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 공직자 재산

1급이상 공직자 중 75%가 재산이 크게 늘었다.(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 발표) 재산이 늘어도 불과 한해동안에 수억원, 수십억원이 불어난 공직자가 있다. 1년에 1천만원은 고사하고 단 500만원을 모으려고 아껴쓰고 쪼개쓰거나 안써도 목표 달성이 버거운 서민들에게는 꿈같은 얘기다. 아니다. 전국의 10가구 중 3가구는 수입보다 지출이 더 많은 적자가계다.(통계청 2004년 가계수지동향) 씀씀이가 헤퍼서가 아니다. 생업을 잃었거나 있어도 변변치 않아 수입이 적거나 없기 때문이다. 가족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지출을 빚으로 때워가는 가구가 30%에 이른 것은 심각한 사회위기 수준이다. 서민들은 재산을 늘린다 할 것도 없다. 고작해야 저금이다. 하지만 저축은 고사하고 빚만 안지고 살아도 정말 다행이다. 이런 와중에 그래도 고위 공직자는 재산 증식이 콩나물 자라듯이 하는 걸 보면 높은 자리가 좋긴 좋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부정축재했다는 것은 아니다. 뭐라할까 역시 이재엔 밝은 것 같다는 생각을 갖는다. 재산이 부쩍 늘어난 공직자의 대부분이 주식 아니면 땅으로 재미를 톡톡히 본 게 공통적 현상이다. 일반 투자가들은 주식시장에 손을 잘못대어 망한 사람이 수두룩하다. 그런데 고위 공직자들은 어떻게 된 노릇인지 사둔 주식마다 천정부지로 치솟아 심지어는 돈 벼락을 맞은 이들도 없지 않다. 땅도 그렇다. 사놓은 땅값이 뛰었거나 무슨 시설에 수용된 보상금 차액이 높아 큰 목돈을 쥐었다는 고위 공직자들이 많다. 사둔지가 오래라는 이유로 부동산 투기란 비난은 받지않을 지 모르지만, 이렇게 보면 투기의 개념도 모호하다. 땅값 상승을 예상해 오래전에 사둔 건 투기가 아닌 투자고 지금 사는 건 투기라는 등식엔 의문이 성립된다. 그러나 저러나 중산층이 무너져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어 걱정이다. 고소득층과 저소득층의 소득격차가 5년만에 가장 큰 폭으로 확대된 지난해의 고소득층 중 각료 등 고위 공직자들이 대거 포함된 건 아무래도 좀 씁쓰레 하다./임양은 주필

조심태

조심태(趙心泰·1740~1799)는 조선조 22대 정조대왕이 수원에 ‘화성(華城)’을 축성할 때 수원부 유수로 큰 업적을 남긴 무인이다. 1768년(영조 44)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무관직을 두루 거친 다음, 1785년(정조 9)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됐다. 같은해 3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한 뒤, 좌포도대장· 총융사에 이어 1789년 수원부사(水原府使)에 임명됐다. 이 무렵 수원이 매우 중시돼 정조대왕의 생부 사도세자 묘소(후일 현륭원, 융릉)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천장하는 일, 수원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기는 일 등 어려운 임무가 많았으나 모두 차질없이 완수하고 1791년 훈련대장으로 직을 옮겼다. 그뒤 총융사· 금위대장·어영대장 등을 역임하였고, 1794년 승격된 수원부 유수로 다시 등용돼 화성 축성, 화성봉수대 설치 등의 방어시설은 물론 호수를 중심으로 송림을 보호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두 차례에 걸쳐 전후 5년 간을 수원지방관이 된 그는 정조대왕으로부터 업적을 인정 받아 우의정 채제공(蔡濟恭)과 함께 가장 뚜렷한 공신으로 평가돼 1797년 이후 한성판윤·형조판서·대호군·장용대장(壯勇大將)을 지냈다. 무관으로서는 보기 드문 명필이었으며 특히 대자(大字)에 뛰어났다. 수원 신읍치 조성, 화성 축성시 정조대왕에게 올린 장계·소계·계상 등은 유명하며 특히 어명을 받들어 정조 18년(1794년) 1월부터 정조 20년(1796년) 8월까지 근 3년동안 화성 성곽 축조의 시말과 제도·의식 등을 자세히 기록한 책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편찬에 착수한 일은 유명하다. 즉 세계문화유산적인 ‘화성성역의궤’는 성역을 끝낸 지 약 한달 후인 1796년 9월 10일 정조대왕이 조심태에게 하명한 데서 비롯됐고 그후 약 두달 후인 11월 이루어졌다. 불과 200여년 전 일이다. 조심태 수원부유수의 후손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지 문득 궁금해진다. /임병호 논설위원

강감찬 장군 동상

강감찬(姜邯贊·948~1031)장군은 고려의 문신이며 명장이다. 경관직(京官職)인 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와 외관직인 서경유수(西京留守)를 겸직했던 현종 9년(1018), 거란의 소배알이 10만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였을 때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가 되어 거란군을 격파했다. 특히 구주(龜州)에서의 대첩은 대외항전사상 중요한 전투의 하나다. 정예기병 1만2천 고려군은 흥화진(興化鎭·의주 위원면) 산기슭에 잠복했다. 고려군은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아 두었다가 때를 맞추어 큰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거란군을 수장시켰다. 침입군 10만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다고 한다. 장군은 거란과의 항전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개경(開京)에 나성(羅城)을 쌓을 것을 주장하여 국방에 대하여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강감찬 장군은 낙성대(落星垈·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출생하고,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는데 호국 위업을 기리는 동상(銅像)은 수원 팔달산 중턱에 있다. 장군 동상은 1971년 6월29일, 애국조상건립위원회(위원장 문화공보부장관 신범식)와 서울신문사가 공동주관, 기공한 이후 1971년 10월 준공됐으며, 1972년 5월4일 국무총리 김종필을 비롯한 정부요인과 수원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을 가졌다. 남창동 산 1번지 대지 500평에 조각가 김영준의 조각으로 세워진 장군 동상은 원상(原像)높이 4.5m, 좌대높이 5.7m, 전체높이 10.2m, 청동주물상 5t, 마상 길이 5m의 거대한 기마(騎馬)동상이다. 경기도 수부 주산(主山)에서 마상의 강감찬 장군이 당장이라도 적진을 뚫고 나갈듯한 국난극복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어 시민들이 즐겨 찾는다. 그런데 장군 동상이 서 있는 자리가 하필이면 최근 중건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성신사(城神祠·24일자 ‘지지대’ 참조)의 원래 터여서 이전이 시급해졌다. 한때 낙성대로의 이전설이 있었으나 그 곳 보다는 수원의 자산이므로 숙지산공원으로 옮겨 중국 대륙, 서쪽을 향해 말(馬)머리를 돌렸으면 좋겠다./임병호 논설위원

