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스펙 전쟁

고용시장이 꽁꽁 얼면서 남들과 다른 스펙으로 무장하는 취업준비생들이 늘고 있다. 학벌, 학점, 토익, 자격증, 수상경력, 어학연수, 봉사활동, 인턴경력 등 이른바 ‘8대 스펙’은 필수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구직자들의 스펙이 상향 평준화 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취업포털 ‘사람인’이 자사 사이트에 등록된 신입 이력서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학점을 제외한 자격증과 인턴 경험, 영어 성적 등 평균 스펙이 2년 전보다 상승했다. 이젠 웬만한 스펙으로는 취업문을 못 뚫다 보니 이력서나 자기소개서에 한 줄 보태려 막노동부터 안나푸르나 등반 등 극한 체험까지 취준생들의 스펙 전쟁이 눈물겹다. 높은 노동 강도 때문에 극한 알바로 꼽히는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나 공사장 막노동을 일부러 하는 취준생들이 있다. 어차피 해야 할 아르바이트라면 이력서나 면접에서 언급할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을 쌓겠다는 의도에서다. 힘든 일도 버틸 수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어서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등반, 수영복 입고 남극바다 뛰어들기, 사하라 사막 걷기, 철인 3종경기 도전 등 고산과 극지, 사막에서의 극한 경험으로 이력서를 채우려는 이들도 있다. 도보나 자전거로 국토 대장정을 하는 경험은 누구나 하는 흔한 것이 돼서 ‘고난ㆍ극한 스펙 쌓기’ 도전에 나선 것이다. 이들은 도전정신과 패기를 보여주기 위해 보다 강도 센 경험을 선택했다. 그런가 하면 상반기 기업 공채 시즌을 앞두고 특이한 인생 스토리를 만든다며 각종 스펙을 급조하는 사례도 있다. 평소 그 일에 관심이 별로 없지만 자기소개서 스토리를 위해 ‘인스턴트 스펙’을 만드는 것이다. 스펙 내용을 뻥튀기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실제 어떤 취준생은 전국을 돌며 ‘평화의 소녀상’ 얼굴 닦아주기를 했는가 하면, 취직을 위해 종교를 바꾸는 경우까지 있다. 영업직 취업을 희망하는 또 다른 취준생은 ‘웃음지도사 1급’ 자격증을 땄다. 16만원을 내고 3일간 인터넷 강의를 들은 뒤 홈페이지에서 문제를 풀면 딸 수 있는 자격증이다. 채용 담당자들은 회사의 업종ㆍ직무와 연관있는 경험이 중요하지 불필요한 스펙을 나열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인스턴트 스펙은 별로 신뢰하지도 않는다. 정부도 학력 등 스펙 타파를 외친다. 하지만 구직자들의 스펙 의존도는 여전히 높다. 취업난이 나은 한국사회의 진풍경, 스펙 전쟁이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양평 헬스투어

일본의 쿠마노 고도(熊野古道)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순례길이다. 쿠마노시는 옛 수행로 쿠마노 고도를 따라 걷는 워킹, 스트레칭, 온천 등으로 건강도 챙기고 휴식도 하는 헬스투어를 운영하고 있다.수려한 자연경관과 역사, 문화, 건강이 결합된 이 프로그램은 관광상품으로 인기를 끌면서 일자리 창출과 소득증대로 이어져 지역이 활력을 되찾았다. 일본에선 ‘에코 투어’ ‘헬스 투어’ ‘웰니스 투어리즘’ 같은 관광 프로그램이 확산 추세다. 우리나라에선 이와 비슷한 ‘양평 헬스투어’가 인기다. 양평군은 지난해 9월 여행을 겸해 산행ㆍ자전거 타기ㆍ건강 측정 등을 통해 건강을 챙기는 이색 관광상품을 처음 선보였다.먹고 즐기는 자연관광에서 건강과 치유로 변화하는 관광 트렌드에 맞춰 지역 자연환경을 활용한 체류형 관광상품을 기획한 것이다. 헬스 투어는 1박 2일, 당일 코스 두 가지다. 코스는 소리산 코스(5.7㎞), 물소리길+자전거길 코스(16㎞)가 있다. 양평 헬스투어는 전문 건강 가이드가 함께 한다. 가이드는 계곡 트레킹과 산행 중간에 건강하게 걷는 법과 등산 요령을 알려준다. 숲 속에 매트를 깔고 누운 채 다리를 나무에 올려 기대놓고 쉬는 ‘횡와 외기욕’, 양말을 벗고 숲 속에 앉아 쉬는 ‘풍욕’, 계곡물에 발을 담그는 ‘크나이프 요법(냉자극 요법)’ 등을 지도한다. 산행 중 건강 측정과 운동효과 분석도 한다. 숯가마에서는 올바른 온찜질 방법을 알려준다. 식사는 동네 산에서 채취한 산나물과 직접 기른 농산물을 이용한 건강 자연식이다. 이달 들어 본격 시행에 들어간 프로그램은 지난해 9~11월 3개월 동안 800여명이 참가했다. 건강 가이드 등으로 연 인원 182명의 일자리도 생겨났다. 양평군은 여행사를 겸한 법인 ‘양평헬스투어센터’를 만들어 프로그램을 연중 무휴 운영 중이다.군은 차별화된 고급 건강투어를 원하는 관광객을 위해 하반기엔 1박 2일에 100만원 짜리 프로그램도 선보일 계획이다. 이 투어에선 종합건강검진, 전통 한정식 식사, 패러글라이딩 체험 등을 포함할 예정이다. 관광자원이 풍부하고 서울과 가까운 양평의 여건에 맞도록 헬스투어를 고안한 양평군의 발상이 신선하다. 양평 헬스투어는 지역민의 소득 증대와 방문객의 만족도를 높이며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양평관광의 효자프로그램으로 자리했다. 벤치마킹 대상이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아이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6살 난 딸아이는 회사 근처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딸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의 연령별 반 대표직을 맡게 됐다.얼마전, 각반 대표들과 원장 선생님 등이 참여한 운영위원회에 참석했는데 그날 모임의 화두는 최근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가정 폭력’과 ‘아동 학대’였다. 비슷한 연령대의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친부와 계모에게 학대를 당해 숨진 신원영 군(7) 사건을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부모로부터 가장 사랑 받아야 할 나이에, 차디찬 화장실에 방치된 것도 모자라 지독한 냄새를 동반하는 ‘락스 세례’까지. 7살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형벌이 아니었을까.아이를 사망에 이르게 한 뒤에도 카톡을 주고 받으며, 알리바이를 만드는 치밀함과 경찰에 붙잡힌 뒤에도 거짓말 탐지기에서 당당하게 ‘죽이지 않았다’고 말하는 뻔뻔함, 아이가 숨진 화장실 옆에서 친부와 계모가 술까지 마셨다는 진술에는 정말 치가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계모에게 원영이는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짐이였던 것일까.▶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모굴스키 동메달리스트 토비 도슨(36ㆍ미국)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린 시절 부모의 부주의로 미아가 된 토비는 미국의 스키강사 집에 입양된 뒤 피부색이 다른 양 부모의 각별한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성장, 결국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된다. 올림픽이 끝난 뒤 우여곡절 끝에 만난 친부에게 토비는 ‘biological father(생물학적 아버지)’라고 부르며,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자신을 친자식과 같이 키워준 양 부모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부모의 폭력과 학대로 감당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에 방치된 아이들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ㆍ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이라는 고사성어가 주는 교훈을 다시금 새겨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아이들의 밝은 미래가 없다면 우리의 미래도 불확실하다. 나부터 우리 아이에게 더 큰 사랑과 관심을 보여야겠다고 다짐해본다. 김규태 경제부 차장

