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관개시설물 유산’ 축만제

정조는 화성을 축조하면서 동서남북에 4개의 호수를 만들었다. 일종의 농업용수다. 화성을 기준으로 북쪽 송죽동에 만석거(萬石渠)를 1795년에 축조했다. 현재 만석거를 중심으로 만석공원이 조성돼 북수원 주민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남쪽에는 화성시 안녕동 사도세자 묘역 근처에 1797년 만년제(萬年堤)를 축조했다. 그 원형은 없어졌지만 흔적이 발견돼 표석을 세웠다. 동쪽의 지동(池洞)에도 못이 있었을 텐데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정조는 1799년(정조 23년) 서쪽에 축만제(祝萬堤)를 축조했다. 지금은 ‘서호’로 더 많이 불린다. 화성 서쪽에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중국 항저우의 ‘서호(西湖)’만큼 아름답고 넓은 호수라는 의미다. 만석거와 만년제에 이어 축조된 축만제는 만석(萬石)의 꿈을 축원한다는 뜻을 가졌다. 본래 축만제둔(祝萬堤屯ㆍ서둔)을 위한 관개시설로 조성된 것으로 정조가 내탕금 3만냥을 들여 만들었다. 축만제는 문헌에 보면 제방 길이가 1천246척(尺), 높이 8척, 두께 7.5척, 수심 7척, 수문 2개로 돼있다. 규모가 무척 커 축만제를 통해 농업용수 혜택을 받은 전답이 232석락(石落, 섬지기)에 이른다고 한다. 축만제는 잉어가 유명해 약용으로 궁중에 진상됐다. 서호에 비치는 낙조(西湖落潮)는 수원팔경 중 하나로 꼽혔다. 호수 남쪽에는 1831년 건립된 풍광이 아름다운 항미정이 있다. 축만제 역시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축만제는 1906년 일제가 농사시험장을 설치하면서 최근까지 농촌진흥청이 관리했고, 시험답을 비롯한 인근 농지의 관개용수원으로 이용됐다. 수원이 농업기술의 중심지가 돼왔던 것도 축만제와 무관치 않다. 축만제가 국제기구인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로부터 ‘관개시설물 유산’으로 인정받았다. 8일 태국에서 열리는 ICID 67차 집행위원회 발표만 남았다. 우리나라에서 관개시설물 유산은 처음이다. ICID가 축만제를 높게 평가한 이유는 ‘가뭄에 대비한 구휼 대책과 화성을 지키는 군사들의 식량과 재원을 제공하는 등 백성의 식량 생산과 생계에 기여했고, 화성이라는 신도시 건설의 하나로 조성한다는 아이디어가 혁신적이었고, 항미정 건립으로 관개용수를 공급하는 단일 목적을 넘어 조선후기 선비들의 풍류와 전통을 즐기는 장소가 됐다’는 역사문화적인 특징 때문이다. 축만제가 국제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돼 자랑스럽고 기쁘다. ‘2016 수원화성 방문의 해’에 지정돼 더 의미있어 보인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혼돈의 대한민국

그야말로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대한민국을 뒤덮고 있다. 김영란법도, 개헌도 모두 이번 사태에 묻히고 있다. 지난주는 언론과 방송이 서로 경쟁하듯 최순실과 관련한 기사들을 쏟아냈다. 반면 검찰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며 국민들의 실망을 자아냈다.당시 검찰에 근무하는 검사와 직원들의 사기도 말이 아니었다. 과거 이와 유사한 중대 사안이 생길 때 움직였던 검찰의 모습에 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검찰의 모습에 실망해서다.일부 검사는 법무부장관이나 검찰총장을 떠올릴 때 이분들도 최순실을 만났을까, 아니면 최순실의 입김이 작용했을까라는 생각마저 든다며 한탄했다. 이 같은 상황에 세월호 사건 당시 기레기라고까지 불리며 폄하됐던 기자들과 언론의 신뢰는 높아졌고, 검찰에 대한 불신은 쌓여만 갔다. 늦었지만 최순실 특별수사본부를 추가 확대해 과거 ‘중수부급’ 진용을 갖춘 검찰은 이번주부터 수사를 본격화하고 있다. 비록 최순실 귀국 후 31시간을 줘 또 한 번 비난의 여론이 있기는 했지만, 그간 언론에서 제기됐던 혐의들이 하나둘씩 검찰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3일 긴급체포된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비서관은 검찰 조사에서 재단 기금 모금 활동과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의 뜻이라 스스로 생각해 참모로서 적극 도왔다는 취지로 진술했다고 한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까지 왔다. 현직 대통령이 수사대상이 되는지를 놓고 논란이 뜨겁다. 이 같은 일련의 상황에 가장 중요한 것은 민심이다. 20대의 대통령 지지율이 2%까지 떨어지고, 은퇴한 70대 노인들도 이제껏 신념을 갖고 살아왔던 자신의 인생이 잘못된 것이었냐며 개탄하고 있다.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할 지 모르겠다며 모든 국민이 혼돈에 빠져 있다.더 이상 국민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까도 까도 끝없는 양파보다 더욱 독한 이번 사건의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진실을 알고 싶은 국민을 대신해, 조금은 늦었지만 검찰 스스로가 한점 부끄럼이 없도록 성역 없는 수사를 해주길 기대해본다. 이명관 사회부 차장

[지지대] 섭정의 시대

유행어는 시대를 반영한다고 한다. 요즘 인터넷 뿐만 아니라 오프라인 모임에서 가장 핫한 유행어 제조기는 바로 최순실이 아닐까 싶다. 독일에서 귀국한 뒤 지난달 31일 검찰에 출두하고 조사를 받는 일련의 과정에서 보여준 최순실의 행동은 즉각 유행어로 제조돼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신발이 벗겨졌을 때는 ‘순데렐라’(순실 신데렐라, ‘밖에서 날 구해줘’), 최순실이 신은 구두가 프라다였다는 사실을 빗대 ‘악마는 프라다도 벗는다’ 등의 유행어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또 검찰 심문 때 최순실이 먹었던 곰탕이 인터넷 검색어 실시간 1위를 차지하며 ‘우주의 기운을 담은 곰탕’이라는 패러디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이 가운데 가장 신랄한 유행어는 바로 ‘순SIRI’일 것이다. SIRI는 애플의 음성인식 서비스를 가리키는데, 대통령의 말씀 뒤에는 ‘순SIRI’의 음성 인식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는, 국정농단 사태의 핵심을 찌른 말로 통용되고 있다. ▶‘섭정(攝政)’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자. 군주국가에서 국왕이 어려서 즉위하거나 병 또는 그 밖의 사정이 생겼을 때 국왕을 대리해 국가의 통치권을 맡아 나라를 다스리는 일 또는 그 사람이라고 풀이돼 있다. 특히 대비(大妃) 등 여성이 하는 섭정을 ‘수렴청정(垂簾聽政)’이라고 하며, 조선시대에는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를 시작으로 6명의 왕후가 7차례의 수렴청정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중국에서는 청나라 말기 서태후의 섭정이 가장 유명하다. ▶대한민국의 근간을 흔드는 최순실 사건의 수사는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하지만 국민들 사이에서는 ‘2016년=순실4년’이라는 말이 유행어로 번지며 최순실의 박근혜 대통령 섭정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다. 정치권에서 조차 “그동안 국민들은 최순실 정권에서 살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박근혜 대통령은 사면초가에 빠진 분위기다. ▶이제 대한민국 사회의 눈과 귀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쏠려 있다. 노무현 정권의 탄핵정국을 넘어 하야정국으로 치닫는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마저 나오고 있다. 지금이라도 모든 의혹에 대해 사실만을 말하고, 잘못된 모든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섭정은 국민들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최대한 빨리 깨달으면서 말이다. 김규태 사회부 차장