성신사

“병진 7월 갑진삭 11일 갑인 절충장군 독성 김후는 감히 화성(華城)의 성신(城神)에게 밝히 고합니다. 엎드리어 생각컨대 물건이 크게 강하게 되는 데에 신의 힘이 없는 법이 없습니다. 이 큰 고을에 성을 쌓았으니 이것이 모두 지신(地神)의 덕입니다. 왕국의 울타리이고 자제들에게는 가리개 구실을 할 것입니다. 이 성을 쌓을 때에 명공을 빌기 위하여 서쪽 기슭에 집터를 잡고 임금께서 엄숙히 임어(臨御)하시고 큰 마음을 쓰시어 제사를 올리어 흠향하게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복과 수를 주시어 몇 억만년의 국기(國基)가 여기에 이루어졌습니다. 처음과 같이 영원하게 복을 드리워 주시옵소서. 삼가 희생(犧牲)과 단술로 몇 가지 음식을 진설하오니 밝히 흠향하시옵소서.” 1796년 7월11일 독성 중군 김후가 올린 성신사개기고유제문(城神祠開基告由祭文)이다. 조선조 제22대 정조대왕은 화성 성역이 완료되는 시점에 수도 한성부의 종묘와 같은 공간 조성의 필요성을 느꼈다. 갑자년(1804) 양위 후 수원으로의 이어(移御)를 위하여 화성유수부(수원)의 위상을 높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조대왕은 모친 혜경궁 홍씨가 고희를 맞이하고 세자(후일 순조)가 15세가 되는 갑자년에 왕위를 물려주고 모친과 수원에서 살려고 했었다. 정조대왕은 화성 성역시 서울의 제도와 같이 사직단, 문묘, 종각 설치와 더불어 성신사를 설치하고 성신사 완공 후 성신에 대한 고유문(告由文)을 직접 짓기까지 하였다. 특히 성신사 낙성연에 친히 참석하여 제사를 주관코자 했으나 갑작스런 서울의 홍역 창궐로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수원행차를 취소하였다. 최근 사단법인 화성연구회가 일제 강점기에 멸실된 성신사를 중건하기 위하여 ‘성신사중건추진위원회’를 발족키로 한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다. 화성 보호를 성신에게 축원했던 성신사는 정조대왕이 수원에 올 때마다 참배하였을 뿐 아니라 화성유수가 대소사 시행 전 만사형통을 기원한 유서깊은 장소다. 성신사가 중건되려면 강감찬 장군 동상 이전과 5억원의 사업비가 필요하다. 수원시의 관심과 예산 배정이 요청된다. /임병호 논설위원

‘영웅시대’

텔레비전 드라마에 뭣 뭣은 등장시키지 말라고 했던 관권개입의 시절이 있었다. 예를 들면 포장마차가 한 사례에 속한다. 문공부에서 이같은 지시가 방송사에 떨어지면 예능국은 이를 공지사항으로 PD들에게 게시하곤 했다. 5공시절의 일이다. 역시 5공시절이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 꼭 빼닮은 KBS탤런트로 박용식씨가 있었다. 얼굴도 닮았지만 대머리 형상이 영락없이 똑 같았다. 문공부의 압력이 떨어졌다. 그를 출연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궁리끝에 가발을 씌워 출연시켰다. 나중에 무슨 5공화국 드라마에서 박용식씨는 실제로 가발을 벗은 전두환역을 맡았다. 물론 그땐 전씨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간 뒤다. 그 무렵에 전씨는 자신의 재임 중 박용식씨가 겪은 고초를 알고 자택에 초청하여 희한하게 닮은 것을 화제삼아 위로하는 자릴 갖기도 했다. MBC-TV ‘영웅시대’가 외압으로 조기에 종영한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신화적 경제건설을 소재로 한 것이 현 정권의 권력층 비위를 상하게한 것 같다. 당초 100부(회)를 예정했던 것을 70부로 줄이게 될 모양이다. 이렇게 되면 어제 68부를 마쳤으므로 다음주에 종영된다. 박정희의 경제건설은 정치적 평가와는 달라서 부정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이를 띄운다고 해서 한나라당 대표로 있는 박근혜에게 정치적 이득이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과거사 문제로 박정희 때리기에 걸림돌이 된다고 보는 정권 차원의 어떤 외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다 보니 시청률이 더 높아져 무려 20%를 돌파하고 있다. 이상한 것은 외압은 있었으면서 외압설은 부인되고 있는 사실이다. 문광부나 다른 그 어디에서도 외압설을 부인한다. 드러내놓고 외압을 가했던 5공시절보다 더 비겁한 은폐가 아닌가 생각된다. 표현의 자유를 말하면서 단 것은 표현의 자유에 속하고 쓴 것은 표현의 자유를 막는 것 같다. 부도덕한 정권의 단면이다. /임양은 주필