[지지대] 막말시대

최근 여권 최고 실세 중 한 명이 취중에 내뱉은 ‘누구를 죽여라’의 막말 파문이 사회전반적으로 시끌벅적 케 했다. 가뜩이나 413 선거를 앞둔 민감한 시점에서 터진 이번 파문은 부정적인 말 한마디가 어떤 파장을 몰고 왔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해당 실세는 당연시 여겨왔던 20대 국회의원 총선 공천에서 배제됐다. 야권에서 저격수 역할을 톡톡히 했던 한 중진 국회의원은 그동안 자신이 행한 각종 막말에 발목이 잡혀 공천까지 받지 못하는 처지에 놓였다. 정치권에서 보여온 수많은 막말 외에도 언어폭력의 종류는 각양각색이다. 정치권에서 행해지는 특정인이나 집단을 향한 부당한 표현이 그나마 점잖은 편일 때도 있다. 부부, 가족간, 직장 동료, 연인, 친구사이 등 인간관계에서 일상적으로 오가는 대화 속에 비속어, 비꼬는 표현, 무시성 발언, 혐오스러운 욕설 등 도가 지나친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대단한 내공을 소유한 자가 아니면 누구나 한 번 이상은 막말로 상대방 마음에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거친 욕설과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된 막말은 폭력, 살인 등 끔찍한 강력사건의 주원인이 된다. 최근 모 지역에서 발생한 부자간 살인사건만 봐도 막말의 극단성이 어디까지인가를 보여줬다. 순간적인 막말 한마디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혈연자를 살인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또 요즘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연인간 데이트 폭력도 상당수 원인이 막말에서 비롯됐다는게 일선 경찰들의 설명이다. 막말로 분을 참지 못하고 사랑하는 연인이 서로 치고 받는 폭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직장 생활 역시 막말의 테두리속에 갇혀 있다. 과거보다 나아졌지만 여전히 갑을 관계 형성속에 온갖 막말이 직장내 곳곳서 이뤄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어느 전문가의 말을 빌리자면 막말 최소화 방안으로 자신이 듣고 싶어하고 힘이 되는 말을 주로 쓰는 언어습관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막말로 가득찬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아조절을 통해 막말에 대해 귀를 막고 살든지, 가능한 말을 하지 않는 묵직한 사람이 되든지 바람직한 자신만의 대책을 세워야 할 듯 싶다. 막말과 관련해 자격지심(自激之心)속에 이 글을 쓰고 있는 기자부터 말이다. 이용성 사회부장

[지지대] 용퇴? 퇴출!

진행자가 말했다. “이해찬 의원을 이번 공천에서 배제하는 나름대로의 취지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홍창선 위원장이 반박했다. “이걸 공천배제 혹은 탈락, 마치 당이 버린 것처럼 해석을 한다면 그것이 아니고….” 진행자가 “적절한 용어를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홍 위원장이 답했다. “원로로서 용퇴를 해서 새 시대에 맞는 후진 세력들이 나라를, 미래를 이끌어갈 일을 해야 하고….” ▶15일 출근길에 라디오 대담이었다. 홍 위원장은 ‘용퇴’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배제니 탈락이니 하는 언론 표현에 불쾌감을 나타냈다. 국어사전에 정의된 용퇴(勇退)는 이렇다. ‘조금도 꺼리지 아니하고 용기 있게 물러남.’ 이 의미의 기본은 자각(自覺)과 결행(決行)이다. 스스로 판단해 스스로 물러나는 행위다. 홍 위원장은 이해찬 공천 배제를 용퇴로 정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시각까지 이해찬 의원은 연락 두절 상태였다. ▶두 시간여 뒤 이 의원이 나타나 입장을 밝혔다. “이유와 근거가 없다. 도덕성이든, 경쟁력이든, 의정 활동 평가든 합당한 명분이 없다.”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정치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라며 김종인 대표도 공격했다. 즉시 탈당계를 제출하고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SNS에는 “가능하신 분은 (세종시로) 내려와 만나주십시오. 29일 남았습니다”라는 호소문도 올렸다. ▶용퇴는 멋지고 당당하며 아름답기까지 한 말이다. 이게 현실 속에서는 전혀 다르게 쓰일 때가 많다. 정년을 앞두고 명퇴를 해야 하는 공직자, 치고 올라오는 후학을 위해 물러나야 하는 인생 선배, 그리고 여론에 떠밀려 정계를 떠나야 하는 정치인까지. 사실상 밀려나는 경우들이다. 그때마다 용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약간은 구차스럽고 약간은 구질구질하다. 그래도 마지막 결정만은 본인이 했다는 위로가 남는다. 이 의원은 이마저도 아니다. 당의 결정을 끝까지 거부했다. 당 지도부나 이 의원이나 모양새가 우스워졌다. ▶얼마 전 유인태 의원이 낙천했다. 곧바로 소감을 밝혔다. “저의 물러남이 당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불출마 선언) 시기를 정하지 못하고 미뤄왔던 것이 오늘에 이른 것 같다.” 며칠 뒤 방송에 출연해서는 더 투박하게 말했다. “괜히 미적거리다가 ‘쪽 팔리게’ 됐다.” 하지만, 그의 처신을 ‘쪽 팔리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국민은 없다. 다들 아름다운 용퇴라고 말한다. 이렇듯 용퇴란 물러나는 당사자가 선택할 말이다. 쫓아내는 상대가 쓰면 안 된다. 자칫하면 쫓겨나는 사람을 두 번 죽이는 꼴이 된다. 김종구 논설실장

