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神의 창조물

사람과 침팬지(유인원과의 원숭이)의 유전자는 97% 같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람과 침팬지 사이에서 2세 출현이 가능할까? 침팬지는 유전자도 비슷하고 영장류에 속하기 때문에 이런 교잡에 의해 혹시 사람으로 진화된 것이 아닌가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의)하느님이 이런 교잡이 가능하도록 창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2세의 탄생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결론이다. 그 이유를 생물학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선 수정하기 위해 정자는 난자에 접근하는데 이때 효소단백질이 분비돼 난자를 보호하고 있는 막에 구멍을 뚫어 준다. 정자가 난자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다. 그런데 사람의 정자는 침팬지의 난자에 접근조차 할 수 없다. 효소단백질이 분비돼 난자막에 구멍을 뚫어주기는 커녕 오히려 접근하는 난자를 박살내버리기 때문이다. 침팬지 자궁에서 분비되는 효소단백질은 사람의 정자에는 독가스 이상의 치명적인 물질이나 다름 없다. 침팬지의 난자는 침팬지의 정자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처음부터 설계돼 있음을 방증하는 부분이다. 바로 DNA 정보에 의해 그렇게 작동하는 것이다. 수정이 불가능한 더 근본적인 이유는 염색체 수가 다르다는 데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의 정자가 침팬지의 난자막을 뚫고 들어갔다고 가정해 볼 때, 사람의 경우 정자와 난자의 염색체가 23개이기 때문에 수정 후에는 짝을 형성해 23쌍을 이룬다. 하지만 침팬지의 난자 염색체는 24개이기 때문에 23개인 사람의 정자 염색체와는 도저히 짝을 이룰 수가 없다. 수정이 불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사람은 분류학적으로 호모(속·屬) 사피엔스(종·種)에 속한다. 침팬지와는 과(科)에서부터 다르다. 침팬지가 사람으로 진화되기 위해서는 원숭이의 DNA에서 돌연변이가 일어나야 한다. 아무리 과학적인 학습 프로그램을 적용시켜 능력을 극대화시킨다해도 침팬지는 침팬지일 뿐이다. 원숭이의 학습효과는 당대에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DNA에 돌연변이가 일어나지 않고서는 사람으로 진화할 수 없다. 성서(聖書·창세기 1:25)에 이르기를 “하느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라고 하였다. 과학이 뒷받침되지 않는 막연한 생각은 창세기의 창조질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임병호 논설위원

APEC 경비 강화

2005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정상회의가 18~19일 부산에서 열린다. 올해 APEC 정상회의는 세계적으로나 시기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경제적으로 이 회의 직후인 12월 홍콩에서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려 도하개발아젠다(DDA)를 다룰 예정이다. 정치적으로는 개발 격차문제가 세계의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올해 APEC 정상회의의 주제가 ‘하나의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로 정해진 것도 이러한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 이번 정상회의에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를 포함한 21개 회원국 정상들이 참석하고 관련 공무원·기업인·언론인 등 6천여 명이 참석하는 등 수년 간 국내에서 개최된 행사 가운데 최대 행사다. 단연 안전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행사 지역인 부산보다는 서울이 더 취약하다. 부산은 대규모 경비인력이 집중 투입돼 테러가 발생할 가능성이 낮지만 서울엔 청와대, 국회, 각국 대사관 등 주요 관공서와 대형 건물, 지하철 역사 등이 위험에 노출된 상태다. 수도라는 특성때문에 시민을 대상으로 한 테러도 우려된다. 지난 7월7일 G8(선진 7개국 + 러시아)정상회의 때 회의장소인 스코틀랜드 글렌이글스시가 아닌 런던에서 발생한 테러가 상기된다. 당시 테러리스트들은 정상회의지역으로 경찰력이 대거 파견된 틈을 이용해 보안이 상대적으로 허술했던 런던 지하철과 버스를 노려 수백명의 사상자를 냈다. 특히 우리나라는 미국, 영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이라크에 파견하여 알카에다 등 국제 테러조직의 목표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국경 봉쇄가 잘돼 있고 화약류의 대량 반출입이 어려워 테러 가능성은 낮다. 문제는 APEC을 반대하는 시민단체들이 부산에서는 물론 서울에서도 반세계화 시위 등을 계획하고 있는 점이다. 특히 18일과 19일 정상회의기간 18일과 19일 부산 해운대 일원에서 10만여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반대집회가 열릴 것으로 알려졌다. 테러를 대비하여 공·항만 검색 절차를 강화하고 육·해·공군과의 체계적인 공조가 이뤄져야 한다. 다중 이용시설의 폭탄테러를 막으려면 국민의 철저한 신고정신도 필요하다. 모두에게 방심은 금물이다. /임병호 논설위원

두 전직 대통령

역대 대통령 가운데 공산주의 전력시비로 구설수에 올랐던 대통령이 두 분 있다. 박정희,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여순반란사건 연루 혐의로 진급이 늦어지기도 했다. 1948년 10월19일 여수에 주둔했던 국군 제14연대가 공산주의를 추종한 장교들의 주도로 여수와 순천에서 무장 폭동을 일으켰던 것이 여순반란사건이다. 반란은 1주일만에 다른 부대의 국군과 경찰에 의해 진압되면서 많은 사상자를 냈다. 당시 박정희는 위관급 장교로 육군본부에 근무했지만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아 수차 조사를 받는 등 꽤나 고생했다. 두번 째는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 때다. 박정희와 맞붙은 윤보선이 이른바 ‘사상논쟁’을 제기했다. 그 무렵 거물 남파 간첩인 황태영이 박정희 형의 친구가 되는 연줄로 박정희와 접선했다는 주장이었다. 이 ‘사상논쟁’은 5대 대통령 선거의 최대 이슈로 떠올라 박정희는 유세마다 윤보선의 주장을 반박하느라고 햇볕에 까맣게 탔을만큼 애먹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보도연맹’의 전력이 멍에가 되어 고생했던 분이다. 해방직후 지방에서 좌익 성향을 갖다가 전향한 사람들로 구성된 관제단체가 이 단체다. 전 국회의원 이철승씨 같은 사람은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기 직전까지도 공산주의자라고 공격했다. 그렇지만 박정희나 김대중이나 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 왼쪽으로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정체성을 지켰다. 그러고 보니 최대 정적이었던 두 분이 다 공산주의자로 의심받았던 공통점이 있는 것은 참으로 묘한 기연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엊그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문병을 맞는 자리에서 얘기 끝에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공산화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의 독재는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도 그의 경제개발은 인정하는 분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후보시절부터 강한 좌파 색채를 드러냈을 뿐 본인의 공산주의 전력은 없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과 비하면 판이하다.박정희는 완전히 부정의 대상이다. 독재자로만 본다. 무엇보다 맥아더 동상 철거의 시비를 두고 “역사로 보면 된다”는 등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처럼 딱부러진 말을 못하는 속내가 뭣인 지 새삼 궁금하다. /임양은 주필