‘억대’ 내기골프

‘돈이나 재물을 걸고 서로 따먹기를 다투는 것’. 도박에 대한 국어대사전의 낱말풀이다. ‘요행수를 바라는 돈내기’라고도 풀이했다. 억대 돈내기 골프에 서울남부지법 형사단독 이정렬 판사는 무죄 판결을 내렸다. ‘골프 기량이 우연보다 지배적이면 도박이 아니다’라고 판결이유를 밝혔다. 스포츠는 실력, 기량이 우선이긴 하지만 비슷한 기량에서는 운이 승부를 가름한다. 운에도 승운(勝運)과 패운(敗運)이 있다. 이런 운도 역시 실력이 좌우한다고는 한다. 말인즉슨 그렇다. 하지만 실력밖의 운을 인정하는 것이 스포츠 세계의 통념이다. 운은 행운과 불운이 있다. 이 판사가 밝힌 기량이라는 것이 이같은 운, 즉 우연의 가름을 얼마나 깊이 살폈는 지가 심히 의문이다. 요행은 필연이 아닌 우연이다. 필연적 기량만 보고 우연의 요행수를 간과하였다면 실체적 진실을 제대로 통찰했다고 보기가 심히 어렵다. 사회적 관념으로도 승복하기가 난해하다. 돈이나 재물을 걸고 서로 따먹기를 다투는 것은 수단이 기량이든 요행이든 간에 도박으로 보는 것이 사회적 인식이다. 법률상으로도 법리해석에 오류가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오락의 정도를 넘어선 돈내기는 형법상의 범죄가 성립된다고 보는 것이 그간의 경험법칙이다. 수단 방법이 기량이든 운이든 어떻든 억대 돈내기는 그들이 아무리 돈많은 부호일 지라도 사회통념상 오락으로 볼 수 없는 도박이다. 일부러 져주어 뇌물을 줄 수 있는 부정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선량한 풍속과 공공의 질서를 현저히 해치는 것이 억대 돈내기 골프인데도 무죄가 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정렬 판사는 종교상의 이유로 입대를 거부한 병역 기피자에게 양심의 자유를 들어 무죄를 내린 바 있는 이른바 튀는 판사다. 판사는 직분일 뿐 그도 인간이다. 억대 돈내기 골프의 항소심 판결이 앞으로 주목된다. /임양은 주필

자승자박

의도적으로 스캔들에 휘말리도록 하거나 (‘노이즈 마케팅’), 부정적 이미지를 일부러 퍼뜨리는 (‘네거티브 마케팅’)영화 마케팅이 범람하고 있어 큰일났다. 주로 제작단계에서 주목을 끌지 못한 영화가 개봉에 임박하자 ‘악 소리 한번 내자’는 식이다. ‘무등산 타잔 박흥숙’은 홍보포스터에 ‘전라도 새끼가 깡패밖에 할게 더 있냐’고 했다. ‘돈벌레 ××들, 그렇게 돈벌고 싶냐’ 는 등 날선 목소리가 이어지자 “주인공 박흥숙이 연좌제로 사법고시에 떨어진 후 내뱉는 자조일 뿐”이라고 해명한 후 “영화를 만든 제작자, 투자자, 감독 모두 전라도 광주 출신인데, 저희가 왜 지역 감정을 조장하겠느냐”고 사과문을 발표했다. ‘선정적이고 욕 먹어도 눈길만 끌면 된다’는 방식은 비일비재하다. ‘모르는 척, 순진한 척! 여자들도 자we를 할까’ 등 자극적인 광고문구를 도발적인 포즈의 여주인공 사진과 함께 넣은 포스터를 영상물등급위원회가 반려한 ‘몽정기2’가 대표적이다. ‘여선생vs여제자’는 영화의 내용과 무관한 ‘미술선생과 여제자와의 원조교제 현장고발’이란 벽보를 거리 곳곳에 붙여 일부러 문제성 영화인양 포장했다. 영화의 소재나 표현의 자유는 긍정수준을 넘어 자해단계로 접어들었다. ‘생과부 위자료청구소송’이나 ‘넘버3’같은 영화에는 듣기 민망할 정도의 욕이 들어갔다. ‘나쁜 영화’는 청소년들의 일탈문제를 다뤘지만 욕설과 폭력은 물론 당시 영화 심의기준으로는 수용할 수 없는 성적 표현을 담아 논란을 일으켰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바람난 가족’등은 결혼의 의미나 가족의 가치를 해체하는 성 표현들을 썼다. 미성년자인 중학생의 임신과 출산, 육아를 다룬 ‘제니, 주노’는, 노인들의 연애 이야기를 다루면서 실제 성행위 장면을 삽입해 논란을 일으킨 ‘죽어도 좋아’의 반대쪽을 겨냥한 영화다. 자극적 표현이나 논란거리 소재는 단기적으로 흥행요소가 될 수 있으나 자제와 여과가 없는 집착은 목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시는 격이다. 또 겉과 속이 다른 내용에 여러번 배신당하다 보면 관객에게 남는 것은 영화에 대한 불신뿐이다. 막가는 영화마케팅과 자해단계인 소재나 표현의 자유는 영화인들의 자승자박이다./임병호 논설위원

김수영 異說

김수영 시인이 한국 문학사에 남는 작품을 쓴 사람임에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최고의 시인’이라는 극찬에는 이론이 있을 수 있다. 문학, 특히 詩에 최고, 최상은 없다. 공감이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수영을 광복 후 최고의 시인으로 꼽아온 평가들은 지나친 것이었다. 그는 참여시인의 전형으로 우상화됐다. 여기에 최면이 걸린 일부 연구자들이 그의 (일부)시들에 심오한 내용이나 있는 듯이 떠벌리는 것은 한편의 코미디같다”는 오세영 시인(서울대 국문과교수)의 말은 일리가 있다. “김수영 시의 한 흐름을 이루는 쉬르리얼리즘(초현실주의)시의 경우 자동기술법과 무의미한 진술들을 내세워 황당무계하게 독자들을 우롱한 면이 있다. ‘아메리카 타임지’나 ‘공자의 생활난’같은 시는 수준미달이고 일종의 시적 사기(詐欺)여서 논란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우습다”고 혹평했다. <꽃은 열매의 상부(上部)에 피었을 때 / 너는 줄넘기 작란(作亂)을 한다. // 나는 발산(發散)한 형상을 구하였으나 / 그것은 작전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 국수 -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일까. //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공자의 생활난’전문이다. 오세영 시인의 비판은 계속된다. “김수영 시의 또 다른 흐름인 참여시의 경우 4·19혁명 이후 5·16군사정변 이전 표현의 제약이 거의 없던 시절에 쓰인 것이다. 시류를 탔던 것이며, ‘혁명을 잘 해보자’는 ‘어용시’를 썼다고 볼 수도 있다. 시의 고발 내용조차 관념적 추상적이다. ‘자유’ ‘혁명’이란 시어를 자주 썼지만 포즈(pose·겉모양)로서 쓴 것 같다. 그는 심지어 5·16군사정변도 ‘혁명’이라고 썼다.” 오세영 시인의 신랄한 바판에 계간문학지 ‘창작과 비평’을 만든 백락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김수영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다”고만 말했다. 김수영 시인은 1998년 문학평론가 50인의 광복 후 대표시인 중 ‘1위’로 뽑았었는데, 그가 만일 살아있다면 어떻게 대처했을 지 궁금하다. 사후에 수제자로부터 악평을 받은 서정주처럼 여하간 죽은 사람은 억울하다. /임병호 논설위원