[지지대] ‘돌 코너’ 이세돌

‘인간승리’ ‘인간 자존심을 되찾다’ ‘위대한 첫승’ ‘인류의 자존심 웃었다’ 14일자 조간신문의 1면 헤드라인은 이세돌의 승리 소식이 장식했다. 지난 13일 ‘인류 대표’ 이세돌 9단이 ‘인공지능’ 알파고를 상대로 귀중한 1승을 거뒀다. 인간 대 인공지능의 두뇌전쟁에서 3패 끝에 첫 승을 거두자 이세돌이 마치 인류를 구한 것처럼 흥분했다. 바둑을 모르는 네티즌들까지 열광적인 모습을 보였다. 외신들도 “마침내 인간 승리”라며 이세돌의 승리를 높게 평가했다. 앞서 알파고에게 세판 내리 지자 모두 끝났다고 했을 때 이세돌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진 4시간 44분간의 혈전, 알파고가 항복을 했다. “3연패 후 1승을 하니까 이렇게 기쁠 수가 없다. 앞으로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정말 값어치 있는 1승이다”. 이세돌 9단은 승리 인터뷰에서 18번이나 세계 정상에 섰을 때도 볼 수 없었던 안도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동안 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합니다”를 반복했던 그가 마음고생을 좀 덜어낸 것 같아 다행스러워 보였다. 이날 이세돌 9단의 승전보 기사엔 수천 개의 댓글이 달렸다. 각종 사이트의 게시판도 이세돌 관련 글로 도배가 됐다.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도 이세돌이 점령했다. 네티즌들은 영화 ‘터미네이터’ 등장인물인 존 코너에 이세돌을 빗대 ‘돌 코너’란 별명을 붙이며 인간 승리의 기쁨을 표했다. 알파고는 존 코너의 적이자 인공지능(AI) 시스템인 스카이넷에 비유됐다. 영화에서 존 코너는 인류 생존을 위해 스카이넷에 맞서 싸우는 저항군 지도자로 그려진다. 클라우드 컴퓨팅 기법으로 1천200여 대의 컴퓨터와 연결된 AI 시스템 알파고는 얼핏 네트워크를 통해 모든 컴퓨터 시스템을 장악한 스카이넷을 연상시킨다. 반면 인간을 대표한 이세돌 9단은 단기필마(單騎匹馬)로 알파고에 맞섰다. 네티즌들은 이세돌의 승리에 “드디어 기계를 이겼다. 이세돌이 인류 멸망을 지연시켰다” “돌 코너의 승리는 인류의 승리” “터미네이터의 시대는 없다”는 등의 반응을 쏟아냈다. 이번 대국 전까지는 알파고의 파죽지세에 “터미네이터의 등장이 머지않았다” “인류가 인공지능을 갖춘 기계에 종속되고 결국 멸망당할 것”이라며 우려는 표했었다. 대국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종 5국이 15일 오후 1시에 열린다. 인류 대표 이세돌의 승리를 다시 한번 보고싶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다나까’ 말투

군대 간 남동생이 첫 휴가를 나왔을 때 일이 생각난다. 군기가 잔뜩 들어 몸까지 뻣뻣해 보였던 동생은 가족들과 얘기할 때도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 하셨습니까?”하며 좀 불편한 말투를 썼다. “여긴 집인데 편하게 말을 하라” 했더니 “군대에 가면 말입니다. 사제말을 쓰면 안됩니다” 했다.생소한 ‘사제말’이란 사회제품을 이르는 것이었다. 나중에야 이 말투가 군대식의 ‘다나까’체라는 걸 알았다. 군대에선 종결형 어미에 반드시 ‘다’나 ‘까’를 붙여 써야 하는 규칙이 있었던 것이다. ‘다나까’ 말투는 군대라는 폐쇄적 집단에서 쓰이는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 표현법이다. 사투리가 심한 각양각색의 팔도 언어를 하나의 매뉴얼로 통일시킨 표준어요, 군대와 사회를 구분 짓는 경계어이기도 하다. 장병들은 훈련소에서부터 다나까 말투를 교육받는다. 그러다 보니 ‘식사 맛있게 하시지 말입니다’ 등 어법에 맞지 않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달부터 군대의 상징이라 여겨지던 다나까 말투가 일과 외 시간에는 사용이 제한된다. 국방부가 생활관이나 일과 시간 이후 일상대화에선 다나까 말투 대신 금기시 돼왔던 ‘요’로 끝나는 ‘해요’체를 사용하도록 했다.또 윗사람과 대화할 때 자기보다 지위가 높지만 윗사람보다 낮은 사람을 높이지 않도록 압존법(壓尊法)도 폐지했다. 대신 브리핑이나 보고, 교육훈련 등 격식이 필요한 경우에는 기존과 같이 다나까 말투를 사용해야 한다. 경직된 병영문화를 개선하겠다는 의도지만 군인들은 일과 중에는 ‘다나까’체를, 일과 후에는 ‘해요’체를 써야 하니 오히려 더 혼란스럽다는 입장이다. 일과 생활의 구분이 어려운 군대생활에서 시간대에 따라 말투를 분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군대에선 다나까체를 개선하겠다는데 사회에선 때아닌 다나까 열풍이 불고 있다. TV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여성들 사이에 다나까 말투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군대식 말투에 터프한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다.극 중 특수부대 장교 유시진 역을 맡은 송중기는 동료 군인들과 대화할 때는 물론 의사 강모연(송혜교)과 연애를 하면서도 다나까체를 쓴다. “이 남자, 저 남자 너무 걱정하는 남자가 많은 거 아닙니까? 이 시간 이후 내 걱정만 합니다” 같은 식이다. ‘~말입니다’를 아예 금지시키고 언어 순화 지침서까지 배포한 국방부, 당황스럽지 말입니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이재준&전자파

이른바 ‘전자파’ 조례가 조만간 완성을 앞두고 있다. 경기도의회 여야가 조례제정에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돌출변수가 없는 한 도의회 4월 임시회 중 통과가 점쳐진다. 도의회 더불어민주당 이재준 의원(고양2)의 뚝심과 소신의 결과다. 그는 횟수로 3년째 전자파 조례재정을 추진해 왔다. 그 선상에 정치ㆍ경제적 이해에 얽매어 논란도 많았다. 하지만 그의 열정과 진정성이 통했던 탓일까? 이제 종점을 앞두고 있다. 전자파에 대한 이 의원의 애정은 남다르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어린이집 민원을 접했다. 기지국 철거 요구에 이동통신사가 못하겠다며 맞선 현장이다. 유해시설물을 철거해 달라는 소리에 관련 업체의 반대목소리가 뜻밖에 높았다. 뭔가 잘못됐다 직감한 그는 그때부터 전자파에 올인했다. 관계 공무원, 업계와 시민 등 이해 당사자들을 만나 의견을 구했다. 그들을 설득하는데 피곤함을 마다 하지 않았다. 전자파가 인체에 유해하다는 팩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의원의 뚝심과 소신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고집(?)도 만만치가 않다. 쉽지않은 과정의 전자파 조례일자만 봐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전자파 조례는 지난 2014년 말 ‘전자파 안심지대 지정·운영 조례’로 최초 발의됐다. 어린이집을 상대로 한 조례는 곧바로 도와 미래부 등의 반대에 부딪쳤다. 하지만 조례는 통과됐고 의장직권으로 공표되기에 이른다. 그는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전자파 조례제정을 연이어 추진했다. 조례는 어김없이 교육부 등의 반대를 불러왔다. 어렵사리 통과됐지만 재의요구에 부딪쳤고 표결 결과, 부결되기에 이른다. 새누리당이 반대표를 던진 결과다. 지난 3월 임시회때 일이다. 국회는 법률을, 지방의회는 조례를 제정한다. 이재준 의원은 미래세대 꿈나무들을 위해 전자파 조례를 꼭 챙겨야했다. 지난 대학시절, 총학생회장 신분으로 상아탑에서 꿈을 키워왔던 이재준 의원, 전자파로 한결 성숙한 의정활동을 기대해 본다. 김동수 정치부 차장

