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지방화시대의 지방정치 과제

역사적 관점에서 한국 정치를 연구한 그레고리 핸더슨은 한국정치는 모든 사회적 자원이 중앙으로 집중되는 ‘소용돌이의 정치’라고 하였다. 이는 과거의 권위주의적 중앙집권체제 하에서 지방수준의 공식적인 정치가 존재하지 않았고, 중앙의 명령과 지시에 입각한 행정만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지방정치의 부재는 지역주민의 의식에도 영향을 미쳐 주민들 역시 지역의 관심사를 논의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의식과 행동이 부족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고 있다. 전지구를 휩쓸고 있는 세계화의 물결과 더불어 지방화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한 국가의 경계 내에서 중앙 정부가 지방에 대해서 행사하고 통제하는 통제권이 약화되고 있다. 지방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발견해 나가는 한편 자율성을 강화하고 있다. 바야흐로 지방화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지방화의 시대에 지방정치가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지방정치는 주민이 그 지방에서 생활해 나가면서 피부로 느끼는 불편과 구체적인 문제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와 이에 기반한 정책대결이 중심이 되는 중앙정치를 답습해서는 안된다. 지방정치에서는 각 지방에서의 일상생활 가운데 부딪치는 교육, 주택, 환경, 복지 등의 문제, 즉 삶의 정치와 관련된 문제들을 세세히 따져보고 해결책을 찾아나가야 한다. 두 번째는 주민의 자발적 참여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지방정치는 중앙정치에 비하여 지리적 기반의 범위가 좁기 때문에 주민들이 참여하는 기회를 만들기가 용이하다. 따라서 옴부즈만제도, 리콜제도, 주민발안제도 등 주민의 참여를 제고하는 방안을 제도화해야 한다. 주민참여에 대한 인식 전환은 지방정치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보하는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제들을 해결함으로써 지방정치는 중앙정부의 통제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의 영역을 확보하는 한편 지역주민의 참여를 통해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방자치의 진정한 의미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신보영.경기도의회 보사환경위원

5월 16일 경기만평, 당구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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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안·발안유적지 발굴 의미

기전문화재연구원이 화성시 태안읍 기안리 및 향남면 발안리에서 발굴, 공개한 백제의 제철공방터와 대규모 취락 유적은 획기적인 사료로 평가된다. 화성 일대가 백제 왕국의 등장과 비밀을 풀어줄 보고(寶庫)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특히 기안리의 제철관 유적 중 화로유적 10기, 도랑유적 12기, 숯가마 1기, 제련 때 사용된 송풍관과 철 찌꺼기 등은 이 지역이 한성 백제 당시 중앙에 인접한 주요 지방세력의 거점으로 보여 관심을 끈다. 대규모 제철공장이 형성된 것은 주변에 그만한 수요와 노동력을 갖추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 발안의 취락지 유적은 초기 백제시대 주변부의 발전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건물바닥을 파고 들어간 수혈식(竪穴式) 평면 형태를 기준으로 할 때 출입구가 튀어나온 철(凸)자형과 사각형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55채의 주거지가 확인된 것은 이례적이다. 기전문화재연구원 발굴단은 옹관묘 3기, 풍남동식무문토기와 타날문단경호, 대형독 등 수백개의 토기만으로도 원삼국시대에서 백제 초기에 이르는 편년(編年)체계를 세울 수 있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화성은 10년전만 해도 백제유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던 곳이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43번 국도를 따라 주거-생산-토성-매장공간 유적 등 백제유적지가 잇따라 발굴되면서 주목을 받아 왔다. 발안 취락유적의 경우 다양한 시기의 유물이 토층별로 나오지 않고 교란된 상태에서 출토돼 형성과 지속시기를 놓고 아전인수식 해석이 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또 취락이 400∼500년 동안 유지됐다면 주거지가 중복돼야 하는데 그런 흔적이 없다는 점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었다. 하지만 기안 유적은 경기 지역에서 발견된 첫 제철 관련 유적이고, 발안 유적은 미사리를 제외하고 가장 큰 백제 취락 유적지라는 점에서 백제 연구에 가속도를 붙여 준다. 앞으로 제철유적이 존재한 시기와 장소가 함유된 정치적 의미를 살펴보면 초기 백제를 역동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화성 기안·발안 유적은 형성 시기인 3·4세기 때의 고분만 확인되면 백제사 연구에 큰 획이 그어질 것으로 판단된다. 이 점만으로도 이번 유적지 발굴의 의미를 높이 평가하면서 경기문화재연구원의 계속적인 노고를 기대한다.