한명숙 의원

열린우리당 이미경 의원이 기자간담회를 열어 “당의장 및 상임중앙위원 경선에 출마하지 않고 한명숙 의원을 의장에 당선시키기 위해 뛰겠다”고 선언했다. 이미경 의원은 작년 1월 전당대회에서 자력으로 5위로 당선된 바 있으며 1년여간 상임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당내 여성의원 중 최다선인 3선으로 문광위원장을 맡고 있는 등 비중있는 인물이어서 당의장 재출마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한명숙 의원을 지원하겠다는 이 의원의 선언에는 ‘큰 힘’이 실려 있다. 한명숙 의원은 환경부·여성부 장관을 역임했다. 17대 총선에서 안전한 전국구를 마다하고 경기 고양의 ‘강남’으로 통하는 일산갑에서 한나라당 중진 홍사덕 전 의원과 맞섰다. 그리고 이겼다. 한 의원은 때만 되면 (이름이)거명됐다. 정동영 전 의장이 입각한 작년 5월과 신기남 전 의장이 중도하차한 8월 그리고 작년 말에도 여당 수장으로 거명됐다. 이해찬 총리 입각 때는 마지막 유력 후보로 오르내렸고 지난 1월에는 교육부총리를 고사했다. 한 의원은 여성운동 1세대다. 민주화투쟁으로 옥살이도 했다. 그러나 이미지가 부드럽다. 오랜 민주화투쟁 경력에도 모나지 않고 두루두루 친한 탈계파 관리형 이미지가 호감을 준다. 현재 열린우리당 여성의원들 가운데 김희선 조배숙 의원이 의장출마 여부를 저울질 중이고, 박영선 의원은 주변의 출마권유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미경 의원이 “오는 21일 당소속 여성의원 18명이 참여하고 있는 ‘여성정치네트워크’ 전체회의를 열어 후보단일화 문제를 공론화하겠다”고 말했다. 한명숙 의원측도 내주 중 출마선언 등 최종결정을 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문희상, 염동연, 김혁규, 유시민, 김두관씨 등 남성들이다. 초반 판세는 문희상 의원이 선두라지만 뚜껑은 열어봐야 안다. 한명숙 의원은 ‘노란 샤스의 사나이’를 부른 왕년의 인기가수 한명숙씨와 이름이 같아서인 지 대중적이기도 하다. 한의원이 열린우리당 의장이 된다면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민주노동당 김혜경 대표 등 한국정치사 최초로 여야 3당 모두에서 여성·당의장(대표)시대가 열린다. 한명숙 의원을 주목하는 또 다른 이유다./ 임병호 논설위원

국토 녹색화

2월16일 공식 발효된 ‘교토(京都)의정서’는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국제협약이다. 1992년 유엔이 주도해 1997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기후변화협약 3차 총회에서 채택, 교토의정서로 명명됐다. 교토의정서가 규정한 온실가스는 이산화탄소, 메탄, 아산화질소, 수소화불화탄소, 과불화탄소, 육불화황 등 6가지다. 교토의정서는 그러나 세계 1위 온실가스 배출국인 미국이 2001년 자국산업의 피해와 다른 나라들과의 형평성 등을 내세우며 탈퇴해 그 의의가 반감됐지만, 세계적 차원에서 지구 온난화에 대한 대처가 시작됐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우리나라는 현재 개발도상국 그룹에 속해 있어 교토의정서 1차 공약기간 (2008 ~ 2012)에는 온실가스 감축대상국에서 제외된 상태다. 그러나 2차 의무감축기간(2003 ~2017년)에는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이행하여야 한다. 문제는 우리나라가 2001년 기준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 세계 9위이면서 배출 증가 속도는 세계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 12위의 무역대국으로 언제까지나 개도국으로 인정받기를 바랄 수도 없다. 정부가 올해부터 3년간 21조 5천억원을 투입해 교토의정서 발효에 대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늦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대책을 서둘러야만 한다는 데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우리나라가 온실가스 배출량을 10% 줄여야 할 때 들어가는 비용은 2020년을 기준으로 최대 28조6천323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철강 화학 전력산업 등은 생산과 수출에 심대한 타격을 받을 전망이다. 지금과 같은 무방비상태로 감축의무를 졌다가는 ‘환경재앙’에 앞서 ‘경제재앙’에 나가떨어지기 십상이다. 교토의정서는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온실가스를 줄이려면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중화학공업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금융 의료 법률 교육 문화 관광 등 지식서비스 산업의 비중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 석유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에너지원을 찾아내야 한다. 특히 온실가스 흡수원인 숲을 많이 가꿔야 한다. 산림청이 전체 온실가스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이산화탄소를 줄이기 위해 국내에 490만ha의 숲을 가꾸겠다고 밝혔다. 국토의 녹색화가 살아 남는 길이다. /임병호 논설위원