“접착갈비도 갈비다”

자유업종의 자영업을 경영할 수 있는 나이를 몇 살까지로 보느냐 할 때 사람마다 관점이 다를 것이다. 예를 들면 이발사의 정년 같은 걸 들 수가 있다. 교통사고의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과실상계, 즉 가해자 책임이 몇 %며 피해자 책임이 몇 %냐는 것을 따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시비 다툼이 법정으로 번지면 판사 마음이다. 법률에 무슨 업종의 정년은 몇 살까지고 또 교통사고가 어떻게 나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과실상계가 얼마씩이라는 규정을 일일이 해놓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판사가 알아서 판결하는 것이 기속력을 갖는 것은 국가가 그같은 권능을 부여한 지위에 있기 때문이다. 판사가 법리·사실·정황면을 살펴 판결을 내리는데 이같은 심리상 임의적 심증 형성과정이 자유심증주의다. 여기엔 판사의 경험·성격·인생관 등이 작용된다. 이래서 판사를 잘 만나야 한다고도 한다. 갈빗살이 없는 뼈에 다른 살코기를 붙이면 갈비로 볼 수 없지만 살점이 붙어있는 갈비뼈에 다른 부위의 살코기를 붙인 것은 갈비라는 대법원 판결이 있었다. 계란 흰자 성분인 식용 접착제로 살점이 있는 갈비뼈에 다른 부위의 살코기를 붙인 이른바 ‘접착갈비’ 업자가 축산물가공처리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상고심에서 이같이 확정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 ‘접착갈비’는 야바위 갈비다. 그런 갈비도 갈비로 본다는 것이 소비심리와 맞는 것인 지 잘 알 수가 없다. 소비자는 100% 갈빗살로 알고 갈비를 주문하는 것이 통례다. 아마 원래의 갈빗살 고기가 절반가량이 넘으면 다른 살코기를 붙여도 갈비로 볼 수 있다고 한 것 같은데, 그래도 그렇지 그게 제대로 된 갈비일 수는 없다. 그런 판결을 내린 분들은 ‘접착갈비’도 갈비로 알고 맛있게 드실 진 몰라도 소비자들 입맛은 어떨는 지 궁금하다. 소비자들의 입맛이 어떻든 판례로서의 기속력을 갖는 것은 그 역시 그같은 권능의 지위에 있는 판결이기 때문이다. 갈비도 이젠 갈빗살이 몇 %냐고 물어가며 먹어야 할 것 같다./임양은 주필

10원짜리 동전

고대 로마시대의 유통 화폐는 금화와 은화였다. 당시 금화·은화 제조방법은 액면과와 똑 같은 무게의 금과 은을 섞었다. 액면가가 1만원인 금화에는 1만원어치 금을, 100원어치 은화에는 100원어치 은을 넣었다. 그러나 로마가 쇠퇴의 길로 접아들면서 1만원짜리 금화에 1만원보다 적은 양의 금이 섞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당연히 돈에 대해 불신을 갖게 되고 돈을 통한 상거래를 거부하여 경제가 한때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우리나라 주화 중 10원짜리 동전을 1개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액면가의 3배가 넘는다. 비싼 이유는 10원짜리 동전을 구성하는 구리와 아연 가격의 폭등이다. 금화와 은화가 각각 금과 은으로 만들어지 듯 10원짜리는 65% 구리와 35% 아연 합금으로 제작된다. 더구나 최근 구리 값이 역대 최고치 수준으로 올랐다. 9월 말 현재 t당 3천974 달러를 기록했다. 2003년 말의 t당 2천318 달러보다 71.4%나 급등한 것이다. 구리와 아연 가격 폭등으로 10원짜리 동전의 원재료 가격만 현재 15원에 육박한다. 여기에 원재료를 가공한 제작 비용과 유통 비용 등을 합치면 총비용이 30원을 넘는다. 올 상반기 10원짜리 동전을 제조하는 데 들어간 비용이 60억 4천800만원으로 지난해 한해 동안의 제조비용인 51억 1천700만원을 이미 9억3천100만원 초과했다. 연도별 제조량도 2002년 1억개, 2003년 1억2천800만개, 2004년 1억3천500만개로 늘었다. 한국은행이 올 상반기 제조량을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지난해 연간 제조량을 이미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10원짜리 동전 제조 비용이 증가한 것은 10원 단위의 결제 관행 탓도 있다. 또 10원짜리 동전 사용을 꺼리거나 소중히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850원 하는 시내버스 승차 요금을 낼 때 10원짜리 동전을 섞어 돈통에 넣으면 노골적으로 싫어하거나 핀잔을 주는 운전사들을 여러 명 봤다. 물론 10원짜리 동전을 낸 승객도 “10원짜리 동전은 돈이 아니냐?”고 맞고함을 지른다. 결제를 50원 또는 100원 단위로 하는 관행을 정착시키면서 집이나 사무실 서랍에 있는 10원짜리 동전들을 모두 쓰면 훨씬 절감될 게 분명하다. 1원짜리와 5원짜리 동전을 본 지도 꽤 오래됐다. /임병호 논설위원