[지지대] 대한민국에서 자영업이란

인천 남구보건소에서 주안역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막국수 집이 하나 있다. 비록 좁고 허름한 집이지만 10년 전통을 자랑하는 나름대로 맛집이다. 여름에는 줄을 서야 먹을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올 겨울은 개업 이후 최악의 혹한기를 보내고 있다. 지난 1, 2월에는 온종일 한 그릇도 못 파는 ‘빵 치는 날’까지 종종 있었다. 찬 음식인 만큼 겨울철 손님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빵 치는 날’은 올 겨울이 처음이다. 자동차 매장이라면 모를까 막국수 맛집에서 ‘빵’이라니…. 막국수 집 사장님의 남편은 40년 경력의 헤어 디자이너로 헤어 관련 업소를 운영하고 있다. 둘째 아들 역시 15년차 헤어 디자이너로 지난해 예약 전문 헤어 샾을 창업했다. 큰아들은 3년 전 129 민간 구급차를 구입해 환자 응급 이송 일을 하고 있다. 가족 4명이 모두 전문직종 사장인 셈이다. 말 그대로 자영업 가족이다. 동네 사람들은 가족이 모두 ‘사장님’이니 그 번 돈을 다 어디에 쓰느냐고 부러워들 한다. 남의 속도 모르고 하는 속 터지는 소리들이다. 막국수 집은 가계세와 난방기 내기에 급급하다. 올 겨울 같아서는 당장 문을 닫고 싶은 심정이지만, 다가오는 봄 소식에 간신히 마음을 달래본다.남편의 헤어 업소도 언제부터인지 손님 구경 하기가 쉽지 않다. 큰아들은 2년차인 지난해 구급차를 3대로 늘리며 자리를 잡는 듯싶더니 최근에는 덤핑 민간 구급차들이 등장해 다시 고전 중이란다. 둘째 아들의 헤어샾도 수입이 들쭉날쭉하다. 이 가족의 경력만 합쳐도 68년이다. 이 정도라면 대박까지는 아니더라도 살림 걱정 정도는 하지 않고 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퇴직에 떠밀린 얼떨결 창업도 아니고…. 경기 불황이라는 피할 수 불청객 탓이라지만 해도 너무 한다. 과연 대한민국에서 자영업으로 잘 살 수 있으려면 몇 년의 경력이 필요할까. 정부가 부르짖는 창업을 통한 좋은 일자리는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생계형 창업 10년 생존율 16.4%’라는 마의 벽까지 넘었지만, 삶의 질이 나아지지 않는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 정도의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도 먹고사는 걱정을 해야 할까라는 궁금증이 절로 생긴다. 대한민국에서의 자영업이란 멀고도 험한 끝없는 고행처럼 느껴진다. 잘 아는 가족이기는 하지만 허락 없이 적은 글이라 프라이버시 침해라며 혼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혹시 이 가족이 글을 보더라도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라는 점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유제홍 인천본사 정치부장

[지지대] 염태영·이재명 戰-Ⅱ

도발(挑發)은 이재명 성남시장이 했다. “피투가 피 튀길지도… 염태영 수원FC 구단주님 혹 쫄리시나요? 성남 첫 원정경기 상대가 수원FC인데 수원에서 만납시다.” 염태영 수원시장이 반격했다. “예 고대하고 있슴다. 우리는 막내로서 별 부담없는데, 시즌 시작 직전까지 외국선수 영입해야 할 정도로 걱정되시나요? 축구 명가 수원에서 멍석 깔고 기다리겠슴다.” 2일 SNS에서 시작된 염태영 대 이재명 전쟁이다. ▶3일 뒤 이 시장이 재공격에 나섰다. “성남 수원시민 여러분과 염태영 시장님. 축구팬들이 수원fc:성남fc 개막전 내기로 ‘이긴 시청기를 진 시청에 걸기’ 하라는데 어떨까요”. 염 시장이 재반격했다. “이재명 성남시장님 쎄게 나오시네요^^ 축구팬들이 원하시고 즐거워하신다면 좋습니다. 한번 해보지요.” 이러는 사이 19일 열리는 수원FC 와 성남FC의 축구 경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프로축구 열기를 두 시장이 만들어 가고 있는 셈이다. ▶평가는 갈린다. 이재명 시장이 이겼다는 평이 있다. 이 시장은 내로라하는 ‘SNS 고수’다. ‘도발’이라는 발상부터 이 시장이 유리한 게임이었다고 평가한다. 염태영 시장이 이겼다는 평도 있다. 염 시장의 이미지는 ‘바른 생활’이다. 그의 SNS도 늘 신중함과 법식을 차린다. 그런데 이번엔 SNS식 언어를 선택하며 응수했다. 또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계기로 삼았다는 평이 나온다. ▶둘은 경쟁자다. 양대(兩大) 도시의 수장이라는 점이 그렇다. 또 다른 정치 세상을 꿈꾼다는 점도 그렇다. 둘의 생각과 상관없이 시민들이 그렇게 싸움을 붙여간다. 그런 둘이 누리 과정에서 처음으로 충돌했다. 염 시장이 ‘시민을 위한 우선 지원’으로 치고 나가자, 이 시장이 ‘국가 책임의 지방 전가 반대’로 맞받았다. 주변에서는 올 것이 왔다고 했다. 동료에서 경쟁자로 바뀌는 시발점이 될 거라고 봤다. 필자의 칼럼 ‘염태영·이재명 戰-Ⅰ’이 게재된 것도 그 즈음이다. ▶그랬던 둘이 벌이는 의외의 전쟁이다. 한쪽을 끝장내는 전쟁이 아니라 모두를 즐겁게 하는 전쟁이다. 시민들이 웃고 있다. 모처럼 정치인들에게 받는 악의 없는 웃음이다. 축구계도 신났다. 두 시장이 한국 축구에 ‘깃발라시코’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며 흥분한다. ▶하지만, 둘은 충돌할 것이다. 2년 또는 그 언저리에서 충돌할 것이다. 입은 다물고 있지만 둘의 눈과 발이 비슷한 곳을 향하고 있어서다. 지금의 정과 여유가 그때도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칼럼 ‘염태영·이재명 戰-Ⅲ’의 내용이 뭐가 될지도 필자는 모른다. 그게 정치다. 김종구 논설실장