한·미정상회담의 성과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이 어제 워싱턴서 가진 한·미정상회담은 그 성과가 크다. 공동성명에서 밝힌 한·미동맹 50주년의 현대적 의미, 북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원칙의 재확인, 통상협력 등 경제 번영을 위한 공동노력, 완전한 동반자 관계 지향 등 4개 항목에 걸친 진지한 내용은 예상보다 훨씬 전향적이다. 또 공동회견에서 두 나라 정상이 서로 밝힌 상호 신뢰와 우정의 다짐은 그간의 껄끄러운 오해를 불식한 점에서 고무적이다. 앞으로 두 나라가 한반도 및 동북아의 지속적인 평화를 위한 역동적·포괄적 동맹관계 추진에 탄력이 붙는 새로운 계기가 됐다. 한국의 안보와 경제불안에 국내외적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됐던 미2사단 한강 이남 재배치에 새로운 이해를 구한 것 또한 수확이다. ‘한반도 및 동북아시아의 정치·경제·안보상황을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는 쪽으로 다시 가닥이 잡힌 것은 우리측 입장이 상당히 수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두 정상이 북한의 핵 보유를 절대로 용인하지 않은덴 인식을 같이 하면서도 미국측이 거론해온 대북제재의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은 대목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마약과 미사일 수출에 대한 상황에 따른 고강도의 조치로 해안봉쇄와 경제제재에 그칠 뿐 최악의 선제공격 우려는 거의 희석된 것으로 관측된다. 또 노 대통령이 향후의 남북교류 및 경제협력 등을 북 핵문제의 전개상황과 연계해 추진할 것이라고 밝힌 정책변화의 가능성은 미국의 그같은 대북 제재를 최대한 억제하려는 포석으로 해석된다. 경제문제에 한국 경제의 구조개혁과 동북아시아의 무역·금융·투자의 중심지 지향의 노력이 평가되는 등 우리의 경제에 신뢰감이 심어진 것은 앞으로의 외국인 투자 유치에 새로운 활성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대통령은 이번 방미 길에 어느 때보다 많은 경제인들을 대동하고 대통령 또한 자신이 미국의 경제 요로를 직접 찾거나 미국 경제인들을 접견하는 등 폭넓은 경제활동을 펼쳤다. 이번 노 대통령의 방미활동과 정상회담은 한마디로 실용주의 외교로 평가된다. 국내 일부에선 미국서 보인 대통령의 이념성 탈피에 엇갈린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당치 않다. 민생경제와 국익증진 등 실질문제의 내실을 위해서는 외형을 파탈해 보이는 실용주의 외교가 투영됐다고 판단한다.

