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일본 복지당의 기세는 대단했다. 고속도로 통행료를 무료화하겠다고 했고, 유류세를 인하하겠다고 했다. 중학교 이하 모든 학생들에게 1인당 월 2만6천엔(약 32만원)씩의 아동수당을 주겠다고 했다. 최저연금제 공약은 개중 압권이었다. 모든 은퇴자에게 1인당 월 최저 7만엔(85만원)의 연금을 주겠다고 했다. 무차별 복지 공약 앞에 적수가 없었다. 유권자들은 복지당에 230석을 줘 1당 자리를 부여했다. 복지당이 거덜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고속도로 통행료 무료화는 일찌감치 포기됐다. 유류세 인하도 실현되지 못했다. 아동 수당도 시행되지 못했다. 급기야 복지당의 핵심 공약이었던 최저연금제마저 지난 6월 포기됐다. 대신 세율을 5%에서 10%로 높이는 정반대의 정책이 시작됐다. 그리고 어제 치러진 총선에서 복지당은 유권자들의 싸늘한 눈총을 받으며 과거 소수당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모레 치러질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도 복지 선거다. 박근혜 후보는 135조원짜리 복지를 내놨다. 4대 중증 환자 100% 건강보험 보장, 65세 이상 임플란트 건강 보험 적용, 국ㆍ공립 어린이집 확충, 월 20만원 노인 연금 도입, 목돈 안 드는 전세제도. 문재인 후보의 약속도 192조원짜리다. 환자 본인 부담 연간 100만원 상한제, 임신ㆍ출산에 필수적인 의료비 전액 지원, 국ㆍ공립 어린이집 시설 기준 확충, 기초 노령 연금 2017년까지 2배 인상, 장기 공공임대주택 확대. 누가 되든 복지 천국이다. 애 낳을 때 돈 주고, 유치원ㆍ학교 다닐 때 돈 주고, 실업자 돼도 돈 주고, 은퇴해도 돈 주고, 몸 아파도 돈 준다고 한다. 없던 항목은 새로 만들고, 있던 항목은 두 배로 올리고, 일부만 주던 항목은 모두에게 준다고 한다. 바야흐로 살 맛 나는 대한민국이다. 이쯤 되면 오는 19일(대통령 선거)은 신바람 나는 선택이어야 하고, 2월 25일(대통령 취임)은 신바람 나는 취임식이어야 한다. 그런데 공약을 듣던 주부 A에게서 비웃음이 나온다. 저게 되겠어? 돈은 어디서 만들 거냐고. 그 설명을 해야지. 코미디 같은 얘기다. 저마다 내세우는 재정 개혁? 2013년은 쥐어짜서 얼기설기 맞춘다고 치자. 쥐어짤 항목이 없어진 2014년은 어쩔 건가. 2015ㆍ2016ㆍ2017년은 또 어쩔 건가. 더구나 두 후보의 복지 약속은 점진적 확대다. 쏟아 부을 예산이 해마다 커지게 돼 있다. 그들이 말하는 재정 개혁으로는 2015년 이후가 설명되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벌써부터 정책의 미스매치(부조화)라며 외면하고 있다. 이마저 검증 기회를 빼앗았다. 박 후보는 11일에야 재원조달 방법을 공개했다. 문 후보도 9일에서야 발표했다. 재외국민, 부재자 투표가 시작되던 시점이다. 이어 국정원이 어떻고, 신천지가 어떻고 하는 네거티브전이 시작됐다. 선거의 막판은 매번 이랬다. 이걸 몰랐을 선거꾼들이 아니다. 바로 그 타이밍에 복지 발표를 끼워 넣은 것이다. 밑천 드러날 복지 재원 검증은 안 받겠다는 의도다. 이제 선거는 그들의 작전대로 검증 안 된 복지공약에 의해 마무리돼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 누가 되든 앞날은 같다. 이념과 세대갈등이 밀물처럼 빠져나간 그 자리에 복지공약의 기억만 또렷이 남을 것이다. 그러면서 출산비 독촉, 유치원비 독촉, 교육비 독촉, 실업수당 독촉, 노인연금 독촉이 시작될 것이다. 약속대로 잘 되면 정말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아니 없다. 경제력의 한계가 곧 복지의 한계라는 동서고금의 상식을 깼던 복지공약은 늘 그렇게 끝났다. 어제, 일본의 복지당이 손을 들었다. 세계 경제 3위 대국의 기브 업(포기)이다. 한국에서는 이제 막 그런 복지당이 등장하려고 한다. 세계 경제 15위의 한국이 어떻게 버틸 것인가. 슬프지만 상상되는 장면이 있다. 2017년 어느 날-혹은 이보다 빨라진 어느 날-, 박근혜ㆍ문재인 대통령이 연설을 한다. 국민 여러분, 날로 침체하는 국내 경기와 급변하는 국제정세 때문에 저의 복지 공약을 지키지 못하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슈&토크 참여하기 = 5년 뒤, 대한민국 대통령의 복지사과문] 김종구 논설실장
오피니언
김종구 논설실장
2012-12-16 2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