저어새

따오기과(科)의 저어새는 천연기념물 205호로 4월을 전후해 한반도로 날아와 5~7월 평균 3개의 알을 낳은 뒤 찬바람이 불면 일본, 대만이나 인도차이나 반도쪽으로 날아간다. 멸종위기에 처한 저어새를 보호하기 위해 북한과학원 국가자연보호센터 박우일 소장이 ‘저어새 1천마리 프로젝트 계획’을 남한측에 제안한 것은 1996년 5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저어새 보전을 위한 제1차 국제워크숍 때 였다. 박 소장은 남측 자연환경과학정보연구센터 한상훈 당시 소장(국립공원관리공단 반달곰 복원팀장)에게 저어새의 분포현황을 조사하기 위한 설문조사와 이동경로 추적 등 5개항을 향후 10년 간 추진하자고 제안했고 양측은 즉석에서 합의했다. 한 전 소장은 이듬해부터 저어새 관련 소책자 3천부를 제작, 저어새의 위기를 알리는 한편 1998년에는 설문지 5천부를 만들어 기본조사를 실시했다. 1999년에는 유도의 저어새 번식지를 생태조사했고, 2000년 7월 저어새 번식지인 인천 강화도 남부지역과 석모도 등 강화갯벌 1억3천600만평이 천연기념물 제419호로 지정되는 성과를 얻어냈다. 북측 박 소장도 1997년 서해안 저어새 번식지 조사를 통해 그동안 2~3곳이라고 추정된 북한 내 저어새 서식지를 10군데 이상으로 늘릴 수 있었다. 남북한 학자들의 공동노력으로 1996년 450여마리에 불과했던 저어새가 1999년 570여 마리, 2001년 870여 마리, 2002년 960여 마리로 늘어났고, 올해 1천475마리가 한반도를 찾아온 것으로 확인됐다. 새 한 종류를 지키기 위한 조그마한 약속이 지켜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10년이 걸렸고 이를 계기로 남북한이 ‘생태통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매우 보람있는 결실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저어새의 서식지는 평북 철산 앞바다의 중도와 솔밭섬, 곽산 앞바다의 대감도, 소감도, 덕도 그리고 남북한 접경지역인 각희도, 석도, 비도, 역도(요도), 유도, 볼음도(수리봉), 인천 강화남단갯벌, 영종도 남단갯벌, 송도갯벌, 시화호, 천수만, 진도 군내간척지, 제주도 성산포·하도리(월동지)등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한반도가 저어새의 주 번식지임에도 우리 정부의 관심은 ’제로’에 가깝고, 철새들이 조류독감 공포 때문에 옛날처럼 환영을 못 받고 있는 현실이 문제점이다. / 임병호 논설위원

잡지 창간호

지금까지 알려지기로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최초의 잡지는 1892년 1월 영국인 선교사 올링거 부부에 의해 창간된 ‘코리언 리포지터리’다. 이어 외국인들의 선교사업을 기반으로 한 영문잡지들이 계속 간행됐다. 1900년에 ‘트렌섹션 오브 더 코리아 브렌치 오브 더 아시아틱 소사이어티’가 발간됐으며 1901년엔 ‘코리아 리브’가 1904년에 ‘코리아 미션필드’가 뒤를 이었다. 이러한 영문잡지의 창간은 우리나라의 개화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의 잡지는 일본유학생, 단체, 학회 등이 주축이돼 발간했는데 개화·계몽이 목적이었다. 1905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수학잡지 ‘수리학잡지’가, 1906년 11월 최초의 아동지 ‘소년한반도’, 같은해 순한글체인 ‘가뎡잡지’, 1908년 11월 ‘소년’이 창간되면서 잡지문화형성의 기폭제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광복 이후 작금에 이르기까지의 잡지들은 시대의 거울이었다. 문화의 전달·보호 및 창조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독자들에게 지식과 정보를 제공, 인류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매스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잡지의 창간호는 당시 사회상을 가장 절실하게 대변하는 횃불과 같았다. 창간호가 배태(胚胎)된 사회적·역사적·사상적 맥락에서 볼 때 더더욱 그렇다. 잡지 창간호를 수집하는 이유가 바로 그 역사성을 보전하기 위해서다. 지난 8일부터 14일까지 수원시립미술전시관에서 ‘해방 60년·잡지 110년 예술·문화를 담는 그릇 - 잡지창간호 김훈동 소장전’을 열고 있는 김훈동 수원예총 회장(시인·수필가)이 잡지 창간호에 갖는 애착심은 더욱 각별하다. 1963년부터 수집을 시작하여 잡지 창간호를 8천여 점이나 소장하고 있는 김 회장의 집 3개의 큰 방엔 책으로 꽉차 있어 앉을 자리도 없다. 지금은 결혼들을 했지만 아들만 3형제를 둔 김 회장은 아들들은 한 방을 쓰게 하고 크게 꾸민 방 세개를 잡지 창간호로 채웠다. 책 때문에 이사 갈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이번 소장전엔 예술·문화 관련 창간호만 1천400여 점이 전시돼 관람객들을 놀라게 하는데 지금도 창간호를 찾아 동분서주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창간호 갖고 계십니까”하고 묻는 등 열정이 대단하다. 농민신문 편집국장·농협경기지역본부장 등을 역임한 김 회장의 꿈 ‘잡지박물관’ 설립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 임병호 논설위원