[지지대] ‘법과 원칙’의 한계

-조선조 공직관은 이랬다. 자연재해를 실정(失政)에 대한 하늘의 징벌이라고 여겼다. 역병이 돌면 반찬을 줄이는 감선(減膳)과 술을 끊는 철주(撤酒)로 근신했다. 태조 이성계는 15차례 감선과 9차례의 철주를 했다. 1518년 5월, 하루에 세 차례나 지진이 났다. 중종이 “사람을 쓰는 데 잘못이 있을까 항상 두려워하는데도 재변이 이러하니 더욱 두렵다”며 스스로 자책했다. 이게 500년 왕조를 지탱한 ‘덕치(德治’다-. ▶-하물며 세월호 사건은 인간이 빚은 재앙이다. 규정을 넘는 화물을 실었다. 항로를 벗어난 곳으로 갔다… 정부의 책임을 말하는 것을 정치적 의도라 하고, 담당 장관의 경질을 말하는 것을 마녀사냥이라고 하면 안 된다. 애들 죽어가는 배에 들어가 밧줄 묶는 데 6일씩 걸린 정부를 탓하는 게 정치적인가. 죽음의 탈출이 이어지는 순간에 경찰 졸업식에서 파이팅하며 사진 찍은 장관을 탓하는 마녀사냥인가. 틀림없는 그네들 책임이다-. ▶-‘법과 원칙에 따라’가 사달일 수 있다. 언제부턴가 최고의 가치로 대접받는 이 화두가 문제다. 사회를 지탱하는 질서가 도덕이라면 법은 그 도덕의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국가의 책임이 ‘법과 원칙’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높고 중한 위치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야 ‘법대로만 책임지는 사회’는 안전해 질 수 없고, ‘원칙대로만 책임지는 사회’는 행복해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상 2014년 4월24일자 김종구 칼럼 중에서) ▶‘법과 원칙에 따라’는 오랜 기간 박근혜 대통령의 화두였다. 위기와 갈등 때마다 이 화두를 강조했다. 그런데 이 화두에는 전혀 다른 두 가지 해석이 따라붙는다. ‘법과 원칙을 지킨다’와 ‘법과 원칙만 지킨다’다. 후자로 결론지어진다면 대단히 위험해진다. 책임정치가 실종되는 논리적 구실이 된다. 법의 영역보다 훨씬 넓은 것이 도덕의 영역이다. 그 큰 도덕의 영역이 ‘지키지 않아도 되는’ 해방구로 남게 된다. ▶지금 그런 상황이 왔다. 최순실은 구속됐다. 10여 개의 혐의가 적용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국민은 죄명에 관심 없다. 실정법을 벗어난 부도덕의 영역에 더 분노하고 있다. 대통령을 좌지우지한 부도덕, 국민 위에 군림하며 거들먹거린 부도덕, 그리고 사교(私敎)와 국정을 혼란시킨 부도덕이다. 모두 실정법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문제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의 위기는 ‘법과 원칙’의 밖에 있는 ‘도덕’의 영역에서 초래된 셈이다. 2년 전 칼럼의 제목은 ‘법과 원칙에 따라- 그 함정’이었다. 김종구 논설실장

[지지대] 개명(改名)

이름을 바꾸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름을 바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법원에 개명 신청을 한 후 허가를 받아 개명 신고를 하면 된다. 현행법에 개명은 헌법이 보장한 인격권·행복추구권에 근거한 이유가 충분할 경우 횟수에 제한없이 신청할 수 있다. 개명은 2005년 절차가 간소화되면서 신청 건수가 급증했다. 최근 10년간 개명 신청 건수를 보면 2004년 4만6천여건에서 2005년 7만여건 이상으로 증가했다. 이어 2007년에는 12만4천364건, 2010년 16만5천924건, 2015년 15만7천425건으로 급증했다. 지난해 성별 개명 건수를 보면 남자가 4만9천359건, 여자가 9만7천57건으로 여자의 신청 건수가 남자보다 2배 가까이 많았다. 개명 이유로는 ‘취업, 결혼 등 현실에 대한 불만족(사주에 맞지 않아서)’이 31%로 가장 많았다. 이어 ‘구시대적 이름이어서’ 26%, ‘부정적 발음·불편한 어감’ 11%, ‘이름에 잘 안 쓰는 한자여서’ 8% 등의 순이었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인 최순실과 그 일가의 개명이 화제가 되고 있다.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은 생전에 7개의 이름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1927년 보통학교 졸업 당시 최도원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이후 최상훈, 최봉수로 이름을 바꿨다. 1954년 절에 들어가며 최퇴운으로 개명했다가 1969년엔 천주교에서 공해남이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1970년대 영생교를 창시해 교주 노릇을 하면서는 방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최태민은 1975년 대한구국선교단을 설립하면서부터 사용한 것이다. 최순실도 두 차례 개명을 했다. 박 대통령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1970년대에는 최필녀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이후 최순실로 개명했다가 2014년 최서원으로 재차 이름을 바꿨다. 최순실의 딸 정유라도 정유연이라는 본명을 2014년 6월 개명한 것이다. 또 차은택 감독의 연결고리로 지목된 최씨 조카 장시호는 바로 위 언니 최순득의 딸로 원래 이름이 장유진인데 최근 개명한 것이다. 이들이 3대에 걸쳐 개명을 한 것은 무속적 이유라는 추측이 있다. 이름을 바꿔 흔히 말하는 ‘사주팔자’를 바꾸려 했다는 주장이다. 이와 함께 미르ㆍK스포츠재단 강제모금 및 해외사업 특혜 의혹을 비롯해 페이퍼컴퍼니를 이용한 해외 재산도피 의혹 등이 불거지면서 흔적 지우기용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그 이름들이 더러워졌다. 앞으로 또 어떻게 바꿀지 궁금하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OECD 가입 20년

