자기 스스로의 위치를 찾는 것인데,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우선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하고, 실언할 수 있으니 말도 아껴야하며, 행동에서도 본 받을만 하여야 최소한의 권위가 생기는 것이다. 요즘 마음이 공허하고 삶의 가치를 느낄 수 없는 것은 이런 권위를 지켜내지 못한 대가 때문에 우리가 겪고 있는 당연한 고초인 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회현상은 의무는 다하지 않고 권리만을 주장하는 사회로 가는데도 권위는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말을 해도 믿으려 하지 않으니 더욱 답답한 노릇이다. 부모들의 권위는 말 안 듣는 자식들의 행동에서 실감하고, 선생님 말씀이 영이 안 서는 이유는 무엇이고, 정치하는 분들의 말씀은 어느 때부터 인가 풍월이 되어버렸는데도 이사회는 심각한 고민이 없다. 또한 합리성이 결여된 이기적인 민원을 갖고 큰 목소리로 몰려와 아우성 칠 때도 한 없이 작아지는 공권력의 권위도 숱하게 보아왔다. 그래서 사회가 바로서고 정연한 질서가 유지되려면 “권위가 있어야 한다” 고 말하고 싶은 것이고, 다소 개혁적인 용어와는 거리가 있지만 답답한 마음에서 고향의 느낌이 드는 권위를 말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굳이 찾으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역할을 다하면 저절로 권위는 생기는 것이다. 간과해선 안 될 것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권위가 아니라 주변을 충분히 살피고 포용하는 권위가 신뢰할 수 있는 진정한 권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피곤한 몸 이끌고 집이라고 들어가면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 강아지뿐만 아니라 온 가족의 진심어린 환대를 받기위해서라도 우리가 권위를 지켜내야 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정말 믿고 의지 할 수 있는 사람이 아주 많은 사회, 꾸지람을 받아도 기분 좋은 권위가 그리운 요즈음이다. 원래부터 있었던 권위의 회복을 위하여 다하지 못한 역할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기를 권하고 싶다. /이홍균.道지역계획담당사무관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1896~1948)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 근대사회의 여명기에 한 ‘신여성(新女性)’으로 기존의 봉건질서와 인습에 온몸으로 대항하여 불꽃처럼 살다 간 선각자였다. 수원에서 태어난 정월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서 시인·소설가로서 여성의 해방과 권익을 찾아내고자 지금 생각해도 과감하기 그지없는 파격을 서슴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월은 한국의 선각자로 후세에 각인되지 못하고, ‘자유분방한 신여성’으로 잘 못 전해져 왔었다. 그 첫째 이유는 ‘이혼고백서’를 통해 ‘정조라는 것이 왜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것이냐’고 주장하면서 이혼 위자료를 청구한 사실 등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주장을 제기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월은 한국 근대문학사 중에서 계몽주의 문학의 중요한 작가이기도 했다. 최초의 여류소설가로서 ‘경희’라는 작품을 발표했고, ‘노라’같은 여성계몽적 시를 써 봉건사회에서 여성의 권익을 외쳤다. 예술가·독립운동가·진보적인 여권운동가로서의 정월의 업적은 1998년 유동준 회장이 창립한 ‘정월 나혜석기념사업회’의 꾸준한 활동으로 본격적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1999년 4월27일 경기도 문화예술회관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나혜석 탄생 103주년 나혜석 바로 알기 제1회 국제심포지엄’은 사계의 전문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나혜석을 다시 생각한다’ ‘나혜석 미술의 재검토’ ‘나혜석 소설 경희의 재검토’ ‘나혜석의 여성해방론의 특색과 사회적 갈등’ ‘나혜석 가족사와 민족의식’ 등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또 최근에는 ‘제7회 나혜석 바로 알기 심포지엄’을 개최하여 ‘나혜석 섹슈얼리티 담론 연구’ ‘나혜석의 자유에 관한 여성학적 접근’ ‘나혜석의 회화와 페미니즘’ 등을 분석하여 시대의 선각자 정월 나혜석을 다시금 알려 주었다. 각계의 권위자들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정월 나혜석기념사업회의 활동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양성평등의 이념으로 남녀가 함께 하는 동반자적인 관계를 지향하는 시대가 된 것은 정월과 같은 여성 선각자들의 자기 희생과 나혜석기념사업회의 헌신적인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혜석기념사업회의 문화사업에 성원을 보내며 관계 당국의 보다 적극적인 협조가 있기를 기대한다.
제17대 국회가 개원도 하기 전에 정치권에서 대통령 중임제를 비롯한 개헌논의가 무성하다. 총선에서 과반수를 얻어 명실공히 집권당이 된 열린우리당은 당선자 연찬회에서 일부 의원들에 의하여 대통령 4년 중임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였다. 또한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도 개인적 소신을 전제로 대통령 4년 중임제를 언급, 당내 논의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민주노동당은 4년 중임제 뿐만 아니라 대통령 선거 결선제를 이미 당론으로 확정하였다고 하면서 개헌에 적극적 입장을 나타냈다. 헌법은 개정이 불가능한 만고불변의 법규는 아닌 것이기 때문에 개헌논의는 정치권을 비롯하여 누구든지 할 수 있다. 더구나 정치를 에워싼 시대적 상황도 변하고 또한 국민적 욕구도 변화되어 개헌논의 자체를 금기시 하거나 또는 문제가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특히 현행 헌법은 1987년 민중항쟁으로 민주화가 이행되는 과정에서 장기적 관점보다는 단기적 차원에서 소위 3김에 의하여 권력분배의 기회 균등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이해가 상당히 포함된 상황에서 졸속으로 개정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수차례의 선거를 통하여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개헌을 차분하게 논의하는 것은 필요하다. 현재 논의의 초점은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하는 것이다. 또한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의 분리실시를 통합실시함으로써 잦은 선거로 인한 정국불안정 요인을 해소하자는 것이다. 2007년12월 제17대 대선과 2008년 4월 제18대 총선은 시기적으로 보았을 때 위의 두 가지 사항을 해결할 수 있는 최적 기회인 것이다. 따라서 이를 정치발전 차원에서 정치권은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이런 필요성과 상황적 논리에도 불구하고 아직 대통령 임기가 4년이나 남아 있고 더구나 제17대 총선이 실시된 지 불과 2주밖에 안되며 또한 새로운 국회가 개원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개헌을 논의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경제상황이 좋지 않아 서민들은 제2의 IMF 사태를 우려할 정도로 어려움에 처했다. 이런 실정에서 민생문제는 도외시 한 채, 또 정치권이 개헌문제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인 지 자문자답해 보아야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