[지지대] #나는 페미니스트다

오늘은 ‘세계여성의 날’이다. 1908년 3월 8일 열악한 작업장에서 화재로 불타 숨진 여성들을 기리며 미국 노동자들이 궐기한 날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이날 1만5천여명의 여성 섬유노동자들은 뉴욕의 광장에 모여 10시간 노동제와 작업환경 개선, 참정권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세계여성의 날 제정 이후 각국에서 여성들의 지위향상과 남녀차별 철폐, 여성빈곤 타파 등 여성운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매년 3월 8일을 전후해 세계적으로 기념대회도 열고 있다. 우리나라도 세계여성의 날에 즈음해 한국여성단체연합 주최로 ‘한국여성대회’를 개최한다. 행사의 일환으로 ‘성평등 디딤돌’과 ‘걸림돌’을 선정하고 있다. 올해 성평등에 기여한 디딤돌 부문 수상자 중 하나는 사람이 아니다. 지난 1년간 SNS에서 활발하게 펼쳐졌던 ‘#나는 페미니스트다’ 선언운동이 수상했다. ‘페미니스트 해시태그’ 운동의 주체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지닌 인간임을 개개인의 자발적 의지로 표명한 수많은 여성과 남성이었다.2015년 2월 10일 한 트위터 사용자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SNS라는 한정된 공간을 뛰어넘어 여성단체 회원으로 가입하거나 오프라인 모임으로 이어졌고, 트위터 내용을 소책자로 제작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페미니즘의 확산은 ‘여혐(여성혐오)’에 대한 반작용에서 나왔다. 지난해 봄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다”며 이슬람 무장단체 IS에 가담한 김군과 팝칼럼니스트 김태훈씨의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 칼럼으로 촉발된 논란이 여성혐오 문제를 공론화 시켰다. 남성잡지 ‘맥심’은 지난해 9월 여성을 납치ㆍ살해하는 내용의 화보를 실었다가 국제적 논란을 일으키며 전량 폐기된 바 있다.한 남자가 ‘못생겼다’는 이유로 여자의 뺨을 때린 뒤 스마트폰 사진 앱을 쓰라고 권유하는 온라인 광고도 있었다. 여혐 콘텐츠는 광고뿐 아니라 대중문화계의 고질병이다. 연예인들의 여혐 발언도 끊이지 않는다. 이들은 여혐 발언이 문제가 되면 ‘재미로 그랬다’는 식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 여혐이 독버섯처럼 퍼져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여성을 여전히 성적 대상화하고 차별하고 사회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문제가 있다. ‘페미니즘은 여성우월주의나 여성 특혜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여혐을 근절시키자는 것이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새 봄, 새 글판

“봄이 부서질까봐 조심조심 속삭였다 아무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새 봄을 맞아 서울의 ‘광화문 글판’이 봄 옷으로 갈아 입었다. 멋진 글귀는 최하림 시인의 ‘봄’에서 가져왔다. 최 시인은 1987년에 펴낸 시집 겨울 깊은 물소리 가운데 ‘봄’을 이렇게 노래했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날 아침 하두 추워서 갑자기 큰 소리로 하느님 정말 이러시깁니까 외쳤더니 순식간에 꽁꽁 얼어붙은 공기조각들이 부서져 슬픈 소리로 울었다. 밤엔 눈이 내리고 강 얼음이 깨지고 버들개지들이 보오얗게 움터올랐다. 나는 다시 왜 이렇게 봄이 빨리 오지라고 이번에는 지넌번 일이 조금 마음 쓰여서 외치고 싶었으나 봄이 부서질까 보아 조심조심 숨을 죽이고 마루를 건너 유리문을 열고 속삭였다. 아무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봄이 왔구나 봄이 왔구나라고.” 이번 광화문 글판의 글은 모든 것이 귀하고 소중하므로 늘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헤아리고 배려하며 살아가자는 메시지를 담았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 상처를 주는 날 선 말보다 서로를 보듬어 주는 따뜻함으로 소중한 가치를 지키자는 것이다. 글판의 디자인은 눈을 가리고 봄을 속삭이는 수줍은 소녀의 모습을 통해 다가오는 봄에 대한 설렘을 표현했다. 1년전 광화문 글판엔 “꽃 피기 전 봄 산처럼 꽃 핀 봄 산처럼 누군가의 가슴 울렁여 보았으면”이라고 새겼었다. 함민복 시인의 ‘마흔번째 봄’의 일부다. 글판 속의 봄을 읽다보면 봄의 설렘이 느껴진다. 봄의 울렁거림과 두근거림도 전해져온다. “꽃씨 속에 숨어있는 꽃을 보려면 들에 나가 먼저 봄이 되어라” ‘수원희망글판’도 새 옷으로 단장했다. 글귀는 정호승 시인의 ‘꽃을 보려면’에서 발췌했다.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잎을 보려면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어머니를 만나려면 들에 나가 먼저 봄이 되어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평생 버리지 않았던 칼을 버려라.” 수원희망글판은 광화문 글판을 본따 만들었다. 2012년 10월부터 시작해 계절마다 새로운 글귀를 시민공모를 통해 선정하고 있다. 짧은 글이지만 각박한 현실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여유와 희망을 준다. 시를 읽지 않는 시대, 거리에서 만나는 글귀가 작은 위로가 된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자유와 배려의 기둥

“아빠 스티커 2개나 받았어요” 아들이 태권도장에서 낸 퀴즈를 맞혀 칭찬 스티커 2개를 받았단다. 퀴즈 질문은 ‘3.1절이 어떤 날인지 아느냐’는 것이었다.아들은 책에서 봤는지 누구한테 들었는지 “유관순 누나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날”이라고 대답했단다. “장하다. 우리 아들 기특하구나” 폭풍 칭찬을 쏟아냈더니 어깨가 으쓱한다. 그런데 다음 질문이 대략 난감하다. “아빠 그런데 나라를 안 뺏기면 되지. 왜 빼앗겨 놓고 다시 찾을라고 그런거야”라며 “그냥 일본하고 싸워서 이겼으면 되잖아”라며 말똥말똥 쳐다본다. “임진왜란 때도 그렇고 3.1운동 할 때도 그렇고 우린 만날 일본한테 왜지는 거야”라며 분개한다. “나라를 잃었지만 그 힘에 굴욕 하지 않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나선 용기가 대단한 거다. 그 정신을 잊어서는 안된다”라며 답해줬지만 뭔가 궁색하다. 남경필 경기지사는 지난 1일 제97주년 삼일절을 맞아 기념사를 통해 “경기도에 ‘자유’와 ‘배려’라는 기둥을 세우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남 지사는 이날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이 다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97년 전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면서 “대한민국은 인류 평화와 상생, 우리 민족의 번영을 위해 미국과 중국, 러시아 그리고 일본까지도 설득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고 했다. 그는 “대한민국은 더 이상 97년 전 나라를 잃고 비통에 빠져 있던 힘없는 나라가 아니다”라며 “이 땅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고 가는 그 어떠한 시도도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우리 손으로 우리 민족의 운명을, 우리 국민의 생명을 지켜나갈 것이다. 바로 그 일을 경기도가 해낼 것”이라고 역설했다. 남 지사는 “지나간 역사를 잊지 않는 것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함”이라며 “3.1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기 위해 먼저 경기도에 ‘자유’와 ‘배려’라는 기둥을 세우겠다”고 말했다. 남 지사의 말처럼 ‘자유’와 ‘배려’라는 기둥이 이 땅에 우뚝 서길 바란다.정치인, 기업인, 국민 개개인이, 온 나라가 한마음 한뜻으로 우리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역사를 물려줄 수 있도록 지금의 현실을 직시하고 준비하길 간절히 기원한다. 최원재 정치부차장