철새

철새는 1년에 최대 2만5천㎞를 이동할 수 있다고 한다. 지구 둘레의 60%를 넘는 거리다. 검은가슴물떼새는 하와이에서 알래스카까지 3천800㎞를 ‘논스톱 비행’한다. 철새들이 장거리 비행에서 쓰는 연료는 ‘지방’이다. 무게당 연소 효율이 높기 때문이다. 지방 1g으로 200㎞를 가는 새도 있다. 이동 직전의 철새는 하루동안 체중의 10% 이상을 몸에 비축하기도 한다. 이 무렵의 에스키모쇠부리도요는 피부 바로 밑까지 지방으로 가득 차서 ‘만두새’로 불린다. 캐나다기러기와 같은 몇몇 철새는 앞의 새 뒤에 딱 붙어 비행한다. 앞에 가는 새의 날개가 만드는 소용돌이를 이용하면 비행이 쉬워지기 때문이다. 유리무당새는 별자리로 방향을 정한다. 기러기나 도요새 종류는 체내에 ‘나침반’을 가진 것처럼 이동 중 일정하게 방위각을 유지하며 그 결과 최단거리 이동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 매일 생기는 ‘나침반’의 오차는 지는 해를 보며 보정한다. 철새에 대한 일반적 이미지와는 달리 대부분의 철새는 밤에 이동한다. 대기가 시원해 체온을 적절하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몸집이 크고 글라이더처럼 유영하는 맹금류는 주로 낮에 이동한다. 햇볕이 대지를 달구면서 상승기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철새는 바다 위를 오래 나는 것을 싫어한다. 따라서 대륙이 가늘게 이어지는 중미, 아프리카와 유럽이 가깝게 만나는 지브롤터 해협 등이 철새의 집결지가 된다. 아프리카와 유라시아가 만나는 이스라엘은 매년 가을 200만 마리의 철새가 지나가 장관을 이룬다. 철새에게도 불행이 닥칠 때가 많다. 매년 수천 마리의 철새가 송전탑에 부딪혀 죽는다. 인간이 변화시킨 환경이 매년 철새들에게 ‘돌아가지 못할’여행을 강요하는 것이다. 번식지나 월동지 못지 않게 철새 경유지의 산림 남벌 등 환경변화 하나도 치명적효과를 불러온다. 한때 ‘철새 정치인’이라는 용어를 쓰지 말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나름대로 규칙과 규율이 있는 철새를 줏대없이 옮겨다니는 정치인과 비교할 수 있느냐는 뜻에서였다. 하지만 무리 전체가 이동하는 철새는 일부라고 한다. 주로 ‘먹을 것’을 찾아 이동한다는 것이다. 추운 곳이라도 양식이 풍부하면 새들은 떠나지 않는다. ‘사람 철새’도 이와 같다./임병호 논설위원

백설

‘수호전(水滸傳)’에 이런 장면이 전개된다. 80만 금군(禁軍)의 교두(敎頭)였던 표자두(豹子頭) 임충(林沖)이 날조된 죄를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창주(?州)로 유배되어 폭설 속에서 고생하는 이야기다. 임충을 죽이기 위해 고태위가 밀파한 네명의 자객이 그를 초료장(草料場) 관리인으로 삼고 그가 잠든 사이에 초료장을 불태울 계획을 짠다. 때는 엄동설한이어서 폭설이 내려 추위에 떨던 임충이 술을 사기 위해 먼 주막까지 길을 나선다. 날은 춥고 어두운데 임충은 폭설이 퍼붓는 길을 술병을 매단 긴 창을 어깨에 멘 채 걸어간다. 술을 사 가지고 돌아오니 거대한 초료장은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임충이 잠시 다른 곳에 피신한 사이 자객들은 임충이 안에 있는 줄 알고 초료장을 불태운다. 목초를 쟁여둔 창고가 불길에 휩싸이고 분노한 임충이 자객 넷을 죽이는 사건이 뒤를 잇는데 그 사이에 눈은 갈수록 세게 퍼부어 대지를 하얗게 덮는다. 폭설 속에서 음모와 분노, 살인과 복수가 벌어지지만 눈은 그러한 인간들의 추태를 아랑 곳 하지 않고 뒤덮어 버린다. 임충이 긴 창 끝에 술병을 매달고 폭설을 헤치며 가는 장면은 상상할수록 비장미가 넘친다. 폭설 속에서 불타는 초료장의 거대한 불길도 눈에 선한 ‘수호지’의 이 장면은 불운에 좌절하지 않는 임충의 강렬한 분노와 의지를 보여준다. 우리나라 순조 연간의 시인 이양연(李亮淵)의 작품에 ‘야설(野雪)’이란 시가 있다. “눈발을 뚫고 들판 길을 걸어가노니(穿雪野中去) /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자(不須胡亂行) / 오늘 내가 밟고 간 이 발자국이(今朝我行跡) / 뒷사람이 밟고 갈 길이 될테니(遂作後人程)” 백범 선생이 애송했다는 이 시를 읽으면 갈등의 세상을 헤쳐가는 묵직한 인생행보가 보인다. 내가 처음 걸어간 족적을 따라 올 뒷 사람의 행보를 위해 신중하게 걸어가는 것은 도인의 길이다. 겨울 가뭄을 해소하고 초목의 뿌리를 적셔주는 백설이 함박으로 내려 이 세상 추한 것을 잠시라도 덮어 주었으면 좋겠다. /임병호 논설위원

우주개발 예산

1996년 수립된 우리나라 국가우주개발 중장기 계획은 2015년까지 총 20기의 인공위성 개발·발사, 저궤도 우주발사체(로켓)의 국내 독자개발 능력을 확보하고 세계 10위권의 선진우주국으로 진입한다는 게 목표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원칙 아래 심우주(지구로부터의 거리가 달과 같거나 그보다 먼 우주공간) 탐사나 순수과학보다는 실용적 목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화성이나 토성 탐사와 같은 선진국의 심우주 개발은 부럽다. 하지만 우리 현실과는 여러모로 아직 거리가 있다. 그래서 국가의 정보주권 확보 및 공공수요 충족을 위해 실용위성 및 저궤도용 소형 우주로켓 개발에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아리랑위성 2호와 통신해양기상위성 및 우주로켓 KSLV-1 개발과 우주센터 건설, 우주인 양성 등에 나서고 있다. KSLV-1은 100㎏급 과학기술위성 2호를 지구 저궤도로 발사할 수 있는 소형 우주로켓으로 2007년에 발사할 계획이다. 현재 전남 외나로도에 세워지고 있는 우주센터는 세계 13번째의 인공위성 발사장이다. 우리나라가 우리의 위성을, 우리의 우주로켓으로, 우리 땅에서 쏘아올리는 데 성공하면 2007년은 우리 과학기술의 신기원을 이룩하는 중요한 해가 될 것이다. 나아가 세계 9번째로 스페이스 클럽에 가입하게 된다. 국내에서 우리 우주로켓으로 우리 위성을 쏘아 올리는 것은 올림픽이나 월드컵축구경기의 국내 개최 못지 않게 미래의 온갖 분야에서 긍정적 효과로 나타난다. 우주개발은 국력의 상징이다. 또 국가신용도를 높이고 청소년들에게 과학기술의 꿈을 제공하며 고부가가치의 첨단 신산업을 창출한다. 앞으로 개발될 9개의 위성을 외나로도 우주센터에서 발사하는 것 만으로도 외화 2천억원 이상의 발사 및 시험비용을 아끼는 효과가 있다. KSLV-1 개발도 그 경제적 파급효과가 개발비의 6배 이상인 3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우리나라의 우주개발은 역사는 짧지만 발전된 정보기술(IT)과의 융화 및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우주개발 예산이 너무 적다. 미국의 140분의 1, 일본의 30분의 1에 불과하다. 이것이 문제다./임병호 논설위원