‘선진국 클럽’으로 불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회원 각국의 경제사회 발전을 공동 모색하고 세계경제 문제에 공동 대처하기 위한 정부간 정책연구ㆍ협력기구다.2차 대전후 유럽의 경제부흥협력을 추진해 온 ‘유럽경제협력기구(OEEC)’를 개발도상국 원조문제 등 새로 발생한 경제정세 변화에 적응시키기 위해 개편한 기구로, 1961년 9월 30일 파리에서 발족했다. 현재 34개국이 가입돼 있다. 한국은 1996년 2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지난 25일은 OECD 가입을 위한 협정서에 서명한 지 20주년이다. OECD와 기획재정부 등에 따르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1996년 5천980억 달러(약 676조6천370억원)에서 지난해 1조3천760억 달러로 2.3배로 커졌다. 개인소득 수준을 보여주는 1인당 국민총소득(GNI)도 1996년 1만3천77달러에서 지난해 2만7천340달러로 2.1배로 증가했다. 지난 20년간 경제 규모는 2배, 수출액은 6배로 커졌다. GDP는 지난해 세계 9위로 올라섰고, 세계 6위 수출대국이 됐다. 하지만 내실은 딴판이다. 1인당 국민소득은 10년째 2만달러대에 갇혀 있다. 삶의 질은 퇴보하는 모양새다. 삶의 질 만족도에서 한국은 10점 만점에 5.80점(27위)으로 OECD 평균(6.58점)에 한참 못 미친다. △부모-자녀가 함께 있는 시간(48분) △어려울 때 의지할 사람이 있는지(100점 만점에 72.37점) △합계출산율(1.19명) 등은 34위로 최하위다. 자살률과 노인빈곤율은 OECD에서 가장 높고, 장시간 근로에도 노동생산성은 제자리다. 학생 1명당 공교육에 쓰는 비용은 OECD 평균(2만2천825달러)의 77%에 불과하지만 사교육비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2.75%)은 OECD 평균(0.91%)의 3배 이상 높다. 여성고용률은 낮고 남녀 임금격차는 커 양성평등도 갈 길이 멀다. 한국은 덩치만 커졌지 내적으론 부실한 ‘반쪽 선진국’이다. 작금의 정치 현실을 보면 선진국 문턱에도 이르지 못했다. 사회 갈등의 완충지대였던 중산층은 옅어졌다. 낮은 시민의식도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고질적인 노사 갈등, 벌어지는 세대 간 인식차 등은 갈등공화국인 한국의 민낯이다. ‘경제발전을 이뤘지만 삶의 질과 사회적 측면은 중대한 도전으로 남았다.’ OECD가 회원국 가입 20년을 맞은 한국에 던진 메시지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게이트 그리고 선배라는 이름

대한민국이 또다시 ‘대형 게이트(gate)’라는 악재를 만난 듯하다. 불과 한달 전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일명 김영란법이 시행되면서 한국사회는 극심한 혼돈에 빠졌다. 하지만 이 법은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음에도, ‘부정부패’와 ‘청탁’이라는 사회 악을 근절해야 한다는 국민적 염원이 담기며 서서히 연착륙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사회 악이 윗선에서 터졌다. 현 정권의 비선 실세로 지목된 ‘최순실 의혹 사건’은 대한민국의 근간을 흔드는 희대의 게이트가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지고 있다. ▶게이트(gate)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정부나 기타 정치권력과 관련된 대형 비리 의혹사건 또는 스캔들’이라고 풀이돼 있다. 이 말은 1972년 6월 발생한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Watergate Affair)에서 유래됐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 닉슨은 재선을 위해 비밀공작반을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투시켜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체포돼 결국 하야했다. ▶‘최순실 의혹 사건’은 양파 껍질과도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사실들이 각종 언론에서 제기되면서 일각에서는 1990년대 중반 조기 귀가의 열풍을 불러온 드라마 ‘모래시계’에 빗대기도 한다. 이 사건과 관련된 특종을 연일 터트리는 특정 채널의 뉴스를 보이기 위해 직장인들이 집에 일찍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렇듯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이 사건에서 유독 기자의 눈길을 끈 시국선언이 있었다. ▶‘선배님, 서강의 표어를 더 이상 더럽히지 마십시오!’ 서강대학교는 박근혜 대통령의 모교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배출한 학교의 후배들이 자부심 대신 그 선배에게 이름을 더럽히지 말아달라는, 어찌 보면 가장 치욕스러운 뜻을 전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고, 길라잡이가 돼주어야 하는 선배. 그 선배의 말로가 후배들에게 수치심과 치욕을 주는 사회를 만들어서는 안된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최순실 의혹 사건’을 공정한 법 테두리에서 수사해 단 하나의 껍질도 남기지 말고 국민들에게 낱낱이 알려야 한다. 그것이 선배가 후배에게 마지막 자존감을 찾아 주는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규태 사회부 차장

[지지대] 가을소풍

초등학교 시절 봄과 가을에 떠나는 소풍은 늘 설레고 즐겁기만 했다. 매년 단골 소풍 코스인 학교 인근의 백월산(白月山)으로 떠나는 소풍이기에 다를 것도 없지만, 유난히 가을소풍이 좋았던 것은 아마도 풍성한 먹거리 때문이었다. 봄소풍엔 요즘처럼 흔한 소시지도 안 들어간 단무지와 지단이 고작인 김밥 또는 계란 후라이가 곁들여진 도시락에 탄산 음료수 한 병이 전부다.그러나, 이처럼 단출한 봄소풍에 비해 가을소풍에는 도시락과 탄산음료 외에도 단감과 삶은 밤ㆍ계란 등이 추가돼 작은 배낭에 먹을 것이 가득했다. 또한 소풍날에는 담임 선생님께도 음료수와 먹거리를 담은 봉투 하나가 건네진다.여자 담임 선생님의 경우에는 스타킹이 추가되기도 한다. 이는 ‘평소 어린 자식을 잘 가르쳐 주셔서 감사하다’는 부모님의 마음이 담긴 소박한 선물인 것이다. 이처럼 풍성한 먹거리와 보물찾기, 장기자랑 등에 추억을 남기는 사진 한 컷까지 어린시절 가을소풍은 반백(半百)을 넘어선 지금까지도 필자의 뇌리에 생생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예나 지금이나 어린아이들에겐 일 년 중 유난히도 소풍날이 기다려지고, 소풍가기 전날엔 밤잠을 설치기 일쑤다. 행여 비가 와서 소풍이 취소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전날 밤은 유난히 길게 느껴지기도 한다.얼마 전 유치원에 다니는 여섯 살 딸아이가 소풍 가는 며칠 전부터 ‘카운트다운’에 들어가고, 전날에는 설렘에 쉽게 잠 못 드는 모습을 보면서 어릴 적 내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딸아이의 가을소풍날 달라진 세태로 인해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지난 2년 동안의 어린이집 소풍 때와 올해 봄소풍까지 아이의 손에 쥐어졌던 선생님용 음료수가 빠졌기 때문이다.이미 가정통신문을 통해 ‘선생님을 위한 도시락이나 음료수 등의 제공을 사양한다’는 소식을 접한 터라 관례대로 해오던 음료수를 준비하지 않았다. 일명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에 따른 것이다.이를 알리 없는 아이는 울며 불며 선생님 음료수를 사 오라고 떼를 썼고, 아내는 이를 어떻게 설명할지 난감해했다. 결국 ‘선생님이 가져오지 말라고 전화를 했다’면서 우는 아이를 겨우 달래 소풍을 보냈지만, 전날까지 설렘으로 가득했던 아이가 시무룩이 소풍을 떠나고 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 역시 씁쓸하기만 했다. 황선학 체육부장