[지지대] 고종 승하

△3월 3일은 비운의 고종(高宗) 황제의 장례식이 있었던 날이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은 승하하셨다. 사인을 놓고 와병설과 일본인 독살설이 현재까지도 팽팽히 맞서고 있으나 그의 나이 56세로 전날 밤 식혜를 들고 침소에 들었다가 불과 30분 만에 승하했고 그 식혜를 들인 나인 2명이 의문사를 당한 것에 비춰보면 독살설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12살에 즉위한 고종황제가 44년간의 재위를 마치고 승하하자 조선은 이후 3년 만에 일본에 강점되는 비운을 맞았다. △엊그제 1일은 97주년 3ㆍ1절이었다. 3ㆍ1 독립만세 항쟁은 고종황제의 승하와 연관이 깊다. 조선반도 일부 지역에서 간헐적으로 봉기 됐던 만세운동이 바로 고종황제 장례식에 맞춰 한민족 항쟁으로 규합된 것이다. 일제의 만행에 숨죽이고 있던 조선 민중이 일제히 들고 일어섰다. 류관순 열사는 일제 순사의 만행에 항변하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그 울분을 참지 못해 밤새 3천 장의 태극기를 그려 천안 아우내 장터 상인들에게 나눠주며 거룩한 민중항쟁의 불을 지폈다. △3ㆍ1독립만세 항쟁에 놀란 일제는 1919년 4월 15일 아리다 육군중위가 이끄는 한 무리의 군경을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화성 제암리로 보내 기독교도·천도교도 30여 명을 교회당 안으로 몰아넣은 뒤 문을 잠그고 집중 사격을 퍼붓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불을 지르는 더욱 악독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 만행에 분노한 선교사 스코필드는 당시 참혹한 광경을 그대로 사진에 담아 ‘수원에서의 일본군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 미국으로 보내 여론화했으며, 지난 1982년 문화공보부는 제암리 학살현장의 유물발굴과 조사에 착수, 그해 10월 21일 이 지역을 사적 제299호로 지정했다. △3월은 이렇게 한민족에게 잊지 못할 아픈 달이다. 엊그제 우리는 그 아픔을 딛고 독립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장렬히 산화하신 선조들을 기리며 독립을 기념하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가졌다. 하지만 못내 아쉬운 것은 상당수의 민중이 그저 3월 1일을 노는 날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날 고속도로 정체가 이를 방증한다. 애국(愛國)에 시간이 따로 있을 수는 없겠지만, 3월 한 달만이라도 개개인이 가슴에 애국을 새겨보길 바라본다. 정일형 지역사회부 부국장

[지지대] 票와 富

수원 지역구의 법적 명칭은 갑구ㆍ을구ㆍ병구ㆍ정구였다. 하지만, 시민들은 다르게 불렀다. 갑구는 장안구로, 을구는 권선구로, 병구는 팔달구로, 정구는 영통구로 불렀다. 짧게는 십수년, 길게는 수십년간 불려온 이름이다. 유권자가 그렇게 부르니 정치인도 그렇게 말했다. ‘우리 장안구를 위해 뛰겠습니다’라고 했다. ‘우리 갑구를 위해 뛰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다. 2012년 을구(권선구)의 서둔동이 병구(팔달구)로 바뀌었다. ‘권선구’가 입에 밴 주민들에겐 충격적 사건이었다. ▶그랬던 지역구 혼란이 이제는 새로울 것도 없어졌다. 왕창 섞였다. 장안구 율천동이 권선구로 갔다. 세류ㆍ권선ㆍ곡선동은 권선구에서 떨어져 나갔다. 4년 전 팔달 지역구로 갔던 서둔동은 다시 권선구로 옮겼다. 수원시 인구는 120만이다. 전국 지자체에서 제일 크다. 처음으로 무(戊)선거구가 생겼다. 행정 조직 4개구와 불일치다. 수원시에서 유독 극심한 혼란이다. 어찌 보면 시세(市勢)가 커서 겪는 일이다. ▶이 혼란 속에 불편한 진실이 있다. 많은 시민이 지역구 판단의 핵심을 ‘부’(富)에서 찾는다. 지역구와 지역 발전을 연계해 생각한다. 지역구가 좋으면 상권도 커지고 집값도 오른다고 생각한다. 우월하다고 판단한 지역구는 ‘문’을 닫아건다. 자부심의 단계에서 배타심의 단계로 넘어간다. 열등하다고 판단해도 문을 닫는다. 여기엔 열등감에서 오는 폐쇄의식이 있다. ▶이번 혼란에도 그런 흐름이 깔려 있다. A 지역은 B 지역에 대해 우월감을 갖고 있다. 자신들이 부자 동네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B 지역의 일부가 A 지역으로 구획됐다. A지역은 “이참에 자기들만의 행정구로 독립하자”며 몰아간다. B지역은 벌집을 쑤신듯하다. “우리만의 지역을 공중 분해시켰다”며 반발한다. B지역에도 새롭게 C지역이 포함됐다. 여기서도 B지역은 불만이다. “못 사는 C동네와 합치기 싫다”는 여론이 깔려 있다. 결과적으로 A, B, C지역 모두가 불만이다. 지역마다 매겨진 사회통념적 ‘동네 값’이 달라서 이렇다. ▶‘강남’ ‘분당’ ‘판교’. 우리 사회에 ‘동네 값’을 매기기 시작한 ‘고유 명사’다. 이 고유명사가 전 국토를 바둑판처럼 쪼갰다. 그리고 옆 동네와 합치려 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었다. ‘못 사는 동네와 같이 놀기 싫다’ ‘잘 사는 동네 들러리 싫다’고 말하게 만들었다. 드러내 놓고 말하긴 불편하다. 하지만, 많은 이가 기준 삼고 있는 현실 속 셈법이다. 정치인도 시민들도 선거구 획정이 잘못됐다고 아우성이다. 그런데 그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르다. 정치인에겐 표(票)가 기준이고, 지역민에겐 부(富)가 기준이다. 김종구 논설실장