닭꿈

꿈에 닭이 훌쩍 나무 위로 뛰어 오르는 꿈을 꾸면 직장인은 진급할 꿈이요, 실업자나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은 원하는 직장에 입사할 꿈이다. 닭이 달걀을 품고 있는 꿈은 오랫동안 정성을 쏟은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꿈이다. 꿈에 먹음직스런 통닭을 배불리 먹고 행복해 하면 입신양명하거나 돈을 갈퀴로 긁어 모을 정도로 부자가 될 꿈이다. 안마당에 모여 있는 닭에게 모이를 던져주는 꿈은 좋은 투자처가 나올 꿈이고, 닭을 독수리가 물어 죽이는 꿈은 경쟁상대나 경쟁사를 누르고 프로젝트를 수주하거나 좋은 성과를 얻을 꿈이다. 닭이 나타나는 흉몽도 있다. 수탉끼리 죽일 듯이 싸우거나 수탉이 쪼려고 덤벼드는 꿈은 부부끼리, 형제자매끼리 다툼이 일어나거나 가족 중 한 명이 병에 걸려 고생할 꿈이다. 닭들이 졸고 있는 닭장 안을 고양이가 들여다보는 꿈은 재산에 손해를 입히는 사람이 나타날 수 있음을 알려주는 꿈이다. 해몽가의 이러한 말들이 모두 맞는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우리 조상들은 대체적으로 닭에 호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해가 바뀌고 날이 바뀌어도 늘 그 힘찬소리로 동을 트게 했던 닭이 어김없이 을유년 정월 초하루를 열어 제쳤다. 닭이 홰에 올라 앉아 우렁차게 매일 아침 우는 습관을 활용해 고려 때엔 시보용(時報用)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닭이 매일 같이 우렁찬 소리로 어두컴컴한 세상을 밝히는 것은 닭의 뇌 속에 들어 있는 송과체(松果體)라는 내분비기관 때문이라고 한다. 이 송과체가 날이 밝을 무렵 미미하고 어스레한 빛까지 감지해내기 때문에 닭이 사람보다 혹은 다른 동물보다 먼저 활동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또 닭은 우렁찬 소리를 내지름으로써 아직도 건재한 존재임을 다른 닭에게 알리려는 의도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 조상들은 정월 초하루를 닭의 날(上酉日)이라고 하여 광·대문 등 집안 곳곳에 닭 그림을 붙여 액막이를 했다. 닭이 액운을 쫓아주고 행운을 안겨주는 길조라 여겼기 때문이다. 닭꿈을 꾸면 부귀공명(富貴功名)한다니 을유년에 내남 없이 흉몽은 말고 길몽들을 많이 꾸었으면 좋겠다. /임병호 논설위원

정월 세시풍속

예전에는 정월(正月)에 한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세시풍속이 많았다.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해도 풍속의 뜻은 거의 같았다. 평양북도 강계 지역에서는 설날 첫닭이 울자마자 농부들이 부잣집의 퇴비를 몰래 훔쳐다가 자기 집 퇴비 위에 던지는 풍속이 있다. 부잣집 기운이 옮겨온다는 속설때문이었다. 정월 대보름 때 부잣잡 흙을 훔쳐다가 자기 집에 뿌리는 ‘복토 훔치기’ 풍습도 이와 유사한 맥락이다. ‘생선 온마리 먹기’도 있다. 경기·경상·충남·강원 등에서 전승된 풍속으로 정월 대보름 날 아침에 반찬으로 주로 청어를 통째로 먹었다. 건강을 기원하는 한편 비린내가 적은 청어를 먹어 여름철 집안에 파리가 많이 꾀지 못하도록 하고, 머슴들을 푸짐하게 대접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복합적 뜻이 담겼다. 정월 대보름 때 무슨 일이든 아홉 번씩 해야 건강하고 부지런하게 살 수 있다는 믿음에서 전국적으로 행해진 ‘나무 아홉 짐 하고 밥 아홉 번 먹기’도 있다. 매월 1, 8, 13, 18, 23, 24일은 ‘인동토일(人動土日)’이라고 해서 흙을 다루면 지신(地神)의 노여움을 산다고 믿었는데 특히 정월 초하룻날을 조심했다. ‘동티’라는 말의 어원도 흙을 움직인다는 한자에 동토(動土)에서 나왔다. 정월 초이렛 날은 사람을 소중히 여긴다고 해서 ‘사람날(人日)’로 불렀고, 평남 용강에서는 열 나흗날을 ‘부인날’이라고 부르면서 여성들의 이웃집 방문을 환영하는 풍습이 있었다. 집안에서 살림만 하는 부녀자들에게 나들이를 하도록 배려를 한 것이다. ‘처갓집 세배는 앵두꽃을 꺾어 갖고 간다’는 말은 설 관련 속담이다. 낭만적으로 생각되지만 실은 세배는 정초에 해야 하는데 처갓집 세배는 앵두꽃이 피는 봄에나 가는 것이라며 처갓집 챙기는 것을 은근히 타박할 때 썼다. 그러나 요즘은 세태가 변해 사위들이 처가부터 챙긴다. 며느리들도 친정행을 당당히 밝힌다. 젊은 부부들일수록 시댁(남편쪽)의 차례를 지내거나 세배를 올리자마자 친정(처가)에 갈 준비에 바쁘다. 시부모가 안계신 가정은 아예 설날 전에 처가로 가는 경우도 있다. 바야흐로 여성시대다. / 임병호 논설위원

설 연휴와 ‘술’