[지지대] 개헌 데자뷔

간혹 언론사 간부를 초청하는 청와대 오찬이 있다. 참석자들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진다. 제한된 발언 기회를 얻기 위해 싸운다. 튀는 질문을 해보려는 두뇌 싸움도 치열하다. 참석자들에겐 차라리 전쟁터다. 그런데 2007년 1월 30일 지방언론 편집보도국장단 오찬은 달랐다. 발언 경쟁도 없었고 튀는 질문도 없었다. 질문하면 말려드는 듯한 분위기, 왠지 들러리가 될 것 같은 분위기가 팽배했다. ▶윤승용 홍보수석의 진행 발언이 더 맥빠지게 했다. “혹시, 지역 현안에 대한 질문이 있으시면 메모로 제출해 주시면 차후에 서면으로 답변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가급적 지역 현안에 대한 구체적 질문은 삼가해주시기 바랍니다.” 지역을 대표해 참석한 국장들이다. 그들에게 지역 현안을 묻지 말라고 했다. 원하는 질문만 받겠다는 거였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이 제안한 개헌이었다. ▶그래도 버릇처럼 손을 들었다. 공식 기록에 남아 있는 내 질문은 이렇다. ‘이참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는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축소시키는 쪽으로의 개헌을 고민해 보신 적은 없으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노 대통령의 답변은 2천 자 가까이 길다. 하지만, 핵심은 한 줄이었다. ‘지금 우리 한국의 대통령 권력은 절대로 지나치게 강하지 않습니다’며 부인하면서 ‘국정을 많이 이양하고 외교·국방에 좀 더 치우친 국정을 하는 것이 좀 필요하다. 대통령은 우리 한국의 대통령에게 외교적, 외교적 업무의 수요가 굉장히 높은 편입니다’라고 했다. ▶오찬은 끝까지 썰렁했다. 춘추관으로 돌아오는 경내 버스에서 참석자 몇이 투덜댔다. “개헌론에 들러리 서라고 부른 거야 뭐야?” “이러려고 전라도에서 오라고 한 거야?” 그랬다. 그게 분위기였다. 노 대통령의 개헌 제안은 무시됐다. ‘임기 다 끝나가는데 무슨 소리냐?’라는 빈정거림이 많았다. ‘대선 패배가 역력하니까 하는 소리’라는 비난도 많았다. 모든 게 1년 남은 임기 탓이었다. 모처럼 선거가 겹치는 기회라는 설득도, 임기를 단축할 용의가 있다는 양보도 ‘임기 말’ 앞에 소용없었다. ▶2016년 10월 24일. 대통령발 개헌론이 또 나왔다. 1년여 남은 임기, 이런저런 구설수…. 9년 전 그것과 닮은꼴이다. 분위기도 똑같다. ‘임기 말 대통령이 위기 돌파용으로 던진 화두’라는 해석이 많다. 그러다 보니 찬성하던 여론까지 돌아선다. 지난 6월 정세균 국회의장의 개헌제안 때는 찬성이 69.8%였다. 그제(24일) 박 대통령이 제안하자 41.8%로 뚝 떨어졌다. 임기 초반 마음을 비우고 제안했으면 좋았을 텐데….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개헌’은 임기 4년을 넘어서야 보이는 화두인 듯하다. 김종구 논설실장

[지지대] 황혼의 분노

충북 단양경찰서는 지난 19일 자신과 아내를 폭행하는 아들(51)에게 흉기를 한차례 휘두른 혐의로 A씨(79)를 불구속 입건했다. A씨는 경찰 조사에서 “농사일도 거들지않고 허구한 날 빈둥거리는 아들이 또 술을 먹고 들어와 혼냈더니 목을 조르고, 말리는 부인까지 폭행했다”면서 “평소에도 부모에게 욕설을 하고 행패를 부려왔다”고 진술했다. 40대 아들을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사건도 있다. 인천 중부경찰서는 20일 아내와의 대화에 끼어든 아들(46)과 말다툼을 하다 흉기로 여러번 찔러 숨지게 한 혐의로 B씨(79)를 체포했다. 아들은 알코올 의존 증상으로 치료를 받아 왔으며,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수십 년을 애지중지 금쪽같이 키워온 자식에게 흉기를 들이대는 무서운 사건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원인이야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결정적인 것은 독립하지 못한 채 얹혀사는 중년 자식과의 ‘불편한 동거’다. 은퇴해 가장이라는 부담을 덜고 느긋하게 말년을 보내고 싶은데 나이가 들어서도 밥값 못하는 자식 걱정까지 해야하는 답답한 심정이 우발적인 분노로 표출되는 것이다. 노부모와 성인 자녀와의 갈등에서 비롯된 두 사건은 부모에 대한 자녀의 학대나 폭력과 같은 맥락이다. 노인과 중년 자녀 사이의 폭력과 범죄는 갈수록 증가 추세다. ‘2015 노인학대 현황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노인학대 신고 건수는 1만1천905건으로 전년보다 12.6% 증가했다. 사법기관 등에 의해 노인학대로 판정받은 건수도 8.1% 늘어난 3천818건이었다. 전체 가해자의 69.6%가 친족이고, 그중 아들이 36.1%에 달했다. 인생 황혼기를 맞은 부모와 자녀 간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고 있다. 힘없는 노인의 경우 자녀와 물리적으로 맞서는 과정에서 흉기를 드는 경우가 많아 돌이킬 수 없는 참사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의 가정환경을 보면 ‘불편한 동거’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부모는 건강 상태와 경제 형편이 안좋아 부양받을 수밖에 없고, 실업ㆍ이혼 등의 상태인 자녀 또한 부모와 같은 공간에서 지내야 할 처지인 경우가 많다. 서로 내키지않는 동거를 하다보니 극심한 갈등과 스트레스를 겪게 되고, 상황이 악화하면 극단적인 범죄로 이어진다. 부모 자식 관계를 ‘천륜(天倫)’이라 한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란 뜻이다. 그 어떤 인연보다 깊고 소중한 천륜을 깨는 흉폭한 사건이 자꾸 일어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지방2급하천 승기천을 둘러싼 갈등