‘素描’ 2題

◇ 퇴짜맞은 지원 요청 국어대사전은 허풍을 ‘실상보다 지나치게 과장하여 믿음성이 적은 언동’이라고 풀이해 놨다. 허풍선이는 허풍을 상습적으로 떠는 사람을 말한다. 일상의 생활에서 허풍선이는 신뢰를 받지 못한다. 정치 지도자쯤 되면 더 말 할 것이 없다. 국방부가 미국에 탄약 등 전시물자지원협약을 요청했다가 거절 당한 사실이 있다. “당신네들이 알아서 해결하라…”며 퇴짜를 맞은 것이다. 걸핏하면 ‘자주국방’이다, ‘전시 작전권 환수’다 하고 큰 소릴 쳐놓으니, 그럼 그렇게 해보라는 감정적 보복임이 분명하다. 말이야 얼마나 좋은 말인가 만은 이부자릴 보고 발 뻗으라고 했다. 일본이 우리보다 못나서 미국을 이용하는 게 아니다. 수조, 수십조원 대의 국민 혈세를 국방비로 들이기보단 미국을 이용하는 것이 국정의 효율이다. 자주국방은 접근해야 할 과제다. 해야 하지만 되도록이면 조용히 내실을 기해 점진적으로 해야 신뢰가 선다. 허풍을 떨어 소리만 요란해서는 되레 국방을 해쳐 재앙을 불러들이기 십상이다. ◇ 사회주의 혁명 포기 10월은 볼셰비키에겐 위대한 달이다. 10월6일은 러시아 혁명 88주년이 되는 날이다. 1991년 소련 붕괴이전의 이날은 ‘혁명의 아버지’ 레닌을 기리는 행사가 레닌 묘 앞의 붉은 광장에서 대대적으로 열렸다. 지금은 아니다. 외신은 “참배객보다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았다”고 혁명일의 주변 모습을 전했다. 추모의 대상에서 구경거리로 전락했다. 푸틴 정부 안에서도 “미라는 땅에 묻자”며 유리관 안에 있는 레닌 시신의 이장 주장이 나오고 있다. 러시아 공산당은 전당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을 버리고 부르주아와의 전략적 연대를 모색하는 강령을 채택했다. 공산당 하원의석은 450석 중 47석에 머물고 지난해 공산당 대선후보는 13.7%의 득표율에 그쳤다. 이른바 ‘우리식 사회주의’를 내건 북녘은 노동당 규약에 남반부 해방으로 표현한 혁명과업 완수의 공격적 규정을 아직도 두고 있다. 이런 가운데 남쪽의 방어적 국가보안법을 가리켜 이 정권은 “박물관에 보낼 시대적 유물”이라며 폐기를 못해 안달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다./임양은 주필

정동영 좌초?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잘 나가다가 제동이 걸렸다. 통일부 장관이 되고나서 방북을 애원하다시피 하더니 아닌게 아니라 평양에 가서 칙사대접을 받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극적으로 만났다. 김 위원장이 정 장관에게 귀엣말까지 했다. 이런 파격적 모습이 김 위원장의 쇼였는지, 밀담이었는 진 몰라도 정 장관의 입장에서는 기세가 올랐다. 통일부는 기고만장 했다. 국정원의 방북 부적정 의견을 무시하고 북의 ‘아리랑 공연’을 관람시키기 위해 많은 사람을 대거 평양에 보냈다. 예산처가 내년 예산안에서 대폭 삭감한 대북 지원금을 그러면 나라빚인 채권을 발행해서라도 대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이런 저런 대북 퍼주기를 통일비용으로 쳤지만 변양균 예산처 장관의 설명은 다르다. “독일은 통일비용으로 매년 국내총생산(GDF)의 4~5%가 든다”면서 “한국이 이런 수준으로 통일비용을 지출한다면 매년 40조 원이 들어 국가재정이 거덜난다”고 말했다. 정 장관은 ‘남북협력공사’란 것을 만들자고 제의했으나 노무현 대통령이 유보 형식으로 만류했다. 뭘 하자는 ‘남북협력공사’인 지는 몰라도 그런 공사를 만든다고 남북의 협력관계가 잘 되는 것만은 아니다. 이 또한 장관 재임 중 ‘한건주의’의 발상이다. 대통령이 정 장관의 제의를 거부한 것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더 검토해보자는 것”이지만 사실상 예산부처의 손을 들어준 것이나 다름이 없다. 또 예산 문제도 예산이지만 정동영의 독주를 견제하는 것으로 보는 관측이 유력하다. 북핵 문제의 현안과는 전혀 무관하게 대북 관계를 유지해 온 것이 그 간의 통일부 정책이다. 대북관계의 독주를 견제하는 의미도 있지만 정치적 견제의 뜻도 없지 않아 보인다. 여권내 차기 대권 주자의 한 사람인 그만이 너무 앞서가는 건 유익하지 않은 걸로 여겨진 것 같다. 정동영 통일이 과속한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임양은 주필

경주시의 방폐장 유치

경상북도 경주는 신라 천년의 고도(古都)다. 그렇지만 흔적은 없다. 천년 사직의 수도다운 면모는 시가지 어디를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반월성 성터, 안압지, 첨성대 등 유적지와 문화재만이 신라의 옛 영광을 말해준다. 삼국사기는 ‘경주엔 수만호(戶)의 인가가 있어 숯불을 태워 연기가 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옛 신라의 수도 경주 시가지는 그만큼 깨끗하고 화려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그 시가지는 현재의 경주 시가지가 아니다. 현 시가지에서 불국사 가는 길로 가다보면 오른쪽에 금오산이 있다. 들판에 우뚝 솟은 이 야산은 산 자체가 거대한 사찰이라 할 만큼 부처가 많은 곳이다. 불국사 가는 길에서 멀리 보이는 금오산 중간의 광활한 논이 옛 경주의 시가지였다. 이에 비하면 수원은 비록 200년이긴 하지만 옛 도시의 흔적이 뚜렷하다. 우선 화성(華城)의 성곽 등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됐다. 장안문·팔달문·창룡문·화서문 등 사대문안의 옛 모습이 드물긴 해도 확연하다. 여기에 ‘화성행궁’이 복원되고 옛 시가지 모습의 재현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신라 천년 사직의 고도 경주가 새로운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고도에서 과학기술도시와 함께’라는 새로운 방향이 제시된 것은 방폐장 유치가 확정되고 나서다. 지난번 주민투표에서 70.8%의 투표율을 보인 가운데 찬성이 89.5%에 이른 압도적인 지지율로 세 곳의 경합지역을 따돌리고 방폐장 유치에 성공했다. 이로써 특별지원금 3천억원을 비롯한 갖가지 정부의 지원이 있게 됐다. 한국원자력 본사도 이전된다. 고용인력이 1만명 가량 창출되고 매출액이 5조5천억원이나 신장된다. 방폐장은 옹진군 굴업도에 유치됐다가 활성단층이 발견되어 취소되고, 전라북도 부안에서는 일부 주민들의 반대시위로 유혈 사태를 빚기도 했다. 경주의 방폐장 유치는 19년만의 일이다. 방폐장 사업이 더이상 표류하지 않고 제대로 잘 되기를 기대한다./임양은 주필