중국의 고대 역사소설 ‘삼국지’를 보면 술 먹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화친이나 음모를 도모하면서도 으레 술을 마신다. 중세의 양산박을 무대로 하는 ‘수호지’역시 노다지 술 타령이다. ‘삼국지’는 위·오·촉한의 세나라 영웅이 천하를 다투는 소설이고 ‘수호지’는 송대의 썩은 벼슬아치들에게 불만을 품은 호걸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그 당시 이들이 마신 술은 요즘말로 하면 배갈(고량주)이다. 잔도 지금처럼 작은 고량주 잔이 아니다. 사발 분량만한 잔이 따로 있어 다 마시고 나면 잔을 머리위에 올려 뒤집어 보인다. 잔을 권한 상대에게 다 마셨다는 성의 표시다. 소주가 국내에 보급된 것은 고려 때다. 원나라에서 들어왔다. 그러나 소주를 내리는 데 곡식이 많이 들어 대중화되진 못했다. 조선시대엔 흉년이 들면 제조 금지령을 내리곤 했다. 또 주정으로 만든 지금의 소주와는 달리 원액이므로 알코올 농도가 무척 높았다. 소주 내리는 게 직접 보이지 않아도 멀리까지 풍기는 냄새만으로 소주 내림을 알 수 있을 정도다. 조선시대의 술은 이래서 곡식이 덜 드는 누룩 술이 주종을 이루었다. 양반계층은 약주, 상민계층은 탁주(막걸리)를 많이 애용했다.(정종은 원래 일본 술이다) ‘압셍트’는 일종의 화주(火酒)로 알코올 농도가 70% 가량 된다. 천재 화가 고흐가 평소 이 술을 즐기다가 한번은 자신의 귀를 자르는 기행을 저지른 것으로 유명하다. 술의 강력한 환각작용 때문이다. 스위스에선 1908년 한 근로자가 ‘압셍트’의 환각작용으로 처자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자 판매금지조치를 취했다. 그런데 스위스 당국은 이번에 유해물질의 농도를 조절한다는 주류업계의 요청을 받아들여 96년만에 판금조치를 해제했다. 설 연휴에 들어선다. 명절이면 또 그냥 넘길 수 없는 것이 술이다. 이래 저래 안 마실 수가 없게 된다. 마신다 해도 배갈이나 내린 소주도 아니고 ‘압셍트’같은 독한 술이 아니지만, 과음하면 몸에 안 좋고 또 실수하기가 쉽다. 설 연휴에 술을 절제해 마시는 생활의 지혜가 요구된다./임양은 주필

호주제 폐지

최근 미국에서는 고학력 여성이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르는 비율이 다시 높아졌다고 한다. 하버드대 클라우디아 골든 교수(경제학) 연구팀은 1990년 대졸 여성의 23%가 결혼한 뒤에도 처녀 때 성을 그대로 썼지만, 2000년에는그 비율이 17% 줄었다고 논문에서 밝혔다. 1980년에는 하버드대 기혼여성 학생 44%가 결혼 전 성을 사용했지만 1990년엔 32%로 감소했다고 한다. 골든 교수 연구팀은 여성해방주의가 득세했던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는 ‘결혼은 남녀의 전쟁터’라는 주장이 여성 사이에 퍼지면서 결혼 전 성을 그냥 쓰는 것이 유행했지만 그후 ‘남녀는 결혼 생활의 동등한 동반자’라는 인식이 미국 사회에 자리 잡았고 여성이 굳이 처녀 시절 성을 고집해 남편과 ‘대립’할 필요를 못느끼게 되면서 거부감 없이 남편 성으로 바꾸고 있다고 해석했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호주제를 폐지하였으나 종전의 가족공동체와 호적은 사실상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심지어 자민당의 헌법조회사가 발표한 ‘일본국헌법개정요강안’에는 일정 범위의 ‘가(家)제도 복원’이 헌법개정의 방침으로 되어 있기까지 하다. 일본은 호주제도를 폐지한 결과 성(姓)씨가 3만여 개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호주 대법원에서는 호주양부모가 한국입양아의 이름을 호주식으로 바꾸게 해달라는 개명신청에 대해 “태어날 때 붙여진 이름은 개인의 정체성(正體性) 일부이기 때문에 함부로 이름을 바꾸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그제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9명 중 6명이 위헌, 3명은 합헌으로 “호주제는 姓 역할에 관한 고정관념에 따라 호주를 승계하는 순위나 혼인 때 신분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 정당한 이유 없이 남녀를 차별하는 제도”라며 “양성평등과 개인존엄에 위반된다”고 “호주제는 헌법불합치”라고 결정했다. 세월은 변함없이 유수와 같이 흐르는데 세태는 그야말로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 결혼을 하고도 남녀 성을 각각 쓴 것은 아마 호주제 폐지를 일찍이 예고한 것 같다. “내가 잘못 했으면 성을 갈겠다”는 최후의 항변도 머지않아 없어질 듯 싶다. /임병호 논설위원

입춘대길

1970년대 중반 무렵 한 노동자 시인은 입춘 날 ‘입춘대길’이라는 詩를 이렇게 썼다. “난세의 영웅처럼 기다리던 / 입춘날이 오면 우리는 / 장쓰미네 왕대포집에 모여 / 해마다 입춘 환영식을 근사하게 열었다. // 일거리 없어 겨울 내내 연장 가방 속에서 / 몸 뒤틀며 신음하던 고데를 꺼내 / 넹가 망치로 멋지게 두들겨 보며 / 봄나무처럼 우리는 물줄기를 찾았다. // 일에 미쳐 / 돈벌이에 환장해서 / 정말이지 오줌 누고 / 그것 볼 사이도 없었지, / 봄 여름 가을 무관했던 / 여편네 외로운 궁둥이에 장작불 / 지피는 것도 좋지만 / 눈 내리는 저녁 풍경을 바라보며 / 잊었던 사랑의 말씀으로 / 영혼을 적시는 노래도 불렀었지만 / 어서 가거라, 겨울이여 // 도둑질, 역적질만 빼놓고 / 하여튼 움직여 밥벌이 해야지. / 밤 새워 분해한 자본주의론. // 마침내 위대한 우리의 계절이 왔느니 / 고데날이 번쩍이도록 어디 한 번 / 올해도 내집처럼 남의 집들 / 튼튼히 잘 지어 보자 우리의 가슴마다 / 입춘대길 입춘대길 써붙이고 / 막걸리 한 대접 두부 한 쪽 / 육자배기 사발가에 신명이 났다.” 박정희 대통령이 작사했다는 ‘새마을 노래’로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자”는 노래가 라디오에서 동네 스피커에서 힘차게 울려 퍼지던 시절이었다. 이 땅의 노동자들은 일거리를 찾아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비록 가난을 면치 못했지만 ‘도둑질, 역적질만 빼놓고’ 열심히 일했다. ‘입춘날’이란 시도 있다. “까치들이 / 미루나무 꼭대기서 / 맑은 목소리로 / 인사하는 아침 // 일찍부터 대문 밖에서 떠들어 쌌는 / 쬐만한 아이들이 / 오늘은 왜 이리 귀여운가. // 식탁의 냉이국이 감미로운, / 가난해서 / 오히려 따사로운 / 인식의 내부. // 잔설 녹는 보리밭 / 건너편 / 과수원 둔덕에 햇살들이 모여 앉으면 / 아아 / 지천으로 피어날 복사꽃아 // 어머니가 꺼내 준 / 봄 잠바 입고 / 종달새 노래 찾아서 / 가랑비 내리는 / 들길을 종일 걸었다.” 입춘인 오늘, 이 땅의 노동자들이 희망을 이야기하고, 이 땅의 청소년들이 들길을 걸었으면 좋겠다. /임병호 논설위원