지방2급하천인 승기천을 두고 남동구와 연수구가 감정싸움을 하고 있다. 승기천이 서로 경계에 있는데, 소위 땅 싸움이다. 앞서 이들 두 지자체는 송도 매립지 10·11공구 관할권을 놓고 다퉜고 연수구가 판정승을 거뒀다. 송도때는 남동구가 먼저 포문을 열었고, 이번 승기천은 연수구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연수구는 지난 7월 “지금 승기천을 남동구가 관리하는데 이곳에 대한 관리가 안 되니, 차라리 우리가 관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주장했다.승기천의 남동구 방향은 남동공단이어서 별로 이용객이 없고 대부분이 연수구 주민들이 승기천을 이용하는데, 하천이 오염돼 주민들의 이용이 불편하다는 게 명분이다. 이재호 연수구청장은 올해를 승기천 살리기 원년으로 삼고선, 최근엔 유정복 시장에게 “승기천 살리기 사업을 할 테니 시비를 지원해달라”고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이러자 남동구가 방어에 나섰다. 이례적으로 입장을 담은 보도자료를 통해 “승기천 하천구역은 93%가 남동구에 속해있으니, 관리 주체는 남동구다”면서 “연수구의 행동은 탁상행정이다”고 반격했다. 20일 이 구청장은 아예 기자회견을 했다. “남동구의 이 같은 반박은 ‘태클 행정’이다”이라며 아예 주민과 언론이 참여한 공개토론회를 장석현 남동구청장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진행상황을 보면서 느껴지는 점은 다들 초점이 승기천이 과연 누구의 땅이냐, 즉 ‘누구꺼냐?’에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두 지자체 간, 또는 두 단체장 간 감정싸움으로 치닫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지금 중요한 것은 두 지자체 다 승기천을 관리하고 싶어하고, 가꾸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인천시는 그냥 두 지자체가 싸우도록 보고 있어서는 안 된다. 원래 관리주체는 시다. 시가 나서서 두 지자체가 더는 다투지 않도록 중재해야 한다. 승기천을 살리고 싶다고 적극적으로 나선 연수구와, 자신의 땅을 잘 관리하고 싶어하는 남동구. 두 지자체의 의지 등을 보고, 냉철하게 결론을 내줘야 한다. 또다시 송도 매립지처럼, 두 지자체가 싸우는 일은 없어야 한다. 지자체가 다투면 결국 해당 주민들만 피해를 볼 것은 당연하다. 이민우 인천본사 사회부장

[지지대] 칭찬은 예술

“칭찬이라는 것은 배워야 할 예술이다.” 막스뮐러(1823~1900)는 그의 유일한 소설 ‘독일인의 사랑’에서 이렇게 말했다. ‘칭찬’을 사회의 여러 제약과 곤경을 허물어뜨리는 ‘예술적 행위’로 승화시킨 것이다. 인간은 누구든지 칭찬받고자 한다. 칭찬을 받게 되면 자아의식이 자극되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으로 본다. 자아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칭찬에 더욱 약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좀 과하다는 느낌이 들더라도, 칭찬은 계속하면 할수록 효과가 크다고 한다. 누구나 5살 또래의 아이들과 대화할 때는 ‘칭찬을 먼저해주어야 한다’는 어린 대화방식을 안다. 어른들은 칭찬과 감동스런 제스츄어를 통해 어린이들의 호감을 먼저 산다. 우리는 칭찬의 효과를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른들끼리 대화할 때, 업무상, 부부간에 대화할 때 칭찬의 효력을 곧잘 잊는다. 이와는 다른 방식을 선택해 쉬운 길도 어렵게 만들곤 한다. 축구경기에서 바로 골대 앞에 같은 편 선수가 골인 찬스를 잡고 있어도, 그를 보지 못하고 엉뚱한 곳으로 공을 패스해 결정적 찬스를 놓치는 것 처럼…. 인간은 지혜롭다. 또 한편으로 어리석다. 인간은 칭찬의 말을 들으면 감정의 동요를 일으켜 과잉칭찬인지 비아냥거림인지의 여부를 가리기 힘들다고 한다. 대부분 일단, 자아의식의 만족감 때문에 거저 좋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좋아하는 상태를 ‘긍정적인 힘’으로 발전시킨다면 칭찬은 인간과 사회발전에 꼭 필요하다. 영국의 속담에 “바보라도 칭찬을 해 주면, 훌륭한 재목으로 쓸 수 있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부족하더라도 야단만 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칭찬을 통해 ‘능동적으로 더욱 잘해 보고자 하는 용기를 키워준다’는 것은 조직사회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칭찬’과 함께 ‘명예’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사람은 훈장이 장난감인 줄 알면서도 그것이 지닌 명예 때문에 지배를 받는다. 쓸데없는 허영과 가치없는 명예욕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명예는 상대를 추켜세워 분발하게 만드는데 효과가 있다. 올림픽 기록도 그런 측면에서 경신될 지도 모른다. 칭찬과 명예가 조화를 이룬다면 더욱 멋진 세상이 될 듯하다. 김신호 인천본사 경제부 부국장

[지지대] 문재인과 노무현의 차이

권오석(權五石)은 일제 강점기 면서기였다. 해방 후 남로당에 입당했다. 한국전쟁 당시 경남 창원군 노동당 부위원장을 지냈다. 전후, 양민 학살에 가담하는 등 좌익 활동의 죄를 범했다. 살인죄, 살인예비죄가 적용됐다. 폐결핵으로 5년간 가석방되기도 했지만 1961년 재수감됐다. 1971년 마산 교도소에서 사망했다. 그에겐 ‘좌익 활동을 했던 미전향 장기수’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적어도 기록에 관한 그는 극렬한 좌익 활동가였다. ▶권양숙 여사의 아버지다. 사위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노 전 대통령이 2002년 출마했다. 선거 초반 그에겐 ‘장인 좌익 활동’이란 딱지가 붙었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측은 느긋해했다. ‘노무현이 후보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고, 후보가 된다 해도 한 방이면 끝난다’라고 했다. 상대편만 이런 게 아니다. 당내 경선 후보들도 노무현을 제압할 무기로 이 카드를 움켜쥐고 있었다. 결국, 이인제 후보가 터뜨렸다. ‘노무현=필패’라는 논리로 공격했다. ▶반전은 노무현의 입에서 나왔다. “저의 장인은 좌익활동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걸 알고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사랑하는 아내를 버려야 대통령 후보 자격이 있다는 겁니까. 그러면 저는 후보 안 할랍니다.” 노 후보에 씌워졌던 ‘적색 콤플렉스’는 이 한 마디로 끝났다. 그 후 노 후보의 장인 문제는 어떤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은 후보 때, 당선 때, 퇴임 때 장인 묘지를 들렀다. 하지만, 이를 시비 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송민순 회고록 파문이 꽤나 길어진다. 송 전 장관이 “북한의 의견을 듣고 UN 인권 결의안에 기권했다”고 술회한 대목이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던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에게 눈길이 모아진다. 그런데 문 전 대표의 답변이 애매하다. 처음에는 “박근혜 정부가 배워야 할 대화 정부의 모습”이라고 답했다. 계속 상황이 이어지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새누리당은 때를 만난 듯 몰아세우고 있다. 국기문란 등의 격한 단어까지 동원한다. 국정 조사, 검찰 조사까지 들고 나왔다. ▶‘놀잇감을 뺏는다’는 말이 있다. 아이가 장난을 못하게 하려면 놀잇감을 빼앗아야 한다는 뜻이다. 누군가 나를 끊임 없이 흔들어 댄다면 그 놀잇감을 빼앗는 게 상책이다. 그 방법은 솔직함과 당당함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사랑하는 아내를…”이란 말로 상대들의 놀잇감을 빼앗았다. 문 전 대표에게 지금 필요한 돌파구다. ‘그때는 남북 관계도 중요했다. 지금보다 대화도 자유로웠다. 의견을 물어볼 수는 있는 상황이었다. 뭐가 잘못됐나.’ 이렇게 말할 순 없는 것인가. 그렇게 하면 안 될 별스런 연유라도 있는 것인가. 작은 일에서 보게 되는 노무현과 문재인의 차이다. 김종구 논설실장