[지지대] 태극기 사랑

소프라노 조수미가 28일(현지시간) 미국 할리우드에서 열린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인 최초로 특별공연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아쉽게 무산됐다. 조수미는 이날 주제가상 후보에 오른 영화 ‘유스(Youth)’의 삽입곡 ‘심플송’을 부른 아티스트 자격으로 참석, ‘태극기 드레스’를 입고 노래할 예정이었으나 성사되지 못 했다. 조수미가 입을 ‘태극기 드레스’는 한국 최고의 디자이너와 원단업체가 힘을 합쳐 만든 것이었다. 태극기 드레스의 콘셉트는 가장 서구적인 의상을 가장 한국적인 소재로 디자인한 것이다. 평소 조수미 의상을 담당하는 ‘데니쉐르’ 서승연 디자이너는 수만 개의 핑크 시퀸 장식의 화려함 위에 선명한 블랙 레이스를 얹어 조수미의 보디라인을 극대화하는 드레스를 디자인했다. 또 구김이 덜한 ‘논개 실크’를 사용해 편안한 착용감과 부드러운 실루엣을 구현했다. 아쉬움이 크지만 조수미는 이미 태극기 드레스를 선보인 바 있다. 그는 2013년 2월 25일 제18대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 태극기 드레스를 입고 나와 바리톤 최현수와 함께 애국가를 열창했다. 몸 전체는 순수ㆍ평화 등을 상징하는 흰색 바탕을 기본으로 태극기의 건곤감리 4괘를 연상시키는 검은색 줄이 가슴 쪽으로 세 줄이 들어가 있었고, 팔에는 음양의 상징인 붉은색과 푸른색이 거대한 코르사주처럼 꽃 모양으로 만들어져 왼쪽 팔을 감쌌다. 엄숙과 권위의 상징이었던 태극기가 패션으로 다시 태어난 건 2002년 월드컵 때다. 3ㆍ1 운동 이래 가장 많은 태극기와 가장 큰 태극기가 거리와 경기장에 등장했다. 당시 태극기 패션이 대유행했다. 태극기를 망토로 걸치거나 머리에 수건처럼 두르거나 스카프로 맨 모습들이 흔했다.여성들의 탱크탑이나 스커트로도 활용됐다. 보디 페인팅으로 얼굴이며 가슴, 배, 팔뚝에다 태극기를 그려넣기도 했다. 국기가 그렇게 멋진 패션 소재나 소품이 될 수 있는지 그때야 알았다. 이런 일은 1882년 수신사 박영효가 일본땅에서 태극기를 내건 이래 태극기 역사상 처음이었다. 태극기가 애국가 속에 펄럭이는 엄숙한 이미지를 벗어나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대상으로 대변신한 것이다. 그땐 남녀노소, 지역, 계층 가리지 않고 모두 태극기를 사랑했다. 오늘은 3ㆍ1절이다. 태극기를 게양한 집이 그리 많지 않다. 태극기를 그토록 사랑했던 국민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영화 ‘귀향’

영화 ‘귀향’은 불편한 영화다. 보면서 많이 힘들다. 아프다. 그럼에도 우리가 꼭 봐야하는 영화다. ‘귀향’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했다. 영화의 각본과 연출, 제작을 맡은 조정래 감독이 지난 2002년 나눔의집 봉사활동을 통해 만나게 된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었다. 조감독은 강일출 할머니의 그림 ‘태워지는 처녀들’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고, ‘귀향’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이 그림은 1943년 일본 순사들에 의해 중국 지린의 위안소로 끌려간 강 할머니가 모진 고초를 당하다 전염병에 걸리자 일본군이 자신을 불태워 죽이려했던 장면을 기억하며 그린 것이다. 나눔의집에서 만난 위안부 할머니들은 “꼭 세상에 알려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했다. 조 감독은 그 부탁을 가슴에 깊이 새겼다. “타향에서 돌아가신 20만 명의 억울한 영령들을 넋으로나마 고향의 품으로 모셔와 따뜻한 밥 한술 올려드린다는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조감독은 아픈 역사이지만 기억해야 할 역사이기에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뜻을 굽힐 수 없었다. 영화는 개봉까지 무려 14년이 걸렸다. 소재가 위안부 할머니들이다 보니 투자자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국민을 대상으로 크라우드 펀딩을 하게 됐고, 7만5천270명의 참여로 11억6천여만원이 모금됐다. 제작비의 50%가 넘는 금액이었다. 시작은 조정래 감독이 했으나 마지막은 국민이 함께 했다. 배우와 스태프들도 재능기부를 했다. 개봉이 임박해서 상영관 확보에 난항을 겪자 온라인 청원이 이어졌고, 대형 멀티플렉스 체인들이 동참하면서 500개 넘는 스크린을 잡을 수 있었다. 무사하게 개봉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관객의 뜨거운 성원이 굳게 닫힌 극장문을 열었다. 24일 개봉 첫날엔 헐리우드 영화를 제치고 15만명이 넘는 관객을 모으며 흥행 돌풍을 예고했다. 모두 국민의 힘이다. 포털사이트와 SNS에선 “실화라서 가슴이 더 먹먹했다” “잊지 말아야 할 아픈 역사다” “진실은 억지로 지울 수 없는 것 같다” “아베총리도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는 등의 관람 소감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진실과 아픔에 응답했다. 영화 ‘귀향’의 힘으로 일본이 위안부 할머니 앞에 사과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영화 ‘귀향’은 아프지만 좋은 영화다. 스토리도 탄탄하고 배우들의 열정과 연기도 훌륭하다. 이 영화를 적극 추천한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인천대 총장 선거 ‘축제’