일화의 虛構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은 조선 선조·광해군 무렵의 명재상이다. 임진왜란 때는 다섯번이나 병조판서에 임명돼 난국을 해결한 공신으로 유명하지만 백사의 이름이 더욱 알려진 것은 그의 공적때문만이 아니다. 해학과 기지가 넘치는 어린 시절 일화 때문이다. 절친한 친구인 한음(漢陰)과 얽힌 이야기들은 잘 알려졌다. 백사는 문장을 잘해서 입신양명한 문인이었다. 시를 잘 지으면 벼슬길에 올랐던 시절이긴 하지만 백사는 허균(許筠)의 시집에 서문을 쓰고 수십 편의 묘지명과 시집을 남겼다. 백사가 쓴 시는 다른 시인과 달리 재치와 기지가 넘친다. 자신의 아들 생일에 이런 시를 쓰기도 했다. “부잣집은 딸을 낳아 온갖 시름 모여들지만 가난뱅이는 아들 낳아 만사가 넉넉하네 / 날마다 천 전(錢)을 들여 사위 대접 하기 고생이지만 책 한 권 아들에게 읽히면 그만이지 / 나는 지금 아들 뿐 딸이 없는데 큰애는 글을 알고 작은애는 인사할 줄을 아네 / 뉘 집에서 딸 길러 효부(孝婦)를 만들어 놓을는지? 내 아들 보내서 천 년 손님 만들어야지 / 집 지키고 취한 몸 부축할 일 걱정없으니 장가를 보내고 늘그막에 낙이나 누리련다” 장난 삼아 지은 희작이므로 그의 진심이 담긴 시로 읽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아들을 부잣집 딸에 장가보내 덕을 보겠다니 익살이 지나치다. 백사는 또 ‘무제(無題)’란 제목으로 남녀 간의 사랑을 읊은 시를 적잖이 썼다고 한다. 호방하고 익살스러운 성정대로 거침없이 쓴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백사의 문집에는 이런 작품이 많지 않다. 백사가 타계한 뒤 그의 문하생들과 자제들이 문집을 엮을 때 백사의 위엄을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시문은 모두 빼서 싣지 않았다는 야사가 있다. 백사가 지닌 인간미나 활달한 문인의 모습은 현재 전하는 문집에서 찾기가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 그렇다면 백사 이항복에 대한 일화들이 의심이 간다. 사실 백사는 한음과 23세 때 비로소 교제를 했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일화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화를 재미로 생각해야지 모두 사실(史實)로 여기는 것은 곤란하다. 역사의 허실(虛實)은 도처에 있다./ 임병호 논설위원

‘애국부부’

산모가 아기를 갓 낳으면 볏짚으로 왼새끼줄을 꼬는 게 남정네가 제일 먼저하는 일이다. 대개는 아이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맡는다. 이를 금줄 또는 인줄이라고 한다. 대문 양쪽 기둥에 매단다. 부정을 막기 위해서다. 예컨대 상 중이거나 탈상을 안한 외부인은 금줄이 걸린 집의 출입을 삼간다. 사내 아이를 낳으면 숯덩이와 빨간 고추를 새끼줄에 꽂고 계집아이를 낳으면 숯덩이와 생솔가지를 꽂는다. 금줄은 보통 갓난 아이가 삼칠을 넘길 때까지 치지만 일곱 이레를 치기도 한다. 아이를 많이 낳았던 시절에도 신생아는 이토록 정갈스럽게 여겨 잡귀를 경계하였던 전래 민속이 이젠 사라진 지 오래다. 가정 분만이 보편화했던 시대에서 병원 분만이 보편화한 시대적 변화에도 원인이 있지만 아파트 거주가 많은 데도 원인이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이를 미신으로 쳐 도외시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이를 많이 낳지 않는데 있다. ‘아들 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했던 때가 옛날이다. 인구 감소의 심각한 현상을 타개키 위해 셋째 자녀부터는 혜택을 주는 출산 장려의 유인책을 써도 좀처럼 아이를 더 낳으려고 하지 않는다. 둘도 많다하여 하나를 낳거나 아예 자녀를 갖지않는 부부들도 있다. 키우고 공부시키기가 어려워 그런다지만 따지고 보면 이기심이다. 부부가 자기네 편하려고 부모 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온당하다 할 수 없다. 충남 서천군의 어느 마을에 출산의 아기 울음 소리가 18년만에 울렸다며 전국지마다 대서특필했다. 농촌에 아기 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은 지가 오래된 탓이다. 도내에도 수년동안 출생 신고를 찾아볼 수 없는 농촌 마을이 적지않다. 산아제한 시대나 산아권장 시대나 아이를 많이 낳는 부부가 실은 ‘애국부부’다. 단 한가지 탁아시설의 사회적 확충은 아주 절실하다. 출산 장려는 이에 초점을 맞추어 적극 이행돼야 한다. 금줄은 이제 정녕 볼 수 없는 것일까./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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