공소시효

미국은 살인죄의 경우 연방법에서 ‘공소시효’를 두지 않는다고 한다. 일본은 지난해 공소시효가 만료된 살인범들이 잇따라 자수해 논란이 일자 공소시효를 15년에서 25년으로 늘렸다. 독일의 살인죄 공소시효는 30년이다. 특히 미국과 독일은 미성년자 성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정지하고 있다. 어린이 성폭력은 성인이 돼서야 피해를 깨닫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감안한 조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는 15년, 무기징역은 10년, 장기 10년 이상의 범죄는 7년이다. 외국에 비하면 공소시효가 너무 짧다. 그래서 덕(?) 보는 사람들이 많다. 1986년부터 1991년까지 10명이 살해된 ‘화성연쇄살인’ 9차 사건의 공소시효가 11월 14일 끝난다. 10일 후 범인이 나타나 “내가 진범이다”라고 떠들어도 잡아 넣을 수 없다. ‘개구리 소년’ 실종·사망사건 공소시효도 5개월이 채 남지 않았다. 실종 11년 만인 2002년 유골을 발굴해 타살로 잠정결정이 났으나 수사는 사실상 중단됐다. 김대중 정부 시절, 불법감청을 독려·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는 임동원·신건 전 국가정보원장이 구속될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김영삼(YS) 정부 시절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지낸 김덕·권영해씨는 면죄부를 받을 전망이다. 공소시효(5년)가 다 지나 처벌을 피하기 때문이다. 안기부 예산을 여당(민자당)의 선거자금에 전용한 의혹을 다룬 이른바 ‘안풍(安風) 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지난 달 28일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결로 “1천200억원이라는 거액은 사실상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라는 항간의 의혹이 사법적 절차에 의해 사실로 확인됐다. YS가 1992년 대선 때 기업 등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거뒀다가 1995 ~ 1996년 선거에 사용한 것이라면 법률적으로 정치자금법 위반죄가 적용될 수 있지만 이미 공소시효(3년)가 지나 사법처리는 물론 진상규명도 어렵다. YS가 해명·사과해야 하는데 입을 꽉 다물고 있어 결국 안풍사건은 흐지부지 막을 내리는 셈이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이 얼마 전 기자단과의 산행 후 “요새 시효제도라는 게 이렇게 부당한 것인지 몰랐다”며 공소시효의 허점을 지적하고 “(당에 쓰라고 1천억 원을 선뜻 내놓은)그 양반(YS) 참 통큰 사람”이라고 말했다. 욕을 한 것인 지, 추켜세운 건 지 헷갈린다. / 임병호 논설위원

어른들 탓

‘욕하는 아이들’의 세상이 된 느낌이다. 아이들 대다수가 그냥 말하는 법이 없다. 호칭과 부사, 끝말은 모두 욕이다. 추워도 “×발 졸라 춥고”, 좋아도 “존니 좋다”다. 친구는 무조건 “×새끼”, “개새끼”, “미친 새끼”다. 욕을 하는 아이도, 듣는 아이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는다. “욕을 안 쓰면 친구들과 이야기가 안 된다”고 할 정도다. 더구나 영화· 드라마 등 대중매체들이 욕을 가르친다. “×발, 존나’ 등은 영화의 재미를 살리는 양념으로 통한다. 욕 하는 아이들을 나무라면 “왜요, 왜요?” 되묻는다. TV나 영화에 다 나왔단다. 전날 부모와 함께 본 영화에도 나왔단다. 초등학교 교실에서도 욕이 일상어처럼 난무한다. 특기적성과목을 맡은 키 작은 교사를 “존만한 ×”이라고 했다가 담임교사에게 지적을 받은 학생이 “담탱이(담임선생님)한테 걸려 캡숑(많이) 혼났지만 재미있었다”고 한다. 분식집에서 떡볶이 먹는 아이들이 “×새끼, 존니 처먹네, ×발!”, “존나 맛있다, ×발!”하며 쉴새 없이 떠든다. 주인 아줌마도 덤덤하다. “요즘 애들은 다 그렇지, 뭐”식이다. “친구에게 욕하면 쓰냐”고 물으면 무참해진다. “왜요? 맨날 쓰는데, 재미있잖아요? 중학생 고등학생 언니들은 더 하잖아요” 한다. “멋진 욕을 배워오면 여학생들에게 인기를 끈다”는 남학생도 있다. 인터넷 역시 욕의 주범이다. 초등학교 입학 후 또래집단을 형성한 아이들은 온라인 게임과 채팅을 통해 욕을 학습하고 실생활에 응용한다. ‘웃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격언은 욕에서도 통한다. 고교생 시절 우등생이었을 대학생들이 복도에서 스스럼 없이 욕을 해대는가 하면,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부부 싸움을 할 때 나오는 욕설은 글로 옮길 수도 없다.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서로 해대는 욕설도 기가 막힌다. “저런 자들에게 정치를 맡긴 내가 실책이다”라는 장탄식이 절로 나온다. 욕설문화를 ‘반항의 문화코드’ 운운하는 부류도 있다. ‘욕설 매체’에 대하여 학교는 힘이 없고, 가정은 무지하며, 사회는 무책임하다. 불량학생으로 보이지 않는 여중생이 이렇게 말했다. “×발, 어른들은 존나하면서 왜 우리한테만 지랄인지 몰라. 다 (어른들한테서)배운건대, ×발” /임병호 논설위원