[지지대] 알터에고

영화 ‘대니쉬 걸(The Danish Girl)’은 1920년대 전 세계를 흔든 ‘릴리 엘베’의 특별한 일대기를 그렸다.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얻기위해 자아를 찾아 나선 ‘릴리 엘베’의 내면을 심층적으로 다뤘다. 1926년 덴마크 코펜하겐, 풍경화가로 명성을 누리던 에이나르 베게너는 아내인 초상화가 게르다와 예술적 영감을 주는 파트너다. 어느날 게르다는 발레리나 모델이 자리를 비우는 일이 생기자 남편 에이나르에게 대역을 부탁한다. 에이나르는 아내의 요청에 드레스를 걸치고 스타킹을 신고 캔버스 앞에 선다. 순간 평생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맛보고 그동안 알지 못했던 자신의 다른 모습에 혼란스러워 한다. 결국 에이나르는 진정한 ‘릴리 엘베’가 되기위해 성전환 수술을 감행한다. 아내는 남편의 선택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에이나르는 5번에 걸친 성전환 수술을 받았으나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이처럼 어떤 이는 자아찾기에 목숨도 건다. 자신안의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게 된 에이나르의 위험을 무릅쓴 진정한 자아찾기, 그것은 고통이라기보다 행복이었다. 누구나 자기 안에 ‘또 다른 나’가 있다. 그게 어떤 모습이든. 나는 일관성이 있다고, ‘오직 하나’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하나가 아니다. ‘오래된 나’는 때로 지루하고 재미없다. 익숙하고 편안해서 그것을 강화하려 하고, 그래서 그것이 ‘진정한 나’라고 착각하지만 오래된 나로부터 탈출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나를 생경하게 바라보기, 멀찌감치서 관찰하기 또는 적극적으로 탐색하기를 해야 한다. 수원 해움미술관이 지난해에 이어 ‘알터에고(Alter Ego)’전을 기획했다. 전시는 또 다른 자아, 혹은 제2의 자아로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성찰적 의미를 지닌다. 알터에고는 끊임없이 창작하는 예술인에게 중요한 요소로, 미술관측은 ‘새로울 것, 신기할 것, 궁금할 것, 충격적일 것’ 등을 작가에게 요구했다.올해 전시엔 김희곤, 서길호, 초이, 최세경, 최옥경 등이 참여해 26일까지 한다. 작가들은 오랫동안 내 안에 머문 ‘오래된 나’ ‘구태한 나’ ‘진부한 나’를 벗고, ‘새로운 나’ ‘낯선 나’ ‘실험적인 나’를 탐구한 창작물을 내보였다. 이 가을, ‘나의 알터에고는?’을 자문하며 전시장에 들러보는 것도 좋겠다. 스스로 내면을 들여다보며 또 다른 나를 찾아보는 의미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밥 딜런’ 언어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인생의 길을 걸은 후에야/우리들은 그를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인가/하얀 비둘기는 얼마나 많은 바다를 날아간 뒤에야/백사장에서 편히 잠들 수 있을까/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포탄이 날아간 후에야/그것들이 영원히 사용이 금지될 수 있을까- 밥 딜런의 노래 ‘Blowin’ In The Wind’다. 통기타 한 대를 연주하며 끝까지 부른다. 기타 초보자도 칠 수 있는 코드 진행이다. 멜로디 또한 지루할 정도로 반복적이다. ▶그런데도 60년대 세계를 강타했다. 이 간단하지만 끊어낼 수 없는 호소력은 어디서 나오나. 말할 것도 없이 가사다. 1960년대 미국 젊은이들에게 그의 노랫말은 정신적 해방구였다. 1973년 발표된 ‘Knockin’ on Heaven’s Door’의 노랫말도 그렇다. -엄마, 내 총들을 바닥에 놓아주세요/난 이제 더 이상 그것들을 쏠 수 없거든요/검은 구름이 넓게 퍼져 다가오고 있네요/마치 천국의 문을 노크하고 있는 것 같아요/똑똑 노크해요 천국의 문을/- ▶문학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직접적이다. 총(gun), 포탄(cannonball) 등의 단어들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말한다. 시어(詩語)라는 기본적 평가에서 이견이 나온다. 그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에 미국 음악전문매체인 빌보드가 평을 냈다. “정말 밥 딜런이 시적이라고 생각하는가? 멜로디를 제외한 채 그의 가사를 살펴보면 종종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발견된다. 다시 한 번 해석해볼 여지가 있다”. 이쯤 되면 문학계에서의 평은 들을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의 노랫말이 준 감동은 어느 시어보다 컸다. 한국으로 건너와 60, 70년대 통기타 1세대를 만들었다. 김민기, 서유석 등의 음악이 밥 딜런의 정서를 그대로 따랐다. 불멸의 통기타 가수 고(故) 김광석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당신 집 수탁이 새벽에 울거든/창문 밖을 봐, 그리고 난 떠났을 거야/ 당신은 내가 여행을 계속하는 그 이유지/하지만 두 번 생각하지 마, 그래도 괜찮아/’ 밥 딜런의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김광석이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라고 번안해 부른 노래다. ▶문학은 문학으로 보고, 예술은 예술로 봐야 한다고들 한다. 그러면 노랫말도 노랫말로 보는 것이 옳다. 밥 딜런 노래에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랫말이 있다. 그는 그 언어로 어느 문학가 못지않은 반전(反戰)ㆍ평화(平和)의 메시지를 표현했다. 그의 노래 ‘Blowin’ In The Wind’를 가수 서유석이 이렇게 번안했다. -학교 앞에 책방은 하나요 대폿집은 열이요/이것이 우리 대학가래요/학교 앞에 책방은 하나요 양장점은 열이요/이거 정말 되겠습니까/(제목 파란 많은 인생). 영 어색하지 않나. 김종구 논설실장