스승의 날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우러러 볼수록 높아만지네/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스승의 마음은 어버이시다” ‘스승의 날’ 역사는 19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충남 논산시 강경여고(현재 강경고) 청소년적십자 단원들은 5월8일 세계 적십자의 날을 맞아 병상에 있는 스승 진동만 교사와 퇴직 교사들을 위문하며 이 날을 ‘은사의 날’로 정했다. 이후 학생들은 5월8일 ‘은사의 날’마다 스승에게 꽃을 달아주고 기념행사를 갖는 전통을 만들었다. 이 사실이 충남지역에 퍼지면서 청소년적십자사 충남협의회는 1963년 9월21일을 ‘은사의 날’로 정해 도내 모든 단원들에게 이에 동참토록 했다. 이듬해 1964년 전주에서 열린 청소년적십자 중앙학생협의회에서 ‘은사의 날’을 ‘스승의 날’로 부르기로 하고 날짜도 5월26일로 바꾼뒤 ‘스승의 날’ 제정 취지문을 발표했다. 전국 규모의 첫 민간 스승의 날 행사가 열린 것이다. 날짜가 5월15일로 확정된 것은 1965년 부산에서 열린 제15차 청소년적십자 중앙학생협의회에서 였다. 이 협의회는 세종대왕 탄신일(1397년 5월15일)인 5월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하고 전국 초중고 학생회장에게 제2회 스승의 날 기념식을 갖도록 호소문을 보냈다. 정부가 개입을 시작한 것은 1973년부터다. 유신 시절 학생집회 불허 방침에 따른 ‘서정쇄신’으로 ‘스승의 날’ 행사가 폐지됐다. 그러나 1982년 정부가 다시 부활키로 결정, 5월15일을 ‘정부 기념일’에서 ‘스승의 날’로 바꿨다. 요즘에는 스승의 날 선물에 ‘청탁성’이 짙다고 비판하는가 하면 스승의 날을 학년말인 2월로 옮기자는 운동도 벌어지고 있다. “태산같이 무거운 스승의 사랑/떠나면은 잊기 쉬운 스승의 은혜/어디간들 언제인들 잊사오리까/마음을 길러주신 스승의 은혜//바다보다 더 깊은 스승의 사랑/갚을 길은 오직 하나 살아 생전에/가르치신 그 교훈 마음에 새겨/나라 위해 겨레 위해 일하오리다”강소천 작사, 권길상 작곡의 ‘스승의 은혜’다. 오늘은 스승의 날이다. 더도 말고‘스승의 은혜’ 노래 후렴만이라도 불러 보면 생각날 것이다.“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임병호 논설위원