선거는 축제다. 민주주의의 축제이자 꽃이다. 선거 출마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시민에게 자신의 의견, 즉 공약을 설명한다. 또 시민은 이들의 의견을 듣고 스스로 한 명을 선택하고, 선택한 사람을 지지하는 것은 물론 믿고 따라준다. 요즘 한창 4월13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떠들썩하다. 또 하나 관심받는 선거가 있다. 국립대인 인천대학교의 새로운 총장 선거다. 현 총장의 임기가 7월에 끝나다 보니, 집행부 인수인계 과정 등을 감안하면 5월 말에서 6월 초엔 앞으로 4년간 학교를 이끌어갈 새로운 총장이 탄생한다. 그동안 인천대 총장은 교수 등 구성원이 직접 총장 후보에게 투표하는 직선제로 선출됐지만, 현행 인천대법률과 정관에 의해 새로운 총장 선출은 간선제로 이뤄진다. 최근 관련법에 따라 총장 선출을 위한 총장추천위원회가 꾸려졌고, 이제 본격적으로 선거를 준비한다. 총장추천위원회가 새로운 총장 후보 모집 공고를 내면, 후보들은 20명의 교직원으로부터 추천서명을 받아 총장 후보로 등록한다.이후에도 모든 선거는 총장추천위원회를 통해 예비후보 선정, 공식 총장 후보자 결정 등이 이뤄진다. 이사회가 공식 총장 후보자 3명 중 1명을 선임해 교육부에 보고하면 최종적으로 대통령이 임명하게 된다. 아쉬운 점은 간선제라는 점이다. 수년 전 인천대가 국립대로 전환될 때 제정된 관련법에 간선제로 명시되어 있다. 당시 많은 관계자가 이를 놓쳤거나, 간과했던 것 같다. 예전처럼 총장 선출방법의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절차를 보장하기 직선제 방식으로 이뤄져야 학교 내 교직원과 학생 등이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진정한 축제가 되는데 말이다. 자칫 간선제는 그 과정에서 교직원들의 줄세우기식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 부산대의 한 교수가 총장 직선제 사수를 외치며 투신해 숨지는 일도 발생할 정도로, 직선제와 간선제의 차이는 크다. 인천의 몇 안 되는 장·차관급 직위고, 대학을 이끌어가는 최고의 결정권자이자 이사회의 당연직 이사인 총장. 선거 방식의 차이를 극복하고 가장 현명한 총장이 선출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민우 인천본사 차장

[지지대] 기억교실

2년 전 우리는 평생 기억해야 할 비극적인 사건을 겪었다. 바로 세월호 침몰 참사다. 더욱 국민들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던 것은 단체로 수학여행을 떠났던 안산 단원고 학생들의 안타까운 소식 때문이었다. 최근 단원고의 ‘기억교실’을 놓고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당시 생존 학생 학년들이 지난달 12일 졸업을 하고, 신입생 300명이 다음달 입학을 하게 되면서 그간 수면 아래에 있던 갈등이 표출됐다. 기억교실 10개를 보전하면 신입생들이 사용해야 할 8개 교실이 부족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 놓고 416가족협의회 등 시민사회단체는 교실 존치를 주장하는 반면, 단원고 재학생 학부모들은 교실을 학생들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등 서로 다른 의견으로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경기도교육청과 학교에서도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물론 정답은 있을 수 없다. 자식 잃은 부모님의 마음을 생각하면 기억교실을 존치해야 하는 명분은 분명하다. 아직까지도 세월호 인양 문제, 수습하지 못한 실종자 문제, 피해보상 문제 등 해결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남아있는 유족들에게는 기억교실의 존치가 현재로서는 마지막 보루인 듯 하다. 자칫 이 모든 문제가 흐지부지 끝나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노파심, 우려의 발현인 것이다. 그 아픔을 직접 겪지 않은 제3자가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자의 심경을 모두 헤아릴 수 있을까. 다만, 지난 2년간 단원고를 다녔던 재학생들의 아픔도 한번쯤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들도 이미 많은 유무형의 피해를 입었지만, 아프다는 말 한번 제대로 못했을 거다. 새로 들어오는 신입생들은 어떨까. 고교생이 된다는 기대감에 간 오리엔테이션조차 무산되는 등 단원고 입학생이 아니라면 경험하지 않아도 될 일들을 겪고 있다. 심지어 교장이 교체되고 교사들도 절반 가까이 바뀔 예정이라는 점은, 어른들조차 세월호 참사와 맞물린 단원고 생활이 쉽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기억교실이 존치될 때 또 다른 4차ㆍ5차 피해자들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우려되는 이유다. 교육당국이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이명관 사회부 차장

[지지대] 철도 공약

제주시에 출마한 후보가 공약했다. 해저 터널을 이용한 KTX 사업 추진이다. 제주도~추자도~보길도~해남~목포를 연결한다는 구상이다. 터널의 제주 쪽 기점은 자신의 지역구인 애월항으로 지목했다. 처음 나온 터널 얘기는 아니다. 이낙연 전남도지사도 주장했었다. 하지만 정부나 지자체 어디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속으로 167㎞를 가는 기술적 문제, 총 16조8천억원이 들어가는 예산상 문제가 모두 걸렸다. ‘안 될 철도 공약’의 전형이다. ▶박남춘(인천 남동구갑)ㆍ윤관석(인천 남동구을) 의원도 철도 구상을 밝혔다. 인천대공원, 논현지구, 송도국제도시를 연결하는 도시철도다. 총 사업비 1조4천억원이다. 사업비는 어찌해볼 수도 있다 치자. 문제는 역(驛)이다. 총 연장 17㎞에 11개 역을 설치한다고 했다. 도시철도라더라도 서는 곳이 너무 많다. 달릴 만하면 멈추는 기차가 될 판이다. 구간에 있는 표(票)를 모두 챙기려다 보니 이런 노선(路線)이 그려졌을 게다. ‘정치로 망가지는 철도노선’의 전형이다. ▶수원 총선도 철도 앞으로 질주하고 있다. 장안구(수원갑)는 신수원선 자랑 선거가 될 듯하다. 권선구(수원을)는 신분당선 연장, 팔달구(수원병)는 전철환승이 등장할 듯하다. 영통구(수원정)는 분당선 급행화가 꿈틀댄다. 남의 실적에 숟가락 얹으려는 후보도 있다. 4년 전 약속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또 만지작거리는 후보도 있다. 그래도 철도는 수원 지역 전 지역구에서 거의 대부분의 후보가 준비하고 있는 공약이다. ▶그도 그럴게, 철도만큼 매력 있는 공약도 드물다. 그 극단의 예가 지난 4년간 수원에서 목격됐다. 2012년 분당선 연장구간이 개통됐다. 영통구 일대 집값이 올랐다. 2015년 신수원선 신설 계획이 확정됐다. 장안구 주변이 활기를 띠었다. 2016년 신분당선 연장구간이 개통됐다. 광교신도시를 강남권으로 만들었다. 그때마다 주민이 좋아했다. 사정이 이런데 입 닫고 있을 정치가 아니다. 지역마다 플래카드가 넘쳐났다. ‘내가 해냈습니다’ ‘내가 시작했습니다’ ‘내가 거들었습니다’…. ▶감별사(鑑別師)는 유권자다. 유권자가 눈을 크게 떠야 한다. 철도 공약의 내용을 따지고 분석해야 한다. ‘불가능한 철도 공약’ ‘노선 망칠 철도 공약’ ‘거짓말 철도 실적’을 가려내야 한다. 다소 불편하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정부 지자체 예산 항목을 뒤져 보고, 정부의 국가철도망 구축 계획을 들춰보고, 후보의 과거 행적을 찾아보면 눈치 챌 수 있다. 유권자ㆍ언론ㆍ시민단체가 함께 하는 ‘철도 공약 바로 보기 위원회’ 정도는 어떨까. 김종구 논설실장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