[지지대] 제 기능 잃은 경기문화재단 뮤지엄본부

경기문화재단은 지난 2015년 4월 뮤지엄본부를 신설했다. 주 역할은 관장 체제에서 독자적으로 운영됐던 경기도박물관과 도미술관 등 6개 공공 박물관ㆍ미술관에 대한 통합경영지원이었다. 당시 언론을 통해 ‘뮤지엄본부장은 대외활동과 기관 간 행정적 협조 지원, 각 관장의 경영동반자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본부는 각 기관의 효율적 경영을 지원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행정력 낭비를 줄이고 시너지를 유도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기대감이 높았다. 그러나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뮤지엄본부가 기관의 자율성과 독자성을 침해하고 또 하나의 ‘옥상옥(屋上屋)’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2016년, 뮤지엄본부는 그 우려를 씻어냈을까. 긍정적 평가는 어려워 보인다. 최근 본부가 주최 주관한 ‘g뮤지엄데이’본보 10일자 1면가 단적인 예다. 올해로 두 번째 열린 이 행사는 도내 공사립 박물관ㆍ미술관의 상생 발전을 목적으로 기획, 문화 축제를 지향했다.하지만 프로그램은 백남준의 작품을 모티브로 한 설치작 1개 전시에 소규모 공연 2회로 구성, ‘축제’는 민망한 단어였다. 개막식에도 170여 개 도내 박물관장 중 단 3명만 참석했다. 본부의 대표 사업치곤 초라한 현장이었다. 이번 행사가 보여준 문제는 더 있다. 뮤지엄본부의 모호한 역할이 그 첫 번째다. g뮤지엄데이 대표작은 백남준의 작품을 모티브로 한 건축가 그룹의 대형 설치작이다. 이 때문에 백남준아트센터가 기획 및 작가 선정 과정에 참여했다지만, 본부가 주도한 것이 사실이다. 본부가 박물관과 미술관의 고유 기능인 전시 기획을 직접 한 셈인데, 당초 본부 신설 목적에는 배치(背馳)된다. 또 본부와 기관 간 소통 문제다. 본부 측이 소개한 g뮤지엄데이 체험 프로그램은 도미술관에서 7~8월 진행했다. 이번 행사와 연관지어 생각할 수 없는 시간차가 있다. 기관과 본부가 일정을 조정해 g뮤지엄데이의 프로그램으로 진행했어야 한다. 본부와 기관 간 불협화음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본부가 당초 목적과 다른 역할을 하고, 본래 요구받은 제 기능은 수행하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난 행사다. 하루빨리 궤도를 수정해야 한다. 잘못된 길을 가는 이 순간에도, 세금은 투입되고 있다. 류설아 문화부 차장

[지지대] 오조준 된 김영란법, 경제적 약자 울린다

“하루 수입이 절반으로 딱 떨어졌습니다. 휴~” 그제 술 한잔 마시고 만난 50대 대리운전 기사가 자동차 키를 넘겨받아 시동을 걸자마자 탄식처럼 내뱉은 말이다. 필자는 많은 대리운전 기사들이 그렇듯이 ‘요즘의 불경기를 한탄하는가 보다’라는 생각에 “경기가 아직 어렵죠?”라고 말 인사를 건네자 대뜸 “그런 것이 아니고 김영란법 때문에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지난 28일 김영란법이 시행된 이후부터 하루 평균 수입이 5만원으로, 시행 이전 수입 10만원의 반 토막 났다는 이야기이다. 기사는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선택했고 지금도 정부를 지지하는데 정부는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라며 한탄했다. 정부와 김영란법이 대리기사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한 것이 아나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당장 생계를 위협받다 보니 모든 것이 불만스럽고 원망스럽다는 눈치였다. 한우농가가 날벼락을 맞고 인천시청 앞 고급 한우 음식점이 문을 닫았다는 소식까지는 (김영란법 취지와 전혀 상관도 없는 한우 농가와 음식점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겠구나”라고 생각했지만, 대리운전 기사의 ‘김영란법 때문에요’라는 말에는 필자도 ‘아~ 여기까지’라는 생각에 아차 싶었다. 밤낮을 바꿔 일하는 대리기사의 생계까지 위협할 줄은 미처 생각이 못 미쳤었다. 술자리가 줄었을 테니 당연한 이치인데도 말이다. 어제 인천시청 인근 단골 음식점에서 시청 공무원과 점심을 먹고 더치페이를 하겠다고 하니 주인이 화들짝 놀란다. 함께 간 시청 공무원이 “국민의 60%가 찬성하는 김영란법에 따른 것인데 뭘 그렇게 놀라냐”라며 웃으며 묻자 주인은 “그 국민 60%가 누구냐, 왜 나한테는 안 물어보느냐, 장사가 너무 어려워 졌다”라며 열을 올린다. 공무원들이 주로 찾는 음식점인데 시청 공무원 대부분이 점심시간에 정문 밖을 안 나가니 그럴 수밖에…. 이 사회의 공직 권력과 기득권 계층의 청렴도 내면화를 위해 시행된 김영란법이 경제적 약자에게 오조준 된 채 오발탄을 터뜨리고 있다. 유제홍 인천본사 정치부 부국장

[지지대] 오감이 괴로운 ‘감각공해’

학창시절 여동생과 함께 방을 썼다. 동생은 잠을 잘 때면 벽시계를 떼어서 장롱 이불 속에 넣곤 했다. 째깍째각, 초침 소리가 시끄러워 잠을 자기 어렵다고 했다. 좀 예민하다, 유별나다 생각했는데 동생에게 그 소리는 거슬리는 공해였던 거다. 공동주택의 층간소음을 둘러싼 이웃 간 갈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단순한 갈등이 아닌 살인과 폭력, 방화 같은 강력사건으로 번져 심각한 사회문제가 됐다. 소음, 진동뿐 아니라 빛 공해도 도를 넘어섰다. 과도한 인공조명 탓에 밤에도 대낮처럼 밝아 편안한 휴식과 수면을 방해한다. 우리나라의 빛 공해는 주요 20개국(G20) 중 두 번째로 높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빛 공해 피해를 호소하는 민원도 크게 늘어 최근 3년간 연평균 3천건이 넘는다. 세계보건기구는 심야에 일정 밝기 이상의 빛에 노출되면 생체리듬 조절 호르몬인 ‘멜라토닌’ 분비가 억제돼 면역력이 떨어지게 된다고 경고했다. 빛 공해에 시달리는 사람은 비만과 불면증, 암에 노출될 위험이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정부가 2013년 ‘빛 공해 방지법’을 만들었지만 무용지물이다. 우리는 일상생활 중에 소음·진동·빛·악취 등 다양한 공해와 맞닥뜨린다. 미각·후각·시각·청각·촉각 등 오감을 괴롭히는 이들 생활형 공해를 ‘감각공해’라 한다. 문제는 점점 감각공해의 심각성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감각공해로 전국 지자체에 신고·접수된 민원건수는 12만5천건에 이른다. 소음과 진동이 10만6천283건으로 가장 많고, 빛은 3천670건, 악취는 1만5천573건이었다. ‘악취 방지법’이 2005년부터 시행되고 있지만 실효성이 없다. 악취 민원은 계속 증가 추세다. 도심에서 발생하는 생활악취 근원지는 음식물쓰레기·정화조·소각시설 등이다. 여기에 소위 먹자골목에서 발생하는 역한 냄새도 빼놓을 수 없다. 악취는 후각을 통해 불쾌감을 줄 뿐 아니라 눈·호흡기 계통에도 자극을 주고, 기체 상태의 물질에 따라 두통과 구토를 수반하며 식욕감퇴와 스트레스도 일으킨다. 감각공해는 사회적 피로도의 영향을 많이 받는 만큼 사람들이 다소 과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순간적으로 참지 못하면 살인 등 강력범죄로 번진다. 서로 배려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중요하다지만 이것만으론 안된다. 일상 생활에 불쾌감과 스트레스를 주고,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치는 감각공해에 대한 정부의 환경정책 수준을 높여야 한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창덕궁에 간 ‘이 국장’