목요칼럼/아리랑

아리랑은 겨레의 가락이다. 중앙아시아의 카자흐 교민 4세(世)인 어린이들도 난생 처음 듣는 아리랑 가락에 어깨춤을 들먹였을 만큼 우리들 심신에 용해된 유전적 가락이다. 아리랑이 노랫말의 앞소리 또는 사잇소리나 후렴으로 드는 아리랑 가락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많은 아리랑 가락은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같은 전통민요 아리랑이 있고 경기아리랑 같은 신민요 아리랑이 있으며 또 아리랑맘보와 같은 가요아리랑 등이 있다. 아리랑 가락은 많지만 하나로 모아지는 맥의 공통점이 있다. 한(恨)과 흥(興)이다. 그리고 그 한은 좌절감이며 흥은 성취욕이다. 이처럼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희망을 익살로 노래한 것이 아리랑 가락이다. 그래서 모든 아리랑 가락은 흥 속에 한이 있고 한 속에 흥이 있다. 언제나 애소(哀訴)와 진취(進取)의 정서를 같이 하면서 그것을 해학으로 간접 표현한 것이 모든 아리랑 가락의 특성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신민요 아리랑의 효시로 꼽히는 경기아리랑의 노랫말이다. 비록 님이 당장은 토라져서 떠나 가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결국 돌아 올 것으로 보는 이유를 발 병으로 빗댄다. 이를 필연적 사실로 확신하는 데엔 충분한 정서적 공감의 이유가 있다. 모든 아리랑 가락에는 이같이 한과 흥이 어울린다. 그것은 겨레의 불행한 과거를 언제나 전화위복으로 새롭게 열어온 강인한 의지이기도 하다. 아리랑의 어원이 무엇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가 되는 알영의 이름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고 밀양의 전설적 낭자인 아랑에서 비롯했다는 설도 있으나 설일 뿐이다. 다만 옛것을 돌아보아 정선아리랑의 기원이 고려시대가 배경인 것으로 미루어 아리랑 가락은 그 이전부터 있어 왔던 것 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또 하나 확실한 건 아리랑 가락은 사회적 신분을 가리지 않고 고루 불려왔다는 사실이다. 사농공상(士農工商) 간의 모든 계층을 초월하여 구전·구승돼 온 것이 아리랑 가락이다. 이 때문에 아리랑 가락은 복합성과 다양성이 있다. 구전·구승돼온 가락에 그 때마다 민중의 새로운 정서가 실린 신사회적 변화의 강한 의지를 아리랑 가락에 담아온 것이다. 조선조말 대원군이 밀어붙인 경복궁 복원공사의 가렴주구에서 나온 ‘경복궁 아리랑타령’이 그러했으며,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이 간곤하게 항거한데서 나온 ‘독립군 아리랑’ 등이 그러한 예로 들 수가 있다. 아리랑이란 말이 언제부터 시작되고 또 그 어의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마는 아리랑처럼 우리들 가슴에 와 닿는 단어가 없다. ‘아리랑’은 노래 가락의 노랫말 중 어조사(語助辭)에 불과하고 또 ‘아리랑 고개’는 어디를 가도 그러한 이름의 고개는 실제로 있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아리랑은 백마디의 말보다 우리의 공감대를 짙게 하는 응집력을 지닌 겨레의 소리다. 아리랑 고개는 그 어디에든 없어도 겨레의 가슴마다 살아 숨쉬는 우리의 맥이다. 조상대대로 이어 우리들 핏속에 꿈틀대며 흐르는 겨레의 가락이기 때문인 것이다. ‘아리랑’ 노래를 불러보고 싶다. 이즈음의 세태가 이같은 심정을 더욱 간절하게 한다. 모두가 제 입장에서 제 좋을대로 안간힘을 다해 다툼을 일삼는 혼돈의 시대다. 말로써는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 시대에 차라리 말일랑은 침묵하고 모두가 ‘아리랑’을 불러보면 어떨까. 가슴에 맺힌 한을 풀고 새로운 희망을 샘솟는 우리의 아리랑 가락을 다 함께 목청 높여 부르고 싶다. /임양은 주필

천자춘추/뚱뚱한 아이들

최근 서울시 교육청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서울시내 초·중·고등학생 가운데 체중이 표준치 보다 20%이상 더 나가는 비만 청소년이 약 10% 라고 한다. 아울러 2001년 국민건강 영양조사에 의하면, 7-12세 아동의 비만율은 4.9-18.4%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실은 통계자료를 보지 않더라도 학교 앞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의 체격을 관심 있게 관찰하거나 동네 목욕탕에서 물장구치며 뛰어 노는 아이들을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일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점차 뚱뚱해져 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1980년대 이후 꾸준히 증가한 국민소득과 신생아출산 감소에 따른 핵가족화 그리고 점점 치열해져 가는 입시 경쟁 등에서 파생된 아이들에 대한 부모들의 편향적인 사랑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여년 전 우리 아이들의 뚱뚱함에 대한 주변 사회의 기본적인 통념은 부유함과 자랑이었다. 이 것은 어려운 시대를 살아오며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어보지 못한 일반 서민들의 아픔이 마음 한구석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 인하여 아직도 많은 부모들이 뚱뚱한 체격의 자녀들을 든든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소아비만은 비만세포의 증식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될 확률이 크며 건강상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또한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소외 받는 경우도 생겨 사회적·심리적 발달과정에도 영향을 미쳐 성인이 된 뒤에도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릴 수 있다. 푸르고 행복한 5월 가정의 달에 부모들이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점차 뚱뚱해져 가는 우리 아이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기 위하여 가족 구성원의 불규칙한 식사와 편식, 폭식, 지나친 패스트푸드 섭취 등의 잘못된 식습관을 고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학교 수업 후에도 여러 가지 과외 학습으로 턱없이 줄어든 신체 활동 시간을 과감하게 늘려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동시에 육성시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 동안의 잘못되었던 자식에 대한 편향적인 사랑에서 벗어 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선우섭.경희대 체육학부 교수