국민이 첫째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1875~1965)은 기우제 우(雩), 남녘 남(南), 이을 승(承), 저물 만(晩), 아호와 이름부터 상징적이지만 가는 곳 마다 갈등과 풍파를 몰고 다니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박용만, 안창호, 김구, 미 군정, 한민당과의 갈등 등 그는 동지를 적으로 만드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우남은 국회, 정부 수립에 대해 감사할 대상을 열거했다. 첫째는 ‘하나님’, 둘째는 미국, 셋째가 국민이었다. 우남에게 기독교는 신앙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현실적 집단이었고, 근대 서구의 문명부강의 근원이 기독교에 있다고 파악했다. 미국은 우남에게 ‘인간의 극락국’이었으며 ‘남의 권리를 빼앗지도 않을 뿐더러 남의 권리를 보호하여 주기를 의리로 아는’나라였다. 그 근거는 미국이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나라이자 광대한 나라이기에 구태여 남의 것을 빼앗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혁명을 책동할 꿈을 꾼 일조차 없다”는 언명은 복화술의 대가인 우남에게 매우 보기 드믄 솔직담백한 고백이었다. 미국은 그에게 ‘아름다운 나라’이자 ‘한국의 조지 워싱턴’의 꿈을 실현시켜준 나라였다. 그런데 상황과 조건에 따라 갈등 구도는 변하였지만 우남이 평생 일관한 것은 ‘좌파와의 대립’이었다. “공산당은 마누라도 네것 내것 없이 같이 살자는 것이다”라는 천박한 주장을 펼칠 정도로 우남의 논쟁은 유치하고 다급했지만 그러나 효과는 탁월했다. 우남은 기독교와 미국을 통해 근대를 경험했지만 ‘부르봉’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하늘 아래 태양이 둘일 수 없다’는 정언명령을 평생 실천했다. 우남의 대통령 꿈과 병은 구분하기 힘들 정도가 돼 권력의 몽상과 질병은 ‘우리의 근대’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됐다. 만일 우남이 대통령 4선을 하지 않고 초대에서 물러났다면,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감사해야 할 대상 중 ‘국민을 첫째’로 언급했다면 한국의 현실은 달라졌을 게 분명하다. 좋든 나쁘든 1965년 숨진 우남 이승만의 언행이 생각나는 이유를 현 정권은 알아야 한다./ 임병호 논설위원

드골

미·소 냉전시대에 이를 견제하는 제3세력으로 프랑스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였다. 제2차대전의 영웅이었던 드골(1890~1970)은 제5공화국 수립후 대통령에 취임했다. ‘위대한 프랑스, 영광의 프랑스 재건’은 당시에 제3세력 거두로 유명했던 그의 구호다. 드골 집권 이전의 프랑스는 내각책임제였다. 2차대전이 종전되고 나서 국정은 산적한 터에 정치권은 싸움질로 영일이 없었다. 한 해에 내각이 두 세 차례씩 바뀌기를 수년동안 거듭했다. 정권이 이토록 불안정하다 보니 민생도 말이 아니었다. 드골이 알제리 전쟁의 위기에서 두 번 째 수상이 되어 대통령책임제의 헌법을 제정, 제5공화국의 대통령에 취임한 것이 1958년이다. 대외적으로는 중공을 승인하는 등 프랑스 국익의 실리외교를 추구하고 대내적으로는 경제부흥과 더불어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켜 역량화했다. 특히 반미·반소 정책을 철저히 일관했다. 파리에 설치됐던 북대서양동맹(NATO)군 사령부를 브뤼셀로 옮기게 한 것이 드골이다. 이만이 아니다. 프랑스군은 NATO에서 철수시키면서 독자적인 핵 무장을 추진했다. 이 무렵 해외 언론에서 드골을 풍자하는 만평은 콧대를 높게 그려 과장하기가 일쑤였다. 국내 정사(政事)에서도 나중엔 독주하기 시작했다. 주요 정책을 내각이나 주무부처 장관과 한 마디 의논없이 혼자 신문 라디오 등을 통해 발표하면서 무작정 국민의 지지를 당부하곤 하는 폐습이 심해졌다. 국민의 인기를 잃으면서 “장관은 뭘 하나요? 네, 장군(대통령)의 구두를 닦고 있지요?” 라는 풍자적 샹송이 나오기까지 됐다. 콧대 높았던 드골이었지만 국민투표에서 패배하자 군말없이 하야했다. 수도 파리를 떠나 향리로 돌아가 정치와는 완전히 담을 쌓았다. 동네 꼬마들과 어울려 놀아주는 동네 할아버지 노릇으로 여생을 보냈다. 1970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생전의 유언으로 동네 공동묘지에 묻혔다. 오늘은 그가 천수를 다한 날이다. 프랑스 국민들은 그를 추모한다. / 임양은 주필

죽어서, 산 사람에게

‘생명의 빚 남기고, 천상의 빛으로’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신문기사가 눈길을 끈다. 충북의 어느 두메산골 교회에서 봉직해오던 전생수 목사(52)가 철야기도중 뇌중풍으로 쓰러져 유언에 따라 각막·신장·간 등 장기를 기증해 7명에게 새 삶을 살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무소유의 달관속에 평생을 청빈하게 살아왔다고 전했다. 지난 9월11일 새벽에 입적한 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이 법구를 동국대 일산병원, 역시 지난 9월20일 선종한 천주교 수원교구 한종훈 신부가 시신을 가톨릭의과대학에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한데 이어 이번엔 개신교 목회자가 기증했다. 공교롭게도 세 분의 종교인들은 유언을 통해 화장하도록 하여 묘소도 남기지 않도록 했다. 법장 스님, 한종훈 신부 또한 안빈낙도(安貧樂道)로 깨끗한 삶을 살았다. 생전에 온갖 협잡으로 부귀공명을 탐하고 사후에는 비좁은 국토에 호화분묘를 예정해두기가 안달인 속인들에게 숙연한 일깨움을 준다. 예전에는 행려사망자를 많이 의학 연구용으로 썼으나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사망자가 거의 없다시피 되어 의과대학마다 애로를 겪는 것이 의학 연구용 시신이다. 해동성의(海東聖醫)로 숭앙받는 허준(許浚)은 그의 스승이 운명하면서 당부한 유언을 받들어 한의로서는 처음으로 스승의 시신을 해부했다. 시신 기증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이래서 더러는 기증 등록을 해 놓고도 이행치 않은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이행하는 사람들이 적잖다. 그래도 의과대학도 많고 연구수요도 늘어 연구용 시신이 미흡한 실정이다. 영국·프랑스·핀란드 등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장기 및 시신 기증자 이름으로 나무를 심어 가꾼다. 캐나다 같은데선 총리가 해마다 기증자들을 초청해 자리를 마련한다. 종교지도자 분들이야 이런 것에 초월하겠지만, 일반인 기증자들에게는 국내에서도 이같은 행사가 있었으면 한다. 장기 및 시신 기증은 어차피 흙으로 돌아가는 또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죽어서 산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이도 의미있는 사(死)의 활력이라고 할 것이다./ 임양은 주필