‘이 국장’은 ‘경제국’ 책임자다. 정조대왕능행차는 ‘문화국’ 소관이다. 굳이 따지면 행사와 무관하다. 그런데도 8일 새벽 5시 서울로 올라갔다. 배정된 역할을 찾아서 옷을 받아 입고 행렬에 참가했다. 창덕궁에서 노들섬까지 10.39㎞를 걸었다. 수원 공무원인 그가 서울 구간에 참가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정조의 본고장 수원 공무원으로서 자부심 때문이었을 것이고, 모처럼 참가해준 서울시를 돕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도 그렇게 말했다. ▶“이러니까 공무원들이 욕을 먹는 거야.” ‘이 국장’이 된 소리를 쏟아냈다. 노들섬에 대기 중이던 버스에 오르면서도 화를 삭이지 못했다. “모자를 달라고 했는데 3시간 만에 주더라고. 사전에 작은 옷을 주문했는데, 큰 옷을 주고는 그냥 입고 가래. 의궤에 내 역할은 칼을 차게 돼 있는데 곤장을 주는 거야. 답답해서 서울시 공무원을 찾았는데 끝까지 안 나타나더라고. 참가자들도 그냥 돈 벌러 나온 거야. 역사고 뭐고 계좌번호 적느라고 정신들 없어. 시민들은 차 막힌다며 삿대질하질 않나.” 어지간히 실망스러웠던 모양이다. “수원이었으면 동(洞)이 주관해도 이것보단 낫겠다.” ▶하루 뒤, 수원구간이 재현됐다. 도로는 완전히 통제됐다. 운전자들은 스스로 우회하며 길을 내줬다. 도로 양옆 인도는 수만명의 시민으로 채워졌다. 한 사람도 도로 위로 내려오지 않았다. 정조대왕 행렬의 완판(完板)이 그 위를 지났다. 장안문부터는 시민행렬이 뒤를 이었다. 등(燈)을 든 시민들이 질서 있게 행렬을 따랐다. 행사 예산을 돕기 위해 각자 구입한 등이었다. 2천명의 참가자도, 수만명의 시민들도 수원구간에서는 모두가 연기자였다. ▶정조대왕 능행차 재현이 그렇게 끝났다. 221년 만에 가장 원형에 가깝게 재현됐다. 서울시, 안양시, 의왕시의 동참이 있어서 가능했다. 특히 서울시의 참여는 의미 깊다. 서울 한복판에서 재현된 최초의 능행차였다. 한강 위에 배다리가 설치된 최초의 능행차였다. 그런데도 수원 공무원 ‘이 국장’ 에겐 어지간히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서울시의 성의 부족이 못마땅했고, 서울시민의 참여 부족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사실 그랬다. 첫째 날 서울 구간 재현과 둘째 날 수원구간 재현은 달랐다. 완성도에서 달랐고 시민정신에서 달랐다. ▶그래도 마무리 평은 후했다. “우리(수원시)는 50년을 했잖아. 서울시는 처음이라 그럴 거야. 그래도 서울시가 참여해서 행사가 커졌는데. 내년엔 나아지겠지.” 정조대왕 행정 50년 수원시. 그 수원시의 공무원 ‘이 국장’의 서울 능행차 참여기는 이렇게 넉넉하게 끝났다. 김종구 논설실장

[지지대] 정년없는 가사노동

결혼한 여성들에게 여행은 가사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남이 차려주는 밥상은 다 맛있다’며, 밥상을 챙기지 않는 그 자체로 행복해 한다. 추석이나 설 명절에 겪는 스트레스의 가장 큰 원인은 고된 가사노동이다. 몇박 며칠 명절음식과 설거지, 청소 등 가사노동에 시달리다 보면 신체적ㆍ정신적으로 황폐해져 부부간 갈등이 극심해지고, 이혼으로 치닫기도 한다. 최근까지도 가사노동은 사회학자들에 의해 노동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사회학적 성차별주의 때문이다. 남성 사회학자들에게 있어 가사노동은 노동이 아닌, 그들이 남편으로서 받을 권리가 있는 서비스라고 봤다. 가정주부는 ‘경제적으로 비활동적인 사람’으로 정의됐다. 결혼을 하면 여성은 가정주부가 된다. 결혼과 함께 가사노동은 여성의 전담분야가 된다. 어떤 남편들은 가끔 ‘협조’도 하지만 이것은 선물로 간주됐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가정’이란 전통적인 성역할이 고정돼 있어서다. 시대가 변하면서 가사노동의 기계화, 가정의 민주화, 가사노동의 사회화 등의 경향이 두드러지고 가사노동에 드는 노력과 시간이 점차 감소됐다. 가사노동이 재평가되고 가사노동이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인식도 확산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사노동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성의 사회참여가 확대되고 경제활동이 늘어났어도 가사노동의 책임은 여성에게 전가되고 있다. 직장을 다녀도, 은퇴를 해도 마찬가지다. 주부들의 가사노동은 정년이 없는가라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일본의 한 출판사가 설문조사한 결과, ‘아내에게 정년이 있느냐’는 질문에 92%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럼, 아내의 정년은 언제인가라는 것인데 가장 많은 답이 ‘남편이 사망했을 때’였다. 부부는 남편이 퇴직한 후 일상생활에서 더 많은 갈등을 겪게 된다.남성은 은퇴해 집에 돌아온 순간부터 정년 이후의 삶을 사는 반면 아내는 여전히 현역이다. 퇴임 후 일터가 없어진 남편이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집에서 먹기도 한다. 매번 밥상을 차려야 하는 아내는 가사 업무량이 더 늘고 스트레스가 쌓인다. 하는 일 없이 티비 보고 신문 보고 밥 먹는 남편이 미워지기도 한다. 부부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가사노동을 나누는 수 밖에 없다. 요리하는 남편이 돼 스스로 밥을 챙겨먹고,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하는 것이다. 여성의 일인데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일을 ‘함께 한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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