열린글밭/스승의 날에

22년전 스승의 날을 제정할 때와 다르게 그림자도 밟지 않아야할 격높은 위치에서 개혁의 대상이 되어버린 지금, 쓰라린 상처를 가슴에 묻고 묵묵히 자신들의 길을 걷고있는 이들의 은혜를 돌이켜 보아야 할 스승의 날이다. 교문 밖에서 바라보는 곱지 못한 시선과 교문 안에서 발생하는 여러가지 어려움도 자신들을 바라보는 총총한 눈망울에 모두 흘려보내고, 유능한 인재를 키워내기 위해 말없이 교단을 지켜 나가고 있는 일선 교사들.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세상의 인심이지만, 그래도 선생님께는 믿고 따르는 어린 제자들이 있음을 명심하고 올바른 인재 양성에 열과 성의를 다해 주길 기대한다. 스승의 날을 맞아 교사, 학부모가 함께 무엇이 서로를 불편하게 했는지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교사는 그동안 사회의 잘못된 인식이 왜 생겼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만약 잘못된 점이 있었다면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 좀더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학부모 역시 너무 지나치게 내 자녀만을 집착한 나머지 교육 환경을 망치는 역할을 앞장서 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봐야할 것이다. 돈도 없고 권력도 없지만 오직 사명감 하나로 2세 교육과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살아가는 선생님들께 스물 두번째 스승의 날을 맞아 어린이들과 학부모가 물질이 아닌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조용호·경기도교육위원

호주의 변(辯)

선친이 작고하여 호주 상속을 받은 지가 20여년 된다. 적잖은 세월이다. 하지만 호주란 것을 의식해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호주 권한을 행사한 일이라고는 더욱 없다. 호주제가 무슨 천하의 악법인 것처럼 야단 법석이다. 어머니 할머니되는 집안의 어른 여성을 놔두고 어린 아들이나 손자 등 남성이 호주가 되는 것을 성차별의 큰 폐악처럼 떠든다. 심지어 남편이 죽거나 이혼한 뒤에 재혼하면 데리고 간 전 남편의 자녀 성씨마저 재혼남편 성씨 따라 고쳐야 한다고 우긴다. 말이야 아이를 위한다지만 재혼녀 여성을 위하는 소리다. 생모가 시집갈 때마다 성씨를 몇번씩 바꾸는 아이들이 안나온다 할 수 없다. 호주제 대신 일본처럼 가족부를 만들거나 미국처럼 1인1호적제를 만들자고 한다. 그래야 선진국형 가족제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아무 것도 아닌 호주를 반납한다 해서 유감스런 건 조금도 없다. 나이가 많으므로 생각이 고리타분한 것인지 스스로 성찰도 수없이 해보지만 아무래도 한다는 소리들이 이상하다. 만약 아버지 성씨 승계의 민법 강제조항을 폐지하면 제멋대로 성을 만들어 족보도 못만들 지경의 난장판이 되어 성씨의 의미가 없게 된다. 호주제가 폐지되면 전통적 가족제도가 붕괴될 것이 심히 두렵다. 여성이 결혼을 해도 남편 성을 따르지 않고 본연의 성을 그대로 갖는 여권 존중은 세계에서 우리나라와 중국밖에 없다. 일본의 가족부나 미국의 1인1호적이 최상의 것처럼 말하는 이들에게, 일본이나 미국처럼 우리의 여성도 결혼하면 남편 성을 따르는 제도에 찬동할 것인지 묻고 싶다. 성차별은 당연히 없애야 하지만 호주제가 과연 성차별인가엔 깊은 생각이 요구된다. 유행병적 개혁은 개악일 뿐 개혁이 아니다. 전통적 가족관념이 왜 개혁의 대상이 돼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들도 자식이고 딸도 자식이다. 인간다움에 성별을 가릴 이유는 없다. 남성이나 여성이란 입장보단 인간다움에 초점을 맞추는 생각이 요구된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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