보들레르의 ‘음악’

“음악은 때때로 바다처럼 나를 사로잡는다! / 나는 출범한다 / 창백한 별을 향해, 자욱한 안개 밑으로 / 때로는 끝없는 창공 속으로 / 돛대처럼 부푼 가슴 / 앞으로 내밀고 / 밤에 묻혀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를 / 나는 탄다 / 나는 느낀다, 신음하는 배의 / 온갖 정열이 진동함을 / 순풍과 폭우가 그리고 그 진동이 / 나를 흔든다 / 광막한 바다 위에서 / 음악은 때로는 고요한 바다 / 내 절망의 거대한 거울.”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1821 ~ 1867)의 詩 ‘음악’이다. ‘음악은 때로는 고요한 바다. 내 절망의 거대한 거울’이라는 절창(絶唱)과 ‘여행의 목적은 떠나는 데 있다’는 절묘한 말을 남긴 보들레르는 ’백지의 공포’란 말을 통해서 시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고통을 고백한 시인이다. ‘백지’는 원고지다. ‘현대성’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정립한 이론가이기도 한 보들레르가 1857년, 첫 시집 ‘악의 꽃(Les Fleurs du Mal)’을 출판하였으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벌금과 시 6편 삭제라는 판결을 받았다. 뇌연화증(腦軟化症)의 징후와 실어증으로 46세의 나이로 삶을 마쳤다. 죽은 지 10여 년이 지나서야 그의 문학적 가치가 높이 평가 됐는데 특히 보들레르의 서정시는 다음 세대인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 등 상징파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발레리는 “그보다 위대하고 재능이 풍부한 시인들은 있을 지 모르지만, 그보다 중요한 시인은 없다”라고 절찬하였다. 일본의 귀재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인생은 단 한 줄의 보들레르 시보다 못하다”며 35세에 자살했을 정도다. 보들레르는 말년에 실어증으로 말을 하지 못했지만 “예술은 인간의 천성이며 천성은 신(神) 예술”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바닷가에 오래 서서 보들레르의 ‘음악’을 들으면 “고통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점에서 위대하며, 가치 있는 고통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는 그의 말이 떠오른다. / 임병호 논설위원

야생동물 방사

1972년 7월 18일 수원시가 시민들의 정서생활과 자연을 살리기 위해 꿩, 다람쥐, 토끼 등 야생동물을 시가지 중심에 있는 팔달산에 방사(放飼)한 적이 있었다. 팔달산은 어느 山과도 맥이 통하지 않는 일명 탑산(塔山)이어서 야생동물들이 잘 살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팔달산에는 그 야생동물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1989년 제주도의 모 신문사 창간기념 행사로 까치 53마리가 방사됐다. 제주도에 서식하지 않는 길조 까치를 들여와 기념일을 축하하고 볼거리도 만들자는 의도였다. 그러나 까치는 천적이 없는 제주 생태계를 휘저으며 무섭게 번식해 과수 작물과 전기시설에 큰 피해를 입혔고 결국 5년 만에 유해조수로 지정됐다. 수원시와 제주도의 선례에도 불구하고 최근 전국 지방자치단체마다 ‘생태복원’ 명목의 야생동물 방사사업이 유행처럼 확산되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 6월 개장한 뚝섬 서울 숲에 사슴, 고라니, 오리 등을, 남산공원 생태 연못 54곳에 개구리 두꺼비 등 양서류 1만 마리와 다람쥐 나비 유충을 방사했다. 전국 지자체가 거의 이런 식으로 야생동물들을 방사했다. 그러나 대부분 서식환경의 적합 여부, 외래성 병원체 감염 여부, 유전적 오염 가능성 조사, 방사 후 적응과정 모니터링 등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의 야생동물 방사·복원 지침을 무시한 주먹구구식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지금까지 지자체의 야생동물 복원 시도가 성공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는 사실이다. 외래종 꽃사슴 20마리를 방사했지만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밀렵만 기승을 부리자 도로 잡아들였는가 하면, 생태공원에 방사한 토끼들도 채 1년이 안돼 모두 자취를 감췄다. 야생동물은 국내 고유종이라도 갑자기 서식 환경이 바뀌면 스트레스를 받아 사망할 수 있고, 특히 외래종은 기존 생태계를 파괴하거나 고유종과 섞여 유전적인 오염 및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무분별한 동물 방사가 각종 질병을 유발해 사람의 건강을 위협하는 점이다. 사스, 조류독감, 에이즈 등은 모두 야생동물로부터 인간에게 전염된 병이다. ‘사람은 자연과 함께, 야생동물과도 함께’라는 슬로건은 좋지만 그런 역현상은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 / 임병호 논설위원

독서

나폴레옹은 전쟁터 말 안장 위에서도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는 원정을 가기 전 학술조사단을 먼저 파견할 정도로 지적인 리더였다. 나폴레옹이 단순한 전쟁광이었다면 베토벤이 ‘영웅교향곡’을 작곡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웅교향곡’은 베토벤이 나폴레옹에게 바친 작품이다.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한 유명인 가운데 독서를 통해 자신의 역량을 키운 사람들이 많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 발명왕 에디슨 등은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지식을 꾸준한 독서로 얻어낸 사람들이다. 링컨 대통령도 독서를 통한 독학으로 대망을 이뤘다. 2차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끈 영국의 처칠 총리는 명연설가로 유명했다. 영국을 제외한 유럽대륙이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손에 들어갔을 때 그는 연설을 통해 영국민들을 안심시켰다. 그의 연설적 재능은 독서에서 나온 것이었다. 철학·정치학·경제학 분야의 독서량은 당시 내각의 어떤 각료들보다 많았다고 한다. “텔레비전보다는 책을 읽어라. 책은 꿈을 심어준다. 너희들이 어른이 돼 펼칠 세상을 밝게 하는 건 텔레비전이 아니라 책이다.” 미국 부시 대통령이 선거를 앞두고 고향 텍사스 내 초등학교를 방문해서 한 말이다. 흔히 부시 대통령을 텍사스의 한량 정도로 생각하지만 그의 독서열은 대단하다고 한다, 클린턴 전 대통령도 다독가다. 골프광인 그가 휴가갈 때 여행가방에 빠지지 않는 휴가목록은 책이다. 그는 10일 휴가에 책 12권 정도를 갖고 간다. 클린턴이 휴가 때 무슨 책을 읽느냐는 항상 뉴스의 초점이었고 서점가의 관심사였다.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는 안중군 의사의 말은 유명하다. 삼성그룹의 故 이병철 회장과 심영섭 우림건설 사장은 소문난 다독가로 꼽힌다. 10여 년 전부터 직원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매월 책을 두 권씩 선물하고 있는 심영섭 사장은 “책을 통해 인간은 좀 더 감성적으로 풍부해지고 창의성을 키울 수 있으며 사회를 풍성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한국 사회를 책 읽는 사회로 만들기 위해선 지식에 대한 개념이 필요하다. 지식이란 졸업장이나 자격증이 아니다. 그 사람의 내면에 쌓인 학식과 판단력, 창의력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같은 지식은 곧 독서를 통해 만들어진다. 바야흐로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계절이다. / 임병호 논설위원

