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바람으로부터 온다. 바람의 갈피마다 물기가 말끔 걷히나 싶으면 가을이 어느덧 우리 곁에 와 있는 것이다. 그 감촉을 즐기느라 ‘나혜석 거리’로의 저녁 마실이 잦아진다. 검게 탄 팔이며 목덜미를 쓸고 가는 바람의 손길이 사뭇 감미롭다. 여름은 이제 갔다고, 더위와 싸우느라 수고했다고, 바람은 지친 나무와 풀, 곡식 등속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다닌다. 찐득찐득한 더위 속의 무기력에 빠져있을 동안도 시간은 끊임없이 가서 어느덧 가을의 바람이며 햇살을 데려온 것이다. 그러니 힘들다고 투덜댄 여름을 멀리 보내는 초가을의 바람이 그저 황홀할 밖에. 이렇듯 시간은 때로 큰 위로가 되지만, 흔적 또한 만들게 마련이다. 여름은 특히 휴가가 있어 더 많은 시간의 자취를 남기고 간다. 여행 중에 만난 수려한 풍광이나 낯선 길에서의 설렘, 가슴에 잠깐 무지개를 걸고 간 사람에 대한 기억도 모두 그런 흔적이다. 누군가는 여름날의 휴가처럼 짧고 달콤한 사랑을 막 끝냈을지 모르고, 누군가는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에 두근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흔적들은 딱지가 앉았건 아직 진행 중이건 모두 시간을 약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갈 힘을 줄 것이다. 그래서인가, 이즈음엔 뜸하던 벗의 전화가 느닷없이 오곤 한다. 청첩이나 부고가 부쩍 많아진다 싶더니,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도 그새 달라졌다. 역시 시간의 수레바퀴는 그냥 굴러가는 게 아닌가 보다. 문득 해야 할 일이나 미뤄둔 일, 하고 싶었던 일들이 두서없이 몰려든다. 여름내 불어난 옆구리 군살부터 얼른 버려야지, 몸의 군살을 빼듯 정신의 군살도 차근히 빼야지, 하다 보면 걸음이 먼저 바빠진다. 그렇더라도 뺄 수 없는 즐거움이 있으니, 바로 나혜석 거리에서의 ‘바람맞이’다. 그곳의 저녁 바람과 맥주 한 잔은 정말 뿌리치기 싫은 유혹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노천카페가 되면서 술과 함께 ‘고담준론’의 난장이 서는 나혜석 거리는 그런 대로 수원의 문화거리 역할을 한다. 근처에 편하게 놀 만한 소극장 하나쯤 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여전하지만 말이다. 그런 공간이 있다면 연극이나 영화, 음악 등의 조촐한 모임을 갖고 ‘술’과 더불어 ‘예술’을 더 즐겁게 논할 수 있지 않을까. 운영이라는 걱정 없이 좋은 프로그램만으로 가꿔나갈 문화공간은 아직 요원한 건지, 쓸쓸한 노릇이다. 바람이 다시 주당들 사이를 누비고 다닌다. 아, 초가을의 이 바람이 너무 달콤해,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무슨 귀엣말이 문득문득 스치니, 여름이 가면 올해도 벌써 삼분의 이나 간 것이다. 하여 단전에 모이는 긴장의 강도가 슬슬 높아진다. 나의 여름은 과연 ‘참으로 위대’했는지, ‘이틀만 더 남극의 햇볕을 주시어’(릴케의 ‘가을날’) 완성시켜 달라고 할 열매 또한 예비했는지, 나도 도르게 마음이 다급해지는 것이다. 이제 시간의 죽비가 도처에서 등을 친다. 삶은 때때로 고삐를 죄어야 나아가는 것, 바람의 애무 속에서 시간의 죽비를 달게 맞는다. 명치까지 서늘해진다. 이런 죽비로 하여 시간의 속살들이 또 가을날의 과일처럼 여물어 가리라. /정 수 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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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일보
2005-09-09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