유엔 묘지

부산 유엔묘지, 유엔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숙부의 묘소 앞에서 오열하는 50대 조카의 신문보도 사진 한 켠엔 그 숙부의 20대 모습이 오버랩됐다. 늦가을 정취속에 헌화된 묘소의 꽃바구니가 유난히 청초해 보였다. ‘존 헨리 라본’이라고 쓰인 비명 앞에서 울먹이는 ‘존 레게욘 라본’씨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켰다. “한국에 잠들어 있는 삼촌을 꼭 찾아 인사 드려라”는 생전의 아버지 당부에 따라 숙부의 사진을 들고 한국 땅을 밟았다. 지난 24일은 유엔이 창설된 지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 영국군 병사는 1952년 젊은 목숨을 한국전쟁 전선에서 바친지 장장 53년만에 그리운 혈육의 방문을 맞이한 것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나라는 16개국으로 30만여 명을 파병한 미군을 비롯해 모두 34만3천여 명의 젊은이들이 참전했다. 이 가운데 3만6천여 명이 이역만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외국인 전사자 중 유해가 본국으로 이송되지 않은 1만1천여 명의 유택을 부산에 유엔묘지를 마련해 안장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장해간 수가 많아 지금은 2천100여 명의 묘소가 안치돼 있다. 이날 유엔묘지에는 많은 나라의 방문객들이 줄을 이었다. 유가족 친지, 혹은 함께 참전했던 노병이 전사한 전우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기도 했다. 하나같이 반세기가 넘었지만 전쟁의 참혹함이 아직도 깊은 상처로 남은 현실에서 고인을 그리워하며 추모했다. 유엔군만이 아니다. 국군의 젊은이들은 더 많이 전사했다. 인민군도 중국의용군도 숱하게 전사했다. 어느 목숨이라고 소중하지 않은 목숨은 없다. 전쟁이 원초적 죄악이다.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38선의 인민군들에게 내린 일제 공격 명령, 그러나 이런 전쟁의 수단화는 어떤 명분으로든 합리화될 수 없다. 만 3년1개월을 이 강토의 산하를 시산혈해로 물들인 비극의 참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국가보훈처가 ‘유엔의 날’을 맞이하여 영국·터키·캐나다 등 11개국 41명의 한국전쟁 참전 유가족들을 초청한 것은 잘한 일이다./ 임양은 주필

대통령의 광고

“좋은 약이라면서 약값은 왜 이리 싸요?” “텔레비전 광고에 안 때리니까요” 어느 약국에서 있었던 소비자와 약사의 대담이다. 소비자는 그래도 미심쩍은 듯 약 갑을 이리저리 살핀다. 텔레비전 광고를 안 내어 약값이 싼 것은 좋지만, 텔레비전 광고에서 듣도 보도 못해 미덥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텔레비전 광고는 어느새 소비자들을 이렇게 길들여 왔다. 텔레비전 광고에 나온 상품이어야 제대로 된 상품으로 여겨지게 됐다. 텔레비전 광고에 안 나온 것이면 오죽하면 텔레비전 광고도 못냈겠느냐며 미덥지 않게 여긴다. 이건 분명히 소비자들의 착각이다. 그러나 이런 소비자들의 착각을 이용해 텔레비전 광고는 호황을 누린다. 업계는 연간 텔레비전 광고비가 수조원 대에 이를 것으로 본다. 토막광고, 프로그램 제공 광고로도 양이 안 차는지 중간광고설까지 나와 되느니 안 되느니 하고 논란이 됐다. 그러나 텔레비전 광고비가 아무리 비싸고 많이 지출되어도 생산업체는 별 걱정을 안 한다. 텔레비전 광고비를 생산원가에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비자들이 부담하는 것이다. 직접 광고비만은 아니다. 텔레비전 광고를 때릴려면 CF를 만들어야 한다. 거액의 모델 출연료 외에 스태프진영의 인건비 등이 또 굉장하다. 이같은 간접 광고비 역시 소비자들이 부담한다. 국정홍보처가 텔레비전 광고를 더러 한다. 처음엔 공익성 광고를 하다가 정부 홍보를 하더니, 언제부터인 지 노무현 대통령이 출연한다. 노 대통령이 직접 나와 “대한민국은 희망이 있습니다. 자신감을 가집시다”라는 멘트를 한다. 대통령이 광고 모델로 나오는 건 전례없는 일이다. ‘대한민국은 희망이 있고 자신감을 갖자’고 해서 나쁠 것은 없다. 문제는 그런다고 희망과 자신감이 과연 생기느냐에 있다. 희망과 자신감은 그같은 말 광고보다는 국민이 체감으로 느낄 수 있도록 구현돼야 한다. 그런데 그 광고비는 특정 상품의 소비자도 아닌 모든 국민의 혈세인 점에서 일반 상품의 텔레비전 광고비와 또 다르다. 좋은 약이면서 값은 싼 것 처럼, 텔레비전 광고를 안 해도 알아주는 대통령이 되면 좋겠다./ 임양은 주필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